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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7강)자유게시판요한계시록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7강)

이름 : 서경수(IP:175.215.227.136)

2016 겨울수련회 제 7강(요란한 정숙)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해서, 예수님 죽음에 대해 모든 인간이 다 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보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분이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닙니다.

9절에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린양이 되심으로, 이제는 누구도 그 사람을 건져냄에 있어서 토 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 저 인간은 안 됩니다. 정말 말썽꾸러기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뽑힌 자들이 누군가? 24 장로들입니다.

12절에 보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합니다. 헨델의 [메시아] 가사에 이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합당하도다.’라고 해도 이것은 자기들 이야기에요.

만약 여러분들이 저에게 ‘요한계시록을 쉽게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거예요. ‘극장(영화관) 안에서는 활극이 벌어져도 바깥에는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란하게 떠들면 떠들수록 바깥은 고요해요. 그래서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을 ‘고요한 정숙’으로 붙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아무리 난리가 난다고 해도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가끔 중국에서 황사가 날아올 뿐입니다. 영화관 속에서 자기들끼리 난리를 칩니다. 바깥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갈수록 더 심화됩니다. 마귀가 체포되고 유황불에 들어가는데도 조용해요. 아무 일 없습니다.

왜 그런가? 홀로 일찍 죽임을 당하신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담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몰라도 돼.’ 그들은 무지의 결과로 무심코 찬성표를 던졌는데 그 결과 예수님이 사형 당했습니다. 예수님 죽이는데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삶이 충실하고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특별히 문제성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별 문제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면 사람들은 “아, 옛날에 예수라는 사람이 설치다가 죽었지.” 이것으로 끝나요.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감춰진 책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해 못하는 책입니다.

일곱 인을 떼는데 굉장히 요란합니다. 상영관 안에서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방법은, ‘자기들끼리 시끄럽고 바깥은 조용하다.’ 그러면 해석이 끝나는 겁니다. 왜냐? 일찍 죽임을 당할 때 눈치 못 채고 죽인 그 취지가 계속 살아있어야만 어린양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죽었다고 누가 호응해주면 그 사람은 주님 바라보지 않아요. “예수 믿어도 인기를 끌 수 있네.” 이렇게 되어 세상적인 인정과 평가에 편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일수록 세상이 조용한 것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 합치된다고 고마워합니다. 우리 주님 돌아가실 때도 이처럼 고요했을 것이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없었지요.

사도가 요한계시록을 외치면 굉장히 시끄러울 것 같지만 사실은 조용합니다. 예수님이 유명인사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도 유명 인사가 아니에요. 성경에서만 떠들지 다른 곳에서는 떠들지 않습니다.

6장 10절에 보면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라고 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이방인 부류와 구원되기로 작정된 이스라엘과의 차이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고요한 세계에 편성해서 같이 살면 되는데 그들은 어린양과 결부되어 있기에 이 세상에서 못살겠다고 탄원하고 있는 겁니다.

희한한 사람들이지요? 그냥 밥이나 먹고 살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심판해달라고 탄원을 합니까? 이들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특이한 존재로 분류되어 구원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별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종결되어 있어요. 유리알 속에 박혀 있는 고정된 물체처럼. 그리고 15절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유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 위에 산이 무너져 덮쳐지는 상황입니다. 어린 양의 진노가 두려워서 차라리 산과 바위 밑에 깔리는 것이 낫겠다는 것입니다. [You rise me up] 이란 노래는 반대로 되어 있어요. 주께서 나를 산 위에 세우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박살납니다. 산 위에 갔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이르기 전까지 그들은 고요할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7장 13절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이 대화가 이상해요. 알면 미리 이야기를 하지, 모르는 척하면서 물어서 누구를 시험하는 겁니까?

이 사람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다 알면서 묻고 대답하게 하는 것은 이미 가있는 그들과 지금 가는 사람이 같은 부류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겁니다.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아는 것, 꼭 말로 해야 압니까? 자기들끼리는 다 아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묻고 답하면서 자기들끼리 신이 났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평안히 살고 있습니다. 과연 평안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곱 인을 뗄 때마다 한바탕 난리가 나지요. 일곱은 마치 저고리에 단추가 나란히 달린 것처럼 7개의 파라핀 도장으로 일단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후크 따듯이 하나씩 떼면 말씀을 봉인한 힘이 자연세계를 찢는 힘으로 발산되면서 작용합니다. 저는 이것을 통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우선 자연세계는 큰 원통의 형식으로 일단 표현됩니다. 말씀 안의 자연세계이지요. 일곱 인을 하나씩 뗄 때마다 조금씩 자연의 힘이 해체됩니다. 이런 식으로 1, 2, 3, 4, 5, 6, 7이 진행됩니다. 일곱 번째 봉인해제 작업에서 하나의 작은 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일곱 나팔이 나옵니다. 말씀과 자연이 서로 전쟁 중인데 그 와중에 전쟁의 진정한 본질을 향해 천사는 움직입니다. 그 작은 통의 내막이 1, 2, 3, 4, 5, 6, 7이라는 나팔 부는 방식으로 공개됩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나팔에서 더 작은 통을 하나 그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곱 대접이 순차적으로 자연세계에 퍼붓게 됩니다. 이렇듯 일곱 인은 말씀의 주이신 예수님과 그동안 자연세계를 지배한 숨겨진 배후세력간의 ‘전쟁의 통보’를 말해주는 것이고 일곱 나팔은 ‘전쟁의 경과’를 말해주는 것이고, 일곱 대접은 ‘전쟁의 마감’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새롭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만 아는 것입니다. 묵시적 존재만 이런 질서가 이 세상에 박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사건들입니다. 옛날에 한 사람이 설치다가 사형 당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어떤 거질말쟁이들은 그분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데 별로 믿을만한 근거도 없어요.

핍박당하는 것과 아무 일 없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기분 좋습니까? 핍박당하는 것이 좋아요. 아무 일 없으면 신자 아닌 것 같아요. 꼭 무시당하는 것 같고. 신앙인답게 순교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때 찐맛없다(‘재미가 없다’의 경상도 사투리)고 하지요.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든지 반응을 나타내 줘야 복음 전하는 재미가 납니다. 그러나 무반응이면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을 우리가 견뎌내야 합니다. “내가 복음으로 설치는 것은 복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는 너보다 수가 높다고 자랑하는 또 하나의 육적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구나.”하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왜 통이 점점 작아지는가? 통이 작아질수록 심판의 전리품, 결과가 막간의 창고에 그대로 쌓여 마지막 일곱 대접에 이르면 마귀의 정체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드러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전 인민들이 가담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도 된 사람들도 가담한 사건임이 드러나지요. 따라서 전부 한 패거리입니다.

한패니까 문제 될 것이 없지요. 시끄러울 게 없어요. 다 소통이 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개무시 하자.’ 이 점에 대해서 서로 의견 투합이 되니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도 된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붙잡혀서 천국은 어린양의 피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 이 고요함에서 벗어나고자 그들은 신원하는 겁니다. “주여, 이 가슴 아픔을 빨리 해소시켜 주시옵소서. 못 살겠습니다.”

8장 10절에 보면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고 했는데, 그러면 하늘의 별이 떨어져서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늘을 보면 멀쩡합니다. 아직 때가 안 된 것입니까?

묵시 세계에서는 그렇게 봐요. 별이 있어도 떨어진 것으로 봅니다. 묵시 세계에서는 자연을 볼 때 묵시적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역사적 주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단어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냐? 묵시적 언어로 포장된 역사적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역사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역사적 인식으로 접근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 해석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는 굳이 해석을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묵시적 해석은 이미 해석된 것이기 때문에 해석할 필요가 없고, 또 해석을 하면 이것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 묵시의 일은 인간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천사들이 실천하기 때문에 우리가 설치면 안 됩니다. 실천할 수 없는데 해석은 왜 합니까? 그리니 우리는 천사가 하는 것을 믿음으로 지켜보면 됩니다.

해석 쉽지요? 천사가 한다니까요. 우리가 해야 한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해석을 해야 하는데 어차피 이것은 우리가 손 댈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는 역사적 언어에요. 그래서 우리 언어는 묵시적 언어에 합치되지 않습니다.

묵시적 용어가 뭔가? 묵시적 용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용어를 은유로 바꾼 거예요. 왜 은유로 바꾸는가 하면, 모든 인간들의 언어 이해가 예수님 죽음에 가담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전부 하나의 마음으로 일관했습니다. 따라서 그 세계에서의 묵시는 숨어있는 것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나서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제가 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들의 몫이네요.”하고 넘겨주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본문의 단어 하나하나 확인 작업에 나서야 합니다. “바다 생물의 1/3이 죽었다는데 정말로 바다에 고기가 줄었는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다의 고기는 전혀 줄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제가 대개를 좋아하는데 이것이 줄면 값이 폭등할 텐데 대개가 줄지 않았어요.

8장 12절에 보면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은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라고 했는데, 이 삼분의 일 이야기는 이미 에스겔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의 삼분의 일 예언이 무엇인가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을 찐빵 쪼개듯이 쪼개기 위해서 그 말을 했어요.

그러니 이렇게 보면 됩니다. 온 인류에 일어날 일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먼저 시범으로 삼분의 일을 작살 낸 겁니다. 바벨론 군대를 이용해서. 이 사건이 역사에서 묵시로 바뀝니다. 역사를 묵시로 바꾼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복수하라.”고 해도 복수할 자격자가 없습니다. 왜냐? 이스라엘마저 메시아를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이방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담했는데 감히 누가 남을 심판할 자격이 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는데 아무도 칠 수가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문서 선지자 에스겔이 예언한 것은 절대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이뤄집니다. 이루되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이루는 것이 아니고 묵시적으로 고요한 중에 이뤄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묵시적으로 가서 그것을 확인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럴 필요 없어요. 묵시적인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 날 구원했다는 그 관계성을 갈수록 또렷하게 드러내게 되면 고요하든지 요란하든지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활동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굉장히 소란하고 많은 일어 벌어지지요. 그런데 사실은 굉장히 조용해요. 신문의 가십거리도 안 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성령의 인도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다가 병거를 타고 가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납니다(행8:26-31). 만나보니 그가 성경을 읽고 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빌립에게 물었고, 빌립은 선지자의 글을 해석해 주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통상적으로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안부를 묻고 행선지를 묻는 것이 상식인데 이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낯선 사람 둘이 만나서 선지자가 예언한 인물이 누구인지 묻고 답하는 이런 희한한 대화가 오고갑니다. 빌립의 답변은 내시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내시는 물이 있어서 그 물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작별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당시 신문에 소개되었습니까? 이것이 화재가 될 만한 사건입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난리가 났어요. 자기 백성이 돌아왔다고. 그러나 땅에서는 조용합니다. 사막에 먼저나 일으키고 끝나는 사건이었어요. 왜 모든 성경 내용을 내가 직접 확인해 보기를 내심 원하고 있습니까? 그건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당시에는 잠깐 유명했지 돌아가신 후에는 잊혀진 인물이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요란스럽게 떠드는 것은 전부 가짜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에게는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방적으로 묵시를 천사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마이크 들고 독수리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까, 까’이런 소리를 내지 ‘화, 화’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세상에서 확인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건 믿음이 없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죽임 당했습니까?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에 떠나갔고 제자들마저 떠나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벌어 살기 바쁜데 언제 예수님을 찾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니까 삭게오처럼 돈보다 어린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묵시적 존재로 전환된 그들끼리의 이야기입니다. 환란은 얻어맞고 터지고 망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환란은 노래방에 갔는데 노래 점수가 낮게 나오는 것, 강의 전에 내용을 다 암기했는데 막상 강의를 하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 차를 몰고 가는데 네비게이션이 알려주지도 않는 지점에 카메라가 있어 과속으로 걸린 것 이 모두가 환란입니다.

이런 일들이 왜 환란입니까? “아, 짜증난다. 빨리 이 세상을 떠나야지!” 이게 바로 복음이잖아요. “세상 더러워서 못살겠다.” 이게 복음이라니까요. 아내가 식사를 차렸는데 밥상이 어제와 똑같아요. 그래서 짜증이 나서 “내가 빨리 죽어야지.” 그게 복음이에요. 유난 떨지 마세요. 멋있고 나를 돋보이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기대하지 마세요. 다 마귀의 시험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주님을 무시하고 죽이는데 가담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오히려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고 감사해야지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아무도 곁에 없는 외톨이였습니다.

9장에도 보면 황충이 나오고 황당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메뚜기 이야기예요. 예레미야에서는 메뚜기인데 계시록에서는 황충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한미 합동 훈련하는 것 같아요.

잡곡 강정은 잡곡이 무작위로 섞여 있기 때문에 이 단어와 저 단어가 연결이 안 됩니다. 하지만 묵시 세계에서는 다 연결이 돼요. 어떤 식으로 연결 되는가? 그것은 몰라도 결과는 동일해요.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의 피로 우리가 흰옷을 입게 되었다.’ 이것만 나오면 됩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세세히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9장 14절을 보면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는 말씀이 있는데, 천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놓여 풀려났는지 어떻게 확인합니까? 15절에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고 했는데, 예사로 사람을 막 죽입니다.

16절에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고 했는데 이것이 뭔가 하면, 불신자들이 무저갱에서 나와서 자기들끼리 싸운다는 거예요. 묵시 세계에서는 이렇게 요란스럽게 이야기를 하지만 이 세상은 고요합니다. 이란과 이라크가 외교를 단절하고 싸워도 시간이 좀 지나면 서로 타협하고 조용해집니다.

20-21절에 보면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 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예언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우상을 섬겼던 그들을 하나님이 시범 조로 큰 벌을 내렸거든요. 벌을 받은 이스라엘이 흩어지면서 온 이방 민족에게 동일한 벌을 내리시는데 그들이 우상을 껴안고 안 살아도 이미 그들은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짓을 해도 회개치 않는 성격을 갖고 있으면 묵시로 일괄적으로 선언을 해버립니다.

매일 점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아이 수능시험을 앞두고, 혹은 자녀 결혼식 전에 자신이 교회 권사라는 사실을 숨기고 재미삼아 점을 보는 것 역시 복술입니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하게 하기 위해서 제가 미리 12장 13-14절을 보겠습니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가 뭐냐? 이것이 재앙을 내리는 순간의 막간입니다. 전쟁의 결실물이 특정한 곳에 쌓이는 거예요.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막간에서 구체적으로 다 보여주는데, 한 때, 두 때, 반 때는 마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미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마귀의 정체가 노골화 될 때까지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고 대치상태로 두는 기간입니다.

마귀조차도 어린양의 주 되심에 동원됩니다. 왜?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귀도 어린양을 높이는데 악역을 해야 됩니다. 옛날에 배우 허장강이 늘 악역을 맡아서 열연을 했지요. 젊은 분들은 모를 거예요. 이처럼 악한 역할만 하는 사람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할을 부여한 겁니다.

그러면 한 때, 두 때, 반 때는 어느 선지서에서 나온 것인가? 다니엘 7장 25절에 나옵니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이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성도가 세상에서 마귀의 손에 잡혀서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성도를 미끼로 사용하셔서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성도는 고난을 받습니다. 자연 세계가 박살이 나는데 이것은 인간 배후에서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한 때, 두 때, 반 때가 사단의 정체와 관련되었는데 이제 호세아 6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결국 한 때, 두 때, 반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이를 두기 위함입니다. 단절이지요. 그 단절에 제대로 기여한 것이 마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채로 하늘나라에 가지 않고 마귀의 손에 잡혀서 죽게 되지요. 그러면 그러한 사건을 조선일보나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예수는 소요죄로 사형 당했다.’고 쓸 거예요. 그러나 그 기사에 마귀는 나오지 않습니다.

연대기적 주체에서는 마귀가 없습니다. 환상의 세계는 없어요. 제가 첫 강의에서 강조했지요. 인간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역사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여기에는 신화적 존재인 마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것도 그 당시 최고 결정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결정했고, 총독 빌라도가 그것을 추인했고 누가 봐도 사람과 사람의 일로 진행되었습니다.

만약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북한에 가서 복음 전하겠다고 몰래 두만강을 넘어가다 잡혀서 실컷 고문당하고 나중에 기자회견에 나와서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훼방하는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이제 반성합니다.”라고 할 때, 거기에 마귀도 성령도 안 보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행정적 절차로 깔끔하게 끝이 납니다. 어떤 영적 가치도 거기에 부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고 전해진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끼리는 ‘목 베인 영혼을 주께서 아시고 신원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지만 막상 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에 속한 모든 백성들은 황제를 주로 인정해야 하는데 성도들은 주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소통이 안 되지요. 주가 서로 다릅니다.

처음 전도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주를 이야기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겼지 황제를 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가 점점 유명해 져버렸어요. 그래서 진짜 주가 가짜 주에게 눌릴 판이 되니 조치를 취한 거예요. 국가 질서를 위해 소수를 제거함으로 다수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성경 속에서는 요란한데 바깥에는 아무 일 없다니까요. 전혀 생업에 지장 없고. 그 요란 떠는 가운데서 누가 아무 소리 안 해도 “주여, 이 세상보다 주님 계신 그곳을 원합니다.”라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요란 떠는 곳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입니다. 어떻게 고요함 속에서 묵시의 요란함을 파악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을 주님의 안목으로 보지 않으면 묵시의 요란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11장 5절을 봅시다. 두 증인이 나오는데 감람나무와 촛대지요. 이것은 스가랴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잡곡 강정이지요. 스가랴의 예언도 집어넣고, 다른 예언서도 집어넣은 거예요. 스가랴 본문이 어떤지 관계없어요. 무조건 여기에 집어넣고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되고, 어린양과 관련된 체 해석이 되는 겁니다. 왜냐? 모든 예언서는 십자가로 완성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묵시 세계는 우리끼리의 이야기지 바깥 세계에서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문 가십에도 실리지 않을 이야기들입니다.

3절에 보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일을 예언하리라.”고 했는데, 1,260일은 3년 반입니다. 이것은 한 때, 두 때, 반 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4절에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스가랴에서 두 증인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서는 그냥 두 증인이에요.

5절에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라고 했는데 막상 죽기는 누가 먼저 죽습니까? 두 증인이 먼저 죽어요. 이렇게 되면 두 증인의 위신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살려준다고 했는데 죽어요.

7절을 보면, 역사의 주체가 묵시의 주체를 이깁니다. 이기는데 이긴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죽으면서 어린양의 십자가를 드러내면서 죽었기에 그들이 죽었던 장소가 예수님의 죽었던 장소의 번짐 또는 재현,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곳을 8절에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소돔과 애굽은 거리가 멀어요. 그런데 소돔이고 애굽이고 십자가 못 박힌 곳이라고 합니다. 혹시 지리를 잘못 파악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럼 뭔가? 지명이 있고 그 위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묵시적 사건이 역사에 발자국을 남긴 겁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이 십자가가 반복되는 곳, 다시 말해서 땅이 주님으로부터 공격받는 곳. 그래서 ‘너희들은 이런 것들을 내용물로 갖고 있기에 억울하지만 자연세계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괴가 창조입니다.

주님이 주가 되시기 위해 파괴되어야 합니다. 로켓이 하늘로 올라갈 때 옆에 붙은 보조물들은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보조물이 떨어져 파괴되어도 로켓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 무너질 것들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들은 좋다고 하지요.

그리고 13절에 보면 큰 지진이 나서 성 1/10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000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찾아보려고 하는데 이런 일은 역사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또는 이 사람들의 죽음에 가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고, 그 후에 일곱 대접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막간에 들어가면서 성도는 정작 누구와 싸웠는가가 나오는데, 12장 6절에 보면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기서 1,260일이 나오는데, 이것은 한 때, 두 때, 반 때, 삼년 반, 48개월. 또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마귀도 어린양을 증거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핍박이라는 나쁜 역할로 협조하고 있다는 것이 묵시적 입장입니다. 여러분들을 무시함으로 마귀가 여러분이 하는 일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마귀가 여러분을 무시하지 않고 높이고 인정해 준다면 여러분은 인기 관리에 몰두하지 주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주여, 살만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더 잘 살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신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무시하는 마귀는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우리를 개무시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마귀. “누가 네 원수인줄 알아? 교회 다니는 것에 대해 아무 간섭도 하지 않는 형제, 자매, 자식, 시어머니, 며느리가 우리가 어린양만 바라보도록 하는 협조자 들입니다. 그 기한이 바로 한 때, 두 때, 반 때에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 모습, 경계선에 있는 우리 모습이지요.

7절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이것은 영화관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고 실생활에서는 용이 없습니다. 용을 찾지 마세요. 용을 써도 못 찾습니다. 개그를 해도 통하지를 않네요?

9절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이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이것이 사실이라는 실증적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실증적 증거를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묵시는 영화관에서만 요란할 뿐이에요.

11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마귀는 우리를 개무시해야 됩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코미디입니까? 아들이 교회 가겠다고 하는데 절에 다니는 엄마가 교회 가지 말라고 합니다. “꼭 가려면 숙제 끝내놓고 가라.” 엄마는 편하게 이야기했는데, 그 아이는 오버를 해서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을 펴놓고 “주여, 신원하여 주시옵소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엄마는 내일 시험 치니까 공부하라고 이야기했을 뿐인데 아이는 오버해서 이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킨 거예요. 잘못 된 겁니까? 잘한 거예요. 그런 감각은 아주 좋아요. 영적으로 예민한 겁니다. 왜냐? 우리는 우리 속에 요한계시록을 걸친 IS 여성 대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 속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3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지요? 그러면 해석이 나왔어요. 666은 뭐냐? 모든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모든 사람이 어린 양이 죽는데 가담했기 때문에. 2,000년 동안 풀리지 않던 숙제가 이제 풀립니다. 666은 모든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매매도 잘 이뤄집니다. 왜? 서로 의기투합하니까. 묵시에서 환상은 날아가고 경제 원리와 행정적 법칙만 남았어요.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서로 편하게 은행 거래하고, 물건을 구입할 때 편하게 값을 묻고 돈을 지불하지 “이것 구입하면 어린양 끼워줍니까?” 이런 소리 안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666입니다.

따라서 666은 144,000과 대비되는 집합 개념입니다. 666은 세상 모든 사람, 144,000은 그 중에서 뽑혀 나온 묵시적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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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