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160120
아담 160120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아담(창세기 3:17-19)
이근호
16-01-20 21:09
아담
2016년 1월 20일 본문 말씀: 창세기 3:17-19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약속,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예언 이후에 그 예언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느냐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참으로 난감합니다. 왜냐하면 ‘후손’이라는 으레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서 탄생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컷과 암컷의 교배에서 새끼가 나온다는 것은 상식이요 자연의 이치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뱀의 후손’은 어떤 식으로 마지막 때까지 이어지는지가 모호해집니다. 숫뱀과 암컷 뱀의 교배를 지어봤자 그냥 일반적인 뱀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뱀의 후손’ 실체 잡기가 오리무중에 빠집니다. 신약에 와서 ‘뱀의 후손’은 곧 악마라고 결론지어봤자 그 와중에서 어떤 경과를 거쳤기에 뱀이 악마가 되었는지 설명할 길이 막막합니다.
이러한 이해 장벽은 실은 우리 인간들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 입장에서, “이왕 따먹은 것, 이제는 선악과 가지고 지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살아있는 자의 당면 문제는 어떻게 앞으로 사느냐이지 자꾸만 지난날을 들추어내 책임 추궁하는 것은 옳은 현실 대처방식이 아니라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선악과 따먹은 그 결과를 가지고 인류의 역사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아담이 곧 예언’이 되게 하시겠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이 아담의 존재와 그에게 주어진 환경과 관련지어서 조성해놓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생존하기 힘든 저주스러운 삶의 처지입니다.
아담으로 하여금 척박한 터전과 생존을 버겹게 하고 거추장스럽게 하는 요건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아담으로부터 저항하고, 불만을 터뜨리고, 원망하는 속성을 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뱀의 후손’ 노선은 아담에서부터 벌써 출발이 되었습니다. ‘아담에게서 ’인간‘이 분리되어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아담이라는 이름의 예언이기보다는 그냥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행복추구를 위해 시도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고유의 가치와 존엄성이 있을 것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겁니다. 즉 아담에게서 인간이 떨어져 나와 둘로 분리되는 겁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을 위하여 예언대로 움직여하는 대상인 반면에, 인간이란 자신의 편안함과 행복함과 고유의 절대적 가치를 목표로 해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의식 자체가 그런 목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예언과 약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살다보면 흙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필히 흙이 되어야 하고, 바로 그런 상황은 당연히 하나님에 의해서 차질없이 수행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결코 편하기 살다가 편하니 죽을 수 있는 권리 같은 것은 애초에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뱀의 후손의 성향은 이런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에 반발하는 성향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행위 목표나 가치를 오로지 최종적으로 자기 영광과 엮어지도록 계획합니다. 오로지 인간의, 인간의 의한, 인간을 위한 세상만을 염두에 둡니다. 그래서 ‘뱀의 후손’ 곧 아담에게 ‘인간’이고 싶어 떨어져 나온 마음은 악마마저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들의 세계만이 유일한 실재하는 현실로 봅니다. 신을 인정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신마저 치우고 자기 자신만을 영원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는 ‘아담’은 없습니다. 인간들 뿐입니다. 행여 사단의 존재도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재로 인정한다고 하지만 역사 가장 확실히 최종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나는 무조건 영원토록 행복해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사후에 모여든 곳에 만약에 천국이라면, 천국은 기껏 ‘인간들의 나라’이지 결코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고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최종적 가치를 인간 자신들에게 두는 것이 뱀의 나라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뱀의 나라에는 뱀이 없고 사단도 없습니다. 오직 자칭 신들이라고 우기고 또한 신인양 행세하며 평생을 살았던 바로 그들의 나라입니다.
세상이 온통 인간들의 손길로 이루어진 세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리하게 들리지도 않고 이상스럽지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유치원부터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늘 듣고 배우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없었고 아담은 오직 하나님의 예언적 관계로 인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은 본인이 무슨 잘못을 저질을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필히 평생을 걸쳐 그래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인생에서 ‘자기 성공, 나의 실패’라는 인식은 성립되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예언을 위하여 확정된 사항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아담에게서 인간이 분리되면서 ‘예언적 인물’이라는 인식을 인간들은 본인의 마음에서 저항하듯이 지워버립니다. 즉 “나는 스스로 나이고 나답게 살아야 될 권리나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어디서, 언제 나타납니까? 바로 예수님이 진정한 아담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예언을 듬뿍 자신이 담당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받아야 될 저주를 홀로 받으시고 3일 만이 약속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서 진정한 아담의 예언은 성취된 겁니다. 이 성취로 인하여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정체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낳으신 분,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시고, 땅에서 생겨난 땅의 지배자로서의 최종적 존재가 바로 뱀의 후손인 사단입니다. 땅에서 여자란 없습니다. 그저 남자 속으로 들어간 남자의 부분일 뿐입니다. 이로서 ‘하늘편’과 ‘땅편’의 싸움이 인간을 앞세운 대리전쟁으로 이 세상에 펼쳐진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예언을 무시하고 단지 독보적 존재자로 사는 재미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1-21 05:38
22강-창 3장 17-19(아담)1601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장 17-19절입니다. 구약성경 4페이지입니다.
창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되게 고생시킨다.’ 이렇게 불평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리가 고생을 더하거나 덜 하거나 그게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선악과에 있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그 선악과에 포함된 내용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내용에 네가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담을 개인적 아담으로 생각해서 ‘아담이 고생했겠다. 아담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니 얼마나 허무를 느끼겠는가.’ 이렇게 동정할 생각을 마시고 아담자체를 하나의 예언이라고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 자체가 예언이 된다는 말은 아담의 후손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예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예언이 되고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를 못하는 이유는 태어나면서 인간사회 분위기자체가 ‘어쨌든 버티고 살아남아야 된다. 밥 먹고 살아야 된다.’라는 개인적인, 사적인 것에 몰두하다 보니 하나님께 원망하기 바빠요. “이 몸 하나 살려보려는데 왜 하나님이 안도와주십니까? 왜 하나님이 안 받쳐 주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 소원을 안 들어주십니까?” 이렇게 하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아담은 하나님과 관련된 예언이 아니에요. 본인만 살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본인이 교주가 되는 거지요.
아담이 하나님의 예언이 된다는 말은 아담이 이 땅에서 죽든 살든 간에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사항이에요. 우리존재가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이 한 가지만 알아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허무하게 볼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공과 실패를 자꾸 의식하는데 하나님과 관련된 이 사실을 안다면 이제는 그 입에서 성공과 실패가 쑥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의 예언이 예언대로 나타나면 성공이고 그 예언을 내 욕망, 욕심이 가려버리면 그것은 실패지요.
성공이나 실패라 하는 것은 주님 안목에서 봐야지 사적으로 내가 생존하는데 얼마나 유리한가, 불리한가, 그걸 따져서 ‘나의 가치는 이 정도다. 나는 잘났다.’ 하든지 혹은 ‘나는 이 정도로 못났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 가치를 자폐증 환자처럼 가두어두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오늘본문 자체가 하나님께서 너는 네 안에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너는 너로 국한되고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누구와 엮여져 있는가, 너는 어떤 예언의 말씀과 결부되어 있는가, 그걸 봐야 돼요. 괜히 우울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울증 걸렸습니까? 하나님이 우울하지 않은데 우리가 왜 우울하지요? 그것은 예언과 결부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선악과와 관련해서 이러한 징벌, 저주를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땅은 너로 인해서 저주를 받는데 왜 땅은 아담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방금 제가 아담은 예언이라고 했고 그 예언의 주된 내용은 창세기 3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하나님의 내용과 아담이 흙으로 와서 흙으로 가야 될 이유가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걸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데 이 약속을 보면서 보는 사람마다 늘 궁금해 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궁금해 하면서도 누구에게 물을 사람도 없고, 막상 물으려 하니 무시할 것 같아서 부끄러워서 묻지도 못하는 그것이 뭐냐 하면, “도대체 뱀의 후손이 누구인가?” 하는 거예요. 뱀의 후손은 마귀다. 뱀의 후손이 마귀면 후손이라고 했으니까 마귀가 등장할 때까지 그 사이에 뭔가가 연결되어야 되잖아요. 장차 예수님 오실 때 마귀가 등장한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 받을 때 마귀가 등장했다고 치고, 그러면 그 전에는? 그 전에는 뱀의 후손이 뚝 끊어졌다가 광야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 그 때에 나타난 겁니까?
뭔가 연결되어야 되거든요. 그 연결 될 때 뱀의 자손 쪽으로 연결된 자들이 누구인가? 그게 궁금해야 되거든요. 사실은 궁금해요. 그런데 아는 사람이 있어야 물어보기를 하지요. 약속을 할 때 분명히 그 당시에 뱀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여자도 있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우리라. 그것이 시발점이 된다면 여자 쪽에서 나온 어떤 계열과 뱀의 계열이 있을 것이고 그 계열을 따라서 마지막에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니까 그 약속과 예수님 사이에, 그리고 그 뱀과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탄 사이에 그것을 이어주는 각자의 후손들이 나올 때 그 후손들의 정체를 밝힐만한 원칙과 법칙이 무엇인가?
분명히 여기에 여자 있고 아담 있고 뱀 있고, 그리고 하나님은 계시고, 딱 네 분밖에 없지요. 그러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조합은 이 네 명 가지고 조합을 짜야 되는 겁니다. 너는 어느 쪽이고 또 너는 어느 쪽이고, 이렇게 조합을 짜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뱀은 땅에서 기다가 나중에 죽잖아요. 그러면 여자 같은 경우에는 ‘아, 여자니까 하와다. 그 하와가 남편 되는 아담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것은 여자의 후손이 될 공산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납득할 수 있잖아요. 자식이 있으니까.
그러면 뱀은 누구하고 결혼합니까? 수컷과 해서 새끼가 나옵니까? 그것은 땅꾼에게 다 잡혀 먹는데? 뱀의 후손을 생산하는 그 어떤 구조, 어떤 메커니즘으로 뱀의 후손이 계속 이어져 나오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달랑 넷 밖에 없는데 이 넷 가지고 조합을 해서 뱀의 후손을 끄집어내야 하는데 무슨 수로 끄집어내지요? 뱀의 후손이 궁금한 거예요. 아니 보고 싶은 거예요. 뱀의 후손이 만약 나타난다면 그 다음 아이디어는 간단합니다. 뱀의 후손을 목 졸라 죽이든지 칼로 찔러 죽여 버리면 더 이상 뱀의 후손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면 이 땅은 천국이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사탄을 흑돼지에 가두어서 한 방에 던져버리면 적어도 악마가 서울시내에서 더 이상 활개 치지 않는다는 것, 이게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의 주제입니다. 강동원이 주연한 영화. 사탄을 흑돼지에 집어넣는다는 이야기는 정말 웃기는 이야기죠. 그러면 사탄을 흑돼지에 가두었다면 사탄의 실체가 분명히 있어야 되겠지요. 보통 돼지인데 사탄이 들어가면 흑돼지가 돼요. 보통 돼지하고 사탄하고 둘 다 있어야 되고 그걸 집어넣는 중간행위지가 있어야 돼요. 그것은 귀신 쫓아내는 사제가 하는 겁니다. 사제가 그걸 맞춰주면 돼요.
그렇게 해서 사탄의 후손이 나타날 때까지 사탄의 사슬을 중간에 끊어버리면 뭐가 되어버립니까? 여자의 후손이 대적할 대상이 없어져 버려요. 주님이 주신 예언을 인간이 끊어놨네. 그놈의 충성심 때문에. 신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예수님이 처치할 사탄을 도중에 사제가 처치해버렸어요. 이게 참 기가 찰 노릇이에요. 사제 자기가 메시아 하든지. “사탄아 물러가라.” 인간들이 사탄을 멀리하고 싶고, 상종하지 않고 싶고, 사탄 없는 세계에 살고 싶어 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예언을 스스로 저항한다는 사탄의 생각입니다. 마귀의 생각이에요.
쉽게 말해서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은 다 사탄이니까 내 선에서 혼자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니까 사탄을 내 선에서 처리해서 나만 잘되면 된다.’ 그렇게 돼버리면 아까 처음에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악과를 따먹을 때의 어떤 정황들이 나타나야 되고 따먹을 때의 결과들이 나타나 주는 것이 하나님의 예언인데 인간들은 주님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힘들게 하면 사탄이라고 생각해서 ‘사탄만 없애버리면 나는 행복할 수 있다. 이제부터 하나님과 내가 회복되어서 옛날처럼 다시 잘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강조하는 그 선악과 따먹었다는 사실을 자기 선에서 억지로 삭제하려는 사탄의 생각입니다. 그게 마귀의 생각이에요. 마귀가 무슨 마귀를 쫓아내겠습니까? 한통속인데. 소통이야 잘 하지요.
그러면 뱀의 후손은 어디 있는가? 뱀의 후손은 아담으로 하여금 환경으로 압박을 가해요. 압박을 가하면 아담에서 뭐가 빠져나오는가 하면, 아담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거부하는 성향이 빠져나오면서 이게 인간이 됩니다. 아담이 둘로 쪼개져서 아담이 있고 또 인간이 돼버려요. 아담은 예언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예언적 존재가 아담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예언이고 약속이고 간에 나만 잘되면 된다는 그 독자적으로 독립하는 것, 나는 절대적 존재로 살고 싶다는 그런 요소가 환경의 압박을 통해서 자생적으로 튀어나오면서 뱀의 후손과 관련됩니다.
쉽게 말해서 뱀의 후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뱀은 없다는 거예요. 사탄의 후손의 특징이 뭐냐? 사탄은 없다는 겁니다. 뭐가 있는가? 인간만, 인간의 역사만 있다는 거지요. 이것은 유치원부터, 초등학교에서 다 배우는 거예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그러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링컨이 한 게티즈버그 연설. 성문종합영어 공부할 때 이 지문 많이 봤어요. “국가가 날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기대하지 말고 네가 국가를 위해서 뭘 해줄 것인지를 생각하라.” 이것은 케네디가 한 이야기고. 케네디가 되었든 링컨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사람들에게 호응이 되고 납득이 되고 박수를 받는 것은 뭐냐? 더 이상 하나님과 엮이기 싫다는 거예요.
“독자적으로 자립하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그게 뭐냐?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도 싫을뿐더러 사탄도 싫어요. 아예 사탄의 존재자체를 없애버립니다. 인간에게 사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종교성에서 지어낸 이야기기 때문에 사탄도 없고, 귀신도 없고, 모든 것은 과학적 법칙 하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결국 인간들은 자기내부에 계속해서 인간으로서 영원하고자 합니다. 천국이 있더라도 아담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그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천국은 다른 누구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나라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살던 식으로 계속 사는 나라. 구약에서는 그걸 애굽이라고 하고 신약에서는 그걸 땅이라고 합니다. 이 세대라고 해요. 애굽, 또는 이 세대 안에서의 희망은 뭐냐?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가? 왜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가? 18절에 주께서 원인제공을 했어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이미 하나님께서 선악과와 관련한 상황, 그런 환경을 의도적으로 저주스럽게 만들어버렸습니다. 17절에,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땅 자체가 저주를 받음으로 그 대지위에서 사는 인간도 저주의 기운, 저주의 압력을 실컷 받아야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낙을 보자고? 낙 없어요. 결국 죽을 때 흙으로 돌아가니까. 낙도 없고 인간에게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 겁니까?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꼴랑, 선악과? 잘났다 정말! 또 심으면 또 따먹을 거야.” 이렇게 분노할 때 바로 그런 화내는 것, 하나님이 정한 조치에 대해서 저항하고, 분노하고,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그 요소를 주께서는 유발한 거예요.
그게 뭐냐? 뱀의 후손의 공통점이에요.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니까. ‘남자인 아담은 그렇다 치고 여자는 살려줘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아담이 둘로 쪼개져서 아담이 있고 사람으로 행세하고 싶은 이것으로 쪼개지는데 이 사실을 최종적으로 언제 마감되는가 하면, 제일 최후에 마지막 아담에서 이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는 겁니다. 이 아담은 본인이 누군지도 몰라요. 본인에서 뭐가 빠져나가는지를 모릅니다. 그냥 처음부터 아담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사실은 살다보면 아담이 아니고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예언과 계시에 관련된 아담은 대체 자기 속에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몰라요. 통째로 자의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벌써 인간은 사람이 되었지 아담은 안돼요. 아담은 마지막 아담에서 진짜 아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듬뿍 하나님의 예언을 온몸으로 다 받아내시는 분, 이게 마지막 아담이에요. 그게 로마서 5장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오실 자, 그분은 마지막 아담입니다.
그 전의 아담은 마지막 아담의 그림자, 또는 모형이라고, 표상이라고, 또 다른 말로는 은유다, 비유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온 아담이 아담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짜 아담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되 마지막 아담이 진짜 아담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그 전의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고 그냥 사람의 후손이죠. 사람의 후손인데 그 사람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관련된다는 것은 언제 그것이 드러나는가? 여자의 후손이 나타날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 둘 밖에 없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아예 없었습니다. 주체자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없는 겁니다. 인간, 사람 자체가 없어요.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이런 것은 링컨의 이야기고 사람 자체가 없는 겁니다.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 해 봅시다. 아담이 둘로 쪼개져서 인간으로 빠져나오면서 자기에 대한 저항을 한다 치고, 그러면 여자가 있는데 여자는 복을 받고 행복한가? 창세기 3장 16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뭐냐? 여자는 없어요. 여자는 남자의 일부로 복속이 되고 예속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모든 인간의 대표자가 되어버려요.
남자는 사람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품안에 있는 마이너스 남자지요. 왜냐? 남자의 지시를 받고, 남자의 통제를 받고, 그것도 자발적으로 남자를 사모하니까. 어쨌든 남자를 못 따라잡아서 환장한 거예요. “너희끼리만 맛있는 거 먹고……” 이게 가정주부들이 하는 이야기지요. “저희들끼리만 놀러 다니고. 결혼 전에는 같이 그리스에 놀러가자고 해놓고. 음료수캔 들고 푸르른 지중해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도 취해보고 싶었는데. 일 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 간다고 해놓고 저희끼리 여행을 가?” 일요일에 좀 야외라도 나가자고 하면 소파에 드러누워서 종일 잠이나 자고 있고. 그걸 디비잔다고 하지요. 종일 디비자고.
이미 여자를 점령했으니까 남자에게는 여자는 없어요. 자기를 닮은, 자기보다 약간 작은 남자가 있을 뿐이고 그저 애 낳는 남자가 있어요. 밥 해주는 남자. 그리고 남자는 자기 집에 여자가 없으니까 또 다른 여자를 찾아다녀요. 남자는 말합니다. “내가 남자인데 왜 너 같은 거한테 매여 있는가?” 무슨 말이냐 하면, 여자는 당연히 남자한테 매여야 되고, 남자가 동으로 가면 여자는 동으로 가고, 남자가 서로 가면 여자도 서로 따라가야 되지만 남자는 여자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니까. 하늘 가는데 땅이 따라가야지 여자한테 남편이 따라가는 법이 없어요. 물론 가정의 행복, 평화를 위해서 따라주는 척은 하지만 호시탐탐 빌미 잡히면 그걸 빌미로 해서 남자는 손쉽게 독립선언을 해버립니다. 오늘 남자의 비밀을 다 알려주는 셈이네요.
그러면 여자는 “너 같은 것과 안 산다.” 이렇게 내쳐야 되는데 여자는 남자가 그렇게 하더라도 그 남자 없이는 또 못사네요. 지금 개인의 성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여자는 없다는 겁니다. 아니 여자는 없어줘야 돼요. 왜? 아담만이, 여자까지 포함한 아담이 하나님과 관련된 예언과 결합하는 대표자노릇을 해야 되기에 그렇습니다. 아담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에 그러면 여자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이아몬드로 돌아갑니까? 여자는 천사가 되어서 돌아갑니까? 똑같아요. 여자도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왜냐? 여자는 남자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가 받은 예언에 여자도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 따로 노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주인이 되고 아내는 남편의 종이 된다는 성경말씀이 있잖아요. 사라가 자기 남편보고 주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여자는 어디 있는가? 이게 바로 여자의 후손의 비밀입니다. 여자라 하는 것은 아담이 아담의 실체를 다 드러냈을 때에 그 마지막 아담이 성취할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요. 성모마리아라 하는데 무슨 성모입니까? 마리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이 땅의 아담에게는, 그냥 사람에게는 없는 존재입니다. 없음에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래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이라고 한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뜻이 뭐냐?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모든 완성은 하늘에서 결정이 되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늘 팀과 땅 팀의 싸움, 이렇게 정리하시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는 겁니다. 하늘의 팀과 땅의 팀.
그러면 땅에 있는 아담의 후손은 다 지옥 간다는 말인가? 아담에서 인간이 빠져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이 땅에 대해서 저항합니다. 왜 저항하는가? 지난 겨울수련회교재에서 ‘자원의 희소성’때문이라고 했지요. 자원이 풍부하지를 않아요.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이래야 음식물을 먹을 수 있다는 이 말은 처음 에덴동산과 다르게 상황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마에 땀 뻘뻘 흘려가면서 먹어도 겨우겨우 입에 풀칠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예언이라고 받아들이고 수용하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놀아도 배부른 그런 상황이 아니에요. 자기 것을 잘라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세상, 자존심을 자르든지, 팔 다리를 자르든지, 하여간 뭔가 일한다는 것은 그만큼 손해 보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돈을 버는 거예요. 돈을 번다는 것은 한쪽이 뭉개지고 날라 가야 그만큼만 돈이 되어서 나에게 오는 거예요. 점점 돈을 번다는 것은 팔다리 날라 가듯이 양심이고 체면이고 다 날라 가는 겁니다. 그래서 회사에 입사할 때 “내가 이 회사를 위해서 목숨 바치겠습니다.” 해놓고는 나이 한 50 후반쯤 되어서 ‘못나간다. 나는 끝까지 정년 채우고 나간다.’ 하지요.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처음부터 그랬었는데 살짝 위장을 했지요. 하나님이 주신 환경에서 아무리 “이것이 하나님의 예언이다. 죄를 지었기에 이것은 반드시 당해야 돼.”라고 표현들은 그렇게 하지만 우리의 속에서 우러나는 저항심, 불평과 불만을 무슨 수로 지우개로 지웁니까? 지울 수가 없어요. ‘아, 내가 나 대신 다른 아담이어야 하는구나. 나는 아니야. 나는 결코 메시아는 아니야.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어요.’ 그걸 느껴야 돼요. 나는 고집스럽게 나의 행복과 나의 번영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 혼자 편한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생각, 선악과 생각, 그런 생각보다도 ‘나는 나만 잘되고 내 욕망만 충족된다면 그것으로 나는 하나님 필요 없어. 내 스스로 살 수 있는 힘만 있다면 하나님도 귀찮아.’라는 그것이 나도 모르는 본성인데 그 본성이 바로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긴 그 뱀의 욕망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여자와 뱀이 상호 교류된다고요. 그 속성이 하나의 밴드로 서로 교류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여자도 뱀이고 남자도 뱀이고 뱀도 그걸 조종하는 그것도 뱀이고. 뱀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이 보이잖아요. 인간 자체가 뱀의 후손이니까. 차라리 여자의 후손은 보이지 않아요. 여자의 후손이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사탄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남은 것은 인간밖에 없으니까,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나라를 위한 정부는 영원이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기에 환호성을 보내고 동감을 표하면서 그게 진리라고 다 고개를 끄덕이지요.
이게 무슨 하나님의 선악과와 관련되어 있는 예언이 되겠습니까? 스스로 신들의 집합체지 이게 무슨 창세기 3장과 관련된 존재라 할 수 있어요?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도 모르고.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당연한 것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은 징벌이라니까요. 징벌의 세계, 저주의 세계에 우리가 놓여있어요. 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아니에요. 주님의 예언 성취를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여기에 주께서 짜놓은 장치, 세트 속에 놓여 있는 겁니다.
덧붙여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원래 자연은 무정해요. 아무 감정이 없어요. 무정합니다. 무정의 세월 또는 무정 부르스라고 하는데 아무 정이 없고 냉혹하고 냉정해요. 그런데 성경에는 자연세계에 그 어떤 분의 감정이 애굽의 열 가지 재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애굽사람들은 그것을 자연현상중의 하나라고 보고 자기들이 믿는 신이 노했다고 이야기했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자연현상의 일부거든요.
그런데 성도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감정이라고 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일곱 인을 뗄 때에 하늘의 별의 삼분의 일이 떨어지거든요.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이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렇게 설명하면 쉬워요. 2차 대전 때 독일군 사령부가 모형으로 작전 판을 만들어놨어요. 누구한테 들으니 군에서는 작전참모장교가 최고랍니다. 작전참모장교가 작대기를 가지고 “탱크는 이렇게 밀고 잠수함은 이렇게 당기고 그 다음에 군대를 이 방향으로 이동시키고……” 그 응결된 모형 판에 작대기를 가지고 밀고 당기고 하듯이 천사가 별 삼분의 일을 잡아당기고, 또 밀고, 또 당기고, 강물의 삼분의 일이 썩고……, 이 모든 것이 이미 확정된 예언의 판 위에서 그렇게 움직이는 거예요.
천사의 감정, 주님의 감정을 표현하는 곳이 어디냐? 대자연입니다. 그걸 가지고 보이지 않는 소리, 들리지 않는 소리, 하지만 별은 별에게 말하고, 달은 달에게 말하고, 보이지 않는 소리, 자연은 자연에게 울리는 그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는 겁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예수님께서 풍랑을 보고 잔소리하고 꾸짖으니까 풍랑이 잔잔해 진 거예요.
“목사님, 이걸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물으면 우리가 아담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돼요. 독립할 생각 말고. 땀을 뻘뻘 흘리는 이것도 예언이고, 내가 죽어야 되기에 죽는 이것도 주님의 말씀의 실시라는 것, 그걸 안다는 것은 마지막 아담이 이 모든 것을 다 처리하시고 결국은 주께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칠 때에 구원이 된다는 그 사실, 보이지 않는 그 분으로부터, 하늘에서 온, 여자가 하늘이니까 하늘에서 온 그 후손, 다윗의 후손 예수님이 십자가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약속은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새로운 예언으로, 우리 몸 전체가 십자가 복음으로 변해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처럼 쳐다보면서 살지 말고 성경을 보면서 이 성경만이 참된 현실이고 진실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