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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9 - 내 뜻대로강의잠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9 - 내 뜻대로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9 - 내 뜻대로

16,02,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이제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150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이 성전세를 안 내었다" 라고 다그쳤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바다에 가서 낚시를 해서, 먼저 잡히는 고기의 입을 열면 한 세겔이 있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라고 하십니다.

(마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마 17:25)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마 17:26)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마 17: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 물고기 아가리를 벌려라 !!

우리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보면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미리 성전세를 준비해서 내면 되는데 굳이 왜 이렇게 하시느냐는 것이다. 구태여 물고기 입 속에 있는 돈까지 끄집어낼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인간 현실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규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는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를 부여하게 되는데, 즉 이성적인 질서와 법칙을 만들어서 세상에 심어놓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인간들은 이 세상을 나름대로 활용을 한다는 것이다.

◈ 주체가 있는 곳까지 !!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라고 할 때, 그것이 자연세계에 오신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어디까지 침투하시는고 하니, 인간들이 살기 위해서 이 세상 전체에 나름대로 질서와 형태를 부여한 그 체계망, 혹은 그물망, 그 속까지 예수님께서 파고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주체가 기다리고 있는데, 즉 "나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각오와 다짐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체를 건드리지 않고 그냥 자연세계에만 오시게 되면, 사람들은 주님에게 좋은 관계로 다가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메시야입니까? 그러면 당신을 믿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관계를 맺게 되면, 그런 관계가 예수님께서 생각한 자연세계의 질서와 인간들이 생각한 자연세계의 질서가 과연 정상적으로 매치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매치가 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 예수님과 인간은 대결상태 !!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이 세상을 보는 눈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보면 안 다는 말이다. 그냥 엉망진창이 아니라 대결상태인데, 즉 출동상태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대치상태로서 예수님과 인간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성전세를 내는 문제를, 이렇게 전혀 엉뚱하게도 물고기 입을 벌려서 거기에서 돈을 끄집어내어서 성전세를 내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기존의 질서와 예수님의 질서가 곱게 만나서 서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이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자연세계에 형태를 준다고 했는데, 그렇게 주는 주인공이 주체가 되고, 그 주체 속에 주님이 파고 들어옴으로서, 인간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에 무엇을 느끼게 되는고 하니까, 자기들이 생각하는 그 중요한 돈이라는 것이, 그것이 자기 노동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물고기의 아가미에서 그러한 돈이 나온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고발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기 때문에, 그 돈에 대한 정당성은 확보가 된다" 라고 하는, 그런 우리 인간의 고집과 주장을 깡그리 박살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 법치국가(法治國家) !!

방금 제가 "자연세계에 형태를 부여한다" 라고 말을 했는데, 그게 인간에게는 진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 진리가 구체화되는 것이 '법(法)' 인데, 거기에 '치(治)' 라는 것이 더해지면, 그게 바로 '법치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중세 때까지만 해도 국가라는 것이 없었는데, 그냥 끼리끼리 모여서 사는 빌리지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국가라는 것은 법이 등장해야 비로소 등장하는데, 즉 법이 없으면 국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법으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27년에 만든 '로마법 대전'이 있고, 그리고 그 뒤에 교황 그레고리 7세가 만든 '교회법령'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죄를 지으면 성만찬에 참여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들이 왜 이렇게 법을 만드는가? 이렇게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게 되니,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도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가지고, 물론 그것을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지킬 수 있는 '법 체제'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그 법 체제가 바로 법치, 즉 법질서인데, 그런 법질서 안에서 하나님과 교류가 된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 토라 - '신앙을 법으로' !!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세상 전체에 형태를 주는 것이고 질서를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리고 이런 교회법이 확장되면 그로티우스에 나오는 국가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이것을 교회의 세속화라고 했는데, 교회에서의 효율적인 법치가 그게 국가의 법으로서 전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국가에서 무엇을 할 때는 법으로 하는, 즉 법치국가가 성립된다는 말이다. 법 아래 누구도 없고, 법 위에 누구도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친목회를 하나 만들어도 다 법이 있는데, 거기에 맞는 회칙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회장이나 총무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숨을 좀 쉬자"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즉 "이것은 법치국가에 관한 것인데, 이것을 신앙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앙을 법으로 만든 자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토라' 라는 것인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 왜 교회법이 세속법이 되었는가?

어렵지만 중요한 것이기에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의 국가가 된다는 것은, 서로의 약속과 규약에 의해서 사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약속과 규약이라고 해버리면, 어떤 독재자가 등장하게 되면 틀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교회법이 세속법인 국가법이 될 수밖에 없었는고 하니까, 그 당시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었는데, 교황은 독재자가 아닌 성경 해석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멋진 아이디어를 낸 것인데,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평등하다" 라는 것도 보장하면서도 법적인 질서도 같이 보장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해석자를 하나 등장시켜서, 그 해석자를 쳐다보면서 거기에 소속된 자들이 법 안에서 효율적으로 움직이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국가에서는 왕을 인정하지 않는데, 비록 왕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니가 뭔데?" 라고 해버리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상 8장의 경우처럼 왕에 있게 되어버리면, 더 이상은 자기 것이 아닌데, 즉 자기 아내라고 해도 결코 자기 아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연산군이나 로마황제인 칼리귤라를 다룬 영화를 보게 되면, 그들은 아무리 신하의 아내라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논다는 것이다. 희롱과 잠자리도 같이 해버리고 말이다. 그러니 땅도 아무리 자기가 열심히 가꾸어도, 왕이 달라고 하면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합 왕의 경우에도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었는데, 그래서 가지고 싶었는데 그 당시의 토라, 즉 율법으로 인해서 그것이 안 되니까, 마누라인 이세벨이 뭐라고 하는가? "당신은 왕이잖아. 왕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왕다운 것이야" 라고 하는데, 그게 맞다는 것이다. 왕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면 왕의 통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왕은 왕이기에 초법적인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만약에 땅을 내놓지 않으면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는 것이다. "저 사람이 왕에게 반역을 했다" 라고 해서 누명을 씌어서 죽여버리고, 그만 땅을 빼앗아 오면 된다는 것이다. 아합 왕이 그런 식으로 해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다는 말이다.

◈ '억울함'과 관련된 왕이 진짜 왕 !!

그러면 거기서 무엇이 생기는가? '억울함' 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강의는 다음과 같이 진행이 되는데, 즉 세상 전체의 형태를 부여했는데, 거기서 무엇이 발생되는고 하니까, 억울함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짜로 숨겨져 있는 하나님이 보내신 왕인데, 이 왕은 이런 억울함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게 교재에 나오는데, 151페이지를 보자.

** 그러니 왕의 자리란, 가난한 자의 입장을 성실히 들어주는 위치에 있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에만 왕이라는 겁니다.

(잠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왕의 자리가 힘으로 유지되는 자리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마음놓고 자기의 억울함을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유지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왕의 자리도 같이 보장해주겠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이 왕을 어떻게 보겠는가? 억울한 자의 한을 풀어주는 왕, 그게 바로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말이다. 그게 율법 안에서 메시야다운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원하는 자가 왕에게 복종을 하겠는가? 아니면 왕을 그 자리에 앉혀놓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겠는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알게 되는데, 그래서 왕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을 보고 "당신, 똑바로 해!" 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전담반이 바로 당신이잖아. 그것을 풀어주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이 무슨 왕인가? 만약에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는다고 하면, 당신은 하나님이 앉을 자리를 도둑질한 것이다" 라고, 그런 반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구약에서 가장 억울한 자의 모델이 누구이겠는가?" 라는 것이다. "1번) 토지를 빼앗긴 사람, 2번) 아내를 빼앗긴 사람, 3번) 권리금을 날린 사람, 4번) 선지자" 라는 것인데, 이중에서 몇 번인가? 말을 안 해도 알지 싶은데, 선지자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자고 하는 것은 성경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세월호 사건이 제 아무리 납득이 되지 않고 억울하더라도, 위안부 문제가 아무리 기가 막혀도, 그런 것을 해결해주는 게 성경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구제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가 구제의 대상인데 누구를 구제하느냐는 것이다.

◈ 하지만, 가난한 자를 도와준다고 해서 !!

그런 구제는 그냥 돈을 주는 것인데, 물론 그게 경제정의실현은 되겠지만, 소득의 균등화이니 말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이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데,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인 아프리카 사람들을 도와줄 수는 있는데,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버리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오히려 이 세상 전체에 인간들이 형태를 부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황의 교령집에 보면, 그게 교황의 명령을 담은 것인데, 거기에 그런 내용들이 없는 것이 아닌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는 내용들이 무지무지하게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도대체 선지자가 무엇이기에 그를 괴롭히면 하늘에서 징벌이 오고 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열왕기하 1장 10절을 보자.

(왕하 1:10)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 인을 살랐더라

여기에 보면, 선지자 엘리야가 뭐라고 하는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지로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실제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이 다 태워서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50명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징집이 되어서 온 용병들이고, 자기 고향이 가면 다들 성실하고 착한 청년들인데 말이다. 그들을 지휘자의 명령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여버리는데, 그러니 이게 사회정의나 경제정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 다시, 물고기와 세금에 관해서 !!

처음에 시작하면서 잠깐 했는데 다시 하면, 예수님께서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돈을 가지고 세금을 낸 것에 대해서, 사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돈을 가지고도 세금을 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물고기를 잡게 해서, 그 아가리에서 나온 돈을 가지고 세금을 내었느냐는 말이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을 때, 그 물고기 입에서 돈이 나온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물론 물고기를 잡아서 팔면 돈이 되는데, 그 돈을 가지고 세금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은 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게 또한 우리의 생각이기도 한데, 그런데 주님은 그런 생각자체를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부여한 이 세상의 형태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이, 그렇게 일을 해서 그 돈으로 세금을 내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렇게 하면 종교적인 형태가 되고 그러면 질서가 유지되니 그렇게 하려는 것이 인간의 아이디어인데, 그런 아이디어를 주님은 사용을 하면서 전혀 뜻밖의 사태를 그 속에 후벼파듯이 집어넣어 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그렇게 낯선 사태를 만드시는가? 그것은 인간의 '주체' 라는 것을 건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데, 즉 "니가 보고 있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라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즉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라고 할 때의, 바로 그 '이 세대'의 행태라는 것이다. 이 세대에서 반복적인 교육을 통해서 훈육과 양육을 받은 것인데, 그러니 이 세대에게 세뇌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숨을 좀 쉬어보자고 하는, 즉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 덕분이 잘 먹고 잘 삽니다" 라고, 그렇게 여유 만만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법을 우리가 잘 지키고 있으니까, 지금은 부르지 말아주세요" 라고 하는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아직 때가 아니라고 가서 전해라" 라는 것인데(ㅋㅋ), 그러니 지금 잘하고 있다는 말인데, 아무리 주님이라도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건드려야만 하겠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주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기에 말이다.

◈ 대치관계가 전환이 되어야 !!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나타나는가? 서로 대치관계인데, 즉 인간이 부여한 세상의 질서와 주님이 새롭게 투입하는 질서가 대치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치관계가 자기 안의 대치관계로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하는 일이 주님의 마음과 관계없이, 그게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인 동시에 주님이 하는 일을 훼방하고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음을, 그것을 스스럼없이 수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히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법으로 자기 울타리를 만든다는 말이다. "성전세를 내라" 라는 것이 법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래, 법을 지켜줄게. 베드로야, 물고기를 잡아서 아가리를 벌려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벌리니 딱 성전세만큼 있는데, 그 다음부터 베드로는 물고기만 보면 입을 벌리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렇게 기존의 질서를 파괴시킴으로서 숨겨져 있는 질서를 나타나게 하시는데, 즉 '파괴' 라는 방식을 사용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오늘 강의제목을 '내 뜻대로' 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 내 뜻대로 !!

여기서 '내 뜻대로' 라는 것에서, '뜻대로' 라는 것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나' 라는 것이 다른 '나'로 교체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내 뜻대로' 라는 것에서 그 '내 뜻' 이라는 것을 '없음'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나' 라는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가서, 그래서 더 이상 '나' 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우리'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 라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붙일 수가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좀 어려운 내용인데, 예수님이 주체가 되려고 하면 온 우주가 주체를 위해서 움직여줄 때, 그래야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방을 청소하는 것은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브라질을 그 전염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주체로서 값어치가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의 주체는 우리보다 양은 많은데, 자기가 명령을 내리면 미국이 움직이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오바마가 아무리 해도 북한은 움직이지를 않는데, 물론 오바마가 북한에 관심을 주지 않아서 북한이 저렇게 나온다는 말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오바마는 여전히 전체 주체의 합당한 자격에서 모자람이 된다는 것이다.

◈ 법을 제정한 주체로서의 아버지 !!

그것은 가족도 마찬가지인데, 조금 전에 장로님께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 사람은 딸이 11명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 집은 귀신을 11명 낳았다는 것이다. 괴물을 말이다. 그것이 각자 주체로서 활동을 하게 되면, 각자의 욕망으로 인해서 충돌을 일으키는데, 그러면 아버지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여기에 법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법을 제정한 아버지만 주체가 되고, 자식들은 그 아버지를 왕으로 섬겨야만 하는 종속관계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체장이고 조직장인데,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렇게 갑질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갑질이 있고 난 다음에 계약이 성립되는데, "당신이 우리 회사에서 일하면 한 달에 얼마를 주겠다" 라고 말이다.

그게 바로 법인데, 이게 상법이고 고용법이 그렇게 해서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월급을 받아서 한 평생을 살면, 그게 과연 주체냐는 말이다. 자기가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도무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밥 먹고 살았다는 것,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 법을 깨는 법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

"성전세를 내라" 라고 하는 것이 법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물고기를 잡아서 아가리를 벌려서 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전세를 내면서도 어떻게 되는가? 이 세대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인간이 부여한 이 세상 형태인 인간 세계에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가 미리 앞당겨서 온 것인데, 그것이 물고기 아가리 속에 법을 깨는 법으로 던져 넣어졌다는 것이다. 법을 깨는 법으로 말이다.

그래서 '성도'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도에게는 성령이 임했는데,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뻔히 기대하고 바라는 희망이 있지만, 그것을 강제로 묵살시키고 자기가 예상치도 못한 전혀 다른 징후를 자기 속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 위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역사' 라는 합집합 위에, 이 역사에 포함이 되는 않는 여집합으로서의 환상이, 역사의 목을 치고 여기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즉 전체라는 현실 속에, 현실이 다룰 수 없는 색다른 현실이 하나의 트라우마처럼 박혀있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6장의 말씀처럼, 사도바울이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하는데, 즉 그것이 일종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신 자에게 주어진 흔적이 성도에게는 주체의 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이다.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사태 !!

그렇다면 열왕기하 1장에서 병사가 무려 50명이나 죽었는데,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구약은 일종의 연극무대로서, 그것을 '미장센' 이라고 했는데, 그 무대 위에서 짧은 각자의 역할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50명이 죽는 병사의 역할을 니가 한 번 해볼래?" 라는 것인데, 졸지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다 죽이고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이스라엘을 뺀 다른 민족들이 다 쳐다보라고 그렇게 하는데, 즉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너희들이 만든 조잡하고 조작된 하나님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허락되었는데, 그래서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사태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이렇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인데, 근거가 없다는 것을 달리 말하자면 "의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가 없다는 것이 흔적이 되면, 그만 "내 인생에 의가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의가 없으면 어떻게 사는가?

◈ 너는 억울하지 않아 !!

그래서 교재 151페이지에서 뭐라고 했는가? 왕에게 호소하라는 것이다. 왕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나가는데, "내가 억울한 당해서 호소하면, 주님은 내가 기대한 것을 도와주는가? 아니면 전혀 기대하지 않는 방향으로 도와주는가?" 라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는 쪽으로 도와주시는데, 이것을 빠트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주여, 도와주옵소서" 라고 하면 도와주시는데, 그런데 전혀 원하지 않는 것으로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를 원치 않는 길로 데리고 가시듯이 말이다. 자기가 원하는 길은 뻔히 보이는데, 그런데 그 길로는 가지 않고 그만 다른 길로 빠지게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한 것이 바로 지금의 요 모양 요 꼴인데, 우리는 매일같이 원치 않는 길로 간다는 것이다. 예뻐지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여전히 예쁘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려고 했는데도 매일 밥은 먹는다는 말이다.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이다.

억울한 자가 호소할 때, 그게 어디서 잘못되었는고 하니, 자기가 억울하다고 보았다는 말이다. 바로 그게 착각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억울하기 때문에 자비로운 왕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 왕은 자기 욕망에서 투영된 왕이기 때문에, 왕도 역시 그 왕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짜들이 연극을 하면 진짜는 그 뒤에 숨어있는데, 우리가 연기자로서 이 세상에서 연극을 하게 되면, 진짜 숨어있는 하나님의 질서는 어떻게 되는가? 진짜 자기의 모습은 "깍꿍, 바로 이게 니 모습이다" 라고 하면서 튀어나오는데, 물론 이것은 성도에게만 해당이 되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생각했던 것은 그동안 니가 훈련을 받고 양육을 받아서 그만 세뇌를 당했다. 세상 자체의 형태를 부여하는 기존의 이 세상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즉 하나님 따로 놀고 나도 따로 노는, 그런 우리 인간들이 부여한 가상의 질서 속에서 우리의 주체가 형성이 되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이렇게 억울합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는가? "오냐, 알았다. 내가 처리해줄게" 라고 하시겠는가? 오히려 "너 자꾸만 징징거릴래?"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억울하냐는 말이다.

◈ 해결책이 없는 도스토예프스키 !!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등으로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 라는 러시아 작가가 있었는데, 그가 러시아정교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했는데, 교회를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반대를 하면서도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게 글을 쓰는 작가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문제를 끄집어내기는 하지만 해결책이 없다는 말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않다" 라고 문제를 제시하는데, 그래서 "무슨 해결책은 있는가?" 라고 하면, "그런 것은 없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죄와 벌' 이라는 책에 보면, 자칭 똑똑한 놈이 사회정의를 펼치겠다고 하면서 돈만 챙기는 수전노 할머니를 때려죽였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할머니에게 이용만 당한 여동생을 구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자 정작 그 여동생까지 그만 곤란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한 행동이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흐르는데, 자기가 터트린 것에 대한 파편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 그러니 도대체 사회정의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신랑은 정의를 부르짖지만 정작 마누라는 먹고 살기 위해서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니 아내나 구해라 !!

제가 주례사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었는지, 아니면 하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ㅋㅋ), 아무튼 "세상을 구할 생각을 하지 말고 니 아내나 구해라" 라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것이 영웅이 아니라, 자기 아내를 웃게 해주는 것이 영웅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주체라는 것이 자꾸만 헛된 망상을 만드는데, 그렇게 되면 민족을 구하고 이또히로부미를 처단하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누가 억울하게 된다는 것인가? 집에서 자기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하는 여자가 그만 억울하고 가난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정의를 실현하고 진리를 구현하겠다고 나대는 것 때문에, 그런 망상으로 인해서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는 쪽이 바로 하나님 편이라는 말이다.

'수상한 그녀' 라는 영화를 보면, 아주 젊은 신랑이 독일에 광부로 가는데, 그런데 가자말자 그만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여자가 어린아이 하나를 혼자서 키우는데, 시장에서 아주 힘들게 말이죠.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할머니가 되었는데, 그런데 어떤 일이 있어서 20대로 다시 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부르는 노래가 김정호 '하얀나비' 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 여인은 무슨 죄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하느냐는 말이다.

◈ 솔로몬의 지혜의 경우에 !!

지난 시간에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했는데, 그 재판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함에 있어서, 그 자기, 즉 '나' 라는 것을 '무(無)'로 바꾸지 않으면 지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니 아이가 죽었어? 억울하지?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라고 하는, 그런 왕은 인간들이 부여한 질서 속에서의 왕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짜 왕이라는 말이다.

그런 억울함을 풀어주는 왕이 진짜 왕이 아니고, 진짜 왕은 무엇인고 하니, "그 아이는 너의 아이가 아니다. 너의 아이가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해줄 때, 그러면 그 아이의 엄마가 "아하, 그렇군요. 나는 나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세요" 라고 하게 될 때, 그래서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 쏟아짐으로서 !!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소연을 하게 만든 한 나쁜 놈들을 어떻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작 억울하다고 온 그 당사자를 작살내는데, 그게 살아계신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은 어떤 기능으로 우리에게 쏟아집니까?" 라고 물으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으로 쏟아집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 되려고 하면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우리가 억울하다고 하면서 하소연을 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십자가로 가야하는데, 왜냐하면 십자가로 가면 누구든지 죄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억울하든지 억울하지 않든지, 아이를 빼앗기든지 말든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죽던지 간에 말이다.

◈ '나'가 아닌, '우리' !!

그런데도 자기가 억울하고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온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기존의 이 세대에서 형성된 주체에서 만들어진 주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주체를 어떻게 하시는가? 아예 없애버리는데, 왜냐하면 그런 주체 자체가 너무나도 수상하다는 말이다.

그런 '나'를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거기에 메시야, 혹은 하나님의 언약의 선지자가 들어가게 되면, 그 선지자로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남은 자는 선지자 하나로 시작된 '우리'가 된다는 말이다.

◈ 갈 수 없는 곳으로 가자 !!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가 나오는데,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가려고 하니까, 엘리야가 어디로 가는가?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땅을 건너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는데, 물론 그것을 하늘로 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요즘은 과학적 인식이 있어서 그런 표현이 의미가 없는데 말이다. 대기권 바깥으로 갔다는 것이 아니라, 가고자 해도 갈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왕하 2: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 가려고 해도 갈 수 없는 곳, 바로 그 하늘이라는 것이다. 그곳이 주님이 계신 곳이고 말이다. 지구가 멸망을 해서 화성으로 가도, 두 곳이 다 땅이라는 것이다. 옆 동네라는 말이다. 외계인이 있다고 해도, 그곳이 새로운 곳이 아니라 옆 동네인데, 그러니 외계인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 동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열왕기하 2장은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인간이 하늘로 갈 수 있는가?" 라는 것인데, 사실은 이 말이 어폐가 있는데,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에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라는 것과 같은 질문이니 말이다. 문장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 수 없는 곳이면 가지 않으면 되는데 말이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누가 너희들보고 갈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 라고 하는, 그게 시작점이 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이 엉터리가 되고 마는데, 진짜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먼저 "갈 수 없다" 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가서는 안 되는 곳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질질 끌려간다는 말이다. 물론 남들은 부러워할지 몰라도, 정작 자기 자신은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서는 안 되는 곳에 가고 있으니 말이다.

◈ 애굽으로 돌아가자 !!

여기에는 쉬운 예를 들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왔는데,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온 몸에 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만 있으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계속해서 지금 자기들이 있는 곳과 애굽을 비교했다는 말이다. "애굽에서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민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민 14: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계속해서 그렇게 비교할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 그런 상처의 흔적, 즉 상흔이 새로운 주체의 핵으로서, 그런 수상한 것이 삽입되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겁을 내고 있는데, 왜냐하면 애굽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으니 말이다.

왜 부부싸움을 하던지 하면 "더 이상은 못살겠다" 라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도 그런 소리를 하고 말이다. 저도 그런 것을 많이 보면서 자랐는데, 시골에서 살던 친척들이 우리 집에 오면, 우리가 그때 대구시내에 살고 있었는데, 올라오면 하소연하는 것이 그런 소리라는 것이다. "형수요, 더 이상은 못살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기 마누라를 패는지 모르겠는데, 술이 문제인데 말이다. 일단 막걸리만 들어가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마다 !!

애굽에서 나왔던 그들이 늘 하나님에게 하소연한 것이 그런 것인데, 하지만 주님은 무엇인가? "그렇게 해야만, 너희들이 갈 수 없는 나라에서 내가 왔다는 것을 안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대충 이야기만 하고 끝내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갈 수 없는 곳에서 오신 분이기에, 그런 주님과 동행하는 발걸음 하나 하나에는, 자기 힘으로는 갈 수 없음을 날마다 고백해야만 하고, 또한 실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동행이 없다고 하면, 즉 안내자가 없다고 하면 전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하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갈 수 있는 세상에 가는 것은, 그것은 인간들이 부여한 세상 형태에 불과한데, 그렇게 자기가 익히 알고 있고 자기 주체에 부합이 되는 세계는, 아무리 멀리 간다고 해도 여전히 땅이라는 것이다. 그 세상은 물고기 아가리에서 한 세겔이 나오지 않는데, 물론 썩은 동전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의미가 있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이미 예상하고 익히 알고 있는 세상, 노력만 하면 파악이 되는 사태들만 기다리고 있는 세상, 그것은 어디를 가도 갇혀있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전혀 빠져 나올 수가 없는 세상인데, 그렇게 빠져 나오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주체가 바뀔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 엘리사의 시체가 눈 앞에 보이거늘 !!

다시 열왕기하 2장으로 가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따라가겠다고 하니, 엘리야는 따라오지 못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엘리사의 경우에 얼마나 아쉽겠느냐는 말이다. "자기만 가고 나는 왜 남겨두는가?" 라는 것인데, 마차가 두 대 오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2인용이 오던지 말이다.

(왕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그런데 엘리사는 중요한 일이 남아있는데, 엘리야의 경우에는 자기만 달랑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런데 엘리사의 경우에는 죽고 난 다음에 자기 죽음 몸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이다. 엘리사의 시체가 다른 시체에 접촉을 하니, 그 시체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엘리사는 살아나지 않았다는데, 그야말로 남 좋은 일만 다 했다는 것이다(ㅋㅋ).

왜 그런고 하니까, 엘리사의 경우에 "너 주체의 존재는, 니가 아는 땅의 세계가 아니다" 라는 말이다. 즉 숨어있는 세계인데, 그런 갈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딛고, 이쪽에는 그냥 시체만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체만 있지만, 그렇게 엘리사가 자리를 잡고 있는 터의 효과가, 엘리사의 시체를 통해서 이쪽세계로 전달되고 전이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왕하 13:20)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왕하 13:21)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보고는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거늘" 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구약으로 바꾸어 말하면 "엘리사의 시체가 눈 앞에 보이거늘"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힘으로,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가? 그 시체를 믿어라. 너희들 눈에는 시체로 보이는가? 그것은 그냥 시체가 아니라 반드시 시체가 되어야 하는 시체이다" 라는 것이다.

◈ '죽은 몸'과 '죽음을 유발하는 몸'의 차이점 !!

그것이 바로 죽은 몸과 죽음을 유발하는 몸의 차이점인데, 즉 새로운 죽음을 유발하는 말이다. 그것을 요한계시록 둘째 사망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죽음이 아닌 다른 죽음을 우리에게 집어넣는데, 그게 게시라는 말이다. 즉 "늙어서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라는 것인데, 그 심판을 예수님의 몸에 각인을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죽음인데, 즉 율법의 저주로 인한 죽음이라는 말이다. 아주 특이한 죽음인데, 부처나 공자나 맹자에게 아무리 빌고 어떻게 해도 안 된다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에게 받는 심판이 복음이 될 줄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는 말이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거룩한 죽음에게 당해야 !!

그러니까 영생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거룩한 죽음 앞에서 그 죽에게 당해야 하는데, 당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제가 죄인이 맞기 때문에 죽어도 당연합니다. 저는 망해야 합니다" 다는 것인데, 그러한 고백이 되어질 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흔히들 십자가를 지고 아골 골짜기를 간다고 하는데, 하지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간다고 하면서 창녀촌에 전도를 한다고 해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곳에 가서 선교를 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간단한 레시피를 가지고 집밥을 만들 듯이 말이다.

◈ 구원의 레시피 !!

그것이 바로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라는 것인데, 그것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굳이 복잡하게 하지 않아도, 간단한 레시피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다. 설탕이 어떻고 후추가 어떻게 천연 조미료가 어떻고,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사실 모든 음식은 미원 한 숟가락이면 끝나는데, 몸에 별로 해롭지도 않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유별나게 선교를 한다고 설치면서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원주민들과 사진을 찍어서 교회에 와서는 돈을 내라고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말이다. 여기에 레시피가 이렇게 엄연히 있는데, 영생을 주기로 특허가 난 레시피가 말이다.

"주여, 저는 죄인이기에 주님의 피와 살을 마실 수 없습니다" 라고, 그것만하면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니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피를 흘리고 살을 찢겨야 한다" 라는 의미인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피를 구한다고 하면서 다빈치 코드가 어떻고 하면서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의는 어디에 있고 또한 성배를 어디에 있는지, 그런 것은 레이더스에게 물어보라는 말이다(ㅋㅋ).

◈ 깜박깜박 희미한 기억 속에 !!

엘리사에게 있어서 엘리야의 가버림은, 자기가 속한 세계는 없는 세계이고, 엘리야가 간 그 세계만이 오직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땅은 왜 있는가? 진짜로 있는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실은 없어질 세계이고 없는 세계인데, 마치 있는 것처럼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안개와 같이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무대를 만들어놓았는데, 인간들은 거기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남자와 여자로서 이렇게 각각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김수희의 '남행열차'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깜박깜박 희미한 기억 속에 ♬" 라고 말이다. 가사를 모르면 할 수 없고 말이다(ㅋㅋ).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151페이지를 보자.

**다시 솔로몬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남들 보기에는 제3자가 관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보지만, 이 불가능성 속에서도 지혜는 동전처럼 들어있습니다. 그 동전을 찾아내는 일을 해야하는 것이 지혜자의 역할입니다. 왕이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이때의 왕의 심정은 죄로 말미암아 억울함에 참여하는 실존적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 무(無)가 우리를 살려냄을 보여주는 것이 곧 지혜 !!

그러니 솔로몬이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데, 지혜가 왕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왕이든 백성들이든 간에 지혜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경험을, 즉 어떤 아기가 죽는 사건을 통해서, 그렇게 무(無)가 우리를 살려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혜의 사태가 곧 솔로몬의 재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는, 그런 없는 분께서, 있다고 우기는 우리를 매일같이 계속해서 살려내는 것이 곧 지혜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물고기를 잡아서 아가리를 벌려서 성전세를 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은 인간들이 피신을 와서 만든 세계지만, 하지만 그렇게 피신한 깊숙한 곳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관여하시는데, 그들이 아는 법칙을 위반해가면서까지 주님은 신호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그렇게 신호를 보내면, 그 신호를 어떻게 포착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는 말이다.

◈ 하나님이여, 우리나라를 보호해주소서 !!

조금 전에 오늘 강의제목으로 뭐라고 한다고 했는가? '내 뜻대로' 라고 한다고 했는데, 요즘은 자꾸만 잊어버려서 말이다. 아무튼 주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우리 인간이 있고 신이 있다고 한다면, 신이 인간에 율법을 주셨다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은 그 율법을 법으로 만들어서 어떻게 하는가?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지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즉 자기만의 고유세계에서 그렇게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자기는 유가 유로 되는데, 즉 정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법칙이 되고 또 법치국가가 되는데, 즉 "하나님이여, 우리나라를 보호해주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뚫고 들어가는데, 그러면 그동안 율법에 갇혀있어서 몰랐던 실질적인 저주가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저주가 자기 택한 백성에게 도달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곧 법이 된다는 말이다. 신약으로 보면 우리가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 완벽한 법이 주어졌다. 마음대로 해봐 !!

어제 낮 시간에 이것과 연관된 이야기를 했는데,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이다. "법을 지키지도 못하고 내 마음대로 했으니 나는 이제 죽었다" 라고 하면서 벌벌 떠는데, 그것도 역시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라고 하는 것은, 완벽한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반면에, 다른 한 편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기에 그 법에서 해방을 시키는 주님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라도 간음을 했다고 해서 돌로 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요한복음 8장에서 보여주는데, 현장에서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인을 그 누구도 돌로 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돌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돌을 놔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누구야? 누가 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전부가 다 가짜 주체라는 것이다. 자기 잘남을, 즉 자기 정당화를 상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왔다는 말이다.

(요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추억은 아름답다 !!

그것을 제가 "추억은 아름답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있을 때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무슨 말인지 모르지 싶은데, '무정 부르스' 라는 노래에 보면 그런 가사가 나오는데, 1절도 아닌 2절 가사에 말이다(ㅋㅋ). 그렇게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있을 때 미련 없이 떠난다고 하는 것은, 건질 것은 건지겠다는 것인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모든 결정과 행동은 앗싸 했는데, 즉 헤어진 여인에 대해서 미련 없이 깨끗하게 보내주었다. 그러니 그 정도로 나는 대견하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주체인데,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엉터리 주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한 평생을 살아가 봐도 결국은 안개처럼 사라질 인생이라는 것이다.

진짜 주체는 주님이 그렇게 그 여자와 헤어지도록 하셨는데, 하지만 주님의 주체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훼방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의 존재의식이 너무나도 강렬하다는 것이다. 자기만 행복하면 되고, 자기만 성공하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주체가 감기에 걸려서 빌빌거리고 있는데 말이다(ㅋㅋ).

주님께서는 제2, 제3의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를 새롭게 제조하시는데, 즉 "이런 죄인도 살았다" 라는 것을 지금 우리를 통해서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봐라, 이렇게 현장에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인도 내가 용서해주지 살았잖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간음을 한 것도 복음이다 !!

그러니 법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는 법에 저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이끌려서 살아가는데, 그래서 무엇을 해도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중간 설명을 모두 떼어내면 "간음을 한 것도 복음이다" 라고 되는데, 그렇지 않은가? "내가 도적질한 것도 복음이다" 라고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소리를 듣고 마귀의 자식들이 얼마나 발작을 하겠는가? "무슨 저런 것이 다 있노?"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전위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그런 전위적인 복음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만큼 복음을 도발적으로 전하신 분이 없는데, 도저히 납득이 되지를 않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전 우주의 주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법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법이 찾아오게 되면, 그게 사랑의 법인데 말이다. 기존의 법이 아닌 사랑의 법이 찾아오게 되면, 그 사랑의 법에 의해서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 하나 하나가 성도라는 열매라는 것이다.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고 말이다.

◈ 성령의 열매와 주체 !!

그러면 이러한 주님의 열매는 어떤 주체인고 하니, 지금부터 그것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말이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자꾸 잊어버려서 말이다. 예수님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다고 했는가? 과정에 들어있는데, 십자가에서 부활로 가는 과정이 말이다. 부활은 묵시세계이고 영적인 세계인데, 그것이 이 땅에서는 십자가의 길로 그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런 요소를 그대로 성도에게 집어넣는데, 그러면 성도는 이 땅에서 누가 봐도 전혀 대단한 존재가 아닌데, 너무나 평범하다는 것이다. 유명인사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그 안에 부활의 영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초라해 보이지만, 사실은 초라한 것이 아니라 천사도 흠모하는 신분이 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증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누구인가? 근처의 빈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조명발이 비치면서 그들이 천군 천사를 보았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눅 2: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
(눅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 일 없시요 !!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 그 목자들의 수입이 늘어났는가? 갑자기 차를 바꾸었는가? 양이 늘어났는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북한말로 "일 없시요" 라고 하는데, 오히려 마누라에게 잔소리를 들었지 싶은데, "여보, 양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정신을 좀 차리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그러면 아마 속으로 "당신은 몰라. 내가 무엇을 보고 왔는지 몰라" 하고 하지 싶은데, 그러면 마누라는 "저 양반이 왜 저래? 어디 외계인을 만났나?"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면 "당신은 몰라. 내가 얼마나 기쁜지, 정말 몰라" 라고 하면, 마누라는 다시 "그렇게 기뻐서 돈이 생겼나? 뭐가 생겼노?" 라고 하면서 구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바로 선지자이고 오늘날 성도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염색도 하지 않고 보톡스를 맞지 않아도 보기 좋았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전혀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머리카락은 빠지고 주름은 늘어만 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가 하는 일마다 꼬인다는 것이다. 사는 것이 아슬아슬하고 애를 쓰지 않으면 돈도 생기지 않고 말이다.

◈ 우리는 엘리사 시체와 같은 존재 !!

그게 어디까지인가? 그것이 엘리사의 무덤까지인데, 엘리사가 죽을 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옆 사람이 좋아지는데, 엘리사의 시체가 닿으니 그 시체가 살아났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사의 시체가 "야, 그냥 가면 안 되지. 돈을 주고 가야지" 라고 했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시체와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인데, 즉 시체는 가만히 있는데 전도가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시체와 같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알아서 붙여주시는데, 그래서 자기들이 알아서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사자인 우리는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자기가 전혀 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나오니 말이다.

요즘 저에게 전화를 자주 하시는 분이 있는데, "목사님, 시원합니다. 제가 이런 병 저런 병이 참 많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시원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그분에게 시원하라고 박카스 한 병이라도 사준 적이 없는데, 물론 속으로는 "그것이 오래갔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ㅋㅋ). 왜냐하면, 그러다가 떠난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니 말이다.

◈ '예수 안'에서의 '우리' !!

그러면 계속해서 주체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는데, 왕은 원 모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주체는 없고 '우리' 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말이다. 오직 그분만이 '나' 라는 것이 되고, 우리는 그분에게 속한 '우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 안에서 우리가 된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흔적을 가진 자들이 바로 성도라는 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초라하고 평범한데, 하지만 성도가 가는 길은 십자가로 해서 부활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게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러면 십자가의 길은 무엇인가? 재산을 다 바치고 구제를 하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삶이 무엇인고 하니, 오늘 이것을 분명히 정리하고 넘어가자는 말이다. 그게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나' 라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이 어려우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서,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것이 없어서 "내 것이 없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뭐가 어려우냐는 말이다. 모든 것을 다 주님이 주신 것인데, 그래서 자기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수상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자식도 주님이 주신 것이고, 자기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래서 주님이 부르시면 "그동안 고맙게 잘 사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나면 되는데, 그러니 얼마나 수월하냐는 말이다. 그런데 왜 어려운고 하니, "어디까지 드릴까요?" 라고 나오니 힘이 든다는 것이다. "내 마음은 못 줍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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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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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