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55절(가락-무한과 초월)16010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55절(가락-무한과 초월)160107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12)
요한복음 8장 55절(가락-무한과 초월)16010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55절에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희와 같지 않기 때문에 진짜다”라고 이야기하시거든요. 그런데 상대방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어떻게 이야기를 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나는 너와 다르기 때문에 진짜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너는 처음부터 거짓말이잖아 너는 처음부터 거짓말 이외에는 아는 게 없잖아 네가 말하는 것이 전부 다 거짓말이거든 따라서 너처럼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진짜다 라는 뜻이거든요. 이 말의 뜻이.
주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는 이유는 간단한 겁니다. ‘오류가 있어야 진리가 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는 오류의 역할을 톡톡히 해야 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상대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나는 유대인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이 처해있는 자리와 그 환경 전체가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오류가 있었다’라는 전제 하에만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가 있어요.
“너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진짜”라는 말은 너희는 나와 다르도록 내가 창조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올 그 다음 질문은 간단하지요. “왜 같으면 안 됩니까?”입니다. 여기에서 창조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폐허”가 창조물입니까? “창조물”입니다. 완전히 황폐한 것도 창조물이거든요. 욥에 보면 황무지에 비가 오지요? 인간이 채소밭(텃밭)을 가꾸지 않았는데 비가 오잖아요. 낭비잖아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기에는 낭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비를 내리십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욥은 ‘나 같은 인간에게는 고난을 내릴 이유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욥에게 고난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욥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미처 모르는 더 많은 세계가 있다’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 생각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옳지 않은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이만큼 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나님의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만큼밖에 모르는데 더 많은 것을 알거야.’ 하는 경우에 ‘내가 이만큼 아는 것’이 ‘오류다’, ‘오류가 아니다’가 판정이 나질 않습니다.
쉬운 예가 있어요. 초등학생들이 의견을 이야기할 때 자기 나름대로 아는 지식, 인터넷 본 것을 가지고 자기 자랑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것을 보며 “너는 근본 의도가 틀렸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 학생이 아무리 풍성한 정보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을 다 모으더라도 근본적인 의도 자체가 다르다면 그것은 ‘오류’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고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것이지 너희들이 나만큼 정보를 알게 되면 너희들이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오류와 진실이 충돌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피조물 속에 오류지점이 있어야 돼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창조물을 위해서 창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는 창조주를 위해서 하신 것이잖아요.
그러면 창조주와 창조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집니까? 중세 철학이나 중세 신학에서는 ‘존재한다’로 이어진다고 본 거에요.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도 존재하고 인간도 존재하고 같이 존재하니까 존재는 존재로 이어진다고 본 거에요.
그걸 ‘존재의 비유’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걸 칼 바르트가 공격했지요. 그런데 칼 바르트가 공격하면서 잘못한 것이 있어요. 창조의 대비로서는 이해해서는 안 되고 진짜 진리는 신앙에 대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학의 전제입니다. 그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하신다가 의미가 없어요.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느냐가 의미가 있어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 인간의 이야기는 내가 존재한다고 전제를 깔고 이야기가 나온 반면에 예수님은 자기가 여기 있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이런 일을 실시할 거야 때문에 일을 벌리시는 거에요.
너희들은 오류가 있다는 말은 앞으로 너희가 오류 있는 인간으로 내가 완전히 밝혀내는 일을 지금 시작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포도주로 바뀌었다 아 포도주 맛있네. 그러면 포도주 마신 사람이 구원 받았어요?
아니지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왜 구원을 못 받았는가 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 내가 여기 있음밖에 모르기 때문에 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와 같이 있는 것은 무조건 같이 아는 것으로 보이는 거에요.
물이 있네 포도주가 됐네 그 포도주 마시면 나는 더 오래 사는 식으로 있네 70이고 80이고 90이고 100세까지 나는 살 수 있네 이것이 인간의 전부에요. 그런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 자체는 예수님이 더 계심이 위함이 아니고 행하기 위함이에요.
그 행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보면 언약을 행하기 위해서 그 모든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신학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달리 복음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함을 얻기 위해서 그 십자가는 누구하고 계약했는가 하면 바로 아버지하고 계약했지요.
여기 55절 한 번 봅시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일방적입니다.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들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거든.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에 대해서 이사야 45장을 봅시다.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사야 45장 4절에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라고 하였지요. 15절에 봅시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창조 속에는 창조자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채로 창조 되었다는 것이 들어있는 거에요.
그러면 누구만 알아야 됩니까? 하나님하고 창조물 속에 계시는 그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는 그분만이 아버지를 알아요. 다른 사람은 아버지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걸 다시 이야기하면 원래 창조(피조)된 모든 세계는 아버지를 몰아야 되고 몰라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중간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스톱되어야 돼요. 더 나가면 안 돼요. 그러면 지나간 게 된다고요. 아버지가 여기 계시고 예수님이 그 다음에 계신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타넘고 가든지 건너뛰려고 해요.
예수님한테 스톱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건너뛰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그 사이에는 제사장으로 스톱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제사장이 죄를 가지고 단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관계가 십일조로 되어 있어요. 그러면 대제사장은 7월 10일날 홀로 지성소에 가서 방울을 달고 소에다가 염소의 피를 갖다 뿌리게 되면 다른 사람이 용서를 받아요. 이걸 가지고 대표자 또는 중보자라고 이야기해요. 이게 중보자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하니님 좋으라고 하는 게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 더불어 좋아지는 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 그래서 하늘나라의 보좌가 이중으로 되어 있지요. 어린양의 보좌기 있고 아버지의 보좌가 있습니다. 같이 있어도 괜찮아요.
왜 그렇게 했는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세상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세전부터 영원토록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복음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언급해버리면 내 존재와 하나님 존재를 연결시켜 버려요. 그런데 중간에 예수님이 들어가 버리면 이 존재는 십자가에서 끝이 나요. 십자가부터는 나락입니다.
단절되기 때문에 이 존재를 가지고는 예수님만 가려는 존재의 길에 들어설 수가 없어요.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거기까지만 와야 돼요. 거기까지만. 그리고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예수님만이 희생할 메카니즘이지 어느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사도행전 4장 12절) 길이 어디입니까의 문제가 아니고 누구의 이름으로 구원되느냐를 물어야 됩니다. 구원 받고자 하는 내 이름이 내 구원에 보탬이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방해가 돼요. 주여 언제쯤 내 이름이 탈락이 됩니까 이렇게 물어야 되죠. 언제쯤 내 이름에 희망이 없고 무의미하다는 조치를 내리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언제쯤 저를 아무 의미없는 무의미한 존재로 규정을 지어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참 고맙겠습니다.
한평생을 어떻게 살았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에서 그렇게 하는 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정리한 것을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의미 없는 곳에서 의미가 나온다. 예수님은 이 의미 없는 곳,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감으로 말미암아 모든 의미 있는 자들이 뒤에 오다가 다 되돌아가게 만들어 버려요.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헌금 했습니다. 십일조 했습니다. 선교 했습니다. 내가 예배당 세워서 강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쥐고 있는 사람은 결국은 주님 가신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열두 제자 뒤로 돌아갓. 그 열두 제자가 전부 다 결국은 제자리로 가지요. 그래서 그 열두 제자가 살아온 것을 세 자로 ‘백일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훤한데 꿈을 꾸지요. ‘훤하게 보이는 것이 꿈인 줄을 몰랐어?’ 그런 뜻이지요.
인생의 모든 것, 종교라는 것, 교회다니는 것이 전부 다 백일몽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의미가 생산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창조물 속에 들어있는 오류의 퍼짐, 오류의 확대, 오류의 확산입니다. 오류의 재생산, 오류의 번식, 오류의 발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기능으로 그래야만 하기에 외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라는 말씀은 너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고 너희는 처음부터 그분을 몰라야 되는 존재로 내가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면 나쁘고 알아야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바로 마귀가 그렇게 잘못된 생각을 집어넣은 거에요. 선악과 나무의 법은 “따먹지 마라”입니다. ‘너는 악행을 행하면 안 되고 착한 일을 행해야 돼.’가 아니고 ‘아예 거기에 대해서 네가 몰라야 된다.’는 거지요.
그 선악과 과실을 아예 따먹지 말라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하지 마라가 최고의 창조물이라는 인간에게 이미 주어졌어요. 이 말은 뭡니까? 네 자리가 따로 있고 네가 그 경계선을 넘어서서는 안 되게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르도록 한 것이 원래부터 피조물을 만들 때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게 보기에 심히 좋은 거에요. 무식한 것이 제일 좋다는 거에요. 유식은 아버지와 나한테 맡기고 피조물은 아버지와 예수님만 아시는 유식함의 효과와 그 혜택만 입으면 되는 겁니다.
“몰랐는데 공짜로 많이 받네요.” 이런 식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 될 문제지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채로 오는 게 진짜 구원입니다. 왜? 그게 혜택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서 노동의 댓가로 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예상치 못한 혜택으로 받는게 영생이고 구원이에요. 포도원 비유에서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일꾼들의 하루 품삯입니다.
한 시간을 일해놓고 하루 품삯을 받는다면 그것은 누가 봐도 혜택이에요. 회사에 가서 6개월 일했는데 3년치 특근 수당을 받았다면 누가 봐도 혜택이에요. 그렇게 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요.
나쁜 짓만 했는데 천국 가는 티겟을 줬다면 이것은 혜택이잖아요. 그러면 그 혜택을 받은 것으로 우리가 이미 승인이 났지만 우리는 확인, 체험이 안 되잖아요. 그것을 확인, 체험하는 방법은 그 동안 나에게 의미가 있던 벽지를 뜯어내는 것밖에 없어요.
‘너는 존재지만 나는 행함이다. 너는 네가 존재함에 최종적으로 모든 의미를 두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그냥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가 된다.’ 실제(fact)가 돼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예를 들어보면 여기에 물컵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에요. 물컵에 물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무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컵이 있을 때에 주께서 물컵을 주신 메카니즘(과정)을 몰라요. 뭔가가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물컵을 아까 내가 들고 물을 따랐기 때문에 내 행동이 여기에 가미가 되어 있어요. 나의 존재 의미가 포함이 된 물컵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내가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너는 네가 하는 짓거리와 네 생각이 모두가 거짓말밖에 할 줄 모르는구나.”라고 통보해(일러)줄 때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누려야 되는 겁니다. “세상에 주님 아니면 원초적으로 이렇게 지적해줄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라고 해야 되는데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고백이고 보통 사람들은 “죽여버릴래.”라고 나오지요.
서로 좋은 의견을 끄집에 내서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고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아예 초장에 말을 막고 “네가 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이기 때문에 나는 네가 뭘 기대하든 그 기대에 반대로 나갈거야”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이 무슨 의논이 됩니까?
협상이 되어서 무슨 타협이 되고 좋은 관계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쪽에서 주님과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아까 제가 언급했습니다. 바로 진정한 창조의 중심에 십자가를 집어넣어야 됩니다.
의미 없는 창조 세계의 중심에다가 십자가를 일으키게 되면 그 십자가를 위해서 천지가 창조된 것이 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있는 그 모든 말씀은 결국 우리가 지키고 우리가 유지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느니라에 자료가 되고 근거가 되는 엮어진 거미줄 같은 말씀들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하나의 계시가 되고 예언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한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거에요. 이것이 뭐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들리기를 원합니다. 제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체험하려면 우리의 걱정이나 염려나 두려움, 공포, 불안, 죽음에 대한 기죽음, 이러한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오류요 죄가 되고 욕심이 되는 겁니다.
요번에 나온 「사사기 속의 그리스도」책에 보면 앞에 머리말 글이 하나 나와 있을 거에요. 예수 믿는 것도 물론 죄고 회개하는 것도 죄에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해서 그렇게 회개했더니만 그것도 죄에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행동하는 나와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는 나와 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일치되지 않아요. 합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이 옳다면 거기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주님께서 구원될 자를 찾아가서 그 속에 자신의 십자가를 심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 중심으로 보게 되고 그렇게 보다 보면 처음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관계로 그 십자가와 연결이 되겠지요. 십자가라는 것은 죽음이잖아요. 그 죽음의 의미는 로마서에 보면 “죄를 사하기 위한 희생제물”이지요.
그렇다면 십자가가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의 자체적인 존재의 의미는 날라가 버리고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돼요. 십자가에서 나온 의미가 뭐냐하면 우리는 죄인이라는 의미지요.
여기서 죄인이라는 것은 내가 행동으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나보다 먼저 선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행하는 창조의 중심인 십자가의 변두리에 있잖아요. 십자가에서 나온 그 관계가 도달되고 보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십자가가 오기 전에 먼저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언약을 먼저 줬잖아요. 그래서 모든 언약의 개념은 그 당시 사람들을 죄인 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론만 그러지 말고 실제로 있는 것을 제시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라고 한다면 제가 준비를 하지 않아도 56절에 나와 있네요.
56절을 한 번 봅시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아까 이론(방정식)을 거기에다가 적용시켜 봅시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나올 때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이었지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한 것은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이지요. 그 언약은 결국 마지막에 성취와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거에요. 북한의 항만이라든지 울산의 현대중공업에 보면 골리앗 크레인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을 전에 10년 전엔가 예로 든 적이 있어요.
골리앗 크레인이라는 것을 보면 도르레가 왔다갔다 하잖아요. 크레인을 하나만 그려보겠습니다. 이 밑에 무거운 쇳덩어리가 있으면 도르레에 붙은 자석을 가지고 이쪽으로 옮기고 저쪽으로 옮기고 하잖아요. 포항제철에 가면 있거든요.
그러면 크레인 시작인 창조부터 크레인의 마지막인 새언약까지를 언약이라고 하면 여기에 언약이 이동하잖아요. 그런데 언약 이동에 인간이 관여합니까 관여하지 않습니까? 언약의 이동은 인간이 관여를 못해요. 왜냐하면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을 이루신 분이 아들이잖아요. 예수님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관여를 못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간단한 논리에요. 아까 얘기했듯이 아버지도 숨어계시고 아버지를 아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니까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동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아브라함이 걸려든 거에요.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몰라도 괜찮아요. 왜? 본인이 생각하듯 자기 존재를 계속 끌고가면 안 됩니다. 자기 존재는 스톱이 되어야 돼요. 십자가에서 자기 존재는 끝나버렸어요.
아까 이론에 의하면 아브라함 속에 장차 올 주님의 새언약이 침투하잖아요. 또 다 잊어버렸습니까? 잊어버릴까봐 내가 걱정이 됩니다. 오류 속에 진리가 나오잖아요. 그래서 진리가 들어오는데 그 진리가 십자가를 닮은 거에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정받을 때가 언제입니까? 자기 아들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여서 제사를 드리지요. 로마서 4장에 보면 자기 아들을 바친 것 같은 믿음이 아니면 그것은 은혜(아브라함)의 계열로 받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믿음의 계열이 아니라고 했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데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똑같은 현상이 얼어나야 되는데 내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이 삽입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못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절대로 행함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본인의 행함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본인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말을 가지고 그러면 본인의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라고 하면 안 돼요. 출발점이 본인에게서 나오면 안 돼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존재를 긍정하게 되어 있어요. 끝까지 그 존재를 포기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할 때에 존재 속에다가 창조의 중심을 집어넣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아들만 알지 피조물은 몰라야 돼요.
선악과에 대해서 인간은 몰라야 돼요. 예를 들어봅시다. 물이 있는데 “이 물을 목사님, 먹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 “예, 안 먹을게요.” 말이야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도대체 내 존재가 어떤 존재이기에 이 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왜 내 존재에 담을 수 없을까?’ 이게 굉장히 기분 나쁘게 된 거에요.
인간은 가시적이라고 눈에 보이는 것인데 내 속에 포함이 안 된 영역이 눈앞에 있다는 것은 성질이 날 이야기입니다. 개한테 뼈다귀를 아예 안 보여주고 “개야, 뼈다귀 먹지마라.”라고 하면 말을 잘 들어요. 뭐 보이는 게 있어야지요.
일단 보여주고 먹지말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보여주지 말든지.. 지금 사람들이 선악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뭡니까? 그렇게 따먹어서 위험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위험한 시한폭탄같은 위험요소를 에덴동산 같은 좋은 동산에다가 집어넣었느냐 말이죠.
차라리 그걸 뽑아내버리면 정말 좋을 건데.. 제가 하는 말은 그게 바로 오류고 그게 왜 오류냐 하면 그게 자기 존재 중심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은 자기 존재 중심으로 다시 생각한 피조세계에요.
나를 편하게 하는 분이 좋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요건이 된다고 본 겁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듯이 하나님 좋고 나 좋고.. 사람들이 교회에 왜 갑니까? 자기 망치려고 교회에 가지를 않잖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이단이다 이거에요. 망치려고 가야 돼요.
나는 오류다. 나는 뭐를 해도 잘못이다. 그것 때문에 가야 돼요. 그런데 자기 존재를 건전하게 유지하려고 간다면 그 사람은 지금 절에 간 것입니다. 가봤자 소용 없는 거에요. 교회에 가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아, 교회에 가는 것도 죄구나.’ 이것을 알게 되어야 돼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가 있다. 그런데 아까 강의하기를 의미라는 것은 무의미(우리가 보기에, 의미 없는 곳)에서 나오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인간에게 전혀 보탬이 되지를 않습니다. 보탬이 안 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에요.
예수님이 괜히 휙 왔다가 휙 갔어요. “뭐가 온 거야? 뭐야 저거? 저 사람 뭐라고 그랬어? 웃기지도 않아. 죽여라.” 이야기가 이렇게 끝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한 때 과대망상증 환자도 아니고 뭔가 한 소리 하다가 대번에 잡혀서 사형당해가지고 가버렸어요. 끝났어요.
다시 예수를 거론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아무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그 의미 없음을 더욱 더 짓밟기 위해서 사울이라는 사람은 짓밟았고 본인이 하는 일은 옳고 정당한 것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그 계통이 바로 베냐민 계통으로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입니다.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배설물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자기가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내가 뒤돌아보니 살아온 모든 것이 오류요 더러운 배설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 본인이 그 일을 할 때는 절대로 이것은 가장 옳은 일을 하고 있지요. 나쁜(bad) 일이 아니고 좋은(good) 일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해도 “너는 만났으니까 좋았겠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똑같이 흉내내면은 우리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나귀 타고 한 번 핍박해볼까요? 그러면 혹시 예수님이 또 나타날지.. 그렇게 모방하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안 되는 거에요.
왜 안 됩니까? 주께서 그렇게 묻지 말라는 거에요. “네가 꼭 구원 되어야 될 이유가 뭐지?” 너희들이 보기에 무의미에서 의미가 나왔다면 이 말의 의미는 너희들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일한 의미는 주께서 우리를 하나둘씩 무의미한 존재로 쳐내는 거에요.
정글 같은 데 갈 때 길이 막혀 있으면 앞에 가는 사람이 잡초를 하나둘씩 쳐내잖아요. 주께서 우리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쳐내는 거에요. 의미 있는 것들을 말이죠. 애 넷 난 것도 의미 없다고 쳐내고 전부 다 쳐내는 거에요.
결국 마지막 남은 이것마저 쳐내지요. 그게 아브라함이라 이 말이죠. 아브라함의 마지막 사랑하는 자가 누굽니까? 자기 아내 아니었죠. 말년에 얻었던, 그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얻었던, 그것도 천사가 와서 예언했던 그 아들마저 무의미한 세계로 가야되는데 이것은 아들 문제입니까 자기의 문제입니까?
자기의 해석 문제이지요. 나라는 존재가 그냥 나라는 것으로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해석이 무한까지 미치는 거에요. 나는 여기에 있는데 저 은하계 너머까지 생각할 정도로 나의 무한은 넓게 퍼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무한을 가지고 하나님도 포섭하고 천국도 그 안에다가 집어넣고 예수님도 그 안에 세워넣고 거기에다가 요한계시록까지 다 품고. 그 무한의 지평에.. 무한의 넓은 평지에다가 온갖 좋은 것을 다 담는 거에요.
그런데 그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나는 의미있다. 나는 의미 있는 존재다. 그게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한은 초월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무한은 초월을 못 따라갑니다. 사고(생각)실험을 해볼 수 있는데요.
여기 지평선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지평선을 바라보고 한 사람이 서 있다고 하면 지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지요. 그리고 지평선과 서 있는 사람의 거리가 5km인 지점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지점에 가보세요.
하늘이 어디 있습니까? 맞닿았습니까? 붕 떠가지고 있는데요. 아무리 무한을 많이 가져도 아무리 오래 살아도 100세 인생이 뭡니까 100세 이상 살아도 지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상황입니까 이 상황이..
사람이 좋을 때는 과거 때문에 기뻐요. 과거에 ‘주여 꼭 이것만 이루어주옵소서.’ 하고 과거의 누적된 기대감, 소망, 희망.. 그것이 꽉 차있어 가지고 그것 때문에 마치 변비가 나아서 기쁜 것같이 기쁘지만 그 기쁜 순간은 며칠 가지 않습니다.
당연히 원래부터 이렇게 되어야 되는 걸로 생각되면서 그 기쁨은 날아가 버리고 새로운 희망이 또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희망 때문에 지금은 별로 시시해보이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 감격도 ‘원래 그래야 되는데 뭐.’ 하면서 마치 자기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너희는 알지 못한다”라고 할 때에 이게 우리의 실력이나 기도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원래 그래야 된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수를 보고도 몰라요. 그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미도 없으면서 의미 있는 척을 하기 때문에 진짜 의미 있는 분이 내뱉는 의미가 뭘로 가려지냐 하면 무의미한 내가 자꾸 예수님을 평가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 버린 겁니다.
왜 그렇게 하려고 합니까? 우리는 내 존재의 지평을 확장하려고 하기 때문에.. 내 영역과 영향력을 넓혀가기 때문에.. 나는 누구하고 안다. 나는 누구하고 친구다. 자꾸 넓히려고 해요. 여러분 갓난애가 자살하는 것 봤습니까?
갓난애는 자살을 해요 안 해요? 이게 나야 라는 망상이 생길 때부터 자살이 이루어져요. 그걸 거울단계라고 합니다. 일방적으로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경직된 거에요. 고정된 것이고요.
남자분보다 여자분들이 아침에 더 많이 볼 텐데 거울을 보고 난 뒤에 거울에 본 내 모습 있지요? 그런데 출근한다고 나설 때 돌아서면 이미 거울의 모습하고 모습이 달라요. 왜냐하면 그 자기의 모습이 아까 5초 전에 봤던 모습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달라요.
인간은 늘 스스로 변화하거든요. 이것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달라져요. 그래서 연초가 되면 ‘내가 언제 이렇게 늙었지?’ 안 늙는 순간이 없이 째깍째깍 늘 달라지고 있는데 마치 처음에 괜찮게 본 그 이미지를 자기의 고정된 이미지로 확장하다 보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아닌 줄로 오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더 나쁜 점은 내가 나라고 여겼던 그 지점에서 타인이나 친구나 친척들, 남편이나 아내를 평가했던 그 평가를 계속 쥐고 있는 거에요. 상대방이 늘 달라져도 “너 요즘 많이 변했대이?”라고 자기 혼자 일방적으로 생각해요.
속으로 ‘너는 안 변한 줄 아나?’라고 하지만 “너 왜 이리 변했어? 시집 올 때는 안 그랬는데 왜 그래? 하루 세 끼 밥 다해주더니 왜 요즘은 밥 하기 싫다고.. 변했나?” “너는 안 변했나? 네가 시집 와서 밥 맛있다고 그런 소리 안 했어? 이제 와서 바빠서 밥 안 해주는 것 가지고 밥 세 끼 안 차려준다고.. 너는 안 변했어?”
그런데 변한다는 말은 사실은 정답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변한다는 정답을 삼으려면 어떻게 변해가고 있으며 거기에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되는데 변하기만 하고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다시 말해서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모른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이 맞네요. “너는 너를 모른다.” 주제 파악이라는 주제를 했잖아요. 주제 파악을 해야 되는지를 아는데 주제 파악이 영원히 안 돼요.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존재로 보지 않고 기능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고정된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변하는 내 존재는 십자가까지 와가지고 거기에서 죽어줘야 돼요.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는 언약의 완성이 마중을 나옵니다. 요나서 2장을 한 번 보고 첫째 시간을 마칩시다. 요나 1장 12절을 어제 수요일날 이야기했지요.
나를 던져서 나 하나 죽고 너희들이 살아라 그렇게 되면 배에 승선한 사람들은 요나가 죽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죽었고. 2장에 봅시다. 요나가 물속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물고기가 기다렸지요.
요나가 뛰어들기 전에 이것을 알아챘어요 못 알아챘어요? 미리 알고 걱정 안 하거나 하지 않았지요. 그러면 요나의 입장은 죽은 거지요. 그런데 요나의 입장은 죽었는데 살았다가 아니라 2장 2절에 보면 “스올의 뱃속”이지요.
이 말은 죽음 그 이후에 죽음보다 더 깊은 죽음이지요. 이것은 배에 승선한 사람은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요나가 도망치면서 알던 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살려내는데 살려내시는 이유는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있는 요나와 본인이 본인을 책임지는 요나가 달라요.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기 전에 내가 끼어들 필요가 뭐있어? 나는 놀러 가야지, 휴가나 갈란다 하고 다시스로 도망치는 그 요나는 요나 스스로의 존재 지평 안에 있는 본인이 중심이 되어 있는 요나입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납치당해서 경험하고 싶지도 않은 죽음의 세계를 이 요나로 경험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마중나와서 그런 거에요. 본인이 나 음부 한 번 구경해보고 싶어. 라고 해서 물에 들어간 것이 아니에요.
언약이 마중나온 세계는 나의 의미가 종식(단절)된 세계입니다. 손털어버려야 돼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세계에요. 요나는 물속에 들어가봤지만 우리는 성령 속에서 이것을 경험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주께서 언약의 칼질을 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의미있는 것을 다 털어내는 그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의미. 오늘 좋은 옷 입었다. 가락 모임에서 누구 만나면 하얀 털옷 입었다고 자랑해야지 라고 하는데 낙지볶음이 묻어서 그 의미가 날아간 거죠.
하여튼 이상하게 내가 조금이라도 꿈꾼 것은 이상하게 다 실패로 끝나게 해주시는 이 고마우신 분, 하나님. 그렇다고 꿈이 안 생깁니까? 그래도 계속 튀어나오는 소망. 나오는 족족 야무지게 다 꺾어주시는 고마움. 하여튼 내 뜻대로 절대로 되지 않도록 꺾어주세요.
‘그럴 것 같으면 나 아무것도 안 할래.’ 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 하게도 못 하게 또 꺾어주십니다. 아무것도 아 하려고 하면 또 하게 하시고 해볼까? 라고 하면 또 쉬라고 하십니다.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가 없어요.
그럴 때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절로 실현되는 겁니다. 이걸 미리 알아버리면 내 존재가 해석해서 내 미래상을 내가 미리 꾸며내요. ‘내가 은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주께서 얼마나 아름다운 미래를 보장할까?’라고 되어 버리는데요.
그래서 말씀대로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교회에다가 돈도 사랑하지 않고 재물을 바치면 주께서 얼마나 더 많은 돈으로 채워주실까 이것은 돈 놓고 돈 먹기지 이것은 진짜 꼼수거든요. 전부 다 꺾어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만드는 당사자가 보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56절에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보기를 원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세계, 예수님의 영역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죽어서 가보니까 자기가 간 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왜? 자기는 피조물이라는 영역을 못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라는 영역 속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피조물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심(핵)으로 꽂혀있었던 겁니다. 그게 에덴 동산에서는 선악과 나무(과실)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아무 일이 없었으면 주님은 살아계시지 않는 거에요. 따먹어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될 때 진짜 에덴 동산에도 주님이 계셨음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아담은 추방되면서 십자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은 꼬꾸라져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했던 나의 존재의 바탕에서 내가 무의미한 바탕으로 추방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반으로 해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을 반석으로 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일생을 헛살은 거에요. 마지막 심판 날에 껍데기를 벗길 때 인간은 심판의 형태로 허무하게 드러날 거에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자기의 바탕을 미리 당겨서 성령께서 십자가를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와 관련이 있는 그런 피조물로서 이미 구원 받은 영역에 속했음을 통보해주죠.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요한복음 8장 55절.hwp (60.5K), Down: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