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창 3장 22-24(에덴에서의 추방)160203-이 근호 목사
24강-창 3장 22-24(에덴에서의 추방)160203-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220)
24강-창 3장 22-24(에덴에서의 추방)1602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장 20-21절입니다. 구약성경 4페이지입니다.
창 3:22-24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시고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추방을 시킬 때는 인간을 좋지 않게 봐서 추방시켰을 것이 분명한데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추울까 싶어서, 아랫도리가 서늘할까 싶어 이왕 쫓아내는 것, 나는 성의는 다 했다는 것을 티내시려고 이렇게 가죽옷을 입히셨을까요? 가죽옷을 입힐 만한 배려 같으면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지를 말지요. 가죽옷 입힐 정도로 신경을 쓰신다면 에덴동산에서 어지간하면 그냥 함께 사시지 왜 구태여 추방을 시키려고 합니까? 추방하게 되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뻔히 아시면서.
그리고 추방을 하려거든 깔끔하게 추방을 해버리지 이렇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어떤 미련 같은 것을 남기게 되면 하나님에게 가죽옷이라는 혜택은 입어놓고 추방은 당할 때에 그 마음이 혼란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치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내가 그동안 해준 것 다 내놓아라, 이러면 깔끔할 텐데 헤어지는 마당에 목걸이를 사준다는 이런 것은 미련이 더 있다는 이야기인지, 여전히 좋아한다는 이야기인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혀줬다는 것은 지난시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것은 여자에게 입혀준 것이 아니고 하와에게 입혀줬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와의 상대역을 하게 될 그 남자는 나중에 등장하지요. 나중에 여자의 후손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하와가 생명이라는 뜻인데 그 생명이라는 뜻에 부합되는 남편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가죽옷을 입혔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지고 하나님 자신의 약속이라는 것이 개시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약속이 개시됨에 대해서 인간 좋으라고 약속을 준 것이 아니라는 그 사실은 오늘 본문에 인간을 추방함으로써 더욱 더 분명해지는 겁니다.
가죽옷을 입혔다, 일종의 엠블럼 같은 거지요. 상표(레테르)같은 것을 붙여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시켜버립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그전에 창세기 3장 15절에서 주셨던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대치국면, 대결, 투쟁, 전쟁, 이것이 본격화되는 환경으로 접어들었다, 모든 상황에 그런 환경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든지, 안 죽고 싶다든지, 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다든지, 그런 개인적인 바람이나 희망은 일체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추방을 하는 이유자체를 인간으로서는 납득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시키면서 이유를 댔어요. 22절에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 그러면 하나같이 되었으니까, 이제 생각이 잘 통하니까 같이 살면 되겠네요.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알고 있는 선악을 그들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터놓고 그냥 사이좋게 사시면 되잖아요. 서로 아는 처지니까.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았다는 그것이 빌미가 되어서, 그게 이유가 되어서 왜 하나님 계시는 쪽으로, 생명나무쪽으로는 이별해야 되고 헤어져야 되는지를 인간 쪽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한 가족이 있는데 “아버지 마음을 아나?” “아버지 마음 압니다.” “나도 네 마음 안다.” 그럼 되었네요. 이제 같이 살면 되겠네요. “나가라!”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이제 아버지 마음을 네가 알게 되었으니 나가라? 아는데 왜 나가라고 하시는가? 알면 같이 사는 것이 편할 텐데 알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내보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은 스스로는 자기를 증명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여기 살게 됨, 내가 천국 가게 됨, 내가 구원받았음, 내가 지옥을 안 가게 되었다든지, 내가 이렇게 산다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증빙, 모든 증거 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은 알 수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제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여기서 살아가는 이유, 이제는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이런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파악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존재가 된 겁니다. 이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인간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놓았습니다. 선악과를 심어놓고 인간보고 따먹지 말라고 했어요. 따먹지 말라고 한 그것을 따먹어도 괜찮다는 쪽으로 언급한 존재가 있었지요. 창세기 3장에 마귀가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아! 선악과 따먹어도 괜찮아.” 5절에 보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되어서 선악까지 알아채서 하나님처럼 되게 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기특하게 여길 것인가, 라는 것이 마귀들의 주장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담과 하와는 동조를 했고, 동의를 했어요. 이것을 동의하고 동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이제 내가 알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것을 안다는 것,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는 선악과마저 우리가 알아서 그래서 하나님도 알고 나도 아는 그것을 함께 알게 되면 그게 곧 사람이다. 그것이 인간을 만드신 취지에 합당하다.’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에요. “하나님, 뭘 원하십니까?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이런 것을 응당 기뻐할 것이라고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설득을 시키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본인도 함께 안다는 이것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만 하나님노릇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되는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 쪽에서 원했던 바다, 라는 식으로 인간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분명히 따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원래 인간은 알지 않아야 된다는 그것이 원래 인간인데 마귀는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이 아는 것을 너희도 같이 알게 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신다.”라는 쪽으로 인간 편에 서서 속인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마귀 말인지 하나님의 말인지, 그것을 사다리타기 하듯이 감추고 난 뒤에 “다음 둘 중 어느 것이 하나님의 본 뜻입니까?”라고 문제를 제시해 볼 수가 있어요.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너는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도 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둘 중에 어느 것입니까?” 이렇게 묻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알아서 영광 돌리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겁니다.”라고 답변을 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왜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이라 하는 것이 그렇게 해서, 그것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맞잖아요.”라고 나온다면 하나님께서 “그게 바로 네가 기껏 아는 너의 존재증명이 그 정도 선으로 끝났다.” 하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스스로 알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가 원래 하나님이 만든 인간답지 않다는 거예요. “몰라야 되는데 네가 왜 알았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은 뭡니까? “좀 알면 어떤데요?” “알면 인간이 아니지.”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알아서 영광 돌리는 그것이 싫습니까?” “싫다.” “그러면 하나님은 뭘 좋아하십니까?”
너와 나 사이에 금지된 그 금지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어놓은 금지의 선, 금지의 경계선, 창조물과 피조물사이에 끊어놓은 그 선을, 그 차단막을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 차단막이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지요. 인간들은 뭘 보는가?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그어놓은 금지선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내용으로 금지되어 있는가를 인간들은 무시한 겁니다. 뭘 인간들이 모르는가 하면, 왜 처음부터 따먹지 말라고 한 그 금지의 명령을 주신 취지에 대해서 인간들은 알 도리가 없고 관심조차 없어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 존재증명만 된다면 인간으로서는 얻을 것 다 얻은 거예요. “나는 이렇고 이래서 존재해야 됩니다.”라는 존재에 대한 긍정, 그 정당성,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버티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나대고, 따지고. “하나님, 이러려고 인간 만들어놓았잖아요. 저는 모르지 않아요. 다 알아요.” 하나님한테 따지는 것밖에 안돼요. “그것을 왜 아는데?” 인간들은 “좀 알면 안 됩니까?” “알면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왜 안 됩니까, 하고 따지는 그것이 바로 내(하나님)가 원래 만든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그렇게 따지고 드는 거예요.
말씀 다시 봅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추방시키는 이유는 분명히 나옵니다. 네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었기에 내보내야 되겠다는 거예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되면 좋지 그게 왜 내보내야 되는 대상이 됩니까? 금지선, 경계선이 빠졌다는 거예요. 피조물과 창조물 사이에 금지해야 될, 끊어야 될 그 경계선이 날라 가버린 거예요. 이 본문을 기초로 해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 대해서 들여다봅시다. 하나님께 무엇이 영광입니까? 하나님께 뭐가 영광이에요? 찬양? 전도? 선교? 뭐가 영광되겠습니까? 봉사, 믿음, 뭐가 영광되겠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힘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것만이 영광이 돼요. “십자가 뛰어넘어 저 부활의 새 생명으로, 전우의 시체를 타넘고 타넘어 앞으로, 앞으로!” 그게 영광이 아니에요. “주님 뜻대로 이렇게 잘 삽니다.” 하나님께 그것 내놓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십자가에 가로막히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게 영광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하나님을 알고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모든 시도가 다 무산되고 실패로 끝나는 지점이 있음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선교, 전도, 헌금, 예배, 뭐든지. 신약에는 사실 예배가 없어요. 신령과 진정의 예배인데 그것은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예배에요. 열 한 시 예배, 두 시 예배, 도대체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참. 제사는 구약 때 드렸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제사를 드려야 거기에 하나님이 합석하는지 알고 천주교에서는 그 제사를 미사로 바꾼 거예요. 개신교에서는 그 미사 드리는 거기서 나왔다고 해놓고는 똑같아요. 천주교는 미사고 이쪽은 예배고, 다를 것이 없이 똑같아요. 그냥 막 사는 게 예배라니까요. 막 사는 게.
뭘 하는 것, 시간과 공간을 따로 잘라서 뭔가 바쳐야 된다는 생각, 가인이 그 짓을 했어요.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받을 것이라는 그 생각. 가인은 백날 제사를 드려도 금지한다는 것, 금지선에서 유턴해야 된다는 것, 그것을 몰랐던 거예요. 아벨은 제사를 드리고 죽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아벨이 생생하게 살아서는 건너갈 수 없는 곳에 아벨은 간 거예요. 왜냐? 아벨은 아벨 본인이 저벅저벅 걸어서는 그 세계에 못 들어가기 때문에. 누구든지 금지선에서 죽지 아니하면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죽어서 간다는 것은 죽음을 딛고 간다는 뜻이 아니고 죽음으로써 네가 시도한, 인간이 생각한 하나님 생각은 끝났어요.
그 다음부터 그 쪽 세계는 하나님 소관인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금지선을 다시 만듭니다. 어디서 만드는가? 신과 신안에 금지선을 만들어요. 신 내부에, 우리와 같이 선악을 아는 세계 속에, 신 안에 금지선을 만들어서 신과 신이 대적하는, 대결하고 전쟁하는 영역으로 만들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인간내부에 선과 악사이의 대치관계에서 행함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좆을 거예요. 인간내부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법적이에요. 뭐든지 법적으로 어느 것이 정당한가, 법적으로 내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법적으로 모든 것을 계산해요. 그러나 무엇을 행함으로서 네가 죄가 되거나 의가 되는 것은 선악과로서 끝났어요. 그 다음부터는 선악을 알게 된 그 자체를 부정하는 쪽으로, 금지한 영역 밖으로 추방을 시킨 겁니다. 개인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었는가, 안 따먹었는가의 그 문제가 이제는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기의 운명이 그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너는 지금 하나님이 갈라지게 한 영역, 하나님이 내부에서 스스로 둘로 쪼개는 영역 속에서 너는 어느 신 쪽인가, 어느 신과 결부되어 있는가, 이것은 법적인 행함을 묻는 것이 아니고 너는 어느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가의 권력의 문제입니다.
권력이 두 동강 난 거예요. 권력이 두 동강 나야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성취가 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뱀이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뱀은 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세계에서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탄이 되는 겁니다. 사탄도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같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시도하는 자기존재증명은 끝났습니다. 아무소용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인간은 하나님의 해외홍보용이지요. 하나님 자신이 어떤 조치를 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은 그 결과에 따라와야 될 뿐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미디어적인 신비라고 합니다. 홍보하는 신비. 하나님의 자기존재증명을 홍보하는데 동원된 하나의 재료로서, 하나의 설비, 장치로서 인간이 여기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들어간 인간은 뭐냐? 자꾸만 자신의 정당함을 스스로 증명하려는 시도를 열심히 하게 되겠지요. “나도 선에 대해서는 알고, 악에 대해서도 압니다, 하나님. 제가 열심히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마음껏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그게 바로 네가 마귀와 함께 있는 너의 존재증명이고 내 쪽에서 그어놓은 금지에 의해서 그렇게 밝혀진다.”고 하지요. 그게 드러나게 된 거예요.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참 따사로운 어버이의 배려 같지요. “참 많이 춥지? 그리고 부끄럽지? 내가 든든한 가죽옷을 입혀주마.” 이정도면 가죽옷 입혀준 채로 에덴동산에서 사랑받고 사는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 뒤에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았다는 이유 때문에 강제조치로 추방을 시켜버립니다. 추방의 의지가 얼마나 단호하신지 24절에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행여나 돌아 올까봐, 행여 미련이 있어서 또 들여다 볼까봐 철저하게 가로막아 버립니다. 이게 본격화된 금지구역처럼 인간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구역을 따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러고 난 뒤에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23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렇게 내보내서 어디로 갈 거냐? ‘근본 된 토지’로 추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근본 된 그 토지에 가게 되면 인간은 진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근본 된 토지에 가버리면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그 금지선이 보이지 않는 선이 돼버려요. 없는 나라에요. 자연스럽게. 왜냐? 이게 근본 된 토지거든요. 근본 된 토지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이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목적으로 두고 살아가는 사회형성, 국가형성, 공동체형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제 사나죽으나 눈에 띄는 것은 인간들밖에 없어요. 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게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근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모든 시작은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보이는 것은 뭐냐? 조상 밖에 없지요.
부모, 돌아가면 마을 한가운데 공동묘지 만들고, 돌아가면 다시 무덤 만들고 또 만들고. 인간세계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은 민족마다 좀 다르지만 뒷동산이나 마을 한가운데 무덤이 있고 그 무덤이 인간세계의 테두리를 형성합니다. 무덤은 돌아가신 분의 영역, 이쪽은 산 사람의 영역, 끝! 이것이 인간의 사고방식의 전부입니다. 그러면 신은 어디 있는가? 그 다음부터 추상적으로 만들어내면 돼요. “너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한다.”(롬 1:21) 하지요. 하나님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근본 된 토지, 이 토지와 관련해서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 토지와 관련된 하나님이 바로 바알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근본 된 토지, 농사를 지으면서 대응 적으로 발췌해 내는 거예요. ‘이상하다. 왜 겨울이 되면 이른 비가 오고 봄이 되면 늦은 비가 오는 걸까?’ 이스라엘은 그렇게 됩니다. 봄이 늦은 비고 겨울이 이른 비에요. 그 동네는 보리농사, 밀농사와 관계해서 그렇습니다. 그럴 때 이유는 모르겠는데 너무 신기한 거예요. 그럴 때 그들은 아, 이 땅은 하나님과 인간이 접촉하는 접촉지점이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를 살려주기 위해서 복 주시는 흔적들이 담겨있는 땅이 이 대지, 근본 된 토지라고 본 겁니다. 근본 된 토지에서 인간의 근본 된 정신, 근본 된 사고방식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딱 한마디에요. “인간은 아직도 살만하다.” 그게 인간의 자기존재증명입니다. 나는 왜 살아야 되는가? 신이 살려줬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내가 행복한 것이 왜 정당한가? 하나님이 내 목숨을 붙여줬기 때문에. 착하기 때문에 살려줬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옳다는 이유 때문에 아직도 안 죽이고 계속 살려준다는 거예요. 이 근본 된 토지에서, 근본 된 생존방식에서 근본 된 정신세계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가뭄 들었다. 엘니뇨현상이 있다. 비가 많이 온다. 이것은 하나님이 벌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농사 잘되고 토지의 소산이 늘어난다. 이것은 하나님이 복 주는 것이고. 축복과 저주, 이 모든 것은 나의 생존에 유리하면 복이고 불리하면 저주로 보는 거예요. 이것이 토지에서 나온 인간의 근본 된 인식이고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뭘 하는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요. “하나님덕분에 농사 이렇게 잘되었습니다.” 그렇게 제사한 최조의 인물이 누구냐? 바로 가인입니다.
가인은 숨겨진 금지의 선을 몰라요. 주어진 대로 최선을 다하면 주께서 기뻐하시고 좋아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최선을 다하는 그거요. 그게 바로 추방되어야 될 이유라는 것을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합니다.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그들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정당성이 자기한테 있다고 봤어요. 왜? 나는 내 어떤 행동자체가 내가 여기 존재해야 마땅한 존재증명이 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겁니다.
말이 어렵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적당한 용어가 없어요. 쉽게 말하면 “너는 왜 행동을 했어?” “나니까 행동한다.” “왜 하는데?” “내가 하고 싶다. 네가 뭔데?” 이게 바로 인간의 근본 된 사고방식이라는 그 말입니다. 이걸 어렵게 말해서 인간의 자기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는 모든 행동과 모든 생각이 자기를 겨냥해서 최종적으로 자기를 목표로 삼아서 “내가 하겠다는데 왜 말이 많아? 내가 사는데 네가 왜!” 천박한 자본주의가 그거잖아요. “내 돈 내가 쓰겠다는데 네가 왜? 내 건데. 하나님 내가 믿겠다는데 네가 왜! 복음이라고 하지 마라. 내 식대로 나는 믿을게. 너는 네 식대로 믿어라. 나는 내 식대로 믿는다.” 그게 바로 존재증명이라니까요. 그것 때문에 인간이 쫓겨난 거예요.
생명나무 있을 때는 따먹기만 하면 되지요. 그러나 생명나무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는 생명나무를 본인이 만들면 되는 거예요. 왜? 생명나무라 하는 것은 이미 금지선 바깥에 있기 때문에 생명나무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생명나무는 없다는 거예요. 왜 없느냐? 안보이니까.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근본 된 넓은 지평선밖에 없어요. ‘저 산, 계곡에 물이 흐르는데 농사가 잘 되겠는지. 저기 가면 자식들 잘 먹고 살겠는지.’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생명나무? 그런 것은 없어요.
이번에 대전에서 요한계시록 수련회 했지요. 천국, 그런 것은 없어요. 자기연대기로 둘둘 감았는데 무슨 천국이 있고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이 세상에 나밖에 없지요. 왜 나밖에 없는가? 내가 나밖에 없으니까 나를 위해서 살지. 내가 만약에 없다면 내가 날 위해 살 이유가 없잖아. 내가 날 위해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만 최종적으로 중요하다는 그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에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할 수 없어요.
“내가 왜 어떤 행동을 합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행동을 합니다.”라고 대답해요. 이것은 국회의원이나 노숙자나 철학박사나 다 똑같아요. “당신은 왜 실내에서 담배를 피웁니까?” “내가 피우고 싶다. 왜! 네가 왜!” 이게 그 이야기에요. “왜 피우고 싶습니까?” “당기네.” 그게 자기존재증명이라니까요, 그게! 다른 이유가 필요 없다니까요, 다른 이유가. 에덴동산이 있고, 생명나무가 있고, 선악과가 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 말고, 인간 말고,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용어들이고 동원된 개념들이에요.
그런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창세기 3장을 보면서 생명나무, 선악과, 에덴동산이 나오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 그 생명나무 있는 곳이 가고 싶다.’ 하는 거예요. “네가 뭔데? 네가 왜 거기 가야되는데?” “내가 가고 싶다는데 네가 왜!” 그게 바로 우리 스스로 하는 존재증명이에요. 뭐가 빠진 거예요? 금지선이 빠진 거예요. 금지의 선. 추방된 취지가 없다니까요. 하나님이, 너같이 사니 추방시켰다는 그 취지가 살아 있어야 되는데 그 추방된 취지는 십자가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십자가외의 다른 복음으로서는 나타내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만이 그걸 보여줘요. 어리석은 십자가,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십자가.
인간의 지혜와 모든 노력과 수고와 영광은 하나님, 하나님, 해도 사실은 본인이 본인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이고 예수고 십자가고, 이런 멘트를 날리는 거예요. 이런 멘트를 날려서 행여 내가 잘될까 싶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가인이 왜 제사 드렸겠습니까? 가인이 제사 드린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그러면 가인이 자기 제사를 하나님이 안 받았어도 삐지지 말아야 되잖아요. 가인이 하나님이 제사를 안 받는 것을 알고 삐졌다는 말은 처음부터 제사 드릴 때 나는 정당하다는 자기존재증명의 하나의 행위로써 제사를 드린 거예요.
그리고 그게 가인의 제사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의 제사가 다 그런 겁니다. 모든 인간이 교회 나오는 것도 다 “하나님, 저 보세요. 잘 하고 있지요?” 선악에서 악을 버리고 선한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선을 가지고 선한 쪽에서 선악과를 동원해서 자기존재를, 내가 이렇게 선한존재로서 자기를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뿐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오늘 본문의 결론이 뭡니까?”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가죽옷 입혀서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어쩔 수가 없는 부정적 권력, 마귀의 권력이지요, 부정적 권력에 예속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자기존재증명을 하기 위해서 인간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너 죄 속에서 못 빠져나와.” 그런데 이 금지의 선이 다가오게 되면 네가 안 되는 것, 불가능한 것을 십자가의 능력, 예수님의 공로로, 예수님의 자비와 은혜로 천국 가는, 생명나무과실을 따먹는 사람 되게 했을 때, 너는 모든 존재증명을, 내가 예수 믿었다고 보지 말고 “주께서 예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하고 예수님께만 영광 돌립니다.
그 금지의 선, 주님께만 영광 돌려서 아버지께 영광 돌리기 위한 하나의 재료로서 우리를 앞장세운 겁니다. 우리는 홍보용 스피커입니다. 홍보용 증거물이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몸부림쳐도 내 힘으로 구원되지 않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 그것이 능력이 되어서 내가 할 수 없는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한 그것은 예수님 홀로 하신 업적입니다.”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주의 증인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인간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금지의 선을 넘어서고 다시 금지의 선 저쪽에서 건너왔습니다. 북에서 남으로 왔다가 다시 북으로 올라가고. 그것을 주님 혼자서 다 하셨어요. 금지의 선을 혼자서 다 넘었어요. 그래서 주님 계신 천국에 생명나무가 가로수처럼 좍 있지요. 그런 나무가 있는 줄도 몰랐지요. 사도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준 있는 줄도 몰랐던 그곳, 십자가 안에 들어가니까 비로소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는 하나의 도구인 것을, 독자적인 존재가 아닌 것을, 내가 스스로 잘났다고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는 그 사실을,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반대로 이야기해서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은 마귀의 장난이었던 것을, 마귀가 그렇게 스스로 자기 잘남을 자랑 질하도록 부추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 이상 우리를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모든 움직임이 나의 훌륭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배후에서 이미 구원되었음을, 십자가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4강-창 3장 22-24(에덴에서의 추방)160203-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