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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무엘상 10강(우상의 몸), 마태복음 72강(단절) 160126강의다니엘

사무엘상 10강(우상의 몸), 마태복음 72강(단절) 160126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주향(IP:211.♡.45.164)

16-02-20 14:46

우상의 몸 (사무엘상 2:22-25 ) 대전-(사무엘10강)

이근호

2016년 1월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2:22-25

(삼상2: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삼상2: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삼상2: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삼상2: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아들들이 악행을 한 거에요. 엘리는 그 당시의 제사장이죠. 성경에서 엘리가 등장하는 것은 사무엘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이 두 패로 나뉘어지는 거지요. 세상이 사라지고 난 뒤에 천국과 지옥, 두 패로 나뉘어 집니다. 세상 끝나면 천국과 지옥이 있다 이렇게 말하지 말고 천국과 지옥이 있으니까 앞에 세상이 있다고 보시는 것이 더 정확한 거에요.

숨겨진 것이 실제이고 지금 나타난 것은 곧장 흔적이기 때문에 세상은 흔적입니다. 흔적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거지요. 인간도 마찬가지고 동물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도 왔다가 사라져버리잖아요. 사라지면서 남는 것은 흔적이고 이 흔적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첫째 나의 노동으로, 나의 열심으로 남긴 흔적(그야말로 흔적으로 끝나버리는)이 있는 반면에 주님의 노동과 주님이 만든 자리는 흔적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와 선이 연결돼 있어요.

보이지 않는 세계는 두 개로 돼 있지요. 하나는 천국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이고 따라서 다시 정리해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고 보이는 세계가 있는데 보이는 세계 전체는 흔적이다. 흔적은 두 종류가 있다. 어떤 종류이냐 인간의 노동으로 나는~ 이렇다 하는 흔적과 인간의 노동으로 가리워졌고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서러움 받고 무시당하는 흔적이 있는데 사실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잖아요.

모든 것이 주님께서 하신 희생, 노동, 주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온 그것을 간파하면 그 사람은 천국과 연결된 사람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지옥과 연결된 사람입니다. 천국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본인이 죽고 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가 나의 것이냐 주님의 것이냐가 이것으로 판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태어 날 때부터 자기 위주이거든요.

그것은 성경에 보면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죄를 발산해요. 그것을 로마서6장에서는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인간 전체를 규정할 때, 죄의 종이란 무엇을 의미 하느냐? 죄만 나오는 모습으로 산다는 거에요. 그러면 죄의 종의 반대말이 있을 께 아닙니까? 그것은 ‘의의 종’이고 뭘 해도 의만 나오는 그러한 사람. 우리보고 둘 중에 뭘 하고 싶냐 하면 당연히 의의 종이 되고 싶지요?

그런데 인간의 타고난 속성이 죄의 종이에요. 이건 결정적인데요. 왜 결정적이냐하면 로마서5장에 보면 죄를 뭐라고 하냐하면 한자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왕이라고 되어 있어요. 죄의 왕 노릇, 아담이 죄를 범죄하므로 그 후손들도 죄를 섬기는, (죄가) 왕이니까 죄가 시키는 대로 죄의 권력에 휘둘리면서 죄를 발산하는 겁니다. 정리하자면 죄를 발산한다는 것은 뭐냐? 지금의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노동이다가 죄를 발산하는 겁니다.

히틀러를 나쁘다고들 하잖아요? 히틀러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죽인 스탈린.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하면 나 살기 위해서 다 죽여 버리잖아요. 지금의 김정은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유독 나쁘다고 욕을 먹는 이유는 실제로 그 사람들에게 히틀러나 나폴레옹, 이런 사람들에게 권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만약에 우리도 히틀러의 자리나 스탈린의 자리 또는 주석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만만치 않았을걸요? 만만치 않아요.

내 권력을 흔들게 되면 가차 없이 처단하거나 동지였던 그들을 배신하고 적으로 간주하겠지요.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그들을 욕을 하지만 아직까지 자기에게 권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막상 그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쳐낼 건 쳐내고 꼴 보기 싫은 건 제거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끌어당기고, 그렇잖아요. 자식이 여러 명이면 그 중에서도 미운 자식과 좋은 자식이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게 뭡니까? 어떤 자식을 바치라고 했어요? 사랑하는 자식을 바치라 했어요. 네가 내치고 싶은 자식을 받쳐라하면 얼른 바치지요.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사랑하는 자식인데 그것도 독자,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내게 바쳐라, 못 하지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못 하는데 죄 밖에 없는 곳에 뭐가 삽입이 되냐하면 의가 삽입이 돼서

내 힘으로 안되는 것을 주께서 하심으로써 죄 짓고 있으면서도 의의 종이 되는 거에요. 이게 성도입니다.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둘 다 날 때부터 죄 짓기 시작한다는 거에요. 둘 다 죄 밖에 몰라요. 다시한번 이야기 하는데 죄란 뭐라고요? 나 중심으로 사는 것. 뭐든지 나의 이익과 나의 가치와 존재, 자존심, 명예, 체면을 양보 못합니다. 심지어 교도소에서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거에요.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어쩔 수 없이 도둑질 했지, 부모가 나를 버려서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내가 이렇게 되었지, 나도 잘 사는 재벌 집에 태어났으면 이렇게 교도소에 안 왔을 거다. 모든 탓을 사회로 돌릴 정도로 자기의 가치를 끝까지 쥐고 있는 게 인간입니다. 둘 다 마찬가지, 천국과 지옥에 가는 사람 둘 다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의의 종이 뭐냐하면 둘 다 죄인데 의의 종의 특징은 그 종에서 불현 듯, 본인의 의사 없이 하나님의 의가 튀어 나온다는 것, 그게 뭐냐하면 희생입니다. 희생과 용서가 나와요. 둘 다 죄 짓는데 “주여! 이런 인간도 주님의 희생이 희생답게 값어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더욱 더 나 밖에 모르는 죄인인 것을 들추어 주셨군요.” 이런 것을 의의 종이라고 합니다.

기존 교회에선 완전히 반대로 가는 거지요. 여러분은 성령 받아서 예수 믿어 의의 종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나쁜 짓 하지 말고 뭘하라? 착한 일을 하라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백날 착한 일을 해 봐요. 착한 일이 누구를 위한 착한 일인지, 자기를 위한, 자랑 질하기 위한 착한 일이지. 남을 이기고 나는 돈은 없지만 교회에 다녀서 너보다 착해, 이런 남을 꺾기위한 남을 정신적으로 짓밟기 위한 탐욕을 삭제하지 않은 채 나오는 착함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점점 더 뭘 노리게 되요? 이 만큼 착한 일을 했는데 언제 우리 집 형편이 피겠습니까? 이렇게 밤새도록 기도 했는데~ 좋은 며느리 언제 주실랍니까? 기도 하지요? 마음속으로 하지요. (그러면 기도하는 죄를 지은 거에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 사람은 안 됩니다, 요런 사람만 와야 됩니다. 이것이 (원하는 기도로) 죄를 지어서 얻은 게 아니고 주의 은혜라고 아는 것은 의의 종에게만 해당되는 특이 사항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렇게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이 아니고 기도를 안 받고 주께서 필요해서 집어 넣었다. 이렇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기대하는 길은 넓은 길이거든요. 남에게 우러름을 받는 길인데 그건 지옥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좁은 길로 가야 하는데 좁은 길은 갈 생각이 없어요. 우리는 날 때부터 나는 내 위주이기 때문에 나를 힙들 게 하는 길을 자진해서 나설 그런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습니다.

따라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는 말씀처럼 히브리서 12장7절에 보면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다. 징계가 있다는 말은 경로 이탈하면 네비게이션이 성도 안에 있는 거에요. 경로 이탈하면 네비게이션이 잔소리 되게 하지요. 좌회전 하시고 다시 우회전 하세요. 경로 이탈 하셨습니다. 경로 이탈 할 때마다 삐비빅! 그게 징계입니다.

갑자기 수입이 많아 졌을 때, “그래 이정도 수입이면 이제 편히 내 영혼아 걱정하지마” 경로 이탈하면 누가 복음 12장20절에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말씀 자체가 주는 네비게이션이에요. 그 쪽이 아니야! 그 쪽이 아니야! 다시 정리해 봅시다. 죄의 종은 혼자 사는 것이고 의의 종은 우리 안에 초대 하지도 않은 분이 와서 턱하니 자리 잡고 조타수, 키를 잡고 경로를 이탈 할 때마다 천국으로 인도 하시는 그러한 기능이 발휘되는 그 사람이 의의 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엔, 우리는 죄만 졌는데, 주님은 이렇게 해석해요. “너는 매일 살면서 의만 나오네!” 이렇게, 왜냐하면 [죄+용서=의]가 되거든요. 우리는 죄 짓고 예수님은 용서 하시고 [죄+피=의]가 되는 거에요. 너에게선 왜 의만 나오느냐? [죄+피=의]라면 이것을 거꾸로 해 봅시다. 의에서 피를 경유하게 되면 이것을 상한 심령이라고 해요. 죄 지을 때는 의가 안 보이니까 그냥 “나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고 남 핑계를 대지만,

이미 의를 입는 입장에서 보면 “아하~ 내가 상한 심령이구나! 내가 내 힘으로 천국 갈 수 없구나!” 쉽게 말해서 “나는 그냥 발암 물질이구나!” 나를 해롭게 하는 요소만 나에게서 나오는, 이것은 내가 나쁜 짓을 하고자 해서 하는 게 아니고 타고난 거에요. 인간의 모든 본성은 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물려받은 죄가 그대로 발산되는 겁니다. 누가 더 착하고 못나고 없어요.

그냥 어떤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배고프면 도둑질 하게 되어 있고 높은 자리에 앉으면 잘난체하게 되어 있고 더 높으면 갑 질하게 되어 있고 모든 인간은 상황을 따라서 본의 아니게 자기의 죄를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컨트롤하면서 천국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용서를 그때그때마다 증거하게 하는 거에요. 용서가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성령이 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제 성도가 뭔지를 정리가 되었지요. 착한 일 하는 사람이 성도가 아닙니다. 자기 죄를 아는 사람, 상한 심령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구약보다도 신약의 로마서 중심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구약 중심으로 하게 되면 모든 인류는 일단 아닙니다. 구약은 범위가 제한적이에요. 누구에게만 이냐하면 이스라엘에게만 이고,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선지자의 내용이 연장된 거에요. 그래서 선지자는 어디 있느냐하면 나라 둘을 호빵 쪼개듯이 자르면 안고처럼 거기서 선지자가 잼처럼 흘러나오지요. 그리고 교회는 어디 있다고 했습니까? 교회가 무너지고 해체될 때 비로소 교회가 보이는 겁니다. 간판 걸려있는 교회가 교회가 아니고 교회를 보다가 실망스러워질 때 거기에 진짜 교회가 있습니다. 진짜 나는 어디 있느냐? 내가 나에게 실망스러울 때입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났지!” 바로 사는 것 보다 죽는 게 낫다는 그 생각이 주님이 주신 생각이에요. 그런데 병원에 가서 좀 낫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헤헤 거리면서 “막내 결혼 할 때까진 살아야지! 못해본 게 있는데 하면서 하와이도 가서 반바지 입고 썬텐 한번 해보고 죽어야지! 살고자 할 때는 글이 안 됩니다. 반드시 글은 ”그래! 이걸로 끝내자!“ 할 때 글이 되지 살아있는 사람의 글은 전부 위선입니다. 아플 때 글이 되지 배부를 땐 글이 안돼요.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 좋다고 나오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에게 모든 기대가 날라 갔을 때 진심이 나오는 거에요. 뭐 술 먹을 때 취중 진담이 나온다고요? 아니에요. 진담은 눈에 뵈는 게 없을 때 진담이 나와요. “ 니 죽고 내 죽자!” 할 때 그 때 진담이 나오는 거에요. 부부싸움 할 때, 진담이 안 나오거든 부부싸움 하지 마세요. 둘 다 거짓말하고 있는 거에요. 둘 다 협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진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특수한 죄에요. 아까 신약 로마서에서의 죄라고 하는 것은 자기중심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자기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구약에서 나왔거든요. 구약에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임이 거기에 언약을 집어넣었어요. 언약을 지금 말로하면 지시약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험을 할 때 그 안에 성분이 뭔지를 눈으로만 봐서 모르잖아요. 그런데 지시약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아! 이안에 단백질이 있구나!” 라는 성분이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이스라엘 속에 언약이라는 이름의 지시약을 줘 버리면 뭐가 나오냐 하면 우상숭배, 이스라엘의 죄는 우상숭배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 일계명이 뭔지 아시죠?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절대로 하나님을 섬겨라가 아니죠. 뭐라고 되어 있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어떤 경우에만?

인간이 죄를 졌기 때문에 본성대로 신을 섬기는데 신을 섬겼다하면 그것을 우상이 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버려요. 예수님을 믿잖아요? 그 예수가 살아가면서 내가 우상적인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솜씨이고 관섭입니다. 삼위일체 믿고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온갖 좋은 것 믿어도 결국 그 신은 나 좋으라고 내 이익을 위해서 믿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지요. 그 느끼게 만드는 것이 방향타를 천국으로 모는 거에요.

내가 믿는 것은 다 우상인 이유가 내가 바로 우상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가짜이기 때문에, 가짜는 가짜만 알아보지 진짜는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것은 로마서 7장 13절 말씀처럼 죄를 더욱 죄되게 하기 위함이다. 자꾸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의인이라고 우기고 잘난 체하고 이만하면 어때서, 이 나이가 어때서, 노래도 보세요. 몇 년 전에는 유행했던 노래가 내 나이가 어때서 잖아요? 작년부터 유행한 노래는 백세 인생인데 가사가 똑같아요.

내가 어때서 왜 지금 데리고 가려 하는데? 내가 알아서 좋은 날 좋은 시에 가겠다고 전해라, 내가 어떤데? 내가 어때서? 이게 공감이 되는 이유가 평소에 우리가 무심코 살아가는 그 무심코가 뜯어보면 내 나이가 어때서와 백세인생이에요. 거기에 무심코가 다 들어 있어요. 아직은 더 살고 싶다. 아직은 못 간다고 전해라. 이게 바로 이방인들에게는 본성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본성을 일단은 긍정합니다. 그게 자기 자신의 전부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내 본성에 박수 쳐주고 “그래! 그래! 그게 너 다운거야!” 하고 인정해주고 격려해 주면 그것이 부처가 되었든 예수가 되었든 아무나 믿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요. 나를 사랑해준다면 아낌없이 사랑을 바칠 그런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오니까 이스라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에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자기 밖에 몰라요.

그런데 언약이 오니까 비로소 그 마음, 아무리해도 바뀌지 않는 나의 본성 그 자체가 처음부터 문제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드러냅니다. 죽어서 좋은 천국에 가고 싶은데 처음부터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상이란 뭐냐? 신과 나하고 조화롭게 의견을 잘 맞추면 신의 나라로 갈수 있다는 이것이 우상이에요.

그런데 진짜 여호와께서는 아무리 애쓰고 노략해도 천국은 네가 갈 수 없는 곳이다. 왜? 쫓겨났기 때문에 , 네 조상부터 쫓겨났기 때문에, 쫓겨남 그 취지가 여전히 살아있는 한은 네가 그 취지를 거슬어 네가 천국에 간다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못한다. 이것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 참 하나님입니다. “아하! 갈 수 없는 곳인데 우리는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죽어서도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것도 아름답게 존재하기 위해서 억지를 부리며 교회에 가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붕괴이고 나의 파괴입니다. 아까 교회는 어디 있다고요? 교회가 깨어질 때라 했지요? 그리고 진짜 나는 어디 있다고요? 내가 파멸되고 깨어질 때 그 안에 내가 들어 있는 겁니다. 복숭아 안에 씨가 들어 있듯이 그걸 쪼개야 되요. 만약에 씨가 들어 있잖아요? 나의 씨는 창세전부터 주께서 고요하게 집어넣은 게 있어요. 이는 창세전부터 택하신 바이다.

디모데 후서 1장에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영원 전부터 주께서 나를 예정하사 백성으로 만드셨다라는 그것이 그 시가 있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것인하여 구원받는 것이지 내가 나댄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요한계시록 9강하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하던가요? 나대지 마라, 티내지 말고, 유난떨지 말고 그냥 조용히, “당신이 믿는 사람이었어? 표도 안 나게, 그렇게.

왜? 내가 안 나대도 내 안에 계시는 분이 나보다 갑질하고 있거든요.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의 죄를 이기기 때문에 그 방식으로만 천국에 갈 수 있지 내가 착하게 산다고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된다고 노래를 해봐야 최선을 다할 뿐이죠. 그런데 그 최선이라고 하는 것이 상황이 바뀌면 그 최선이 최악이 돼 버립니다. 타인에게 최악이 되지요.

내가 잘되고자 하는 일이 남에게 피해를 엄청 주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만 범위를 넓히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식에게 열성내고 자기 키우려고 모든 것을 헌신하는 어머니가 타인에겐 얼마나 이기적인지 자기 밖에 모르는 그런 것인지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라는, 지난 오후 예배에서 제가 기도 할 때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일깨워 달라고 했거든요.

이스라엘은 망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신약에 오면 두자로 말하면 교회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뭐하라고 세워진 것이냐 하면 망하라고 세워진 겁니다. 교회에 다니시고 망하세요. 교회에 다니시고 그 교회와 함께 망하세요. 너나 나나 다 망해야 되는 이간인 것을 교회를 통해서 체험해야 되고 체득해야 돼요. 그걸 통해서 뭐가 나와야 되냐 하면 우상 숭배라는 것은 타고 났다는 사실.

골로새서 3장5절을 한번 봅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숭배가 있는 지점이 어디란 말입니까? 우리 지체, 우리 몸 안에 있다는 거에요. 우리 몸 안에 있으니까 그 위력을 발휘하는데 우리가 백화점 앞을 지나가는데 그냥 갈 수가 없지요. 탐심을 부릴 수 밖에 없지요.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신이 되었든 누굴 믿었든 일단 우상숭배가 오게 되면 날 위해서 믿는 게 되요. 원대한 종교적인 탐심, 탐욕, 종교적인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빠른 시간내에 얻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적 방식이니까 세상 적 방식 같으면 칼 쥐고 주먹쓰고 때리고 하겠지만 종교적 방식은 뭐에요? 자기 학대, 자기 비움, 자기 낮춤, 자기 부인이겠지요?

부족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원래 얻고자 하는 것을 낮추는 연기를 하므로서 극한의 낮춤과 아낌없이 드리고 봉사하는 것을 통해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를 더 얻어 내고자 하는 투자 의식입니다. 투기 의식을 인간은 지울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 사무엘 상 봅시다. 제가 오늘 사무엘 상을 하면서 우상을 이야기 하는 것은 사무엘 상이 구약이지요? 구약 안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있지요.

지금 이스라엘 내부에 일어 난 일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 언약이 어디 있느냐? 오늘 본문의 같은 경우에 언약은 누가 언약이 되는 가 하면은 바로 어린 사무엘이 언약이 되요. 계시를 등에 듬뿍 지고 지금 나타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보냈다는 말은 기존에 누가 제사장이냐 하면 엘리 제사장이에요. 그런데 엘리 제사장이 매우 늙었다고 되어 있거든요.

매우 늙어서 자기의 아들들이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더니, 이것이 뭐냐하면 그들의 악행이 온 백성들에게 듣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제가 보기에는 엘리 아들들이 억울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전체에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엘리의 아들들 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거잖아요. 그런데 유난히 엘리의 아들들에게 부각이 되었다는 말은 엘리 제사장이라는 자리가 그들이 소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맡겨준 자리입니다.

뭘 하기 위해서? 언약의 실체에 드러내기 위해서, 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할 수 밖에 없는가. 엘리 아들들이 이렇게 했고 동참한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거룩한 제사 일을 하기 위해서 성소에서 일하는 사람,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정결해야 될 임무를 맡고 있는 여인들이 좋아서 동참했겠어요? 그냥 성폭행 했듯이 했다는 말은 결국 엘리의 아들들이 뭘 개무시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효과를 개무시 한거에요.

왜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제사의 효과를 개무시 하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이게 오늘 강의 내용의 핵심 부분인데 왜 무시 하느냐? 왜 예수나 십자가를 무시 하느냐? 정신이 어디에 팔려 있습니까?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나의 쾌락과 쾌감, 나의 기분 전환, 나의 욕구달성, 내 만족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평소에 살아가는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엘리의 아들들이 중심이 발각이 된거에요. 그러면 이것을 엘리의 아들들만 지적하고 탓할 문제가 아니지요. 이스라엘 내에 그런 남자와 여자들이 숱하게 많지만 재수 없게 엘리의 아들들만 거론된 겁니다. 하나의 시범조로 걸려 든거에요. 연예인들만 이혼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혼이 얼마나 많지 안 습니까? 욕을 누가 다 듣습니까? 연예인들이에요. 그건 왜냐 유명함으로 돈을 벌어먹기 때문이에요.

뭔가 인기가 있다는 것은 돈만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호박씨라는 온갖 유명인사들을 다 파 헤치는 프로가 있어요. 기자들이 나와서, 그것을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참, 유명하기 때문에 씹히고 국민들은 씹는 맛으로 보고 본인이 남들에게 씹힐 것을 감추는 효과의 이득을 얻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사건건 소소한 것까지 씹히는 것은 분명히 본인은 싫을 거에요. 하지만 남에게 주목을 받고 씹히는 그 자리를 향해 청춘을 바친 사람이 우리나라에 수십만 명입니다.

어떻게 하면 뜰 수 있습니까? 연예인해서 어떻게 하면 뜰 수 있습니까? 초등학교 애들의 소망이 뭔지 아시니까? 연예인 되는 거에요. 그 애들은 씹히는 것도 몰라요. 무조건 되고 싶은 꿈이에요. 드림이에요.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것은 그들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하나의 미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우리가 평소에는 똑같아요. 남에게 약점을 감추고 남이 못한 것은 씹고,

소파에 누워서 리모컨으로 체널 돌려가면서 하여튼 나이 60만 넘으면 다 그래요. 할 일 없는 퇴직한 남자들, 어디 욕할 것 없는 가 찾아보고 안철수며 김정은이 나오면 또 욕하고 하지만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성도에게 언약을 줘버리고 복음을 주고 하나님의 의의 종이 되게 하시면 남이 나를 비난하기 전에 내가 나에게 예민해지고 철저하게 죄를 깨닫게 되요.

그것을 성령의 열매인 온유라고 합니다. “남 뭐라고 할 게 뭐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그래! 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하는데 누가 돌로 칠 수 있겠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누구 집에 불났다 하면 야호 하는 게 아니고 “나도 깜박깜박 해서 집 나올 때 가스 불 안 끄고 하는데 아하~ 여태 가스 불도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끈 게 아니고 주께서 끌 수 있는 정신력을 아직까지 유효하게 유지시켜 주셨기 때문에 밖에 나올 때 끈거였구나!” 되는 겁니다.

앞으로 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문 열고 닫았는지도 모르고 버스탔다가도 내려 와서 다시한번 더 학인해 보고 확인하면 잠겼는 것을 괜히 그랬다 싶고 도대체 내 정신이 아니라니까요. 나중에는 어떻게 되냐하면 예수님 사랑합니다도 잊어 버려요. “예수님 누구세요?” 정신 하나도 없어요. 평소에도 주께서 은혜로 지금껏 살아온 겁니다. 앞으로 그렇게 되더러도 그런 정신나간 짓도 주의 은혜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 주인이 내가 아니에요. 내가 주인 같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무슨 수로 갑니까? 뭘 했다고 가요? 뭐 한 게 있어야지! 평생 자기 자랑만 했는데 뭘 했다고 갑니까? 이런 것을 상한 심령이 되게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본문에) 여기서 악행하는 것을 이스라엘 온 나라에 공개해 버리십니다. 25절을 봅시다.

(삼상2: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훈계를 해요. 여기서 아버지가 아들들을 훈계하는 것과 하나님이 아들들을 보는 것이 여기서 차이가 납니다. 아버지가 훈계 하지요. 맨날 다른 사람들에겐 설교하고 자기 자식이 잘못 하는 것을 뻔히 알잖아요.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죽지 아니하면 말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야말로 내가 망해야지! 내가 죽일 놈이야! 라는 상태에선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진심이 나온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훈계를 한 것은 아직 아들들에게 뭐가 있느냐? 미련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어버이날이 어떻고 어린이날이 어떻다고 훈계하는데 그 훈계를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기주의로 아들을 보호하기로 간주해 버립니다. 자기 아들만 싸고 도는 거에요. 식당에서 어린애가 떠들어서 누가 뭐라고 하니까 엄마는 “애야! 그러지마” 하고 싸고 들잖아요.

그러면 어떤 아저씨가 나무라면 엄마가 나무라는 건 괜찮은데 모르는 남이 나무라면 그 엄마가 “아이고! 얘~예 죄송합니다.”가 아니고 화가 난다니까요. “네가 뭔데 너는 자식 없나? 너는 얼마나 자식 잘 키우냐? 네 새끼나 잘 보지, 남의 귀한 자식에게 왜 그렇게 하냐? 어지간히도 할 일 없다. 눈 흘기며 재수없다. 너는 얼마나 잘 하나 보자, 야야 옷 입고 나가자!” 꼭 경험 한 것처럼 이야기 하지요?

그런데 어떤 아저씨든 누가 식당에서처럼 훈계를 할 때는 그냥 쉽게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내가 그 상대방에게 맞을 각오하고 어렵게 입을 떼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을 볼 때 아무리 인간이 자기 자식을 훈계해도 부모가 자기 자식을 제대로 다루질 못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방법처럼 못하는) 이것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엘리하고 그 자식 사이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과 기준을 어느 부모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30절을 한번 읽어 보세요.

(삼삼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여기서 해석을 주의해야 합니다. 멸시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우리가 정신을 자기 이익에 온통 온 종일 24시간 정신을 팔기 때문에 그 순간 주님을 멸시해요. 따라서 엘리 아들들이 죽은 것은 시범조로 죽인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 엘리의 아들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신 거에요. 아까 [죄+피=의]가 된다고 했지요. 의 쪽에서 보면 의를 위하여 피를 흘렸고 상한 심령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그러면 성도가 상한 심령이 되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이건 일반 교회에서 잘못 가르친 것이고 이런 건 이단입니다. 상한 심령되고 구원 받는다? 이런 건 구원 못 받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고 의가 상한심령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누구든지 초대받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습니다.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습니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교회가 부서져야 교회가 나온다는 말은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교회에 오거든요. 그것을 탈탈 털어내는 작업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목사도 이단이고 장로도 이단이고 전부 이단인데 어떤 사람이 구원 받으려 교회에 갔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 복음을 알게 되었어요. 복음을 알게 되어서 “목사님은 왜 설교 하면서 복음을 안 전합니까?” 이 말 했다고 갑자기 퇴출당해 버렸어요.

저쪽에서는 이 사람을 쫓아냈다고 보지만 주님 보시기엔 이 사람을 보내서 덩치 큰 저쪽을 털어 낸 거에요. 어딜 감히 지옥 갈 인간들이 어딜 붙어? 붙은 자리를 알고 붙어야지! 다 떨쳐내는 거에요. 상한 심령도 아닌 게 어딜 천국엘 가 이 말이거든요. 왜냐하면 상한 심령이 되야 예수님의 피만으로 구원되는 것을 느끼는 거에요.

만약에 상한 심령이 아니고 잘 난 존재가 되어 버리면 기도해서 잘난 존재. 헌금해서 잘난 존재, 십일조해서 잘난 존재, 선교해서 잘난 존재, 나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에 다녀서 잘난 존재 이렇게 되어 버리면 전부 하나님을 통째로 멸시하는 집단이 되는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을 존중해야지! 하나님을 존중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멸시 안 해야지! 아무도 없습니다.

주께서 멸시하는 자가 납니다라고 들추어내게 하시므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이건 엘리 아들들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일리 아들들과 저하고 다름없네요! 하면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설경 해석이 이렇게 보면 굉장히 쉬우면서도 사고의 발상에 전환이 안 되게 되면 이것보다 어려운 게 없어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맨 날 복음이야기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하나님을 섬겨야지! 말씀을 주었으니 순종해서 영광 돌리고 섬기고 찬양하는 뜻으로 말씀 지키겠다는데 이게 왜 이단이야?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다.” 맨 날 이런 소릴 하고 있어요. 죄를 노출시키는 것을 감 못 잡고 착한 인간을 더 착하게 하기 위해서 영광 돌린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방향이 반대입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정하사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아담의 죄이며 누굴 욕할 입장이 못 되고 너도 똑같다라는 것을 너도 그 상황 되어보면 너도 마찬가지라는 거지요. 사람이 배불러야 그 다음에 사치도 하지 배고플 때는 빵이 제일 좋지요. 음식이 뭐 맛이 있네, 없네, 쓰네, 짜네 이건 먹을 게 있다는 뜻이에요. 젓가락이 갈 때 없다라고 말해도 막상 다 치워버리면 아 왜 그러십니까? 농담도 못합니까?라고 하지요.

이 말씀을 주께서 언약이라고 했지요. 정리해 봅시다. 우리 속에 주의 언약이 들어온다라는 이 말씀이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매일같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매일같이 이 말씀대로 일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딱 저네요. 제가 경멸이 여겼습니다라고 고백케 해서 우리 자신이 말씀 덩어리가 되게 하십니다.

말씀이 함께 일하고 있는 현장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걸어 다니는 말씀이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엘리 보고 지옥에 갔다, 엘리의 아들들이 지옥에 갔다 이렇게 하지 마세요. 지옥과 천국은 신약 때 경정되는 것이고 구약은 하나의 무대 장치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그 무대장치를 세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미장센이라 했어요. 한 장면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것.

이 세상 자체가 하나의 미장센이에요.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엘리, 아들들) 미장센속의 하나의 연극배우들입니다. 각자의 맡은 역할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엘리의 가정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서 아버지의 집이 망했다. 이렇게 설교해선 아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뭐냐하면 사무엘 상 8장 3절에 나와 있어요. (삼상8: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엘리의 아들들만 아버지의 행위를 안 따른 게 아니고 사무엘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안았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아무리 훌륭해도 자식을 천국, 지옥 보내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아버지의 몫이 아니에요. 너누 심한 책임감을 부모가 갖지 마세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저 자식을 낳은 게 아니고 아버지인 나를 이용해서 (자식을) 낳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간을 반대로 가져가세요. 원래 준비된 너가 나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뚫고 나온 거에요. 다윗의 자손이 예수님인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다윗을 이용하신 거에요. 분명히 역사상으로 다윗이 조상이지만 자손이 오히려 자손의 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주는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이 초대해 줘야, 천국으로 불러 줄 때 아버지께서 불러준 사람은 다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 밖에 없어요. 그리고 아들은 성령을 받아야 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45.164)

16-02-20 14:48

단절 (마 20:17-23) 대전- 72강

이근호

2016년1월 26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0:17-23

(마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마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마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20: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선 자기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실지 다 아셨잖아요. 지금은 마태복음20장이니까 아직 26장이 안 됐지요? 다 아셨는데 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을까요? 가롯 유다가 와서 (팔고) 배신할지도 아셨어요. “가롯 유다야! 네 할 일 얼른 해야지! 그래야 돤다.”라고 해 놓고도 왜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이야기를 했느냐는 겁니다.

아까 죄 속에서 의가 나온다고 했지요? 허무를 만들어요.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아까 읽었던 본문처럼 오늘 할 이야기는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십자가와 부활사이에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만을 생각하는데 주께서 그 사이에 틈, 간격. 이 차이를 주님께선 주목해요. 영어로 gap이라고 하지요. 후딱 건너 뛸 수가 없어요.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어 물 한 방울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주세요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천국에 간 사람은 지옥으로 갈 수가 없다해요. 큰 구렁이 있어서 건널 수가 없어요. 끝났어요. 영원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이 단절을 주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요. 멀리서 보는데 그래도 소용없어요. 멀리서 보면 마치 진짜 보이는 것 같은데 인간은 상상하기 때문에,

뭐든지 신의 세계, 아름다운 세계, 온갖 것 다 상상 하는데 상상하게 되면 뭐가 빠져 버립니까? 단절 요소가 있다는 것이 생각이 안 난다니까요. 타박타박 걸어가게 되면 마치 그 쪽으로 길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라고 했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그 길을 따라 가려고 했는데 못 갔지요? 그 길은 단절된 길인데 베드로는 자기의 목숨을 바치면 얼추 따라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겁니다.

길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끊어져 있습니다. 끊어진 길을 제시하는 분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처음부터 아무 생각 없으면 덜 안타까울 텐데 (I’m missing you) 그리워하는 것. 그리운데 갈 수 없는 곳.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에게 오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그냥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거에요. 이게 단절 아닙니까?

하지만 너무너무 사랑하기에 그저 보기만 해도, 나는 슬퍼도 행복합니다. 이승철이 불렀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라는 노래 (그런 그대를 위해서 나의 심장쯤이야! 얼마든 아파도 좋은데 사랑이란 그 말은 못해도 먼 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사랑은 주는 거니까, 너만 잘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가도 나는 슬퍼도 행복합니다.

왜? 스스로 위로하는 거지요. 사랑은 그냥 퍼 주는 거니까, 너만 잘 되면 되지 내가 잘 될 필요가 뭐 있어! 이런 식으로 위로 하는 거에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I’m missing you.그런데 왜 그리워했냐는 말이죠? 그렇다면 잊도록 조치를 해야 되는데 그리워 하기는 왜 그리워했냐는 말이죠. 이게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과 관련이 돼있어요. 인간은 신을 그리워해요.

인간은 그리워하는데, 그건 단절 없는 그리움입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그리워하는 것 아시죠?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한 편이지요? 한 몸이지요?” 자꾸 이런 신을 생산하고 만들어 내요. 자꾸 보고 싶어 해요. 우상이지요.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리움 없이는 인간은 못 살아요. 이것을 소망이라고 할 수 있고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인간은 그리움 없이는 한 시도 못 삽니다.

왜 힘든 인생을 견뎌 내느냐? 내가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은 그리운 사람과 언젠가는 만난다는 그 힘이 나의 용기가 되고 격려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힘이 되어 일곱 번 넘어져서 좌절해도 굴하지 않고 또 힘내서 살고 하는 거에요. (자식처럼) 그놈의 자슥이 뭔지?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이야기를 해도 그 예수는 나의 이 그리움이라는 체제 안에서의 예수는 그냥 그리움의 대상일 뿐이고,

내가 원래 그리워했던 분의 자리에 그냥 예수라는 분이 턱 하니 그냥 대체물로 들어갈 뿐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이번 수련회에서도 했는데 참 어려운 부분이 많았어요. 나름 쉽게 하려고 노력을 다 했지만 어려운 내용이 많았는데 뭐냐 하면 남이 없으면 내가 없다는 그 이론입니다. 나는 가짜에요. 내가 거울을 보잖아요. 거울 속의 나는 죽은 나에요. 내가 봤던 5초전의 ‘나’이고 지금의 나를 몰라요.

나르시즘(자기 애)에서 그 사람은 뭐가 문제냐 하면 물에 비친 자기가 가짜인 것을 몰라서 물에 빠져 죽은 거에요. 사람들이 거울을 봐야 되는 이유가 진짜 나를 바라보면 나르시즘에 빠져요. 따라서 인간은 나를 대신 할 수 있는, 거울에 비친 나 말고 중간에 것을 만들어서 자꾸 집어넣어야 돼요. 만드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타인의 모습, 남의 모습에서 내가 되고 싶은 요소를 집어넣어서 그 순간의 나의 희망이 되는 겁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돼야지 그래! 저게 바로 내 모습이야!” 머리가 (저 사람처럼) 저렇게 나와야지! 나도 저렇게 해달라고 해야지! 이것이 오늘을 살게 합니다. 내가 누군지 몰라요. 그냥 내가 되고 싶은 것에 간격을 유지하는 그것이 내가 진짜 내 모습이 될 가능성만 내다보면서 언젠가는 원래의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을거야라는 희망 때문에 오늘도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애들보고 뭐라고 합니까? 자꾸만 꿈을 꿔라! 희망을 가져라! 지금의 네가 전부가 아닌데 여기서 네가 왜 실망하고 좌절하느냐? 너는 네가 되고 싶은 네가 될 수 있어. 그러니 이렇게 시시한 것 가지고 신경쓰지마! 얼마 전에 광주 강의 할 때 제가 이야기 했거든요.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애는 정신병자라고, 거짓말이 뭡니까? 내가 따로 있고 꾸미고 싶은 내가 따로 있을 때 꾸밀 줄 안다는 것은 자살을 미연에 방지하는 거에요.

꿈이 있는데 왜 자살을 해요. 진짜 내가 남아 있는데 왜 지금 죽어요? 억울하게 진짜 내가 없을 때 자살한다니까요. “기껏 이거야? 에잇! 죽어 버리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구자근 사모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자기도 애들을 그렇게 가르친답니다. (어느 정도의) 거짓말 못하는 애는 정상이 아니다, 다들 조금씩은 다 그렇다는 거지요. 물론 그것을 전문으로 삼으면 안 되고 전문으로 얘들 패면 어떤 축구 선수 아들처럼 소문나게 돼있어요.

그게 아니고 누구나 다 자기 말고 가짜 자기를 앞에 내세우면서 자기는 뒤에 숨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에요. 그게 바로 교육학입니다. 너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큰 인물이 되라는 이유가 뭡니까? 국가의 인물에 나의 대체물을 거기다 상징물로 만들어라. 그래야 네가 남에게 크게 환영받는 인물이 된다는 것 때문에 지금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유인하는 거에요.

이렇게 하면 돼요? 아니야! 좀 더!더!더! 이렇게 해요? 아니야! 더!더!더!더! 점점, 이번에 1등하면 되요? 아니야? 전교 1등 해야 돼, 너 이번에 전교 3등 나왔어! 안돼! 다른 반 애가 1등 했어! 너는 화나지도 않아? 그럼 전교 1등 하면 돼요? 아니야! 다른 얘들 봐라! 서울에 있는 강남 얘들이 공부 더 잘해! 계속해서 멈추지 않게 하는 겁니다.

서울 대에 다니던 학생이 자기는 아무리 봐도 금 수저가 아니고 흙 수저라는 것 때문에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어요. 이 사건을 하번 분석해 봅시다. 서울 대학에 들어갔다 하면 남들은 보기에 얼마나 부럽습니까? 공부 잘하는 애 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보기에 자기 주변에 금 수저들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에요. 자기는 흙 수저로 출신이 나쁘다는 말이죠. 이 학생의 문제는 뭐냐? 여기서 금 수저가 흙 수저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한 거에요.

왜냐하면 뒤 돌아서 생각해 보면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아무 쓸대 없는 생각이었다라는 것을 살면서 뒤돌아보며 알아야 할 텐데 걔는 거기서 스톱이 되버린 거에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서른으로 왜 끝나요? 서른 둘, 셋..도 있는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어디로 끌려가는 지도 몰라요. 그냥 무작정, 망상에 의해서 끌려간다고 보면 되는 거에요.

그 망상을 언제 멈출 거에요? 바로 절벽 끝에서, 절단의 자리, 절단된 자리까지 와야 스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개인 문제가 아니고 온 인류의 문제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왜 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죄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자기 안에 죄가 있잖아요. 그 죄의 값은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아야 하는 끝입니다. 자살해서는 안돼요. 자살해도 소용없습니다.

주님에 의해서 죽어야지 자기가 알아서 죽으면 안돼요. 알고 죽어야 되요. 나는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아 합당함을 알고 죽어야 되요. 그러면 합당함이 영원히 고정된 신분이잖아요. 고정된 신분의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십자가에서 부활로 폴짝 뛴 분에 의해서 바라볼 때 모든 것은 버림받아 마땅하지요.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아셨다는 거에요. 내가 누구에게 고난 받고?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남들이 보기엔 예수님이 스스로 알아서 간 것으로 보이지만 자기 빼놓고 모든 인간, 제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이 자기를 아버지께 버림받는 자리, 사실은 인간들의 본래의 자리, 인간들은 모르는데 예수님은 미리 아신 그 자리, 죄 지은 자는 하나님 앞에 영원히 버림받고 지옥 간다는 예수님만 알고 있는 그 자리까지 인간들은 뭣도 모르고 예수님은 미리 앞당겨서 몰아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누구까지?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들까지,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유대인, 이방인 구분 없이 다 버림받아야 마땅하게 드러난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목 걸이로 달고 차에 달고 하는 게 십자가가 아니에요. 그건 부적이고 예배당 꼭대기에 달려 있다고 그게 다가 아니고 십자가는 엠블럼(emblem) 자동차의 앞쪽에 붙어 있는 상징물, 좋은 차에 붙어 있는, 전체를 대표하는, 전 인류에 대한 엠블럼은 십자가입니다.

버림받아 마땅함.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엠블럼인 십자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다시 말해서 너희는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구원자마저도 얼마나 인간들이 어리석나 하면 계속 거부하고 밀어내는 거에요. 매일같이 신자던 불 신자던 상관없이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이 들어 온다하면 나가세요! 계속 떠미는 거에요.

못 들어오도록, 말씀이 못 들어오도록, 복음이 못 들어오도록, 예수님 못 들어오도록 내 인생은 나만 즐기는, 내 망상과 내 희망과 내 꿈, 그것을 즐기는 거에요. 희망과 망상과 꿈은 어디서 얻느냐? 남에게서 얻어요. 그래서 남이 없으면 죽어요. 혼자 남으면 죽어요. 자살해요. 누가 알아주고 예쁘다 해주고 전화해주고 내 말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같이 술 먹어 줘야 되고 뭐든지 나의 존재함을 알고 있는 자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인해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바로 자기이기 때문에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모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그리워하는 나를 그 사람 안에 내가 일방적으로 집어넣어 버렸어요. 친구를 찾아 갈 때 친구를 찾아 가는 게 아니고 친구 속에 내가 투자해 놓은 내가 그 동안 공들여 박아놓은 나의 공로와 나의 희생적인 결과물로 친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친구가 나를 배신한다하면 두 번 다시 안 찾지요. 왜? 내 것이 사라졌으니까.

그래서 여자들이 결혼하고 난 뒤에 늘 노심초사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준 남자가 나만 보는 게 아니고 다른 곳에 한눈 팔 때, 길을 가면서도 다른 사람 쳐다보면 “너 지금 누구 봤나?”고 꼬집어요. 그럼 남자들은 어떠냐하면 결혼 할 때는 여자가 이렇게 할 줄 몰랐다는 거에요. 그저 살림만하고 성경에서처럼 돕는 배필인줄만 알았지요. 도와주는 줄 알았지 도와주는 자가 아니고 세퍼트처럼 꽉 무는 자, 개가 물고 흔드는 것처럼 남자의 멱살을 쥐고 흔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거에요.

그래서 영원히 하나됨은 없습니다. 부부가 영원히 하나됨은 없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가 단절에만 주목하면 안돼요. 이미 부활해서 주와 함께 있던 분이 이미 이쪽에 건너왔다는 사실, 건너와서 우리와 함께 있던 평소에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몰고 있느냐? 이것과 만남이 있어야 돼요.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아까 말한 의의 종, 똑같은데 뭔가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거에요. 용서나 희생이 주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충동적으로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예전에 설교했잖아요? 성령 받으면 기도가 스톱된다고 그 다음엔 기도를 안 하느냐? 어떻게 기도 하느냐? 충동적으로 하게 되요. 하고 싶지 않은데 기도가 다급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결혼식을 앞뒀는데 기도 안하겠습니까? 날씨 좋게 해주세요! 내가 이건 그냥 하는 소리이지 기도가 아닙니다.

아무 문제없게 해 주시고, 이건 혼자 하는 소리이지 주님! 이건 기도 아닙니다. 할 거 다해요. 걱정이 돼서, 기도는 어떤 일이 터져야 되요. 일이 터지면 누가 망가지는가? “어? 이러면 안되지!” 자기가 붕괴되고 죽을 지경이지요? 죽을 지경에서 진심이 나오는 거에요. 건성건성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진짜 다급해서 “주님! 이건 도저히 못 견디겠습니다.” 하고 나올 때의 진심. 성령께서 시키시는 겁니다. 이건 기복신앙이던 어떤 내용이던 괜찮아요.

중요하다는 것은 다급하다는 것, 그게 중요해요. 급하다는 겁니다. “주여! 제가 하는 것이 기복신앙인줄 알지만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기복신앙이던 뭐던 따질 입장이 아닙니다. 급합니다.” 이렇게 터져 나오는 거에요. 눈이 와서 차가 미끄러지는데 나는 유모차 끌고 가는데 잘못하다간 아이는 죽겠는데 주여! 주여! 아버지~ 아버지~ 아는 용어 다 튀어 나오지요? 제발 저 차가 방향을 틀던지 스톱을 하게 해 주던지 어떻게 좀, 이렇게 급할 땐 순간적으로 0.1초 내로 나오는 게 있지요?

그럴 땐 급해서 뒤에 예수 이름도 못 붙이고 그냥 외칠 뿐이죠! 그걸 성경에선 부르짖는다라고 해요. 이것을 구약에선 출애굽이라 합니다. 출애굽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구약의 출애굽을 통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홍해를 어떻게 건넜냐고 물으면 아무 대답 못 하지요. 십자가 복음을 알게 되면, 성령 받으면 십자가 앞에서 우린 아무 소리 못합니다.

너는 한 평생 어디서 어떻게 살았느냐? 주여! 그냥 건너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당겨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만약에 여기서 저기까지가 15Km이다. 그러면 15Km이전부터 십자가가 꽂혀 버려요. 꽂힌 특징이 뭐냐하면 하여튼 내 뜻대로 안되는 만사가, 범사에 내 뜻대로 안되면서 감사가 나오게 하는 것, 희안하게, 내 뜻대로 안되게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왜냐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 다시 말해 허무. 허무한 존재에서 절대로 이탈하면 안되는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처음부터 허무 했어요. 버림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워낙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르겠지만 세상 것을 많이 누리고 많이 가졌어요, 자식도 있고, 결혼도 해보고 집도 있고 알아봐 주는 사람도 있고 칭찬도 많이 해주고 착하다는 소리도 많이 해주고 이쁘다는 소리도 많이 해주고 하여튼 온갖 것 나에게 유리한 것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가졌어요.

이게 무거운 짊인데 이런 것 때문에 내가 뭘 모르냐하면 우리가 처음부터 원래 허무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요. 아까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라는 노래를 예를 들었지만 어떤 여자가 나타나서 나하고 친하게 지내다가 여자가 집에서 반대해서 다른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했을 때 결혼식은 가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그저 슬퍼도 행복합니다라는 노래만 부르고 있더라는 거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왜 처음부터 그런 여자를 어떻게 만났냐 하는 거지요. 사람이 자기에게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내가 원래 그런 여자를 만나는 것이 마땅한 가치 있는 존재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뭐가 없어지냐하면 자리가 허무한 자리에서 괜찮은 자리로 쓸만한 자리로, 세상을 다 쥐고 위대한 큰일을 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요.

그러나 막상 예수님은, 우리의 그런 죄를 짊어지신 분이 이 땅에 와서 사셨을 때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버림받았고 밉상 당했고 보기는 보아도 믿지 못하고 따라 다니던 사람은 노림수를 가지고 따라 다니고 12제자처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따라 다니고 아무도 주의 마음을, 심지어 자기 가족도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요. 허무하게 사셨잖아요?

똑같은 죄인데 주님은 죄지은 적 없이 나의 죄를 가져 가셨는데 같은 죄로 되고 우리는 죄가 있으면서도 버림받으면 안 된다는 고귀한 존재로 행세하는 내 모습. 이미 간격이, 차이가 예수님하고 벌어져 있는 거에요. 우리는 항상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간격,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의 대상과 지금의 모자라는 나의 간격만 생각했지 그 간격에만 몰두하다 보니까 십자가와의 간격은 우리는 처음부터 생각 안합니다.

거울보며 비친 모습에만 몰두하지 아침부터 십자가 피 앞에선 생각 안하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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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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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