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아벨의 제사 160217
가인과 아벨의 제사 16021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세기 4:2-4)
이근호
16-02-17 21:16
가인과 아벨의 제사
2016년 2월 17일 본문 말씀: 창세기 4:2-4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면서, 사람이 스스로 “나는 사람이다. 나는 인간이다”고 주장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는 식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단독적으로 사람도 아니요 인간도 아닙니다. 필히 하나님의 약속과의 관련성 속에서 인간의 의미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언약적 위치’와 관련있는 식으로 나타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요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남자부터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드신 것은 남자는 남자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해야 될 역할이 따로 있고, 여자는 여자로서 약속을 나타내야 될 역할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가 약속의 무대에 등장하고 난 뒤에는, 다른 역할을 해야될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바로 가인과 아벨입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가인과 아벨을 아버지와 어머니인 하와와 연결시켜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는 평소에 인간들이 가족관계 속에서 자아의 주체성을 확립하던 그 관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 없이 어머니 없이 내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의 위치는 훼방받고 무시당하고 무관심하게 되어 버립니다. “나는 누구네 집 자식이다”가 자연스럽게 되어 버리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일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묻혀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가문과 가족 안에서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은 인류사 내내 무시당하고 핍박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역할이 있습니다. 비록 본인들이 이 사실을 알던 모르던 관계없이 하나님의 작업은 방해받지 않고 진척됩니다. 형제 사이에 상반되는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두 종류로 분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한쪽은 가해자가 되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가 됩니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류는 인간들이 사전을 알아차린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관여하고 개입한 그 결과로 분류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은 본인의 결심이나 선택이나 행함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단독적인 가치나 의미가 없이 언약적 역할을 부여받는 것처럼, 그 언약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성질로 관여하느냐 따라 어느 한쪽은 가해자가 되고 어느 한쪽은 피해자가 됩니다. 이는 본인들이 자신의 육신의 부모로부터 물러받은 성질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라는 자연스럽게 땅의 소산물을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목축하는 자라서 자연스럽게 양과 그 첫새끼를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느 제사를 더 낫느냐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 보면 무의미합니다.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드리는 제사를 받아야 될 책임이 있다고 인간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드린 제사 중에서 골라서 받으시는 분이라면 사전에 제사의 매뉼(표본적 방식)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 있어 공정한 관계라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옳은 제사 방식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그것을 거부한다면 이는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도 마땅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전에 인간에게 “제사는 이렇게 드릴 경우에만 받겠다”는 표준 규약 같은 것을 제공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인과 아벨 중, 어느 제사가 옳은 제사인지는 인간들이 구태여 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인간이 드린 제사는 신이라면 마땅히 받아서 복을 내리시는 것이 신의 할 도리라고 인간들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사와 제사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은 곧 ‘불공평한 신’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신이 스스로 떠맡는 것밖에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실 것이다”고 여기는 바로 그런 인식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도 모르는 저주받을 안목입니다. 가인은 옳지 않는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안 받고, 아벨은 옳은 제사를 드렸기에 받았다는 해석이 곧 악마의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인간의 행함을 받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바른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바로 그 제사가 바른 제사일 뿐이며, 제사를 받고 아니받고 여부는 제사를 드린 인간이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의 원형이신 중보자와 하나님과의 밀약입니다.
히브리서 12:22-24에 보면,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천국에 모여든 숱한 구원받은 자들은 몽땅 다 중보자아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흘려진 언약의 피로 인하여 모집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훨등하다는 겁니다. 이는 곧 아벨이 피 흘렸다고 해서 그 공로로 아벨이 구원되는 게 아니라 아벨마저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1:4에 나오는 말씀은 이렇게 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즉 과연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이 더 낫다는 평가는 아벨과 가인의 행위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실체이신 예수님의 피와의 관련성으로 판정되는 겁니다.
이는 인간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 속은 예수님께서 채우십니다. 아벨이 제사한 번 드린 것으로 아벨의 역할이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의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바른 제사, 바른 예배 드려서 구원받자’라는 의식은 복음을 훼방하는 악마적 해석이 됩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바른 제사드려서 그 공로로 구원되는 자는 없습니다. 아벨마저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믿음이란 히브리서 11:1의 말씀과 같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곧 믿음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믿음이 아벨에게 그런 제물을 통해서 제사를 드려라 고 조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아벨의 목축 제물과 자신의 구원사역을 긍정적으로 연결시키신 겁니다. 아벨은 이처럼 오는 구원자를 증거하기 위해 죽어야 하는 피해자 반열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가인은 반대로 가해자 반열, 곧 악마의 계열에 속해야 될 인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실은 껍데기 뿐임을 알고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게 하옵시고 날마다 예수님의 복음만 튀어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2-18 15:56
26강-창 4장 2-4절(가인과 아벨의 제사)1620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장 2-4절입니다. 구약성경 5페이지입니다.
창 4:2-4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오늘 본문을 보면 아담이 가인 이후에 아벨을 낳은 게 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아담이 아버지가 되고 아벨은 아들이 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아들이 있고,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가족중심으로 살다보니 그런 겁니다.
아버지가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고, 그래서 우리 가정이 형성되었다, 그걸 자연스럽고 옳은 세상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의 뜻과는 위배돼요. 아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아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담이 설쳤던 무대는 끝났고 이제는 아벨과 가인이 설치는 무대만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가인과 아벨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가 없는 관계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에게 인간은 어찌할 수 없는 관계로 인간은 태어난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관계할 수 없다면 누가 관계하는가?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관리하십니다.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가족단위로 살다보니 ‘아버지가 안도와주면 못산다. 엄마가 안도와주면 못산다. 엄마가 애 안 키워주면 못 키운다.’ 라는 식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버릇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혀 고백되지 않고 그것이 전혀 비현실적인 것처럼 되는 겁니다.
‘어떤 교회에 부교역자가 있는데 당회장 목사가 그 부교역자 보고 나가라고 했다. 당회장 목사가 나보고 그 교회에서 나가라고 했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가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관여하는 세상이 창세기 3장, 4장, 5장, 죽 나오는데 우리가 성경을 덮어버리고 실생활에 가게 되면 ‘네가 나한테 그렇게 했잖아.’라는 식으로 하나님관계를 차단시키는 그것이 버릇처럼, 그것이 생활의 전부라는 식의 발언들을 흔하게 하고 있어요.
창세기 4장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됩니다. 대체 인간이 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떤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내가 나를 여기 있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내 뜻대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기대와 상관없이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따라서 태어나고 난 뒤에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우기면 안돼요. 그것은 반칙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원천의 취지와 위배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 인간이 있다, 사람이 있다.’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어떤 역할을 가진 존재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남자와 여자라는 역할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든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든 이유는, 아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남자는 남자 역할, 여자는 여자 역할이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하기 때문에 남자로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난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남성성, 여성성이 중요한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있고 동생 아벨이 태어난 것은 그들의 역할이 한쪽은 가해자가 되고 한쪽은 피해자 역할을 하기 위해서 형제로 태어난 겁니다. 이것을 체계 있게 이야기한다면, 모든 인간은 본인이 여기 있다는 것은 전혀 하나님에게 중요하지 않고 어떤 포지션, 언약적인 관계, 위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언약적인 위치를 너는 어떤 식으로 품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네가 남자야, 그러면 남자를 만드신 그 포지션대로 갈 것이고 네가 여자로 태어났어, 그러면 하와와 같은 길을 가야 돼요. 그 다음에 네가 가해자야, 그러면 가인의 길을 가야 되고 네가 피해자야, 그러면 아벨의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저 아벨입니다. 어떻게 살까요?”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저 아담인데 어떻게 살까요?” 그것은 이미 이 몸이 내 몸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있고 자기가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부러워하는 그 사람이 소중한 것이 아니고 본인이 본인에게 제일 중요해요.
이게 잘못된 건데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한 겁니다. 모든 질문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던지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의 모델에서 본인을 뺄 생각을 안 해요. 자기가 최적의 모델인 것처럼 그렇게 행세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에 하나님에 합당한 사람들이 나와요.
하나님에 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가 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기분 나쁘게 여기는 경향들이 교회에서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누구인데요?” “스데반집사입니다.” “에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한국대통령보다 인기가 없어요. 스데반집사가 재벌보다 인기가 없어요. 스데반집사가 미국대통령보다 인기가 없어요. 2015년을 빛낸 인물들, 뉴욕 타임스에 나오는 그 인물 중에 스데반집사가 없습니다. 우리 동네 이장 뽑고 국회의원 뽑는데 스데반집사 나오면 떨어집니다.
대구 동구 을 국회의원후보하고 스데반집사하고 붙으면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있어요. 제가 그쪽 선거운동원은 아닙니다. 스데반집사가 성령 충만한 것은 맞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맞고, 주님께서 반기는 사람은 맞는데 인간이 원하고 싶은 요소는 없어요. 돌에 맞아 죽었으니까.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이 저에게 묻기를 “목사님,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돌에 맞아 죽으세요.”
이것은 안중에 없었을 거예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그걸 알려주세요.” 이것은 되는데 “당신은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니까 소리 소문도 없이 돌에 맞아 객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합당한 조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 적 조치입니다.” 하면 그런 자기 인생에 대해서,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내가 기뻐하는 경지까지, 그 차원까지 저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옵소서.”라고 인간은 요구하기 마련이에요. “성령 받았습니까?” “받았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집사처럼 돌에 맞아 죽으면 되겠네요.”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스데반집사는 핍박을 받았어요. 당신도 교회에서 핍박을 받으세요.” 이런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를 않아요. “오늘도 핍박받는구나. 교회 나와야지.” 이런 게 없어요.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대단한 신앙인지 대우받고자 합니다.
은근히 안에 그런 욕망과 욕심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포지션, 위치,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자기의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모델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인간은 없습니다. 사람도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 적 역할이 있을 뿐입니다.
네가 이 땅에서 가해자로 살았는지, 이것은 가인쪽이지요. 아니면 네가 피해자로 살았는가? 그건 아벨쪽이지요. 여자의 후손되시는 예수님은 이 땅에 피해자로 왔습니다. 그러면 줄을 세운다면, 그리스도와 관련된다면 그리스도와 같은 역할을 그 일부라도, 퍼즐의 조그마한 조각이라도 우리 내부에, 예수님이 당했던 그 고난과 가신 길이 그 일부라도 우리 내부에 들어 있어야 됩니다.
그 신호판을 바깥으로 보일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신자라는 신호판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모델인 것이 쓰레기 같은 우리를 통해서 보여야 돼요. 나는 이렇게 잘났다, 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쓰레기라는 그것,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신호지 내가 잘났다는 신호를 보여주면 안 됩니다.
나 건드리지 마라, 나 무시하지 마라, 그런 신호가 나오면 안돼요. 네가 뭔데 나를 개 무시하느냐, 이런 신호가 나오면 안돼요. “주님을 위해서 이보다 더 천박한 취급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포지션이, 내가 맡은 역할이 그거라면 기꺼이 당하겠습니다.”라는 그런 신호가 나와야지요.
그래서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제일 나쁘고, 비 복음적이고, 사탄 적이고, 악마적인 해석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악마적인 해석이 뭐냐? 가인은 악마적인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바른 제사를 드려서 구원받았다. 이것이 가장 악마적인 해석입니다. 사탄적인 해석이라고 보면 돼요. 아벨이 훌륭했다고 하는 겁니다.
가인은 그것보다 더 못했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더 훌륭하다든지 더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역할이 다를 뿐이지요. 역할이 다를 뿐인데 우리는 평소에 세상 살아가는 것이 ‘나는 너보다 낫다.’는 그것을 자신의 삶의 동력으로, 삶의 희망으로 삼아서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교회에서 한번 붙어봐? 세상에 나가서 한 번 붙어봐?’ 이게 살아가는 동력 같아요.
누가누가 잘났나? 금요일에 KBS에서 <누가누가 잘하나>하는 애들 동요대회 하는 게 있어요. 그게 ‘누가누가 잘났나?’로 바뀌었지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 오니까 ‘아벨처럼 누가 믿음이 더 좋은가?’ 이렇게 돼버려요.
너는 나보다 못난 가인 같고 나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아벨 같다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누가 잘나고 누가 못나고 하는 것과 관계없습니다. 스데반집사가 누구보다 훌륭한 게 아니에요.
스데반집사는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은 스데반집사의 본래의 자기의 죄의 속성은 성령 앞에 기도 못 폈다는 겁니다. 성령이 충만하니까, 덮쳐버리니까. 스데반 집사가 죄가 없을 리가 없고 죄의 본성이 항상 있지요.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감추어지고 주님의 뜻만 스데반 집사에게 나타난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용서한 것은 사실은 스데반 집사가 용서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니까 그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주님의 속성과 주님의 마음, 주님의 뜻이 껍데기인 스데반집사를 사용해서 그냥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바다가재 먹는 것이 TV에 나옵니다만 껍데기를 먹는 사람은 없어요. 전부 다 알맹이 먹지요. 랍스타라는 그것, 알맹이를 먹잖아요. 성령께서는 우리 보고 “너 조용해. 너 잔잔해. 세상에서 네가 어떤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 내가 뻔히 다 아는데 너는 일단 조용히 해. 나는 너를 껍데기로 사용해서 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너를 통해서 끄집어 낼 거야. 그 과정에서 너는 돌에 맞아 죽든지 형에게 맞아 죽든지 하더라도 할 수 없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공생애 때 나타난 그 성질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작용할 때 본인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특성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본인이 죽지 않고 나타나는 주의 일은 없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은사가 있고 병 고치는 은사가 있어서 내가 안수하고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 이런 것은 사탄의 은사고요, 사탄의 능력입니다. 반드시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만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결과는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결과를 홀로 아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일체 결과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고 그냥 나를 사용하시는 것뿐이에요.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내일 일은 우리가 몰라요. 내일 죽을지 더 살지 어떻게 될지를 몰라요. 하지만 성도는 어떻게 되든 주께서 일하신다는 점은 미리 알아요. 그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가인과 아벨을 비교하는 대목으로 활용되는 것이 히브리서 11장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이 대목에서 아벨은 가인보다 더 착해서 더 훌륭한 사람이라서 형보다 더 좋은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한 해석이 되려면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지금 있는 것들은 실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있는 것들은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라는 겁니다. 뭐가 허상인가? 아벨은 착해서, 제사 잘 드려서 구원받았고 가인은 안착해서, 아벨보다 못해서 지옥 갔다, 라는 식이 잘못된 해석이고 그것이 허상이라는 겁니다. 아벨이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은 아벨과 가인 둘을 비교해서는 모르고 장차 나타날 것, 실상,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그분과 연계시킬 때, 그것을 제가 언약의 흔적이라고 했지요,
언약의 포지션이라고도 했지요, 장차 새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해서 볼 때 ‘아하, 아벨은 가인보다 그리스도의 더 나은 속성을 드러냈다.’ 하는 거예요. 아벨은 그리스도의 속성을 드러냈고 가인은 악마의 속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판정날 것을 구약 창세기 4장에서는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시는지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걸 모르는 거예요.
가인은 그냥 농사짓는 사람이라서 그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을 뿐이고 아벨은 양 치는 사람이라서 양과 그 새끼를 드렸을 뿐이에요. 한 번 바꿔봅시다. 아벨이 농사짓는 사람이고 가인이 양치는 사람이었다면 가인의 제사는 받고 아벨의 제사는 안 받았을 겁니다. 왜냐? 주님께서 그 붕어빵의 앙꼬, 어떤 속을 넣느냐 하는 것은 아벨이나 가인이 본인의 속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은 언약 적 포지션을 받았을 뿐이에요.
붕어빵 하니 생각나는데 초등학교 때 방학 중에 외가 집에 가서 아르바이트 아닌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국화빵을 팔던 사촌형님이 나에게 잠시 그 국화빵틀을 맡긴 적이 있어요. 쉬워요. 밀가루 한 번 붓고 한 바퀴 돌리고 그 다음에 단팥 앙꼬 넣어서 한 바퀴 돌리고 뒤집으면 되는 겁니다.
그처럼 인간이라 하는 것은 없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허우대, 껍데기만으로 인간이 아니에요. 속, 알맹이가 언약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그 역할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그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 관계인가, 아니면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을 관계인가? 그걸 보여주는 것이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앙꼬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남자와 여자라는 역할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생겼고 가인과 아벨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 때문에 생긴 겁니다. 평소에 가인이 동생 때려죽이고 싶었던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 형이 동생을 죽이게 된 그 원인제공자는 가인도 아니고 아벨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개입해서 그래서 형이 동생을 죽인 겁니다. 때려죽였는지 돌려 쳐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죽였습니다. 피가 나왔다고 하니 다 가능성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도 받으시고 아벨의 제사도 받으셨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하나님은 아벨과 가인을 불공평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 불공평해야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게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환영받으면 예수님이 안 죽어요. 예수님은 핍박을 받아야 될 분이기에, 그것이 믿음의 내용이기 때문에 그걸 앞당겨서 가인에게 앙꼬를, 아벨에게도 앙꼬를 국화빵의 속 넣듯이 집어넣은 겁니다.
지금 여러분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은 한 달 전에 뭘 받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매일같이 그 속성이 나와요. “나 성령 받았으니까 건드리지 마라.” 이러면 안돼요.
“한 달 전에 당신이 성령 받았으면 오늘은 뭘 내놓습니까?” 뭘 내놓아야 돼요. 나는 성령 받았다는 그것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거예요. 그리스도가 나오면서 “나는 쪼다고 쓰레기입니다.” 이게 나와야지요. 모든 성도는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속에 있는 악령이 기어나갑니다.
그런데 그 때 뿐입니까? 그걸로 끝납니까? 그 다음날도 악령이 기어 나와야 돼요. 왜? 성령이 늘 오시니까. “내가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주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를 보여줘야지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아요.
“목사님, 저는 어떻습니까? 저는 아벨입니까, 가인입니까?” 그러니까 목사들이 뭐라고 하느냐? “여러분이 아벨의 믿음의 반열에 들어서 천당 가려면 여러분은 옳은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그러면 또 궁금하지요.
“그러면 옳은 제사를 드리면 그 때부터 신자 맞습니까?” “신자 맞습니다.” “어떻게 하면 옳은 제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까?” “예배를 드려야죠.” “어떤 예배입니까?” “돈 내세요.” 결국 돈 이야기, 돈 내고 시간 바치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 외에는 할 것이 없어요.
“합당한 십일조를 해야 참된 예배의 완성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배를 회복하라? 주님은 예배를 부숴버렸어요. 예배를 부숴버렸는데 무슨 예배를 회복해요? 살아가는 것이 예배인데, 성령과 진리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영적인 예배인데 무슨 예배를 회복해요?
계절마다 커튼 색깔 바꾸면 그게 예배를 회복하는 거예요? 목사가 특별한 날에 가운 색을 바꾸면 그게 예배 회복하는 겁니까? 그게 아벨의 제사입니까? 나중에 천국 가시거든 아벨에게 물어보세요. “아벨 당신은 훌륭합니까?” 아벨이 뭐라고 하겠어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장차 오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하는 일에 개입하니까 나는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형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으로 주님 쪽에서 그렇게 사용한 겁니다.”
언약적 포지션이 그래요. 내가 하는 직업의 그 가치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성령을 주신 사람은 내가 하는 가치에 대해서 판정은 주님이 내리는 겁니다. 강도가 낙원에 갔어요. 그러면 우리도 강도질을 할까요? 안 해도 이미 강도지만. 칼을 안 들었다 뿐이지 강도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강도가 천국을 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도할까요?
기생 라합은 천국 갔어요. 우리도 기생 질 할까요? 창녀 할까요? 아니에요. 간음한 자가 주께 용서받았어요. 우리도 간음할까요? 그게 아니지요. 그게 아니지요. 삭개오가 돈만 밝히다가 천국 갔습니다. 우리도 돈만 밝히기 위해서 세무서에 취직할까요? 키도 작아야 되겠네요. 이렇게 다니면 구원받습니까? 키 작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예배당 커튼 색깔 바꾼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예배시간에 파이프 오르간 동원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도 구원 못 받아요. 그걸 고백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입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뭐, 부자가 천국가기 힘들고 가난한 자가 쉽다고요? 가난한 자 되어서 천국 가 보세요. 못가지. 부자만 못가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도 못가요.
그 말은 인간이 어떤 노력과 수단을 다 동원해도, 어떤 말씀을 지키고 어떤 바른 예배와 제사를 드려도, 아무리 양을 잡고 소를 잡고, 새끼를 분리해서 잡고, 어떻게 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아벨은 자기가 드린 제사에 외부적인 의미가 덮쳐버린 겁니다.
본인이 의미를 가미한 것이 아니에요. 신라의 삼국유사인가 삼국사기인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데 저는 역사를 구라로 보기 때문에 안 믿습니다만. 김유신 장군에 목이 말라서 물을 대접 받는데 그 물을 주는 사람이 그냥 물을 떠서 주면 되는데 버들 입새를 바가지에 띄워서 줬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게 진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치고,
자 개가 물이 먹고 싶어 짖어댄다 칩시다. 그러면 개한테 물을 줄 때 버들잎사귀를 띄워서 주게 되면 개가 그 의미를 압니까? 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아이에게 젖을 주면서 버들 잎사귀를 붙여주면 뭐 압니까? 주께서 뭘 집어넣어도 인간은 개만도 못하고, 오랜만에 욕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인간은 개만도 못하고 말만도 못해서 주께서 왜 나에게 이런 인생을 살게 하는지를 몰라요. 마치 장군이 타던 그 말이 우물가의 여인네가 물을 줄 때 물을 그냥 주지 않고 물에 버들 잎사귀를 띄워서 주는 그 의미를 모르듯이. 물론 장군은 알지요.
급하게 마시면 체하니까 걷어내는 사이에 숨을 고르고 마시라는 뜻이구나, 하고 의미를 알아채는데 장군이 타는 그 말은, 그 짐승은 의미를 모르지요. 우리는 성경을 펼쳐도, 1장, 2장, 3장, 백날을 봐도 짐승과 같아요. 그 뜻을 몰라요. 왜 모르는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목사님, 제가 구원받겠습니까?” 자기밖에 몰라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우기는 인간입니다. 말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하면 말이 화를 냅니다. 인간은 말보다 못하고 개가 화를 낼 정도입니다.
“어떻게 그런 인간과 나를 비교합니까?” 이렇게 나와요. 인간은 개보다 못합니다. 성경 시편에 보면 인간은 짐승만도 못하다(시 49:20)고 했어요. 깨닫지 못하니 짐승만도 못하다고. 깨닫지 못하니 짐승만도 못하다. 어느 누가 깨닫겠습니까? 깨닫지를 못해요. 그렇게 교회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돌아서면 자기 잘났다고 우기고 또 원망하고 그래요. ‘난 아벨처럼 되어야지.’ 아벨의 진가는 히브리서 12장 24절에 나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지금 히브리서 12장 24절을 읽었는데 이걸 이해하려면 히브리서 12장 22절에서 23절을 같이 읽어줘야 돼요.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하나님이 긍정적으로 그 속성을 집어넣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속성을 집어넣은 많은 숫자의 구원받은 자들이 하늘나라의 총회에 선배로 와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누가 있는가? 24절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거기 가 계시다는 거예요.
그들은 자기가 알아서 천국 간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자기편으로 끌어 모은 자들이 천국에 모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인 것의 공통점이 뭐냐? 중보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모였는데 24절에 보니까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중보자의 기능을 하는 피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아벨이 죽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아벨이 제사 드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제가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아벨이 더 나은 제사 드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떤 제사를 드려도 구원 못 받아요. 아벨을 자신의 피로 불러 모은 분은 예수님이지 아벨이 아니에요.
아벨이 바른 제사를 드려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벨이 드린 양과 염소새끼를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 피와 연계시킨 예수님의 공로로 아벨은 구원받은 거예요. 그걸 가지고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이지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아벨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바른 제사를 드립니다.” 이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아벨은 그냥 평소처럼 자기 제사를 드렸는데 그걸 그리스도와 연계시킨, 언약 적으로 예수님과 관련된, 십자가와 관련된 것이라고, 질적으로 주님과 같은 속성이라고 일방적으로 평가하신 예수님 덕분에 아벨은 졸지에 형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려서 구원받아 놓고, 본인이 구원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구원했다는 것을, 예수님의 구원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미리 이 땅을 살아온 겁니다.
별로 어려운 이야기 아니에요. 지금 이게 어렵게 들리는 이유는 뭐냐? “목사님, 저는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시작하면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진짜 마귀보고 좋은 소리 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이렇게 아벨은 제사 한 번 드리고 그 다음에 형에게 맞아 죽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벨이 제사 드리고 난 뒤에 ‘그래 이제 제사 드렸으니 내일은 끝났다.’
아니에요. 평생에 걸쳐서 아벨은 주님에게 쓰이고 또 쓰이는 겁니다. 두 달전에 은혜 받았습니다. 끝 아니에요. 한 달 전에 은혜 받았습니다. 끝 아닙니다. 15일 전에 은혜 받았습니다. 끝 아닙니다. 3년 뒤에 은혜 받았습니다. 끝 아니에요. 주께서는 랍스타처럼 우리 속을 빼내실 거예요. 파먹을 거예요.
왜? 주님 자신의 것이니까. 이제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신앙인의 모델을 어디서 찾습니까? 기도 많이 해서 부자 된 장로한테서 찾습니까? 설교 잘해서 큰 예배당 짓고 있는 당회장 목사에게서 찾습니까? 스데반 집사에요.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했으니까 멋있어 보이지요. 그러면 바꾸겠습니다. 기생 라합. 또 바꾸겠습니다. 강도. 신앙의 모델이에요. 돈만 밝힌 삭개오, 삭개오가 얼마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까?
‘아, 돈 밝혀도 구원 받는구나.’ 돈 밝혀도 구원받잖아요. 집에 불의한 돈을 쟁여놓고도 구원 받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불의한 재물을 쌓자는 이야기에요? 아니에요. 그 이야기가 아니고 구원은 인간의 자기 행함과 상관없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아벨은 죽으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벨의 피보다 예수님의 피는 그 전에 이미 너희에게 알려준바 되었다. 창세기 4장을 봐라. 아벨이 피해자잖아요. 피해자라는 말은 피해를 받아서 구원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벨 속에 그리스도의영이 들어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아벨은 예언자가 되는 거예요. 아벨과 사가랴의 피까지.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나오지요. 아벨과 사가랴의 피까지 이 세대가 담당해야 된다.
주께서는 언약적 포지션 가지고 세상을 둘로 쪼갭니다. 껍데기 자랑하지 말고 네 속에 주님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잘났다, 그게 아니라 “주여, 못났으니까 주께서 어떻게 작용하더라도 뭐든지 합당한 조치임을 제가 흔쾌히 수용하겠습니다. 주께서 나의인생을 어떻게 조지든지, 스데반처럼 돌로 쳐 죽이고 정말 나를 강도로 만든다 할지라도 그것조차 합당한 조치이오니 주께만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그것이 매일같이 우리 속에서 나올 때 그게 믿음의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껍데기 남 껍데기 가지고 얼마나 껍데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까? 세상에서 평가받는 것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그게 사탄의 술책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습관이 되어서 우리는 남의 시선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주여, 죽여서라도 내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살아 있음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