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의 어미 160127
산 자의 어미 16012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산 자의 어미(창세기 3:20-21)
이근호
16-01-27 21:26
산 자의 어미
2016년 1월 27일 본문 말씀: 창세기 3:20-21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3:19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는 다음과 같이 운명을 확정지어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러한 확정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게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협의하시거나 의논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이 사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자기 일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지어주신 ‘흙으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상황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따로 아쉬워하거나 섭섭해 하거나 불만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더나아가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유나 근거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흙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러한 아담의 모습을 곧 ‘자멸하는 아담’이라고 칭할 수 없습니다. 출구는 없는 운명입니다.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없는 현상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은 아담 뿐만 아니라 그 아내되는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여자는 남자의 요소이기에 ‘남성지향성’으로 움직입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처럼 흙으로 변합니다. 여자는 남자 운명에 흡수, 통합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여자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남자의 여자’일 뿐입니다. 곧 남자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본문에 나오는 ‘하와’를 여자의 보편성이라고 보시면 아니됩니다. 이 ‘하와’는 여자와는 관련 없고 아직 나타나지 않는 ‘그 남자’ 혹은 ‘마지막 아담’과 관련된 여자입니다. ‘산 자’란 최종적으로 언약완성자에 의해 살게 된 자를 말합니다.
아담이 자기 아내를 ‘하와’ 곧 ‘생명’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이 흙으로 환원하는 작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창세기 3:15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남자는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즉 ‘남자의 후손’과 뱀의 대결로서 약속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세계와 관련되어집니다. 남자가 공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자의 개입으로 해서 죽음에서 생명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아담이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흙으로 돌아갈 팔자이지만, 이러한 조치를 행사하시는 그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은 성취된다는 점을 아담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의 실행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요? 그 내용이 2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미 뱀과의 싸움이라는 약속을 내리신 그 하나님께서 아담과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실행하시면 옷을 처음 사용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범죄의 징후와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25에 보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창조의 정상적 상태임을 나타내는 징후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징후가 깨어져버리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스스로 자기 몸에 조치를 취합니다. 그것이 바로 ‘옷’이었습니다.
옷은 ‘부끄러워함’과 관련해서 인간들에 의해서 등장됩니다. 이는 곧 스스로 ‘비정상적인 존재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바로 이 인간들의 상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서는 접촉지점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들이, 자신의 것, 죄악된 것으로 가렸던 그곳에 하나님의 것으로 입혀주시는 접촉지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곧 인간이 하는 모든 시도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실행하는 일과 충돌을 야기한다는 면을 말해주는 겁니다.
같은 지점을 두고 하나님과 인간이 경쟁하는 바가 됩니다. 즉 ‘인간의 부끄러움은 어떤 식으로 제거되는가’에 관한 실제성을 두고 벌리는 경쟁입니다. 과연 인간들이 벌리는 모든 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안 부끄러운 정상적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라는 겁니다. 인간의 위대한 문명과 지혜와 도덕과 지식이 과연 그것으로 인간들의 비정상적인데서 오는 수치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애초에 하나님께서는 거부하고 나서시는 행위가 바로 아담과 여자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내리시는 조치 외에는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여전히 수치스러운 존재라는 겁니다. 이런 인간들은 지옥갑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랑스러울만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수치없애기 작업은 가죽옷으로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언약으로 맺어진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하나님께서 ‘수치 제거’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여호수아 5:9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수치가 떨어져나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시범적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할례의식을 요단강 건너고 난 뒤에 행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과 설명이 곧 ‘애굽의 수치가 떨어져 나감’입니다. 이 할례 의식은 신약에 오면 완성이 되는 것이 그것이 곧 세례입니다. (골 2:11-12)
즉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겁니다. 이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2인 1조가 되어 존재하는 바가 됩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바다에서는 살아나올 수 있고 심지어 다니엘 세 친구 같은 경우에는 불 속에서 살아나왔습니다. 자기 백성 인생에서 거침없이 개입하신 분의 효과입니다.
이 분의 효과로 인하여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곧 거룩한 자로 인정받는 겁니다. 로마서 1:16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적으로 변변치 않는 조건을 지니고 있으면서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미 온 천하 앞에서 부끄러움의 끝모습을 보여주신 주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따라서 이 십자가라는 부끄러움만이 부끄러움을 해소하는 유일한 법칙이 됩니다. 즉 내 힘으로 아무리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자인하고 그런 식으로 진리로 확정지으신 하나님에게 이의 걸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인을 통해서 복음을 정립하시는 이 일관됨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주는 수치성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는 수치성을 의식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1-28 06:29
23강-창 3장 20-21(산자의 어미)1601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장 20-21절입니다. 구약성경 4페이지입니다.
창 3:20-21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방금 읽은 이 이야기 앞에 아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여기 식물이란 음식물을 말합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너와 의논할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너하고 의논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아담아, 인간아, 너도 나와 의논할 생각을 하지 말라. 내가 너를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면 너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게 우리 인간의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편하지 않습니까? 나에게 “너는 이렇다.”고 이야기할 분이 하나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주위 사람들은 나 좋으라고, 나를 위로하려고, “잘 될 겁니다, 훌륭하십니다, 오래사실 겁니다, 행복해지실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행복 근처도 안가요. “너는 흙이니 그냥 곱게 흙으로 돌아가라.” 끝! 차라리 속이 다 시원할 정도입니다. 역시 인간들의 위로, 인간들의 달콤한 격려의 말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괜히 우리로 하여금 ‘더 좀 살았으면…….’ 하는 부질없는 욕심만 자꾸 양산시킵니다. 아주 깔끔하게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이것은 내 지시고 명령이야. 끝!”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해주시면 쓸데없는 욕심을 안 부릴 것이 아닙니까? 그런 쓸데없는 망상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 내가 그런 존재구나. 역시 하나님이 제대로 일러주시네. 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여기서 이탈해서는 안 되겠구나. 이탈할 수가 없을뿐더러 이탈되는 망상을 가지면 나만 힘들어지는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자멸하는 아담’이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출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함으로 말미암이 인간이 스스로 ‘왜?’ 또는 ‘무슨 이유로?’라는 그것을 전부 다 없애버립니다. 그 근거를 다 없애버려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학문, 철학이나 과학이나 많은 학문을 하지만 ‘왜 그래야 되는데? 왜 그래야 되는데?’ 끝까지 그렇게 물으면 나중에는 그래야 될 근거가 없습니다. ‘사람은 왜 살아야 되는데?’ 이유 없어요. ‘왜 죽어야 되는데?’ 이유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 자체적으로 어떤 이유를 끄집어내도 그 이유는 없어요. 그냥 ‘무조건’이에요. 우리는 이유도 없이, 출구도 없이 그냥 자멸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리 재벌이나 뭐니 해도 자멸, 스스로 뭉개지고 있는 중이에요.
저는 이것을 두고 “어이가 없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배우 유 아인이 <베테랑>이라는 영화에서 한 대사에요.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거기서 설명하기를 ‘어이’란 뭐냐? 맷돌의 손잡이인데 그 손잡이가 없으면 맷돌을 돌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설명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론 자체가 내가 보기에 어이가 없는데, 어이가 없다는 말은 ‘왜 내가 이렇게 태어나고 살아야 되는가?’ 어이가 없어요. 아무 이유가 없고 근거가 없습니다.
‘왜?’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그 질문을 끄집어낼 필요도 없고 끄집어내서도 안 되는 겁니다. 본문에서 아담을 보고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그러면 여자는 어떻게 되는가? 여자도 마찬가지로 같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지난 시간에 했듯이 여자가 남자를 사모함으로 말미암아 남자의 운명 안에 여자의 운명이 이미 포함이 되어서 이제는 여자는 없어요. 마이너스 남자, 남자의 일부로서, 남자다운 요소로서 합류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창조할 때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었는데 범죄하고 난 뒤에는 남자의 일부로서 여자가 있을 뿐이에요. 남자의 운명이 여자의 운명을 접수했다, 그렇게 보면 되는 겁니다. 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고 되어 있는데 여자가 남자처럼 되려고 사모하지요. 여자의 원형은 여자가 아니고 유사남자, 남자와 비슷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계에서 원래 남자만 목사하게 되어 있는데 여자들도 목사 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페미니즘(여성주의)도 가만 보면, 남자를 어떻게 따라잡느냐, 남자 가진 것 우리도 가질 수 있다, 남자가 레미콘 트럭 몰면 우리도 몰 수 있다, 남자가 레슬링 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 남자를 앞서려고 하고 남자를 잠식하고 흉내 내는 식으로 유사남성이 여성인 거예요.
여자의 운명은 남자에게 잠식이 된 겁니다. 없어졌지요.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이 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 하와라는 여자는 없어요. 왜냐하면 여자 자체가 남자로 전환됨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여자가 아닌 하와가 등장하는 겁니다. 원래 여자는 남자가 먼저 있고 그 남자를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 여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남자가 여자의 운명을 포함해서 흙으로 돌아가니까 여자도 같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여자가 없어졌다면 이제는 하와라 하는 것은 처음 남자인 아담의 아내로서의 여자가 아니고 이 하와는 남자 없는 여자로서 등장되는 겁니다. 아마 최초의 페미니즘이라고나 할까? 남자 없는 여자로 등장하고 하와를 하와 되게 하는 그 요소는 아담이 아닙니다. 아담은 흙이니까 하와와 관계없어요. 아담은 흙이니까 죽음이잖아요. 하와는 그 뜻이 ‘산자의 어미’ 생명이거든요. 생명과 죽음은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아내로서의 여자는 끝나버렸어요. 아담과 함께 죽고, 하와를 하와 되게 하는 그 배우자는 이제 하와로 출발해서 앞으로 새로 생길 거예요.
역사가 끝나고 난 뒤에 새로 생길 겁니다. 남자나 여자나 19절에 의해서 흙으로 돌아가니까 근거는 없어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왜요?” “묻지 마.” 왜 내가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지의 그 근거, 이유가 없어요. “흙이 아니고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됩니까?” “묻지 마.” 거기에는 이유가 없어요. 이 세상은 이유라는 것이 없어요. 근원적으로 따질 수 있는 이유라는 것이 없어요. “너 왜 그랬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왜?” “왜 하고 싶은데?” “내가 하고 싶다는데 그걸 왜 네가 묻는데? 왜 간섭하는데?” 그렇게 돼버려요.
스스로 자멸하는 중이니까 그 이유도 모르면서, 출구도 없으면서 그냥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하와’라고 해서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산자의 어미가 된다고 이름을 그렇게 붙인 자가 누구냐 하면, 죽음입니다. 아담이 흙으로 돌아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요. 자기는 죽어가면서 자기 아내의 이름을 산자의 어미라고 붙여주는 것은, 죽음이 그냥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안에 새로운 죽음이 등장하는데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드디어 시작이 되고 개시가 된다는 겁니다.
생명은 어디 있느냐? 생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통 자멸하고 죽어가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죽어가고 있으면서 아담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생명이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런 안목을 지금 우리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으로 돌아가면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생명이라고 뭔가 찾을 수 있는, 새 생명을 발견할 수 있는 근거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도적으로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어렵기 때문에 좀 더 쉽게 하게 되면,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는 이것은 아담이 요청한 것도 아니고, 아담이 원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냥 그렇게 된 겁니다. 이걸 어렵게 보면 이렇습니다. 아담은 선악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가 원칙이 되었고 법이 되었다, 이렇게 정리가 돼요. 죽어가는 인간조차 주께서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새로운 창조의 원칙으로, 재료로 채택을 해버린 겁니다. 인간은 흙이 되어 가게 하면서도 그 속에서 하와를 끄집어내시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끄집어내시는지 그걸 이제부터 말씀드릴 텐데 그게 아주 신기합니다. 어떻게 신기한지 2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지어 입힌다고 했는데 이게 굉장히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이 가죽옷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뭐부터 봐야 되느냐 하면, 2장 25절부터 잠시 봐야 돼요. 한 장만 넘기는 수고를 하시면 됩니다. 거기 보면, 아직 하와는 없고 여자밖에 없지요.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그 다음에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부끄러워하지 않은 겁니다.
벌거벗었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것이 정상이라는 거예요. 벌거벗었는데 부끄럽다? 이것은 이미 비정상이라는 겁니다. 비정상은 주님의 조치에 의해서 이제 흙으로 돌아가야 되지요. 죽음이 찾아와야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2장 25절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데 3장 7절에 보면, 이미 부끄러워졌지요. 그 부끄러워진 것에 대한 인간들의 조치가 뭐냐? 치마를 만들어서 그 부끄러운 부분을, 물론 다 부끄럽지만 우선 급한 대로 치마를 해서 입었습니다.
지금 제가 문제 던진 것은 뭐냐? 생명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하는 거예요. 분명히 자기 아내 이름을 하와라고 했는데 지금 자기 남편은 죽어가고 있어요. 죽어가고 있는 입장에서 자기 아내도 같이 죽습니다. 그런데 같이 죽어가는 입장에서 난데없이 자기 아내를 보고 ‘산자의 어미’라고 했으니까 도대체 아담이 자기 아내에서 뭘 발견했기에 자기 아내 이름을 생명이라고 했느냐는 거지요. 그것은 아담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그 하나님의 지시에서 죽는다는 그 결말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우리를 죽이신다는 그 조치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그 죽음 안에서 생명을 실시한다는 그 작업이 죽음이라는 작업 안에서 이미 시작이 되었다고 보는 거지요. 죽음으로서 끝난 것이 아니고 죽이는 분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개시가 되는 겁니다. 아담한테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니까 자기 아내에게는 여지가 있다고 본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런 안목을 주셨지요. 아담이 스스로 창작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했거든요.
그러면 시작점이 어디냐? 수치스러운 그 대목부터가 드디어 생명의 시작점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수치스러운 그 대목을 기반으로 해서 이 수치가 어떻게 해소되고, 말소되고, 수치스럽지 않은 것으로 전환되는 그 방식이 곧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끄집어내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여호수아 5장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요단강 건너가면서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했습니다. 할례라 하는 것은 인간의 육적인 흐름을 끊어버리는 거지요. 더러운 죄가 흐르는 인간의 육체를 끊음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죽으리라.”의 그 연속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면 “죽으리라.” 속에서 “생명을 얻으리라.”가 되어버려요. 그게 거룩한 예식이에요. 더러움에서는 저주, 지옥이 주어지지만 거룩한 곳에는 천국과 생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길이 죽 가다가 다른 길로 빠져야 돼요. 제가 수련회에서 이야기했지요. 서울의 지하철 2호선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당-방배-서초-교대-강남-역삼-선릉-삼성-종합운동장-신천-잠실, 이렇게 되거든요. 이것은 천국시험에는 안 나옵니다만. 거기서 교대가면 3호선으로 빠져요. 그리고 선릉에 가면 분당 선으로 빠집니다. 길에서 다른 길로 빠져야 기존의 길이 보입니다. 길을 바꾸면 풍경이 달라져요. 현재 길 속에서는 내 길이 뭔지 몰라요. 그런데 길에서 이탈, 빠져나와서 내가 전에 갔던 그 길을 바라보게 되면 그 길은 새롭게 보이게 되고 지금 내가 가는 길의 풍경도 달라져요.
전의 88고속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대구-광주고속국도가 되었어요. 터널이 열 몇 개인가, 그리고 다리도 많고, 지금 가보면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한 달 만에 가보니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바로 저거다!’ 지금껏 인간들은 죄가 근거가 되어서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되고 흙이 되어야 되는데 그 근거, 내가 지은 죄를 근거로 하지 말고 다른 분에 의한 근거로 해서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풍경이 달라져요. 그 풍경을 미리 보여준 것이 뭐냐? 여호수아 5장 9절입니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제쳐두고 오직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했지요. 이게 2호선에서 3호선으로 빠져나오는 거예요. 이게 다른 지하철을 타는 거예요. 빠져나오게 되는데 애굽 사람들은 바다를 못 건너요. 왜? 물고기가 아니고 사람이니까 깊은 바다를 건널 수 없습니다. 오징어도 아닌 바에야. 오징어는 또 육지에서는 못살지요. 수륙양용, 육지에서도 살고 바다에서도 살 수는 없습니다. 애굽사람들은 바다에 빠지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육지에서 살던 사람들이 애굽이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모세가 자기백성을 인도하는데 의도적으로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죽음의 바다로 인도해요. 죽음의 바다로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뭘 보여주는가? 애굽사람들, 애굽군사들은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그것은 2호선이고, 사당-방배-서초, 이렇게 가는 2호선이고 다른 노선을 타버리면 사람은 안 죽어야 정상이라는 거예요. 물이든 불이든.
심지어 다니엘 세 친구는 불에 들어가서도 안 죽었어요. 이거 참! 불에 들어가서도 안 죽는 그것이 정상이라는 겁니다. 불에 들어갈 때 몇 명이 들어갔는가? 세 명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구경해 보니 분명히 세 명이 들어갔는데 번호! 하나, 둘, 셋, 세 명이 들어갔는데, 번호! 하나, 둘, 셋, 넷, 번호 끝! 네 명이 들어앉아 있어요. 교회 왜 나옵니까? 노선 이탈된 자만 정말 성도라 할 수 있어요. 교회란 바로 그걸 이야기해야 돼요.
여러분은 각자 몇 명입니까? 한 명이지요. 아니요. 두 명이라는 거예요. 네 안에 다니엘의 세 친구를 살렸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래야 정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는 것이 비정상이에요. 요새 비정상이 너무 많아서 어느 것이 정상인지가 구분이 안 되는데.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참 정상으로 보이지요. 정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아담은 자기 아내를 하와라고 불렀어요. 자기 아내가 늙어죽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생명이라고 한 것은 창세기 3장 15절,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죽는 거예요. 내가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하나의 재료로서, 하나의 과정으로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조치가 일어났다면, 그러면 그 약속에 의하면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뱀을 물리칠 날이 오게 되면 그것은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 여자를 자기 아내에 이름을 붙여서 하와라고, 생명이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담이지만 아담 자기가 죽어가는 입장에서 무슨 조치가 있습니까? 아무 조치가 없거든요. 이야기가 참 어려운데, 이 세상은 아무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다. 이것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그냥 무심한 세상이고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모든 것이 흘러가고 저절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없을 경우에 불교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세상은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것이고, 니체도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냥 영겁회귀다. 그냥 영원한 것만 계속 돌아올 뿐이 아무것도 아니다. 이유를 찾지 마라.” 그 말이 맞아요. 하나님이 없는 경우에.
그런데 하나님이 있는 경우라도 그 말이 맞아요. 감히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주제에 인간이 자기가 납득이 되는 이유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릴게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겁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서 온 메시아가 맞습니까?”라고 하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17절에,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라는 것을 이렇게 증명해요. 18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두 분이 증거하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잖아, 라고 했어요.
이게 인간들 보기에 터무니없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얻고자 하고 찾고자 하는 근거는 없다. 너희들이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겠다는 그 이유를 찾지 말라. 너희들에게는 그것이 포착이 안 된다.” 너희는 아무리 애써도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어야 될 모든 이유는 다 엉터리입니다. 예수님의 예수님 됨은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방식으로 메시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서 주께로 가는 접촉점은 없습니다. 인간이 어던 상상을 하든지 그것은 가짜예수에요.
그러면 인간은 뭐하면 됩니까? 흙이니 그냥 흙으로 돌아가면 돼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이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창세기 3장 19절에 있지요. 이 창세기를 제일 먼저 누구에게 준 줄 알아요? 이게 바로 모세의 글입니다. 그 모세가 누구한테 이야기했습니까? 단군의 자손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애굽에서 건져낸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이 창세기를 이야기한 거예요. “너희들에게만 알려주는데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한 그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다. 그 약속대로 하게 되면 흙으로 돌아가라는 그 죽음 가운데서 생명이 피어난다.”라고 그들에게만 알려준 거예요.
물론 그들이 믿지를 않지요. 그들은 우연히 바다를 건너온 것으로 여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홍해바다에서 애굽군사들이 죽었는데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비정상이고 바다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살아서 기어 나온 사람이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런가? 2호선에서 3호선으로 빠졌거든요. 3호선으로 빠지니까 풍경이 달라요. 어떤 풍경인가? 전에는 인간들끼리 어떻게 살아보겠다는 그 풍경이 전부였는데, 오늘날 세상 사람들처럼, 그랬는데 하나님이 살려내는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살려내는 풍경이 아까 말한 여호수아 5장 9절의 할례라는 겁니다. “할례를 행했더니 애굽의 수치가 굴러 내려갔다. 너희는 이제는 애굽과 같은 민족이 아님을 알아야 된다. 전에는 애굽인과 마찬가지로 수치를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수치 당하지 않는 민족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창세기 3장 19절에서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힌 취지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부끄럽다고 가린 그 부위에 인간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것을 주께서 없애버리고 친히 만든 것을 갖다 입혔다는 것은, 너희들의 수치가 된 그 부분부터 해서 수치가 사라지는 그 작업을 함으로써 하와, 생명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이제는 새로운 풍경 속에서 보라는 겁니다. 시편 25편 3절에 보면,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수치, 수치, 나오는데 이것은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옛날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운 요소가 있었다는 그 사실을 전제로 해놓고, 그 다음에 그 부끄러움이 어떻게 하나님의 후속조치에 의해서 사라지고 부끄럽지 않는 존재,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계속 투입되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수치를 당하지 아니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신약에 와서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정말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것이 최종적으로 나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복음이 자랑스럽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사도바울아! 한 달 수입이 얼마냐? 집은 몇 채냐? 차는 뭘 타고 다니나? 외제냐?” 세상은 그런 것으로 부끄러움을 줘요. 그런데 그런 것으로, 어떤 부동산이나 차 같은 것으로, 가정의 행복이나 이런 것으로 근원적인 부끄러움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사람이 땜질하듯이 때우는 것밖에는 안되니까.
가죽옷이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줄 아시고 그 부끄러움을 막는, 커버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친히 마련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도 전혀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그 막는 마개가 뭐냐?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복음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한 겁니다. 같은 취지로 로마서 9장 33절에 보면,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존재는 지옥 갈 사람에게만 해당되지요. 그들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해소하려고 한평생을 시도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학력이 어떻고, 재산이 어떻고, 우리 집안에 유명인사가 있느니, 이런 것으로 자신의 허점과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기도를 어떻게 해서 응답을 받았느니, 어떻게 했더니 주께서 축복을 주셨다느니, 이런 것으로 자기 부끄러움을 커버하려고 하는데 다 헛수고입니다. 주께서 주신 방법은 이미 확정되어서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 곧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 거치는 반석, 부딪히는 돌에 지옥 가는 사람은 왜 다 엎어지고 자빠지는가? 히브리서 12장 2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자기자신을 바라보지 말라는 거예요. 자기자신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커버하려고 애쓰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봐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십자가 자체가 온 천하에 까발린,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자태요, 모습이고 사망이라는 겁니다. 누가 봐도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로 사형당하는 이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스스로 자멸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극한의 망가짐을 보여줌으로써 누구나 그 앞에서 ‘나는 저렇게 되면 안 돼. 우리 집안은 저렇게 되면 안 돼.’ 누구나 고개 돌리면서 차마 되기 싫은, 상상하기도 싫은 그 부끄러운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이게 진정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얼굴 돌리지 말고 똑바로 보라는 겁니다. 얼굴 돌리는 너 자신이 부끄럽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똑바로 보라는 겁니다.
그 망가짐과 그 실패 감, 그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버림받은 자, 우리는 차마 그런 지경 안 되기 위해서 오늘 분투노력 합니다. “주여, 망가지지 않게 하옵소서. 실패하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았다고 하게 하옵소서.” 그런 것들이 왕, 왕, 왕, 왕, 거리면서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 앞에 안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자 그렇게 애를 쓰거든요. 소위 인간 자체가, 하나님께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또 가죽옷 입힌 그 인간 자체가 법인데 인간의 모든 법은요, 자기 부끄러움을 스스로 커버하고자 하나님의 율법을 총동원해서 다 끌어 모아가지고 그걸 의롭게 지켜냄으로 말미암아 덜 부끄러워하는 식으로 교회오고, 교회 와서는 착하고 선한 것으로 자기를 땜질하는 겁니다. 산소용접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땜질, 용접을 제일 잘하는 사람을 거론했습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용접 잘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 바리새인들은 그 온갖 착함으로 다 땜질했어요. 착함의 제일 선봉에 선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마저도 실패했다면 누구라도 실패한 거예요. 얼마나 훌륭하냐가 아닙니다. “나처럼 망가질 수 있느냐? 나처럼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치맛바람이 일어나서 “우리 아들 둘을 하나는 예수님 오른 편에, 다른 하나는 예수님 왼편에 앉게 하옵소서.”
그들은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으로 인간의 수치를 면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이 이렇게 합니다.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마시기 싫다고? 그래도 너는 마시게 되어 있어. 너는 마시게 되어 있다.” 이 쓴잔을 마셔야 돼요. 이 쓴잔을 주님이 먼저 마시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십자가의 길로 가지요. 그 동정심 많은 이웃동네 아주머니들이 웁니다. “저렇게 괜찮은 분이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망가졌구나. 안타깝다.” 아주머니들이 따라오면서 우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여러분 자식들 위해서 우세요.” 지금 누가 누구보고 울어야 되는지.
내(주)가 당한 이 모멸과 수치는 하나님 아버지가 시킨 일이 돼요.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가 시킨 일이라는 것은 그 십자가가 영광이 되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부끄럽지만 그게 영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복음 전하면서 온갖 수모를 당하지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조금도 이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영광스럽게 본다.” 해요. 이 사고방식이 반대가 되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은하철도 999, 그 철도노선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이 은하철도 999, 그거 타고 갑니다. 철이 하고 모자 쓴 메테르아줌마 하고 타고 가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자멸하고 있고 출구가 없어요. 맨날 과학은 묻습니다. 왜? 왜? 세포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저 별은 왜 저렇게 붕괴하고 초신성은 왜 태어났는지? 맨날 묻는 게 왜? 왜? 무엇 때문에? 이유 없습니다. 아무도 어떤 이유도 모릅니다. 사람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70, 80, 90, 100, 살다가 이유도 모른 채,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2호선 타고 가다가 마지막 잠실에서 내려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재판에서 지옥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수치를 직접 가려주는 하나님의 방식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할례였고 신약에 오면 그것이 세례였습니다. 할례가 세례로 바뀐 거예요.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혼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동행해서 함께 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에요.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만 언제 죽더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우리로 하여금 주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서는 가죽옷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바로 십자가의 피라는 겁니다. 이미 대신 처리해 줬다는 겁니다. 주님이 해 주신 그 일을 우리에게 이미 과거가 되게 하는 겁니다. 과거라는 말보다는 완료가 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미완료밖에는 모르는 우리에게 이미 완료된 요소가 주님에 의해서 삽입된 거예요. 주님은 그것만 봐요. 네 안에 뭐가 박혀 있는가, 그것만 봅니다. 로마서 9장 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주신 것을 의지하지 않고 의롭게 행하려고 의지하다 보니까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그러니 이 십자가라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집어넣어준 것이 없이 본인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하는 자들은 전부 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외면하고, 도망치게 만드는 십자가를 항상 우리 앞에 놓이게 했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아니고 죽음 안에 있는 죽음, 다시 말해서 죽음 안에 있는 낯선 죽음인데 그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이 가능했지요. 내 죽음은 당연한 죽음이고, 내 죽음 말고 낯선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해서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이 소식을 구약 때부터 오늘날 성도에게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가죽옷을 부끄러운 곳에 입힌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장 부끄러운 곳이 어디입니까? 가장 들키기 싫은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그것과 십자가를 매치시키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장 나에서 드러내기 싫어하는 곳, 가장 부끄러운 것, 모르겠지요? 알려드릴게요. 모든 이의 공통점입니다. 뭐냐? 나는 나로 인해서 살고 싶다는 겁니다. 나는 절대자가 되고 싶다는 것, 세상 다 죽어도 나만은 홀로 살아남고 싶다는 것, 천상천하유아독존, 불교신자, 온 천하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 이것이 죄짓고 나서 가장 부끄러운 것입니다.
스스로는 부끄럽지 않아요. 되게 자랑스러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부끄러운 거예요. 이걸 은근히 감추면서 그걸 이타주의라고 하고, 희생이라고 하고, 남을 도와주기도 하는데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나를 내가 스스로 위대하게 만드는 그 죄, 그 죄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는 그 장소에 십자가로 들이닥칩니다. 그러면 “주여,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고 달려가던 그 사울이 십자가지신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주여, 제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고백할 때는 어떤 경우라도 반드시 뭘 고백하게 되느냐? “내가 바로, 홀로 신이 되고자 하는 내가 마귀의 대장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것, 그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십자가를 병 낫는 데나, 돈 버는 데나, 행복에나 써먹지 말고 깊숙이 있는 나의 원초적인 죄, 나밖에 모르는 죄를 십자가와 결부되게 해주셔서 이 죄마저 주께서 부끄럽지 않게 용서했다는 사실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