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행 13:1-5 (전도 일꾼)
52. 행 13:1-5 (전도 일꾼)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52. 행 13:1-5 (전도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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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 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행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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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라 !!
만약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의 직업을 모두 포기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라고 성령께서 당부를 하셨다고 하면, 그러면 일단 우리는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좋을까요? 나쁠까요?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을 떠나서, 그것을 한 마디로 허황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이 세상의 모든 직업에는 반드시 서로 간에 계약서가 있는데, 일류 대기업에 다니든 공장에 다니던 그 어디에 다니든지 다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회사에 나가면 사무실에 컴퓨터가 있고, 출퇴근을 하는 시간도 정해져있고, 또한 연봉도 나름 정해져있고 말이죠. 그래서 자기가 일을 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위임식을 하면 노회에서 파송된 목사들이 와서는 교인들에게 다짐을 시키는데, 위임을 받는 목사에서는 대우를 어떻게 해주고 어쩌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목사로 하여금 직장을 든든한 것을 잘 골랐다고 하는, 그런 눈에 보이는 직업의식을 가지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것도 전혀 없이 그냥 "너는 지금부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라"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의식이 드는고 하니, "봐라. 나도 직업이 있어. 노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라는 생각보다는, " 그래, 나는 백수다. 이제 내 인생을 끝났어" 라고 하는 암담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절망감이 든다는 말이죠.
모두가 같은 일인데, 그런데 이 세상일은 번듯하고 광이 나고, 그래서 자기 자식이 취직이 되었다고 하면서 부모가 기뻐하는데, 그런데 주님의 일을 맡은 사람은 마치 죄를 지은 죄수처럼, 그 누구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입장이 되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하는 일의 내용에 있는데, 요한계시록 2장 7절에도 나오듯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연봉을 체결해서 일하는 것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는 겁니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이 세상에서는 상대방을 평가할 때, "당신 집에는 돈이 얼마나 있어?" 라고 해서, "우리 집에는 돈이 없어"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런 대답을 하면서 기가 죽고 만다는 말이죠.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당신 집에는 돈이 얼마나 있어?" 라고 해서, "우리 집에는 돈이 없어" 라고 하면, 그것은 단지 돈이 없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됩니까? 이 세상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당신은 이제 끝났어. 당신은 실패한 인생이야" 라고 하는 의미인데, 그런데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없는 순간이 와도, 그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돈이 없는 순간일 뿐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보고 "당신 손수건이 있어?" 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조금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보고 "에이, 그러면 죽어라"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단지 그 사람은 그 순간에 손수건이 없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냥, 돈이 없을 뿐 !!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없다는 것은 실패하고 끝난 인생이 아니라, 그냥 돈이 없는 순간에 불과한데,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오직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들려지는 복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에게도 들려지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주고 받는 가운데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들려지는, 무슨 그런 것이 다 있느냐고 한다면, 두루 두루 다 알아야 진리이고 좋은 것인데 말이죠. 그런데 왜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들려지도록, 그렇게 제한적이고 특정인에게 국한되어있느냐고 하신다면, 그런 것이 불만일 수 있다는 겁니다.
전도자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가 지금 사도행전을 보고 있는데, 이 사도행전은 전도자에 대해서, 즉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알 수 없는데, 다만 4절에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그렇게 해서 떠났다는 말이죠.
(행 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그것만 우리가 알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그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한지,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을 그냥 모른다고 하면서 지나갈 수는 없는데, 성령은 예수님의 영인데,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이야기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령, 즉 예수님의 영이 들어온 것이니,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가짐이 들어왔다고 보면 되겠죠. 즉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마음가짐이 없었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마음가짐이 새로 생겼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의 마음가짐이 새로 생겼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런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라고 당부한 것들이 거기에 가득하다는 겁니다. 특히 "전도자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 당부하신 것이 그냥 말씀을 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당부하신 말씀이 이제는 마음가짐 자체로 변해서, 이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으로서 전도자의 마음에 도착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가짐 !!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전도자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전도를 하라고 하셨는고 하니, 그 중의 하나를 살펴보면, 마태복음 10장 39절에 보면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러니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는 복음의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도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전도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 목숨에 연연한다고 하면, 그것은 전도자로서 합당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아니,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따로 떼 놓고 전도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 말이 맞아요. 누가 봐도 그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라는 겁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것은 안 돼. 너무 무리한 것이야" 라고 하던 것이, "내 목숨까지 내어놓고 전도한 것은 말이 안 돼" 라고 했던 자기의 마음이 어떻게 바뀌는고 하니까, 예수님이 당부하셨던 전도자의 마음으로 바뀐 채로 성령에 의해서 세움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하는 전도자인 사도바울의 경우에, 그가 에베소서 6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18절에서 2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엡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엡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는 복음에 묶인 자입니다 !!
사도바울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달라고 하는데,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라고, 자기가 그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 일을 위해서 쇠사슬에 매여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이 어떻게 보면 참 부럽기도 하고, 또한 안타깝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자기의 각오나 결심, 혹은 목사나 교인들에게 자기가 전도를 잘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흉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진정 단호한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혹은 심란한 마음으로, "여러분,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나는 복음에 묶인 자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오직 성령을 받은 자 말고는 없다는 말이죠.
그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이라는 말이죠. 그가 성령을 충만을 받아서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지려고 하는데도 자기 할 소리를 다하고, 결국은 그 돌에 맞아서 즉사했고, 그 즉시 주님께서 스데반 집사의 영혼을 받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갔다는 겁니다. 그게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말이죠.
교인들에게 이런 성경말씀의 내용을 이야기하면 겁부터 내는데, 그것은 모르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인데, 교인들이 바라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서 추가적으로 그 다음에는 무엇을 얻겠느냐고 하는, 즉 주님의 사랑자체보다도, 그것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이 세상 것을 은근히 기대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바라면서 어려움이 와도 참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주님의 사랑이 밥 먹여 줘요 !!
하지만 성령을 받은 스데반 집사나 사도바울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환경 가운데서라도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좋아서, 그 자체를 복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즉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그 무엇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너무 좋아서, 그래서 황홀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이 일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누가 감히 이 일을 하겠는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감당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사도바울은 복음에 매인 몸으로서 로마에도 가고, 또한 그 어두운 지하감옥에도 갇히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걱정을 하지만, 반면에 당사자들은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도 역시 그러한데,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편안하게 잠들어있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만 걱정이 되어서 기도가 늘어진다는 말이죠. 다니엘의 경우에도, 정작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사자들과 함께 느긋하게 지내고 있고, 오히려 그를 집어넣은 왕은 걱정이 되어서 다니엘의 안부를 묻고 난리를 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게 되면 보상이나 대가와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데, 이미 사랑을 받은 것 자체로서, 그것을 전부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아하, 주께서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해주셨구나" 라고 하면서, 그런 주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로 인해서, 거기에서 헤엄치기에 바쁘지, "제가 주님을 사랑했으니 그만한 대가를 주세요"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로 뭔가 챙기려고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는 것이,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 귀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가 귀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하필이면 되도 않는 귀를 가지 나에게 복음에 들려지고, 그게 고분고분 믿어지고 알아지고, 넘치도록 깨닫도록 해주셨는데, 그것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예정론' !!
그래서 사도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와 같은 글들을 보게 되면, 근본적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예정론' 이라는 겁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만 복음이 들려지도록 되어있지, 택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귀가 아무리 많이 붙어있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그런 귀한 하나님의 계시가 바로 복음이다" 라는 것을 단호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복음을 알아서 좋고, 그래서 기쁜 것도 참 좋고, 주님의 사랑을 알아서 정말로 좋은데, 그런데 왜 그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아야만 하느냐는 겁니다. 좋으면 좋게 전하면 되는데 말이죠. 그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심적인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죠.
전도를 하는데, 왜 목숨까지 필요한가?
다시 말해서, "우리도 기쁨이 넘치면 가끔 전도도 하고 하는데,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어떻게 전도자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만 하는, 그런 극단적인, 또가 아니면 모라는 식으로, 그런 이야기를 주님을 위해서 전도를 하겠다는 자들에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라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라고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기쁘게 열심히 전도를 하면 되는 것이지, 꼭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합니까?" 라는 겁니다. 즉 전도를 하는 것과 목숨을 내놓는 것, 그 연결고리가 제대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은 왜 그런고 하니까, '전도(傳道)' 라고 했을 때, 그 '도(道)'가 이미 사람들에게 통용되고 있는, 혹은 사람들에게 납득되는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道)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께서 알고 있는 이 도(道) 때문에, 이 진리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목숨을 빼앗겼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그 귀한 말씀을 담으려고 하실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는 말씀뿐만 아니라, 방금 이야기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라고 하는 말씀도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라" 라는 말씀도 역시 추가할 수 있고, 그리고 "여행을 위해서 주머니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뭔가 떨쳐버리고, 사람에게는 전혀 의존하지 말라는 식으로, 그렇게 전도자를 몰고 가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마 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마 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마 10: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마 10: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마 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 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전도자로 세웠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부흥을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닌데, 오히려 그런 교회가 전도를 막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를 전도하는데 무슨 목숨이 필요합니까? 그냥 띠만 있으면 되고 전도지만 있으면 되는데 말이죠. 추가적으로 대일밴드, 이쑤시개, 과자, 사탕 등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전도가, 마태복음 10장과 11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 목사님은 설교를 잘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넘칩니다" 라고 하는데, 거기에 굳이 목숨까지 내놓을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 라는 말씀을 하실 이유가 없고, 그리고 "인자는 머리를 둘 곳이 없다" 라고 하실 이유도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꼭 전해라. 알았지?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진짜 제대로 된 복음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야 하는데, 정말로 성령께서 "이것은 꼭 전해라. 알았지? 이것만은 전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을 말이죠.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정답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지금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런 것은 다 우리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지하려고 하는 우리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바로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또한 우리로 인해서 구원받을 자에게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전도를 할 때 "우리 교회에 나오면 재미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우리 교회에 나오면 지금 죽어도 괜찮습니다. 오늘밤에 낙원에 갑니다" 라고 죽음을 섞어서, 즉 "너와 나의 목숨을 섞어서 이야기하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에 종사하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인간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너와 나의 목숨을 바꾸자 !!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당신은 우리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연봉은 2,600입니다" 라고 하면 말이 되는데, 그런데 "당신은 우리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목숨을 내놓으세요" 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무슨 드라큐라 회사에 들어갔습니까? 자기 목숨을 내어놓게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바로 그것인데, 즉 교체라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니가 가지고 있는 목숨으로 아등바등 살았는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마련되어있다. 그러니 니 목숨을 내놓아도 괜찮다" 라고 하면서 마치 폐건전지를 회수하듯이 회수한다는 겁니다. 즉 "너의 목숨을 회수해서, 그 자리에 주님의 목숨을 넣겠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서 "이제 나가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가게 되면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인데,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는, 그것을 전도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고린도후서 6장의 말씀을 보겠는데, 제가 이 말씀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르는데, 보면서 두 가지가 걱정이 되었어요. 먼저 이 내용이 무엇인지가 걱정이고, 그리고 이것을 설교하면 교인들이 얼마나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지, 그게 걱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걱정거리를 살펴보겠는데, 14절에서 18절입니다.
(고후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후 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고후 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
여기 14절에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저는 방금 읽은 이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신학교에 가기 전에도 많이 보았고, 또한 목사가 되고 나서도 많이 읽어보았는데, 그러면서 조금 전에 말한 두 가지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의미와, 그것으로 인한 교인들의 스트레스가 걱정이 되었다는 말이죠.
우리가 사회에 나가면 동창회도 있고 계모임도 많이 있는데, 불신자와 동업을 할 수도 있고, 그리고 결혼문제도 걸린다는 말이죠. 도대체 사회생활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차라리 이 본문말씀을 보지 않았다고 하면, 마음놓고 동업을 해서 십일조라도 많이 할텐데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것이 용납되지 않는데, 여기 16절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라고 하니 말이죠. 심지어 고린도전서 3장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얼마나 무서우냐는 겁니다. 그런 놈은 그만 죽여버리겠다는 것인데, 겁이 나지 않습니까?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령을 받은 자의 자유함 !!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누구를 통해서 했습니까?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셨는데, 지금 사도바울이 어떤 심정인고 하니, 성령으로 인해서 입이 벙긋벙긋한다는 겁니다. "왜 너희들은 나처럼 전도를 하지 않아?" 라고 하면서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즐거움과 자유로움으로,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져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처럼 성령이 있는 자는 불신자와 사귀라고 해도 사귀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고린도후서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가서 살까?" 라고 하니, 사도바울은 "그것은 아니야. 상대방이 거부하지 않을 때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태도 다음과 같은데, 즉 이 세상에서 돈이 좀 있고 권세를 부리는 자를 봐도, "웃기지 마라" 라고 하면서 하찮게 본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유함이라는 것이죠.
성령을 받지도 않은 목사가 협박해도 겁을 먹지 말고, "당신이 그러고도 목사야?" 라고 하면 되는데, 왜 그런 자유함이 없느냐는 말이죠. 물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지만, 성령을 받게 되면 "그래, 100평짜리 아파트에서 헤엄을 쳐라. 나는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이야"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 푸근함으로 살면 된다는 말이죠.
갈 테면 가라 !!
그러니 믿지 않는 자와 결혼도 할 수 있는데, 그리고 갈라설 수도 있다는 겁니다. 불신자와의 결혼을 부추기는 것 같은데(ㅋㅋ), 즉 모든 것을 함에 있어서 자유함으로 하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입장에서 말이죠. 그러니 "불신자야, 좀 놀아 줘" 라고 할 필요가 없는데, "갈 테면 가라. 그게 아니고 좋으면 사귀자"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 자유함,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의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그런 것에 주눅들지 않고 또한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을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면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감히 자유롭게 외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주신 놀라운 영생, 그것은 우리가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은 놀라운 선물인 줄 압니다. 얼마나 그 영생이 귀한지, 우리의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전혀 손해볼 것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런 귀한 것을 주셨으니, 이 세상에 휩쓸리거나 질식을 당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성령을 받은 자들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01,02 정리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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