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행 16:1-5 (교회의 변화된 모습) - 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설교(2004)
66. 행 16:1-5 (교회의 변화된 모습) - 이근호 목사 사도행전 설교(2004)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66. 행 16:1-5 (교회의 변화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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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행 16: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행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 16:4)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행 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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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도 박도 못하는 '가족' !!
우리는 "교회의 기초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야 하는데, 가족의 기초라고 하면 자기 족보가 될 터인데, 즉 혈통이라는 겁니다. 현대의학으로 말하면 유전자인데, 그러니 부모 밑에 태어난 자식은 무조건 한 핏줄이 되고, 가문을 형성한다는 겁니다. 인위적으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의 단위를 형성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부모와 자식 사이는 피로서 연결된 끊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겁니다. 피로서 연결이 되었다는 것은, 회비를 내고 가입하는, 또한 그 모임의 조항을 지키겠다고 선서를 해서 구성되는 조직이 아니라,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그 조직의 일원으로 포함되어서, 그렇게 빼도 박도 못하는 확정된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가족' 이라는 겁니다.
국가가 아무리 막강하고 사회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움직이는고 하니까, 자기가 속해있는 가장 가까운 조직체인 가족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조국을 사랑한다고 해도, 부모가 미국에 이민을 가면 자식은 같이 갈 준비를 하기 마련이라는 말이죠.
역시 내가 머물 곳은 고향밖에 없다 !!
그러니 인위적인 조직, 즉 사람이 만든 조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피로 연결이 되어있고, 생명과 생명으로 짜여져 있는 가족이라는 것을 인간적인 능력으로 깨부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에 쫓겨서 바쁠 때는 부모를 잊을지 몰라도, 연휴가 되고 명절이 되면 고향이 생각나고 부모가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촉촉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을 생물학적으로는 귀소본능이라고 하는데, 새나 물고기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데 말이죠. "역시 내가 머물 곳은 고향밖에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절로 이동원이 부른 '향수' 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뿌리를 생각하고 찾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무리 시댁에서 대접을 잘 받는다고 해도 친정을 잊지 못하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보다는 자기에게 육신을 준 친정부모가 더 가깝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우선이 되는 가족이라고, 옛날부터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해왔다는 겁니다.
가족보다도 더 확실한 것은 없는데, 그래서 '부모공경' 이란 것이 모든 윤리의 토대가 되는데, 국가에 대한 충성도 부모공경에서 시작된다는 말이죠. 즉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국가에 충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확고한 뿌리인데, 이것을 능가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교회인가? 가족인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생각이 좀 다른데, 도저히 사람의 능력으로 깰 수가 없는, 또한 깨어지고 싶지도 않은, 우리는 가족이 해체되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가족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님은 도전장은 던진다는 말이죠. 즉 "교회는 가족이 아니다. 그런 육신에 의해서 맺어진 가족과는 다르다. 교회의 기초는 따로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마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마 12:47)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투표를 하면 몰표가 나오는 경향이 많은데,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일을 잘하고 믿음이 좋고 해도,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집안끼리 뭉쳐서 투표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집안이 받쳐주면 그 사람은 쉽게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객지에서 와서 홀로 고군분투하면서 아무리 애를 쓰고 봉사를 다해도, 막상 투표를 하면 생각보다 표가 적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은 도시나 시골이나 다 마찬가지인데, 이것을 두고 어떤 신학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유교적인 집단을 기독교로 포장을 했을 뿐이라고 비꼬기도 했는데 말이죠. 그러니 교회내부로 들어가면 과거에 집안끼리 뭉쳐서 지내던 그런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형성되어있다는 겁니다.
교회의 기초는 '믿음' !!
하지만 교회의 기초는 그런 가족이나 친척으로 나누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런 혈연이 기초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교회의 기초는 없는데, 이 땅에서 교회의 기초는 없다는 말이죠. "당신은 왜 교회에 나왔습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 이모가 이 교회에 다녀서 나왔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 그것은 기존의 유교바탕의 관계를 그대로 당긴 것이 되는데, 그러면 그것은 종친회에 온 것이지 교회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의 기초는, 인간적인 혈연이나 그런 것에서 당겨서 가지고 올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성경에서는 그것을 '믿음' 이라고 하는데, 믿음이 교회의 기초라는 말이죠. 물론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본다는 겁니다.
과연 교회에 나오면 다 믿는가?
제가 이렇게 믿음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속으로 웃지 싶은데, 왜냐하면 그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자기가 보니 그렇게 기적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면 웬만하면 다 믿으니 말이죠.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유별나게 과장되게 이야기할 필요가 무엇이 있냐는 말이죠. 물론 "믿음은 기적입니다" 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그냥 성경말씀을 보고 믿으면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사람들에 교회에 나와서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마지막 때 예수님이 심판을 하실 때는, "니가 너를 아는가?" 라고 묻는 게 아니라, "니가 나를 믿는가?" 라고 물으신다는 겁니다. "니가 어느 정도로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아는가?"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니가 성경말씀을 믿는가?" 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아는 것과 믿는 것 !!
여러분,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알면 알수록 그것이 지식이 되어서 자기의 것이 되는데, 그렇게 자기 소유가 점점 더 커지고 부풀어지고 넓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안다는 것은 자기에게 보다 많은 것을 끌어 모으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의 소유가 많아지고 넓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있는 것도 다 포기하고 몽땅 믿는 거기에 올인을 하는 것인데,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자기가 믿는 것에 던졌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일단 자기 목숨은 자기가 간직하고, 다만 지식으로 약간 빼내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하는 아니라, 그것은 a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란 말이죠.
반면에 자기가 무엇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기 목숨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자 하는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즉 "내가 죽어도 괜찮은 것은, 내가 믿는 그분 때문에 내가 죽어도 전혀 아깝지를 않다" 라는 것이 되어질 때, 그것을 두고 '믿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나를 믿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를 믿지 않으니, 자기 부모도 믿지 않고, 자기 자식도 믿지 않고, 자기 일가친척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가진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 자기가 아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 자기의 경험을 의지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서 자기 목숨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설교를 다시 하면 !!
설교를 다시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조직에는 그 밑바닥에는 가족이라는,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확실하고 현실적인 최소단위의 조직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가정이고 가족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이 가족은 포기하지 않은 채로 자기가 무엇을 하나 획득해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만들어내는, 그것을 두고 "믿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해내고야 말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직장에 입사를 했는데, 상사가 "당신, 이것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 당연히 "예,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제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낼 자신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신앙의 반대말이 곧 신념이다 !!
그러니 이 세상에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노력만 하면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라는 의미이고, 반면에 성경에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저는 이제 그런 짓거리는 포기했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즉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나를 구원하는 짓은 이제 더 이상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어떤 분은 "신앙의 반대말은 신념이다" 라고 했는데, 제대로 지적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면 된다" 라고 하는 그 신념의 반대말이 곧 신앙이란 겁니다. 즉 "해도 안 된다" 라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신앙의 신념이 서로 충돌하고 싸우는 전쟁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기초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그 기초는 "하면 된다" 라는 신념이 아니라, 무엇을 더 끌어당겨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를 놓아두고 포기해도 될 정도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그런 든든한 분을 내가 만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분과의 교제가 시작이 되었다는 것, 또한 그분은 나의 가족보다도 더 우선적인 분인데, 그분은 나를 만드신 하나님으로, 그분이 먼저 나를 알고 나를 찾아오셨고, 나는 그분으로 인해서 찾아냄을 당했고, 이제부터 그분의 것으로서 남은 평생을 살게 되었다" 라고 하는 안도감, 그게 바로 믿음이고 교회의 기초라는 겁니다.
숨은 그림 찾기 !!
그래서 교회의 기초는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은 모든 것이 가족중심인데, 그러한 가족을 일부러 해체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강력하게 반발한다는 말이죠. 그런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억지로 구원을 받으라고 할 수 없기에, 그래서 사도들이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혹은 '집나간 하나님의 자녀 찾기',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새끼가 어디에 있지?" 라고 하면서 찾아다니시는 주님의 일을, 지금 사도들이 그것을 대행해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주의 백성이 분명히 있을 텐데, 어디에 있지요? 얼굴을 좀 봅시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새삼스럽게 사람을 개조해서 주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길가는 사람을 교회에 데리고 와서 등을 쳐가면서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들을 찾아낸다는 겁니다.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낸다는 말이죠. "당신이 그 사람입니까? 당신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입니까?" 라고 하면서 찾아낸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과 사도들은 전혀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맡겨버리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디모데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죠. 그래서 계속해서 그 교회의 기초가 과연 믿음인지를, 그것을 항상 반복하면서 진행해나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멀쩡하게 지옥에 갈 사람이 착각해서 그만 교회에 왔다고 하면, 그런 사람에게 "죄송하지만 어디서 오셨습니까? 잘못 오신 것 같습니다" 라고 하면서 돌려보내야 한다는 말이죠. 목욕탕이라고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데, 이것은 남자가 여탕에 들어간 것과 같다는 말이죠. 어떤 목욕탕은 남탕과 여탕을 가끔 바꾸는 바람에.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말이죠(ㅋㅋ).
믿습니까? 아십니까?
그러니 믿는 것인지 아는 것인지, 그것을 항상 구별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돌려보내고 오직 믿는 사람만 형제로 받아들이면서, 그 기초가 살아있는 주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 그것을 모여서 확인하고 되풀이하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많은 목사님들이나 교인들이 반발을 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지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론상 옳은 이야기이지만,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디 교회가 되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열이면 아홉 이상이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겁니다.
어느 목사님이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저를 언급했는데, "이근호 목사가 전하는 복음이 옳은 것 같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듣고 있는 신학교 동창생인 목사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이 하는 말이 다 맞는데, 그런데 이근호 목사가 있는 교회는 몇 명이나 모이는데?" 라고 했다는 겁니다(ㅋㅋ).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복음을 이야기하게 되면 평소에 자기가 감추고 있던 것들이 드러나는데, "나는 복음을 안다. 십자가를 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결국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물론 복음도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도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이 정도의 교인을 확보했다" 라는 확보됨, 즉 "나의 힘은 이 정도이다. 나는 목회자로서 이 정도로 교회를 운영한다. 교인도 이 정도이고, 헌금도 이 정도로 모인다" 라고 하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그게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해서, 자기가 도저히 그것을 숨길 수가 없어서 내뱉게 되는데, 그게 바로 "도대체 몇 명이나 모이는데?" 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것은 비단 그 신학교 동기생만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인데, 그 관심사가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았지?"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언제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지? 그런 큰 교회에 다니지?" 라는 것을 자기의 자존심으로, 자기의 훈장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구원, 그 이상의 것은 없어 !!
하지만 정말로 죽음에서 살림을 받았다고 한다면, 구원 이상의 것을 더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정말로 영생을 얻었다고 하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다 얻은 것인데, 그러니 구원을 받고도 다른 것을 더 얻으려고 냄새를 맡으면서 돌아다니는 것은, 사실은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마지막까지 다 마무리해서 일괄적으로 받은 것인데, 그런데 왜 구원 이상의 것이 더 필요하냐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목회자가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했다면, 그 구원에 대해서 평생을 감사하고 고마워하면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런데 "주님이여, 저를 구원시켜놓고 왜 교인은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런 짜증을 낸다는 것은 그 사람은 전혀 구원의 기쁨이나 감사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은 구원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데, 교인이 있니 없니 하면서 구원의 더 이상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죠.
구원인가? 착각인가?
그러니 그런 사람이 받았다고 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닌 자기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진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여, 저에게 이런 구원과 영생을 한꺼번에 주셨으니, 이제 제가 무엇을 더 원하겠습니까? 그러니 남아있는 제 인생과 제 몸뚱아리도 주님이 알아서 사용해주세요"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구원을 받은 자의 기도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인가요? "주여, 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셨는데, 즉 "제 몸을 드리겠나이다" 라는 것이라는 말이죠. 더 달라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몸을 알아서 사용해달라고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겁니다. 물론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도 당하지만, 그런 몸이라도 드리겠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왜 디모데에게 할례를?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라는 것을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가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제가 처음에 설교를 하면서 무엇을 전제로 하고 했습니까?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행 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그것은 바로, 사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천국 백성을 새롭게 만드느냐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즉 남겨진 자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을 찾아가서는, "당신은 이렇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사도의 임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야, 저 유대인들을 어떻게 하면 구원을 시키지? 한꺼번에 왕창 감동을 시켜서 구원을 받게 할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되면 주님도 기뻐하시고 참 좋을 텐데" 라고 해서, 그것을 목표로 해서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자기의 제자로 삼아서 함께 동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가?" 라는 것을, 즉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아주 자유롭게 일을 하신다. 그리고 택한 자는 모두 다 완벽하게 구원을 하신다" 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방식으로 주님은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과 디모데를 증인으로 내세운다는 말이죠.
고린도전서 9장을 보면, 이게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싶은데, 사도바울이 자기의 자유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19절에서 23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유함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구원에는 방법론이 달리 없다는 겁니다. 구원이 복음이 실시하는 것이지, 사도바울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말이죠. 자기는 그 일에 참여되어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 상태인데, 그것이 자기가 소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자기는 복음이 주는 자유함의 영역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복음을 위해서 허용되고 사용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게 얼마나 대범하고 대단한 것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구원에 대해서 자신만만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의식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에게 율법이 있는 자로서 접근해 가도록 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나는 이미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다" 라고 하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율법의 사람이 되어야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나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그래서 나는 율법의 사람으로 사용되어야한다. 이 모든 것이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일인데, 여기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가타부타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얻은 자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나는 주님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도구다 !!
그러니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유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 성질을 마음대로 부리는 자유가 아니라, 그런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위해서 자기가 마음껏 활용되어진다는 점이 너무너무 기쁘다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사용되어진다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맙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긴다는 말이죠.
그리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자기가 율법이 없는 자로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상대방을 어떻게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기는 그냥 하나의 도구로서 마음껏 활용되고 사용되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에 손톱깎기를 전 세계에 수출해서 유명해진 회사가 있는데, '쓰리세븐' 이라고 말이죠. 그 회사의 사장님은 24시간 손톱깎기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강원도 산골에서 손톱깎기를 하나 보내달라고 연락이 오면, "우리 회사를 어떻게 알고 그런 전화를 다해" 라고 하면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손톱깎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손톱깎기에 의해서 자유롭게 활용되어야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하나를 위해서 달려가야만 하는 입장이라는 말이죠.
짜장면 한 그릇을 배달해도 !!
아마 이해가 잘 되었지 싶은데, 물론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지만 말이죠. 짜장면 배달에 미친 사람은 한 그릇을 위해서 학교 캠퍼스를 마구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그 짜장면이 퍼지지 않도록 제 시간에 고객에게 배달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사도나 손톱깎기 사장님이나 짜장면집 사장님이나, 그들은 인간적인 일로 인해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놀랍게도 자기에게 영생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마음껏 활용되도록, 그렇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기를 놓아버린다는 겁니다. 물론 손톱깎기 회사나 짜장면집 사장님은 예로 든 것이지만 말이죠.
"이번에 갔더니만 한 명도 믿지 않았어" 라고, 그렇게 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화를 내거나 낙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수십 명이 은혜를 받던, 한 사람도 은혜를 받지 못하던, 그것과 자기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이죠. 자기는 쓰임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러한 자유함, 이게 바로 혈연으로 인해 만들어진 가족보다도 더 단단한 기초,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자기 것을 지키고 자기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 의를 확보하고,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런 것을 다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유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01,29 정리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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