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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5강 [전쟁의 무기]자유게시판요한계시록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5강 [전쟁의 무기]

이름 : 오용익(IP:183.105.195.252)

2016겨울수련회 제 5강 : 전쟁의 무기

첫째시간부터 한 것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연대기 속에서 주체가 확립되기 때문에 그 주체는 연대기를 못 벗어납니다. 제가 첫 시간에 연대기를 죽 나열했는데 사실은 연대기를 더 자세히 하고 싶었어요. 장미전쟁 같으면 왜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명예혁명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충분히 동의해야 합니다. 1206년에 테무친이 등장했고 1271년에 원나라가 생겼다. 나도 그들과 함께 있었으면 그랬을 것이다. 왜? 그 사람이나 우리나 동일한 장소에서 주체가 형성되기 때문에.

하지만 역사시간이 아니기에 연대기를 죽 훑어내려 오면서 주체는 그렇게 형성된다는 것을 말했고 그렇게 주체가 형성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형성된 주체는 그 연대기에서 두 번 다시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안 벗어나면 되지?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못 벗어나게 되면 환상을 배격하게 돼요. 왜? 돈이 안 되니까. 요한계시록 연구해서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일곱 교회 지시하는 주님의 이야기하고 교회에 주어지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만약에 그 주님이 안계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다면 교회는 폐허가 되는 거지요. 계시든 안계시든 폐허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걱정하는가? 이미 주체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요. 환상을 배격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환상을 배격한 흔적이 십자가로 되지요. 이 역사와 역사 밖의 환상의 교집합은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사건과 부활이라는 것이 이 역사 가운데서 실제로 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있었는데 이 주체가 역사 밖으로 못 벗어나잖아요.

십자가사건이 일어나니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십자가 그것마저 내가 믿어서 나의 역사가 이 환상까지 포괄하게 되면 이것은 뭐가 되는가 하면, 이 전체가 역사가 되어버려요. 십자가 알았으니까 이제 예수 부활의 새 생명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걸 기대하면서.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체가 그런 행동밖에는 할 줄을 몰라요. “목사님, 알려주세요.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밝혀주시면 다 흡수해서 새로운 정보로서 더 단단하고 확실한 신자로 거듭나겠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했던 자들이 바로 유대인이었고 바로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연대기에서 나온 주체, 주체라고 하면 어려우니 예를 들겠습니다. 안중근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할 때, 또 김구가 상해에서 고생할 때, 독립군이 힘들게 독립운동을 할 때 우리가 그들 입장이라면 우리는 예수님 편을 드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후원금 보내고 그들과 동조하는 거예요. “잘한다. 그래야 우리 민족이 살지.” 민족이 뭔데요? 국가가 뭐지요? 그게 왜 필요하지요?

놀라운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그 국가와 민족을 짐승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감각이 떨어지는 이유가 이미 연대기에서 주체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뭐라고 하면 그것을 흡수할 태세가 되어있고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구원을 더 확실하게 다지려는 의사밖에 없어요. 그것으로 인하여 십자가사건이 터졌다면 방법은 뭐냐? 역사에서, 연대기에서 만들어진 그 주체를 예수님께서 원하는 환상 속에서 새로운 주체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그것은 ‘찐빵 쪼개기’를 통해서 한다고 했습니다. 찐빵 쪼개기를 통해서 자기주체를 자기 식으로 구원하겠다는 의사가 전혀 없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 주체 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문서들이 요엘부터 계속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서가 나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알아먹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세상은 작살나야 된다는 이야기지요. 예수님께서 창조를 다 빨아들입니다. 주님이 영존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손수 만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불태워버려야 되니까. 그렇게 빨아들여서 그것을 다시 주님의 ‘다 이루었다.’에 근거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뱉어내는 겁니다. 뱉어낼 때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 완성품의 복사 품으로, 복제품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탄생하는데 그걸 가지고 인치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의 완성된 것이 들어있는 것, 거기까지는 이해되시겠지요?

그렇게 이해된다면 애초부터 자기구원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기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들의 할 일은 뭐냐? 이걸 가지고 잡곡강정이라고 이야기했지요? 얼음땡 게임. 가만있는데 천사가 와서 톡, 하고 건드리면 어떤 때는 호세아, 어떤 때는 요나, 어떤 때는 하박국, 스바냐,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정리했다 치고, 나 혼자 정리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리했다 치고 그 다음에 뭐냐? “나는 구원받습니까? 나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그런 문제는 요한계시록에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유리알속의 세계이기 때문에 돌려보면서 그 재미, 이렇게 보고 또 저렇게 보고, 그렇게 돌려서 보는 재미가 있어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문제가 아니고 “내가 어떤 존재입니까? 진짜 믿는 자가 맞습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고 “주님과 마귀가 싸울 때 어떤 무기들이 동원되고 어떤 전쟁이 수행됩니까?”라는 것을 이제 성도들은 내놓게 됩니다.

어떤 무기들로 싸우느냐는 말이지요.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전쟁할 때 어떤 무기들이 있었는가? 도대체 짐승들은 어떤 무기들을 내놓았고 거기에 대처한 주님은 어떤 무기, 선지자는 어떤 무기를 내놓고 전쟁을 치렀는가, 그 문제입니다. 자기구원문제는 관계없어요. 왜? 이미 우리의 주체는 주님이 몽땅 가져갔고 우리는 주님에 소속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입장이기 때문에 자기 구원에 대해서 신경 쓴다는 것은 연대기적 주체를 그냥 고집하는 것밖에는 안돼요.

그러면 무기가 뭐냐?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요한계시록 수련회의 제일 중요한 대목에 와 있어요. 그 무기가 뭐냐? 이 세상 누가 행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행함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누가 행했느냐? 사람들이 행했느냐? 아니면 사람외의 어떤 분이 행해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로마서의 믿음과 행함의 문제와 마찬가지에요. 누구의 행함의 결과로 이런 세계가 형성되었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누구의 행함의 결과로.

“저 어떻게 구원받아요? 저 신자 맞아요?” 그런 문제를 다루게 되면 그것은 유대인처럼 되어버려요.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이야기 중에서 유대인을 가지고 ‘사단의 회’라고 했어요. 그러면 누가 행했느냐, 에 대해서 누가 할 말이 많으냐하면, 선지자보다 선지자를 반격하는 그쪽 패들, 짐승의 패들이 할 말이 더 많아요. 굉장히 불평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이라고 제가 말은 했지만 짐승들이라 하는 것은 선지자들이 이야기한 거거든요.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하게 되면,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고 해놓고는 막상 못 돌아와요. 70년에 70이레, 70+이레라는 묵시개념이 첨가가 되었어요.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연대기성은 여기서 깨집니다. 70이레는 연대, 시간이 아니고 뭐냐? 이것은 사건의 조합이에요. 사건의 조합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 시간 밖에서 일어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사건이 터지게 되면 시간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응고가 되고 동결이 돼요.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아무리 세월이 오래가도 한때 두 때 반 때입니다. 시간 자체가 응고가 되어버린다는 거지요. 스톱이 되어버려요. 그것은 시간을 스톱을 시키는 그 양쪽에 사건이 작대기처럼 경계를 쳐서 그렇습니다. 사건이 딱 경계선을 쳐서 그래요.

한때 두 때 반 때, 한 동안, 두 동안, 이렇게 하는 것은 말이 안돼요. 한동안, 또 한동안, 그 다음에 더욱더 말이 안 되는 것이 반 동안. 수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서를 정하는 거예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런 식으로요. 또 하나의 기능은 양을 나타냅니다. 한 무더기, 두 무더기, 세 무더기……, 양입니다. 그런데 한 때 두 때 반 때는 양을 가지고 순서를 표현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한 때 두 때 반 때가 인간들의 주체 입장에서는 해명이 안돼요.

양은 양으로 하고 순서는 순서로 해야 되잖아요. 1992년 10월 18일, 이렇게 하면 이것은 시간이 양이에요. 그 때 우리나라에서 흰 옷이 많이 팔렸습니다. 흰옷 입고 간다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세요. 그게 흰옷인지. 때가 묻었지요. 왜 사람들이 이 장림에 빠졌는가 하면 연대기적 주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내 쪽에서 뭔가를 행사하지 않으면 나의 구원은 실패로 끝났다는 겁니다. 구원론 중심이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볼 때에 “천년왕국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는데 성경에 천년왕국이라는 것이 없어요. “요한계시록 20장에 천년동안 왕 노릇 하리라.” 그 뒤에 뭐가 있습니까? 또 “바벨론 멸망 뒤에 뭐가 있습니까?” 그거 알아서 뭐하는데? 그거 왜 알아야 되는데요? 그런 일들을 주께서 하시는데 주께서 하시는 그 일이 절대로 인간들한테는 눈에 띄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새로 받는 책 <사시기 속의 그리스도> 121페이지에 보게 되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수수께끼의 특징은 정답으로 인하여 수수께끼의 비밀이 더욱 잠겨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수수께끼를 제시한 지점보다 정답이라고 내민 지점에서 수수께끼의 비밀이 더욱 더 확고하게 봉인되어 버립니다.”

정답을 줬는데 더 몰라. 그게 정답이에요. 정답을 줬는데 더 몰라요. 정답이 뭐냐 하면, 네가 하는 행동, 인간들이 하는 행동에 인간들이 모르는 다른 배후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거기에 대해서 이 선지자에게 또는 오늘날 성도에게 비난을 가합니다. 이 세상에 인간 말고 누가 있느냐는 거예요. 결국 싸움은 그거예요.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인간의 손에서 역사는 이루어지고 진화한다.” 이게 인간의 주장이고 선지자는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망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마귀와 예수님의 싸움이 아니에요. 마귀와 예수님의 싸움이 아니고 인간 대 주님의 증인이라고 여기는 인간들끼리의 싸움이에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에, 예수님이 기도할 그 때에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탄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 때부터 사탄은 사라졌어요.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수종 들고 그 다음부터 예수님은 사람 만납니다. 사람 만났을 때 바리새인 나타났거든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바리새인들이 할 말이 많아요. “너는 우리와 같은 연대에 속한 같은 인간인데 무슨 큰소리를 그렇게 치느냐? 너는 누구야?” 이런 식으로 대들었지요. 그걸 봐서 예수님의 싸움은 인간들 앞에서 등장했지만 인간들 주체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버린 그 배후세력과의 싸움에 나선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게 했는가? 배후세력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봉인돼야 돼요. 이 비밀이 열리면 안돼요. 비밀을 열어서 알려주면 되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아주 친절하게, 강남의 학원 강사처럼 아주 재미있게 “당신 뒤에 악마가 있어서 이런 행동을 합니다.” 이렇게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주게 되면 이것은 이미 정답이 확정된 상태의 가치가 손상이 가요. 이미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버림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전민족의 대표입니다. 그러면 이야기는 끝난 상태에요. 세상은 이미 파장인데, 장사는 끝났는데 이제 와서 새삼 누구를 구원한다는 것은, 어떤 개인을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사람을 구원하지 않아요. 왜? 더 이상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유대인을 통해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구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텅텅 비겠네요? 엘리야나 모세는 변화 산에서 주님과 함께 왜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생산된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을 뭐라고 하는가? <사사기속의 그리스도> 새 책 나왔다고 해서 죽 읽어보니 오자가 딱 한 개가 나왔어요. ‘습자지’라는 단어를 ‘습자기’(202)라고 한 그 한 글자 틀렸어요.

170페이지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기드온 군대 수가 32,000 모았다가 300명 제와하고 다 빼버렸습니다. 그 빼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300명은 바로 ‘처음부터 이 숫자가 아니고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빼시고 남은 숫자’라는 점을 증거 하기 위해 이들은 집에 돌아가서는 아니 되고 끝까지 전쟁에 참여해야 합니다.” 다시 되풀이 할까요? 처음부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뺐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집에 가지 말고 끝까지 남아서 전쟁에 참여해야 되는 겁니다. 이 전쟁은 누구 전쟁이어야 하는가? 300명의 전쟁이 되면 안돼요. 누구전쟁? 주님의 전쟁이어야 됩니다.

따라서 주님이 아니면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그 300명이 꼭 필요했던 거예요. 그들은 자신들의 전쟁이 결코 아님을, 그리고 전쟁하기 전에 이미 남은자로서, 승리자로서 이미 주님에 의해서 손 탔다는 것, 주께서 저쪽치기 전에 우리 쪽부터 남은자로 만들어서 그 애들이나 너나 똑같은데 은혜로 너를 남게 했다는 그것을 전쟁 통에 나서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전쟁에 군사로 나서는 것, 이게 무기에요. 우리는 은혜로 남았지 행함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는 이것이 무기가 돼요.

이게 로마서 9장입니다. 엘리야가 오해했지요. 몇 명 남았나 보니 나만 남았어요. 나만 남은 것이 아닌데? 7천명이 남아 있다. 7자가 또 나와요. 7자, 7천명이 남아 있다. 모든 구원의 일은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왜냐?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그 취지가 남아 있어야 돼요. 추방당할 때 이미 추방시켰으면 “저는 추방되어야 마땅합니다.”를 유지를 시켜줘야 됩니다. 그런데 “선악과 또 심으면 되지 그거 좀 따먹었다고 참 쫀쫀하기는. 그까짓 선악과 또 심으면 되지.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사람이 신인가? 하늘나라 식목일 만들어서 선악과도 심고. 그것 따먹었다고 삐져서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그것도 내보내면 그냥 내 보내면 될 일을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칼 들고 두루 도는 천사들을 경비용역으로 불러서 지키시니 그게 뭐가 그렇게 화 날 일이라고 그렇게까지 하는가?” 하지요.

그렇게 보면 하나님도 책임이 있네. 그 위험한 나무를 심기는 왜 심어놓았는가 말이에요. 심어놓으려면 저 변두리 안 보이는 곳에 심어놓아야지 동산 한가운데 심어놓고 그것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이것은 백화점 쇼윈도에 원피스 걸어놓고 사지 말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지 마세요.” 이것은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불교신자 중에 그것에 삐져서 예수 안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이나 팔자나 자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네가 아는 순간 독립하기 때문에 알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바보 등신이 돼야 돼요. 올해가 병신의 해거든요. 절대로 알아서는 안돼요. 그저 주는 대로 먹고, 실패해놓고 “그저 무익한 종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얼마나 낮아져야 그렇게 됩니까? 돌멩이로 쳐도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이거 뭐예요? 사람이 자기 주체가 살아 있으면요, 방금 이야기한 요한계시록 이야기, 사사기 이야기, 아무리 해도 그것마저 자기주체가 믿음이 있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포섭해버려요. 인간의 주체가 살아 있으면. 그중에 대표적으로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마법의 성’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시작부터 굉장히 신앙처럼 보여요. “♬믿을 수 있나요” 초장에 믿음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가사를 보니까 마법에 빠진 공주가 나와요. 믿음과 마법에 빠진 공주, 벌써 좀 수상하지요. 마법에 빠진 하녀가 아니고 마법에 빠진 공주라는 겁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찾아가는 거지요. 가서 마법에 빠진 공주를 구원합니다. 용기 주소서, 하면서. 가사에 보면 기도를 해요. 빡세게 기도합니다. 손을 내밀어 구원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둘이 하늘을 납니다. 서프라이즈! 놀라워라! 주체가 현실에 불만이 있을 때 뭔가 미흡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자기 주체를 건드리지 않고 거기에 플러스(+)를 해요.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 +(플러스) 비가시적세계까지 포함하게 되면 이 세상이나 내세나 완벽한 구원에 대해서 드디어 단단하게 자물쇠를 걸은 것이 되지요. ‘이제 재림하기만 해라. 나도 합격이다.’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지어냈던 묵시문학이라는 겁니다. 고난 받고 학대받는 민족의 서러움을, 한을 묵시문학으로 펴내서 자기민족끼리, 억울한 한 맺힌 민족끼리 결속을 다지는 겁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정감록처럼. 차라리 굿을 하는 것이 솔직하지요. “도를 아십니까?”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집안이 잘 안 풀리지요? 천도 제 드리시면 복 받습니다.” 그 천도 제나 성당의 미사나 교회의 예배나 차이점이 뭐예요? “예배 참석했습니까? 복 받으실 겁니다.” 차이점이 뭐예요? 똑같잖아요. “당신의 주체를 단단히 하소서.” 그거잖아요.

주께서 300명을 남겼는데 은혜로 남은 자가 구원 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남을 때 어떻게 남기는가? 전쟁을 통해서 남깁니다. 그래서 전쟁은 필수적이에요. 필연적이에요. 무슨 전쟁? 아까 이야기했는데 또 잊어버렸지요? 무슨 전쟁입니까?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상황이 내가 기도해서 얻어진 결과물이냐 주님이 개입해서 전쟁하기 위해 주어진 상황이냐, 그 싸움입니다. 피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남은 자, 은혜로 남은 자를 인식할 때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 주체가 고대하고 기대하는 드림, 꿈은 날라 가버립니다.

그런데 성도가 아닌, 주께서 은혜로 남겨서 남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면서 그 은혜를 가지고 은밀하게, 내밀하게 자기가 원했던 것을 노릴 수 있는 정당한 근거로 활용하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내가 기대했던 바를 내 힘으로 안 되었는데 주께서 은혜 주셨으니 이참에 주신 힘 가지고 본격적으로 내가 원래 원했던 내 뜻을 한 번 이루어 보겠다는 거예요. 거기서 나오는 노래가 김 종환의 ‘존재의 이유’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알 수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지만,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 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아르바이트하다가 정식직원이 못된 모양이지요. 사귀는 여자는 “언제 직장 제대로 잡고 언제 결혼할건데?” 할 때 “조금만 기다려.” 막 혼자 우는 거예요. 사진 손에 쥐고 우는 거예요. 오늘도 힘든 알바에 지쳐 퍼져서 애인 사진 쳐다보고 울면서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달려갈 테니. 헤어졌던 그 만큼 너를 사랑해줄게. 왜? 그게 나의 존재의 이유니까.” 하이고, 꼴랑 존재, 참 거창하다. 남자가 태어나면 울어야 할 세 번의 이유가 있답니다. 초등학생이 그런 이야기 했다는데 태어날 때 울고, 죽을 때 울고, 게임 질 때 울고. 왜냐하면 그 애들은 국가, 짐승 개념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자기존재의 이유에서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권력이라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내부에서 내가 기대하는 이미지에 대해서 내가 고스란히 자진해서 자발적 복종을 한다고요. 권력은 나에게서 나와서 그 나온 권력에 스스로 복종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자기한테 경배하고 자기가 곧 절대적인 신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민족이 나를 배신한다? 그러면 난민이 되어서 독일로 가면 되지요. 조국이 배신하면 나가서 살아야지요. 미국에 가든지, 독일로 가든지, 프랑스로 가든지. 독일 쾰른 성당 앞에서 까불든지.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까지 어떻게 주께서 관리하는가? 새로운 전쟁을 자꾸 유발시킵니다. 그러면 전쟁을 어떻게 유발시키는가? 주께서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이 행동할 때 절대로 그 인간 배후는 없습니다. 내가 결정하면 그게 결정이고 내가 안하면 결정 안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배후에 뭐가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같은 경우에 자기가 왕입니다. 최고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는 느부갓네살을 유일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일으키지요. 바벨론 왕이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를 몰라요. 우리는 보통 꿈꾸고서 무슨 내용인지 모를 때 그냥 잊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그 꿈의 내용이 뭔지가 자꾸 켕기는 거예요. 그 꿈이 어떤 꿈인지를 모르고서는 더 이상 사는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없음을 통해서 있음을 흔들어 버립니다. 문제가 주어지면 해결하면 되는데 더 큰 난제는 문제가 뭔지를 모르겠어요.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어요.

특히 결혼한 사람들은 잘 알거예요. “여보, 왜? 요즘 우리가 서먹한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다. 당신은 아나?” “나도 몰라.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천사가 보고 “참, 호사스러워가지고는. 아프리카 한 번 갔다 와야 돼. 밥도 못 먹는 지경이 돼 봐야 돼. 밥 많이 먹고 기름 값도 내려가니 배 탁탁 튕기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것은 잘 살고 못 살고가 문제가 아니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문제를 주면 풀면 되잖아요. 문제를 주면 잘 푸는 학생은 진짜 공부 잘하는 학생이 아니에요. 없는 문제를 만들어 내는 애가 진짜 공부 잘하는 학생이에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얼마나 공부가 쉬웠으면 자기가 문제를 막 만들어내겠어요? 그런 것을 크리에이티브, 창조적이라고 해서 추앙들을 하지요.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뭐가 문제인지를 모름으로 말미암아, 어떤 문제가 있는데 단,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답으로 존재하는데 문제를 모르니 연결고리가 끊어진 거예요. 이게 주님의 흔들기에요. 그 사람들은 마르둑 신을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뭐냐? 역사에 함몰된 환상을 부릅니다. 그게 무당들이에요. 그들은 신에 관한 전문가거든요. 역사에 함몰된, 권력에 복종하는 종교인들을 불러요.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가지고 적그리스도, 가짜 선지자들이라고 해요. 월급 줬으니까 그들을 죽 불러 모습니다.

“지금 내가 이런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꿈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나에게 해답을 제시하라.” 이렇게 요구합니다. 누가 알아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다니엘도 몰라요. 이것은 누가 죽을 판이냐 하면, 느부갓네살은 물론이고 거기에 있는 엉터리 박수무당도 물론이만 다니엘도 난처하게 되었네요. 왜냐하면 다니엘이 계시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요셉이 꿈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닙니다. 꿈을 피동적으로 꾸는 사람이지 꿈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요한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지 계시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성도란 아슬아슬한 사람이다. 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자기가 성도행세 할 수 있는 꺼리는 완전히 무장해제를 당한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코미디언에게 “날 웃겨봐, 웃겨봐.” 하게 되면 코미디언은 화가 난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성도한테 “네가 믿는 것을 한 번 표현해봐.” 이것은 성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성도들에게나 해당되는 거예요. 간증 많이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잘해요.

그런데 진짜 성도는 어제의 믿음이 오늘은 틀려버렸어요. 없어. 자기가 자기를 성도라 할 수 있는 어떤 기제, 어떤 메커니즘이 없어요. 그냥 매일매일 맡긴 채 살아가는 겁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무기가 없어요. 전쟁을 해야 되는데 무기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신은 주님이 친히 무기가 된 그 결과물로 남은 자, 300명, 은혜로 남은자기 때문에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기껏 이 소리밖에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성도된 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닌데요.” “에이, 얼마나 기도했으면 성도가 되었어요? 돈 얼마 주고 성령 받았어요? 나무뿌리 몇 개 뽑고 성령 받았어요?” “저는 나무는 뽑은 적도 없고, 그저 뽑은 거라고는 새치만 뽑았고, 남 기도할 때 나는 잤고, 어쩔 수 없었고, 할 줄도 모르고, 주님 영광 돌릴 줄도 모르고, 찬송하면 음정도 다 틀리고, 3절 부르고 4절 넘어갈 때면 지루하고, ‘찬송가는 왜 이렇게 긴 건지.’ 했고, 장로님이 기도할 때는 잤고, 목사님이 축도할 때에야 깼고 열두시에 예식 있어서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그런데 성도되었어요. 남은 자입니다. 왜? 그 사람의 고백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내가 행한 것이 없고, 어떤 의미 있는 일을 나에게 가하지 않았고……, 성도입니다.

왜? 은혜로 남은 자 계열이기에 때문에. 다니엘도 마찬가지에요. 다니엘 이야기하다 보니 이 생각이 나네요. 아까 어떤 분이 우리교회게시판에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이 병에 성도의 눈물을 담으면 하나님께 응답받는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눈물을 많이 병에 담으면 그 자식의 눈물의 기도 덕에 자식이 복을 받는다.” 했는데 이게 뭐가 문제입니까? 성도의 눈물을 바로 내 속에 그런 욕심이 있다는 것 때문에 흘린 주님의 눈물입니다. 답을 달아주려고 하니 스마트폰에서는 들어가지지를 않아서 아직 못쓰고 있어요. 내일 가서 써줘야 돼요.

다니엘은 큰일 났습니다. 그러나 다니엘로서는 큰일 났지만 안심했지요.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항상 일은 주님이 저질러 놓고 자신은 대책 없는 사람으로 내 몰렸고 그 현장에 주께서 아슬아슬한 순간에 응답 주셔서……사실은 아슬아슬한 순간도 아니에요. 자기는 ‘이제야 내 인생 여기서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죽으면 죽으리라.’ 했는데 그제야 주님께서 얄밉게 해답을 주시네. 애간장 다 뜯어놓고 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느부갓네살왕에게 “왕이시여, 이런 꿈이 맞지요? 금신상이……, 이런 꿈 맞지요?” 들어보니 기억이 나거든요. “맞다. 너 빼놓고는 다 죽어야 된다.” “죽이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당신 속에 품은 하나님의 약속이 당신을 삼켰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당신에게 삼켜져버린 나라의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을 그렇게 다루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보호용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게 바로 전쟁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에서 오늘날 우리 입장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이후에 또 여러 가지 계시가 오잖아요. 그러면 그 계시의 방식은 어떻게 되는가? 방금 우리가 공식을 받았습니다. 어떤 인간을 흔들어버리는 겁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불안하고 걱정스럽고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지요. 거기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봉인을 열었다. 두루마리가 이렇게 있다면 여기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봉인되어 있어요. 카스텔라처럼 되어 있어서 한 꺼풀 떼면 또 봉인되어 있고 또 한 꺼풀 벗기면 봉인되어 있고,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의 하나를 열었어요.

하나를 열 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이 이걸 개봉을 해요. 다윗의 자손이 개봉을 한다는 말은 다윗의 자손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인간과 자기라는 인간과의 만남으로나 여겼는데 예수님께서 신화적인, 환상적인 요소를 발휘하는 가운데 이 땅을 빠져나가면서 인간들 배후의 어떤 점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도록 해서 “인간은 오직 행함입니다.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라는 객소리가 나오게 되었는가의 그 배후를 살피는 내용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 내용물은 어떻게 나오는가? 이쪽에는 그냥 자연세계를 심판하지만 심판을 통해서 알려진 그 내용물은 막간이라는 것을 통해서 저쪽 한구석에 분류해서 따로 적체를 해놓아요. 따로 모아놓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가 그걸로 끝났습니다. 그 복잡한 요한계시록, 한 글자 한 글자 따져가면서 “목사님,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무슨 사건입니까? 아마겟돈? 이것은 무슨 사건입니까? 이것은 시편 83편에 나오는 연합군전쟁, 그 전쟁을 말합니까? 이란이 미사일을 쏘면 이스라엘도 받아치고 걸프전이 일어나고, 그런 것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없어요. 이스라엘이 없는데 무슨 이스라엘전쟁이 나요? 전 천년으로 해서 휴거되고 나머지는 고생시켜서 “잘못했습니다.” 회개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합세해서 올라가고……, 참 사기 치는 밑천도 여러 가지 동원되는데 그것이 세계정치사와 전혀 맞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내 인생은 내가 지켜야 돼. 내 주체는 내가 지켜야 돼.’ 이런 쪽으로 자꾸 가는 거예요. 그런 것을 듣고 난 뒤에 요한계시록을 강의를 한다고 하니 ‘목사님은 저런 것들을 어떻게 풀까?’ 왜 푸는데요? 주님이 풀어놓은 것을 우리가 왜 푸는데?

주님이 풀 때 이 모든 개념은 환상으로 풀어요. 그러면 우리 쪽에서는 우리 언어 가지고는 풀이가 안 됩니다. 안되면 안하면 되지 뭘 그리 걱정이에요? 말해놓고 진짜 기분 좋다. 이 모든 이야기가 환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하고 이번 시간 쉬어봅시다. 교재를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걱정스러워 보이는 그것이 제가 못마땅하다는 거예요. 걱정 안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봐야 하는데 걱정스러움으로 보니까 제가 굉장히 답답한 거예요. 대체 누가 사기를 쳐서 그 걱정을 만들었느냐 그 말입니다.

교재 3페이지에 “없는 장소에 대한 묘사”라고 하지요. 있지도 않은데 묘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언어라 하는 것은 일대일 대응이 되어야 하는데,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장소를 묘사한다? 그 말은 없는 것을 묘사하는 그것이 없는 것을 있게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여전히 없구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 없습니까? 언어가 통하는 우리 세계는 있기 때문에. 그런데 있는 세계가 일곱인 뗄 때 4분지 1일이 없어지고 다시 3분지 1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그대로 있어요. 그대로 있는데 주께서 심판을 그렇게 지금 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리 봐도 대전바닥, 이 한밭바닥에서 심판이 안보이잖아요. 산성비? 산성비 그것도 재앙입니까? 우산 쓰면 그만인데. 강물이 오염되었다? 그건 정화시설을 가동하면 됩니다. 강물오염 같은 그런 것은 따지고 해가 3분의 1일이 없어지는 그것은 왜 안 따집니까? 도대체 반칙을 범해도 그런 반칙을. 같은 요한계시록의 벌을 내리는데 별이 3분의 1이 떨어진다는 그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고 강물 오염, 메르스 퍼지는 그 것, 메르스는 위생시설만 잘해서 대처하면 돼요. 인류역사 지금까지 끄떡없어요.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어도 끄떡없어요. 2012년에 멸망한다고? 벌써 지났는데요? “물로써 심판받듯이 불로써 심판받는다.”라는 이야기, 인간들 세계에서 그것을 뭐라고 하는가? 교재 3페이지에 보면 그것을 은유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없는 세계를 묘사할 때 이미 있는 나의 세계의 주체를 강화하기 위해서 없는 세계를 되받아서 내 의미로 받아주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거울상’이라고 합니다. ‘거울단계’라고 하는데 거울상에 비친 이미지가 있고 그 이미지는 감정이 없고 굳어 있어요. 거울에 비친 그 상은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는 내 마음은 아프고 콩닥콩닥 뜁니다. 거울 보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보입니까? 안보이잖아요.

따라서 냉혹한 이미지가 실제로 느낌이 있는 나, 내 머릿속의 온갖 감정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극복하고 그 차이를 같이 보는 이것을 가지고 ‘자아이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동일시’라고 하고 이것을 주체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내 마음에 바람직하고 멋있다고 여길 때 스톱, 스톱이 되어서 며칠 몇 달 동안 그것이 나의 모델이 되는 거예요. 제 머리를 너무 짧게 깎아놓았는데 미용사가 모양을 맞추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어요. 미용사 잘못은 아닙니다. 어쨌든 저의 이 머리모양이 30여년 해오던 그 모양과는 달라서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무슨 권력적 아부현상인지는 모르지만 이 머리모양을 보고 “십년은 젊어 보이십니다.” 10년, 10년, 10년, 계속 젊어지면 50년 젊어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속아 넘어가게 되면 진짜 십년이 젊다는 이미지가 고정이 되면서 앞으로 늙어도 그게 내 모델이 돼요. ‘그 때 머리 잘 나왔던 그것이 나야.’ 이렇게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드림, 비전, 꿈이에요. 이걸 상상계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아무리 봐도 내가 나의 모델, 내 이상의 욕망을 달성하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일방적으로 채택합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 뭐라고 해도 이 세상은 아무렇지가 않아요. 고요해요. 문제 있어요? 아무 문제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로 요한계시록을 못 믿습니다. 십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6겨울수련회 제 5강.hwp (80.0K), Dow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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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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