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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1강-창 3장 14-16(저주속의 약속)160113-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21강-창 3장 14-16(저주속의 약속)160113-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21강-창 3장 14-16(저주속의 약속)160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장 14-16절입니다. 구약성경 4페이지입니다.

창 3:14-16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대화의 상대를 지명해서 뱀과 여자와 대화할 때, 그리고 17절에서는 아담과 대화할 때 여자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과 주님께서 여자를 보시면서 여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이미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남자와 여자를 만들 때 그 때 그 위치를 가지고 그런 자리를 향하여 말씀을 하시는데 이 아담과 하와 뱀은 이미 본인들이 생각하는 그 위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본인들이 몰라요. 하나님은 아시는 거예요. 너는 네 자리를 이탈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는데 인간들은 선악과 하나 달랑 따먹었을 뿐이기 때문에 그 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게 되면, 저주를 주게 되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나오십니까?” 하고 굉장히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낯설게 생각하는 겁니다. 벌써 이런 벌을 내리고 저주를 내릴 때에 “그렇습니다. 이 징벌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힘듭니다. 너무 고됩니다. 너무 심하게 벌 주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그 자리에서 벌써 이탈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생각하지 않는 엉뚱한 자리를 잡고 “이게 나야. 이게 아담이고, 이게 남자고, 이게 여자고, 이게 뱀이다.”라고 일방적인 자기주장을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터무니없이 너무 가혹한 처벌을 주고, 그리고 더 인간입장에서 기분 나쁜 것은 왜 우리하고 사전에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퍼붓느냐 그 말입니다. 지난 수련회에서 스바냐 1장 3절을 이야기했지요.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하나님이 진멸할 때 “하나님이 인간을 진멸하는 이유가 뭡니까? 왜 인간을 만들어놓고 만들 때는 언제고 진멸을 왜 하십니까?” 라는 어떤 불만 같은 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는 사람과 내가 보는 내가 틀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징벌을 주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징벌을 주시고 저주를 주시는 그 본 뜻과 이것을 수용해야 되는 우리의 뜻이 좋은 뜻에서 일치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흥! 치! 이렇게 돼 버려요 “하나님이라고 일방적으로 횡포를 부리시는구먼. 당하는 것은 당해야 되지만 기분은 썩 좋지가 않네.” 이렇게 돼버려요. 그래서 우리네 인생은 살면 살수록 기분이 썩 좋지 않아요. 불안불안 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무슨 장난을 칠지. 한평생 돌아보게 되면 내 원대로 되는 것보다 뜻대로 안된 것이 더 많아요. 그 점에서 어딘가 불만을 터뜨려야 되는데 그 불만의 마지막지점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마 입에 담지를 못하지요. 불만 더 하다가는 더 벌을 받을까 싶어서. 그런데 기분은 썩 좋지 않아요.

교회 나와서 기도한다는 자체가 기분 나쁘다는 뜻이에요. 기분 나빠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 하면서 제일먼저 알아야 되는 것은 도대체 인간은 어떤 식으로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가, 그것부터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는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모르기에 오해를 자꾸 만들어요. 인간내부를 단면으로 끊어버리면, 중국 음식에 딤섬이라는 것, 만두 비슷한 것이 있지요, 그걸 잘라보면 속 내용이 다 나오잖아요. 인간의 내부를 단면으로 양파처럼 잘라버리면 그 내부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오해했던 것들이 층층이 쌓여 있어요. 누구에 대한 오해냐 하면, 타인에 대한 오해가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던 것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요.

‘저 남자가 내 행복을 지켜줄 줄 알았는데 내가 오해했다.’ 이런 것처럼 겹겹이 쌓여 있어요. ‘지금 같으면 내가 미쳤나? 저 인간과 결혼하게.’ 이런 것들이 뜯어보면 겹겹이 쌓여 있어요. 그게 타인에 대한 오해가 아니고 본인에 대한 본인의 오해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오해가 왜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뱀과 남자와 여자에게 어떤 조치를 했는지의 그 하나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밴드라는 표현을 했는데 함께 엮어놓았다고 하는 것, 밴드란 연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연대를 일으켜요. 연대를 일으켜서 아담과 뱀, 여자와 뱀 사이를 빈 공간으로 남겨두지를 않고 뱀의 사상과 뱀의 의지와 뜻으로 연결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의 밴드, 연대성이 형성됩니다. 에베소서 2장 1, 2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악령, 악마지요. 그러니까 너희들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악마의 통치와 지배와 간섭을 받으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편에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내뱉은 모든 문화와 문명, 그것은 악마의 작품입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마귀의 작품의 결과가 뭐냐 하면, 하나님한테 불순종하게끔 그렇게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다 장악하고 점령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그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은 몰라요. 이 사실에 대해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만이 되돌아보면서 내가 예수님 알기전의 모든 것은 마귀가 시켜서 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제야 알고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큰일 날 뻔 했다, 정말! 식겁했다, 식겁했어!” 주께 감사하지요. “빠져나올 수 없는데 강제로 목덜미를 잡고 빼내셨구나. 안 나가려는 나를 후려쳐서라도 악마에게서 벗어나게 해서 천국으로 데려가셨구나.” 그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첫째 부활, 이미 시간 밖으로 끄집어내서 시간속의 인간들, 군상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너도 그렇게 한통속이 되어서 살아가던 그 모습이라는 겁니다. 왜 못 빠져 나갔는가? 그것은 연대를 이루었어요. 악마의 생각으로 꽉꽉 엿가락처럼 묶어놓았기 때문에 뺄 수가 없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었다고 해서 마귀한테 “난 이제 독립이야.”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다음부터 마귀의 생각이 우리를 장악되도록 주께서는 인간과 마귀를 함께 꽁꽁 묶어놓았습니다. 묶어놓은 증거가 뭐냐? 묶어놓았으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거예요. 하고 싶어도 순종이 안돼요.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마귀로부터 지시와 명령이 주어지는 입장이기에, 그 힘이 마귀로부터 오기에 어딜 빠져나가요, 못 빠져나가요. 그러면 마귀의 지시하는 그 명령의 사상과 내용이 뭐냐? 마귀가 인간에게 유혹한 것이 있어요. 선악과 따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라고 한 것이 뭐냐 하면, 선악과 앞에서 너 자신을 비추지 말라는 거지요. 왜? 선악과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춰버리면, 우리가 선악과를 항상 따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곧 우리가 저주받아서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마귀가 와서 “불안불안 하지 말고 아예 선악과 자체를 없애버리면 너는 우뚝 설 수 있다.”는 거예요. 독자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무엇 때문에 얽매일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명령과 잔소리를 네 선에서 끊어버리면 되지 않느냐? 네 삶은 네가 알아서 네 행함으로 할 수 있는데 누구눈치 볼 것이 없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선악과 자체를 없애버리라고 하는 거예요. 먹어서 없애버리는 거예요. 없으면 더 이상 나에게 지시와 명령을 내릴 아무도 없다면 진정한 자유, 나의 의지대로 무조건 살게 되면 그것이 내 인생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마귀가 아담에게 그렇게 지시했다고 분명히 했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평소에 이 마음이 우리마음 아니에요? 마귀까지 거론할 것도 없이. 누가 나에게 지시하고 간섭한다는 것이 굉장히 기분 나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는 불순종의 영, 마귀의 지시에 물들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간섭이나 명령이라도 그게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나한테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답답해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인간을 편하게 해주지요.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고 BOYS BE AMBITIOUS! 꿈과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진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해요. 특히 십자가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 뜻은 이거예요. “네가 너 자신을 안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래 만든 네 자리가 아니라 네가 엉뚱한 자리에서 요청하게 된 가짜신이고, 가짜 예수고, 가짜 복음이고 가짜 성령이다.” 네 자리를 옹호하고 네 자리를 변명하기 위한,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사수하기 위해서 도용된 가짜 삼위일체, 가짜 하나님, 가짜 성령, 가짜 복음, 가짜 교회, 이런 것들, 가짜 성경해석, 가짜 진리, 이런 것들을 끌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너는 영원히 죄인이 되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 앞에서’를 치워버려요. 내가 중앙에 있어야 돼요. 내가 중앙에 있는데 ‘누구 앞에서’가 되어버리면 나는 중앙에서 변두리로 빠지잖아요. 그게 싫은 거예요. 그 싫은 짓을 먼저 한 자가 누구냐 하면, 악마입니다. 누구 앞에서 나를 봐야 될 것인가? 어린애들이 거울을 보잖아요. 거울 앞에서 이렇게 움직이면 거울 안의 내 모습도 같이 움직이고, 거울 앞에서 손가락을 이렇게 움직이면 거울 안에서도 반사가 그대로 되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그 거울에 있는 그 그림, 영상은 스스로 생각하고 눈물짓고 그렇게 하지 않아요.

내가 행동하는 대로 그냥 비출 뿐이지요. 그래서 거울상은 진정한 내가 아닙니다. 거울을 보고 돌아서서 5초가 지났어요. 5초가 지났으면 5초가 흐른 뒤의 나를 알아야 될 텐데 머릿속에 5초전의 내 모습이 고정되어서 그게 지금의 나인 줄 오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날마다 달라지는데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달라지는 나를 스톱시켜서 이걸 영원히 고정적인 나이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요? 날마다 달라지는 내가. 날마다 달라지는 내가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군지를 거울 보듯이 보는 겁니다.

그런데 거울이라는 것은 출근할 때 아침에나 잠간 보고 안보잖아요. 그러면 누굴 보느냐? 거울 자리에 타인, 남들이 있어요. 아빠 엄마가 있고 자식들이 있고. “여보, 이번에 내 머리 잘나왔어? 내 머리 어때?” “괜찮지.” 왜 묻습니까? “여보, 그 옷 위아래가 색깔이 안 맞다.” “그러면 이것으로 바꿔 입을까?” 이미 주고받고, 또 주고받는 가운데서 나라는 것을 계속해서 수정해 가는 겁니다. 왜? 나는 내가 누군지를 모르면 불안하니까. 타인을 통해서 그때그때마다 확정하게 되면 그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영원히 신처럼 행세하는 나라고 자꾸 여기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남편보고 “여보, 나 어때?” 할 때 “당신은 이렇게 해.”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 줄 알았지요. 나중에 남편이 기분 나쁜 일이 겪고서 들어왔어요. 남편보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입었는데 어때?” “꼴 보기 싫어!” 그러니까 그는 나를 모르고 나는 그를 몰라요. 그런데 나를 알기 위해서는 그를 통해서 알아야 되는데 그가 보는 나를 내 것이라고 잡으려고 하니까 상대방이 자꾸 변하네. 대체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니까요. 내가 누군지를. 이게 뭐냐? 아까 말했듯이 양파껍질이 겹겹 쌓였듯이 오해가 계속 쌓이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나 스스로 내 맘에 드는 의미를 챙기기 위해서 남들과 대화하고, 남들과 비교해야 되고, 경쟁해야 되고, 남이 요구하는 지시와 명령을 따라야 되는데 주님께서 보는 인간은 그런 내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그런 인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십자가 앞에 설 때 인간은 전부 다 통합해서 하나의 통합된 의미만 인간에게 제공했습니다. “너는 죄인이야.” 그런데 인간은 이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신처럼 악마의 지시를 받아서 “저 목사입니다.” 주님이 “뭐 어쩌라고?” “목사이니 목사답게 하겠습니다.” 그게 바로 네 오해라는 말이지요.

제가 목사입니다, 나는 장로입니다, 나는 아버지입니다, 나는 국회의원입니다, 나는 주부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자기와 일치시키는 것은 주님 앞에 이미 확정된 죄인이라는 것이 듣기 싫어서 따로 자기 나름대로의 만족스러운, 내 스스로 있게 한 만족스러운, 내가 신이라고 우기고 싶은 그 오해에 합당한 위치와 직업과 평가들을 세상 살아가면서 계속 구하고 있고 찾고 있는 겁니다. 나를 개 무시하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돋보기에 하고 나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런 좋은 평가를 계속 수집하는 겁니다.

수집할 때 그냥 수집됩니까? 다 비용이 드는데요. 그러니까 다단계 사기에 걸려드는 거예요. “여러분은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 부자 되는 것이 내 존재에 합당해.’ 어떻게 됩니까? “일단 5십 만원 내시고 좀 더 벌면 다시 투자하시고.”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십자가 앞에서 너는 무슨 행동을 해도 죄인이다. 따라서 네가 부자 되었는지 가난하게 되었는지를 내가 묻지를 않는다. 너는 어차피 죄인이니까.” 그런 주님이 지정한 십자가 앞의 자리가 못마땅해서 도망가다 보니까 다단계, 조 희팔에게 걸려든 겁니다. 내가 그걸로 만족하기 위해서.

조 희팔이든 누구든 그렇게 해서 재산이 불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까? 그게 끝일까요? 남자, 여자, 뱀, 연대가 되어 있어요. 하나의 밴드가 되어 있어서 마귀는 계속해서 “너는 지금보다 더 부자가 될 수 있는데 지금 뭐하고 있어? 200억 가지고 만족해? 300억 한 번 붙여줘? 남 기 한번 팍 죽게 만들어줘.” “그렇지. 나는 여기서 만족하면 안 돼. 나는 이것보다 더 클 수 있으니까. 이게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 나는 아직 더 살 수 있고 점점 더 발전할 수 있고 확장될 수 있어.” 이게 바로 불순종의 영인 악마의 생각을 그대로 수입한 거예요.

수입은 했는데, 악마는 자기가 멸망한다는 것을 아는데 인간은 멸망한다는 것도 모르고 안다고 한들 그런 줄 알아도 내가 아는 그 내가 다가 아니고 다른 내가 또 생각 되면서 이게 불일치, 합치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오해가 쌓이는 거예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었는데 당장 죽이지 않고 인간과 마귀를 밴드로 만들어서 오해와 불일치 속에서 불안과 희망의 자기모순이 일어나도록 했느냐? 창조의 형식이 달라졌어요. 저주를 통한 창조를 주께서 실시하십니다. 저주받는 게 구원이고 저주받는 게 창조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장 13절에 보게 되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남편과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 그리고 뱀과의 관계, 이 모든 관계에서 인간의 본래의 자리에서 창조되기 위해서는 너는 저주라는 터널을 필히 통과해야 되고 그 저주를 유발하는 장치, 그 설비는 네가 눈에 보이는 모든 가정, 모든 세상관계입니다. 징벌과 저주가 구원 안 됨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가 지옥 갔다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기 위한 장치로 이 저주라는 인큐베이터에 집어넣은 거예요.

왜냐하면 그러한 저주 속에서, 뱀의 생각 속에서 인간은 결코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실제가, 현실이 아니라는 거지요. 누가 무슨 소리 하게 되면 갑자기 그것으로 인해서 밤새도록 잠을 못자요. 왜?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 그냥 무시해.’ 아무리 해도 무시해야 된다고 설치는 것이 이미 영향을 입었고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2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헤롯에 두 살 아래의 애들을 다 죽이는 그 대목인데 죽이고 난 뒤에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의 그 심정, 그 어미의 아픔과 고통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여자에게는 자식을 낳게 하는 겁니다. 자식이 없고 결혼도 안하고 그냥 일만 한 사람들은 어미가 그 자식 잃은 아픔을 몰라요. 얼마나 아픈지. 요 근래에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자식은 지옥가고 자기 혼자 천국 가 봐야 천국이 전혀 재미도 없고 행복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저 자식에게 나가 들어 있기 때문에. 자식과 내가 마귀와 연대가 되어 있기에 때문에 그 어느 것이 빠져도 내가 아니에요. 이미 인간 마음의 습성이 ‘나는 무조건 내가 최고여야 되고 나는 혼자여야 되고 누구로부터 간섭 안 받아야 돼.’라는 악마의 심령이 있는 이상은 그것으로 인하여 계속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마음 품성 가지고 하나님께서 여러 일을 일으키면 그저 아픔과 불안과 우울증과 마음고통, 이런 것이 계속 생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또 새로운 몸부림을 치고요.

도대체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어떤 겁니까? 저는 이렇게 합니다. 상호침투 된 관계다. 마귀의 심정으로 부부사이에 서로 침투하고 있어요. 서로 손잡고 있는데 그 사이를 흐르고 있는 것은 뭐냐? 마귀의 사상이 손잡고 있어요. ‘너는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돼.’ ‘아니, 네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돼.’ 그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마귀가 갖고 있던 거예요. “너는 너를 위해서 사는 그것이 너의 진리다. 그게 가장 너다운 거야.” 이미 그런 생각이 확고하게 있는 이상은 누구를 만나도 상대방에게 그것을 강요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내가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저주아래 두시는 것은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라는 거예요. 그 비정상의 맛을 흠뻑 맛보게 하고 젖게 합니다. 평생토록. 그런데 인간은 뭡니까? ‘내가 행복한 것이 정상이고 혼자 사는 것이 정상이고 내가 누구 간섭 안 받고 다 기도한대로 내가 뜻한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심성이에요. 나는 나로 인해서 즐겁고 그야말로 하나님 흉내 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스스로 있는 거예요. 내가 싫으면 싫은 것이고 내가 좋으면 좋은 거예요. 나는 스스로 있으니까.

그런데 그 마음을 확정짓기 위해서 주위에서 끌어 모으는데 끌어 모아봤자 그걸로 일시적으로 확정되었다 싶었는데 돌아서면 그걸 로는 미흡해서 또 끌어 모으고, “내가 이만큼 잘난 존재라는 것을 누가 좀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할 만한 사람만 친구로 불러대고, 그런 자리에 가기도 하고. 부모들이 같은 대구시라도 수성구로 이사 가는 이유가 뭡니까? 서구하고 수성구하고 성적차이가 엄청나게 나요. 서구에서 서울대 한 명 갈 때 수성구에서는 15명이 들어가요. 서울 강남하고 마찬가지에요. 왜 부모가 그리로 이사를 가야 됩니까? 내 자식이 공부 잘하는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이에요. 자식마음이 아니고 이 부모 내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줘가지고 내가 어떤 마음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면서 궁극적으로 ‘나 잘났다, 나한테 누구라도 잘못했다는 소리 하지 마. 나 기분 나쁘다.’라는 그 악마의 마음이 중심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낼 때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 될 수밖에 없게 한 그 십자가가 진짜 축복이고, 진짜 배려고, 하나님의 진짜 은혜라는 사실을 주께서는 성도한테만 깨닫게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상호 침투하는 가운데서, 서로가 서로를 강요하는 가운데서 서로가 가짜에요. 서로가 가짜인데 서로가 진짜라고 우깁니다. 몽땅 다 비정상입니다. 왜? 마귀와 연대되어 있기 때문에. 마귀 따로 나 따로 아닙니다. 여자 따로 남자 따로 아니에요. 남자는 여자를 요청하고 여자는 남자를 요청해서, 그렇게 서로를 이용해서 나 잘났다는 것을 증명해줄 상대자로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사귀고 싶어 하는 겁니다. 아낌없이 준다고요? 어디서 그런? 아낌없이 주는 사람 없습니다. 그것은 다 밑밥이고 밑천 깔아놓기에요.

그러면 결국 이 저주 속에 있는 인간이 선악과 따먹는 날 억, 하고 단박에 목 졸려 죽듯이, 혹은 독약 먹은 것처럼 헉, 하고 죽는 것이 아니고 왜 이렇게 치열하게 살게 하는가? 다른 세계를 저주 속에서 끄집어내는 위대한 창조의 능력을 과시하게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안 되지? 네 그 생각이 정상이야? 내가 보기에 비정상이야.” 네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네가 정말 아프고, 남의 눈이 아니라 네 눈에서 눈물이 나고, 자식 아프면 남이 아픈 것이 아니라 내가 아프고, 이것은 부정하고 부인하려야 할 수가 없는 현실 그 자체에서 내가 바로 그 현실 자체라고 지독하게 인식케 함으로 말미암아 나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못 느끼게 만드는 것, 그렇게 해야 인간은 기존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생각도 못하지요.

다시 말해서 의도적으로 뱀의 위치에 갇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갇혀 있는 그나마도 유일한 현실이기에 그것을 사랑하지요. 어쩔 수 없지 뭐. 주어진 현실 열심히 살아야지. 그 안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만족하면서 조그마한 행복쪼가리라도 얻으려고 합니다. 저는 그걸 마약 같은 인생이라고 해요. 서로 약물 처먹고 그 안에서 꿈꾸고 있는 그것, 이것은 인간이 해결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하는가? 주님이 약속을 통해서 인간이 갇혀 있기 때문에, 인간이 뱀에게 지배받기 때문에, 뱀이 오야붕이기 때문에 뱀하고 대결하십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기서 놀라운 것은 여자라는 것은 분명히 사람 눈에 보입니다. 남자 아니면 여자, 여자 아니면 남자니까 눈에 보이는데 뱀이 안보입니다. 뱀은 땅꾼, 뱀 장사나 건강원에 가면 보이는 뱀이 있지만 여기서 뱀의 후손이라고 여자와 견줄만한, 여자와 운명이 엮일 그 뱀은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악마의 심정을 가진 인간들에게는 악마가 없습니다. 악마의 심정의 통제를 받고 있는 인간들에게 요한계시록이나 성경의 세계는 없습니다. 오직 역사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원을 하되 역사에 증거를 남기는 식으로 구원의 약속을 실현하기에 그 보이지 않는 세계, 그 약속에 건져내는 그 약속을 매칭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여자를 이용한 겁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대결하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이 생각하는 하늘에서가 아니라 평범한 이 같이 죄짓고 있는 인간 속에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처녀 마리아에서 하나님이 태어나요. 그 처녀 마리아, 그 처녀가 무슨 대단한 처녀겠습니까? 평범해도 너무 평범해요. 구미공단 여공이에요. 너무 평범해요. 나이가 그 또래 되니까요. 요새 말고 옛날 우리 20대 때, 7080때, 그 때는 여자들이 고등학교만 나오면, 중학교만 나와도 전부 공장 다 보냈어요. 오빠 공부시킨다고, 오빠 하나 판사 만들기 위해서 공장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순이야, 가방을 왜 샀니?” 혹은 “영자야 울지 마.” 하는 테마가 다 그 테마에요. 그 평범한 여자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아가 출현됩니다. 죄에서 의가 나오고 저주에서 축복이 나옵니다. 왜? 인간들은 아무리 천국을 생각해도 그 천국은 마귀가 집어넣은 가짜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 지금 고생하지? 너 죽으면 좋은데 간다. 낙원에 간다.” 이것은 마귀가 이야기한 거예요. 실제로 약속은 이미 우리 속에 있어요.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고 무시를 당해도 너무 무시당하는 아주 특이한 식으로 약속이 옵니다.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한다는 이 묵시적인 존재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친히 나타나게 하면 주위 사람들은 완전히 그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봅니다. 누가 무슨 소리 하면 “나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야.” 이런 소리 하면 “완전히 돌았구먼. 다른 사람들 봐. 자기 자랑하기 바빠.” 나는 국회의원이다, 나는 장관이다, 나는 희망이 넘치는 사람이다, 나는 전에 몸 담았던 당에서 탈당해서 다른 당으로 옮겼어, 나는 그러니 희망이 있어, 여보, 나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했어, 이게 마귀 짓이거든요, 이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보, 걱정하지 마. 우리 애 공납금 많이 들어간다고 걱정하지 마. 이번에 내가 일 많이 해서 과장에서 부장으로 진급했어.” 이 말은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이야.”라는 그 말을 미워해서 “나는 내 기준은 내가 만들고 내가 원하는 내 가정은 내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서 내가 책임지고 먹여 살릴 것이니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고 할 때 복음 아는 여자는 말합니다. “네가 나를 알아? 지금 네가 그런 소리 하는 것은 네가 아는 너 자신을 알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나를 이용하는 거야.”

그런 말 하게 되면 “여보, 당신 대단해. 최고야.”라고 해줄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여보, 당신은 오해와 오해의 중첩이야. 왜? 십자가 앞에서 당신 자신을 세워본 적이 없기에. 나도 당신과 결혼하면서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여기고 시작했다. 웨딩드레스 입었을 그 때 다 예쁘다고 했지. 그게 오해와 오해의 중첩인 것을 몰랐었어.” 결혼 했는가, 안했는가, 몇 번 했는가,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지옥 가거나 혹은 천국에 가더라도 “너는 구석에 꿇어앉아 있어!” 그런 것 없습니다.

자기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면 그것은 약속에 포함된 겁니다. 그리고 이미 이 땅에서 달랑 본인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이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예수님의 증인 하라고 이미 먼저 침투된 약속이 우리내부를 장악하게 되면 우리는 시간 밖에서 주의 일 때문에 시간 안으로 잠시 소풍 온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주의 증인 합니까? 늘 죽이고 늘 살리십니다. 왜? 우리가 어제 주의 증인한다고 했지만 오늘 되면 “내가 주의 증인입니다.”가 또다시 마귀의 심성이, 이 육신이 남아 있으니까 “그게 나의 확정된 참된 모습이야.”라고 우기기 때문에 매일 죽이고 매일 살리고, 매일 살리고 매일 죽이고, 살려낸 인간 또 죽이고 내일 일은 내일 하고, 날마다 저녁이 되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 모습으로 갑니다.

또 아침이 되면 십자가 앞에……, 거울 앞에 서지 마시고, 거울 앞에 서도 괜찮은데 십자가 앞에 서셔서 “주여, 오늘 죄인인데 또 무슨 오해가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어떤 일을 통해서 다 끄집어내도록 하겠습니까?” 주께서 또 일거리를 줘서 남에게 교육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것 아는데 너는 모르지?” 이런 스승노릇 하라는 것이 아니고, ‘여보, 나에게 이런 오해가 있었네. 이렇게 못난 인간인데도 또 당신 앞에서 잘난 체를 했고 남들 앞에서 잘난 체를 했어.’라는 그런 마음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말로는 할 필요가 없어요. 말로 하면 또 이용을 하기 때문에 말로 할 필요는 없어요.

장사할 때 ‘고객님, 남는 것 없다고 거짓말 했지만 사실은 곱빼기로 남습니다.’ 그걸 말로 할 필요는 없어요. 왜? 말로 하면 그쪽에서 이용을 하니까. 누구 좋으라고? 다만 그런 고객이 왔을 때 주께서 그런 마음이 아직도 네 속에 남아 있음을 끄집어내도록 하기 위해서 가게에 손님이 오게 하십니다. 네가 장사해서 부자 되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보다 더 좋아하는 마음이 아직도 악마처럼 네 속에 있기에 내가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너를 구원했다는 구원의 기쁨을 죄인 됨을 경유해서 더욱 더 느끼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뱀과 싸우는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는 누구냐? 여자는 없어요. 여자의 후손이 여자를 만드는데 그 여자는 단수가 아니고 복합명사, 오늘날 성도들이,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 몸 된 지체들이 여자가 되는 겁니다. 왜? 주님이 그렇게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자에서 자손이 나온 거지만 자손이 먼저 창세전부터 있었고 이 약속을 위해서 합당한, 자기 모습을 증거 할 여자를 차후에 이 땅에서 만들어내는데 그들은 자기가 악마의 심성의 역사 속에서 이런 짓거리를 했음을 세상을 향해서 아낌없이 고백하는 겁니다.

“나는 당신에게 사랑 받을 자격도 없고, 아니 더 살 자격도 없는데 주님 때문에, 주님이 이렇게 살려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직도 나는 당신 앞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리는 확정되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죄인, 상한 심령, 확정된 채로 확정되지 못하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내 세상이 아닌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행복을 위해서 살고 행복을 위해서 결혼했고, 그 모든 것이 마귀의 욕심이고 마귀의 장난질이고 마귀의 심성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1강-창 3장 14-16(저주속의 약속)160113-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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