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강-YouTube강의(운명)160121-이 근호 목사
143강-YouTube강의(운명)160121-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69.34)
143강-YouTube강의(운명)160121-이 근호 목사
제 143강, 제목은 ‘운명’입니다. 보통 운명이라 하는 것은 신이 정했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거는 모든 종교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럼 신이 정했으면 어떻게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난감해해요. 신이, 하나님이 정한 것은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했는지..뭐 누가 알겠어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죠.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 운명을 정해놓았을 때, 하나님의 보따리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우리가 모른다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이 운명을 정했다는 말은 하나마나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지 맘대로, 지 멋대로, 그냥 살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놓고 신의 운명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제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을, 뜻을 아는 사람이 맞나? 하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특히 성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운명을 창세전부터 이미 정해놓았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정해놓은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정해진 것이 그 사람의 실생활 속에서 어떤 식으로 표출되고 표현되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알려주십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창세기 27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운명을 언급을 하면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운명이 다 같은 운명이 아니고 두 패로 나누어지는 운명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인구가 60억이 된다면 그 60억 개의 운명이 아니고 두 개의 운명으로 패가 갈립니다. 한쪽은 저주받아야 될 운명이고 한쪽은 복 받아야 될 운명입니다.
그냥 저주받는 운명이 아니고 저주받아야 될 운명이고, 복 받는 운명이 아니고 복 받아야 될 운명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구든지 “나는 저주받을 편에 서지 않고 복 받을 편에 서고 싶어요.” 할 것입니다. 괜한 욕심들이 발동들을 하죠. 그런데 복과 저주를 우리 쪽에서 선택을 한다면 이거는 운명이라는 말이, 이거는 쓸데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어떤 정도냐 하면 “니가 복 받고자 노력해도 허허! 너는 저주받아야 돼!” 이게 바로 운명이 운명답게 되는 것이고. “나는 나쁜 짓해서 저주받을 거야.” 해도 “아니야. 너는 복 받아야 해!” 라고 해야 운명이 운명다운 겁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과 에서, 두 아들에게 하나의 이벤트를 벌리죠.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가져오는 선착순입니다. 먼저 가져온 아들에게 내가 축복을 하고, 그것도 독점적으로 다 먹습니다. 몽땅 다 가게 만드는 그런 이벤트를 벌렸습니다. 원래 그 이벤트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된 거죠. 나누어주지를 않습니다. 복을 반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이 다 가져가는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에 두 아들은 이것을 알아요. 이게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단순히 요 시합이 시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게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우리 운명이 이 시합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뉘앙스를 들어보면 이거는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큰 아들 되는 에서에게 모든 복을 밀어주는, 출제문제가 이쪽에 유리하도록, 백퍼센트 큰 아들 쪽으로 가도록 그러한 문제를 준 거죠.
그러니까 큰 아들은 이거는 시험이 형식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나의 모든 복은 니가 가져야 돼.’ 이미 확정된 그것을 그냥 형식으로 별미 갖다 바치라고 하는 것으로, 다 이미 일이 결정된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이런 운명이 자기가 바뀌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안 했죠.
누가 무리수를 두느냐 하면 동생이, 이미 아버지의 마음은 형에게 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동생이 무리수를 둡니다. 이 축복을 자기가 가로채겠다는 희한한 발상을 합니다. 이미 조건은 별미를 갖다 바쳐라. 근데 이 별미 갖다 바친다고 복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버지의 마음은 굳어졌어요. 형한테. 그래서 아버지는 별미를 주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니가 형 맞나? 아니면 동생이냐? 그걸 확인해서 복을 거기다 쏟아 부으려고 한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지금 눈이 어두워서 목소리만 듣고, 청각으로만 그걸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동생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눈이 어두운 그 약점을 이용해서 형처럼 꾸며야 되죠. 운명 자체를 가로채는 겁니다. 운명을 가로챈다는 말이 참 이상한 말이죠. 이미 결정 난 것을 어떻게 그걸 가로챌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바로 세상 종교가 말하는 운명론과 하나님이 말하는 예정과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겁니다.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인간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신이 이미 정해주기를 인간들은 이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 기대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마귀 적입니다. 왜 마귀 적이냐, 무조건 나한테 좋은 패가 와야 되고 무조건 내가 잘돼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그러한 운명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정론이라 할 때, 대부분의 예정론이 다 엉터리고 잘못된 이유고, 그 예정론하면서 “나는 반드시 구원되기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예정론을 언급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거는 하나님의 예정론하고, 복음적인 예정론 하고는 전혀 맞지를 않고 상관없는 예정론입니다.
진짜 야곱의 구원받는 운명은 자기 속에 있는 그 더러운 욕망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정해진 운명은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뭐냐, 성도의 팔자와 운명이 거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 우리는 뭐냐, 죄인의 모습으로 거기에 가담되는 겁니다. 근데 우리는 나는 마땅히 구원되어야 하고, 나는 마땅히 잘난 사람이고, 나는 마땅히 의인이고, 나는 마땅히 남보다 착해서 하나님께서 천국 보낼 것이라는 그것을 죄라고 여기면 되는데, 누구나 그런 게 있어요.
있는 걸 인정하면, 이게 바로 지옥 갈 죄라고 인정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그 위에다가 십자가 플러스 나를 매치하게 되면(십자가+나) 구원받는다는 이런 자기의 에서 같은 종교적인 속성으로 구원을 언급하니까 이게 바로 지옥 갈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교회가면서도 지옥가고, 복음이야기하면서 지옥가고, 십자가 이야기하면서 지옥 가는 이유가 그 전제부터가 야곱적인 전제가 아니고 에서적인 전제, ‘신은 나를 사랑할거야.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전제가 자기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 분명히 예수님보고 이야기를 했건만, 나보고 이야기한 것으로 처음부터 성경 볼 때 그런 식으로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봅니다. 그러니 내가 터 잡은 운명에다가 주께서 숟가락 하나만 얹어서 구원만 하게 되면 그 운명은 천국 가는 운명이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데, 그거는 인간의 타고난 종교성이고 마귀가 심어준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정,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왜 에서를 야곱 앞에 깔아놓을까요? 바로 현재 우리 마음속에 에서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연결 짓고 하나님과 접촉하려는 그러한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을 배치해놓은 것입니다. 더구나 축복을 준다는 그 이삭이 전적으로 야곱편이 아니고, 야곱은 아예 축복 꿈도 못 꿔요.
전부다 큰 아들에게 밀어줬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안다면, 하나님의 진짜 예정은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우리를 죄인 만들고 너 같은 인간은 천국을 엄두도 못 내고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그 사실을 우리 속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영원히 유지하는 그것이 생명의 핵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죄인인 것이 밝혀지기 때문에. 우리 안에 십자가 안에서 죄인인 것을 영원히 유지하는 한 우리는 영생 받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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