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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인의 출생 162010우리교회미가

가인의 출생 162010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가인의 출생(창세기 4:1)

이근호

16-02-10 21:23

가인의 출생

2016년 2월 10일 본문 말씀; 창세기 4:1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부부가 동침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라는 사실도 우리 가정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복주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 감사하는 차원에서 그런 고백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 가정에 가인이라는 자식이 생긴 것은 이런 보편적 상황이 아닙니다.

즉 ‘자식 생김’의 차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지상 개입’의 차원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가정을 유지하는 차원이 아니라 도리어 가정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주신 자식입니다. 자식이이란 가문이나 가정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일반적인 견해로 해석하며 아니되는 겁니다. 도리어 가정의 무의미로 해석되기 위해 자식이 생긴다는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가정을 의지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도리어 가정을 무의미한 것으로 와해시키시는 목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연속적인 작업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아담의 부부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식으로 인해 달라져야 하는 결과물이어야 합니다. 부부가 원인이 아니라 자식이 원인이 되어 부부는 계속해서 새로운 결과를 낳는 흔적으로 남겨지게 되고 달라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으로 자식의 출생을 ‘얻었다’는 소유의식으로 자식을 대하게 됩니다. ‘가인’이라는 말은 ‘얻었다’는 긍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얻어진 자식은 둘째 아들, 곧 ‘허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식으로 온 가족이 마감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비록 이름을 부여하기는 하지만 최종 의미는, 최종적 후손에 의해서 결정짓어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 단순히 선악과 과실만 손실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을 유발시키기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담과 하와의 처지를 걱정해서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한 사실, 즉 뱀에 대한 최종적 심판과 처리에 관한 내용이 선악과 나무 과실과 관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뱀에 대한 하나님의 결단은 일체의 생명을 허락될 수 없는 존재라고 최종 확정지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악마에서 생명은 제공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존재를 통해서 이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죽음의 보편화를 통해서 뱀으로 하여금 그 죽음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즉 선악과 따먹은 책임을 하나님께서 계속 끝까지 추궁하시므로 말미암아 선악과 훼손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 심판에서 면제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십니다. 오직 ‘죽음’ 이외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게 만들어버리십니다. 생명이란 어림도 없게 하십니다. 오래 사는 것이 결코 생명이 아닙니다. 선악과 의식이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직접 그 죽음의 구조 안에 개입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110:1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지상 개입은 주의 원수를 색출하고 영원히 지배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여망이나 기대나 희망과 협상하지 않는 식입니다.

즉 인간이 구원되고 싶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염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죽음 기정 사실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죽음을 활용하여 생명을 유발시키시는 겁니다. 즉 여자의 이름이 ‘생명’ 곧 ‘하와’로 바뀐 것을 봐도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자신의 씨를 남겼다’는 겁니다. 곧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개입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약속을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뭘해도 죽음만 유발시키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 생겼을 때, 자신들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허무=아벨’을 짓게 됩니다. 즉 긍정이 아니라 허무가 곧 자신들의 신세에 부합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식 생산은 곧 허무를 유발하는 작업에 관여한 바가 됩니다.

하지만 그 허무의 유발이 곧 미처 예상 못한 ‘얻음’ 곧 ‘가인’이 되는 겁니다. 자식 생산에 관여하시는 방식으로 약속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개입하십니다. 이는 곧 ‘씨’로 개입하는 방식입니다. ‘후손 낳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뱀의 후손과의 전쟁마당으로 확대시키고자 하십니다.

‘씨’란 곧 ‘개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자연마저 통제하고 관장하는 유일한 ‘한 분’을 두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16에 보면, “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자식이 열 명이라고 하더라도 참된 씨는 그 많은 자식들이 죽어가면서 단 한 명의 그분을 지목하고, 고백하고, 지향한다면 바로 그 한 분이 뱀을 이기시는 ‘여자의 후손’이 되시는 분입니다. 아담은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이미 남자의 일부로 예속된 여성도 같이 죽어갑니다.

안 죽고 사는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바로 그 죽음 속에서 피어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으로 피어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 오빠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나흘만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도로 살아날 때에, 그 나사로 가정은 진정 생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사람이란 본디 죽게 되어 있다는 점과 죽어가면서도 그 죽음이 예수님이라는 ‘한 분의 씨’와 관련성이 있는 죽음이라면 사나 죽으나 산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생명이란 이처럼 허무 속에서 피어납니다. 이 땅에 오신 그분마저 사람들보기에 허무하게 죽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그 허무한 죽음에 온 우주와 대자연이 다 관여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직 유리한 여자의 후손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로 인하여 뱀의 후손, 곧 악마에게 합당한 심판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의 죽어가는 삶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전쟁터롤로 제공되어있음을 아는 자들이 곧 생명에 속한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2-11 17:46

25강-창 4장 1절(가인의 출생)1620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4페이지입니다.

창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남편과 아내가 동침해서 자식을 낳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 같습니다. 부부, 남편과 아내가 동침해서 자식을 낳는 그것이 뭐 그리 이상스럽고 신비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정상으로 느껴지는 그것으로 인하여 뭔가 빠져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가 그 가운데 빠져버렸고 남는 것은 내 가정만 남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우리는 보통 여기서 스톱이 되어버려요. ‘부부가 동침해서 애를 낳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라고 생각하는데 당연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 뒤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원래의 뜻은 여호와가 나를 통해서 그 남자, 그 씨를 낳았다는 겁니다.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에요. 하와가 남편하고 동침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편이 나로 하여금 자식을 낳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식을 내 몸을 통해서 태어나게 했다, 이렇게 하와가 고백한 겁니다. 하와가 그렇게 고백한 이유는 하와 이름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두 가지의 상반된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뭐냐? 죽음에 대해서 보편화시킵니다. “네가 어디서 뭘 하든지 간에 죽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중에 네가 늙어 죽을 것이다. 각오해라. 끝!” 하고 주께서 철수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죽음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죽게 되었다고 되거든요.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의 영향력 때문에 죽음이 발생되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야 돼요. 나를 죽게 한 것, 내가 나를 죽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선악과와 나와 섞일 때에 선악과 속에서 죽음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선악과가 나와 결합해서 죽음을 낳았다면 생명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거든요. 생명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생명나무와 격리를 시켜버려요. 그렇다면 늙어 죽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더 깊이 있는, 심도 있는 의미로 봤을 때 생명나무를 못 따먹었으면 그것은 생명이 없다는 점에서 죽음이 되는 겁니다. 숨이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생명나무 구경도 못하고 생명나무 맛도 못 보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 되는 겁니다. 불멸의 존재가 되더라도 죽음이에요.

그리고 생명나무 따먹어도 죽음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생명나무 따먹으면 영원한 죽음이 되지요. 그러면 죽음이 되지 않고 생명이 되려면 선악과 따먹은 것을 취소하는 입장에서 생명나무를 따먹어야 되는데 선악과를 이미 따먹은 입장에서는 취소가 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저질러놓은 일에 대해서는 인간은 끝까지 책임지고 생명하고는 이별을 고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조치를 그렇게 하면서도 하나님 나름대로의 노림수가 있어요.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중심에서 인간만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따먹게 한 그 원인자가 누구냐를 두고 인간을 추궁을 해요. 추궁을 하는 과정에서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뱀이 꾀어서 따먹었습니다.” 하는 뱀의 존재를 부각을 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것으로 모든 일처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뱀에 대한 적절한 저주, 적절한 심판을 행사하는 계기로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은 그 정황을 활용하시는 겁니다.

모든 것을 선악과 따먹은 상황으로 전환을 시켜버립니다. 전환을 시켜 본다면 뱀에 대한 처리, 척결, 뱀에 대한 합당한 심판을 행사하는데 그 담당을 여자가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 이름이 하와가 되는 겁니다. 생명은 뱀에 대한 척결이 되고 난 뒤에 보자. 생명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생명을 현재화시키는 그 작업이 일어나는데 그 작업은 완전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선악과중심으로 인하여 뱀에게 저주가 주어지는 그날, 그 때 그 순간 생명은 나타나리라, 그렇게 됩니다.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인간은 빠집니다. 주가 주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인간들은 주님이 한 분이라고 여겼는데 성경에는 주가 한 분이 아닙니다. 주가 주에게 말씀하신다, 주가 두 분이 나옵니다. 주가 두 분이 되기에 하나의 존재인 인간이 두 사람을 동시에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섬겨서 구원받는 길은 없습니다. 한쪽을 섬기면 한쪽이 삐지기 때문에 안돼요. 인간은 하나님 섬겨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님끼리 알아서 그 효과, 그 결과로서 인간은 구원되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겨서, 예수 섬겨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제는 인간하고는 안놉니다. 판사는 피고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지 판사가 피고하고 흥정하지 않습니다. “징역 얼마나 해주면 네 마음이 좋겠는가? 한 5년으로 해줄게.” 이런 식으로 판사가 피고를 상대로 뒷거래 하지 않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는 그런 것이 있지만 실제는 그런 것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입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길은 없습니다. 인간이 기대해서 구원되는 길은 없습니다. 죽어서 좋은 천국 가겠다는 것은 백 프로 마귀가 인간에게 바람을 집어넣은 거예요. 허황된 꿈을 심어놓은 거예요. 종교라는 이름으로.

“여러분, 구원받고 싶습니까? 하나님께서 천국 보내줍니다.”라고 하는 단체가 있다면……, ‘단체가 있다면’이 아니지요. 그냥 다 그렇지요. 교회나 성당, 백 프로 사탄의 전당입니다. 사탄이 상주해 있는 단체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이라는 것이 없어요. 죄 지은 주제에 심판을 받아야지 무슨 구원을 받습니까? 뭘 잘했다고? 선악과 따먹은 짓이 참 잘한 짓이에요? 선악과 따먹어놓고 뭘 잘했다고 은근히 구원을 내 밉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조치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원수로 내 발등상 되게 하기 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까지’라는 말은 목적을 의미하는 겁니다. 주님이 하실 일의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 일은 뭐냐? 주의 원수를 심판하는 그 작업, 그 기능을 위해서 주께서는 이 땅에 들어와서 설치게 되고 활동하게 됩니다. 누구와 더불어? 죽어가는 인간과 더불어.

따라서 인간은 죽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죽고 여자는 남자에게 복속된 존재기 때문에 같이 죽고 땀 흘려 죽는 남자 옆에서 여자도 함께 죽습니다. 님아, 요단강 건너갈 때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둘 다 합쳐서 요단강 건너가서 죽습니다. 당연히 죽어요.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아까 봤던 시편 110편의 일을 진행을 시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작살냅니다. 그것이 마감되는 날, 끝나는 날 여자 이름은 하와가 되는 겁니다. 생명이 되는 거예요. 생명은 죽음 속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죽자!” 죽읍시다. 우리가 죽어줘야, 아, 죽어줘야 생명 나와요. 주께서 우리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그 귀한 일, 우리를 죽이시는 그 좋은 일을 통해서 주께서 좋은 결과를 맺으십니다. 생명이 나옵니다. 우리를 통해서 생명이 나온다면 우리는 아낌없이 죽읍시다. 어차피 우리는 죽어 마땅한데 죽어 마땅한 것을 사용해주시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죽어가는 우리를 통해서 생명을 끄집어내시다니. 죽어가는 인간도 쓸모없는 것이 아니고 쓸모 있게 사용해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죽어가는 인간이 “나도 보탰잖아요. 나도 생명 얻는 일에 힘을 보탰으니 내 몫을 주세요.”라고 나대지 맙시다. 그것은 죄 지은 인간이 해야 될 행세가 아닙니다. 태도가 글러먹었어요. 그저 죽어가면서도 “죽어가는 인간을 통해서도 이렇게 생명을 나타내주시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는 그 고백 외에는 아무 할 고백이 없습니다. 천국 갈 생각하지 마시고, 오래 살 생각하지 마시고, 90에 부르든, 80에 부르든 후딱, “기다렸다고 전해라.” 하고 그냥 가시기 바랍니다. 그 와중에서 주께서는 생명을 거기서 만들어내십니다.

약속을 주시면서, 죽으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해 입히지요. 가죽옷을 해 입히면서 주께서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와 차단시켜 추방하고 마는 겁니다. 이제 생명나무는 우리 힘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막혔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두 사람을 쫓아내시고” 쫓아낸다는 것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까워라. 나중에 다시 돌아오너라. 문 활짝 열어놓으마.” 이런 것 없습니다. 쫓아내시는 거예요. “냉큼 쫓아라.” 그렇게 된 거예요. 쫓아내시고, 적극적으로 밀어내시고 두 번 다시 못하도록 생명나무 가는 길을 지키게 했습니다.

인간이 행여 미련 둘까봐서, 죽어가는 주제에 혹시나 ‘살 길이 있지나 않나.’ 하고 미련 둘까봐. 미련 두는 그것도 마귀의 생각입니다. 일체 모든 미련은 끊어야 돼요.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가지고 하나님 자신의 자식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가인을 여자의 몸을 통해서 낳게 했습니다. 이게 여자의 후손의 시작입니다. 아담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식으로 가인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 그 남자를 낳았는데 그 남자가 어떻게 저주받는, 지옥 가는 남자가되었는가?

하나님이 낳은 자식 같으면 단박에 뱀을 이기고 생명나무를 얻어서 “여기 생명나무, 인삼뿌리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부모에게 갖다 주면서 효도하는 자식이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참 일처리 잘한다고 할 것인데 어떻게 가인이라는 하나님의 자식이 도리어 하나님 앞에 저주받는 자식이 되었습니까?

물론 아담과 하와, 이 죄 많은 인간이 낳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시 죄 값으로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했는데 하나님이 개입해서 낳은 자식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버림받는지, 이런 자식을 하나님이 왜 의도적으로 낳게 했느냐는 그 문제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게 의문점이 되지요. 가인의 이름 자체가 ‘얻었다’는 뜻이에요. 얻었다.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가인의 이름은 하나님이 지은 것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가 지어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아이를 얻었다.’ 해서 이름을 가인, ‘얻음’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얻는 순간 아담과 하와는 자기존재에 대해서 상당히 좋게 생각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자식을 소유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둘 째 아들을 낳는데 그 이름이 ‘아벨’이에요. 아벨의 뜻은 ‘허무’에요. 얻었는데 그것이 허무로 끝나는 겁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얻은 것이 결국은 허무로 끝난다는 것은 자식의 이름을 지었지만 자식의 이름의 문제가 아니고……, 애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 애들의 이름을 지었던 부모 자신의 이 세상 삶에 있어서의 시작과 결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셨으니 고맙습니다.” 했는데 ‘아하 그게 아니네. 우리 자신을 긍정하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를 허무하게 만들기 위해서 자식을 주셨구나.’ 허무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자식들의 쟁투와 싸움, 이것은 시작점을 부모인 아담과 하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얻었다고 했을 때는 허무로 끝나잖아요. 그렇다면 바꿔야 돼요. 허무를 통해서 새롭게 얻어져야 되는 겁니다. 내가 얻은 가인은 허무로 끝나야 되고 허무로 시작된 것을 통해서 내가 미처 기대하지 않는 새로운 얻음이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생명과 연관되고 관련될 수가 있습니다.

성경 본문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고 되어 있거든요. 자, 여호와가 내 인생의 어느 지점에, 어느 지점을 목표로 개입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을 때는 부부가 시작이 되어서 자식을 낳는데 있어서 여호와가 개입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것은 오산이었고 오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식을 허무한 존재로 바꾸는 그 지점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해주셔야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시작이 되는 것처럼 오해를 하는데 그것은 오해에 불과하고요, 아담과 하와는 자식, 그 씨를 낳는 지점에서 주께서 개입했다면 그 씨를 낳게 된 아담과 하와는 원인지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결과로 들어가야 돼요. 그 씨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새롭게 달라지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는 겁니다. 후손이 선조를 살리는 식이에요.

그렇게 되어줘야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 후손과 후손의 전쟁, 하나님의 작업의 최종적인 중심점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후손을 통해서 선조가 거꾸로 복을 받는 시스템이 될 때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가 하신 일 전체에 대해서 파악이 가능한 겁니다. 씨를 통해서, 씨는 그 다음 씨로 이어지는 거예요. 창세기 4장 25절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와 동침하매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절대로 우리 부부는 동침해서 애를 낳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부부가 동침해서 애를 낳는 것이 너무나 보편화되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애 안 낳아서 문제지만 하여튼 일상적으로는 보통 DNA가 어떻고, 수정란이 어떻고, 줄기세포가 어떻고, 애 낳는 것을 당연하게 보는데 절대로 당연한 게 아니고 진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약속,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관련된 그 씨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 3자, 쉽게 말해서 아담의 씨라는 이름으로 여호와께서 직접 관여하는 그 징후, 그 증거로서 개입할 때만 비로소 의미가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또는 여호와께서 인간의 씨로서, 인간의 후손으로서, 인간의 후손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 땅에 개입하십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뭐냐? 부부는 뭐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하는 그 전쟁마당으로 자기 육체를 제공한 것밖에 안돼요. 우리 육체에서 마음껏 노세요, 라고 장소 제공한 거예요. 노름하는데 담요한 장 빌려준 거예요. 이 담요위에서 마음껏 화투치고 노세요, 라고 내주는 것밖에 안돼요.

그런데 그 씨의 개입이 인간의 씨가 오면서 “여호와로 말미암아”라고 되어 있거든요. “여호와로 말미암아”로 개입되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씨를 이 땅에서 만들어줬기 때문에 대자연의 모든 운행과 질서와 법칙과 원리가 이 씨의 활동과 관련성 있게 작동하고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어떤 과학자도 모르는 이야기를 방금 제가 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을 제가 그대로 읽어볼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하시고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바람과 바다는 인간들의 사고에는 인간과 관련 없는 대자연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해와 달과 마찬가지로. 별도 마찬가지고. 인간과 무관하고 따로 노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제가 해보고 고함지른다고 내일 해가 안 뜨는 것이 아니고 달을 보고 “달아, 그 빛을 감추어라.” 한다고 해서 달이 갑자기 빛을 안내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고함을 치시면 해와 달과 별이 우르르 다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매 그들이 잔잔하게 되었다는 말은 바람과 바다는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어떤 분을 겨냥해서 같이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분이 누구냐는 거예요, 그분이. 그분이 바로 아담을 통해서 계속해서 씨를 양산해내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 분 자체입니다. 여호와께서 인간의 자손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개입하시는 거예요. 인간세계에 개입할 뿐만 아니고 그 인간세계에 개입할 때 그냥 개입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인간을 둘러싼 온 우주, 대자연도 함께 동반해서 그 씨와 더불어서 활동하도록 조치를 하신 겁니다. 여호수아가 전쟁할 때 해가 멈췄지요? 하나님이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하는데 해가 도와줍니다. 해가 지지를 않아요. 여리고성 무너질 때 지진이 일어났지요? 요단강 스톱되었지요? 홍해가 갈라졌잖아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무덤이 깨지면서 죽은 자가 살아나서 예루살렘 동네에서 돌아다녔지요?

그래서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 보면 모든 세계, 모든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함께 움직인다 했습니다. 심지어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로마서에 나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모든 피조물이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되면 드디어 썩어짐에서 벗어나서 새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과학적으로 증명이 될까요? 과학이라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켜놓고 따지는 거예요. 그저 자연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인간은 뱀의 후손이에요. 저주받아야 되고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에요. 하와라는 생명과 연관된 자식이 아닙니다. 생명과 연관된 자식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그 씨가 계속해서 투입이 되어야 됩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인이 메시아인가, 하는 문제지요. 아담과 하와는 착각했지요.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이제는 가인이 자기 부부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대결에서 여자의 후손이 이긴다는 그 인물이 바로 가인으로서 이제 잉태했다. 처음 잉태했을 때 “하나님이 드디어 메시아를 주셨다.”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아민이 까꿍!” 하면서 잘 놀고 밥도 잘 먹고, 1개월 좀 넘었는데 벌써 5.2킬로그램, 사진 찍고 난리 났어요. 자식 치고 그렇게 안 키우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참 귀엽거든요. 여러분이 태어났을 때 여러분 부모가 다 그렇게 귀여워했습니다. 커서 이렇게 되었지만 어릴 때는 그렇게 예쁜 딸이고 예쁜 아들이고 온 동네에 잔치 벌였어요. “뭐 잡을래? 마이크 잡을래? 청진기 잡을래? 책을 잡을래?” 성경책 갖다 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 다 허무로 끝나는 겁니다.

인간에서 태어난 어떤 자식도 메시아는 없습니다. 왜? 허무로 끝나야 되기에. 가인과 아벨, 그 틈에서 나오는 씨, 여호와로서 준비된 씨는 이 땅에서 모든 인간의 자손을 죽었더라, 죽었더라, 허무로 끝나게 하시는데 관여합니다. 심지어 누구까지? 예수 그리스도까지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분으로, 자식으로서 이 땅에서 허무한 십자가죽음으로 끝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봐도 실패자입니다. 그런데 뭔데 우리가 성공 자 되어야 합니까? 주님마저 실패자로 끝난 인생, 우리가 여기서 성공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 이유가 없어요.

다만 실패로 끝나면서도 주님의 성공하신 그 생명나무로 사용되어진다면 그것보다 더 큰 영광스러움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썩어가고 있습니다. 썩어가는 것은 마땅한 거예요. 마땅히 썩어가고 있으면서도 썩어가는 이 인간에게 하와의 씨가, 생명의 씨가 썩어가는 그 와중에서 피어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성도입니다. 아벨은 죽어가면서 여자의 후손 쪽으로 나타납니다. 형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분명이 두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두 사람이 아니에요. 사실은 한 사람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주신 가인 안에 두 형제가 들어 있었던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여자의 후손은 두 명이 아니고 세 명이 아니고, 아이를 열두 명을 낳아도 열 두명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은 단 한 명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라.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내 자손이라 하였으니.” 형제가 열 명이십니까? 다섯 명이 되십니까? 다섯 명 몽땅 다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열 명 다 여자의 후손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은 어디서 나오는가?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도 아닌 그 속에서 성도 아님을 아는 자가 등장한다면 여자의 후손에 속한 성도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고 허무하게 끝나야 될 것이 나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의 생명을 증거 하게 된다면, 여러 명이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죽어간다면 그 사람이 바로 여자의 후손과 관련된 새 생명, 다시 말해서 천국의 백성입니다.

아벨은 죽어가면서 그것을 보여준 겁니다. 사람들은 오해하지요. “하나님 쪽에 있는 아벨을 왜 죽이시는지 몰라. 형이 죽이려고 할 때 즈음에 형을 보고 ‘멈춰라. 저 인간은 나의 참 백성이다. 너는 그를 죽여서는 안 돼.’ 그렇게 나오면 얼마나 좋아.” 그랬더라면 아벨도 메시아 쪽이 아니고 가인도 역시 메시아 쪽이 아닙니다. 진짜메시아는 죽어야 돼요. 이 땅에서 강도한테 얻어맞든지 동네 깡패한테 얻어맞든지 죽어야 됩니다. 죽을 때, 하나님에 의해서 죽을 때 그 사람이 바로 죽지 않는 생명나무에 속하는 천국의 백성입니다.

오늘 설교 간단합니다. “죽자!”라고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은 “죽어야 된다.” 이걸로 끝납니다. 죽자, 죽어야 됩니다. 어느 누구도 살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죽어가면서 죽는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죽는 이유는……, 궁금해요? 여호와로 말미암아 죽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이 이미 하와에 속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기백성입니다.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가 죽습니다. 나사로가 죽지요. 동생들이 자기오빠가 죽었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왜 죽입니까? 참 바보 같은 아가씨들. 죽어야 돼요. 오빠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나흘 만에 살아났을 때, 이것은 오빠가 사나 안사나 관계없이 오빠는 죽어도 생명에 속한 오빠라는 사실을 그제야 아는 거예요.

그때는 그냥 오빠가 아니고 “오~파!”지요. 그 오빠 같은 분이 예수님이에요. 분명히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 능력 없네. 자기도 못살면서 누굴 구원해?’ 다 도망갔습니다. 그 죽었던 예수님 믿는 자가 바로 생명을 얻은 천국의 백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그러나 죽어 마땅함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천국의 백성입니다. 그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이미 살았습니다. 죽어가면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이 세상 모든 되어가는 일이, 이 땅 해와 달과 별의 모든 일이, 파도치는 것, 태풍이 불어오는 이 모든 것이 나를 죽이는 용도로서 지금 주어진다는 거예요.

남편 만나고 아내 만나고 자식……, 죽겠다, 죽겠다, 정답이십니다. “난 자식 때문에 못살겠다.” 제대로 정답을 말하신 겁니다. “결혼 안하고 혼자 있으니 외롭습니다. 외로워죽겠다.” 맞습니다. 결혼 안 해도 외로워죽고, 결혼해도 속상해서 죽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 맞습니다. 그 죽는 이유는 주께서 그 죽음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시켜서 죽이시는 죽음임을, 그리스도께서 의도적으로 죽음임을, 단지 그 죽음에만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주와 관련된 속에만 담겨 있습니다. 그게 설날에 보낸 택배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죽이시지요.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 동참시켜서 죽이는 것 맞지요?” 그걸 아신다면 생명의 택배 받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결국 얻었다고 자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긍정하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허무로 끝날 때 주께서 일하는 장소 제공하는 차원에서 저희들의 몸을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 땅 잠간 가는 인생 속에서 주께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그 생생한 그 일을 마음껏 증거하고 증명하는 몸으로 상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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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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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