광주 강의(2016. 1. 22) 1강
광주 강의(2016. 1. 22) 1강
이름 : 서경수(IP:220.84.152.182)
광주 강의(2016. 1. 22) 23-1
마가복음 7장 5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장로들의 유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대충 말해보면, 하나님의 계시는 아니지만 유사 계시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옆에 네 생물이 있고, 그 옆에 24장로들이 있지요. 장로는 유대 나라에서 대표자들입니다. 이 대표자들을 그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은 아니고, 출애굽 이후 나라가 만들어지면서 행정적 지도자 외에 정신적 지도자들이 필요했지요. 이들을 원로들이라 할 수 있는데, 신앙적 측면에서 깊이가 있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장로가 된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행정적 뼈대 보다 정신적 지도자를 각 지역 중심으로 세웠는데 이들이 장로입니다. ‘당신의 신앙을 본받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장로들이 교만을 뜬다든지 ‘내가 메시야다.’ 이런 뜻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알고 그 말씀에 대해 남보다 더 깊이 체험한 사람이 지역마다 생기기 마련입니다. 왜냐? 상대적이니까요.
하나님께서 “네가 최고다.”라고 지시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어떤 사람은 농사만 열심히 짓고, 또 어떤 사람은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면서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면 자연적으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존대를 하겠지요. 이런 사람이 지역의 유지가 되는데, 돈이 많아서가 아니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데, 이스라엘이 아무리 왕이 있고 군대장관이 있어도 이 사람들의 권위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겁니다.
당시 장로는 토착 유지, 정신적 지주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있다는 말은 전쟁이나 다른 재난으로 인해 행정적 외형이 와해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은 죽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쥐고 있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한 것이 계속 누적이 됩니다.
장로들의 해석이 누적되면서 그것이 ‘탈무드’가 되고, ‘미드라쉬’가 되고 다양한 책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 장로들이 어떤 생각으로 하나님을 봤는지 이 정도는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됩니다. 유대교의 정신적 체제는, 전 우주가 ‘하나님의 토라의 바다’라고 합니다. ‘토라’는 율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는 많이 미흡합니다. 토라를 구전 토라와 문서 토라로 나눕니다.
문서 토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사실 하나님의 계시가 성문화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는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토라’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토라’는 모르고 ‘토라’에 대해서 해석하고 이해한 것만 범람하고 있었어요. ‘토라’가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 ‘토라’의 권위는 그 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축소될 것은 축소되고, 유지될 것은 유지 되고 해서 이것이 전통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생각은 한 것 같아요. ‘이 우주는 토라로 되어 있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우주는 하나님 말씀의 바다다.’ 이런 정도가 되겠지요. 우주가 하나님 말씀으로 되어 있다면 그것이 그들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면,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이 땅에 유대인이 있고 그들에게 토라가 있습니다.
이 토라를 통해서 인간의 신성화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신성화를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가 일치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이 사고는 오늘날 한국 교회와 똑같아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는 땅에 있는 믿는 사람의 의지로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어요. 그들 입장에서 예수님 이야기는 대단히 억울합니다. 왜냐? 그들은 나쁜 짓을 할 경우에나 들을 소리를 나쁜 짓도 안 했는데 하시니 억울하지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토라에 위배되는 것. 모세가 토라를 받았지요. 토라는 율법이니까.
율법에 위배될 때 마귀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자신들보다 더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 없어요. 그런 자신들을 향해 ‘마귀’라고 하시니 대책이 없어요. ‘마귀’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마귀’라고 하시니 어찌합니까?
사람에게 욕을 해도 피할 길을 주고 욕을 해야 개선의 여지나 소통의 여지가 있는데, 죽도록 충성했는데 마귀라고 하면 충성하지 않아도 마귀, 충성해도 마귀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네가 마귀니까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고 회개해도 마귀라는 겁니다. 이러니 이들이 주님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의식이 중세 철학에도 나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통해서 반영된다.’고 했고, 둔스 스코투스는 ‘하나님은 숨어 있어서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와 하나님이 의지로 연결된다.’는 주장을 했어요. 이 뒤에 윌리암 오컴이 나옵니다. ‘우리가 의지가 된다면 결국 우리의 단독 주체를 인정해도 좋다.’ 그래서 나중에 데카르트에 가면 주체사상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주체성이 등장하면서 그노티우스 이후에 근대 사회론, ‘개인이 모여서 사회가 된다.’ 하나님이 만든 사회에 개인이 구성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들에 의해서 사회가 되기 때문에 개개인이 어떤 의견을 내놓는가에 따라서 그 사회는 새롭게 형성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회가 변화되는 것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면 변동되라고 사전에 하나님이 이미 승인한 것을 뒤늦게 우리는 각자의 의견을 제시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1688년에 명예혁명이 일어났지요. 그 전에 크롬웰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제 주체는 내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왜? 나와 하나님이 직접 의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체계화한 신학이 ‘칼빈주의’입니다. 1536년에 칼빈주의 신학이 주창되었는데, 그 전 1517년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지요. 이 때 루터가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그 믿음은 교회가 인정해주는 믿음이 아니고 사적 믿음이에요. 나 홀로 믿고, 나 홀로 구원 받는 것.
이처럼 나 홀로가 되면 교회가 안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나 홀로 하되 나 홀로 구원 얻은 사람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입니다. 지금은 ‘나 홀로’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데 그 때는 이게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신분사회였어요. 마치 조선시대 때 “너 양반이야?” “나는 쌍놈이다. 왜!” 이렇게 대들다가는 죽습니다.
오늘날 사회와는 다른 시절이었습니다. 신분이 나눠져 있었고, 신분이란 그 시대의 보편적 사상에 의해서 계급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여기에 복종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아요. 왜냐?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람을 억압해야 돼요. 이것이 바로 계급이론입니다.
계급이론은 본인의 계급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저쪽과 다른 계급이란 측면에서 계급이 거론되는 겁니다. 권력이란 남을 밀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이쪽이 권력을 갖는 겁니다. 요즘 갑질을 한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을이 없으면 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게 헤겔의 철학입니다. 주인은 노예가 없으면 자신이 주인인 것을 확인할 수 없어요. 그래서 타인이 없으면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손거울을 보면서 대화를 나눠요. 자기가 자기를 보고 이야기합니다. 그 손거울을 빼앗으면 우리는 십자가 지신 주님과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런데 주님이 보기 싫으니까 주님의 자리에 자신을 집어넣고 자신(손거울)을 보고 이야기를 해요. 이것은 환상 속에 빠져있는 거예요.
이러한 둔스 스코투스의 이론, 즉 ‘신의 의지는 나로 통해서 반영이 되고 드러난다. 그리고 서로 협조가 된다.’ 여기에서 더 나가면 ‘나는 귀한 존재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 말은 ‘나의 의지, 나의 행동, 나의 인식’이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근거해서 그런가? 그것이 바로 토라입니다.
정리해봅시다. 토라의 모든 해석은 현재 토라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자기 정당성을 위하여 해석이 나와야 하고, 자기 집단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힘으로 퇴출하는 권력을 유대민족은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왕이 누구였습니까? 헤롯이죠.
그런데 순진하기 짝이 없는 동방박사가 움직이던 별이 멈춘 후에 헤롯 왕에게 찾아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지요. 이 사람은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물음이 왜 나왔는가 하면, 역사 속에 묵시를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유다는 헤롯 왕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가 멀리서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했지요.
이 질문을 현재 왕으로 있는 헤롯에게 물었어요. 왕이 모르는 이야기를 동방박사가 했다는 것은 왕의 통치에 누수가 발생한 거예요. 왕이란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권력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을 때 왕이 되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 ‘죄가 왕노릇 한다.’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다 죽는다는 겁니다.
석가도 죽고 소크라테스도 죽고 공자도 죽었어요. 죽었다는 말은 평소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니까 세상 권력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살아났어요. 그러면 왕의 통치에 누수가 발생한 겁니다.
왕의 통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면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자신들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의지다. 그리고 토라를 연구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들은 길을 이야기했어요. 그 길이 뭔가? 인간에서 출발해서 신에게로 가는 길인데, 이 길 하나에 모든 사람들이 다 뭉쳤습니다. 심지어 12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어요. 길이 아닌데, 길이 없는데 오셔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요. 예수님이 평소에 자신을 길이라고 하셨어요. 사람들이 난처하게 되었어요. 내가 알고 있는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난데없이 침범한 길이 진짜 영생으로 통하는 길인가?
사실 이것이 ‘복음이냐, 교회냐?’의 싸움이에요. 교회 와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 길인가, 아니면 교회에 충성, 봉사하는 것이 아무짝도 쓸모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그것이 길인가? 주님은 치고 빠졌어요. ‘나는 길이요.’ 베드로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지요. “목숨 버리고 가겠습니다.”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올 수 없다.”
다시 정리하면, 주님이 가신 길은 인간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갈 수 없는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천국 가는 길이 있기는 한데 우리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갈 수 없는 자들, 이방인들만 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갈 수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천국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요. 죽은 자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이게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모호한 기운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은 주인공을 또렷하게 알려줍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나에게 연락을 취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마트 폰을 샀는데 메시지가 떠요. 보니까 “너는 이미 구원 받았다.”는 문자입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이 보내신 거예요. 십자가만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성령 세례도 역사적 사건이에요. 골고다 언덕이라는 한 장소에 국한된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온 천지로 퍼졌어요.
주님은 어디 계신가? 성령이 임하는 사건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죽는 곳이 애굽이라 하고, 십자가 못 박힌 곳이라 하고, 그곳이 소돔이라고 하고--, 그런 사건을 주므로 말미암아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행위는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유전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길이 뭔가? 이야기해도 소용없어요. 왜? 말해도 그 길은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메시지가 날아오기를 기다려야 돼요. 안 오면? 안 오면 어쩔 수 없어요. ‘안 오면?’이란 말 자체가 잘못 된 것입니다. “안 와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죄인도 의인도 아닌 중립적 입장에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여긴다면 큰 착각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죄가 왕노릇하는 가운데 죄의 종으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장로들의 유전을 소중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주님이 하시는 일에 꼭 필요한 환경이 되고, 배경이 되는 겁니다.
어느 이단도 불필요한 이단이 없이 다 필요합니다. 이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 사람들이 추구하는 길이 내가 옛날에 추구한 길이었지.’라고 하면서 혼자 미소를 띠게 만들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바로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라고 했지요.
여기 ‘외식하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외식’은 이사야가 한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구약 해석에 대해 제가 잠시 운을 뗀 겁니다. 구약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 구약 성경은 충분히 해석되어 왔고, 해석이 누적된 것이 ‘탈무드, 미드라쉬’ 등입니다. ‘미드라쉬’는 어떤 성경 구절이 있으면 그 구절을 다른 구절과 연계해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옛날 유대인 선배들이 대단한 사람들이죠. 현재 한국교회에서 하는 것을 그들은 이미 다 해보고 망했어요.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짓을 하면서 망하고 있고. ‘언어가 있다. 언어는 하나님 뜻이 담겨 있다. 풀자. 그러면 구원 받는다.’ 이 논리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다 가지고 있어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어요. ‘죄 아래 있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말문을 닫아야 해요. ‘미드라쉬가 되었건 탈무드가 되었건 인간이 끄집어내는 것은 전부 마귀가 시키는 죄다.’ 이렇게 되어야 될 텐데, 자신이 마치 중립 지역에 있어서 잘만 하면 구원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광야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의 말투를 보세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4:3)” 이렇게 나오지요. 이 말의 뉘앙스는 뻔한 거예요. 내부적으로 예수님 마음을 흔드는 거예요. 이런 말입니다. 마귀가 “예수야, 내가 너를 아는데 ‘내가 진짜 메시야일까, 아니면 스스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인가’ 갈등하는 것 잘 안다.”
그러니 마귀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치고, 예수님 스스로 기도하면서 두 가지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정말 메시야일까, 아니면 메시야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아버지여, 제가 정말 메시야라면 이 돌이 떡으로 바뀐다면 내가 메시야인 것을 확정하겠습니다.’라는 마음이 있겠지요. 그 마음이 바로 마귀의 마음과 같은 마음입니다.
마치 기드온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난 후에, 양털로 시험을 하잖아요. 인간들은 다 이런 마음이 있어요. 따라서 마귀의 기능은 뭔가 하면, 마귀를 존재라 여기는 것은 의미 없어요.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니기에 존재는 의미가 없고, 마귀의 기능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제가 하나님을 인정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적 발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은 마귀적 발상뿐입니다. 귤을 먹을 때 하나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두 개, 세 개 있으면 ‘어느 귤이 더 맛이 있을까?’ 갈등합니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고, 나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자율적 이성’인데, 이것이 유대인들의 ‘외식’을 낳은 겁니다.
6-7절을 계속 봅시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을 신약에 적용할 때, 구약 인용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배재하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끼어들면 안 돼요. “예수님, 그 해석 잘못된 것 아닙니까? 독단적 해석이고 알레고리 같은데요?” 이런 식으로 반발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님은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이 말은 ‘구약 성경을 네가 기록했나, 내가 기록했나?’ 질문하는 거예요. 주님이 성경을 기록했으면 주님이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왜 끼어듭니까? 기록은 주님이 하고 해석은 인간이 하고.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말씀 주신 분, 출제자가 해답을 알고 있지, 출제자도 아닌 인간이 해답을 이야기하면서 천국 넣어달라고 문을 두드리면 그 문이 열리겠어요?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는데 안 열립니다. 그럼 이 말씀은 뭔가?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어야 구원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나는 말로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존경해야지’ 이렇게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엉터리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아무리 입술로 존경한다고 해도 마음은 그것과 먼 것이 너의 현 주소고 그것이 진짜 너의 마음이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말씀이 말씀대로 이뤄집니다. 말씀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네가 말씀에 잠겨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말씀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것을 겨울수련회 식으로 표현하면 ‘동결’된 거예요. 냉동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동결하신 이 규정에서 출발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장로들의 유전 같은 것을 내가 만들어 내지요. 관습, 전통인데 전통도 자주 반복하면 진리가 됩니다.
진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버릇에서 왔어요. 버릇이 굳어지면 자기의 성격이 됩니다. ‘인간의 속성은 처음에는 버릇처럼 나오다가 나중에는 굳어진다.’ 이것이 정확합니다. 접혀있는 우리의 심성이 나올 때는 버릇처럼 나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웃으면서 태어납니까? 울면서 태어납니다. 악을 쓰면서 태어납니다.
태어나서 1개월이 지나면 악을 쓰는 것도 요령을 부려요. 가만히 누워 있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낮은 소리로 울음소리를 반복해요. 그래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으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러면 엄마가 앉아주지요. 인간이 악을 쓰면서 태어난다는 것은 혼돈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립할 수 없는 혼돈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정돈하는가? 악에서 나온 부모가 한 성격들 하는데, 마음에 들면 젖을 주고 마음에 안 들면 젖을 안 줍니다. 거기에 따라서 악이 정돈이 됩니다. 시간 맞춰 젖을 주면 이것이 습관이 되고 버릇이 되어 정돈이 되고 주체의 속성으로 정립이 됩니다. 나중에 커면, ‘엄마가 인상을 쓸 때는 젖을 달라고 하면 안 되는구나. 기분 좋을 때 젖을 달라고 해야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정돈이 돼요.
그럼 혼돈은 어디에 갔는가? 저 밑바닥에 혼돈이 있지요. 혼돈은 ‘무정형’인데, 형태가 만들이 지지 않은 상태지요.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혼돈상태에 있었지요. 아이가 왜 우는가? 이것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에서는 혼돈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럼 그 전에는 어떻게 봤는가? 인간에게는 선이 있어서 알아서 나쁜 짓을 안 한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요즘은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부정 속에서 선한 척을 한다고 합니다. 선한 척하는 것을 as if 라고 했지요? 그런데 선한 척이 발달되면 as if not 으로 바뀝니다. ~아닌 척하지요. 수준이 낮을 때는 ~인 척을 하는데, 그 다음에는 ~아닌 척을 하는데, 이 때 이 사람은 정신병자가 아니고 정상인이 되는 겁니다.
거짓말 할 수 있다는 것은 드디어 정상인 레벨에 들어온 거예요. 그러나 거짓말 할 줄 모르면 정신병자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생활이 안 됩니다. 혼돈이 혼돈 값을 해야지 점잖은 척해서는 사회생활 못합니다. 오 목사님과 구 사모님을 처음 봤을 때 ‘이분들은 산에 있어야 할 분이지 하산해서는 안 될 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하산을 했단 말이지요. 그것이 실수였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감사해요. 왜냐? 산 위에서 보는 것과 산 밑에서 보는 것은 계시가 달라요. 언젠가는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항상 혼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스스로 덮는다고 얘를 쓰고 있어요. 예전에는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먹고 산다’고 주장했어요.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잘 성장한다는 것이지요. 요즘은 이것이 잘못된 이론이라는 겁니다. 엄마의 ~하는 척을 잘 배우면 정상인이 되고, 엄마의 ~하는 척을 못 배우면 사회 적응을 못하고 이용만 당하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야무진 사기꾼이 되면 될수록 아이는 빨리 정상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엄마의 위선을 빨리 배워 엄마를 앞지르면 훌륭한 자식이 됩니다. 만약 앞지르지 못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를 의지하게 됩니다. 자립을 못하고.
이것이 주님이 주신 우리의 자리입니다. ‘너는 입술로 하나님을 부르지만 마음을 멀다.’ 이 말은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먼 것을 인정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의 혼돈스런 짓을 그냥 해. 그래야 내가 다가갈 때 그 다가감의 취지가 부각되는 거야.’ 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이런 식으로 하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나를 본받으라.’는 식으로 설교를 하면 이것은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신자인 것을 확인하겠다.’는 몸부림입니다. 이렇게 되면 점점 위선의 도가 심해지는 거예요.
사람은 쾌락으로 사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쾌락 이상이 있어요. 뭐냐? 향락, 극단적 쾌락이죠. 향락의 특징은 자기 학대, 자기 비움, 자기희생입니다. 주님 앞에 이런 짓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네가 그런 짓 할 입장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죄인은 욥처럼 말문을 닫아야 합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입을 닫아야지 ‘주여, 저의 신앙을 남에게 알리지 마소서.’ 이것 광고하는 겁니다.
주께서 이미 평정을 했습니다. ‘너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마음은 멀리 있다.’ 이렇게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 안에서 동결된 상태에서 성령께서 그 동결된 것을 풀 때 ‘저는 아무 한 것도 없이 구원 되었습니다.’ 고백하는 것, 이것이 죽음의 족쇄에서 풀려난 것인데, 이것은 주님이 스스로 말씀을 성취하시는 과정에서 발생된 은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능입니다. 도둑이 와서 주인을 묶어 놓고 그 집 세간을 가지고 갈 때, 세간이 그 집을 탈출하는데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저는 춘향전이 생각나는데, 이 도령이 춘향을 시험하지요? ‘지금까지는 네가 변 사또의 수청을 들었는데 이제는 나의 수청을 들겠느냐?’고 하니까, 춘향이 하는 말이 ‘저놈이나 네놈이나 다 같은 놈이구나.’ 이 말을 듣고 이 도령은 ‘춘향은 한결같은 여인이구나.’ 생각하면서 이 도령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요.
제가 수요일 설교에서 ‘아담은 여자가 되어간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못했어요. 모든 여자는 남자의 일부가 되어서 결국 남자가 됩니다. 그래서 여자는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대표인 아담을 예수님의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아담을 여자로 만듭니다. 남자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가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여자를 가졌다고 하는 순간 그 여자는 남자의 일부로 변해서 남자가 되어버립니다.
마치 어느 동화의 이야기처럼, 금이 갖고 싶었는데 빵을 먹으려고 잡았는데 그 빵마저 금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먹을 것을 보고도 못 먹어요. 이처럼 세상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으로 여기고 손을 댔는데 내 것이 되는 순간 내 것이 되었기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 것이 되면 ‘있음’이 됩니다. ‘있음’이 되면 ‘없음’이 있어야 ‘있음’이 정립되는데 전체를 가지면 전체를 가진 그것이 아무 운동이 일어나지 않아요.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 아무 희망도 없어요.
여자는 전부가 아닌 그 무엇입니다. 남자는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여자라고 하는 순간 뭔가 놓친 게 있어요. 제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남자는 전부이고 여자는 플러스 알파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남자가 전부를 가질 때만 느끼는 그 무엇, 그것이 여자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정복했다. 그러면 남자가 행복할까요?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겁탈하지요. 그리고는 그를 미워해서 쫓아내지요. 왜 그렇습니까? 성경의 이 말씀은 모든 남자가 다 이렇다는 겁니다. 여자도 그렇습니다. 왜? 이미 남자를 사모한 이상은 여자가 남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암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호 침투하는 거예요. 네 성격, 내 성격 따로 없어요. 서로 교류가 되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돼요. 갑질하는 남자도 있고 씩씩한 여자도 있고, 당신 없으면 못산다고 하는 여자 같은 남자도 있고.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정해졌지요. 그러면 성도는 이것을 지킬 생각하지 말고, 지켜서 구원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미 구원을 받고 난 뒤에 우리가 어떤 상태이기에 주님이 구태여 죽으셨는가를 십자가 중심으로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목으로 해석하는 것이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6. 2. 18. 02:3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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