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60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60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

이름 : 한윤범(IP:221.147.126.24)

20160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

(강의:이근호 목사)

35장 30절 봅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불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홀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하나님의 신과 성령의 차이점이 뭐냐? 참, 수백 번 들었던 질문이고 명쾌하게 답변한다는 게 상당히 힘든 것처럼 보이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 자체가 어떤 경우가 질문이 되느냐 하면, 성경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성경 밖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훑어보고 나오는 질문이에요. 여기는 성신인데 신약에서는 성령이냐? 질문 자체가 사실은 성경 밖의 어떤 자리가 없습니다. 성경 밖에서 성경 전체를 조명할 수 있는 자리는 인간에게 허용하지 않았어요. 그럼 성경 안에 자리 잡으면서 성신은 뭐냐, 성령은 뭐냐, 이렇게 질문이 돼야 되거든요.

성신은 과정이고 성령은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둘 중에 어느 것 할래, 하면 사람은 역시 마지막 완성되는 것으로 열매 따먹듯이 따먹고 싶은데 완성을 가질 수 있는 위치는 과정 밖에서는 따먹을 수 없어요. 과정 안에서 비로소 완성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완성과 상관없는 존재지요. 인간은 완성을 탐내서도 안 되고 그리워해서도 안 되고 가져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럼 인간은 뭐냐? 완성되신 분의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물결에 휩쓸리게 되면 그걸로 족합니다. 인간은 과정이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되신 것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으로 우리들이 동원된 겁니다. 동원예비군 있지요.

최후의 승리는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이런 구호를 위하여 우리는 최후의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과정 속에 들어가야 돼요. 이것은 저는 완성이 되는 욕심을 포기했다는 고백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느 인간치고 나는 누구누구의 쫄다구, 누구누구의 과정으로 족하다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최후 승리가 나의 승리로 같이 체험할 수 있기를, 그것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보면서 참아야지, 언젠가 빛 볼 날 있겠지, 이렇게 버티는 게 인간이지 나는 그냥 과정으로 쓰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걸 만족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그러나 실제로 피라미드 보게 되면, 운동회에서 피라미드 만들 때 밑에 열 사람부터 해서 나중에 제일 위에 꼬마가 올라가서 깃발 흔들잖아요. 사진은 제일 위에 아이만 나오고 나머진 나오지도 않지요. 그래도 좋다고 하는 그 사람은 완성의 과정에 포함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신을 받았다는 말은, 네가 완성체가 아닌 것을 일찍이 짐작하고 그걸 수용하라. 나는 널 소모품으로 사용할 테니까 됐나? 그래도 좋아? 이것이 성신 받은 마음입니다. 너, 성신 없지. 난 성신 받았지. 난 잘났어. 이건 성신 받은 게 아니에요. 잘난 내가 최종 완성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성신 받은 내가 마지막 최종적으로 자랑 질하고 싶은 내용물이 되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신을 받게 되면, 나는 누구누구의 쫄다구다. 나는 손해만 보고 소모품이고 그분만 잘된다.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셨어. 나는 그래도 좋아. 이렇게 돼야 그 사람은 이미 과정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 성신이 나왔다는 말은, 사실은 우리가 성신이 보여주는 과정 속에 이미 합류가 있을 경우에만 최종적인 완성인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성신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위치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구약이 아니고 우린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걸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에게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 오지요. 성령이 올 때 이방인이 뭐라고 합니까? 그렇지, 내가 기다렸어. 웬 일이야. 이런 수가 다 있어. 놀랍다는 표현을 하고 있지요.

어디 나오느냐 하면,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성신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보태보겠습니다. 16절에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돼 있잖아요.

이들이 환상 자체, 꿈 자체, 그리고 예언하게 된 그 자체를 그들은 종결적인 것, 최종적인 것으로 좋아하질 않아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어떤 분이 완성했기 때문에 그분 덕분으로 내가 예언을 하게 되고 꿈을 꾸게 되고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거예요. 성신을 통해서 성령 받은 것은 구약부터 내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성령부터 완성품부터 먼저 받아놓고 자신이 받은 위상과 위치가 바로 구약 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던 그들이 했던 행위를 자기들은 완성되고 난 입장에서 그때 성신 받은 사람들의 역할을 이제 이방인들이 하게 되는 겁니다.

물건 주고 돈 받는 게 낫습니까, 장사할 때 돈부터 챙기고 물건 주는 게 낫습니까? 우선 돈부터 챙겨놓고, 지금 물건 없는 데요? 돈 먼저 드릴 떼니까 물건 오게 되면 우리부터 줘야 됩니까? 이게 편하지요. 그런데 외상 깔아놓으면 불안해서 안 돼요. 일주일 후에 줄게요. 이사 가면 어떻게 할 건데? 그래서 보증금 받잖아요. 하나님이 알아서 보증금이라고 미리 주신 게 성령이에요. 그 말은 우리가 원한 걸 준 게 아니에요. 여기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성령 받기를 원했습니까? 오순절 오기를 원했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온 거예요. 기도한 것은 유대인들이에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온 것은, 이방인들은 자기 하나님이 따로 있어요. 추상적이고 뭔가 천지를 만들었는데 구체적이지 않고 착하게 살면 복 주고, 나쁜 일 하면 벌주고, 바르게 살면 행운을 가져다주는 그런 우상이 하는 이방종교에요. 진짜 여호와가 아닙니다. 언약이 없거든요.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앞장세워서 하시는데 이방인들은 십일조고 십계명이고 없어요. 그냥 맹탕이라, 그냥 살아요. 에티오피아 내시가 언제 주를 알았겠습니까. 그냥 성경보다가 성령 받아서 즉석에서 세례 받고 새 사람 됐지 않았습니까.

참, 이런 게 상당히 어려운데요. 에베소서 2장 7절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이 과거 어느 시점인지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과거 시점은 반복이 안 됩니다. 아까 이순신 장군 이야기했지요. 이순신 장군 살아 돌아오면 기겁할 짓입니다. 죽은 김대중 대통령, 안 오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오는 세대에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반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과 효과가 계속해서 은혜로 말미암아 반복해서 주어진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도의 신앙생활이라 할 때 사실은 정확하게 말해서 성도의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왜 없느냐? 날마다 밟아 죽이는데 무슨 나라는 게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만들어내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우리는 뭘 하나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러거든요. 딸이 뜨개질 못하면 엄마가 가르쳐주잖아요. 좀 가르쳐주면 엄마 귀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안다니까. 그만 해.

우린 뭘 하나 알려주면 그 다음에 알아서 자기가 스스로 반복시키는 그런 버릇이 있어요. 이건 예수 안이 아니고 자기 안이에요. 자기 안에서 자기가 원하는 자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이 옳은 것이다, 하면 그 다음부터 예수를 본인이 유지하는 방식으로 자꾸 방식을 고안해냅니다. 그때 내가 기도해서 은혜 받았지. 앞자리 앉아 은혜 받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반복시키는 겁니다. 계속해서 오는 세대에 내가 나를 관리하고 조절해서 스스로 인정할 만한 믿는 사람으로 자기를 강제하고 자기를 컨트롤하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이란 연대기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신이 오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행세가 그겁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완성품이 되고자 한 거예요. 그런데 성신은 완성이 아니고 과정이라 했지요. 인간아, 네가 스스로 완성품 되려고 아예 애초에 마음먹지 말라. 그건 인간된 도리가 아니다. 스스로 잘났다는 것을 존재 증명하는 것이 인간의 임무가 아니라는 겁니다.

참고로 어제 수요일 설교 들어보시면 나올 거예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면 같이 살면 되잖아요. 하나님도 알고 나도 알게 되었으니까 잘 됐네. 사이좋게 살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추방하는 이유가, 네가 선악을 알게 되는 일에 나와 함께 했기에 나가라. 같이 살자, 로 해야 자연스런 서술이 되는데 선악을 알았나? 나가라.

이게 신의 세계 내부가 갈라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와 악마의 세계, 선악을 아는 세계가 두 조각나서 새로운 금지의 경계선이 마련한 작열한다고 이렇게 제가 설명했잖아요. 금지가 없는 것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금지 없는 세계는 주의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금지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완성품을 원합니다. 완성품을 탐을 냅니다. 마귀가 그걸 부추겼지요. 금지를 넘어서면 완성품을 얻는다.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 네가 언제까지 과정에 머물 것인가? 너도 완성품이 되어야지. 그게 네가 추구할 최후의 목표, 존재의 의미야. 너는 신이 될 수 있는 존재야. 마귀가 거짓말 한 거예요.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어요. 마귀는 될 수 있다고 한 거예요. 금지만 넘으면 된다. 하지 마라를 넘어서게 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커튼을 쳐놨습니다. 이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은 이런 오해를 할 수 있어요. 커튼 뒤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할 거예요. 그러나 이 교회 사람은 다 알지요.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커튼을 괜히 쳐서 뭔가 있는 것처럼 자꾸 유발되는 거예요. 주께서 금지해놓으니까 저것만 젖히면 뭐 있는 줄 알고. 아무것도 없어요. 금지를 젖힌 그 자체가 금지 뒤에는 바로 마귀가 있었던 거예요. 완성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마귀가 만들어놓은 늪이 있을 뿐이에요. 피조물로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저주와 죽음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어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음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죽음을 경험해 본적 없잖아요. 마귀는 딴 소리하거든요. 금지를 넘어서면 신이 될 것이다. 안 죽는다 이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둘로 쪼개놨어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어놨어요. 참 꼴좋게 됐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알려줘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 될 때까지 우리의 욕망의 열차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계속 부지런히 최후의 신이 될 때까지 달리고, 달리고 있어요. 실은 그걸 안다 할지라도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죽음 뒤에 자살한 자에게는 지옥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살하고 싶어 해요. 그놈의 더러운 심보, 희한한 심보지요.

자살하면 지옥 가는 걸 누가 알려줘도 지옥이 있음을 알아도 심지어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는 줄 알면서도 그 지옥에 가고 싶어. 지옥이 어떤지 구경 한 번 해보고 싶어. 우리 심보가.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마저 다 점령하고 싶고 장악하고 싶어요. 왜? 그게 나니까. 그게 자기 존재 증명이라는 겁니다. 나는 어떤 이유라도 거칠 것이 없고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모든 행동과 의지를 총동원해서 그걸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네요. 병들어서 그래요. 날 때부터 이단이라서 그래요. 스톱이 안 됩니다. 이것까지가 없어요. 네가 뭔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신을 보내서 너는 누구누구의 노리개며, 누구누구의 소모품이며, 누구누구를 위한 자료에 불과하고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죠. 그러면 성신 보낸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이 환영했겠습니까? 성신 받아서 우리는 과정에 불과하고 완성을 하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람을 우대했습니까? 죽였지요. 아벨을 죽인 걸 보세요. 가인이 제사 드리는 것은 자기 존재 증명이었습니다. 신이여, 내가 드린 제사를 안 받기만 해봐라. 이런 거예요. 왜? 내가 했으니까. 제사 드리는 내가 나로서는 완성이니까.

어렵게 하지 맙시다. 돈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와? 우리가 돈이 없으니까 욕하지만 우리가 돈 푼이나 있으면, 옆에서 누가 뭘 그렇게 비싼 것을 사, 하면 내 돈으로 내가 사는데 아줌마가 왜? 우리는 상상이 안 되지요. 우리는 수백 억 재산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택시 타면 9980원 나올 때 있어요. 그때 잔돈 20원이잖아요. 그럼 잔돈 놔두세요. 꼴랑 20원. 왜 그 귀한 돈을 날립니까? 그만한 돈은 있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백 만원을 줘버린다. 다른 사람이 욕하지요. 그런데 뭐라 합니까?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와? 이게 평소에 우리 속에 다 들어있어요. 그게 뭐냐? 나는 신이라는 자기 존재 증명을 그런 식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성신을 요구하지 않겠다. 왜? 현재 있는 자체가 완성이기 때문에. 완성을 더욱 더 완성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원하는 식으로 관리할 거야. 그걸 소위 신앙생활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마귀 생각입니다.

다시 정리합시다. 성신 또는 성령이 온다는 말은 나는 누구누구를 위해서만 존재해야지 나를 위한 나는 애초에 그런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지 자신의 잘남을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성령 받아서 헌금하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고 해요. 그것도 죄냐, 이렇게 우기는 사람도 있어요. 결국은 누굴 증거하는 겁니까? 성령 받은 자기 자신의 증인되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증인될 사람이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온 동네에 팔아먹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떠벌이고 선전하고 홍보하고 있는 거예요.

아이를 교육시키고 있으면 오지랖 아줌마가 아이를 왜 저렇게 키우노? 그럼 내 아이 내가 키우는데 니가 와? 누가 뭐래도 내 애는 내 안에서 완성품이라는 거예요. 아줌마가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성령이 하는 일인 건 생각도 못하고. 성령이 그런 일까지 하겠습니까만. 항상 우리는 성령 받았다 하지만 뭔가 치고 들어오면 그 순간 완성품이라는 걸 증명할 방어체계가 발동됩니다. 북한처럼 장거리 미사일 쏘아 올리든지 할 것 같아. 나를 방어하고 나의 정당함을 주장하라고 성령 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옳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준 성령을 자신이 옳다는데 써먹고 있으니 그게 무슨 성령 받은 겁니까, 악령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지.

마귀가 뱀이 뭐라고 자꾸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우리 현재 자신을 누가 뭐래도 나한테는 나의 완성품이에요. 누가 뭐래도 내 자식은 최고 귀한 자식이에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미운 자식 내놓으라고 했습니까? 사랑하는 독자 바치라 했잖아요. 뭐예요? 줘놓고 왜 뺐습니까? 아브라함은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게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약 때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완성품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완성품을 위한 과정인 것을 고백 못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못한단 말이죠. 진정으로. 흉내는 내지요. 아까 표면효과처럼. 혹시 그런 고백하면 천당 보내 줄까봐. 역시 자기가 죄지어도 여전히 이 세상 자기는 최고의 완성품 된다는 거예요. 잘된 저 사람보다 못난 내가 더 귀하게 느껴진다니까. 이런 생각이 못돼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은 타고 났어요. 우리가 마음을 못되게 먹어서 나밖에 모른다는 게 아니라 타고난 걸 무슨 수로 고칩니까? 못 고치니까 성령이 온 겁니다.

여기 사도행전 2장 계속 볼게요. 21절에 보게 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돼 있잖아요. 이게 바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 했지요.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이게 난데없는 꿈이고 난데없이 터진 예언이고 이것은 난데없이 외치게 된 환상이다. 강압적으로 본의 아니게 마구 흔들어서 입에서 툭 나오게 한 고백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살아가면서 밥 짓고 공부하는 모든 것이 종합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쪽으로 형성되고 종합하는 거예요. 내가 어느 대학에서 공부했고 직장생활하고 아이 둘 낳고 셋 낳고 결혼해서 잘 살고 행복하다고 날 증거하라는 게 아니고 그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나는 아기 낳고 노력하고 힘들게 고생했다.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이야기하고 싶을 때 자기 연대기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당연한데 툭 튀어나온 게 주의 은혜였어요.

이게 지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성령이 왔기 때문에 지금 사는 모든 것은 내 잘남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걸 증거하기 위해서 이런 인생길, 하나의 과정으로 겪어야 했습니다. 미쳤어, 내가 이런 희한한 고백을 왜 하지? 이걸 누가 가르쳐서 조련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누가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시고. 그건 간사한 거고 세뇌 받은 다단계 회사에서 그 짓하고 있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이 긴긴 말을 간단하게 하면, 인간은 자기한테 실망할 때 자기한테 실패할 때 자기한테 암담한 사태에 봉착했을 때 “주여,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부르짖지요. 그게 성령이 주신 기이한 현상이 되는 거예요. 천사가 좋아서 난리 났어.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불가능에 직면했을 때 평소에 인간은 가능성 끄집어내어서 내가 완성품이니까 완성품을 요리조리 보관하고 관리하려고 애를 써요.

그걸 진보 또는 발전이라 하고, 진화. 더 나아지는 것, 그게 꿈이고 희망이고 그 나아짐이 없을 때 자살하거든요. 나아질 때는 사랑 받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사랑해줄 사람 없고 나에게 무관심하면 또 자살해요. 하여튼 한국 사람은 이래저래 자살 많이 해요. 나를 관심 갖는 사람이 없다든지 내가 발전해놓고 그걸 자랑할 대상이 없다면 사람 미쳐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도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성령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만나보세요. 길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미장원에서 수다 떨면서 동회에서 공무원과 이야기하고 노인네와 이야기하고, 명절에 친척들 모일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사람 있는지. 없지요. 그들과 차이 나면 되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똑같이 밥 세끼 먹고, 똑같은 옷 입고, 관심사가 똑같고, 안철수가 어떻고 하더라도 속으로 각자 지 완성품 자랑 질하고 있구나.

이건 자랑은 아닌데 우리 애가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 내 능력으로 못 키우겠고 서울 법대를 갈지 어디를 갈지. 자랑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을 때 자식이 완성품이에요. 그 자식을 키워낸 본인이 완성품이고. 누구든지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는다. 이거거든요. 그런데 그자식이 공부는 잘하는데 버릇이 없더라, 하면 오랜만에 왔는데 이러기냐 하면서 삐져서 가버리고. 건드리면 다 삐지고.

전부 다 완성품이에요. 전부 신이에요. 과정이 없어요. 신앙은 우리는 완성품을 자꾸 선점하려고 해요. 예수 믿고 어떻게 됩니까? 맨날 천국 가면 어떻게 행복합니까? 주께서는 그런 것 걱정하지 말고 네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보란 말이죠. 천당 가서 얼마나 누리는지 따지지 말고 쓸데없이 과정은 안 밟고. 공부도 못하는 게 서울대학 가서 미팅할 생각, 엠티 갈 생각이나 하고. 합격이 돼야 하든지 말든지 하지.

과정 속에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는데 이런 인간을 상한 심령으로 바꾸시는 그 과정에 참여하시는 분이 누구냐? 다른 사람 같으면 자기 뜻대로 자길 사수하겠는데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나도 입만 떼만 방어하는데 내 잘난 걸 자랑 질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고 꾸짖으시면서 찾아오시는 능력, 성령 받은 사람 아니면 아무도 못 느낍니다.

헌금 하면서 나도 자랑하고 싶은데 주여, 이게 왠지 죄네요, 느끼게 하는 것, 성막 만들고 하게 하면서 이게 바로 죄구나. 이걸 함으로 복 받으려고 기대하게 만드는 내 마음, 이걸 함으로써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확인하고 싶은 탐욕, 내 행위로 구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 시도 자체가 바로 주님의 완성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을 우리로 느끼게 할 때 성령께서 그렇게 작용하고 징계 내리시는 순간순간들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몇 글자 되지도 않아요. 문장 외울 수 있어요. 문장 외운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속에 낯선 것이 있어서 우리를 매일같이 뒤집어내셔야 돼요.

에베소서 2장 7절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안은 없습니다. 우리 안은 없는데 자꾸 만들어내요. 예수 안 따로 있고 내가 완성품이니까 내 안이 또 따로 있고. 그런데 사실은 성도한테는 나의 안이 없어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내가 죽었는데 무슨 내 안이 있어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을 예수 안에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내 연대기가 있는 게 아니고 주의 십자가 효과가 날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퍼부어주는 겁니다.

작년인가 루게릭병을 도와준다고 미국에서 시작된 ‘아이스버킷챌린지’를 했지요. 그럴 때 온 몸에 얼음이 부어지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매일같이 얼음덩어리처럼 퍼부어주는 거예요. 너는 소모품이다. 네가 어떤 완성된 것을 품지 말라. 품어봐야 다 헛된 것을 알게 될 거야. 이것만 되면 주를 잘 섬기겠습니다. 막상 돼보세요. 다른 생각나지요. 이번 집만 계약된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당신은 술만 끊으면 인간되는데. 술 끊어서 인간된 사람 아무도 없어요. 술 끊는 것은 잘난 척하는 표면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는 뭘 해도 인간 안 된다고 판정이 난 입장에서 쓸데없이 당신이 이것만 하면, 저것만 하게 되면, 그건 새로운 완성품 기회를 주는 것밖에 안 돼요. 다 소용없는 겁니다. 오히려 이렇게 하세요. 당신이 이런 일까지 할 수 있다니. 긍정적 마인드로(갑자기 비복음적인데) 당신이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세상에 설거지를 다 할 줄 알아? 놀라운데. 그러면 빨래도 해보지? 당신은 뭐하고? 나는 감시하고. 당신은 배우는 과정이고 나는 완성이니까.

오는 세대에 계속 퍼부을 수 있는 것은 기존의 내 중심이 되면 역사가 모포로 휘감는 것이 돼요.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버리고 자꾸 허황된 미래를 향하여 현재를 채찍질하고 몰아넣게 만들어요. 연대기입니다. 그래서 완성이라는 게 없어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 성화론이 그거잖아요. 그런데 완성이 되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것이 날아가 버려요.

그럼 손톱 누구 것이냐? 주의 것이에요. 모든 것이 주의 것이에요. 몸이 아프다? 그럼 병원에 가야지. 왜? 주께서 병을 만들어놨으니까. 치료해야 되는데 돈이 아까워서 뭘 하느냐 하면, 기도한다고. 나한테 얻어맞았는데 부활되게 하옵소서. 목사가 거짓말했지만 진짜라고 친다면, 애 죽이고 향 피워서 냄새 없애고 맨날 부활되게 해 달라. 내가 보기에 거짓말 같아.

부활되게 하는 게 미신이잖아요. 그런 미신 우리는 없습니까? 시간은 급한데 차를 놓쳤어요. 늦장 부려서. 간단한 문제에요. 택시 오면 타면 되는데 택시 값은 8000원, 버스 값은 1200원. 주여, 버스 빨리 오게 하옵소서. 이건 솔직하게 돈이 아까워서 택시 못 타면서 주여, 기적을 베풀어서 다음 차 빨리 오게 하옵소서. 항상 우리가 하는 기도 속에는 내가 예상 되는 게 있는데 결국 내가 되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해달라는 욕망이거든요.

야고보서 4장에 그런 말이 있어요. 세상 것을 사랑하게 되면 간음한 여자라고 했어요. 너무 과격한 것 아닙니까. 나의 신부가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무슨 수로 그걸 지킵니까? 성령이, 그 말씀은 우리로 지키라는 게 아니고 이미 그 말씀이 완성품 속에 들어있어요. 주께서 만든 내 안에 보면 말씀대로 티도 없고 흠도 없이 완성품이 있습니다. 그 완성품이 하늘에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하늘에 있는 완성품보다 땅에 있는 이 몸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너는 이미 죽었고 죽은 시체 주물럭거리지 말고 네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땅의 것을 사랑하게 되면 우상숭배, 탐심이라고 돼있다고.

그런 것은 성령께서 오게 되면 우리는 이미 완성품이고 과정인 걸 알지요. 이런 은혜를 양동이에 얼음 붓듯이 계속해서 퍼부어주는 거예요. 퍼부어주면 어떻게 되는가? 속이 다 시원해요. 정신과 다니면서 약 먹던 분이, “목사님, 속이 다 시원합니다. 약 끊은 지 오래됐습니다.” 속이 뻥 뚫렸다는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더 이상 아등바등할 그런 완성품을 내가 안 만들어도 되고 나의 완성품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죽으면 안 돼요. 하나의 과정을 밟으라고 성령을 주신 겁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메시아 오기 전에 성신 줬던 성신의 역할을 이미 완성된 입장에서 어떻게 완성이 됐는지 왜 예수님께서 내 대신 완성품이 됐는지 그걸 보여주는 역할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것, 죄지은 것, 그걸 우리가 그대로 되풀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한 심령을 알아야 돼요. 구약 욕할 게 아니고 바로 우리도 그 입장 되면 그럴 수밖에 없구나.

성막 만들라니까 가락지 끼고 하면서 주여, 이러면 복 주겠지요, 이 정도하면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그러면 위대한 분,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런 성신 받은 사람도 있으니까 누가 뭐래도 완벽한 이스라엘, 두 번 다시 멸망할리 없고 책망 받을 일 없을 것이라고 하던 그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표면효과였습니다. 십자가가 자기의 진면목을 드러낼 때까지 내가 인간이 아닌 것을 알 때까지 주께서는 인간의 가능성 있는 것들을 집대성해서 마치 그것으로 방주처럼 구원의 완료, 완성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작업들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런데 성막에선 무슨 사건이 일어납니까? 죽음의 사건. 이틀에 한 번? 아니요. 사흘에 한 번? 아닙니다. 매일 일어나지요. 지금도 하나님께서 오는 세대에 매일같이 십자가 죽음을 우리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 당시 성신 받은 사람들이 만든 성막 안에 매일같이 죽음 사건이 일어납니다.

죽음 사건이 그들을 건집니까? 조각목으로 만든 성막이, 여자들의 자수 솜씨가 구원합니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과정이고 완성은 그 안에 들어있는 죽음이 완성입니다. 이 아이러니, 나의 죽음이 완성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대신 죽은 죽음이 완성이에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여러분, 속이 다 시원해야 돼요. 뭘 줘도 내 것 아니에요. 내 것 아니니까 마음껏 누리고 마음껏 사용해도 괜찮아요. 버스 놓쳤잖아요. 택시 타면 되는 거예요. 물론 지각하더라도 다음 버스 기다립니다만. 왜? 돈을 사랑하니까. 이러나저러나 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속이 다 시원하다니까요.

아가씨를 사랑하는데 결혼하고 싶은데 삐져서 도망갔다. 술 먹고 가서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지 마세요. 왔다가 가는 것도 주의 뜻이다, 하고 다른 여자 사귀면 되니까. 그런데 얽매일 필요 없어요. 애가 공부 못한다. 다음에 잘하겠지. 다음에 잘할 리가 없어요. 지금도 못하는데 뭐. 공부 못하지만 사회성 좋으니까 다른 것 하고 싶은 것 하겠지. 그러다가 공부 잘하면 저건 미친 거다. 뭐든지 마음을 구멍이 난 것처럼 해서 애가 뭘 한다면 고맙게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히 여기시는 방법으로 살아가줘야 네가 잘되는 게 최종 완성이 아니고, 내가 행복한 것이 완성이 아니고 어차피 완성은 다른 인간, 주께서 만든 인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이렇게 가나 저렇게 가나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거든요.

우리는 하루하루가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남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그 인간이 어떻게 살든지 그건 저쪽이고, 나는 내 식대로 몰아넣을 것이고 뭘 해도 의미 두지 마세요.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놈의 의미 두는 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속이 상했고 얼마나 하나님을 탓했고 하나님께 분노와 원망을 해댔습니까. 아무것도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인데 주께서 내 인생 조져놨다고 불평불만 하는 그것이 마귀의 시험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60204b 울산강의.hwp (33.0K), Down:11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5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292 묻고답하기 온전한 것 - 최고관리자 16-02-14
15,291 우리교회 예수님과 만난 사람(1) 160214 - 최고관리자 16-02-14
15,290 설교 진리와 함께(고린도전서 13:6-7)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14
15,289 우리교회 진리와 함께 160214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14
15,288 강의 까닭없는 구원 160212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6-02-13
15,287 강의 선先-미래 160212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2-13
15,286 자유게시판 25강-창 4장 1절(가인의 출생)162010-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2-11
15,285 우리교회 가인의 출생 162010 미가 최고관리자 16-02-10
15,284 자유게시판 안양모임 안내(2016. 2. 12 금)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2-09
15,283 자유게시판 서울 의존교회160108a,b (십자가와 부활)―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6-02-09
15,282 자유게시판 177강-고전 13장 4-5(사랑은?)160207-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07
15,281 자유게시판 69강-신 11장 29-32절(에발산과 그리심산)160207-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2-07
15,280 우리교회 에발산과 그리심산 160207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2-07
15,279 묻고답하기 진리와 함께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07
15,278 우리교회 르호보암왕 160207 - 최고관리자 16-02-07
15,277 설교 사랑이란(고린도전서 13:4-5)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07
15,276 우리교회 사랑이란? 160207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2-07
열람 ➜ 자유게시판 20160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6-02-06
15,274 자유게시판 201602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6-02-06
15,273 강의 과정과 완성 160204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6-02-04
15,272 자유게시판 안양20160108b히11장 13절(고향)-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16-02-04
15,271 자유게시판 할례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2-04
15,270 자유게시판 24강-창 3장 22-24(에덴에서의 추방)160203-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2-03
15,269 우리교회 추방 160203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2-03
15,268 자유게시판 뱀의 자식들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6-02-03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