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8 - 솔로몬의 지혜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8 - 솔로몬의 지혜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8 - 솔로몬의 지혜
16,01,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교재 148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하나님과 왕이 세상전체를 지혜를 가지고 지배합니다. 그 왕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리스도' 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뒤에 '그리스도'가 붙지요. "하나님이 지정하신 왕은 오직 예수님 당신뿐입니다. 부처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마음은 왕 당신에게 있고, 예수님 당신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 지혜가 지배하는 세상 !!
여기에 보면, "하나님과 왕이 세상전체를 지혜를 가지고 지배합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지혜를 아는 자가 생명나무를 얻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게 잠언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게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는데,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다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지혜에 걸려들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지혜로 통치를 받았을 때, 지혜가 우리 인생을 삼킬 때, 지혜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 그 지혜와 더불어 생명나무도 함께 있다는 말이다. 특히 여기 잠언서 8장에 보면 이 지혜가 천지창조에 관여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지혜로 하셨고, 그 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라는 것이다.
(잠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잠 8: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항상 염두에 두어야하는 것은, 그것을 누구에게만 하신다는 말인가? 그게 언약의 백성에게만 하신다는 말이다.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언약의 백성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을 아주 성급하게 붕 떠서 결론을 내린다고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말씀하셨다" 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언약은, 깡패와도 같아서 !!
인간에게는 언약을 주어도 그 언약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괜히 오해만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약의 백성이다. 그 언약을 가지면 구원을 얻는다" 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주셔서 우리가 그 언약을 알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우리 안을 파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언약을 중간에 받아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면 안 되고, 언약이 파고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는가? 우리의 마음은 훌라후프와도 같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 훌라후프 속에 액체와 같은 주체가 흐른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주체는 자기 주체가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인 것인데, 그 주체는 말씀대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안에 누가 들어왔다는 말인데, 도적같이 말이다. 전혀 허락도 맞지를 않고 들어왔는데, 그래서 우리는 "왜 도적같이 들어오십니까?" 라고 물으면, 주님은 "처음부터 너의 것은 없었다. 내 것을 내가 접수하겠다고 하는데, 니가 왜 말이 많아"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 이제 내가 접수하겠어 !!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상당한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무심코 교회에 다니고 무심코 세상을 살게 되면, 매일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내 인생이 이렇노?"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돌아서면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한다는 말이다. 즉 "내 인생을 이렇게 주님이 조져놓았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그리고 우리 가족은 또 어떻게 하라고? 아이쿠 불쌍한 내 자식!"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자기 것만을 생각하는데, 그래서 언약을 주신다고 해도, "언약을 주면 뭐하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언약이 무슨 돈이 되나?" 라고 하는데, 그러니 언약을 마치 자기가 관리하는 것처럼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언약이 우리 속을 휘젓고 다녀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언약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시도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하루에 몇 장을 보고, 기도는 얼마나 하면 됩니까? 일주일에 교회는 몇 번을 가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언약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데, 언약은 마치 깡패와 같아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온다는 겁니다. 집달관이라고 하면 더 적합하지 싶은데, 마구 들어와서 빨간딱지를 붙이고 간다는 말이죠. 그 빨간딱지가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모르는데, 피 뭍은 손으로 붙여놓고 간다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의 자기 것으로 접수해버리신다는 말이다.
◈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것을 몰랐는데, 성령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성신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것이 좋다고, 그렇게 하나님과 잘 지내면 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말을 잘 들고 좋게 지내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고 말이다.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그들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말씀을 들을 때는 '아멘'을 하지만, 돌아서면 "내 인생을 누가 이랬노? 왜 이렇게 조졌노?" 라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직접으로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빙 들러서 원망을 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압박을 가하고 말이다. 주님에게 정선을 다해서 헌금을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마치 뇌물처럼 보이는 우리의 모습, 그러니 우리가 언제 거듭나겠는가? 죽지 않으면 불가능하지 싶은데 말이다. 그때는 "아하, 평생 나의 것이 없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물론 죽을 때라도 그런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언약이 우리 속에 침투해서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 언약은 우리의 말을 전혀 듣지를 않는데, 그러면 누구의 말만 듣는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말만 듣고, 우리 안을 마구 휘젓고 돌아다니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언약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의 경우에, 친구 분들이 놀러오면 아주 반갑게 맞이하는데, 그런데 제가 가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저 놈의 여편네들이 아직도 가지 않고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ㅋㅋ).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경향이 있는데, 즉 "내가 이렇게 힘들여서 만들어놓았는데, 주님이 뭐라고 마음대로 평가하십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치매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다윗언약에 고정이 되어있기에 그 다윗언약대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소경을 낫게 할 때 소경이 뭐라고 합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지정된 통로를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라는 뜻이 포함되어있다는 겁니다.
(마 20: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
소경 둘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강의한 것에 의하면 '언약의 주여!' 라는 의미인데, 그런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할 때, 그 '우리' 라는 것은 언약과는 동떨어진 자기들밖에 모르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 이익만 챙기는 '나' 라는 것인데, 그게 과연 결합이 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소경이 눈을 떠도 그게 오히려 그들에게는 심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주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도 독특한데, 소원대로 해주시면서 심판을 해버린다는 말이다. 소원대로 해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심판인데, 왜냐하면 눈을 뜨고 나서 이 소경들은 주님 앞에 다시 오지 않았는데, 다른 곳에서는 한 사람인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여기 마태복음 20장에서는 소경들이 주님을 쫓은 것으로 되어있는데요?)
그러니 이렇게 되면 자기의 소원대로 한 것이 그만 문제가 되는데, 즉 "내 입에서 내 소원이 주님을 향해서 따로 발사되었다" 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감추어진 속마음이, 주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튀어나오다가 주님에게 들켜서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주시옵소서' 라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잘 걸렸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평소에 너희 마음속에 나에 대한 생각도 없고 언약도 없고, 단지 이게 아쉬워서 속으로 나를 원망했지? 이제 잘 걸렸다. 너의 소원대로 해주마" 라는 것인데, 즉 "너의 실상을 이제 내가 알려주겠다. 너는 너의 욕망에 휘둘리면서 살아온 너 자신이야"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언약에는 관심이 없지?" 라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언약에 관심도 없으면 도대체 언약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가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 나는 저 친척집에 놀러가고 싶어 !!
저의 경우에는 친척들이 참 많았는데, 저의 어릴 때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가고 싶은 친척집이 있고 가기 싫은 친척집이 있다는 말이다. 촌에서 올라와서 "형님요,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친척집에는 가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런데 좀 산다고 하는 친척집에는 가고 싶다는 것이다. 평소에 잘 보지 못하는 물건이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올 때는 용돈도 좀 생기고 하니 말이다.
이것과 관련을 지어서 생각해보면, 만약에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곳을 주님께서 천국이라고 만들어놓았다고 하면, 우리는 천국 이야기를 하더라도 거기는 가고 싶지 않은 천국이 된다는 것이다. 친척집에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은, 어린 마음에도 자기가 결정하고 싶어하는데, 즉 "나는 저 집에는 가기 싫어. 하지만 그 집은 좋아. 가고 싶어" 라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만든 천국은 우리의 그런 결정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데, 자기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가고, 또한 가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따로 만들어놓은 동네가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가려고 하면, 그게 좋던 싫던 간에 먼저 자기 마음이 바뀌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선택에 대해서 자기가 의심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선택에 문제가 있음을 기꺼이 수용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두고 '자기 부인'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자기의 선택이 자기 인생을 망칠 수가 있다는 것을, 즉 "아하, 나 자신이 곧 나의 구원을 가로막는 요인이구나" 라고, 그렇게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내 존재의 바탕에 악이 있다 !!
이것을 어렵게 이야기하면, "내 존재의 바탕에 악이 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별로 어려운 이야기도 아닌데,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당연히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옛날 이야기라고 여기지 말고, 자기를 구성하는 본질이 원래 악이 거기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즉 악에서 출발해서 지금의 자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태어나고 난 다음에는, 악과 자기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그게 남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죽음이나 천국을 이야기하면 아주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데, 먼 먼 미래의 일로만 여겨진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십대야. 그런데 왜 죽어?"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죽음이 어디 그러하냐는 말이다. 세월호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십대라고 해서 결코 죽음이 비켜 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바로 자기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아니 죽음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아니 더 나아가서 자기 속에 이미 죽음의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어떻게 그런 철없는 아이들이 알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죽음의 힘이 살고자 하는 힘을 이기고 있다는 말이다.
금수저를 태어날 때부터 손에 들고서 나왔다고 하는 재벌3세의 경우에, 그들이 기껏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급 술집에 가서 고급 양주를 마시는 것을 자랑하고,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모는 것을 자랑하는데, 사실 진짜 재벌3세는 그런 자랑도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한 끼에 20만원을 하는 식사를 했느니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들이 바로 죽음의 요소라는 것이다. 죽으려고 환장을 했기에 그런 고백들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돈이 많은 재벌3세가 "나는 부자다" 라고 했을 때, 남들이 보기에 그것이 맞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나는 죽을 자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보다 정확한 인간의 본래 자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든,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주어지는 제대로 된 자리라는 말이다.
◈ 매일같이 어린양이 죽어나가는 성전 !!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고 하니, 그것은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에 성전이 있고, 거기에서 매일같이 어린양이 죽어나가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성전의 한 복판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인데, 달리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는 이런 시각으로 보신다는 말이다.
어린양 속에 우리의 죄가 전가되어있고, 그 어린양을 죽이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어린양에서 더 벗어나서 성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것은 바로 어린양의 존재에 수렴된다는 것이다. 즉 어린양에 다 연결이 되어있다고, 그렇게 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죽으려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들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아침마다 조깅을 하고 말이다. 어떻게 하면 더 오랫동안 죽지 않고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피곤해도 난리가 나는데, 마치 자기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남들은 아파서 병원에 가도, 자기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특권의식에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다.
이번 수련회에서도 했지만, 창세기 5장에 보면 '죽었더라' 라는 것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고 있고, 그게 정상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사실은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이 정상이고, 죽는다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죽었더라' 라는 것이 너무 많다가보니, 우리는 그것이 정상이고, 그래서 "살다보면 죽겠지" 라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창 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6)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 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8)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 유일한 인간은 오직 예수님뿐 !!
그러니 '죽었더라' 라는 것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그 인간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처럼 비정상적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리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서, "바로 너희들이 비정상이었다" 라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부활하심으로서,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자라는 것을, 즉 유일한 인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알려주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데, 즉 "잃었다가 다시 얻으면 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삶이 잃어버리는 과정을 겪고 있다고 여기면 되는데, 그러면 이미 구원이 된 사람이라는 말이다.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살다가 언젠가는 자기 목숨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즐거워야하고, 당연해야하고, 감사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순서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코카콜라 병이 서서 콘베어벨트에 의해서 차근히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144,000명의 그 구원받은 자로서 서있기 때문에, 마치 펭귄이 남극에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대로 우리도 흰옷을 입고 서있는, 그런 절차 가운데 놓여있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의 피가 묻은 흰옷인데, 그러니 죽는다는 것, 그것을 난데없는 것으로,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강의처음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과 왕이 지혜를 가지고 지배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이 통치하시는, 즉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지혜의 일부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용도로서, 그래서 우리가 죽어야만 하지만 아직 죽지 않고 "이것이 지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이렇게 살아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자의 여유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솔로몬의 지혜 !!
그러면 그 지혜는 과연 어떤 식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고 하니, 그게 교재 149페이지에서 150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거기에는 그 유명한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내용인데, 그래서 미리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지혜가 침투하게 되면 노선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노선의 변화는 전쟁을 유발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면 무엇을 압박하는고 하니, 노선의 변화, 즉 우리의 인식체계를 변화시키게 되는데, 그 노선의 변화는 이 세상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텅텅 비어있고, 그 군데군데 산이 있고 강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지혜가 들어오게 되면 이 비어있는 것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꽉 차있는고 하니, 지혜에 대해서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즉 지혜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힘이 이미 상주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평소에 꾸준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영적으로 보면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인데,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받아내는 보자기가 마귀가 펼친 보자기라는 것이다. 그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손들에게도 죄가 왕 노릇을 한다고 한다는 말이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죄의 왕 노릇 !!
그러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는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그것만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무엇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말인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지은 것만큼이나 지금도 그와 동일한 죄의 권세 안에서 우리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지시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의 통제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왕 노릇' 이라고 하는데, 즉 죄의 왕 노릇이라는 것이다.
요즘 왕 게임이 인기가 있다고 하는데, 5명이 왕 게임을 해서 왕이 된다고 하면, 5명 중에서 한 명이 왕이 되는데, 그러면 나머지 4명은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것이 아니라, 5명이 있다고 하면, 5명 말고 숨겨진 왕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따로 있는 그분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귀를 보고 그분이라고 하면 안 되지만 말이다.
아무튼 마귀가 보이지 않으니 자기가 왕인 것 같은데, 그런데 막상 하는 행동을 보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구와 욕망에 늘 쫓기고 시달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그것은 내 뜻이 아닌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자기의 뜻보다도 자기를 조종하고 다스리는 힘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된다는 말이다.
◈ 마귀와의 소통 !!
이번에 수련회를 하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마귀마저도 주의 손에서 다루어진다" 라고, 아주 짧게 했다는 것이다. 마귀도 주님이 다 쓰시는데, 그러니 정작 우리는 싸울 것이 없는데, 뭘 싸운다는 말인가? 마귀에게 속한 인간이 어떻게 마귀와 싸우는가? 모두가 같은 한 패인데 말이다.
그렇게 마귀와 한 패라는 것을 인문학 강좌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소통'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격이 똑같은데, 둘 다 마귀라는 말이다. 인간을 위한, 즉 '나'를 위한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세상이 자기를 위해서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미친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런데 인문학 강좌에서는 그것 말고 달리 내릴 결론이 없는데, 더욱 더 마귀의 자식을 마귀의 자식으로 만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에 있어서, 그 지혜가 침투하면 노선을 변경시키게 되는데, 즉 죄 안에 갇혀있는 인간을 의 안에 갇혀있는 인간으로 말이다. 그게 예수님을 믿으면 그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차후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아하, 바뀌었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인식자체를 바꾼다는 것이다.
◈ 내일도 승리 !!
원래 신분이 회장님의 아들인데, 그만 태어날 때에 뭔가가 잘못되어서 그 아들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 아들이 달동네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아버지가 어떻게 수소문을 해서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 아들이 자기가 재벌2세라고, 그렇게 인식을 바꾸는 문제인데, 그것이 곧 지혜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버지는 아는데, 아버지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비밀에 부침으로서 아직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 회사에서 평사원으로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곧 아들도 알게 되지 싶은데, 이게 MBC의 아침 드라마인데, '내일도 승리' 라고 말이다(ㅋㅋ).
그게 인식의 변화인데, 즉 우리는 이미 천국의 백성인데,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죄를 짓는 것만 배워서 말이다. 죄를 짓는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칼을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사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천국은 주님의 위해서 사는 나라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이 없고,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산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아무런 감각자체가 없는데, 그것이 잘못이라는 인식자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에 그러하다는 말이다.
이제 솔로몬의 지혜가 좀 와서 닿는지 모르겠는데, 솔로몬의 지혜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과, 그리고 똑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 가운데서, 두 부류가 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식밖에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제3자인 지혜가 투입이 되면, 그들은 "내 자식이 최고다" 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거기에 죽음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이제 정리해보면, 지혜가 이 땅에 올 때 어떤 식으로 오는고 하니, 우리 자신의 것을 빼앗는 식으로, 그렇게 죽음으로 다가와서 노크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문을 열어준다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 베세비우스 화산과 폼페이 유적 !!
여기에 적절한 예를 다음과 같이 들 수가 있는데, 베세비우스 화산이라고 있는데, 그게 이탈리아에 있는데, 거기에 가면 시커먼 흙 언덕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그런데 거기에 보니 구멍이 뚫려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고학 학자들이 그 구멍에 석고를 부어보았는데, 그리고는 흙을 치우고 그 석고의 모양을 보니 그야말로 몸부림을 치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00년 전에 폭발해서 폼페이라는 도시 전체를 날려버린, 그 유적발굴의 시작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베세비우스 화산이 터져서 도시 전체를 그만 덮어버렸고, 그게 무려 2,000년이나 지나면서 사람은 유골까지 다 썩어서 사라지고, 그 공간만이 구멍의 형태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구멍에다 석고를 부으니 그 당시 죽을 때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이 되었다는 말이다. 개의 모습도 있고 말이다. 그게 오늘날 폼페이의 유적이라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지혜가 이 세상에 와서 어디를 치는고 하니, 죄가 이미 왕 노릇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 죄로 덮인 구멍에 주님께서 자신의 지혜를 집어넣는데, 그러면 죄의 왕 노릇으로 인해서 죽게 된 인간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치 석고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죄 속에 주님의 피를 집어넣게 되면, 피가 곧 언약의 완성인데, 그렇게 피를 구멍 속에 넣게 되면 그 하나하나가 이 세상이 마귀에 속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마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러니 이 세상은 그냥 고요하다는 말이다.
◈ 요란한 정숙 !!
이번 수련회의 7강 제목이 원래 '요란한 정숙'이었는데, 그것을 담당하신 목사님이 별로 마음이 들지 않았던지 고요한 정숙으로 바꾸고 말았는데, 그러면 반복되는데, 정숙도 역시 고요한 것이니 말이다. 원래 제가 의도한 것은, "요란하지만 그게 고요하다" 라는 의미인데, 마귀도 없고, 그냥 인간이 태어났다가 인간이 죽는다는 말이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인데, 영겁의 세월이 옛날부터 그렇게 흘러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지혜로 발굴해보니까, 비로소 마귀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인간을 죽게 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정녕 죽으리라" 라는 것처럼, 따먹지 않아야 하는데, 마귀가 따먹게 해서 인간을 죽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죽음의 시체더미들이 바로 마귀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는데, 하지만 여전히 마귀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귀가 있기에 벌어지는 상황의 결실들이 온 지구상에서 대대로 우리에게 펼쳐지고 있는데,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만 잘 살면 최고라는 말이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해도, 자기 자신이 바로 그 귀함의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바로 이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인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라는 것으로, 그렇게 인식의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디모데후서 1장 9절을 보자.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부르심과 구멍 뚫기 !!
여기에 '부르심'이 나오는데, 이게 바로 '구멍 뚫기' 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전혀 나올 수가 없는데, 역부족이라는 말이다. 죄가 왕 노릇을 하는데 무슨 수로 나온다는 말인가?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도 역시 죄가 된다는 것이다.
자기 주제 파악도 전혀 되지를 않은 상태에서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죄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가면 그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가 아닌 자기의 나라가 된다는 말이다. 즉 "나는 부르짖어서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한다는 것이다.
부르짖어서 천국에 갈 자는 한 사람도 없는데, 그쪽에서 불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초청장이 와야한다는 것이다. 어제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서 연락이 와야한다는 말이다. 물론 연락이 오면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여기 디모데후서 1장 9절에도 나오지만, 영원 전부터 이미 구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성령이 오게 되면, 즉 성령이 오게 되면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래서 "아하, 나의 구원은 내가 노력해서 받는 것이 아니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시동을 걸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부터 이미 계획이 잡혀있어서, 그런 계획대로 진행을 하다가 보니, 자기가 창기가 되고, 강도가 되고, 또한 세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한 달 수입이 2,500만원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세 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부도가 나고 말이다.
그러니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주님께서 구멍을 뚫어서 석고를 붓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래서 성도라고 하면 "나의 나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지혜의 석고덩어리인데, 성도의 죄 안에는 구멍이 여기 저기 뚫려서 주님의 십자가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 튜브 안의 액체주체 !!
그것을 어제 설교를 하면서 그것을 '튜브 안의 액체주체' 라고 했는데, 마치 훌라후프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것처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언약완성이 흐르면서 자기 안에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있다는 것인가? 주님이 활개를 치면서 돌아다니신다는 것이다. 그게 바깥으로 표현될 때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말이다.
그것이 성령을 받아야만 가능한데, 즉 성령의 힘이 곧 초청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도 않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을 시켜서 자기가 마치 신자라도 된 것처럼 흉내를 낸다고 한다면,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면 왠지 너무 너무 밉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바로 짝퉁인데, 그러면 왜 짝퉁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을 보면 짐승이, 즉 악마가 계속해서 가짜 신자를 양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복음을 알면 구원을 받는다. 십자가를 알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악마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십자가에서 멈추면 안 되고, 이제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니 혼자서 살면 안 되고 모이기를 힘써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공동체를 만들어서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경전체의 주장이고, 또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을 제대로 구체화하는 현상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두가 가짜라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여러분이 잊어버렸지 싶어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지혜가 오게 되면 먼저 인식변화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는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즉 주님이 택한 자와 그 택함을 모방한 자 사이의 전쟁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애비는 마귀라고 했는데, 그런데 바리새인은 그 당시에 그 누구보다도 최고로 말씀대로 산, 즉 말씀 생활화의 모델케이스가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과 똑같은지 모르겠는데, 오늘날 가장 마귀적인 자가 누구이겠는가? 어제 낮에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수녀에 대해서 말이다. 수녀들이 그런 복장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인데, 그리고 수녀들이 참기름을 짠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게 하늘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ㅋㅋ). 모르기는 해도 신부들이 수녀들과 같이 일을 하면 기겁을 하지 싶다는 말이다.
◈ 과도한 잔소리의 비참한 말로 !!
보통 남자들은 아내가 법적으로 한 명인데, 그 한 명의 잔소리를 평생 듣는데, 그러면 그야말로 지긋지긋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아내가 남편을 보고 커피포트의 코드를 뽑으라고 잔소리를 했다고 해서 총으로 쏴서 죽였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잘못된 것이지만, 얼마나 잔소리가 듣기 싫었으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많이 참았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 남편이 모든 남편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데, 그런데 성당에 가면 신부는 한 명인데 수녀는 열 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잔소리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신부들이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는데, 나중에 성당의 주임 신부라도 되면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하지만,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짐인데, 자기 자신도 귀찮은데 남이라면 오죽 귀찮겠느냐는 말이다. 세상 전부가 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인데, 결혼을 할 때는 좋다고 난리를 치지만, 한 번 살아보라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라고, 서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부부관계가 유지되는고 하니까, 없으면 심심하다는 것이다. 심심해서 같이 산다는 말이다. 없으면 나중에 그 잔소리조차도 그립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자가 죽으면 그렇게 우는데, "나는 지금부터 무슨 재미로 사노?" 라는 것인데, 그러니 처음부터 자기 재미밖에 없다는 말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고, 자기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발 죽지 말고 같이 살자. 왜냐하면, 나의 재미를 위해서 너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부부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약을 달여서 먹이고 한다는 말이다(ㅋㅋ).
◈ 마귀에 사로잡힌 인간들밖에 없어 !!
솔로몬의 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지혜가 도착한 지점에는 모두가 마귀에 사로잡힌 인간들밖에 없다는 것인데,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쁘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악인데, 그런 "나는 좀 더 착하고, 너는 좀 더 악하다" 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라고 할 때는, 그렇게 돌로 칠 수 있는 자는 예수님 자신밖에 없는데, 그 누구로 돌로 칠 위인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빠서 돌로 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르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사람은 돌로 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솔로몬의 재판에 있어서, 그 여인이 자기 아들을 양보한 것 자체를 두고 지혜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지혜라기보다는 일종의 상황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여인은 자기는 어차피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쪽의 고집이 더욱 세니까 말이다. 그래서 "죽이느니 차라리 그냥 주자" 라고,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 주부가 콩나물무침을 하기 나름 !!
그런데 지혜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서, 콩나물무침을 할 때 보면 참기름도 넣고 깨도 넣고 하는데, 그런데 콩나물이 무슨 죄가 있는가? 그런데도 삶아서 주물럭주물럭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만드는 주부의 마음인데, 콩나물이 어떻게 해달라고 해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지혜가 와서 우리를 주물럭거리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알아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콩나물무침만 만들어내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광야에 누가 있었는가? 목자들이 양을 치고 있었는데, 그 목자들이 묵시를 보았다는 것이다. 천사가 등장하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목자가 나중에 목자 협의회의 회장이라도 되었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가 똑같은데, 즉 콩나물을 무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어디 그 목자들이 그렇게 아기 예수를 보았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자기들이 치는 양들이 다 잘되고 해서 수입이 왕창 올라가고, 또한 자기 집안이 잘 되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 뒤에 성령이 늘 따라다닌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들은 그때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고, 그리고는 아기 예수를 한 번 보았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은퇴라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아주었다고 해서 천국에 특석을 만들어놓았는데, 그래서 기도를 하면 마리아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가 힘을 좀 써주어야 예수님에게 도달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악마의 모습인데, 물론 기독교도 여기에 못지 않지만 말이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마리아는 십자가를 졌는가? 성령을 받지 않아서 십자가를 믿지 못하고, 그래도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등장한 것이 마리아라는 것이다. 마리아를 이용해서 그런 식으로 조직을 꾸몄다는 말이다.
◈ 나도 목사다 !!
그렇게 성령을 받지 않으면 결국은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같이 "나도 신자다. 나도 목사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말씀이 와야만 하는데, 그런데 정작 말씀이 오지 않으니 그 말씀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말씀을 잘 전하는 목사라는 것인데,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자기도 목사 대우를 해달라는 것인지 말이다.
그것을 제가 이번 수련회를 하면서 그림으로 그렸는데, 즉 이렇게 역사가 있고 묵시가 있다고 하면, 그 교차지점에 십자가 사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보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하, 십자가를 믿게 되면 역사와 묵시가 다 나의 세계가 되는구나. 그러면 나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맞네" 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게 하나가 되면 그 전체가 다 역사로 전환이 되면서 주님은 여기서 빠져서 나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믿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닌데, 이미 자기 소유가 되었기에 말이다. 자기 구원을 뒷받침해주는 십자가가 되면 이것은 곧 우상숭배인데,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가 죽은 자가 되어서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는 기능인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구원을 가지는 게 전혀 아닌데, 주님이 자기를 가지게 되면 더 이상 자기가 구원을 소유할 이유도 없고, 더 이상 자기가 설칠 이유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9강 마지막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티내지 말고 나대지 말자" 라고 했는데, 그리고 "유난을 떨지 말자" 라고 했지 싶은데 말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라고 하는데, 그 다음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르심'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즉 구멍을 뚫어서 석고를 부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 우리의 허락도 없이 십자가의 피를 넣어버렸다는 말이다. 주님의 지혜의 완성을 말이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이스라엘에 두 창기가 있었는데 !!
솔로몬 지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솔로몬이 다스리는 나라인 이스라엘에 두 창기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도 이렇게 창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오래된 직업이기는 하지만 결코 좋은 직업은 아닌데 말이다. 자기 몸을 팔아서 돈을 버는 직업이니, 고상하고 거룩한 직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들이 어떻게 아이를 잃던 말던 간에 단체로 나쁜 여자라고, 그렇게 몰아서 내칠 수 있는 대상이 바로 두 명의 창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쁜 곳에 지혜가 가는가? 가지 않는가?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어떻게 나쁘고 좋고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모두가 다 나쁘다는 것이다.
◈ 창기는 더럽지만, 너는 착해 !!
그러면 "창녀는 더럽다" 라고 하는 누구의 생각인가? 주님의 생각이 아니라, 창기가 되기 직전까지의 바로 우리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분명히 창기가 되면 다른 소리를 하는데, 그렇게 인간은 항상 자기 존재를 긍정하려고 하고, 그것을 사수하는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죄가 그런 식으로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선하다" 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마귀가 우리와 소통하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을만해서 따먹었는데, 그게 어때서? 오히려 그것을 닦달하는 하나님이 나쁘다" 라고 하면서, 마귀는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속삭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우리 인간을 격려해주는데, "그럴 수도 있어. 힘을 내. 너는 가치가 있어. 너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속에서 우리 자신이 나오면 죄가 되고, 반면에 우리 속에서 주님이 나오면 의가 되는데, 그게 바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물론 말씀을 들을 때는 자기가 들어가 있지만, 돌아서면 또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우상숭배는 그야말로 끝이 없어 !!
오늘 낮에 일기예보를 들이니 대구에도 20밀리미터의 비가 온다고 하는데, 그것을 들이니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눈이 온다고 하면 성경공부를 하려고 오다가 들이박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누구의 생각인가?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데, 자기가 편리하도록 말이다.
주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러니 자기 자신이 진작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어야 죄를 짓지 않는 것이지, 그렇게 않고 살아서 숨쉬고 있는 이상은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 위주의 우상숭배는 그야말로 끝이 없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또 뭐라고 하는가? "그래, 복음을 위해서 살다보면, 그렇게 복음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 착하다고 주님께서 인정해주시겠지" 라고 나오는데, 누구 마음대로 착하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왜 복음을 자기가 독점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도대체 십자가가 누가 졌다는 말인가? 자기가 십자가를 진 것이 결코 아닌데, 그러니 십자가도 지지 않은 인간이 복음을 결코 독점할 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독점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십자가 마을을 욕하는 사람들이 이런 대목은 왜 인용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 다시, 두 창기의 경우에 !!
지금부터 어려워지는데, 그래서 약간은 주춤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두 창기의 이야기에 있어서, 한 여자가 잠을 자다가 그만 실수로 아기를 깔아서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만 그 여자가 어떻게 하는가? 같은 집에 살면서 동시에 낳은 다른 여인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자기 아이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증인이 없는데, 각자가 다 자기 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자기들끼리는 어떻게 해결이 되지 않으니 솔로몬에게 데리고 와서 재판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제3자인 솔로몬이 개입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개입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같으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유전자 검사를 받으면 백발백중이겠지만 말이다.
(왕상 3:16)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왕상 3:17)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왕상 3:18) 나의 해산한 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왕상 3:19)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왕상 3:20)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왕상 3:21)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왕상 3:22)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매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상 3:23)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왕상 3:24)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상 3:25)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왕상 3:26)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상 3:27)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왕상 3:28)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 무화과나무와 솔로몬의 지혜 !!
이것을 설명하기 이전에 어제 오후시간에 설교한 것을 잠시 다시 살펴보면, 시간상 많이 자제를 했었는데 말이다. 그게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으로부터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해서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마 21: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그리고 예수님이 지나가셨는데, 그런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구나. 나중에 때가 되면 다시 와서 따먹어야지" 라고 하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생각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과 무화과나무는 한 시대에 같은 집단으로 같은 법으로 묶여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하시는가? 때가 되지도 않은데 열매를 달라고 했고,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하니 그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되는가? 무화과나무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같은 법에 묶여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게 잘못된 일방적인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무화과나무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제자들은 전혀 관여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하겠는데, 제자들의 경우에 "무화과나무는 우리가 잘 안다" 라고 하는데, 즉 때가 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하는 자연법칙 정도는 안다고 나온다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만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해서 저주를 해버리니까, 자기들이 안다고 하는 대상에서 무화과나무는 그만 제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우리가 우리를 과연 아는가?
이것은 그리 많이 어렵지가 않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우리를 과연 아는가?" 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겁을 내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우리의 생각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은 "무화과나무는 때가 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할아버지가 오셔도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때가 되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저주를 받아도 당연하지만, 하지만 이 무화과나무는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 나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떻게 하셨는가? 그렇게 정상적인 나무라고 여겼던 무화과나무를,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그만 저주해버리니 바짝 말라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뭔가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우리가 그 무화과나무를 마치 잘 아는 무화과나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바로 무화과나무와 같은 신세가 우리의 신세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래서 제자들은 겁이 났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앞 뒤 논리가 맞지 않는데,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을 가지고 저주를 해버리면, 그 다음은 누구의 차례라는 말인가? 제자들의 차례인데, 주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도록, 그것을 주님께서 유도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와 동일한 것인데, 지금 이것을 아이를 어떻게 살리고 말고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발단은 무엇인고 하니, 다른 두 창기 사이에 심각한 의견충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창기들이 있는 현장에 한 번 가보자는 말이다.
◈ 언약 안에 숨어있는 지혜는, 왕을 통해서 구체화가 !!
그래서 교재 148페이지에서 "하나님과 왕은 이 세상을 지혜로 다스린다" 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언약 안에 숨어있는 지혜는 왕을 통해서 드디어 구체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인가? 지혜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과 결합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결합이 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을 뛰어넘는, 즉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는 것처럼, 그런 상식 밖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두 창기의 이야기인데, 그냥 여인이라고 하고, 그 여인이 같이 잠을 잤는데, 한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죽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고 하니, 물론 본의는 아니지만 아이를 죽인 여인을 'A' 라고 하고, 즉 가해자인데 말이다. 그리고 억울한 여인을 'B' 라고 한다면, 즉 피해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해자와 피해자라고 해도 양쪽이 다 선악체계 안에 들어있는데, 즉 "억울함을 당한 나는 착하고, 나에게 피해를 입힌 저쪽은 나쁘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를 그런 선악체계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인식자체를 말이다. 그러면 지혜가 와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해버리면 되겠는가? 그렇게 판정이 나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약간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아기를 잃어버린 여인 쪽에서 자기의 선악을 그만 솔로몬 왕에게 맡겨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피해를 입은 여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자기가 그만 생각을 중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앞으로 자기 자식이 어떻게 될지,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그만 손을 놓게 된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지혜라는 것이다. 즉 "저는 저 못된 여자를 그만 작살을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 라는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의 아이를 억울하게 잃어버리기 이전까지는 누가 자기의 가치를 판단했는고 하니, 자기가 자신의 가치를 꽉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도달한 자에게는, 진리가 그 사람은 자유케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의 가치, 자기의 운명, 자기의 팔자를 누구에게 일임을 해버리는데, 그게 누구라는 말인가? 자기를 찾아온 지혜라는 말이다.
◈ 주여, 쪼개소서 !!
자기를 재판하고 자기를 판정하는 유일한 재판장에게, 피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다 맡겨버린다는 것이다. 즉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임신할 필요는 없는데, 굳이 그렇게 임신하지 않아도 "주여, 주의 종이니 말씀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자 솔로몬이 뭐라고 했는가? "아이를 둘로 쪼개라" 라고 했는데, 이게 이번 겨울 수련회의 주제였는데 말이다. 쪼개지지 아니하면 숨겨진 원수가, 즉 하나님의 지혜에 대적하는 주의 원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련회 때 "우리 자신을 쪼개야 합니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자식을 쪼갤 때, 그 어린 자식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 아이를 쪼갠다는 의미도 전혀 모르는데, 그러니 그것을 누구에게 한 말이겠는가? 솔로몬이 두 명의 엄마에게 했다는 말이다. 아기는 엄마의 일부인데, 그러니 "너희 자신을 쪼개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솔로몬 왕이 도끼를 들고 "내가 너희 두 명의 여인을 다 쪼개버리고 말겠어"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원고인 나쁜 여자가 뭐라고 하는가? "내 것이 아니니 쪼개세요" 라고 하는데, 반면에 피고인 착한 여자는 "내 것이니 쪼개세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착한 여자의 경우에는, "쪼개기 이전에 이미 나는 쪼개졌다" 라는 것인데, 간단히 말해서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 지혜의 증거물이 왜 어린 자식인가?
그렇다면 왜 이렇게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그것도 장성한 자식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이제 갓 태어난 자식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서, 즉 아줌마에서 아줌마를 끄집어내는 방법이 되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줌마의 경우에 "나는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