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55절(가락-무한과 초월)160107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55절(가락-무한과 초월)160107b-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211.34.67.143)
요한복음 8장 55절(가락-무한과 초월)160107b-이 근호 목사
아브라함에게 산다는 것과 우리에게 삶이 마찬가지인데요 산다는 것이 예외적인 거에요. 이게 이상한 거에요. 나타나있다는 것.. 무의미에서 의미가 나타난다면 무의미한 것이 정상이고 의미 있게 살아있는 것은 뭔가 예외적인 것, 특별한 혜택으로 이해를 해야 돼요.
‘뭐 살다 보면 죽겠지.’가 아니라 ‘그렇다면 처음부터 죽었어야 되는데 왜 이 땅에 태어나서 살지?’라는 의문이 나와야 돼요. ‘죽으면 안 돼.’ 이게 아니고 ‘왜 계속 살고 있는 거지? 이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왜 내가 살아야 돼?’ 질문이 그렇게 돼야 돼요.
무의미를 바탕으로 해서 질문이 나와야지 ‘나는 의미 있다. 나는 살아야 돼. 내가 죽는다는 것은 어이 없어.(이것은 유아인이 한 이야기거든요.) 이건 안 돼. 반드시 살아야 돼.’ 이것은 뭔가 적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다른 쪽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악마의 생각이죠. 그래서 마귀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밥으로 생각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해서 종노릇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나는 마귀의 종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냥 ‘나 아니야.’ 하고 큰소리 치지 말고 우리 심성에 ‘이상하지 왜 자꾸 나는 살지? 또 살았네. 왜 자꾸 사는 거야?’ 오히려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가가 제대로 정립이 되어 있어야 돼요.
사는 것이 비정상이고 죽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왜? 무의미에서 의미가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 의미가 의미를 알려면 무의미로 가서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한테 무의미가 된 것은 인간들의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구원 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피하기 위해서에요. 왜냐하면 의미가 있는 오류한테 잡힌 구원자는 100% 오류가 있는 구원자에요. 왜? 납득이 되니까요. 대표적인 것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아닙니까?
‘이렇게 좋은 분이 우리를 구원해야지.’ 하고 붙든다면 그 붙드는 과정 속에서는 ‘나는 나빠.’가 근원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아요. 나는 나쁘니까 잡는다(붙든다)는 말을 하겠지만 잡는 그 행위도 나쁜 데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쁜 중에 일부라는 생각을 해봐야 돼요.
그렇잖아요? 빨간 물감이 있다고 하면 그 물감을 찍어 가지고 왼쪽, 오른쪽, 중앙, 어디에 발라도 빨간색이 찍혀 나오잖아요. 찍힌 것이 오류라면 어디를 찍어도 이게 오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당시에 일하시는 모든 기능은 ‘너희들은 이런 정도에 갇혀 있다. 그래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하다.’는 쪽으로 이야기하시고 인간들이 납득이 가고 인간들이 이해되는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피해버립니다.
그 중에 하나 예가 58절입니다. 58절 한 번 봅시다. 57절의 유대인들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한 번 비교해봅시다. 57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상당히 노안의 인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답니다. 실제 나이는 33살밖에 안 되었는데 “50도 못되었는데” 세상에 17살이나 늙게 봤으니까 도대체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50도 못되었는데”라고 했어요. 이것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50세, 어떤 사람은 40세, 어떤 사람은 60세, 또 어떤 사람은 70세로 할 일이 많아서 갈 수 없고요. 80세는 알아서 갈 나이고요. 90세는 자기가 알아서 좋은 날짜를 골라서 가겠다고 하고요.
이런 사람들이 있을 때에 50세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한 살부터 50살까지 살았다는 것이잖아요. 여기에 예수님이 중간에 계신니까 “오십도 못되었다”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45~47세 정도로 봤다 이거지요.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을 자기들 속에 예속했다, 또는 전체에 속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했다고 보지 않고 자진해서 포함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속한 것과 포함된 것의 차이를 보여주면 됩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눈에 보이는 것 전체를 다 잡아요. 그걸 영어로 all,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은하계, 은하계에서 더 넘어선 별, 거기다가 별이 하나 또 새로 발견하게 되면 (얼마전에 발견되었거든요.) 지금까지 알고 있는 전부에다가 +1로 하나 더 보태면 되겠지요.
그것을 아까 제가 초월이라고 하지 않고 무한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갈 때까지 계속 가보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 구약 전도서에 보면 “사람이 책을 봐도 끝이 없다”고 했어요. 지식을 쌓아도 한이 없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결국 인간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헛되다는 이야기는 무한의 끝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초월세계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이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그 초월세계를 우리는 생각하기를 무한 저 너머에 초월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방금 이 그림에 의하면은 초월은 이미 이 인간의 눈에 보이는 유한+α (무한), 인간에게 또 미지로 남아있는 그것까지 합해서 전체를 말합니다. 미지의 것이 아직 남아있고 앞으로 점점 과학이 발달할테니까 그걸 무한이라고 한다면 유한(자기가 지금 알고 있는 것)+무한(미지로 남아있는 것)을 전체(all)로 보는 거에요.
그런데 이 전체에 초월이 들어와 버리면 이것은 예속되는 것이 아니고 포함이 되어 버리지요. 인간이 생각하는 전체에, 전체에 들어있지 않은 것이 들어와 버렸으니까 인간은 예수님을 이해합니까 못합니까?
예수님도 껴안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해서 한 말이 “나는 40이고 나는 60, 70인데 너는 아직 오십도 못되었다”라는 것이고 이것은 예수님을 자기 전체의 일부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이 납득이 되지 않는 튀는 이야기를 한 거에요.
마치 교회에서 복음이야기를 하면 납득이 안 되듯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교회가 전체에요. 그런데 몇 주 전에 제가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사는 교회를 부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다른 교회에 가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은사를 받은 자는 교회를 부수어 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돈을 내서 건물을 짓고 당회장, 부목사를 세워서 조직을 만든 이 교회를 은사가 부수어 버립니다. 천주교는 성령(은사)이 부수어 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그런 사실도 몰랐네요. 내가 껴안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합니까? “나가라.” 이렇게 되지요. 왜냐하면 이 전체라고 하는 것이 누구 좋으라고 하는 전체입니까? 그 안에 본인이 있지요.
본인이 납득이 되고 본인이 중심이 되어 있는 전체, 또는 본인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전체, 그 전체와 어울리지 않고 섞이지 않고 튀는 이야기를 해버리면 본인의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추방시켜야 되겠지요.
그 사람을 아웃사이더라고 하잖아요. 추방시켜 버려요. 그래서 벌거벗은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을 희생물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이것은 아간의 이야기입니다.- 자꾸 일이 안 되는 거에요.
조사를 해보니까 거기에 아간 같은 존재가 있었고 그래서 아간을 잡아죽였더니만 다시 일이 잘 풀렸다고 한다면 아간의 존재는 일종의 희생물이 되는 거에요. 그것이 속죄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마리의 새를 잡아가지고 그 문둥병의 죄를 새 한 마리에다가 다 집어넣어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죽은 새의 그 피를 한 마리 남은 새에다가 바르고 난 뒤에 새를 창공을 향하여 훨훨 날려버립니다. 문둥병자가 하나님의 긍휼로 깨끗함을 입은 상태를 두 마리의 새로서 표현한 거지요.
그런데 벌써 모세의 율법에 그런 것이 있으니까 후대의 사람들은 그 방식을 그대로 자기한테 적용을 시키겠지요. 그러면 자기의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 공동체의 의사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제물로 갖다 바칠 때에 우리 공동체가 다시 평화와 안녕을 회복하는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있잖아요. 요한복음 11장에 한 사람이 죽어서 다른 사람이 살겠다는 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잖아요.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전략이었던 겁니다.
인간이 끝까지 악마의 편에 서서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게 되면 우리는 안전보장이 된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거에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소속된 입장입니까 아니면 낯선 분으로서 포함된 입장입니까? 포함된 입장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미리 당겨서 오신 거에요. 오늘날 성령이 올 때에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왜 믿으려고 하는데?”, “구원 받고자 합니다.”, “네가 누군데 구원을 받아? 네 주제를 알아? 네 주제도 모르고 왜 구원을 받아?”, “남들 보니까 예수 믿으면 죽어서 좋은 데 간다고 하는데 저도 죽어서 좋은 데에 가고 싶습니다.”, “그건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그러지요.”, “그러면 그 천국은 네 나라가 되네?”
그럴 때에 제가 늘 써먹는 예화가 있습니다. “천국에 너는 왔는데 네가 좋아하는 딸이 만약에 지옥에 간다면 너는 천국에서 마음이 편하겠어 안 편하겠어?” “천국에서도 죽을 맛이지요.” 천국에서도 죽을 맛이면 그것이 천국이겠습니까 지옥이겠습니까? 지옥이지요.
끼리끼리 좋아하는 사람은 같이 가야 돼요. 자기 혼자 가면 재미가 없어요. 맛있는 것도 같이 먹어야 맛있지 자기 혼자 맛있는 것을 먹어봐야 며칠 안 가서 맛이 없어요. 그럼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누가 결정한 거에요? 내가 결정한 거에요.
나와 함께 바라볼, 나와 함께 있을 사람을 원하는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여러분들이 들어봤을 겁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같이 하지요. 그런데 같이 하는 조건이 있어요.
누구 마음에 들어야 돼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함께 있어야 돼요. 처음에 결혼할 때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했잖아요. 그런데 둘 다 착각하고 있었던 거에요. 서로 너는 내 마음에 들고 나는 내 마음에 들고.. 둘 다 주도권을 쥐고 결혼한 겁니다.
23일날 또 결혼식이 있어서 거기에서 주례해야 돼요. 벌써 다 준비해 놓았어요. 사랑이라는 것이 자기를 망치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어떤 경우도 내가 주인공 됨을 스스로 포기할 능력이 나한테는 없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만 잘 되면 좋은 세상이고 세상이 아무리 좋은 세상이라도 내 가치를 잃게 하면 나한테 나쁜 세상이 되는 겁니다. 북한에 살다가 남쪽에 왜 옵니까? 복음 때문에 오는 줄 알아요? 자기 좋으라고 탈북하잖아요.
가족을 놔두고 왔을 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더 이상 북한에서 내가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가 되고 그런 뜻으로 건너온 거에요. 말로는 그렇게 안 하지요. “내가 가서 다시 불러낼게.”라고 하는데 자기가 먼저 나왔다는 말은 ‘역시 나에게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어.’라는 뜻이 되지요.
예수님이 우리한테 같은 소속이 되었다는 그런 의식에 대해서 예수님은 푹 잠겨 버려요. 포함이 되어 버린다고요.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 손에 돌아가시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까불다가 맞아죽었지.”라고 했지만 예수님의 그 죽음마저 그들 전체에 소속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에게는 단절되어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부활은 그들의 소속이 안 되지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자기 속에 소속이 되어 있어도 자기 손으로 죽인 사람이 부활되었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 그래요? 죽여서는 안 될 분은 내가 생각하는 전체가 합세해서 죽인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예수님이 부활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는 거에요. 그래서 그것이 퍼지는 것을 방지해야 돼요.
그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다는 것, 그 이야기가 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지요.
그래서 본인이 나중에 예수님이 만나고 난 뒤에 사도바울은 자기 중심의 전체가 아니고 예수님 중심의 전체가 될 때 나는 주님을 핍박하기 전, 창세 전부터 주님 앞에 소속된 사람, 창세 전에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데 누가 방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된다는 이 생각이 주님이 하시는 일에 방해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이유를 알게 된 거에요. 왜 살아야 됩니까? 주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 받은 거에요.
못된 짓을 하라고 태어난 거에요. 우리 집에도 그런 효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태어난 것은 엄마한테 불효하라고 태어난 거에요. 이 말은 불효자하고 있는 거에요. 효자하고 있는 거에요? 효자에요. 엄마와 아빠의 모든 수발을 다 들어서 “네가 왜 이 일을 하느냐?”하고 물으면 “이 일을 하라고 내가 자식된 거에요.”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나에게는 내 세계가 없고 아빠의 세계에 나는 예속되어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그러면 그 애가 기특한 거에요? 미친 거지요. 안 되지요.
조선 시대에 효자 랭킹 5위까지가 나왔습니다. 오늘 아침 방송에 보면 나오거든요. 어느 정도로 해야 2등이냐 하면은 엄마가 죽을 즈음이 되어서 힘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손가락을 깨무는 거에요. 고문서에 표기가 되어 있어요.
이 손가락을 깨물 때 나는 소리가 비단이 찢어질 때 나는 소리하고 똑같대요. 비단을 찢는 소리처럼 ‘찍’하고 손가락을 깨물어서 나는 그 피를 멀건 죽에다가 섞어가지고 먹여주니까 엄마가 기운을 차렸다는 거에요. 이것이 2등이었습니다.
1등은 16세 소녀가 아버지에게 밥 몇 끼를 더 대기 위해서 헐값에 자기 몸을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심청이처럼 소원을 빌려는 것이 아니고 몇 끼를 더 먹여서 아버지의 목숨을 연명시키기 위해서 자기 몸을 요새 돈 한 10만원을 주고 팔아서 부자 양반집에 노비로 팔려갔답니다. 그것이 1등을 했습니다.
3등은 자기 엄마가 고기를 먹고 싶은데 고기를 구할 데가 없어서 자기 허벅지를 찢어서 그것을 끓여서 엄마한테 먹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잔혹사인지 도대체 엽기적입니다.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제가 요번에 수련회 교재에 인간에게 혈연관계보다 더 끈질긴 것은 없다라고 썼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혈연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친 것을 보세요. 이것이 1등 했습니다. 이삭을 자랑하면 안 돼요. 아브라함을 자랑하려 하면 안 돼요. 왜 태어나는가? 아브라함 본인이 도대체 왜 태어나는가?
“왜 내가 아직도 살아야 됩니까? 아, 이 짓을 하라고 살아있어야 되는군요.”라고 해서 한 짓이 아들을 잡아죽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가 되는 것이 예수님만 살이있는 거에요. 예수님만 의미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다 그냥 그대로는 무의미한 거에요.
다만 언약이라고 하는 그 골리앗 크레인, 언약의 이동을 따라서 그냥 이동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연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연적 존재가 있다고 하면 필연적 존재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필연적인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다”라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주의 계시에 의해서 지시를 받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연’이 있다고 하면 ‘필연’이 있다고 했는데 반드시 ‘우연’과 ‘필연’은 연결되어 있어요.
이 둘이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연’은 반드시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지.’라고 ‘필연’으로 자기를 오해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는 것은 우리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우연적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은 핵폭탄으로 날라가도 나는 마지막 살아남은 자로서 무조건 세상이 날라가는 최후의 모습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보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요. 최후의 1인자, 마지막 남는 자가 승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하고 싶은 거에요.
상식에서 70세에 죽는 사람, 80세에 죽는 사람, 90세에 죽는 사람, 100세에 죽는 사람 중에 누가 최후의 남은 자입니까? 100세에 죽는 사람이죠. 그래서 ‘100세 인생’ 아닙니까? 마치 오래 살면 승자로 알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서 33년밖에 살지 않았어요.
구약의 사울왕, 다윗, 솔로몬 그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동일하게 40년 통치기간이에요. 솔로몬은 b.c.970~930년, 다윗은 b.c.1050~1010년, 사울은 b.c.1090~1050년 이렇게 그 통치기간이 40년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크레인으로 다룰 때 그 당시가 의미 있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가 40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왕으로 있으면서 알게 되었지요.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에는 기고만장했다가 진짜 왕은 이게 아니구나를 안 것이죠.
여기서 우리 한 번 정리해 봅시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뜻은 내가 아는 나(나의 나)와 언약의 나가 불합치(일치 되지 않음)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나는 죽음으로 끝나지요.
이 죽음으로 언약(십자가)으로 마중을 나오지요. 이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하기 위한 죽음으로 엮어지게 되면 이 사람은 창세 전부터 택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증인이 되지요. 이렇게 엮어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사실을 내가 불교신자라든지 안 믿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게 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미를 안 두고 꼭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만 의미를 두느냐?” 이렇게 얘기하겠지요. 안 믿는 사람이나 불교신자나.. 교회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렇게 이야기할 때는 뭐라고 답변해야 돼요? “네가 아는 전체에 네 손에 잡히지 않는 예외적인 것이 포함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는 왜 몰랐느냐?” 교회에서 자꾸 죽고 난 뒤에 부활된다고 하는 거에요.
그들은 십자가를 후딱 지나서 어떻든지 간에 부활의 새생명을 자꾸 누리고 싶은 겁니다. 자꾸 죽으면 좋은 데에 간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죽어서 좋은 데에 가지 말고 지금 너희들 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작은 자(소자)에 대해서 너희들은 어떻게 대우했는가를 따져야 돼요.
그들이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그 사람이 괴롭고 어려울 때에 (그를 위해) 힘들어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고 했거든요.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잖아요. 지금도 복음을 아는 사람과 함께 있어요.
그런데 함께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그들은 자기 존재 위주로 그들을 시답지 않는 것(변두리)으로 지금도 핍박하고 있는 거에요. 아까 유목사님이 이야기하셨는데요.. 신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 “너는 아직도 십자가만 생각하나?”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셨지요.
그럼 물어보세요. “너는 뭘 전하나?” 한 번 물어보지요. “너는 아직도 십자가만..” 그것이 무슨 뜻인 줄 알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언제 모으나?” 그런 뜻이거든요. 그것이요. 그래서 언제 목회하겠느냐 그런 뜻이다 말이지요.
그 말은 내 존재의 의미를 위해서 예수도 있고 복음도 있고 성경도 있고 하나님도 있다는 뜻이거든요. 나를 위해서 그런 개념들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은 뭡니까? 나는 없어도 돼요.
진작 죽어야 되는데 십자가 때문에 계속 끈질기게 아직도 눈 뜨고(점점 감기고 있습니다마는) 살아있다 그 말이죠. 제발 안 살고 싶은데 자꾸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내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세계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을 내가 내 것으로 만들어 포함시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님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우연적 존재에요. 있으나 없으나 그만인 존재에요. 그 이야기를 유대인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당신은 아직 50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왜?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당시로부터 2000년 전 사람이고 너는 나이가 50도 안 되었는데 네가 어떻게 그를 보느냐?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신 말이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였습니다. 그냥 성질 같으면 죽여버리든지..(그들의 마음을 표현함) 우리 공동체가 알고 있는 그런 소통, 흔히 요새 인문학에서 하는 소토의 법칙을 네가 뭔데 깨느냐 이 말이지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들한테 예속이 되어 있지 않거든.” 결국은 이 말이거든요. 주님은 참기름을 발라놓으셨어요. 아무리 붙잡아도 자꾸 빠져나와요. 붙잡히지 않아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물병을 들었지만 59절에 그들은 돌을 들었지요.
그 성질, 그 기능, 그게 바로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 아비는 마귀다” 처음부터 마귀에게 속했으면 마귀의 모습을 드러내지, 꼭 내가 한소리 해야 마귀의 모습을 드러내냐.. 정리합시다.
적그리스도,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쪽은 이미 마귀 쪽에 모든 것은 다 넘어갔아요.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날 아담과 하와, 남자와 여자와 뱀이 아주 밴드를 만든다고 했지요. 보컬그룹이라 이거에요. 하나의 밴드로 되어 있어요.
셋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선악과 자체에 대해서는 전부 다 모르고 다만 따먹을 만해서 따먹었다는 것에 대해서 전부 다 동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꼬시는데 내가 안 따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뱀이 꼬시는데 안 따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는 그런 뜻이거든요.
전부 다 자기 인생은 변명을 하든지 해서 내가 책임지겠다. 내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유지하겠다는 그러한 속셈을 드러낸 겁니다. 그게 바로 마귀에 속한 속성이에요. 나를 유지하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거기에서 나온, 그들이 말한 천국은 자기가 배포나게 한 번 살아보겠다는 천국이기 때문에 100% 가짜입니다. 그 천국은 초월이 아니고 유한의 세계가 끝나면 드디어 시작되는 무한의 세계를 천국, 유토피아로 본 겁니다.
그들은 그 천국에 가도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아는 내가 유지되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그대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강의했듯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만들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뒤에 따라오는 모든 인간들도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거에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나의 소유가 되는 의(이것을 남한테 빼앗기면 안 돼요.), 수고하고 애써서 내가 만든 나의 의를 저축해야 돼요.
이것이 마귀가 지옥으로 보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자기 의를 자기가 계속 채우는 거에요. 요걸 오늘날 교회가 너무 잘하고 있어요. 괜찮아..(박수) 너무 잘하고 있어요. 뭘 하게 되면 이런 혜택이 주어진다. 뭘 하면 착하다고 한다.
그 바닦에는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살아야 돼.가 마귀의 숨소리처럼 늘 나오고 있어요. 어쨌든 살아야 돼. 무조건 살아야 돼. 사는 게 남는 거야. 인간은 부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왜? 마중나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미리 앞서서 마중나온 사람이 없으면 부활의 세계는 물건너 간 겁니다. 미리 마중나왔다는 말은 내가 중심이 아니고 나는 우연적 존재, 다시 말해서 곁가지에 불과한 거에요. 주님이 만든 중심에서 그냥 같이 돌고 있는 유성같은 존재인 거에요. 잠시 나타났다가 없어져도 그만인 것입니다.
유대인하고 예수님의 대화가 어긋나지요? 이 어긋난 대화 자체가 계시잖아요. 그렇다면 이 계시가 오늘날 우리 속에 똑같은 현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돼요.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주님의 응답이 늘 어긋나지요?
나에게 의미를 두고 하는 기도니까요. 그러면 나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 기도를 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나에게 의미가 없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요. 기도를 왜 하는데요?
급해서 기도를 하겠다는 말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뜻으로 기도를 하잖아요. 죽을 때 죽더라도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보고 죽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벌써 나한테 의미가 있잖아요. 기도를 안 하면 된다고 하는데 답답한데 기도를 안 하는 위인이 어디 있습니까? 답답하면 기도하게 되어 있는데요.
‘주여, 어찌 합니까?’ 하게 되어 있는데 왜 기도를 안 해요. 의도적으로는 안 하겠지만 푹 쑤시면 하게 되어 있는데요. “엄마야! 아이고 놀래라.” 하고 기도하게 된다니까요. 우리가 속해있는 이 세상 자체가 그리스도의 세계이기 때문에 성도를 가지고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쳐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현상들이 자주 일어나게 되어 있지요. 어지간한 것들은 안 걸린다고 하지만 금방 강도가 센 것이 올 거에요. 기다려 보세요.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이럴 수가 있는지..’
9장에 봅시다. 1절에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처음에는 눈을 떴다가 사고로 소경된 것이 보기에 흔하겠습니까 처음부터 눈이 감겼는데 눈을 뜨는 것이 흔하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어요? 멀쩡한데 교통사고 나가지고 음주운전하다가 눈이 감긴 것은 흔하지요. 개그맨인데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된 그런 것도 방송에 나왔잖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소경으로 확정이 되었는데 나중에 보이게 된 것은 ‘가역적’이에요. 가역적 현상입니다.
‘불가역적’이라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아베 일본 수상 때문에 잘 배웠잖아요. 회담에서 한 번 결정난 것은 번복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모든 시간이 십자가로 도로 돌아간다면 이것은 ‘가역’이 되겠지요.
고무줄을 아무리 당겨봐야 손을 놓으면 ‘탱’하고 다시 원상복귀되잖아요. 낚시대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그의 시간에 납작하게 같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거에요. 의미있음에서 의미있음은 다 탈취당하고 우리는 무의미하고 오직 예수님만 의미있는 곳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이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그리스도로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이것을 체험하려고 하면 하수구에 가든지 팔당댐 물 뺄 때에 한 번 들어가보면 빨려들어가지요. 연어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거슬러 올라가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시간의 축소(단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7장에 나와요. 고린도전서 7장을 한 번 봅시다. 29~30절에 “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보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아내하고 이혼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내가 있든 없든 탈탈 털어라. 모든 나에게 붙어있는 이 곁가지 같은 의미들은 털고 갑시다. 시간이 당겨버리면, 신앙의 원천지, 신앙의 시온으로 가버리면 그동안 이 땅에서 내가 내 소유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은 무의미한 데로 가버리는 거지요. 이것이 죽음입니다.
올해 오늘로 75세 생일을 맞은 분이 계시지요. 병실에서 생일을 맞이하신 분이 있는데 이건희씨입니다. 이건희가 갖고 있는 것은 달랑 하나였습니다. 병든 몸. 병든 몸밖에 없지요. 그것도 지금 누워있겠지요. 병든 몸밖에 없어요.
누가 되었든 다 그래요. 죽을 때는 다 그렇게 됩니다. “때가 단축(축소)되어진 고로” 주께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시간의 축소를 담아내시는 거에요. 이 의미는 재산을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고 갖고 있든 갖고 있지 않든 탈탈 털리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주님은 강도인가 봐요. 있는 것 다 내놔봐. 우리가 빈손, 아무것도 없는 채로 왔으니 아무것도 없는 채로 돌아가라. 그러니 먹는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다시 묻겠습니다. 소경이 아니었는데 소경이 되는 것이 쉽습니까 소경이었는데 눈을 뜨는 것이 쉽습니까? 소경이 눈을 뜬 것이 희한하지요. 그런데 9장 마지막에 소경이 눈을 떴다는 거에요. 그냥 이 눈만 뜨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에 눈을 떴어요?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알아 맞추는, 당신이 누구인지 이제 알게 되는 눈을 뜬 거에요. 그게 최초의 지점(처음)이라는 거에요. 이 사람이 살다보니까 안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이렇게 구원 받아야 될 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었어야 한다는 거에요.
참 잔인한 하나님이에요. 조금 멀쩡해서 천당 보내도 되는데 꼭 소경이 되어서 천당에 가니 말이에요. 그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으니까 눈을 뜨고 싶은 생각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가 눈을 뜬 예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포기했을 거에요.
그처럼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처음부터 이것을 예상하지 않았어야 되는 겁니다. 부모가 죄인이니까 우라는 마땅히 죄인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예수님 앞에 지옥가야 마땅하고 소경으로 살다가 소경으로 죽어야 마땅한데 웬 은혜인지 우리가 눈을 떠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나한테 주어진 인생 역경이나 고생, 고난 같은 것은 고난도 아니에요. 눈 뜨는 것이 중요하지 나머지 것들은 시간이 단축하므로 내가 부자였다 거지였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이 탈탈 털려야 될 것들이고 일시적인 하나의 장식품밖에 안 되잖아요.
사소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여버림으로 탈탈 터시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나는 부자요, 어느 대학 나왔습니다.) 언약으로 마중나가서 딱 한 마디, 언약으로 이야기해요. ‘너는 죄인이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브랜드를 우리는 일찍 달아야 돼요. 롯데마트 같은 데에 가서 물건을 살 때 브랜드를 보잖아요. 우리도 선반 위에 ‘나는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라는 브랜드를 달고 꿇어 앉아 있어야 돼요. 그러면 천사가 와가지고 ‘아이고 여기 있네.’하고 사주겠지요.
‘나는 부자입니다.’라고 이건희는 알아서 부자로 하고 ‘나는 전전 대통령입니다.’라고 하면 ‘대통령 많이 해라. 나중에 죽으면 대통령도 같이 다 날아가니까요.’ 없어질 것들을 우리가 영원한 것으로 오인하면 안 됩니다.
이 소경이 자기가 장님이니까 ‘나는 장님이다.’ 이것을 영원한 것으로 봤어요. 인간은 이상스럽게 일단 자기 것이 되면 이것을 전부 다 영원으로 봐버려요. 그것을 아까 첫째 시간에 인간은 유한이기 때문에 무한을 생각한다고 했고 이것이 인간의 상상력이 돼요.
유한이기 때문에 자꾸 경계선 너머를 바라보거든요. 그 경계선 너머는 무한이지 초월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자꾸 무한을 초월로 보는데 그것은 옆에 있는 유한으로 보이는 초월을 못 알아봐서 그래요.
식사할 때 감사기도 하잖아요. 물론 우리 십자가마을은 거의 안 합니다마는.. 그런데 왜 고맙습니까? 주님이 까마귀를 통해서 가져다 준 거거든요. 모든 손길이 주와 함께 있다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잖아요.
뭘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사는 삶이 신앙생활 아닙니까? 함께 사는 것. 신혼이 아니고 동거인가요? 신혼으로 시작했다가 동거로 끝나는 것이 참 아쉬운 거에요. 신혼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동거는 나 때문에 네가 있다는 것이에요.
나 때문에 네가 있다는 말은 나한테 필요가 없으면 네가 알아서 좀 나가줘. 이렇게 할 수도 있고 맘 같으면 바꾸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은근히 비추는 거지요. 우리가 요한복음 9장을 하면서 처음과 끝을 미리 봅시다. 미리 보지 않으면 뒤의 뜻을 몰라요.
정리합시다. 기적이란 시원, 원초로 다시 환원시키는 게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한테 감추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는 이미 내가 중심이고 나로부터 새로운 무엇을 확장시키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전체로 간주하고 예수님까지 거기에다가 집어넣으려고 하고 하나님마저 거기에다가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에요. 자, 9장 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아까 8장은 유대인하고 대화했지요. 그런데 지금 이 9장에서는 제자들하고 대화하지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유대인하고 대화할 때는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마치잖아요. 그런데 제자들한테는 항상 여지를 남기지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자진해서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선택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속에 예수님이 선택한 흔적과 징후를 거기에다가 심어버려요. 이 말은 내가 잘나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삽입되어 있는 주님의 것으로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이 바로 그거에요.
이 인치심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할 때에 하기 때문에 미리 안 합니다. 성령께서 하셨다는 것은 우리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하고 대화하는 거에요. “오늘 잘 잤나?” “예, 잘 잤지요.”라고 하면 “너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있는 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라고 하시는 거에요.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나다.”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이 이야기하셨지요. 그런데 하나님께는 타인(남)이 없어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갑니다. 알파요 오메가라니까요.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의 뜻이에요.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주님의 모든 대화가 우리한테는 주님 자신에 대한 고백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대화라고 보면 됩니다. 그것을 삼위 하나님의 자기 교제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초기 삼위일체 이론에 보면 나옵니다.
제자들이 이야기할 때는 유대인하고 달라요. 물어요.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혈연관계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은 여전히 제자들은 자기라는 혈연관계를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이 안 되는 제자들을 어떻게 하게 하셨는가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 했건만 그것이
그냥 정보로만 날라오지 말고 현재 있는 것으로 늘 되새기며 체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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