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과 완성 160204
과정과 완성 16020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한윤범(IP:221.♡.126.24)
16-02-06 17:15
201602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5장 20절부터 하겠습니다. 20절부터 한두 절 읽어볼게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그렸으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왔으되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이들이 지금 뭘 만들고자 하느냐 하면 성막과 성막이 운영되는 데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만들고 제사장 복장을 만들고자 자원하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게 되면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물건이 될 수 있는지 그것을 생각해봐야 돼요.
이런 말이 있어요. 개체는 개념보다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개체,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설명한다고 칩시다. 사람들이 설명한 것을 다 끌어 으면 그 개체를 온전히 다 설명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없지요. 길에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데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백 명이 이야기하고 그걸 다 끌어 모으면 아무리 백 명이 아니라 천 명이설명해도 그 사람의 진실을 설명할 수 없겠지요. 원래 있는 개체는 그 개체에 대해서 이야기해봤자 다 끌어 모아봤자 그 개체를 대신할 수 없고 개체와 일치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성막이 하나님이 원하는 성소이겠느냐 하는 겁니다. 아니지요. 쉽게 말해서 노아 당시에는 노아가 방주 만들면 충분했지요. 그 당시 홍수 피하는데 충분했습니다. 그럼 노아가 하늘나라 가는데 방주로서 충분했겠느냐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았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거잖아요. 그럼 노아가 방주 만든 것은 과연 헛수고였느냐는 문제가 또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만들지 말지. 그러면 안 만들면 구원되느냐 하는 겁니다.
성막을 만들고 성소를 만들 때 사람들이 자원해서 목걸이와 각가지 자기의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드릴 때 그 사람들의 의도와 목적이 있을 거예요. 이것 드려서 성막 만들게 되면, 21절에,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그 다음에 성막을 짓기 시작했지요.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과 같은 거예요. 성막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성막을 지으라고 해서 짓기 시작했는데 그 성막이 본인들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온전히 구원이 안 되지요. 그러면 그들이 헛짓을 한 것이 돼버립니다.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제가 정리한 게 뭐냐 하면, 아무리 개념이 많이 있더라도 성막은 이럴 것이다, 해도 원래 개체를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개체를 진짜 성막이라 하고, 개념을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말로 하면, 가능성이죠. 인간의 가능성을 집대성해서 만든 성막은 진짜 성막, 이건 인간으로서는 가능한 게 아니고 불가능해요. 참 된 성막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손수 만듭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35장 20절에서 성막 만들라는 취지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으로 결론 나왔습니다. 만들어봐라. 그게 너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일단 만들게 되면, 그것이 왜 불안정하며 왜 완성품이 아닌가? 온전히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개체에서 마달하는지 네가 만들어봐라. 만들어보고 그때 가서 내가 알려줄게. 이런 취지로 그들로 성막을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일종에 하나님에 의한 초청이죠. 성막 만들라는 명령 자체가 인간들에게 미끼를 던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막 만들면 성막에서 내가 너와 만나리라. 벌써 인간들은 그 말만 듣고 이미 희망이 생겼습니다. 성막에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성의와 정성을 다해서 성막을 만드세. 그렇게 하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만남의 장소를 만들자. 그걸로 그 당시 사람들은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어요. 하나님, 두 번 다시 딴 소리하기 없기입니다. 성의를 다해서 시킨 데로 했으니까 저를 구원하는 것에 뒤에 딴 소리하기 없기요, 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진짜 성막이란 제가 나중에 지나가서 진짜 성막이라 하지만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은 개체라든지 진짜 성막은 없는 겁니다. 성막 만들라. 예, 만들겠습니다. 끝난 문제에요. 자기가 만든 성막이 가짜일리가 없지요. 왜? 시킨 데로 했으니까. 시킨 데로 금가락지, 귀한 패물 바쳐서 성막 만들었으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고 요구한 바다. 그것도 그냥 드리는 게 아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다 드렸으니까. 이렇게 집대성한 것을 이게 아니야. 내가 이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내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 어디가 문제입니까? 가능성이 문제인데요. 인간이 성막을 만들면 행위가 나오고 행동이 나오겠지요. 그 행동과 행위 안에 가능하다는 취지와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잘만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백 퍼센트를 이룰 수 있는 희망으로 행동과 행위에 나설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나중에 그들이 만들고 난 뒤에 그게 아니라고 주께서 판정을 내려버리면, 이것은 성막을 제대로 못 만들었다, 어설프게 만들었다, 제대로 성의 표시하지 않느냐? 이걸 닦달하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어떤 걸 지시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없는 존재가 너라는 존재야. 이걸 지적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성막을 만들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개념을 아무리 집대성해도 진짜 개체를 따라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개체는 개념보다 크다는 말입니다. 3+5=8이라 해놓고 여기에 대해서 시험 칩니다. 3+5=? 문제 푸세요, 할 때 학생들이 3+5=8이라고 풀었습니다. 이 반의 산수시험을 빵점입니다. 이러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정답 맞췄는데? 정답 8, 맞는데? 3+5=8이잖아요. 그래서 인간들이 시킨 데로 해서 정답이잖아요. 이 말이 뭐냐? 나도 선생님 시킨 데로 정답을 낼 수 있는 그러한 자질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실체 앞에서는 이게 정답이 아닌 오답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오답인데 자꾸 인간들은 오해해서 정답 낼 수 있다고 스스로 자기를 꾸미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라.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게 오답이라고 내리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만있겠습니까, 반발하겠습니까? 선생님이 3+5=8이라고 해서 8이라고 했는데 이게 왜 오답이냐고 한다면, 나는 3+5=8이든 9든 관계없이 이중에서 선생님이 아무리 가르쳐도 우리는 선생님이 원하는 답변을 낼 수 없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 들어봐라. 아무도 없는 거예요. 내가 원했던 정답은 바로 그것이다. 너희들의 상한 심령이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가능성으로 위장하고 꾸며온 거예요. 시킨 데로 하면 천국 보내주겠지.
정답은 뭐냐 하면, 천국 가겠다는 것이 오답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전체를 모르고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나온 오답이 되는 겁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천국 가면 된다는 자기밖에 모르는 심보가 결국은 성경 보면서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손들고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답이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대구강의해서 했는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주체라고 인정하려면 브라질에서 퍼지고 있는 지카 바이러스가 내 말 한 마디로 다 없어져야 해요. 그 정도 위력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울산 앞 바다에 파도가 넘실거리잖아요. 내가 잔잔하라고 하면 잔잔해질 수 있는 자격자가 유일한 주체자입니다. 우리가 바다에게 잔잔하라고 하면 까불지 말라고 소금기를 퍼부을 거예요. 네가 뭔데 감히 바다를 명령하느냐 말이죠.
인간이 주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능성 범위 안에서 주체라고 행세할 뿐이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서는 전혀 아무 데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자기 욕망 외에는 쓸모없는데 왜 태어났습니까?
하나의 개체를 정확히 규명하려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연관성이 있어야 됩니다. 해가 졌다. 해가 지는 것과 식물이 자라는 것과 관련성이 있어야 돼요. 그걸 우리는 몰라요. 그러면 우리는 무식한 사람이 됩니다. 무식한 채 기껏 학교에서 3+5=8이라 하니까 정답을 알았다고 하는 거예요. 정답이 되려면 그것만 정답이 아니고 전체를 다 조명해볼 때 그 전체가 정답이고, 그 한 쪽을 떼어내도 정답이 되고, 이렇게 정답이 돼야 돼요.
치즈 피자가 있으면 한 구석을 떼어내도 치즈가 있어야 되고 중앙을 떼어내도 치즈가 있어야 되지 자기만 있고 나머지는 없는데 치즈 피자라고 우기는 것은 전체를 모르는 괴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천국을 간다는 것은, 네가 천국에 대해서 전부를 알아? 모릅니다. 모르는 데를 왜 가? 이상하네. 모르면서 왜 가는데? 그걸 모른다는 것은 거기에 들어가는 방법도 제대로 모른다는 게 돼요.
물론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지요. 네가 예수에 대해서 알아? 모릅니다. 다 모르지. 다 알아야 구원받아. 조금 알아서 못 가. 네가 아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이 모순된다면 어떻게 할 건데? 네가 아는 예수는 물 마셔도 천국 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좀 더 알아보니까 물 마셔도 못 간다. 이렇게 서로 대치된다면, 이걸 해결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안 되지요.
쉬운 예를 들어서 노아 방주가 홍수에는 견딜 수 있었지요. 그런데 노아 방주로 나중에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질 때도 됩니까? 지붕 홀랑 다 타버려요. 방주가 물에는 되지만 장차 불에는 안 되잖아요. 그러면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전체를 다 커버할 수 있어야 되지요. 난 물에서는 커버됩니다. 넣어주세요. 그건 오답이에요. 정답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출애굽기 35장은 구약입니다. 성막 만들라는 대목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게 끝인 줄 알았어요. 마치 노아가 방주 만들면 곧 구원되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성막 만들라고 해서 아낌없이 패물, 결혼반지 다 빼서 그것도 억지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 자발적으로 갖다 바쳤습니다. 그래 성막 만들어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좋은 날 보았습니까? 성막 만들었다고 이스라엘 멸망 안 당했습니까? 나중에 성막이고 성소고 성전이고 다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성막에 있던 언약궤는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목사님,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문제냐고 묻는 게 잘못이다. 왜? 처음부터 문제였다. 성막 만들었으니까 주께서 이제 도와주겠지, 우리와 함께 하겠지, 라는 오답, 잘못된 아이디어를 기껏 성막 만들었다고 써먹겠다는 심보가 교만한 심보였다. 그게 자만스런 심보였던 것입니다.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 중에 반발이 나올 겁니다. 그러면 만들어도 소용없을 걸, 만들어도 가짜라면 왜 주님께서 성막 만들라고 했는가? 그럼 잘못은 주님한테 있네. 우리한테는 없네, 라고 이야기하실 거예요.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 많습니다. 시킨 데로 했는데 처음부터 성막 만들라고 한 취지는 뭐고, 이유가 뭐냐? 누구 약 올리는 거냐. 왜 그렇게 했느냐, 라고 궁금할 거예요.
저는 이것을 두 자로 먼저 이야기할게요. 표면. 네 자로 늘이면, 표면효과. 말은 어려운데 쉽게 말하면, 저는 헌금하면서도 돈을 내지 않으면 안 될까? 돈이 아깝다. 이 돈으로 다른 것에 쓸 수도 있는데, 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그렇게 묻는 사람 없어요. 바보 되려고 묻습니까. 다른 사람 다 그런데.
그럴 때 저는 이렇게 합니다. 표면효과입니다. 내가 어느 정도로 돈에 집착했는지는 돈을 내면서 내 속에 있는 죄악성이 효과를 발휘하는 거예요.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본인이 스스로 알게 되면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운동화 신고 운동하게 되면 발 냄새납니다. 이야기를 그렇게 하게 되면 실례가 아닌데 ,신발 벗고 냄새 맡아보세요, 한다면 이건 너무 심한 이야기지요. 하나님이 왜 그런 짓을 해요. 여러분, 성막 만드는 것이 구원하지 않습니다. 말로 끝나면 되는데 스타킹 벗고 냄새 맡아 보라는 부질없는 짓을 합니까? 표면효과라니까.
아는데 어느 정도인지 실제로 해보세요. 다시 말해서 여러분, 죄인이라는 말 안 믿습니다. 본인이 어느 정도 죄인인지 하루하루 삶을 통해서 그 냄새를 맡아보세요. 이게 말 하는 것은 믿지 않지만 효과는 믿으시는 주님의 방식입니다. 주여, 부족합니다. 죄인입니다. 그런 기도하지 말고 돈 한 푼 때문에 이웃과 싸우고. 그게 기도를 대신하는 거예요. 옆집과 돈 몇 푼 때문에 싸우는 것은 일종의 개체고, 기도원에서 부족하다고 기도하는 건 개념에 불과하거든요.
신앙생활은 그냥 사는 거예요. 무슨 효과? 표면효과. 그냥 사는 겁니다. 주님 사랑한다고 해놓고 자기 아이보다 덜 사랑하잖아요. 시집도 안 갔는지 아이 낳아보지 못한 노처녀는 교회 와서 자기 아이만 쳐다보고 말씀 안 들으면 막 화내요. 맨날 유아실에서 저희끼리 잡답하고 밥 먹고 그냥 가고. 왜 그런 짓 하느냐고 하는데 그건 본인이 아이를 안 낳아봐서 그래요. 죄의 발 냄새를 충분하게 안 맡아봐서 그래요.
그래서 시집 갈 때 되면 가야 돼요. 그것도 죄니까. 시집가는 죄를 지으시라고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어요. 시집을 간다고 해서 더 죄짓는 건 아니다. 말 뉘앙스가 이상하잖아요. 시집가려고? 죄지으려고? 시집간다고 꼭 죄짓는 것만은 아니지, 이런 뜻이거든요. 그 바탕에 깔려있는 게 뭡니까? 시집가면 또 시집가는 죄를 짓겠구나. 그래도 가고 싶다고? 그러면 시집가는 것이 죄만 짓는 건 아니지, 라고 껄껄거리면서 그냥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봐. 가기 전에는 주를 어떻게 섬길까 하다가 가고 나면 남편을 어떻게 섬길지 그것만 생각하지.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뭐냐?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줘놓고 뺏는 것은 더 힘들어요. 차라리 개체를 모르고 개념만 알면 쉽게 제자리 오는데 일단 해놓고 죄짓는 맛을 봤는데 죄짓지 말라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다시는 내가 술 먹으면 개라고 하는데 그 개, 영원토록 죽을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 말씀이 에베소서 2장 7절에 나옵니다. 첫째 시간부터 어렵게 하겠습니다. 상당히 난해한 말씀이 나오는데 쉽게 설명해드리려고 애쓰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여러 세대에 반복해서 나타내려면 어떤 형태를 가진 것이 되면 안 돼요. 형태로 고정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형태는 과거 그때로 끝나요. 이순신 장군이 되풀이 된다는 말은, 이순신 장군이 귀신 들린 박수무당이나 하는 소리지 다른 사람은 성립 안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1598년에 죽었잖아요. 내년에 이순신 장군이 살아서 돌아다니면 유령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반복이 안 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장 7절에 보니까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함이라고 돼있지요. 도대체 그게 뭐냔 말이죠. 지금 우리가 출애굽기 35장에서 성막 만들지요. 한 번 만들었으면 성막이 계속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오는 세대에 이십 년, 백 년 후에도 계속 성막이 되겠어요? 이게 안 돼요. 성막은 성전으로 바뀝니다. 어떻게 바뀌는가? 표면효과가 죄가 되거든요. 이 죄를 자비로 용서하시면서 성막이란 표면효과 속에 처음부터 들어있었던 성전이 있었어요. 성전은 감춰진 거예요. 성전은 감춰진 것이고 성막은 성전의 예고편으로 보면 돼요.
사람들이 처음에 성막 만들 때 이건 예고편이라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았어요. 성막 만들면 내가 함께 있을게. 사람들이 난리 났지요. 좋아서.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장을 스스로 제안했다. 그렇다면 시킨 데로 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성막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가능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성심성의껏 그들은 성막을 다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다시는 두 말 하지 않기, 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제 강의에 의하면 성막 만드는 것은 표면효과지요. 표면이 있다는 말은 안에 심도, 깊이 있는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잠겨져있다.
남녀가 6개월 사귀고 결혼했습니다. 이런 남자 같으면 결혼하기 힘들어요. 지금 내가 보기에 당신이란 여자는 정말 훌륭하고 신부 감으로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내가 당신한테 미천하고 나한테 과분합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되는데 하지만 결혼하고 난 뒤에 당신이 어떻게 바뀔지 제가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이러면 그 사람은 결단성이 없어서 간만 보고 결혼하기를 계속 주저하게 되는 거예요.
결혼은 일을 저지려야 돼요. 이건 상당히 위험한 비윤리적인 발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언제까지 간 보고 있습니까. 지금은 좋은데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백일 만나서 초콜릿, 사탕 주고받으며 좋은데 만난 지 일 년 됐을 때 명품 가방 주는지 안 주는지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명품 가방 사주면 여자 쪽에서 친구들 보니까 마음 변한 싸늘한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더라. 일 년 말고 오백 일 될 때 봅시다. 이러면 남자가 짜증나서 때려치우자, 이렇게 돼요. 그러다 나중에 팔십, 구십 돼서 간만 보다 요단 강 건너가면 되겠습니까? 안 되잖아요.
결혼할 때는 일단 지금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지금 내가 느끼는 봐 당신의 전부라고 믿고 모든 걸 걸고 결혼해야지요. 왜? 결혼이 구원이 아니고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그럼 결혼은 뭐냐? 표면효과입니다. 이제 살아가다보면 차차 그 사람의 숨겨진 속성들이 다 나오겠지요. 자기는 안 나옵니까? 본인도 마찬가지로 같이 나온단 말이죠. 내밀한 것도 있을 수 있고 결혼할 때 숨긴 것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빚이 2억 있는데 당신이 벌어서 갚아 줘. 이제 와서 결혼을 무를 수도 없고 같이 살지만 빚은 네가 알아서 해. 이렇게 나올 수도 있고.
그걸 또 미리 캔다고 결혼하기 전에 서로 좋아하면 되는데 흥신소 가서 뒷조사해서 현재 빚은 얼마며, 유전병은 없는지 다 계산하고 사돈의 팔촌까지 호적등본 다 떼보고 월북한 사람 없는지 다 조사하고, 돈 거래는 명확한지. 아이고, 참.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면 돈 벌어서 배낭여행이나 하고 지 혼자 셀카 찍으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요. 결혼한 사람은 그게 부럽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일을 닥치게 하는 것은 원래 진짜 인간은 근원적으로 죄인인데 사람은 자꾸 자기가 그나마 잘났다고 우기니까 얼마나 잘났는지 중심 되는 죄와 연결시키기 위해서 인생을 하루하루 살게 하는 겁니다. 내가 결정할 때는 잘했다고 했는데 돌아서보니 이런 허점, 이런 실수, 이런 미흡함이 있구나. 도대체 나의 정체는 뭐냐? 그건 중심과 관련돼있어요. 중심이 뭡니까? 십자가 피였잖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성경에서 그렇게 많이 나오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그 중심 찾아가는데 중심을 찾아가면서 주께서 일으킨 어떤 실제적인 인생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는 그 인생을 살 생각은 안 하고 그걸 성경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 나는 죄인이다, 십자가 앞에 나는 죄인이다. 시험에 나온다. 3+5=8이라고 백날 외운들 구원되겠습니까?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다. 고백합니다. 구원해주세요. 어림도 없어요. 그거는 지식이고 꼼수에요. 그것 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주님이 내 인생에 깊숙이 개입해서 왜 나는 이익 되는 것만 달랑 챙기고 바깥에 대해서는 알 생각도 안 하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한다는 그것에 대해서 선뜻 발 들여놓기를 힘들어하느냐? 나만 편하면 되지, 나만 행복하면 되지, 왜 그런 쪽이냐? 그게 바로 오답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정리해봅시다. 표면효과는 죄인데, 나는 역시 잘났다. 나는 역시 정당하다. 성심성의껏, 여기 보세요. 얼마나 정당한지. 마음이 감동된 자가 아낌없이 재물 바쳤고, 아낌없이 헌금했고, 헌물 했고. 목표가 있어요. 완전한 완벽한 성막만 나온다면 마치 노아가 방주 만드는 것처럼 그 시대의 방주로서 성막을 열심히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은 어디까지나 표면일 뿐입니다. 그 다음 차례는 그 표면이 전부가 아니고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서히 알아가야 되죠.
카스텔라에서 제일 맛있는 부분이 밑에 노란 것 말고 새카맣게 누른 부분이죠.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인생을 살면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시는 이런 죄를 안 범해야지, 이러거든요. 그건 큰 실수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죄짓고 실수하는 것은 그러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이건 어쩔 수 없어요.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돼서 딸 때려죽여서 몇 달인가 놔둔 것, 남들은 다들 욕하는데 본인은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목사지, 자식 교육 잘못시켰다면 신학교수 안 되지, 개척교회하고 있으니까 교인들한테 자기 실생활도 말씀과 일치된 것을 보여야지, 자기 관리를 해야 되는데 그 자체가 나는 바르게 살아야 되고 목사답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그 목사는 몰랐던 거예요. 아무리 표면으로 덮어도 나는 십자가에서 아이를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을 때려죽여도 합당한 죄인인 것을 주께서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주여, 이런 죄인 감사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실수로 때려죽여도 이것은 내가 죄인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당당할 것까진 없지만 이걸 인정해줘야 돼요.
따지고 보면 그 목사의 첫 번째 마누라가 암으로 안 죽었으면 그런 일 없었을 거예요. 자기 아이를 때려죽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남의 아이니까 때려죽이잖아요. 물론 자기 아이라도 죽이는 사람도 있긴 있지만. 계모니까 동조해서 때려죽인 거예요. 남편 출세에 지장 있을까 싶어서. 그런 환경을 주님이 조성한 겁니다. 왜 조성했습니까? 죄인 됨을 알리기 위해서 조성한 겁니다. 아직까지 안 때려죽인, 아니 손 한 번 안 댔으니까 나는 의인입니까?
표면의 다양성이 있더라도 환경 따라서 어떤 사람은 피자 표면, 어떤 사람은 카스테라 표면, 어떤 사람은 곰보빵 표면, 울퉁불퉁한 인생, 편안한 인생, 재벌 3세가 되든, 가난한 집에 태어나든 표면은 달라서 한 결 같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성막에 보탬이 된 사람은 우쭐거릴 것이고 돈 없어서 패물 못 바친 사람은 기죽을 거란 말이죠.
여기서 이스라엘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강자는 헌금 할 수 있는 자, 약자는 헌금 할 돈도 없는 자. 돈 없는 자가 약자가 아니고 돈 있는 자가 강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꺼이 드릴 수 있는 그런 자가 갑질하고 정신적인 폭력자가 되고 돈 내고 싶어도 몇 푼 내야 소용도 없는 그런 것이 약자가 되는 거예요.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서 누가 힐난하고 비난했습니까? 그 당시에 바리새인, 돈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놀렸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이 과부가 한 동전 두 닢이 부자가 낸 것보다 더 많이 냈다고 했지요. 이게 사회적인 차원에서 가난한 자가 약자가 되고 돈 많은 자가 부자가 되고 도둑놈이란 뜻이 아니에요. 많이 헌신한 자가 도둑놈이 되는 거예요. 주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고 많이 희생한 인간들의 도둑놈이 되고, 차라리 술 먹고 세리와 창기가 하늘나라에 가까워요.
경제적 상황으로 약자와 강자로 나눈 것은 성경을 경제논리로 해석한 것밖에 안 됩니다. 이건 흔히 말하는 해방신학이라는 엉터리 신학에 불과합니다. 그걸 보면 사람들 가슴 속에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마치 자동적으로 의인되는 양 여기는 그 인간의 갑질 그것도 하나님이 죄를 드러내는 표면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쉽게 갑시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렸습니다. 성막을 만들라. 예를 들면 의자가 삐꺽거릴 때 유력한 부자가 있어서 자기가 한다고 나선다면 그게 바로 교회에서 갑질하는 인간이란 말이죠. 그러면 새순교회에선 아무도 안 하는 거예요. 의자에 앉다가 자빠지든 엎어지든 아무도 안 해. 에이씨, 내가 해야지.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아주 평화롭습니다. 갑질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 자체가 자원해서 하든지 스스로 하든지 인간의 마음은 썩었습니다. 속에 있는 썩은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때 저는 장갑의 속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예를 드는데 살림을 살아본 사람은 다 알아요. 고무장갑 벗을 때 뒤집어져서 안이 밖이 되고 바깥이 안이 돼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드러내고 내가 했다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가지고 노시는 겁니다. 명령을 함으로써. 그 당시 사람들은 얼씨구나 하고 이래도 하나님이 복 안 주면 하나님이 나쁜 거야. 그래서 그걸 함으로써 합당하게 정당하게 자신은 주의 백성인 양 당당하게 행세깨나 했을 겁니다. 해도 무슨 소용 있어요? 성막 만들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24절에 보면, “무릇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자는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무릇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자는 가져왔으며”
이걸 써보겠습니다. 필요한 것. 누구에게 필요하지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백성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 되지요. 이야기가 깔끔하게 끝났지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구원받고 복을 받는 것은 너희들이 만든 것, 낸 것으로 복을 주는 게 아니에요. 이걸 분명히 합시다. 하나님이 우리가 준 것을 봐서 복을 주는 게 아닙니다.
복이란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근거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에게 복이 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완성하게 되면, 완성된 그걸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무상으로 복을 주고 천국을 주고 생명수를 주고 영생을 주시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그런데 출애굽기 35장에 보면, 주께서 성막에 필요하다고 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아낌없이 드렸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필요하다고 오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뭐냐? 우리는 자신이 의롭고 정당함으로 살고 싶지 자신의 약점을 내 코앞에 드러내는 그런 필요에 대해서 아예 사절하지요. 우리는 그런 그림자와 꼬리를 뒤에 감추길 원하지 그 음흉한 꼬리를 내 앞에 두는 것은 우리가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한테 이런 꼬리가 있다고 우리 앞에 두는 것은 이게 나한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잘난 체하는 너에게 꼭 필요한 조치를 내가 내린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복 받은 민족이에요. 세상에 어느 민족이 율법 어겼다고 대번에 손 올려서 때리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다른 이방민족은 묵인했다, 방치한 걸로 돼있어요. 그런데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내리시고 사랑하는 차원에서 그때마다 때리시는 겁니다. 꼬리 열두 개 되는 여우야, 너. 그러면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맞습니다. 여우 맞습니다. 이러면 아무 문제없어요. 주께서 열두 꼬리를 보여주신 것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도 바꿔야 돼요. 이 여시, 김 여시로. 평소에 여시처럼 살지 않습니까. 주님 이름 빌려서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주님한테 모든 책임 다 맡기고 지는 하고 싶은 것 다 하잖아요. 주님 넉넉하게 용서해주시겠지. 나는 내 성질대로. 그게 여시잖아요. 그런 여시 짓이 우리한테 꼭 필요한 일이에요. 그럼 여시 짓을 안 하면 되지 않느냐? 우리는 여시 짓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아주 교만한 여시 짓을 나올 수 있는 상황으로 주께서는 공을 몰고 가듯이 게임하듯이 요리조리 몰아넣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나 우리나 사실은 여우라는 점에서 달라질 게 없어요. 서로 얼굴이 달라서 거울을 보게 되면 네 얼굴, 내 얼굴, 화장발 따라서 얼굴이 달라 보이겠지만 표면효과로 십자가 효과로 거울 보게 되면 둘 다 십자가 앞에 죄인이에요. 그래서 그런 설교했잖아요. 교회란 죄인들의 모임이라고. 사방에 거울로 해야 돼요. 십자가 거울을 달아야 됩니다.
<용쟁호투>라는 영화가 있어요. 이소룡이 마지막 장면에 사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서 싸우는 거예요. 그런 곳이 어딥니까?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에 갔다 합시다. 우리는 오직 한 말밖에 없습니다. 주여,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얀 옷을 입게 된 것은 예수님이 천국을 이루기 위해 흘린 피 때문에 제가 감히 하얀 옷을 입고 이곳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시커먼 인간을 하얗게 만드신 것은 주님의 공로입니다. 이게 바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그 천국이에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221.♡.126.24)
16-02-06 17:15
20160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과정과 완성
(강의:이근호 목사)
35장 30절 봅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불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홀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하나님의 신과 성령의 차이점이 뭐냐? 참, 수백 번 들었던 질문이고 명쾌하게 답변한다는 게 상당히 힘든 것처럼 보이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 자체가 어떤 경우가 질문이 되느냐 하면, 성경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성경 밖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훑어보고 나오는 질문이에요. 여기는 성신인데 신약에서는 성령이냐? 질문 자체가 사실은 성경 밖의 어떤 자리가 없습니다. 성경 밖에서 성경 전체를 조명할 수 있는 자리는 인간에게 허용하지 않았어요. 그럼 성경 안에 자리 잡으면서 성신은 뭐냐, 성령은 뭐냐, 이렇게 질문이 돼야 되거든요.
성신은 과정이고 성령은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둘 중에 어느 것 할래, 하면 사람은 역시 마지막 완성되는 것으로 열매 따먹듯이 따먹고 싶은데 완성을 가질 수 있는 위치는 과정 밖에서는 따먹을 수 없어요. 과정 안에서 비로소 완성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완성과 상관없는 존재지요. 인간은 완성을 탐내서도 안 되고 그리워해서도 안 되고 가져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럼 인간은 뭐냐? 완성되신 분의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물결에 휩쓸리게 되면 그걸로 족합니다. 인간은 과정이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되신 것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으로 우리들이 동원된 겁니다. 동원예비군 있지요.
최후의 승리는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이런 구호를 위하여 우리는 최후의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과정 속에 들어가야 돼요. 이것은 저는 완성이 되는 욕심을 포기했다는 고백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느 인간치고 나는 누구누구의 쫄다구, 누구누구의 과정으로 족하다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최후 승리가 나의 승리로 같이 체험할 수 있기를, 그것이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보면서 참아야지, 언젠가 빛 볼 날 있겠지, 이렇게 버티는 게 인간이지 나는 그냥 과정으로 쓰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걸 만족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그러나 실제로 피라미드 보게 되면, 운동회에서 피라미드 만들 때 밑에 열 사람부터 해서 나중에 제일 위에 꼬마가 올라가서 깃발 흔들잖아요. 사진은 제일 위에 아이만 나오고 나머진 나오지도 않지요. 그래도 좋다고 하는 그 사람은 완성의 과정에 포함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신을 받았다는 말은, 네가 완성체가 아닌 것을 일찍이 짐작하고 그걸 수용하라. 나는 널 소모품으로 사용할 테니까 됐나? 그래도 좋아? 이것이 성신 받은 마음입니다. 너, 성신 없지. 난 성신 받았지. 난 잘났어. 이건 성신 받은 게 아니에요. 잘난 내가 최종 완성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성신 받은 내가 마지막 최종적으로 자랑 질하고 싶은 내용물이 되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신을 받게 되면, 나는 누구누구의 쫄다구다. 나는 손해만 보고 소모품이고 그분만 잘된다.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셨어. 나는 그래도 좋아. 이렇게 돼야 그 사람은 이미 과정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 성신이 나왔다는 말은, 사실은 우리가 성신이 보여주는 과정 속에 이미 합류가 있을 경우에만 최종적인 완성인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성신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위치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구약이 아니고 우린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걸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에게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 오지요. 성령이 올 때 이방인이 뭐라고 합니까? 그렇지, 내가 기다렸어. 웬 일이야. 이런 수가 다 있어. 놀랍다는 표현을 하고 있지요.
어디 나오느냐 하면,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성신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보태보겠습니다. 16절에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돼 있잖아요.
이들이 환상 자체, 꿈 자체, 그리고 예언하게 된 그 자체를 그들은 종결적인 것, 최종적인 것으로 좋아하질 않아요.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어떤 분이 완성했기 때문에 그분 덕분으로 내가 예언을 하게 되고 꿈을 꾸게 되고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거예요. 성신을 통해서 성령 받은 것은 구약부터 내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성령부터 완성품부터 먼저 받아놓고 자신이 받은 위상과 위치가 바로 구약 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던 그들이 했던 행위를 자기들은 완성되고 난 입장에서 그때 성신 받은 사람들의 역할을 이제 이방인들이 하게 되는 겁니다.
물건 주고 돈 받는 게 낫습니까, 장사할 때 돈부터 챙기고 물건 주는 게 낫습니까? 우선 돈부터 챙겨놓고, 지금 물건 없는 데요? 돈 먼저 드릴 떼니까 물건 오게 되면 우리부터 줘야 됩니까? 이게 편하지요. 그런데 외상 깔아놓으면 불안해서 안 돼요. 일주일 후에 줄게요. 이사 가면 어떻게 할 건데? 그래서 보증금 받잖아요. 하나님이 알아서 보증금이라고 미리 주신 게 성령이에요. 그 말은 우리가 원한 걸 준 게 아니에요. 여기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성령 받기를 원했습니까? 오순절 오기를 원했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온 거예요. 기도한 것은 유대인들이에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온 것은, 이방인들은 자기 하나님이 따로 있어요. 추상적이고 뭔가 천지를 만들었는데 구체적이지 않고 착하게 살면 복 주고, 나쁜 일 하면 벌주고, 바르게 살면 행운을 가져다주는 그런 우상이 하는 이방종교에요. 진짜 여호와가 아닙니다. 언약이 없거든요.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앞장세워서 하시는데 이방인들은 십일조고 십계명이고 없어요. 그냥 맹탕이라, 그냥 살아요. 에티오피아 내시가 언제 주를 알았겠습니까. 그냥 성경보다가 성령 받아서 즉석에서 세례 받고 새 사람 됐지 않았습니까.
참, 이런 게 상당히 어려운데요. 에베소서 2장 7절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이 과거 어느 시점인지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과거 시점은 반복이 안 됩니다. 아까 이순신 장군 이야기했지요. 이순신 장군 살아 돌아오면 기겁할 짓입니다. 죽은 김대중 대통령, 안 오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오는 세대에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반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과 효과가 계속해서 은혜로 말미암아 반복해서 주어진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도의 신앙생활이라 할 때 사실은 정확하게 말해서 성도의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왜 없느냐? 날마다 밟아 죽이는데 무슨 나라는 게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만들어내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매일같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우리는 뭘 하나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러거든요. 딸이 뜨개질 못하면 엄마가 가르쳐주잖아요. 좀 가르쳐주면 엄마 귀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안다니까. 그만 해.
우린 뭘 하나 알려주면 그 다음에 알아서 자기가 스스로 반복시키는 그런 버릇이 있어요. 이건 예수 안이 아니고 자기 안이에요. 자기 안에서 자기가 원하는 자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이 옳은 것이다, 하면 그 다음부터 예수를 본인이 유지하는 방식으로 자꾸 방식을 고안해냅니다. 그때 내가 기도해서 은혜 받았지. 앞자리 앉아 은혜 받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반복시키는 겁니다. 계속해서 오는 세대에 내가 나를 관리하고 조절해서 스스로 인정할 만한 믿는 사람으로 자기를 강제하고 자기를 컨트롤하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이란 연대기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신이 오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행세가 그겁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완성품이 되고자 한 거예요. 그런데 성신은 완성이 아니고 과정이라 했지요. 인간아, 네가 스스로 완성품 되려고 아예 애초에 마음먹지 말라. 그건 인간된 도리가 아니다. 스스로 잘났다는 것을 존재 증명하는 것이 인간의 임무가 아니라는 겁니다.
참고로 어제 수요일 설교 들어보시면 나올 거예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면 같이 살면 되잖아요. 하나님도 알고 나도 알게 되었으니까 잘 됐네. 사이좋게 살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추방하는 이유가, 네가 선악을 알게 되는 일에 나와 함께 했기에 나가라. 같이 살자, 로 해야 자연스런 서술이 되는데 선악을 알았나? 나가라.
이게 신의 세계 내부가 갈라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와 악마의 세계, 선악을 아는 세계가 두 조각나서 새로운 금지의 경계선이 마련한 작열한다고 이렇게 제가 설명했잖아요. 금지가 없는 것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금지 없는 세계는 주의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금지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완성품을 원합니다. 완성품을 탐을 냅니다. 마귀가 그걸 부추겼지요. 금지를 넘어서면 완성품을 얻는다.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 네가 언제까지 과정에 머물 것인가? 너도 완성품이 되어야지. 그게 네가 추구할 최후의 목표, 존재의 의미야. 너는 신이 될 수 있는 존재야. 마귀가 거짓말 한 거예요.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어요. 마귀는 될 수 있다고 한 거예요. 금지만 넘으면 된다. 하지 마라를 넘어서게 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커튼을 쳐놨습니다. 이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은 이런 오해를 할 수 있어요. 커튼 뒤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할 거예요. 그러나 이 교회 사람은 다 알지요.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커튼을 괜히 쳐서 뭔가 있는 것처럼 자꾸 유발되는 거예요. 주께서 금지해놓으니까 저것만 젖히면 뭐 있는 줄 알고. 아무것도 없어요. 금지를 젖힌 그 자체가 금지 뒤에는 바로 마귀가 있었던 거예요. 완성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마귀가 만들어놓은 늪이 있을 뿐이에요. 피조물로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저주와 죽음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했어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음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죽음을 경험해 본적 없잖아요. 마귀는 딴 소리하거든요. 금지를 넘어서면 신이 될 것이다. 안 죽는다 이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둘로 쪼개놨어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어놨어요. 참 꼴좋게 됐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알려줘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 될 때까지 우리의 욕망의 열차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계속 부지런히 최후의 신이 될 때까지 달리고, 달리고 있어요. 실은 그걸 안다 할지라도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죽음 뒤에 자살한 자에게는 지옥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살하고 싶어 해요. 그놈의 더러운 심보, 희한한 심보지요.
자살하면 지옥 가는 걸 누가 알려줘도 지옥이 있음을 알아도 심지어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는 줄 알면서도 그 지옥에 가고 싶어. 지옥이 어떤지 구경 한 번 해보고 싶어. 우리 심보가.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마저 다 점령하고 싶고 장악하고 싶어요. 왜? 그게 나니까. 그게 자기 존재 증명이라는 겁니다. 나는 어떤 이유라도 거칠 것이 없고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모든 행동과 의지를 총동원해서 그걸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네요. 병들어서 그래요. 날 때부터 이단이라서 그래요. 스톱이 안 됩니다. 이것까지가 없어요. 네가 뭔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신을 보내서 너는 누구누구의 노리개며, 누구누구의 소모품이며, 누구누구를 위한 자료에 불과하고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죠. 그러면 성신 보낸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이 환영했겠습니까? 성신 받아서 우리는 과정에 불과하고 완성을 하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람을 우대했습니까? 죽였지요. 아벨을 죽인 걸 보세요. 가인이 제사 드리는 것은 자기 존재 증명이었습니다. 신이여, 내가 드린 제사를 안 받기만 해봐라. 이런 거예요. 왜? 내가 했으니까. 제사 드리는 내가 나로서는 완성이니까.
어렵게 하지 맙시다. 돈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와? 우리가 돈이 없으니까 욕하지만 우리가 돈 푼이나 있으면, 옆에서 누가 뭘 그렇게 비싼 것을 사, 하면 내 돈으로 내가 사는데 아줌마가 왜? 우리는 상상이 안 되지요. 우리는 수백 억 재산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택시 타면 9980원 나올 때 있어요. 그때 잔돈 20원이잖아요. 그럼 잔돈 놔두세요. 꼴랑 20원. 왜 그 귀한 돈을 날립니까? 그만한 돈은 있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백 만원을 줘버린다. 다른 사람이 욕하지요. 그런데 뭐라 합니까?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와? 이게 평소에 우리 속에 다 들어있어요. 그게 뭐냐? 나는 신이라는 자기 존재 증명을 그런 식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성신을 요구하지 않겠다. 왜? 현재 있는 자체가 완성이기 때문에. 완성을 더욱 더 완성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원하는 식으로 관리할 거야. 그걸 소위 신앙생활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마귀 생각입니다.
다시 정리합시다. 성신 또는 성령이 온다는 말은 나는 누구누구를 위해서만 존재해야지 나를 위한 나는 애초에 그런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지 자신의 잘남을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성령 받아서 헌금하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고 해요. 그것도 죄냐, 이렇게 우기는 사람도 있어요. 결국은 누굴 증거하는 겁니까? 성령 받은 자기 자신의 증인되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증인될 사람이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온 동네에 팔아먹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떠벌이고 선전하고 홍보하고 있는 거예요.
아이를 교육시키고 있으면 오지랖 아줌마가 아이를 왜 저렇게 키우노? 그럼 내 아이 내가 키우는데 니가 와? 누가 뭐래도 내 애는 내 안에서 완성품이라는 거예요. 아줌마가 그런 이야기하는 것이 성령이 하는 일인 건 생각도 못하고. 성령이 그런 일까지 하겠습니까만. 항상 우리는 성령 받았다 하지만 뭔가 치고 들어오면 그 순간 완성품이라는 걸 증명할 방어체계가 발동됩니다. 북한처럼 장거리 미사일 쏘아 올리든지 할 것 같아. 나를 방어하고 나의 정당함을 주장하라고 성령 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옳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준 성령을 자신이 옳다는데 써먹고 있으니 그게 무슨 성령 받은 겁니까, 악령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지.
마귀가 뱀이 뭐라고 자꾸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우리 현재 자신을 누가 뭐래도 나한테는 나의 완성품이에요. 누가 뭐래도 내 자식은 최고 귀한 자식이에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미운 자식 내놓으라고 했습니까? 사랑하는 독자 바치라 했잖아요. 뭐예요? 줘놓고 왜 뺐습니까? 아브라함은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게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약 때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완성품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완성품을 위한 과정인 것을 고백 못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못한단 말이죠. 진정으로. 흉내는 내지요. 아까 표면효과처럼. 혹시 그런 고백하면 천당 보내 줄까봐. 역시 자기가 죄지어도 여전히 이 세상 자기는 최고의 완성품 된다는 거예요. 잘된 저 사람보다 못난 내가 더 귀하게 느껴진다니까. 이런 생각이 못돼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은 타고 났어요. 우리가 마음을 못되게 먹어서 나밖에 모른다는 게 아니라 타고난 걸 무슨 수로 고칩니까? 못 고치니까 성령이 온 겁니다.
여기 사도행전 2장 계속 볼게요. 21절에 보게 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돼 있잖아요. 이게 바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 했지요.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이게 난데없는 꿈이고 난데없이 터진 예언이고 이것은 난데없이 외치게 된 환상이다. 강압적으로 본의 아니게 마구 흔들어서 입에서 툭 나오게 한 고백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살아가면서 밥 짓고 공부하는 모든 것이 종합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쪽으로 형성되고 종합하는 거예요. 내가 어느 대학에서 공부했고 직장생활하고 아이 둘 낳고 셋 낳고 결혼해서 잘 살고 행복하다고 날 증거하라는 게 아니고 그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나는 아기 낳고 노력하고 힘들게 고생했다. 네가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이야기하고 싶을 때 자기 연대기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당연한데 툭 튀어나온 게 주의 은혜였어요.
이게 지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성령이 왔기 때문에 지금 사는 모든 것은 내 잘남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걸 증거하기 위해서 이런 인생길, 하나의 과정으로 겪어야 했습니다. 미쳤어, 내가 이런 희한한 고백을 왜 하지? 이걸 누가 가르쳐서 조련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누가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시고. 그건 간사한 거고 세뇌 받은 다단계 회사에서 그 짓하고 있지,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이 긴긴 말을 간단하게 하면, 인간은 자기한테 실망할 때 자기한테 실패할 때 자기한테 암담한 사태에 봉착했을 때 “주여,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부르짖지요. 그게 성령이 주신 기이한 현상이 되는 거예요. 천사가 좋아서 난리 났어.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불가능에 직면했을 때 평소에 인간은 가능성 끄집어내어서 내가 완성품이니까 완성품을 요리조리 보관하고 관리하려고 애를 써요.
그걸 진보 또는 발전이라 하고, 진화. 더 나아지는 것, 그게 꿈이고 희망이고 그 나아짐이 없을 때 자살하거든요. 나아질 때는 사랑 받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사랑해줄 사람 없고 나에게 무관심하면 또 자살해요. 하여튼 한국 사람은 이래저래 자살 많이 해요. 나를 관심 갖는 사람이 없다든지 내가 발전해놓고 그걸 자랑할 대상이 없다면 사람 미쳐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도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성령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만나보세요. 길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미장원에서 수다 떨면서 동회에서 공무원과 이야기하고 노인네와 이야기하고, 명절에 친척들 모일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사람 있는지. 없지요. 그들과 차이 나면 되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똑같이 밥 세끼 먹고, 똑같은 옷 입고, 관심사가 똑같고, 안철수가 어떻고 하더라도 속으로 각자 지 완성품 자랑 질하고 있구나.
이건 자랑은 아닌데 우리 애가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 내 능력으로 못 키우겠고 서울 법대를 갈지 어디를 갈지. 자랑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을 때 자식이 완성품이에요. 그 자식을 키워낸 본인이 완성품이고. 누구든지 건드리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는다. 이거거든요. 그런데 그자식이 공부는 잘하는데 버릇이 없더라, 하면 오랜만에 왔는데 이러기냐 하면서 삐져서 가버리고. 건드리면 다 삐지고.
전부 다 완성품이에요. 전부 신이에요. 과정이 없어요. 신앙은 우리는 완성품을 자꾸 선점하려고 해요. 예수 믿고 어떻게 됩니까? 맨날 천국 가면 어떻게 행복합니까? 주께서는 그런 것 걱정하지 말고 네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보란 말이죠. 천당 가서 얼마나 누리는지 따지지 말고 쓸데없이 과정은 안 밟고. 공부도 못하는 게 서울대학 가서 미팅할 생각, 엠티 갈 생각이나 하고. 합격이 돼야 하든지 말든지 하지.
과정 속에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는데 이런 인간을 상한 심령으로 바꾸시는 그 과정에 참여하시는 분이 누구냐? 다른 사람 같으면 자기 뜻대로 자길 사수하겠는데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나도 입만 떼만 방어하는데 내 잘난 걸 자랑 질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고 꾸짖으시면서 찾아오시는 능력, 성령 받은 사람 아니면 아무도 못 느낍니다.
헌금 하면서 나도 자랑하고 싶은데 주여, 이게 왠지 죄네요, 느끼게 하는 것, 성막 만들고 하게 하면서 이게 바로 죄구나. 이걸 함으로 복 받으려고 기대하게 만드는 내 마음, 이걸 함으로써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확인하고 싶은 탐욕, 내 행위로 구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 시도 자체가 바로 주님의 완성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을 우리로 느끼게 할 때 성령께서 그렇게 작용하고 징계 내리시는 순간순간들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몇 글자 되지도 않아요. 문장 외울 수 있어요. 문장 외운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속에 낯선 것이 있어서 우리를 매일같이 뒤집어내셔야 돼요.
에베소서 2장 7절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안은 없습니다. 우리 안은 없는데 자꾸 만들어내요. 예수 안 따로 있고 내가 완성품이니까 내 안이 또 따로 있고. 그런데 사실은 성도한테는 나의 안이 없어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내가 죽었는데 무슨 내 안이 있어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을 예수 안에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내 연대기가 있는 게 아니고 주의 십자가 효과가 날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퍼부어주는 겁니다.
작년인가 루게릭병을 도와준다고 미국에서 시작된 ‘아이스버킷챌린지’를 했지요. 그럴 때 온 몸에 얼음이 부어지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매일같이 얼음덩어리처럼 퍼부어주는 거예요. 너는 소모품이다. 네가 어떤 완성된 것을 품지 말라. 품어봐야 다 헛된 것을 알게 될 거야. 이것만 되면 주를 잘 섬기겠습니다. 막상 돼보세요. 다른 생각나지요. 이번 집만 계약된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당신은 술만 끊으면 인간되는데. 술 끊어서 인간된 사람 아무도 없어요. 술 끊는 것은 잘난 척하는 표면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는 뭘 해도 인간 안 된다고 판정이 난 입장에서 쓸데없이 당신이 이것만 하면, 저것만 하게 되면, 그건 새로운 완성품 기회를 주는 것밖에 안 돼요. 다 소용없는 겁니다. 오히려 이렇게 하세요. 당신이 이런 일까지 할 수 있다니. 긍정적 마인드로(갑자기 비복음적인데) 당신이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세상에 설거지를 다 할 줄 알아? 놀라운데. 그러면 빨래도 해보지? 당신은 뭐하고? 나는 감시하고. 당신은 배우는 과정이고 나는 완성이니까.
오는 세대에 계속 퍼부을 수 있는 것은 기존의 내 중심이 되면 역사가 모포로 휘감는 것이 돼요.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버리고 자꾸 허황된 미래를 향하여 현재를 채찍질하고 몰아넣게 만들어요. 연대기입니다. 그래서 완성이라는 게 없어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자. 성화론이 그거잖아요. 그런데 완성이 되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것이 날아가 버려요.
그럼 손톱 누구 것이냐? 주의 것이에요. 모든 것이 주의 것이에요. 몸이 아프다? 그럼 병원에 가야지. 왜? 주께서 병을 만들어놨으니까. 치료해야 되는데 돈이 아까워서 뭘 하느냐 하면, 기도한다고. 나한테 얻어맞았는데 부활되게 하옵소서. 목사가 거짓말했지만 진짜라고 친다면, 애 죽이고 향 피워서 냄새 없애고 맨날 부활되게 해 달라. 내가 보기에 거짓말 같아.
부활되게 하는 게 미신이잖아요. 그런 미신 우리는 없습니까? 시간은 급한데 차를 놓쳤어요. 늦장 부려서. 간단한 문제에요. 택시 오면 타면 되는데 택시 값은 8000원, 버스 값은 1200원. 주여, 버스 빨리 오게 하옵소서. 이건 솔직하게 돈이 아까워서 택시 못 타면서 주여, 기적을 베풀어서 다음 차 빨리 오게 하옵소서. 항상 우리가 하는 기도 속에는 내가 예상 되는 게 있는데 결국 내가 되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해달라는 욕망이거든요.
야고보서 4장에 그런 말이 있어요. 세상 것을 사랑하게 되면 간음한 여자라고 했어요. 너무 과격한 것 아닙니까. 나의 신부가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무슨 수로 그걸 지킵니까? 성령이, 그 말씀은 우리로 지키라는 게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