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 (사무엘상 2:13-17 ) 대전-(사무엘9강)
오류 (사무엘상 2:13-17 ) 대전-(사무엘9강)
이름 : 주향(IP:211.231.45.164)
오류 (사무엘상 2:13-17 ) 대전-(사무엘9강)
이근호
2015년 12월2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2:13-17
(삼상2: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삼상2: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삼상2: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삼상2: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삼상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 더라
여기서 소년들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지요. 아버지가 제사장이고 그 소년들은 평소에 늘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들은 봤습니다. 소년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12절부터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고 불량자의 티를 냈는데 어떤 티를 냈냐하면은
(13절)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절)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제사하기 전에 먼저 챙긴 거지요. 삶지 말고 생것으로 먹겠다고 생고기를 달라는 겁니다. 육회를 좋아하는 모양이지요? 수육보다 육회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도 소년들이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 있냐하면 이것 하나만 아시면 됩니다. 진리는 오류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오류 없는데서는 진리가 나온다? 안 나온다? 안 나온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오류적이기 때문에 오류가 나올 때 하나님께서 이것은 오류다라고 나중에 지적하기 전 까지는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같은 인간이니까 뭐 그럴수도 있지! 그래서 불량자, 철없는 소년들이 하는 짓이 하나님께서는 오류라고 보시는 겁니다. 불량자가 제사를 멸시했다. 하나님께서 소년들이 하는 것을 좋게 보시지 않고 나쁘게 봤거든요. 나쁘게 봤다라는 것은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에잇! 나쁜 인간들” 이렇게 지나치지 말고 오류에 초점을 맞춰서 거기에 끼어들어야 돼요.
끼어들어서 하나님은 이 소년들이 하는 짓을 나쁜 짓이라고 했는데 과연 우리도 나쁘게 느껴지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똑같은 원리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 죽으시는데 만약에 그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고 했을 때 예수님을 이해하는 쪽이냐 예수님을 살해시킨 그들의 이래에 동의 할 것이냐? 우리가 다시한번 돌아 봐야 되지요. 어디에 동의하겠습니까?
죽이는 자에 합세 하겠지요? 나도 한표요! 이렇게 찬성표를 던질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라는 거에요. 믿음이 안 나오면 천국도 못 가지요? 그래서 천국은 막혀 있습니다. 대전을 보면 한밭로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살고 있다. 우린 이렇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대전 사람들이 옹기종기 이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옹기종기 그들이 갇혀 있다고 보지 못하잖아요.
이렇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에요. 어디에 갇혀 있냐? 죄에 갇혀 있는 거에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대전 사람들이 옹기종기 죄에 갇혀 있다. 죄에서 못 빠져 나온다. 무슨 짓을 해도 죄 안에서 죄를 퍼트리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옹기종기 참 잘살고 있다 이렇게 같이 공감하게 됩니다.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라든지 명절이나 이러 때 보면 “나도 저들처럼 웃음소리에 끼어들면 얼마나 좋으련가! 나는 저들에 비해 너무 외롭다. 주여! 저를 왜 이렇게 외롭게 하십니까?”
죄에 갇혀 있다는 것, 이것은 그냥은 알 수 없고 옹기종기 살고 있는 그 모습이 그렇게 행복스러워 보이고 좋아 보여서 “나도 한표요!”라고 뛰어 들 때 뛰어든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선 준비해 놓은 성경 말씀으로 대비를 시킵니다. 마주치게 하지요.
그렇다면 대전에 사는 것도 계시에 편입되고 성경책도 계시에 편입이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과 대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습, 그들은 살았다고 보거든요. 주님은 그것을 죽었다고 보시는데 기필코 우깁니다. “왜 우리가 죽었다고 하는지? 멀쩡하게 좋은 일 하고 있는데 왜 죽었어?” 그들이 살았다고 하는 여기에 주님께서 성경 가지고 들이대십니다.
성경으로 들이 대시는데 거기엔 주제가 있지요? 십자가라는 주제, 복음으로 이렇게 들이대시니까 마주치지요? 복음으로, 십자가로 들이대게 되면 “나는 빼주세요!”가 안 돼요. 왜요? 같이 서로 좋다고 맨날 카톡! 카톡!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하면서 살았다는 말이죠. 노아가 방주 지어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아주 재미있게 정신없어요.
돈 없다! 돈 없다! 하면서도 연말이 되고 크리스마스 때면 인천 국제공항은 터져 나가지요? 이렇게 옹기종기 사는 모습이 얼마나 이상향이고 우리가 고대했던 바입니까?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잖아요? 남의 집을 보게 되면 사실은 거기도 다 불행이 있는데 멀리서 보게 되면 다들 행복하고 자기만 불행한 느낌이 들지요. 연말에 연예대상이니 상 받게 되면 그 받은 연예인은 굉장히 행복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옹기종기 잘 살고 있는 거에요. 자체적으로 자기 오류를 뽑아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선 구약 때 순교자를 키우지요. 하나님께서 순교자를 만들어 냅니다. 순교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만들어 냅니다. 본인이 선지자하려고 아무도 안 나옵니다. “선지자 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안 나옵니다. 누가 자진해서 순교자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강제 조치가 내려집니다.
하나님의 신이, 성신이 주어집니다. 이 성신은 어디와 연결 되어 있냐하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선지자입니다. 왜 예수님 오시기를 고대하다가 보고 기뻐했으니까! 그래서 선지자의 기쁨은 옹기종기 잘 살고가 기쁜 게 아니고 누군가 오신다는 것. 메시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메시야 중심을 뭐라고 하냐하면 ‘천국’이라고 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하고 전혀 달라요.
진짜 천국은 성신을 받든지, 성령 받든지 다른 말로 하면 옹기종기 사는 자체가 오류 있음을 말해서 그들로부터 미움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천국 백성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천국 백성을 자진해서 순교의 길을 갈 사람은 아무리 성신 받아도 자진해서 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강제 조치를 하지요. 이것을 원치 않는 길이라고 했어요.
(요 21:18)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입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 뭐라고 했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마 저를 미워하는 사람은 이 대목만 딱 따가지고 고발할거에요. 그런데 베드로를 한번 보세요. 자기는 죽기를 각오 했으나 뭐라고 했습니까?
(누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너는 마귀에게 팔린다. 주님의 기도 덕분에 평생 우리가 살아온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옹기종기 사는데 합세하다 보니까 여기 옹기종기 사는 대전 바닥은 전부다 자기로 의해 즐거워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강제 조치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 했습니까? 그동안 살아왔던 옹기종기를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이것을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 방문하니까 누가 반대를 했냐 하면 애굽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이 극렬하게 반대해요. 잘 살고 있는데~ 그 동안 여기 드린 밑천이 얼만데요.
히브리인이 닭갈비집을 하고 있는데 떠나자고 하면 닭갈비집 보증금은 어떻게 하라고 누가 돌려줍니까? 하나님이 돌려줍니까? 갑자기 보따리 싸고 가기는 어디로 가는데요. 그 동안 여기 드린 밑천이 얼만데요. 인테리어 비용 계산해 보세요. 그리고 이웃과 다정하게 사귀었던 것, 그 관계를 다 끊어 버리고, 이건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애굽을 떠날 때 모세도 본인이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게 아니고 추방당한 거지요. 사실은, 현상금 걸려서 도망친 거에요. 모세도 그런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모세 말을 듣겠습니까? 아무도 안 듣습니다. 얼마나 집착이 강한지 광야에 가서도 항상 뭐만 생각합니까? 애굽 시절, 그 때가 좋았더라! (Green Green Grass of Home)이죠. 고향의 푸른 잔디, 차에서 내리면 아빠, 엄마가 반겨주고 금발의 메리가, 체리 빛 입술을 가진 메리와 참 나무 밑에서 같이 놀던, 깨어보니 꿈인데,
그런 시절을 못 빠져 나온다는 것을 심리학에선 뭐라고 하냐하면 인간은 기억으로 자아가 매일같이 형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두뇌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고 두뇌 전체의 공명 현상에 의해서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게 뭐냐하면 생물학적으로 현재의 정황이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기억하지 않는 그 기억이 지금 자기로 하여금 신체적인 본능을 형성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도 생존의 본능의 일종이에요. 생존에 불리하다 싶으면 헤어지는 거에요. 내가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생각하는 거에요. 그것을 생체 리듬이라고 하는데 생물학에서는 이 생체 속에도 시계가 있어요. 보통 우리의 상식은 낮이 되고 밤이 되면 식물도 해 뜨면 활동하고 밤 되면 잠자고 이런 줄 알고 있는데 가둬 놓고 모든 것을 차단시켰을 때 햇빛도 달빛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본능적으로 세포내에 시계가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잠 잘 때 잠자고 활동 할 때 활동하는 것을 밝혀냈지요.
아하! 외부와 차단되어도 인간은 따로 시계가 움직이는구나! 삼풍백화점 붕괴 되었을 때 생존자가 신기록을 세웠지요? 17일 만에 구조 됐는데 며칠이나 지났어요라고 했을 때 한 이틀 되었나요 하니 왜냐하면 생체 리듬이 갇힌 환경에 적응하도록 재편성 된거에요. 두뇌와 관계없이 신체 자체가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거에요. 사실 정신 바짝 차린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육신이 알아서 하면 정신은 뒤따라서 내가 정신차려서 된거라고 우기는 변명하는 것이 정신이지 실제로는 육체가 알아서 생존에 적합하도록 방어하게 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를 한 것은 결국 진리라 하는 것은 물 건너 갔다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주께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지요.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안되는 것을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지요? 안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이란 간단해요. 내가 안 되는 것을 주께서는 어떻게 되게 하시는가?
주께서 하신 일만 찾으면 돼요. 그걸 어디서 찾습니까? 간단하지요. 숨 쉬는 것, 무얼 먹을 까 반찬 고를 때, 점점 더 범위를 확대하면 뭐만 남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걸로 나와 버려요. 내가 한 발걸음과 머리카락 까지도 전부 다 주께서 하신 일로 되어 버리죠. 퍼센테이지가 저쪽 주님이 하신 일로 점점 더 많아져요. 심지어 무엇까지 포함되냐 하면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의 위협 이것까지도 주의 일이 되어 버려요.
내가 실수해서 죄 지어서 징계 받는다 그런 게 아니고 실수해서 벌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환란과 핍박 어떤 어려움이 올 지라도 그것마저도 주께서 준비 된 절차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나에게 들이 닥쳐야 될 사태로 생각하게 됩니다. 믿게 되요. 우리가 옹기종기 살 때는 뭐가 겁나냐 하면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제일 겁나요. 사실은.
옹기종기 살면서도 늘 벌벌벌벌 떨면서 사는 이유가 이 행복을 주께서 혹시 앗아가지 않을지, 소박하고 정말 이건 욕심도 아니야라고 마지막 챙기는 것 마저 주께서 맴매! 하면서 내놔! 하면 “마지막 남은 것까지 빼앗아 가면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 그런 걱정을 미리 당겨서 하는 겁니다. 오죽했으면 임재범이가 제발 다른 것은 다 되는데 제발 이 여자만큼은 허락 하소서라고 합니다.
허락 해줘봐야 몇 개월 가지도 안을 거면서, 결혼식 할 때 기분 좋다 할 뿐이지 몇 개월 가지도 않아요. 애 울 면 운다고 제대로 짜증 낼 텐데, 1과1이 있을 때는 별로 싸움이 없어요. 그런데 제 3자가 들어오게 되면 둘이 갈라져 버려요. 제3자가 자식입니다. 좋은 자식은 슥되고 미운 자식은 자식이 되는 집은 받고 부양도 안하려 하는 자식은 자슥도 아니고 자식이죠. 부양하는 조건으로 집을 주었는데 안 하는 거에요.
다시한번 정리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계시거든요. 소년들은 제사를 멸시했다. 주의 뜻은 이것입니다. 네가 제사를 알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사에 대해서 오류를 통해서 제사의 본질이 뭔가를 접근해 가시겠다는 겁니다. 그 오류를 우리 대신 불량자 소년들이 대신 일을 저질러 주는 겁니다. 제사가 뭐냐는 거지요. 도대체 제사가 뭐냐?
제사가 뭐이기에 소년들이 하는 짓이 제사와 반대가 되고 제사를 공격하고 제사가 보여줘야 될 하나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짓이 된다는 겁니다. 소년들의 하는 짓이, 그러면 두 가지를 생각 할 수 있지요. 첫 번째는 소년들의 짓이 제사의 본질을 훼손한다. 두 번 째는 더 어려워요. 소년 속에 무엇이 제사를 훼손 하려고 시도되었느냐 또는 소년 안에 어떤 요소가 있기에, 마귀지요! 마귀는 순진한 소년들을 통해서 어떤 자기의 얼굴을 보이는지 밝혀내면 되겠습니다.
이 두 가지를 밝혀내기 위해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오류를 일으키신 거에요. 2015년 마지막 설교는 뭐로 끝났습니까? ‘막 살아라!’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오류에요. 오류를 통해서 날마다 다시한번 주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선지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마지막 때의 선지자라면 선지자라고 규정한 개념이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그 개념과 불일치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육신의 모습.
아까 힌트 드렸지요. 우리는 생존적인 욕구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기억이라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사는데 유리하도록 조작이 되고 날조가 되는 주일 낮에 했던 모든 기도의 응답은 없다고 하면서 모든 기억은 날조된 것이고 조작된 것이라고 했지요? 그것은 뭐냐하면 자기가 기도해놓고 응답이 없으면 남들이 얼마나 우습게보겠습니까? 그러니까 억지로 참는 거에요. 구성을 편집해요.
“내가 기도하니까 이런 응답 받았어요.”하면 남들이 카리스마 있다고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게 뭐냐하면 목사들의 주된 작업이 재구성이지요. 현실의 재구성이죠. 만약에 우리가 베드로라면 이렇게 해야 되요.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는 것조차도 죄라고 고백해야죠. 왜? 띠 띠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 내가 원하는 길에 동업자가 아니에요. 내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이 뭐에요?
내가 원하는 것 자체가 주님이 본래 제시한 것과 불일치된다는 것을 주께서 이미 아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게 되면 우리는 좋다고 넓은 길로 가요. 넓은 길로 가게 되면 나락으로 떨어지잖아요.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어떤 바보같은 30대 남자가 휴대폰을 보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겁니다. 그럴 수 있겠어요. 절벽 구경하러 관광 갔다가 마침 거기서 전화 받다가 떨어져 죽은 거에요.
그걸 보고 제가 느낀 건 뭐냐하면 옹기종기 사는 데 정신 팔려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에요. 모든 사람들이, 이게 전부인가? 2015년이 지나고 2016년의 환상을 위해 발밑이 절벽인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달 보며 비는 거에요. 대전에도 유명한 공원 위에 올라가 빌고 전부 비는 거에요. 가상의 브릿지를 놓는 겁니다. 자신이 만든 유토피아로 가기위한 브릿지. 그렇게 올라가서 비는 것은 무속 신앙이고, 송구영신 예배 때 손 모아 비는 것.
참, 절에 가서 비는 것이나 교회에 가서 비는 것이나 둘 다 뭡니까? 전부 다 우상 숭배지요. 새해에 각오를 새로이 한다? 도대체 새해를 누가 만들어 놨는데 사람이 만들어 놨는데, 각오를 자기가 해요? 365일 누가 만들어 놨습니까? 주님은 하루만 만들어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것으로 끝나요. 일 년 스케줄을 주께서 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른 비, 늦은 비로 스케줄 끝나버려요.
그것은 이스라엘 내에서도 세속적이고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안식일 1.2.3.4.5.6,1.2.3.4.5.6. 안식일의 반복이에요. 그 안의 심지 같은 계시적 시간입니다. 안식의 언약이 계속해서 눅눅하게 녹아 있을 때만 그것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호떡 안에 설탕이 없으면 그건 호떡이 아니지요. 그냥 밀가루 덩어리지요. 호떡 먹는 이유가 뭡니까? 뜨거울 때 접어서 먹으면 주룩하고 설탕물 하고 땅콩가루하고 계피하고 있어야 맛이 나잖아요.
자 첫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의 본질은 오류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면 소년들이 하는 짓이 어떻게 제사의 본질과 대비되는 속성을 가지는가? 소년들이 하는 짓은 의외로 평범해요. 삶은 것 말고 날 것 먹겠다는 거에요. 너무나 단순한 거에요. 소년다운 생각이라! 왜냐하면 아버지가 제사장이니까 삶은 것만 나왔어요. 그래서 싱싱한 것 먹고 싶다는 거에요. 이게 뭐가 그리 나쁜 짓입니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예수님을 재판 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사형시키는데 한 표 던진다고요. 왜 그들이 하는 짓이 내 몸도 결코 그렇게 나쁜 짓이라고 생각이 안 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중심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유리함, 생존의 유리함이 평소에 중앙지역을 이미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죄에 갇혀있다라고 보는 겁니다.
“나는 죄에 안 갇혀 있는데?” 갇혀 있다면 나에게 갇혀 있는데!“ 그게 바로 죄에 갇혀 있는 거에요. 나에게 갇혀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다는 소년적인 성격이 그대로 제사하는 곳에 가서 고기 날 것을 달라 한 겁니다. 소년들이 보기에는 늘 반복되는 일상적인 거잖아요. 제사장이 가서 제사 드리고 하는 일이 늘 하던 일이라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복이 되어 버리면 식상해지고 그 의미가 이제는 고정되어 버렸어요. 이 세상에는 흐름이 있는데 이 흐름에 마디를 주게 되면 질서가 생기고 질서에서 나온 것이 뭐냐하면 형상이 되고 그 형상은 하나의 고정적 대상이 되면서 여기에 이름으로 부르지요. 이름이 있어야 대상이 되니까 관계를 맺습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 있고 흐름에 마디를 주면 질서가 생기지요. 이 마디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이 소년들은 무심코 신선한 고기를, 이제는 삶은 고기가 지겨워져서 생고기를 먹겠다고 먹었는데 그것이 사건이 되었고 그 사건이 자신들에게 평소에 있던, 소년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던 자신들의 본성이 바깥으로 질서화 되어서 튀어 나온 겁니다. 무심코 한 것인데 질서가 튀어 나오고 [흐름 / 마디→질서→ 형상] 여기서 전혀 오류라는 낌새가 나타납니까? 안 나타납니까? 전혀 나타나지 않지요.
왜냐하면 소년들은 날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해석 할 때에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불리하면 악이 되는 거에요. 이것을 지난 수요 설교에 했지요.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불리하면 악이 되는 겁니다. 선악과가 그렇게 변질된 겁니다. 그래서 해석을 할 때 선과 악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내 생존에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근거해서 해석한다는 거에요. 이런 식으로 해석 안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아무도 없어요.
다시 이야기 하면 1+1=사이좋게 지냈다. 드라마에선 이것이 1+1관계에서 출생의 비밀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1+1관계) 여기에 이미 흐름이 질서가 되었어요. 서로 사랑해 주고 예뻐해 줬는데 (1+1관계)에 사이에 “사실은 네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고 내가 친 엄마다!”라고 끼어들어 올 때 (1+1관계)에 사이에 제 3자가 차고 들어오게 되면 뭐가 깨어집니까? 그 행복이, 서로 좋은 관계가 깨어지잖아요? 억지가 되지요?
인간들 끼리 살잖아요. 그럼 인간들 끼리 잘 살면 되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면 되는데 왜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예수님은 왜 (그 사이에) 끼어듭니까? 그것도 별을 따라서 왔는데 동방박사가 하는 이야기가 “혹시 여기에 임금님이 새로 나셨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문재인이 당대표로 있는 새 정치 민주연합당(더불어 민주당)이 있는데 누군가 “혹시 여기 당대표가 안 바꾸었습니까? 안철수로?” 그럼 문재인이 가만있겠어요?
만약에 내가 문재인이 동생이다라고 한다면 “형님 뭐합니까? 안철수 내쫓아야지!”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헤롯 왕이에요. 헤롯 왕이 나쁜 놈이라고 욕 할게 못 된다니까요. 자기가 지금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왕인데 누군가 “혹시 여기 왕이 새로 태어났지요?” 하면 지금 정권 물려 줄 생각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건 당연히 제거해야 되지요? 물론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알지만 그건 먼 훗날 이야기고,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누구도 알아야 돼요? 헤롯 왕도 동의가 돼야 하는데 전혀 동의가 안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동방 박사들 가는 길에서 암살 시키고 두 살 아래 남자 아기들 다 죽이고 그래야 뭐가 된다? 흐름에 마디가 생기면 뭐가 된다? 질서, 이스라엘의 질서를 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헤롯 왕을 욕 할게 못 되지요. 우리는 우리 질서 없습니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10:34) 불화를 주려 온 거지요.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좋은 관계에서 갑자기 누가 치고 들어오는 겁니까? 주님이 치고 들어오면 이 가정이 불화가 날 수 밖에 없어요.
사무엘상 2장에서 3장을 쭉 읽어 보면 엘리 제사장이 말하는 게 굉장히 점잖아요. 사무엘이 세 번씩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엘리에게 왔을 때 엘 리가 사무엘을 구박했습니까? 미워 했습니까? 타박했습니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주신 계시를 수용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수용했어요. “사무엘아 네게 무엇을 말씀 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걱정하지 말고 말해라, 화 안 낼게.
이야기 하니까 뭐라고 합니까? “그대로 되어야지” 사람이 이 정도로 점잖아요. 얼마나 점잖아요. 아버지는 점잖은데 애들은, 자식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점잖은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엘리가 죽고 나서 집안에 며느리가 해산이 가까웠는데 아들을 낳았을 때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결국 뭡니까? 이 집안에 영원한 저주가 내려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몰랐었는데 오류가 눈앞에 막 등장하면서 진리는 오류를 밀어 내면서 뒷 부분에 진리가 같이 연결 되면서 지상으로 나오지요. 그래서 십자가를 가지고 주께서 앞장세우게 되면 그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고 그리스도의 영은 십자가만 이야기해요. 요한복음16장에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그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거에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나온다. 옹기종기 살기 좋을 때는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또는 갑자기 한 달 수입이, 월급이 100만원정도 더 올라갔다. 분명히 기쁜 소식이에요. 하지만 이런 기쁜 소식 때문에 뭐가 가려지나 하면 하나님의 의가 가려져 버려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소중함과 고귀함은 그 순간만큼은 가리워져 버리지요. 잊어지거나 가리워지지요. “나는 월급 100만원 더 못 받아도 하나님의 의가 더 좋아!” 이렇게 돼야 되는 거거든요. 이게 정상이거든요.
하나님의 의는 뭐냐 하면은 일어난 사태와 그 속에서 자기의 죄를 느낄 때, 비로소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의는 새롭게 우리에게 느껴지는 겁니다. 뭔가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매사가 자기 원대로 안 될 때,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뜻대로 안되게 되면 어떻게 대처 하느냐 하면 자기의 욕심을 낮춰요. 욕심을 낮춘다고 됩니까? 낮춰도 안돼요. 무슨 이런 운명이? 포기해도 안돼요.
눈높이 낮춰도 취직이 안 될 정도로, 결혼 하고 싶은 데 내가 너무 콧대를 높였구나! 조금 낮춰야지! 낮춘다고 결혼 됩니까? 그래도 결혼이 안돼요. 주위에서 결혼시킨다고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저도 참 마음이 아파요. 결혼한 사람의 여유? 그런 게 아닙니다. 모르니까 하려고 하는구나! 왜냐하면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본성에 맞아요. 그런데 누구와 같이 산다는 것은 챙겨줘야 되는데 이게 짐이 되요.
왜 인간은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이 맞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아에서 못 벗어나거든요. 나갔다가도 후딱 자기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같이 산다는 이유 때문에 억지로라도 사랑을 해줘야 되니까, 급히 사랑해주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오려고 하니까 상당히 자기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해요. “여보 사랑해!”라는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 예의상 해 줘야 한다는 것.
사실은 자식을 낳고 통계를 내 보세요. 예쁜 짓하는 것이 많아지는지 미운 짓 하는 일이 많은지를 기껏해야 세 살까지로 이쁜 짓이 끝이나요. 그 다음 네 살부터는 미운 짓하기 시작해서 일곱 살 되면 지리산으로 보내야 되는 가? (청학동) 훈장님에게 보내서 인간 만들어야 되는 지, 나이 12살 정도 되면 감당이 안돼요. (사춘기)15살 정도 되면 벌써 옷에서 담배 냄새나기도 하고 “저것, 누굴 닮았나?”하고 자책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우리 자신들의 평범하고 소박하고 아무 욕심 없는 그것이 복음을 가립니다. 낮추고 낮추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이 복음을 가리는 거에요. 그냥 오류대로 성질대로 살면되요. 알아서 우리를 동반시켜서 우리를 오류라고 드러내면서 같이 동반해서 나타나십니다. 주께만 영광이 되지요. 이가봇이라는 비느하스의 아내는, 엘리는 죽고 그 집안에 남은 것이라곤 며느리의 자식 밖에 없잖아요?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집안은 어차피 영광을 가려야 될 저주 받아야 될 집안이라고 인정을 해 줘야 되요. 여기서 비느하스가 지옥 간다, 엘 리가 지옥 간다고 그렇게 단정 짓지 마세요. 왜냐하면 구약 자체가 하나의 연극 무대이니까. (각자의) 역할, 나쁜 역할을 해야되요. 나쁜 역할이 있을 때 우리는 선뜻 나쁜 역할보다는 좋은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데 사무엘처럼 되고 싶어 하는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런 것이지,
우리는 나쁜 역할에 더 일치 됩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거에요.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 올 때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주께서 맴매해서 온 거에요. 주께서 좋게 하면 교회에 안 옵니다. 따라서 교회에 안 나왔다 하면 그것조차도 주의 뜻이에요. 다음 주에 또 본다는 보장 없습니다. 내가 내일도 산다는 보장 없듯이, 주님께서는 내가 생각한 드라마를 늘 일찍 종결시켜 버립니다. 일찌감치 막 내려 버립니다. 내일의 나를 주께서 드라마를 짜 주셔야 되지, 오늘의 나는 오늘로 끝나는 거에요.
이 소년들의 죄는 다시 말하지만 평범합니다. 그러나 소년들 속에 욕구는 평범하지 않아요. 이것은 바로 제사를 노리는 거에요. 제사를 노리는 마귀의 술책이죠. 그래서 우리는 정리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항상 평범한 인간의 얼굴로 지상에서 구체화되는 거에요. 다들 동의 되고, 다들 공감하는 뭐 애들이 그럴 수 있지, 철없어서 애들이 그럴 수 있지라고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마귀는 주님의 그 시대에 필요한 구원에 위한 복음을 훼손합니다.
그러면 제사는 뭐냐?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편하게 내가 생존하려는 욕구와 반대되는 요소가 제사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사가 뭡니까? 어린 양의 죽음이지요. 어린 양의 죽음에 대해서 소년들이 뭘 알겠어요? “나는 저 죽음이 싫어!”라고 대모 하지 않았어요. 그냥 고기 먹고 싶다. “삶은 고기 말고 생고기 먹고 싶어” 그 뿐이에요. 그런데 제사를 멸시 했다는 거에요.
소년들이 속해 있는 모든 흐름과 구성, 질서 자체가 호시 탐탐 제사의 가치를 모독하고 무산시키는 세력에 의해서 갇혀 있는 시대가 바로 사무엘의 시대이고 오늘 날 우리의 시대에요. 그러면 사무엘은 성신이 임하기 때문에 이 소년들과 다르겠지요? 사무엘은 어떤 일로 달라지는 거에요. 그 이야기가 뒤에 나옵니다. 오류 없이는 진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삼상 2장21절)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 하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지요? 계속해서 초점이 엘리의 소년들과 사무엘인데 결국 사람은 오류지만 그 오류를 아시면서 인간은 오류인 것을 아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지속적으로 투입이 되었습니다. 투입된 노선을 따라 이 땅에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무엘이죠.
그렇다면 사무엘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에 보편적 이상이나 보편적 상식과는 다른 태도로써 다른 노선으로써 인생을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날 성도의 가는 길이에요. 모든 사람들은 넓은 길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우리도 좋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딱 멱살 쥐고 “안돼!”하고 빼내어서 다른 길로 가게 하지요. 그러면 “제가 좁은 길로 가겠습니다”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나서는 좁은 길은 넓은 길의 일종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익히 알고 내가 아는 길은 넓은 길입니다. 자기 딴에 고난 받고 굶고 금식해도 넓은 길이에요. 좁은 길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길이에요. “내가 여기에 알아서 온 것이 아니였군요!”라고 고백되어 질 때 주께 좁은 길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해서 내 인생은 주님의 인생이지 내 인생은 아예 없는 겁니다. 사무엘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마음을 낮추거나 높일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닌데 내가 마음대로 살아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그냥 막 사세요. 어차피 내 인생이 아닌데요. 그렇게 되면 막 살면 사무엘도 막 살고 있는 중이에요.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막 살고 있는 거에요. 아마 사무엘이 막 안 살고 정신 차려서 살았다면 나중에 사무엘의 아들들이 8장에 보면
(삼상8:1-3)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라고 되어 있잖아요. 자식 교육 잘 시켰습니다. 5월8일 어버이 날 이 본문 가지고 설교 하지요. “여러분! 사무엘도 다 소용 없네요.” 이렇게 제목을 해서,
성경에 보면 목사의 자격 가운데 뭐가 있냐 하면 자기 집안을 잘 다스리는 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것을 가지고 강의를 했어요. 목사의 자격이 몇 가지가 되요. 주시는 이유가 아무도 목사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그럼 목사는 어떤 사람이 되야 하나? 내가 목사 값을 못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 만 주의 영이 임하는 것이죠. 주께서 하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 저는 목사 할 자격이 안됩니다라고 늘 고백합니다.
그러면 정리하고 1강 마치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평범한 일을 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계시가 규정을 했어요. 불량자이다. 제사를 멸시했다. 그런데 소년들을 보면 멸시 한적 없어요. 방해 한 게 아니잖아요. “그만 둬라! 나는 제사가 싫어! 난 어린 양의 제사가 싫어! 난 다른 신을 믿겠어!”라고 안 했지요? 유별나지 않았지요? “아이고! 우리 아버지 참 고맙다. 아버지가 제사장이라 매일 고기 먹는다.”라며 오히려 제사 하는 것을 좋아 했을 거에요.
왜? 제일 좋은 고기를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마귀라는 것이 노골적으로 뭘 엎어 버리고 예배당 유리창 깨고 이것이 마귀가 하는 짓이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옹기종기 재미나게살면 그게 마귀인 거에요. 복음도 관심 없고 언약도 관심 없고 그냥 제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가정에서 웃음소리 나고 시편 73편에서처럼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늘 건강하고 늘 운동만 했는지, 아무 걱정도 없고 만사에 형통하고 그것이 마귀 짓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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