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
201602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
이름 : 한윤범(IP:221.147.126.24)
201602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5장 20절부터 하겠습니다. 20절부터 한두 절 읽어볼게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그렸으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왔으되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이들이 지금 뭘 만들고자 하느냐 하면 성막과 성막이 운영되는 데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만들고 제사장 복장을 만들고자 자원하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게 되면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물건이 될 수 있는지 그것을 생각해봐야 돼요.
이런 말이 있어요. 개체는 개념보다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개체,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설명한다고 칩시다. 사람들이 설명한 것을 다 끌어 으면 그 개체를 온전히 다 설명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없지요. 길에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데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백 명이 이야기하고 그걸 다 끌어 모으면 아무리 백 명이 아니라 천 명이설명해도 그 사람의 진실을 설명할 수 없겠지요. 원래 있는 개체는 그 개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봤자 다 끌어 모아봤자 그 개체를 대신할 수 없고 개체와 일치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성막이 하나님이 원하는 성소이겠느냐 하는 겁니다. 아니지요. 쉽게 말해서 노아 당시에는 노아가 방주 만들면 충분했지요. 그 당시 홍수 피하는데 충분했습니다. 그럼 노아가 하늘나라 가는데 방주로서 충분했겠느냐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았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거잖아요. 그럼 노아가 방주 만든 것은 과연 헛수고였느냐는 문제가 또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만들지 말지. 그러면 안 만들면 구원되느냐 하는 겁니다.
성막을 만들고 성소를 만들 때 사람들이 자원해서 목걸이와 각가지 자기의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드릴 때 그 사람들의 의도와 목적이 있을 거예요. 이것 드려서 성막 만들게 되면, 21절에,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그 다음에 성막을 짓기 시작했지요.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과 같은 거예요. 성막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성막을 지으라고 해서 짓기 시작했는데 그 성막이 본인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온전히 구원이 안 되지요. 그러면 그들이 헛짓을 한 것이 돼버립니다.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제가 정리한 게 뭐냐 하면, 아무리 개념이 많이 있더라도 성막은 이럴 것이다, 해도 원래 개체를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개체를 진짜 성막이라 하고, 개념을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말로 하면, 가능성이죠. 인간의 가능성을 집대성해서 만든 성막은 진짜 성막, 이건 인간으로서는 가능한 게 아니고 불가능해요. 참 된 성막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손수 만듭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35장 20절에서 성막 만들라는 취지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으로 결론 나왔습니다. 만들어봐라. 그게 너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일단 만들게 되면, 그것이 왜 불안정하며 왜 완성품이 아닌가? 온전히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개체에서 마달하는지 네가 만들어봐라. 만들어보고 그때 가서 내가 알려줄게. 이런 취지로 그들로 성막을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일종에 하나님에 의한 초청이죠. 성막 만들라는 명령 자체가 인간들에게 미끼를 던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막 만들면 성막에서 내가 너와 만나리라. 벌써 인간들은 그 말만 듣고 이미 희망이 생겼습니다. 성막에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성의와 정성을 다해서 성막을 만드세. 그렇게 하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만남의 장소를 만들자. 그걸로 그 당시 사람들은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어요. 하나님, 두 번 다시 딴 소리하기 없기입니다. 성의를 다해서 시킨 데로 했으니까 저를 구원하는 것에 뒤에 딴 소리하기 없기요, 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진짜 성막이란 제가 나중에 지나가서 진짜 성막이라 하지만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은 개체라든지 진짜 성막은 없는 겁니다. 성막 만들라. 예, 만들겠습니다. 끝난 문제에요. 자기가 만든 성막이 가짜일리가 없지요. 왜? 시킨 데로 했으니까. 시킨 데로 금가락지, 귀한 패물 바쳐서 성막 만들었으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고 요구한 바다. 그것도 그냥 드리는 게 아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다 드렸으니까. 이렇게 집대성한 것을 이게 아니야. 내가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내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 어디가 문제입니까? 가능성이 문제인데요. 인간이 성막을 만들면 행위가 나오고 행동이 나오겠지요. 그 행동과 행위 안에 가능하다는 취지와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잘만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백 퍼센트를 이룰 수 있는 희망으로 행동과 행위에 나설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나중에 그들이 만들고 난 뒤에 그게 아니라고 주께서 판정을 내려버리면, 이것은 성막을 제대로 못 만들었다, 어설프게 만들었다, 제대로 성의 표시하지 않느냐? 이걸 닦달하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어떤 걸 지시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없는 존재가 너라는 존재야. 이걸 지적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성막을 만들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개념을 아무리 집대성해도 진짜 개체를 따라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개체는 개념보다 크다는 말입니다. 3+5=8이라 해놓고 여기에 대해서 시험 칩니다. 3+5=? 문제 푸세요, 할 때 학생들이 3+5=8이라고 풀었습니다. 이 반의 산수시험을 빵점입니다. 이러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정답 맞췄는데? 정답 8, 맞는데? 3+5=8이잖아요. 그래서 인간들이 시킨 데로 해서 정답이잖아요. 이 말이 뭐냐? 나도 선생님 시킨 데로 정답을 낼 수 있는 그러한 자질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실체 앞에서는 이게 정답이 아닌 오답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오답인데 자꾸 인간들은 오해해서 정답 낼 수 있다고 스스로 자기를 꾸미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라.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게 오답이라고 내리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만있겠습니까, 반발하겠습니까? 선생님이 3+5=8이라고 해서 8이라고 했는데 이게 왜 오답이냐고 한다면, 나는 3+5=8이든 9든 관계없이 이중에서 선생님이 아무리 가르쳐도 우리는 선생님이 원하는 답변을 낼 수 없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 들어봐라. 아무도 없는 거예요. 내가 원했던 정답은 바로 그것이다. 너희들의 상한 심령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가능성으로 위장하고 꾸며온 거예요. 시킨 데로 하면 천국 보내주겠지.
정답은 뭐냐 하면, 천국 가겠다는 것이 오답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전체를 모르고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나온 오답이 되는 겁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천국 가면 된다는 자기밖에 모르는 심보가 결국은 성경 보면서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손들고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답이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대구강의해서 했는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주체라고 인정하려면 브라질에서 퍼지고 있는 지카 바이러스가 내 말 한 마디로 다 없어져야 해요. 그 정도 위력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울산 앞 바다에 파도가 넘실거리잖아요. 내가 잔잔하라고 하면 잔잔해질 수 있는 자격자가 유일한 주체자입니다. 우리가 바다에게 잔잔하라고 하면 까불지 말라고 소금기를 퍼부을 거예요. 네가 뭔데 감히 바다를 명령하느냐 말이죠.
인간이 주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능성 범위 안에서 주체라고 행세할 뿐이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서는 전혀 아무 데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자기 욕망 외에는 쓸모없는데 왜 태어났습니까?
하나의 개체를 정확히 규명하려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연관성이 있어야 됩니다. 해가 졌다. 해가 지는 것과 식물이 자라는 것과 관련성이 있어야 돼요. 그걸 우리는 몰라요. 그러면 우리는 무식한 사람이 됩니다. 무식한 채 기껏 학교에서 3+5=8이라 하니까 정답을 알았다고 하는 거예요. 정답이 되려면 그것만 정답이 아니고 전체를 다 조명해볼 때 그 전체가 정답이고, 그 한 쪽을 떼어내도 정답이 되고, 이렇게 정답이 돼야 돼요.
치즈 피자가 있으면 한 구석을 떼어내도 치즈가 있어야 되고 중앙을 떼어내도 치즈가 있어야 되지 자기만 있고 나머지는 없는데 치즈 피자라고 우기는 것은 전체를 모르는 괴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천국을 간다는 것은, 네가 천국에 대해서 전부를 알아? 모릅니다. 모르는 데를 왜 가? 이상하네. 모르면서 왜 가는데? 그걸 모른다는 것은 거기에 들어가는 방법도 제대로 모른다는 게 돼요.
물론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지요. 네가 예수에 대해서 알아? 모릅니다. 다 모르지. 다 알아야 구원받아. 조금 알아서 못 가. 네가 아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이 모순된다면 어떻게 할 건데? 네가 아는 예수는 물 마셔도 천국 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좀 더 알아보니까 물 마셔도 못 간다. 이렇게 서로 대치된다면, 이걸 해결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안 되지요.
쉬운 예를 들어서 노아 방주가 홍수에는 견딜 수 있었지요. 그런데 노아 방주로 나중에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질 때도 됩니까? 지붕 홀랑 다 타버려요. 방주가 물에는 되지만 장차 불에는 안 되잖아요. 그러면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전체를 다 커버할 수 있어야 되지요. 난 물에서는 커버됩니다. 넣어주세요. 그건 오답이에요. 정답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출애굽기 35장은 구약입니다. 성막 만들라는 대목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게 끝인 줄 알았어요. 마치 노아가 방주 만들면 곧 구원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성막 만들라고 해서 아낌없이 패물, 결혼반지 다 빼서 그것도 억지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 자발적으로 갖다 바쳤습니다. 그래 성막 만들어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좋은 날 보았습니까? 성막 만들었다고 이스라엘 멸망 안 당했습니까? 나중에 성막이고 성소고 성전이고 다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성막에 있던 언약궤는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목사님,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문제냐고 묻는 게 잘못이다. 왜? 처음부터 문제였다. 성막 만들었으니까 주께서 이제 도와주겠지, 우리와 함께 하겠지, 라는 오답, 잘못된 아이디어를 기껏 성막 만들었다고 써먹겠다는 심보가 교만한 심보였다. 그게 자만스런 심보였던 것입니다.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 중에 반발이 나올 겁니다. 그러면 만들어도 소용없을 걸, 만들어도 가짜라면 왜 주님께서 성막 만들라고 했는가? 그럼 잘못은 주님한테 있네. 우리한테는 없네, 라고 이야기하실 거예요.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 많습니다. 시킨 데로 했는데 처음부터 성막 만들라고 한 취지는 뭐고, 이유가 뭐냐? 누구 약 올리는 거냐. 왜 그렇게 했느냐, 라고 궁금할 거예요.
저는 이것을 두 자로 먼저 이야기할게요. 표면. 네 자로 늘이면, 표면효과. 말은 어려운데 쉽게 말하면, 저는 헌금하면서도 돈을 내지 않으면 안 될까? 돈이 아깝다. 이 돈으로 다른 것에 쓸 수도 있는데, 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그렇게 묻는 사람 없어요. 바보 되려고 묻습니까. 다른 사람 다 그런데.
그럴 때 저는 이렇게 합니다. 표면효과입니다. 내가 어느 정도로 돈에 집착했는지는 돈을 내면서 내 속에 있는 죄악성이 효과를 발휘하는 거예요.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본인이 스스로 알게 되면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운동화 신고 운동하게 되면 발 냄새납니다. 이야기를 그렇게 하게 되면 실례가 아닌데 ,신발 벗고 냄새 맡아보세요, 한다면 이건 너무 심한 이야기지요. 하나님이 왜 그런 짓을 해요. 여러분, 성막 만드는 것이 구원하지 않습니다. 말로 끝나면 되는데 스타킹 벗고 냄새 맡아 보라는 부질없는 짓을 합니까? 표면효과라니까.
아는데 어느 정도인지 실제로 해보세요. 다시 말해서 여러분, 죄인이라는 말 안 믿습니다. 본인이 어느 정도 죄인인지 하루하루 삶을 통해서 그 냄새를 맡아보세요. 이게 말 하는 것은 믿지 않지만 효과는 믿으시는 주님의 방식입니다. 주여, 부족합니다. 죄인입니다. 그런 기도하지 말고 돈 한 푼 때문에 이웃과 싸우고. 그게 기도를 대신하는 거예요. 옆집과 돈 몇 푼 때문에 싸우는 것은 일종의 개체고, 기도원에서 부족하다고 기도하는 건 개념에 불과하거든요.
신앙생활은 그냥 사는 거예요. 무슨 효과? 표면효과. 그냥 사는 겁니다. 주님 사랑한다고 해놓고 자기 아이보다 덜 사랑하잖아요. 시집도 안 갔는지 아이 낳아보지 못한 노처녀는 교회 와서 자기 아이만 쳐다보고 말씀 안 들으면 막 화내요. 맨날 유아실에서 저희끼리 잡답하고 밥 먹고 그냥 가고. 왜 그런 짓 하느냐고 하는데 그건 본인이 아이를 안 낳아봐서 그래요. 죄의 발 냄새를 충분하게 안 맡아봐서 그래요.
그래서 시집 갈 때 되면 가야 돼요. 그것도 죄니까. 시집가는 죄를 지으시라고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어요. 시집을 간다고 해서 더 죄짓는 건 아니다. 말 뉘앙스가 이상하잖아요. 시집가려고? 죄지으려고? 시집간다고 꼭 죄짓는 것만은 아니지, 이런 뜻이거든요. 그 바탕에 깔려있는 게 뭡니까? 시집가면 또 시집가는 죄를 짓겠구나. 그래도 가고 싶다고? 그러면 시집가는 것이 죄만 짓는 건 아니지, 라고 껄껄거리면서 그냥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봐. 가기 전에는 주를 어떻게 섬길까 하다가 가고 나면 남편을 어떻게 섬길지 그것만 생각하지.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뭐냐?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줘놓고 뺏는 것은 더 힘들어요. 차라리 개체를 모르고 개념만 알면 쉽게 제자리 오는데 일단 해놓고 죄짓는 맛을 봤는데 죄짓지 말라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다시는 내가 술 먹으면 개라고 하는데 그 개, 영원토록 죽을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 말씀이 에베소서 2장 7절에 나옵니다. 첫째 시간부터 어렵게 하겠습니다. 상당히 난해한 말씀이 나오는데 쉽게 설명해드리려고 애쓰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여러 세대에 반복해서 나타내려면 어떤 형태를 가진 것이 되면 안 돼요. 형태로 고정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형태는 과거 그때로 끝나요. 이순신 장군이 되풀이 된다는 말은, 이순신 장군이 귀신 들린 박수무당이나 하는 소리지 다른 사람은 성립 안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1598년에 죽었잖아요. 내년에 이순신 장군이 살아서 돌아다니면 유령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반복이 안 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장 7절에 보니까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함이라고 돼있지요. 도대체 그게 뭐냔 말이죠. 지금 우리가 출애굽기 35장에서 성막 만들지요. 한 번 만들었으면 성막이 계속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오는 세대에 이십 년, 백 년 후에도 계속 성막이 되겠어요? 이게 안 돼요. 성막은 성전으로 바뀝니다. 어떻게 바뀌는가? 표면효과가 죄가 되거든요. 이 죄를 자비로 용서하시면서 성막이란 표면효과 속에 처음부터 들어있었던 성전이 있었어요. 성전은 감춰진 거예요. 성전은 감춰진 것이고 성막은 성전의 예고편으로 보면 돼요.
사람들이 처음에 성막 만들 때 이건 예고편이라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았어요. 성막 만들면 내가 함께 있을게. 사람들이 난리 났지요. 좋아서.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장을 스스로 제안했다. 그렇다면 시킨 데로 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성막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가능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성심성의껏 그들은 성막을 다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두 말 하지 않기, 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제 강의에 의하면 성막 만드는 것은 표면효과지요. 표면이 있다는 말은 안에 심도, 깊이 있는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잠겨져있다.
남녀가 6개월 사귀고 결혼했습니다. 이런 남자 같으면 결혼하기 힘들어요. 지금 내가 보기에 당신이란 여자는 정말 훌륭하고 신부 감으로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내가 당신한테 미천하고 나한테 과분합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되는데 하지만 결혼하고 난 뒤에 당신이 어떻게 바뀔지 제가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이러면 그 사람은 결단성이 없어서 간만 보고 결혼하기를 계속 주저하게 되는 거예요.
결혼은 일을 저지려야 돼요. 이건 상당히 위험한 비윤리적인 발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언제까지 간 보고 있습니까. 지금은 좋은데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백일 만나서 초콜릿, 사탕 주고받으며 좋은데 만난 지 일 년 됐을 때 명품 가방 주는지 안 주는지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명품 가방 사주면 여자 쪽에서 친구들 보니까 마음 변한 싸늘한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더라. 일 년 말고 오백 일 될 때 봅시다. 이러면 남자가 짜증나서 때려치우자, 이렇게 돼요. 그러다 나중에 팔십, 구십 돼서 간만 보다 요단 강 건너가면 되겠습니까? 안 되잖아요.
결혼할 때는 일단 지금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지금 내가 느끼는 봐 당신의 전부라고 믿고 모든 걸 걸고 결혼해야지요. 왜? 결혼이 구원이 아니고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그럼 결혼은 뭐냐? 표면효과입니다. 이제 살아가다보면 차차 그 사람의 숨겨진 속성들이 다 나오겠지요. 자기는 안 나옵니까? 본인도 마찬가지로 같이 나온단 말이죠. 내밀한 것도 있을 수 있고 결혼할 때 숨긴 것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빚이 2억 있는데 당신이 벌어서 갚아 줘. 이제 와서 결혼을 무를 수도 없고 같이 살지만 빚은 네가 알아서 해. 이렇게 나올 수도 있고.
그걸 또 미리 캔다고 결혼하기 전에 서로 좋아하면 되는데 흥신소 가서 뒷조사해서 현재 빚은 얼마며, 유전병은 없는지 다 계산하고 사돈의 팔촌까지 호적등본 다 떼보고 월북한 사람 없는지 다 조사하고, 돈 거래는 명확한지. 아이고, 참.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면 돈 벌어서 배낭여행이나 하고 지 혼자 셀카 찍으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결혼한 사람은 그게 부럽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일을 닥치게 하는 것은 원래 진짜 인간은 근원적으로 죄인인데 사람은 자꾸 자기가 그나마 잘났다고 우기니까 얼마나 잘났는지 중심 되는 죄와 연결시키기 위해서 인생을 하루하루 살게 하는 겁니다. 내가 결정할 때는 잘했다고 했는데 돌아서보니 이런 허점, 이런 실수, 이런 미흡함이 있구나. 도대체 나의 정체는 뭐냐? 그건 중심과 관련돼있어요. 중심이 뭡니까? 십자가 피였잖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성경에서 그렇게 많이 나오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그 중심 찾아가는데 중심을 찾아가면서 주께서 일으킨 어떤 실제적인 인생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는 그 인생을 살 생각은 안 하고 그걸 성경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 나는 죄인이다, 십자가 앞에 나는 죄인이다. 시험에 나온다. 3+5=8이라고 백날 외운들 구원되겠습니까?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다. 고백합니다. 구원해주세요. 어림도 없어요. 그거는 지식이고 꼼수에요. 그것 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주님이 내 인생에 깊숙이 개입해서 왜 나는 이익 되는 것만 달랑 챙기고 바깥에 대해서는 알 생각도 안 하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한다는 그것에 대해서 선뜻 발 들여놓기를 힘들어하느냐? 나만 편하면 되지, 나만 행복하면 되지, 왜 그런 쪽이냐? 그게 바로 오답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정리해봅시다. 표면효과는 죄인데, 나는 역시 잘났다. 나는 역시 정당하다. 성심성의껏, 여기 보세요. 얼마나 정당한지. 마음이 감동된 자가 아낌없이 재물 바쳤고, 아낌없이 헌금했고, 헌물 했고. 목표가 있어요. 완전한 완벽한 성막만 나온다면 마치 노아가 방주 만드는 것처럼 그 시대의 방주로서 성막을 열심히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은 어디까지나 표면일 뿐입니다. 그 다음 차례는 그 표면이 전부가 아니고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서히 알아가야 되죠.
카스텔라에서 제일 맛있는 부분이 밑에 노란 것 말고 새카맣게 누른 부분이죠.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인생을 살면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시는 이런 죄를 안 범해야지, 이러거든요. 그건 큰 실수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죄짓고 실수하는 것은 그러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이건 어쩔 수 없어요.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돼서 딸 때려죽여서 몇 달인가 놔둔 것, 남들은 다들 욕하는데 본인은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목사지, 자식 교육 잘못시켰다면 신학교수 안 되지, 개척교회하고 있으니까 교인들한테 자기 실생활도 말씀과 일치된 것을 보여야지, 자기 관리를 해야 되는데 그 자체가 나는 바르게 살아야 되고 목사답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그 목사는 몰랐던 거예요. 아무리 표면으로 덮어도 나는 십자가에서 아이를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을 때려죽여도 합당한 죄인인 것을 주께서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주여, 이런 죄인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실수로 때려죽여도 이것은 내가 죄인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당당할 것까진 없지만 이걸 인정해줘야 돼요.
따지고 보면 그 목사의 첫 번째 마누라가 암으로 안 죽었으면 그런 일 없었을 거예요. 자기 아이를 때려죽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남의 아이니까 때려죽이잖아요. 물론 자기 아이라도 죽이는 사람도 있긴 있지만. 계모니까 동조해서 때려죽인 거예요. 남편 출세에 지장 있을까 싶어서. 그런 환경을 주님이 조성한 겁니다. 왜 조성했습니까? 죄인 됨을 알리기 위해서 조성한 겁니다. 아직까지 안 때려죽인, 아니 손 한 번 안 댔으니까 나는 의인입니까?
표면의 다양성이 있더라도 환경 따라서 어떤 사람은 피자 표면, 어떤 사람은 카스테라 표면, 어떤 사람은 곰보빵 표면, 울퉁불퉁한 인생, 편안한 인생, 재벌 3세가 되든, 가난한 집에 태어나든 표면은 달라서 한 결 같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성막에 보탬이 된 사람은 우쭐거릴 것이고 돈 없어서 패물 못 바친 사람은 기죽을 거란 말이죠.
여기서 이스라엘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강자는 헌금 할 수 있는 자, 약자는 헌금 할 돈도 없는 자. 돈 없는 자가 약자가 아니고 돈 있는 자가 강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꺼이 드릴 수 있는 그런 자가 갑질하고 정신적인 폭력자가 되고 돈 내고 싶어도 몇 푼 내야 소용도 없는 그런 것이 약자가 되는 거예요.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서 누가 힐난하고 비난했습니까? 그 당시에 바리새인, 돈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놀렸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이 과부가 한 동전 두 닢이 부자가 낸 것보다 더 많이 냈다고 했지요. 이게 사회적인 차원에서 가난한 자가 약자가 되고 돈 많은 자가 부자가 되고 도둑놈이란 뜻이 아니에요. 많이 헌신한 자가 도둑놈이 되는 거예요. 주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고 많이 희생한 인간들의 도둑놈이 되고, 차라리 술 먹고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에 가까워요.
경제적 상황으로 약자와 강자로 나눈 것은 성경을 경제논리로 해석한 것밖에 안 됩니다. 이건 흔히 말하는 해방신학이라는 엉터리 신학에 불과합니다. 그걸 보면 사람들 가슴 속에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마치 자동적으로 의인되는 양 여기는 그 인간의 갑질 그것도 하나님이 죄를 드러내는 표면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쉽게 갑시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렸습니다. 성막을 만들라. 예를 들면 의자가 삐꺽거릴 때 유력한 부자가 있어서 자기가 한다고 나선다면 그게 바로 교회에서 갑질하는 인간이란 말이죠. 그러면 새순교회에선 아무도 안 하는 거예요. 의자에 앉다가 자빠지든 엎어지든 아무도 안 해. 에이씨, 내가 해야지.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아주 평화롭습니다. 갑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 자체가 자원해서 하든지 스스로 하든지 인간의 마음은 썩었습니다. 속에 있는 썩은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때 저는 장갑의 속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예를 드는데 살림을 살아본 사람은 다 알아요. 고무장갑 벗을 때 뒤집어져서 안이 밖이 되고 바깥이 안이 돼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드러내고 내가 했다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가지고 노시는 겁니다. 명령을 함으로써. 그 당시 사람들은 얼씨구나 하고 이래도 하나님이 복 안 주면 하나님이 나쁜 거야. 그래서 그걸 함으로써 합당하게 정당하게 자신은 주의 백성인 양 당당하게 행세깨나 했을 겁니다. 해도 무슨 소용 있어요? 성막 만들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24절에 보면, “무릇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자는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무릇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자는 가져왔으며”
이걸 써보겠습니다. 필요한 것. 누구에게 필요하지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백성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 되지요. 이야기가 깔끔하게 끝났지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구원받고 복을 받는 것은 너희들이 만든 것, 낸 것으로 복을 주는 게 아니에요. 이걸 분명히 합시다. 하나님이 우리가 준 것을 봐서 복을 주는 게 아닙니다.
복이란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근거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에게 복이 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완성하게 되면, 완성된 그걸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복을 주고 천국을 주고 생명수를 주고 영생을 주시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그런데 출애굽기 35장에 보면, 주께서 성막에 필요하다고 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아낌없이 드렸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필요하다고 오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뭐냐? 우리는 자신이 의롭고 정당함으로 살고 싶지 자신의 약점을 내 코앞에 드러내는 그런 필요에 대해서 아예 사절하지요. 우리는 그런 그림자와 꼬리를 뒤에 감추길 원하지 그 음흉한 꼬리를 내 앞에 두는 것은 우리가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한테 이런 꼬리가 있다고 우리 앞에 두는 것은 이게 나한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잘난 체하는 너에게 꼭 필요한 조치를 내가 내린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복 받은 민족이에요. 세상에 어느 민족이 율법 어겼다고 대번에 손 올려서 때리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다른 이방민족은 묵인했다, 방치한 걸로 돼있어요. 그런데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내리시고 사랑하는 차원에서 그때마다 때리시는 겁니다. 꼬리 열두 개 되는 여우야, 너. 그러면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맞습니다. 여우 맞습니다. 이러면 아무 문제없어요. 주께서 열두 꼬리를 보여주신 것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도 바꿔야 돼요. 이 여시, 김 여시로. 평소에 여시처럼 살지 않습니까. 주님 이름 빌려서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주님한테 모든 책임 다 맡기고 지는 하고 싶은 것 다 하잖아요. 주님 넉넉하게 용서해주시겠지. 나는 내 성질대로. 그게 여시잖아요. 그런 여시 짓이 우리한테 꼭 필요한 일이에요. 그럼 여시 짓을 안 하면 되지 않느냐? 우리는 여시 짓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아주 교만한 여시 짓을 나올 수 있는 상황으로 주께서는 공을 몰고 가듯이 게임하듯이 요리조리 몰아넣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나 우리나 사실은 여우라는 점에서 달라질 게 없어요. 서로 얼굴이 달라서 거울을 보게 되면 네 얼굴, 내 얼굴, 화장발 따라서 얼굴이 달라 보이겠지만 표면효과로 십자가 효과로 거울 보게 되면 둘 다 십자가 앞에 죄인이에요. 그래서 그런 설교했잖아요. 교회란 죄인들의 모임이라고. 사방에 거울로 해야 돼요. 십자가 거울을 달아야 됩니다.
<용쟁호투>라는 영화가 있어요. 이소룡이 마지막 장면에 사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서 싸우는 거예요. 그런 곳이 어딥니까?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에 갔다 합시다. 우리는 오직 한 말밖에 없습니다. 주여,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얀 옷을 입게 된 것은 예수님이 천국을 이루기 위해 흘린 피 때문에 제가 감히 하얀 옷을 입고 이곳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시커먼 인간을 하얗게 만드신 것은 주님의 공로입니다. 이게 바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그 천국이에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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