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60108a히11장 13절(고향)-이 근호 목사
안양20160108a히11장 13절(고향)-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211.34.67.182)
안양20160108a히11장 13절(고향)-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 오늘 본문은 약간 어렵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되어있지요.
또 14절에 보면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라고 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 부분이냐 하면 사람이 땅에서 살잖아요. 그런데 땅의 본향 말고 하늘에 본향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 본향에 갈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과연 있느냐 하는 문제가 어렵습니다.
땅에 산다는 것은 수평적인 이동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수평적으로 아무리 이동해봐야 하늘에 있는 본향에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 본향이 하늘에 있다고 했거든요. 땅에 있는 자가 하늘에 있는 본향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은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땅에 있고 본향은 하늘에 있고 그 본향을 사모한다고 여기서 말했는데 그 본향을 사모하기 전까지 그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증거했습니다.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땅에 있는 사람이 로켓을 타고 갈까요 어떻게 갈까요? 이제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13절을 다시 보게 되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믿음’이라는 말 뒤에 무슨 말이 나옵니까?
‘죽음’이 나오지요. 하늘에 있는 본향에 가는 방법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냥 죽으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들은 믿음을 따라서 죽었다”라고 하거든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해요.
믿는 사람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인간이 죽어버리면 믿음도 같이 날라가 버려요. 왜나하면 본인이 죽잖아요. 믿는 본인이 숨도 못 쉬고 죽어버리는데 믿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강아지도 우울증에 걸린다는 소리를 아까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강아지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면 강아지의 우울증을 낫게 하기 위해서 가축병원에 갈 수는 있어요. 그런데 가축병원에 가는 도중에 강아지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울증을 고칠 이유가 없지요. 죽었으니까요.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을 경우에만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는 것이지, 죽어버리면 우울증이고 뭐고 어떻게 했든 간에 이미 죽으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래서 예를 들어 고(故) 한경직 목사님이 믿음생활을 잘했다고 하지만 한경직 목사님이 죽어버리면 그 믿음도 같이 날라가 버립니다.
개 우울증하고 똑같은 거에요.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본인의 죽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취소가 되고 그것이 무의미하게 다 날라가 버리지요. 왜냐하면 죽음은 그 정도로 모든 것을 삼켜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들으면 알아요. ‘아, 그 이야기..’라고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상당히 어려울 거에요. 왜 모든 것이 다 날라가 버리느냐? 왜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가? 죽음은 하나의 결과물입니다. 어떤 것의 결과냐 하면 로마서 6장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죄를 짓게 되면은 죽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믿음, 소망, 사랑에다가 보태서 전도하기, 교회다니기, 예배드리기, 이 모든 것이 죄에 속한다 이 말입니다. 예수 믿고 기도하고 방언 터지고 하는 모든 것이 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선교헌금 내고 봉사하고 성가대하고 이 모든 것이 죄에 해당되어서 그것이 근육이 뭉치듯이 뭉친 것이 죽음을 낳은 거에요. 그러니까 네가 죽었다는 말은 그 순간 재수가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견디다 견디다 못해 평생에 하는 일들이 드디어 터져버리면 이게 죽음이 되는 겁니다.
평소에 얼마나 꼼꼼하게 죄를 지었습니까? 그 죄가 넘치다가 넘치다가 폭발해버리면 이게 죽음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요. 따라서 제 이야기는 이 땅에서 믿음생활 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죽는 순간에 이 믿음도 죄였다는 것이 드러날 뿐이에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모든 것도 예수 믿는 죄를 지었고 예수를 소망하는 죄를 지었고 예수님을 사랑한 죄를 지은 거에요. 그래서 내가 사전에 이것이 어렵다는 단서를 달은 겁니다.
이 본문을 보고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서 믿음 좋은 생활을 하다가 죽어서는 좋은 데에 가겠지.’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것은 자기의 믿음으로 가겠다고 우길 때에 이런 오류가 생긴다는 말이에요. 내가 갖고 있는 믿음으로 가는데 그 믿음은 나중에 죽음 앞에서 다 털리는 겁니다.
죽으면 완전히 바짝 마른 뼈다귀가 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잘 먹고 죽은 사람은 때깔이 좋다는데 죽고 난 때깔이 좋으면 뭐 합니까? 오뉴월에 하루볕처럼 똑같이 되어버리는데 무슨 때깔이 좋아요?
믿음생활한다고 죽을 때 미소로 죽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성경 전도서에 보면 “아무리 착하든 악인이든 죽을 때는 동일하게 찾아온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말은 사람을 보고 죽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똑같이 취급해서 똑같이 죽여버립니다.
화살이 왔다가 누구는 피해가고 총알이 왔다가 신앙이 있다고 피해가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인도네시아에 태풍이 와서 해일이 일어났을 때에 그 중에 분명히 기독교신자가 있었을 건데 똑같이 쓸려갔아요. 운명은 같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쁘게 죽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죽어야 마땅합니다를 미리 챙긴 사람이 성도입니다. 차별대우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고 나 믿었으니까 죽고 난 뒤에도 특혜가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요청하는 사람은 주를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이용해 먹은 거에요.
주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자기 자신의 미래, 자기 자신이 더 좋은 거에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게 된 나의 장래의 모습이 나에게 더 사랑스러워지게 되면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제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이 본문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빠이빠이 하시길 바랍니다. 잊어주세요. 믿음, 소망, 사랑이 다 죄입니다. 그리고 어제 가락교회 강의할 때 두 번째 시간에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백일몽이라고 이야기했지요. 백일몽이 뭐라고 했습니까? 낮에 꾸는 꿈이라고 했지요? 들어놓고도 잊어버려요. 낮에 꾸는 꿈을 백일몽이라고 해요. 백일몽이라는 쎄시봉이 부른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할아버지의 시계라는 노래의 가락에 맞추어서 나오는 노래에요.
바닷가의 모래성처럼 무너져도 영원할 줄 알았는데 파도에 확 실려가버리지요. 그처럼 이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한 순간의 백일몽입니다. 밤에는 꿈이지만 낮에는 꿈으로 안 보이잖아요.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게 꿈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죽음의 순간의 관점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자식 키우고 기도 열심히 하고 집 안에서 했던 그 모든 것이 죽는 순간에 보니까 다 헛짓을 한 거에요. 그런다고 죽음이 취소된다든지 죽음이 더 연기되는 것도 아닌데..
기도를 오래 한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에요. 히스기야는 기도해가지고 오히려 더 인간을 버려놓았어요. 일찍 죽었으면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15년을 더 살아가지고 나라를 다 팔아먹었잖아요.
창고를 바벨론 사자한테 보여줘가지고 다 날렸어요. 그냥 갔으면 부자 됐을 텐데 괜히 기도해가지고 거지꼴로 가버린 거에요. 진짜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살았다는 그 정신이 있었다면요 나중에 죽을 때에도 또 기도했을 거에요.
삼천갑자 동박삭이처럼 한 번 더.. 전에는 기도해서 15년 더 살았으니까 이번에는 빡세게 해가지고 25년 더 연장.. 그래가지고 뭐 하려고.. 백 세 넘어서 극락에 있다고 자랑질하려고.. 극락에 있다고 전해라.. 그 짓 하겠어요..?
내 믿음을 땅에 있는 사람이 하늘에 가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을 핑계(빙자?)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시도한 것인데 주님께서 이용당합니까? 그런 인간들을 죽여버리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죽을 때 그냥 본인이 죽으면 안 돼요. 믿음을 따라 죽어야 돼요. 이 믿음은 본인의 믿음이 아니고 믿음이 콘테이너로 해가지고 실어가는 사람이 진짜 믿음을 소유한 거에요. 믿음이 하늘에서 주어지게 되면 그 사람은 죽기 전에 이미 죽은 자가 되어 버려요. 이것이 요점입니다.
내가 만든 믿음은 살고자 하는 믿음인 반면에 주님이 주신 믿음은 십자가에서 성령을 통해서 온 믿음이기 때문에 내가 살아도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수용하는 겁니다. 내가 살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의 백일몽이고 실제로는 나는 죽은 자인데 다만 남들 보기에, 또 내가 거울을 볼 때 살아 있어 보이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지요.
그것이 남들 보기에 내가 거울을 보기에는 내가 사는 것처럼 (마치 뭐뭐인 것처럼, as if 용법) 사는 거에요. 내가 사는 것처럼 살려고 하는데 이게 가짜거든요. 가짜가 예수님의 진짜를 박차고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거에요.
적금은 얼마를 부어야 되고 펀드는 어느 포트폴리오처럼 깔아야 위험 부담이 적고 보험은 몇 개를 들어야 되고 이번에 상견례 할 때에 옷은 뭘 입고 가야 되고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해야 내가 원하는 것이 조기에 달성될 수 있을 것이냐를 걱정하는 거에요.
모든 것은 이미 죽은 자의 요구사항인데 마치 나는 안 죽은 것이고 내가 안 죽었으면 남편도 안 죽었지요 내 자식도 안 죽었지요 내가 살아있으니까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환상(꿈)이 아니고 실제인 것처럼 나한테 엮여져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짜(꿈)가 아니고 실제라는 것은 너무도 명확하지요. 애가 밥 달라고 하고 개가 와서 물면 아프지요. 아픈데 이것이 꿈입니까? 실제로 아프지요. 그러니까 실제가 맞다고 자부하지요.
성경에서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예수님은 전혀 감각되지 않고 체험되기는 내가 알아서 예수 믿는 것으로 되는 거에요. 천사들을 보고 ‘내가 알아서 예수 믿어서 간다고 전해라. 지금은 아직 못간다고 전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늘 본문 13~14절에 봅시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했지요. 그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감각이 뚝 떨어지는 거에요. 이게 성경에는 나와 있는데 영 체험이 되지를 않아요. “본향”은 여기에 사는 게 본향이에요.
신앙생활을 40년을 했니 50년을 했니 하는 것은 다 껍데기요 장식에 불과하고 툭툭 털게 되면 남는 것은 옛날 그리웠던 그 고향만 나이가 들수록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옛날 불렀던 7080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나고 green grass of home을 들으면 갑자기 옛날 한 동안 혜화동에서 놀았던 것, 종로에서 술 먹고 까불었던 것, 미팅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첫사랑이 어디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도 생각날 것입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은 그 마음 내 마음’(1989년, 장인 가수 이용복이 부름)라는 노래 가사와 같이 돌아갈 수 없지만 그것이 내 마음의 고향이에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릴 때 있던 그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그 고향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물론 지금은 가봐야 다 개발이 되어서 ‘땅’이라고 부동산 간판이 걸려있겠지만요. 지금 서울에 가면 이쁜 축에도 들지 않지만 옛날 그 시절 그 때는 동네 순이가 왜 그리 이쁩니까? 그 나와바리(동네)에서는 제법 이뻤어요.
또 교회에 풍금 치는 누나는 어찌 그리 이쁜지요. 신기해요. 어떻게 풍금을 다 칩니까? 나중에 피아노 전공하면 풍금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지 다 알게 되지요. 어릴 때는 모든 게 아릅다운 토대(그라운드)에요.
그라운드는 그냥 내가 살던 땅이 아니고 나의 바탕이 되는 겁니다. 나는 거기에서 뿌리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누가 자기의 기억을 뿌리칩니까? 누가 자기의 기억을 거부해요? 길을 가다가 오랜만에 동창생을 만나면 갑자기 어린 시절 그때로 확 돌아가 버리는데요.
이걸 뿌리치고 어디를 가요? 내 본향이 다른 데에 있다고요? 글쎄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알기는 아는데 실제 우리의 감각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결국 성경과 따로 노는 거에요. 믿기는 뭘 믿어요.
그냥 예수 믿고 죽으면 행여나 천국에 보내주겠지라는 기대사항일 뿐이지 이 바탕(그라운드)은 여전히 땅에서 손톱만큼도 거기에서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땅에서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파키스탄이나 나이지리아에 선교사로 가도 자꾸 죽기 전에는 한국에 오고 싶어요. 그게 무슨 선교입니까? 그 나라를 가야지 왜 고향을 그리워해요. 어디 출장갔습니까?
12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됐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인생 속에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우리나 똑같아요. 진달래 먹고 다람쥐 쫓던 것이 뿌리이고 그것밖에 없고 거기에서 한 발치도 벗어나지 않았어요.
지금도 고향에서 사돈의 팔촌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줘야 되는 양 여깁니다. 그런 것을 못 벗어나는 것을 제가 사자성어로 ‘혈연관계’라고 했지요. 인간이 혈연관계를 어떻게 벗어납니까?
혼자 교회에 간다고 갔는데 그 시간에 애가 아프다고 하면 후닥닥 갈 수밖에 없는 이 내 자식에 얽히고 설킨 혈연관계에서 발을 뺄 수가 없어요. 한 덩어리인데 어떻게 발을 뺍니까? 성경에도 나와 있어요.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마태복음 10장에 잘도 나와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만 달랑 믿기를 원하지 그런 상황이 실제로 나한테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학수고대 한 적도 없고 오히려 겁을 내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만 그런가요?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 실제로 나에게는 안 나타나기를 자꾸 바래요. ‘실제로 이렇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러면 저 예수 못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는 혜택만 있는 상태에서 달랑 받기를 원하지 그것을 빼놓고 단지 성경귀절만 보면 너무 참혹하고 너무 고난이 엄청난 것 같아서 우리는 그것을 피하고 싶어해요.
그래서 성경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본다는 것이 큰 모험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속에는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증후와 증상과 증거들을 심어놓아 버립니다.
특징적인 것은 본인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의도하는 것과는 배치되는 것을 심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네 믿음은 안 받는다. 너를 대신해서 너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그분을 봐서 너를 구원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어(주체)가 내가 아니에요. 내가 신앙생활을 잘해서 내가 온전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하여금 본인의 의사와 그라운드(고향)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황으로 몰아세우십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몰아세우느냐 하면은 믿음의 주를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죽은 너를 대신해서 너의 새로운 제 2의 인생을 준비하는 그분이 계신 곳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고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찰칵하고 스냅사진을 찍어버리면 이 사람은 믿음 관계에 속한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것도 볼 때 잘 찍어야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믿음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이 되는 겁니다. 수요일날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것이 어려운 말입니다. 성도로 승인되었으나 성도로 확인되지는 않은 거에요.
승인과 확인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물어보지도 않고 승인한 겁니다. “너는 내 백성이고 너는 천국에 가서 살아야 돼.”라고 승인을 내렸는데 막상 구원 받은 우리는 이 삶 속에서 이것이 확인이 잘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났는데 진달래 먹고 다람쥐 쫓고 그 집에 가기 바쁘지 ‘주여 지금 죽이옵소서.’ 이런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니까요. 확인이 안 된다니까요. 워낙 얽히고 설킨 혈연관계가 많아요.
그런 동창생이나 친구들도 많겠지만 특히나 발목을 잡는 것은 자식 아닙니까? 자식이 아니고 자슥이지요. 자슥들이 발목을 잡으니까 집 안 일 해야 되는데 언제 주님 생각할 시간이 있습니까? 바쁜데요.
직장에 다니다가 그만 두면 금방 전화가 옵니다. “야야, 요새 놀지? 허리 아프다. 좀 와줄래?”라며 시가집에서 시아버지가 부르지요. 또 친정에서 논다는 소문을 듣고 “야야, 김장 같이 담글래?”라고 부르지요.
그 혈연관계를 무슨 수로 떨칩니까? 강아지도 배고프면 사료를 줘야 되는데요. 모든 것이 내 손길을 필요로 하고 심심해서 “나 좀 써주세요.” 하고 다가서기도 하고요. 산다는 것이 뭡니까?
이왕 살아 있는 것, 이대로 가는 것, 그게 살아 있는 거지요. 딴 길로 새지 않고 살던 식으로 사는 것 말입니다. 제가 오랜만에 좋은 소리를 합니다. 산다는 것은 그냥 추진력으로 가는 거에요.
교회는 잠깐 왔다가 가는 거에요. 예배는 쇼(연극) 구경하고 후딱 집으로 와야 돼요. 어떤 사람은 도중에 집으로 오는 사람도 있지만요. “예, 예, 예, 갈께요. 기다리세요. 가게 문 열어 놨어요. 곧 갈께요.” 하고 중간에 손님 왔다고 그냥 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후딱 왔다가 친목 모임하고 후딱 가는 거지요, 뭐. 그것은 이 히브리서 11장하고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네 안에 네가 사는 것이 아니요 네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것은 이미 성도로서 승인이 난 거에요.
이것이 하나의 청사진이요 설계도입니다. 우리는 겉돌고 있어요. 우리는 정신을 딴 데에 팔고 있습니다. ‘주님 주신 복으로 참 재미나게 삽니다.’ ‘어디서 재미나게 사는데?’ ‘예, 땅에서 재미나게 삽니다.’ ‘나그네 아니야?’ ‘전혀 그런 각오가 없는데요?’ ‘이방인 같은데?’ ‘다들 나를 좋아하는데요. 이방인 아닌데요.’
이번에 요한계시록 강의를 제가 대전에서 하는데 특(턱)별히 여러분한테만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이것이 결론이에요. 왜냐? 주님이 그렇게 승인해버렸어요.
내가 그것을 확인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확인이 안 됩니다.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내가 제일 좋아요. 그러나 그런 나밖에 모르는 천하의 죄인을 주님께서는 걸어다니는 요한계시록으로 승인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나한테 칭칭 감겨버리면 내가 지킬 것이 전혀 없습니다. 턱(특)별히 여러분들에게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성경을 지킨다는 것은 이미 관계가 성립되어가지고 못 지키는 거에요.
얽히고 설킨 것이 너무 많아서 땡기는 데가 너무 많아가지고 그래요. 따라서 아무리 가까이 가도 성경은 그만큼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 죄가 더 많이 생각나게 되어 있어요.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키면 지킬수록 성경과 나 사이에는 간격이 더 벌여졌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백지영이 부른 드라마 ost에 나오잖아요.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멀어지고’
성경 말씀에 다가가면 성경 말씀은 멀어지고 구제한다고 구제하면 성경 말씀은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나타나고 헌금한다고 다가가면 너 반만 냈지? 오늘밤에 죽여버린다고 다가오고..
도대체 다가설 수가 없어요. 성경을 모르고 목사말만 들으니까 ‘아, 이 정도 하면 목사가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착각을 하는데 실제로 성경을 보세요. 지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식 위해서, 남편 위해서 분주하게 세상일 다 하고 와서 피곤해가지고 성경을 보려고 성경을 폈을 때 “육을 위해서 심는 자는 썪을 것을 거두고 영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요한복음 6정)가 딱 나오면 ‘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다고 해놓고 왜 다른 말 하십니까?’ 이러는 거에요. 왜 사도바울은 말을 자꾸 바꾸십니까?
도대체 자체 내에서는 종합이 안 돼요. 자꾸 묻고 싶어도 엄한 소리한다고 충고 들을까봐 못하고 공개적으로 질문하면 ‘그것도 모르는 것 보니까 신앙도 안 좋으네.’ 하고 뒤에서 뒷담화 할까봐 겁나서 못하고요.
결국 모르겠다고 결론이 나지요. 믿음을 따라 난 사람은 내가 심지 않은 어떤 흔적이 나한테 들어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런 사람이거든요. 방주를 만드는 것이 노아의 아이디어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노아는 심부름꾼이지요.
그러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은 본인이 온전케 해서 온전케 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함이 방주라는 형태로 노아의 인생에 허락도 안 받고 사전에 협의 없이 투입되어 버렸지요.
강제로 치고 들어온 거에요.
그러니까 버스를 타는데 갑자기 운전 기사가 제 맘대로 급하게 운전해가지고 예상도 못하고 엎어져서 다쳤다면 이건 순교하려고 일부러 다친 것입니까? 그런 것 아니잖아요. 치고 들어온 거에요.
그러니까 순교하지 마세요. 제 말대로 막 사세요. 막 살면 믿음 따라 된 사람은 치고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거룩하게 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100% 신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를 조작하는 거에요.
자기의 인생이 따로 있고 주님 앞에 내세우는 근사하게 포장되고 믿음으로 범벅이 된 그런 작품을 자기가 나름 세워가지고 세상에서는 이 자아를 굴리고 주님 앞에서는 저 자아를 딱 내세워가지고 이중플레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 많이 안 해봤어요?
위선자로 사는 것이지요. 아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다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그런 짓을 하는 가운데서도 난데 없이 치고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밤중에 싸웠고 꿈을 꾸었고 이삭은 자기가 원하는 아들이 유산을 상속하지 못하고 거짓말쟁이가 뺏어갔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원하는 아들은 아들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저주 받는 아들이 자기 몸에서 태어나야 되는 거에요. 이스마엘이 저주를 받아요.
그리고 같은 아들인데 로마서 9장에서 에서는 창세 전부터 저주(미움) 받기로 작정되었습니다. 수요일날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자기는 하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죄지은 나 말고 본향에 준비된 나가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 따로 있는 것은 나한테 협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만들어 놓고 이 땅에서 그 진짜 자기(예수님이 준비한 그 나)를 바라보라고 이 땅에서 우리를 죽은 자로 보는 거에요.
그러면 아까 그 공식을 다시 봅시다. 죄를 지으면 죽음이 오지요? 이제는 공식을 바꾸세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인데요. 죽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죄 짓는 일만 하면 되는 거에요. 참 쉽지요? 평소에 하는 일이 다 죄 짓는 것인데요.
혈과 육밖에 모르고 자기 자랑밖에 할 줄 모르고 자기 자존심밖에 없는데요. 이미 죽었기에 죄가 나오는 이 작업을 주께서 실시를 해주는 겁니다. 이미 따로 창세 전부터 예수 안에 있는 나를 마련을 했기에 그런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를 편하게 해주시는지 이제는 마음 편하게 죄를 지을 수가 있어요. 말을 제가 잘하고 있는가 너무 막 나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데요. 제가 말한 죄는 새삼스럽게 지을 것 없이 평소에 뭘 하나 먹을 때에 주께 감사를 하지 않고 먹는다든지 하는 무심코 우리의 습관에서 나오는 죄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귤이 하나 썪었어요. ‘주님도 잘 삐졌다. 기도를 안 하고 먹었다고 그런 썪은 것을 주나.’ 이런 식으로 다시 주님과 연결시켜 주는 매사의 특이한 상황들 속에 보쌈당하듯이 싸이는 겁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이것으로 할까요. 이것이 마음에 드는데요. ‘자루’. 예수라는 자루 안에 들어 있는 우리, 보화.
옛날에 설날이 되면 한복입을 때에 복주머니가 있지요. 애들은 그것만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절할 때고 그것만 쳐다봐요. 얼마가 나오는지.. 요령이 없는 할아버지는 5만 원짜리 하나 끄집어 내는데 요령이 있는 할아버지는 천 원짜리로 50장을 바꿉니다.
완전히 주택자금도 아니고 두툼하게 내놓으면 애도 좋아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는 엄마가 더 좋아해요. ‘아버지께서 이제 돌아갈 때가 다 되었구나. 그래 이제는 아버지의 기반이 서는구나.’ 하고 까보면 천 원짜리에요.
천 원짜리 50장하고 5만 원짜리 한 장하고 손에 촉감이 달라요. 한 때나마 즐겁잖아요. 그러나 천 원짜리 줄 줄은 몰랐지요.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실린더, 또는 콘테이너(믿음)에 붙잡힌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탈탈 털리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의나 자랑거리나 모든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향에 가는 사람의 특징은 놀라운 기적들이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천사가 등장했어요. 그런데 천사가 등장하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천사가 등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천사말고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법’이 주어졌습니다. 성경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은 법이 육신의 법과 영의 법 두 가지의 법으로 쪼개져요. 갑자기 히브리서 나그네의 이야기를 하다가 로마서 7장으로 연결이 되지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 동네에서 몇 년 동안 나그네 생활했습니까? 몇 년 동안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같은 공간에서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하는 것은 구약적 계시의 무대입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공간이든 시간이든 상관이 없이 네 마음속에 법이 어떻게 동일하게 작용하느냐가 중요해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히브리서 11장 8절에 아브라함이 순종해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잖아요.
그러니까 쉽게 생각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일종의 지도책 위에서 걸어가는 방법을 사용한 거에요. 오늘은 여기에서 내일은 저기에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경주, 광주로 가듯이 이렇게 가는 방법을 사용했다면 오늘날 신약에서는 어디를 가지 않고 매일 똑같은 한 자리에서 계속 사는 거에요.
하여튼 집사님 이 빌라에서 참 오래 살아요. 이 한 자리에서 말이죠. 벌써 만난 지가 몇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살고 있잖아요. 계속 살고 있더라도 나그네가 되도록 하는 거에요. 육의 법과 영의 법 사이에서 난 나그네입니다.
마음으로는 영의 법을 좋아하지만 육신으로서는 육의 법을 좋아하지요. 그러니까 육신은 주께서 알아서 껍데기를 벗겨줘야 됩니다. 죽을 때가 되면 육신의 법을 주면서 삶의 무게를 벗겨줍니다. “그 동안 혈연관계로 얽히고 설켰기 때문에 무거웠지, 얘야?” 하면서 벗겨주게 되면 주 안에서 자는 성도는 안식합니다.
성도가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 주 안에서의 안식, 자는 것이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나그네는 끝난 겁니까? 물론 자게 되면 끝났지만 자기 전부터 끝난 거였어요. 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해서는 안 되겠지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마귀의 종이 됩니다. 항상 어떤 행동을 할 때는 그냥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이것 하면 더 살 수 있어요?’라는 태도를 가지고 어떤 행동에 나서게 되어 있어요.
안경을 바꿀 때도 ‘안경을 바꾸면 더 오래 살까?’ 이런 것이죠. 죽음에 쫓기듯이 나오는 것이 인간의 행동입니다. 죽음에 쫓긴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것보다도 어떤 모호한 공포, 두려움, 실패에 쫓기듯이 나오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인간은 꼭 도망자 신세같이 도망하면서 그렇게 평생을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이미 우리가 죽은 자와 방불한 것처럼, 마치 죽은 자처럼(as if)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로 하여금 성도로 승인된 것을 살아가면서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그거 봐. 내가 죽어도 괜찮다고 했잖아. 네가 실패한 것은 실패가 아니야. 누가 너 보고 실패라고 했어? 너에게 이미 믿음이 있으면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야. 환난, 핍박, 곤고, 적신, 위험, 칼, 어떤 것이 와도 네 속에 박혀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했다.(로마서 8장)’
너에게 평소에 자꾸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고 세상 사람과 같이 살다보니까 사실은 로마서 8장 말씀이 가리워진 거에요. 그런데 세상 일이 잘 안 되게 하셔서 우리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그 순간 우리 속에 박혀 있던 주님이 주신 믿음의 흔적이 먼지를 털어버리면 맨얼굴(민낯)이 나오듯이 말씀에 의해서 나온 거지요.
우리 자신이 요한계시록이잖아요. 평소에 요한계시록이지만 우리 자신은 요한계시록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삶을 삽니다. 그러다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먹구름 사이에 햇빛이 나오는 것처럼 잠시(잠시입니다.) 우리는 내가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렇게 아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고난’이라고 합니다. 즐거운 고난이지요.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고 목 베인다고 하지만 본인은 기분이 좋은 거에요. ‘아, 내가 이런 사람이지.’라고 성도로 승인된 것이 확인이 되는 순간이 고난의 순간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왜 저에게는 고난이 없습니까?’ ‘혈연관계에 묶여서 같이 도망간다고 보는 거지요.’ 뒤에서 좋은 것을 주려고 ‘어이, 학생.’ 하고 부르는데 ‘잡히면 죽는다. 예수한테 잡히면 죽는다.’ 하면서 내달려 도망치는 사람이에요.
말씀이 부르는데 말씀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기 바빠요. 혈연관계 속에 숨어들어가지요. 다시 기어들어가는 거지요. 드라마를 보면 그런 것이 나오잖아요. ‘어이, 청년. 좀 보세.’라고 어떤 허름한 할어버지가 부르니까 청년이 막 도망칩니다.
자기가 잘못 한 것이 있어서 도망하는 거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할아버지가 상속할 아들을 찾고 있는데 그 아들이 잘못 되어가지고 보육원에서 바꿔치기를 했다든가 해서 자기는 재벌 아들인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는 부모도 없는 고아, 거지 출신인 줄 알고 사니까 우연히 ‘만나게 해주세요.’ 하고 불렀어요. 그 틈을 알고 가짜 아들이 끼어들어가지고 그것을 감추려고 온갖 나쁜 일을 다하는데 그것이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거에요.
어쩌면 이 세상은 주님이 꾸며놓은 드라마입니다. 재벌이 부르는데 너무나 낯선 분이 불러주니까 우리는 익숙한 곳에 숨어버리지요. 익숙한 것이 편하니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육은 육신의 법을 따르기 때문이에요. 이제 로마서 7장이 이해가 되지요?
육신의 법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고 영의 법은 우리한테 상당히 부자연스러워요. 육신의 법이 실패로 끝나서 절망적이어서 울고 있을 때에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바울도 외치잖아요.) 누가 나를 건져주랴” 이런 기도가 기도거든요.
기도할 때 항상 뭔가 그냥 곱게 기도하는 법이 없어요. 꼭 따질 듯이 해야 돼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건져주랴”라고 기도할 때에 ‘아! 주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주님이 계시군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것은 주요’ 성도로 승인된 것이 주님에 의해서 또 다시 확인되는 순간을 우리는 매 순간 맞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영의 것을 내 손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마세요. 소유하면 빠져나갑니다. 우리가 소유해버려는 이 짓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뭔가 신처럼 되는 양 여기는 옛날 우리 조상의 DNA가 남아서 그런 거에요.
하늘을 나는 파랑새가 아릅답잖아요. 그런데 손에 잡아보세요. 더러운 냄새, 비린내가 나요. 멀리 있을 때는 주님이 아름답지만 가까이 와 보세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쥘 수 없는 분이에요.
다만 내가 쥘 수 없기에 우리가 믿는 믿음은 다 가짜인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은 하나의 수작에 불과합니다. 그냥 가짜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 수작을 부리는 우리를 안 놓으실 때 그 관계를 가지고 믿음, 소망, 사랑, 고린도전서에서는 은사라고 한 거에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에서 영의 법이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한 쪽이 일방적으로 장악하는 겁니다. 이 사랑을 구약에서는 다른 두 자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질투’
용어가 강렬하지요? ‘나 너 사랑한다.’ 이것보다도 ‘나는 네가 다른 데에 눈 돌리면 질투할거야.’ 김경호가 부른 노래에요. ‘네가 다른 데에 눈 돌리면 나는 너를 질투할거야. 미워할거야.’라고 하는 것이 더 사랑스럽지요?
그래서 사랑은 우아하고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이 아니고 폭력적입니다. 오늘 좋은 것 많이 배웁니다. 사랑은 폭력적이에요. 사랑을 뺏기지 않으려고 폭력을 행사하시는 주님이 요한계시록에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에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것은 가짜지요. 왜? 믿음을 가지면 자기가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니까요. 믿음을 따라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돼요.
마치 죽은 자처럼 되는데 그 이유는 모르지요. 왜 죽은 자냐? 살아가면서 계속 죄가 나와요. 영의 법을 좋아해요.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다 들은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영의 법이 아니고 육신의 법이 얽혀져 있어요.
그 얽혀진 것이 사실은 떠나야 될 고향이에요. 진달래 먹고 다람쥐 쫓던 이 곳이 좋은 곳이고 거기에서 출생했지만 떠나야 될 곳인데 우리는 떠나야 될 곳에 더 집착하는 겁니다. 더 좋은 다른 곳이 없으니까요.
좋다.(good) 나쁘다.(bad)의 가치를 어디서 결정했습니까? 이미 내가 태어나면서 가치를 결정했어요. 우리 부모와 모든 사람이 저에게 그렇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네가 이러이렇게 된다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이라고 일방적인 인간들의 사회에서 형성된 좋고 나쁨, 선과 악을 우리는 이미 교육을 받았어요.
그 교육을 받고 나중에 말씀 안에 보니까 나한테 이익이 되면 good이고 나한테 손해가 되면 bad가 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가 부자 청년이지요.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영생을 good으로 본 거죠. 거짓말이었습니다.
무엇이 good이었습니까? 돈이 good이었습니다. “영생이 그렇게 좋으냐?” “좋습니다.” “좋으냐?” “좋습니다.” “그렇다면 재산을 팔지?” “No good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거기까지 가는 것 같아요.
끝까지 죽어야 될 이유를 알지요. 그러니까 죽어 마땅함을 알게 하는 거에요. 죽어 마땅함을 아는 작업을 하는 이유가 성도로 승인된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당신이 왜 죽었지요?), 그 주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 받을 통로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아, 이래서 돌아가셔야 되는구나.’ 워낙 말을 안 들으니까요. 내가 내 말을 안 들어요. 그리고 내가 내 마음대로 나를 다룰 수 있는 관리대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천방지축, 자기 맘대로니까요. 아까 강의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자루지요. 자세한 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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