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힘 160122
원초적 힘 160122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서경수(IP:220.♡.152.182)
16-02-18 03:09
광주 강의(2016. 1. 22) 23-1
마가복음 7장 5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장로들의 유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대충 말해보면, 하나님의 계시는 아니지만 유사 계시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옆에 네 생물이 있고, 그 옆에 24장로들이 있지요. 장로는 유대 나라에서 대표자들입니다. 이 대표자들을 그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은 아니고, 출애굽 이후 나라가 만들어지면서 행정적 지도자 외에 정신적 지도자들이 필요했지요. 이들을 원로들이라 할 수 있는데, 신앙적 측면에서 깊이가 있다고 소문난 사람들이 장로가 된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행정적 뼈대 보다 정신적 지도자를 각 지역 중심으로 세웠는데 이들이 장로입니다. ‘당신의 신앙을 본받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장로들이 교만을 뜬다든지 ‘내가 메시야다.’ 이런 뜻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알고 그 말씀에 대해 남보다 더 깊이 체험한 사람이 지역마다 생기기 마련입니다. 왜냐? 상대적이니까요.
하나님께서 “네가 최고다.”라고 지시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어떤 사람은 농사만 열심히 짓고, 또 어떤 사람은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면서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면 자연적으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존대를 하겠지요. 이런 사람이 지역의 유지가 되는데, 돈이 많아서가 아니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데, 이스라엘이 아무리 왕이 있고 군대장관이 있어도 이 사람들의 권위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겁니다.
당시 장로는 토착 유지, 정신적 지주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있다는 말은 전쟁이나 다른 재난으로 인해 행정적 외형이 와해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은 죽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쥐고 있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한 것이 계속 누적이 됩니다.
장로들의 해석이 누적되면서 그것이 ‘탈무드’가 되고, ‘미드라쉬’가 되고 다양한 책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 장로들이 어떤 생각으로 하나님을 봤는지 이 정도는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됩니다. 유대교의 정신적 체제는, 전 우주가 ‘하나님의 토라의 바다’라고 합니다. ‘토라’는 율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는 많이 미흡합니다. 토라를 구전 토라와 문서 토라로 나눕니다.
문서 토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사실 하나님의 계시가 성문화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는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토라’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토라’는 모르고 ‘토라’에 대해서 해석하고 이해한 것만 범람하고 있었어요. ‘토라’가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 ‘토라’의 권위는 그 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축소될 것은 축소되고, 유지될 것은 유지 되고 해서 이것이 전통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생각은 한 것 같아요. ‘이 우주는 토라로 되어 있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우주는 하나님 말씀의 바다다.’ 이런 정도가 되겠지요. 우주가 하나님 말씀으로 되어 있다면 그것이 그들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면,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이 땅에 유대인이 있고 그들에게 토라가 있습니다.
이 토라를 통해서 인간의 신성화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신성화를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가 일치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이 사고는 오늘날 한국 교회와 똑같아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는 땅에 있는 믿는 사람의 의지로 표현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어요. 그들 입장에서 예수님 이야기는 대단히 억울합니다. 왜냐? 그들은 나쁜 짓을 할 경우에나 들을 소리를 나쁜 짓도 안 했는데 하시니 억울하지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토라에 위배되는 것. 모세가 토라를 받았지요. 토라는 율법이니까.
율법에 위배될 때 마귀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자신들보다 더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이 없어요. 그런 자신들을 향해 ‘마귀’라고 하시니 대책이 없어요. ‘마귀’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마귀’라고 하시니 어찌합니까?
사람에게 욕을 해도 피할 길을 주고 욕을 해야 개선의 여지나 소통의 여지가 있는데, 죽도록 충성했는데 마귀라고 하면 충성하지 않아도 마귀, 충성해도 마귀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네가 마귀니까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고 회개해도 마귀라는 겁니다. 이러니 이들이 주님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의식이 중세 철학에도 나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통해서 반영된다.’고 했고, 둔스 스코투스는 ‘하나님은 숨어 있어서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와 하나님이 의지로 연결된다.’는 주장을 했어요. 이 뒤에 윌리암 오컴이 나옵니다. ‘우리가 의지가 된다면 결국 우리의 단독 주체를 인정해도 좋다.’ 그래서 나중에 데카르트에 가면 주체사상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주체성이 등장하면서 그노티우스 이후에 근대 사회론, ‘개인이 모여서 사회가 된다.’ 하나님이 만든 사회에 개인이 구성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개인들에 의해서 사회가 되기 때문에 개개인이 어떤 의견을 내놓는가에 따라서 그 사회는 새롭게 형성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회가 변화되는 것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면 변동되라고 사전에 하나님이 이미 승인한 것을 뒤늦게 우리는 각자의 의견을 제시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1688년에 명예혁명이 일어났지요. 그 전에 크롬웰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제 주체는 내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왜? 나와 하나님이 직접 의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체계화한 신학이 ‘칼빈주의’입니다. 1536년에 칼빈주의 신학이 주창되었는데, 그 전 1517년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지요. 이 때 루터가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그 믿음은 교회가 인정해주는 믿음이 아니고 사적 믿음이에요. 나 홀로 믿고, 나 홀로 구원 받는 것.
이처럼 나 홀로가 되면 교회가 안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나 홀로 하되 나 홀로 구원 얻은 사람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입니다. 지금은 ‘나 홀로’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데 그 때는 이게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신분사회였어요. 마치 조선시대 때 “너 양반이야?” “나는 쌍놈이다. 왜!” 이렇게 대들다가는 죽습니다.
오늘날 사회와는 다른 시절이었습니다. 신분이 나눠져 있었고, 신분이란 그 시대의 보편적 사상에 의해서 계급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여기에 복종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아요. 왜냐?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람을 억압해야 돼요. 이것이 바로 계급이론입니다.
계급이론은 본인의 계급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저쪽과 다른 계급이란 측면에서 계급이 거론되는 겁니다. 권력이란 남을 밀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이쪽이 권력을 갖는 겁니다. 요즘 갑질을 한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을이 없으면 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게 헤겔의 철학입니다. 주인은 노예가 없으면 자신이 주인인 것을 확인할 수 없어요. 그래서 타인이 없으면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손거울을 보면서 대화를 나눠요. 자기가 자기를 보고 이야기합니다. 그 손거울을 빼앗으면 우리는 십자가 지신 주님과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런데 주님이 보기 싫으니까 주님의 자리에 자신을 집어넣고 자신(손거울)을 보고 이야기를 해요. 이것은 환상 속에 빠져있는 거예요.
이러한 둔스 스코투스의 이론, 즉 ‘신의 의지는 나로 통해서 반영이 되고 드러난다. 그리고 서로 협조가 된다.’ 여기에서 더 나가면 ‘나는 귀한 존재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 말은 ‘나의 의지, 나의 행동, 나의 인식’이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근거해서 그런가? 그것이 바로 토라입니다.
정리해봅시다. 토라의 모든 해석은 현재 토라를 인정하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자기 정당성을 위하여 해석이 나와야 하고, 자기 집단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힘으로 퇴출하는 권력을 유대민족은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왕이 누구였습니까? 헤롯이죠.
그런데 순진하기 짝이 없는 동방박사가 움직이던 별이 멈춘 후에 헤롯 왕에게 찾아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지요. 이 사람은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물음이 왜 나왔는가 하면, 역사 속에 묵시를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유다는 헤롯 왕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가 멀리서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했지요.
이 질문을 현재 왕으로 있는 헤롯에게 물었어요. 왕이 모르는 이야기를 동방박사가 했다는 것은 왕의 통치에 누수가 발생한 거예요. 왕이란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권력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을 때 왕이 되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 ‘죄가 왕노릇 한다.’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다 죽는다는 겁니다.
석가도 죽고 소크라테스도 죽고 공자도 죽었어요. 죽었다는 말은 평소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니까 세상 권력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살아났어요. 그러면 왕의 통치에 누수가 발생한 겁니다.
왕의 통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면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자신들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의지다. 그리고 토라를 연구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들은 길을 이야기했어요. 그 길이 뭔가? 인간에서 출발해서 신에게로 가는 길인데, 이 길 하나에 모든 사람들이 다 뭉쳤습니다. 심지어 12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어요. 길이 아닌데, 길이 없는데 오셔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요. 예수님이 평소에 자신을 길이라고 하셨어요. 사람들이 난처하게 되었어요. 내가 알고 있는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난데없이 침범한 길이 진짜 영생으로 통하는 길인가?
사실 이것이 ‘복음이냐, 교회냐?’의 싸움이에요. 교회 와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 길인가, 아니면 교회에 충성, 봉사하는 것이 아무짝도 쓸모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그것이 길인가? 주님은 치고 빠졌어요. ‘나는 길이요.’ 베드로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지요. “목숨 버리고 가겠습니다.”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올 수 없다.”
다시 정리하면, 주님이 가신 길은 인간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갈 수 없는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천국 가는 길이 있기는 한데 우리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갈 수 없는 자들, 이방인들만 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갈 수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천국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요. 죽은 자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이게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모호한 기운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은 주인공을 또렷하게 알려줍니다. 성령이 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나에게 연락을 취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마트 폰을 샀는데 메시지가 떠요. 보니까 “너는 이미 구원 받았다.”는 문자입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이 보내신 거예요. 십자가만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성령 세례도 역사적 사건이에요. 골고다 언덕이라는 한 장소에 국한된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온 천지로 퍼졌어요.
주님은 어디 계신가? 성령이 임하는 사건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죽는 곳이 애굽이라 하고, 십자가 못 박힌 곳이라 하고, 그곳이 소돔이라고 하고--, 그런 사건을 주므로 말미암아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행위는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유전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길이 뭔가? 이야기해도 소용없어요. 왜? 말해도 그 길은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메시지가 날아오기를 기다려야 돼요. 안 오면? 안 오면 어쩔 수 없어요. ‘안 오면?’이란 말 자체가 잘못 된 것입니다. “안 와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죄인도 의인도 아닌 중립적 입장에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여긴다면 큰 착각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죄가 왕노릇하는 가운데 죄의 종으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장로들의 유전을 소중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주님이 하시는 일에 꼭 필요한 환경이 되고, 배경이 되는 겁니다.
어느 이단도 불필요한 이단이 없이 다 필요합니다. 이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 사람들이 추구하는 길이 내가 옛날에 추구한 길이었지.’라고 하면서 혼자 미소를 띠게 만들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바로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라고 했지요.
여기 ‘외식하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외식’은 이사야가 한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구약 해석에 대해 제가 잠시 운을 뗀 겁니다. 구약 해석을 어떻게 하는가? 구약 성경은 충분히 해석되어 왔고, 해석이 누적된 것이 ‘탈무드, 미드라쉬’ 등입니다. ‘미드라쉬’는 어떤 성경 구절이 있으면 그 구절을 다른 구절과 연계해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옛날 유대인 선배들이 대단한 사람들이죠. 현재 한국교회에서 하는 것을 그들은 이미 다 해보고 망했어요.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짓을 하면서 망하고 있고. ‘언어가 있다. 언어는 하나님 뜻이 담겨 있다. 풀자. 그러면 구원 받는다.’ 이 논리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다 가지고 있어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어요. ‘죄 아래 있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말문을 닫아야 해요. ‘미드라쉬가 되었건 탈무드가 되었건 인간이 끄집어내는 것은 전부 마귀가 시키는 죄다.’ 이렇게 되어야 될 텐데, 자신이 마치 중립 지역에 있어서 잘만 하면 구원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광야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의 말투를 보세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4:3)” 이렇게 나오지요. 이 말의 뉘앙스는 뻔한 거예요. 내부적으로 예수님 마음을 흔드는 거예요. 이런 말입니다. 마귀가 “예수야, 내가 너를 아는데 ‘내가 진짜 메시야일까, 아니면 스스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인가’ 갈등하는 것 잘 안다.”
그러니 마귀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치고, 예수님 스스로 기도하면서 두 가지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정말 메시야일까, 아니면 메시야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아버지여, 제가 정말 메시야라면 이 돌이 떡으로 바뀐다면 내가 메시야인 것을 확정하겠습니다.’라는 마음이 있겠지요. 그 마음이 바로 마귀의 마음과 같은 마음입니다.
마치 기드온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난 후에, 양털로 시험을 하잖아요. 인간들은 다 이런 마음이 있어요. 따라서 마귀의 기능은 뭔가 하면, 마귀를 존재라 여기는 것은 의미 없어요.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니기에 존재는 의미가 없고, 마귀의 기능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제가 하나님을 인정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적 발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은 마귀적 발상뿐입니다. 귤을 먹을 때 하나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두 개, 세 개 있으면 ‘어느 귤이 더 맛이 있을까?’ 갈등합니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고, 나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자율적 이성’인데, 이것이 유대인들의 ‘외식’을 낳은 겁니다.
6-7절을 계속 봅시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을 신약에 적용할 때, 구약 인용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배재하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끼어들면 안 돼요. “예수님, 그 해석 잘못된 것 아닙니까? 독단적 해석이고 알레고리 같은데요?” 이런 식으로 반발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님은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이 말은 ‘구약 성경을 네가 기록했나, 내가 기록했나?’ 질문하는 거예요. 주님이 성경을 기록했으면 주님이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왜 끼어듭니까? 기록은 주님이 하고 해석은 인간이 하고.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말씀 주신 분, 출제자가 해답을 알고 있지, 출제자도 아닌 인간이 해답을 이야기하면서 천국 넣어달라고 문을 두드리면 그 문이 열리겠어요?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는데 안 열립니다. 그럼 이 말씀은 뭔가?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어야 구원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를 해서, ‘나는 말로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존경해야지’ 이렇게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엉터리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아무리 입술로 존경한다고 해도 마음은 그것과 먼 것이 너의 현 주소고 그것이 진짜 너의 마음이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말씀이 말씀대로 이뤄집니다. 말씀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네가 말씀에 잠겨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말씀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것을 겨울수련회 식으로 표현하면 ‘동결’된 거예요. 냉동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동결하신 이 규정에서 출발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우리는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장로들의 유전 같은 것을 내가 만들어 내지요. 관습, 전통인데 전통도 자주 반복하면 진리가 됩니다.
진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버릇에서 왔어요. 버릇이 굳어지면 자기의 성격이 됩니다. ‘인간의 속성은 처음에는 버릇처럼 나오다가 나중에는 굳어진다.’ 이것이 정확합니다. 접혀있는 우리의 심성이 나올 때는 버릇처럼 나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웃으면서 태어납니까? 울면서 태어납니다. 악을 쓰면서 태어납니다.
태어나서 1개월이 지나면 악을 쓰는 것도 요령을 부려요. 가만히 누워 있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낮은 소리로 울음소리를 반복해요. 그래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으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러면 엄마가 앉아주지요. 인간이 악을 쓰면서 태어난다는 것은 혼돈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립할 수 없는 혼돈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정돈하는가? 악에서 나온 부모가 한 성격들 하는데, 마음에 들면 젖을 주고 마음에 안 들면 젖을 안 줍니다. 거기에 따라서 악이 정돈이 됩니다. 시간 맞춰 젖을 주면 이것이 습관이 되고 버릇이 되어 정돈이 되고 주체의 속성으로 정립이 됩니다. 나중에 커면, ‘엄마가 인상을 쓸 때는 젖을 달라고 하면 안 되는구나. 기분 좋을 때 젖을 달라고 해야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정돈이 돼요.
그럼 혼돈은 어디에 갔는가? 저 밑바닥에 혼돈이 있지요. 혼돈은 ‘무정형’인데, 형태가 만들이 지지 않은 상태지요.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혼돈상태에 있었지요. 아이가 왜 우는가? 이것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에서는 혼돈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럼 그 전에는 어떻게 봤는가? 인간에게는 선이 있어서 알아서 나쁜 짓을 안 한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요즘은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부정 속에서 선한 척을 한다고 합니다. 선한 척하는 것을 as if 라고 했지요? 그런데 선한 척이 발달되면 as if not 으로 바뀝니다. ~아닌 척하지요. 수준이 낮을 때는 ~인 척을 하는데, 그 다음에는 ~아닌 척을 하는데, 이 때 이 사람은 정신병자가 아니고 정상인이 되는 겁니다.
거짓말 할 수 있다는 것은 드디어 정상인 레벨에 들어온 거예요. 그러나 거짓말 할 줄 모르면 정신병자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생활이 안 됩니다. 혼돈이 혼돈 값을 해야지 점잖은 척해서는 사회생활 못합니다. 오 목사님과 구 사모님을 처음 봤을 때 ‘이분들은 산에 있어야 할 분이지 하산해서는 안 될 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하산을 했단 말이지요. 그것이 실수였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감사해요. 왜냐? 산 위에서 보는 것과 산 밑에서 보는 것은 계시가 달라요. 언젠가는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항상 혼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스스로 덮는다고 얘를 쓰고 있어요. 예전에는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먹고 산다’고 주장했어요.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잘 성장한다는 것이지요. 요즘은 이것이 잘못된 이론이라는 겁니다. 엄마의 ~하는 척을 잘 배우면 정상인이 되고, 엄마의 ~하는 척을 못 배우면 사회 적응을 못하고 이용만 당하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야무진 사기꾼이 되면 될수록 아이는 빨리 정상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엄마의 위선을 빨리 배워 엄마를 앞지르면 훌륭한 자식이 됩니다. 만약 앞지르지 못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를 의지하게 됩니다. 자립을 못하고.
이것이 주님이 주신 우리의 자리입니다. ‘너는 입술로 하나님을 부르지만 마음을 멀다.’ 이 말은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먼 것을 인정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의 혼돈스런 짓을 그냥 해. 그래야 내가 다가갈 때 그 다가감의 취지가 부각되는 거야.’ 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이런 식으로 하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나를 본받으라.’는 식으로 설교를 하면 이것은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신자인 것을 확인하겠다.’는 몸부림입니다. 이렇게 되면 점점 위선의 도가 심해지는 거예요.
사람은 쾌락으로 사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쾌락 이상이 있어요. 뭐냐? 향락, 극단적 쾌락이죠. 향락의 특징은 자기 학대, 자기 비움, 자기희생입니다. 주님 앞에 이런 짓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네가 그런 짓 할 입장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죄인은 욥처럼 말문을 닫아야 합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입을 닫아야지 ‘주여, 저의 신앙을 남에게 알리지 마소서.’ 이것 광고하는 겁니다.
주께서 이미 평정을 했습니다. ‘너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마음은 멀리 있다.’ 이렇게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 안에서 동결된 상태에서 성령께서 그 동결된 것을 풀 때 ‘저는 아무 한 것도 없이 구원 되었습니다.’ 고백하는 것, 이것이 죽음의 족쇄에서 풀려난 것인데, 이것은 주님이 스스로 말씀을 성취하시는 과정에서 발생된 은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능입니다. 도둑이 와서 주인을 묶어 놓고 그 집 세간을 가지고 갈 때, 세간이 그 집을 탈출하는데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저는 춘향전이 생각나는데, 이 도령이 춘향을 시험하지요? ‘지금까지는 네가 변 사또의 수청을 들었는데 이제는 나의 수청을 들겠느냐?’고 하니까, 춘향이 하는 말이 ‘저놈이나 네놈이나 다 같은 놈이구나.’ 이 말을 듣고 이 도령은 ‘춘향은 한결같은 여인이구나.’ 생각하면서 이 도령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요.
제가 수요일 설교에서 ‘아담은 여자가 되어간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못했어요. 모든 여자는 남자의 일부가 되어서 결국 남자가 됩니다. 그래서 여자는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대표인 아담을 예수님의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아담을 여자로 만듭니다. 남자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가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여자를 가졌다고 하는 순간 그 여자는 남자의 일부로 변해서 남자가 되어버립니다.
마치 어느 동화의 이야기처럼, 금이 갖고 싶었는데 빵을 먹으려고 잡았는데 그 빵마저 금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먹을 것을 보고도 못 먹어요. 이처럼 세상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으로 여기고 손을 댔는데 내 것이 되는 순간 내 것이 되었기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 것이 되면 ‘있음’이 됩니다. ‘있음’이 되면 ‘없음’이 있어야 ‘있음’이 정립되는데 전체를 가지면 전체를 가진 그것이 아무 운동이 일어나지 않아요.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 아무 희망도 없어요.
여자는 전부가 아닌 그 무엇입니다. 남자는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여자라고 하는 순간 뭔가 놓친 게 있어요. 제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남자는 전부이고 여자는 플러스 알파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남자가 전부를 가질 때만 느끼는 그 무엇, 그것이 여자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정복했다. 그러면 남자가 행복할까요?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겁탈하지요. 그리고는 그를 미워해서 쫓아내지요. 왜 그렇습니까? 성경의 이 말씀은 모든 남자가 다 이렇다는 겁니다. 여자도 그렇습니다. 왜? 이미 남자를 사모한 이상은 여자가 남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은 암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호 침투하는 거예요. 네 성격, 내 성격 따로 없어요. 서로 교류가 되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돼요. 갑질하는 남자도 있고 씩씩한 여자도 있고, 당신 없으면 못산다고 하는 여자 같은 남자도 있고.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정해졌지요. 그러면 성도는 이것을 지킬 생각하지 말고, 지켜서 구원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미 구원을 받고 난 뒤에 우리가 어떤 상태이기에 주님이 구태여 죽으셨는가를 십자가 중심으로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목으로 해석하는 것이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6. 2. 18. 02:30 녹취 마침)
서경수(IP:175.♡.38.142)
16-03-01 09:52
광주 강의(2016. 1. 22) 23-2
7절까지 설명한 것 이해하시겠지요? 말씀 지키는 것은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주께서 시작한 일을 주께서 마무리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우리는 죄의 통치 아래 있어서 하는 짓 모두가 나쁜 짓이고 옳은 일은 전혀 없는 것이 마귀를 통한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마귀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왕노릇 하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가 터져 나오도록 하셔서 예수님 홀로 주가 되도록 그런 전략을 사용하십니다. 구원 받고 보니 모든 것이 감사한 일 뿐이지요.
8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고 했는데, 이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왜냐? 그들은 ‘장로의 유전’을 따랐는데, 장로는 하나님 말씀 잘 지키는 소문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행위는 본인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계명을 만들고 그것을 지켰는데 이것이 천국 갈 수 없는 가짜 길이었던 것입니다.
길도 아닌데 길이라고 우깁니다. 그 길 때문에 진짜 길이 핍박을 받게 되지요. 물론 주께서 그렇게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따르게 해서 그들에게 문제를 내는 겁니다. ‘하나님 계명과 사람의 유전의 차이점은?’ 이 문제를 풀 수가 없었어요. 그들에게는 둘 다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여겼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하나님의 계명은 문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이룰 때 하나님이 영광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즉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유전’입니다. 사람의 습관화 된 진리 체계지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왜?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미리 다 보여주니까 우리는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10절부터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의 차이점을 예를 듭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죠. 그러면 유대인들은 이런 말을 할 거예요. ‘우리가 나 좋으라고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했다’고.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 대신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것이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하면 그것도 유전이 되겠지요.
오늘날 교인들이 이 말씀을 보고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니까 부모님은 받은 것으로 생각하세요.’ 이렇게 하지 않고, 부모님께 용돈을 직접 드리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킨 것입니까? 나는 10만원 드렸는데, 어떤 사람은 20만원 드리면 누가 더 계명을 잘 지킨 것입니까?
지금 이 말씀은,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될 수 없는데,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된다고 본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지 아닌지는 확실히는 모르고 다만 분위기상 그렇게 몰고 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쪽으로 다들 수긍하니 그렇게 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용돈을 드렸습니까? 용돈은커녕 책임을 전가했지요. 사도 요한에게. “이제부터는 네가 모셔라. 나는 죽는다.” 세상에 이런 불효자가 어디 있습니까? 죽을 때는 그렇다 치고 평소에 예수님이 부모님께 용돈 얼마나 드렸어요? 아닙니다. 어머니의 부탁을 듣고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런 소리했어요. 그보다 더 심한 말은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라고 했어요. 어머님이 없을 때 그런 소리를 했으면 이해하겠는데 어머님이 와 계시는데 이런 소리를 했어요.
15-16절 봅시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빨리 너희의 더러운 것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즉 인간 자체가 더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7장 4절을 보면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우리는 시장에 갔다 와서 손 안 씻고, 물 안 뿌리는데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공연히 인간들이 하는 일에 시비를 걸어요. 그것은 어떤 행동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속에 있는 것이 더러워서 이런 짓이 나온다.’는 식으로 시비를 거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 보기에는 주님이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비칩니다.
듣는 사람이 굉장히 억울해요. 우리가 만약 유대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예수님 당신은 식사할 때 손도 안 씻고 식사합니까?”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손 씻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뭐라고 합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요.”라고 할 거예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데 어쩝니까? 예수님도 인정했잖아요.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그러면 바리새인이 제일 앞서 있고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간단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시비를 거는 거예요.
제일 선봉에 선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서 ‘네가 가는 길은 지옥 가는 길이다.’라고 한다면 바리새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줄을 잘못 선 거예요. 주님 말씀은 ‘바리새인을 따르지 말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본문 말씀처럼 시비를 걸고 지적하시는 내용이 바로 주님께 줄을 서는 방법입니다.
‘아, 우리는 무엇을 하든 더럽구나. 어떤 행동을 해도 시비 거리가 되는구나. 내가 자랑하는 것들이 주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것에 불과한 것이구나.’ 이것을 인정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강의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이 억지로 시비를 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두 번째는 뭔가? 계명을 그런 식으로 정립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계명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계명은 죄가 먼저 나와야 죄 속에서 계명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죄가 있고 다른 곳에 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의는 죄 속에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죄밖에 없어요. ‘그럼 저는 죄뿐이네요. 죄인이니까 뭘 해도 죄가 되겠네요?’할 때, 그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내는 것이 주님의 솜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전이 되고, 나는 누구를 모시는 셈이 되고, 나는 껍데기입니다.
‘나는 죄만 짓습니다.’라는 말이 ‘나는 의인이에요.’라는 뜻입니다. 왜냐? 그 의가 나로 하여금 계속 죄인 되게 합니다. 즉 죄인되게 하는 그 역량과 기능이 의가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의가 없으면 그런 고백이 안 나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이런 고백은 의가 있는 경우에만 나오는 고백입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통행권이 자동으로 나오지요. 그런데 고장이 나면 직원이 나와서 일일이 통행권을 뽑아서 나눠줍니다. 여기 선 직원이 주님입니다. 우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지적된 죄 안에서 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내 속에 주님이 계시면 더러운 내 속에서도 의가 나옵니다.
숯은 시꺼먼데 이것으로 설치 미술을 하면 작품이 되어 높은 값에 팔립니다. 변기가 화장실에 있으면 그냥 변기인데, 이것을 미술관에 전시해 놓은 사람이 있었어요. 제목을 [샘]으로 붙여서 전시를 했는데, 값이 엄청나게 나가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흉내를 내서 다른 사람이 하게 되면 그것은 값이 없습니다.
‘강남 스타일’을 불러 세계적 명성을 얻은 가수 [싸이]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자기의 노래가 그렇게 유명해 질 줄을 몰랐어요. 즉 우연으로 스타가 되었기에 그 후속 곡을 내는 일이 참으로 부담되고 어려운 겁니다. 그 우연을 자기 능력으로 다시 만들 수가 없어요.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연히 구원 받았기에 구원받은 티를 내려고 하니 어색하기 짝이 없어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구원 받았으면 죄만 지어라.’ 이미 구원 받았기에 가볍게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이지요. 구원은 주님이 하셨는데, 인간은 착한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엉터리 사고가 자리 잡고 있어서, 이 사고에 맞추려고 구원 받은 티를 내려하니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이 위선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 주님은 알아서 죄를 끄집어내십니다. 그럼 죄가 뭔가? 내가 믿음이 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지요. 내가 납득이 되는 구원을 내가 소유하려 하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안 죽고 살아 있어서 행동으로 보여야 되고 그 행동이 주님의 계명과 일치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이 맞아요. 우리는 바리새인에서 구원 받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바리새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바리새인 짓이 나오면서 바리새인처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나의 죄인 된 모습이다.’라고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이게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예수 믿고 바른생활 한다고 설치고, 성도는 나 자신도 몰랐던 바리새인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바리새인의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똑같은 죄를 범하게 되는가? 충동 때문입니다. 충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충동의 반대는 이성입니다. 이성은 내 몸은 내 것이니까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동을 이성을 뚫습니다. 이성이 말을 안 들어요. 갓난아이가 태어날 때는 혼돈 속에서 나온다고 했지요. 갓난아이가 울 때 엄마가 꾸중한다고 알아듣나요? 아이 울음소리가 엄마의 꾸중소리보다 더 높아요. 엄마가 아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를 상전이라고 합니다. 울면 아이의 요구를 들어줘야 합니다. 안아줘야 하고, 젖을 물려야 합니다. 혼돈이 우리의 상전입니다. 충동은 조절이 안 돼요. 비이성적입니다. 그리고 충동은 노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향락’입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이처럼 충동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넘고 넘습니다.
이런 괴물이 없어요. 어느 정도 성취를 했으면 흡족해야 하는데 잠시 만족할 뿐 또 새로운 것을 욕구해요. 그래서 늘 일을 저질러요. 저질러놓고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라고 후회합니다. 우리교회 새로 나온 성도 한 분이 저에게 자주 전화를 합니다. “제가 남편에게 괴물이라고 욕했는데, 제가 괴물이었습니다. 이제 제 속이 펑 뚫렸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복음을 듣고 그동안 막혀있던 모든 것이 뚫렸습니다.” 이런 말을 해요.
남편이 괴물인줄 알았는데 자신이 괴물이었다는 거예요. 제가 속으로 “남편이 괴물 짓하면 또 화가 날걸요?” 바로 이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을 알아요. 그래도 똑같은 상황이 오면 못 참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충동은 내가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속으로 잠복해 들어가요.
그런데 늙어 치매에 걸리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갑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너무 충동이 많아지면 남을 생각할 여지가 없어요. 분노 조절장치가 깨지면 남 생각을 못해요.
17절 봅시다.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ANE자온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제자들이 못 알아들은 거예요?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했지요.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자신들은 이미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면 깨끗함을 유지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외부의 더러운 것이 내게로 들어오면 내가 더러워지니까 들어오기 전에 더러운 것을 씻으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깨끗하게 살려는 이 마음을 하나님이 알아주시리라는 것, 이것에 대해 예수님은 질책을 하셨지요. 예수님의 질책에 대해 그 옆에 있었던 제자들이 놀랐어요. 꼭 자신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던 거지요.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 비유에 대해서. 예수님 대답은 18절에 나옵니다.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과 15절 말씀의 차이점이 뭡니까? 차이가 없지요.
설명을 하시려면 알아듣게 말씀을 하셔야지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면 알아듣겠습니까? 예를 들어, "쟁반에 담긴 이것은 무엇입니까?" "꿀이다." "예수님, 귤의 비유를 알려주세요." "깨닫지 못하느냐? 이건 귤이다." 이게 말이 됩니까? 구체적인 해석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이야기한 것을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바리새인들은 책망을 들어야 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제자들도 납득이 되어야 '예수님은 우리 편이고 바리새인들 남이다.' 이렇게 되는데, 제자들이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주님이 아시지요.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을 우회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신 겁니다. 왜냐? 제자들은 성경을 기록해야 될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증거해야 될 증인이거든요. 따라서 바리새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바리새인과 다르지 않은 제자들도 같이 느껴야 될 사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번이나 되묻도록 유도하신 거예요.
제자들이 "그 비유는 무슨 뜻입니까?"라는 물음이 나오게 하신 거예요. 이 원리가 여기뿐만 아니라 계속 나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어떻게 하면 영생 얻겠습니까?"라고 했고, 예수님이 답변했는데 제자들이 놀라지요. "그럼 아무도 구원 못 받겠네요?" 부자 청년은 떠나면 그만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 청년의 편에 서고 싶고 예수님이 점점 낯설어지는 거예요.
이처럼 낯설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왜? 안다고 할 때는 몰라요. 모른다고 할 때는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를 학원에 보낼 때 아무 학원이나 보내는 것은 요령 없는 사람이에요. 학원에 보낼 때는 기초부터 가르치는 학원에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자신감을 가지고 공부를 따라가지, 처음부터 어려운 부분을 공부하면 모르면서 자신의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결국 시험을 치면 다 틀리지요.
예수님은 제자들 편이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결국 제자들 들으라고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는,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모든 인간들아, 너희들을 위해 내가 대신 죽을 게.'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다. 이 대신 죽음에서 죄가 나오는데 두 종류의 죄가 나옵니다.
희생물을 죽이는 것이 죄에요. 사람이 죽어야 되는데 대신해서 희생물이 죽기 때문에 희생물의 죽음이 죄가 됩니다. 어떤 노인이 뱃놀이를 즐기다가 물에 빠졌는데 청년이 물에 뛰어들어 노인을 건져냈습니다. 기자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그런 용감한 행동을 했습니까?" 청년의 대답이 "누가 나를 떠밀었어요."
청년이 물에 빠진 것은 물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의 죄를 들춰내기 위함입니다. 왜? 그냥 물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떠밀려서 들어갔으니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칼로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떠밀려서 죽어야 돼요. 왜냐? 그래야 죄가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발생시키면서 주님은 죽으셨지요.
그 다음에 이 죽으심을 떠맡아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죄가 돼요. 자기가 예수님 죽인 것을 끝까지 책임져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을 반겨야 돼요. 그게 안 되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귤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데 누가 강제로 귤을 입에 넣으면서 '처먹어!' 하면, 먹기 싫어도 먹을 수밖에 없지요.
처먹으라고 준 귤은 주가 먼저 먹은 귤이고, 그 귤을 강제로 우리에게 먹인 거예요.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아니에요. 내가 죽였던 분이 내 안에 들어온 것이 부활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는 절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당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제 잘난 맛에 기도해서 원하는 것을 따내는 종교단체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어요.
제가 지난 수련회 마지막 강의 후에 기도하면서 잠깐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와서 억지로 참았습니다. 제 감정이 표출되면 안 되고 진리가 전해지는 자리니까요. 왜 울컥하는 마음이 생겼는가 하면, 한국교회를 생각하니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어요.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전하지 않아요. 신학교 교수, 목사들이 복음을 몰라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니까 예수님이 설명해 주십니다. 이런 설명은 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제자들이 몰랐다는 것은,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 지적하는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을 지적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 말씀을 들었지만 제자들 생각은 '그래도 내 속에 착한 부분도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21-23절에서 그런 제자들의 생각을 짓밟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방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주님, 이런 것 말고 착한 것도 있잖아요?'라는 질문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만약 사람에게 착한 것도 있다면 착한 것도 계속 나열했을 거예요. 그러나 없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의는 죄 속에서 나와요. 우리는 속이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죄인이어야 합니다.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오지 선이 안 나옵니다. 안 나오는데 나온다면 이건 누구의 솜씨입니까? 주님의 솜씨지요. 주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나옵니다. 분명히 우리에게서는 의가 안 나오고 죄만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는 것은, '너희들은 죄밖에 나올 것이 없지 결코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현대의 주체 개념과 연결할 때 잘 설명이 되는데, 만약 탐욕이 나왔다면, 손들고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도 나옵니다.'라고 할 때, 주님은 '탐욕이 나오는 자아와 찬양이 나오는 자아가 같은가, 다른가?'라고 물을 거예요. 이 질문에 대해 그 누구도 설명 못해요. 왜냐? 한 입에서 저주와 찬양이 나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하나를 골라잡아야 하니까요.
'탐욕아, 너는 잠시 쉬어라. 내가 지금 찬양해야 하거든.' 이게 가능합니까? 주님은 이것 자체를 탐욕으로 봅니다. 모든 찬양의 밑바닥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원래 자아는 탐욕만 나오는데 이 자아가 자신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도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찬양하는 주체를 가짜로 만들어요.
주님은 이것을 사전에 초를 쳐요. 전혀 용납하지 않는 거지요. 21절에 나오는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훼방, 교만, 광패' 등인데,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 나와요. 어느 세월이 이것을 다 지킵니까?
마가복음 7장 21절 이하에서는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악한 것을 거론했는데, 우리 모두 이런 것이 나옵니다. 이건 충동이라고 제가 말했지요. 이성적인 것은 누를 수 있는데 충동은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와요. 충동이 튀어나온 후에 '내가 왜 이렇게 행동했지.'하고 나중에 나오는 것이 이성의 몫입니다. 뒤늦게 반성하고, 후회합니다. '다시는 그런 짓 안 해야지.' 다짐을 해도 그런 상황이 오면 또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구타한 후에 다음 날 명품 가방을 아내에게 선물하면서 "내가 어제는 정신이 없이 행동했어. 정말 미안해! 다시는 이런 짓 안 할 거야." 다짐을 해도 며칠 지나 또 화나는 일이 있으면 아내를 구타합니다. 아내는 맞으면서도 "내가 자식 때문에 참고 산다." 하면서 또 참습니다. 그러면 남편은 때린 자가 됩니다. 그럼 아내는 뭐가 됩니까? 견디는 자가 되지요.
남편은 악마고 참고 견디는 아내는 천사입니까? 남편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럼 사랑의 은사는 뭔가? 남편의 행동은 고쳐지지 않고 또 튀어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아내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고발'입니다. 이것이 사랑이에요. 그런데 왜 아내가 경찰에 고발 못하는가? 그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남편을 경찰에 고발하면 내 자식은 누가 키우나? 이것이 탐욕입니다. 탐욕이 없는 것 같은데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니까 내 속에 이런 탐욕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 드러냅니다. 때리는 남편보다 참는 내가 더 나쁘다는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사랑답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맞아야 됩니다.
맞고, 고발하고, 이혼하고. 이렇게 될 때 내가 더 나쁜 여자고, 내가 괴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 현장은 개판인데 거기에서 사랑의 은사가 나옵니다. 사랑의 은사가 나오는데 뭐 그리 복잡한가? 복잡합니다. 우리가 자꾸 사랑을 이성으로 조작해 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르반’이 성경에 나오는데, ‘이런 것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꾸 드립니다.
장로의 유전으로 우리의 정당함을 만들어서 내 행동으로 하나님께 가는 길을 자꾸 만들려고 해요. 그런데 주님은 인간이 드리는 것을 거부하시면서 ‘네 속이 더러워.’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속이 더럽다고 헤쳐주시는 그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손길입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들었어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설교 현장은 산 위가 되면 안 돼요. 산 밑에 와서 주님과 바리새인이 싸우고, 바리새인이 욕을 먹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 편인 것처럼 행세할 때 주님은 바리새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을 우회해서 제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파해야 될 사람이기에 그들이 바리새인과 동일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결국은 ‘전부 다 섞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죄인이란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겁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집니다. 십자가는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항상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드신 것이지요. 우리 속에 탐욕과 시기가 있으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나로 인하여 유발된 상황이 예수님 돌아가심입니다. 십자가와 내가 관련된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만 이어지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산 밑이 어디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산 밑입니다. 보건소, 학교, 집입니다. 이 동네에서는 모두 자기가 잘났다고 설칩니다. 바리새인이 되려고 모두가 환장을 했어요. 주님은 여기에서 죄의 보편화를 추진하십니다. ‘너희는 죄의 왕노릇 하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유대인들은 음식물을 깨끗이 해야 된다고 여겼어요. 왜냐? 자기 몸은 주님이 주신 몸이기에 깨끗한 것이 들어가야 깨끗함이 유지된다고 생각했어요. 몸 자체가 하나님의 토라로 만든 것이기에 토라의 성스러움은 곧 나의 성스러움이고, 나의 성스러움은 토라의 성스러움에 흡수되어 하나님의 신성함을 드러내면서 하나님과 결합된다는 이론입니다.
제가 창세기 2장을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은 왜 ‘먹지 말라.’ 혹은 ‘먹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까?” 365개가 하지 말라는 계명, 258개가 하라는 계명, 토탈 623가지라고 하는데, 유대인의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먹지 말라.’는 것에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고, 창세기 9장에서는 ‘고기는 피채 먹지 말라.’고 했어요.
이 말씀에 의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먹지 말라는 말씀이 먹을 수 있는 영역을 잠식하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기를 위해 손댄다는 거예요. 왜냐? 인간은 자기 몸을 살리기 위해서 뭔가를 먹어야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먹는 것부터 브레이크를 걸어요.
인간의 영역에 대해서 주님 언약의 영역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먹지 말라.’고 할 때, 인간은 ‘이것은 먹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먹는 쪽으로 피하겠지요? 결정타가 뭔가 하면,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
주님의 살과 피는 생명나무인데 이것은 반드시 먹으라는 겁니다. ‘그래야 영생 얻는다. 못 먹겠다고? 그러면 너는 영생 얻지 못한다.’ 인간들이 먹는 것 중에 예수님의 살과 피는 없어요. 그런데 인간이 몰리고 쫓겨 가면서 기껏 자기가 살기 위해서 먹었던 모든 것은 ‘먹지 말라.’에 밀려서 숨도 못 쉬고 있는 거예요.
그 ‘먹지 말라.’가 결국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로 굳혀집니다. 이것을 해석하면, ‘너희들이 결국 내 살을 찢고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다. 즉 너희들이 원초적으로 죄인인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내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너희가 산다.’라는 뜻입니다. 성만찬을 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들 손에 죽는 것이 너희를 살리는 길이다.’ 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원천적으로 죄인인 것을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3. 1. 08:5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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