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십자가와 부활 160108강의디모데후서

십자가와 부활 160108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김창길(IP:118.♡.121.36)

16-02-09 15:09

서울 의존교회160108a (십자가와 부활)―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2장 14절부터 하겠습니다.
디모데에게 편지한 속에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들이 교회들 마다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 디모데의 편지을 통해서 뭔가 복음을 정립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오케이 하고 동의할 거예요. 그러나 그게 동의를 했다고 해서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가 분명히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음 에도 불구하고 돌아서게 되면 자기가 알았던 복음에 대해서 복음과 대치되는 의견들이 여기 저기서 막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 쏟아지게 될 수도 있겠지만 복음을 알았던 본인 각 개인이 세월이 가면, 시간이 지나 가면 나는 전에 20대에 복음을 이렇게 알았는데 30대에는 이렇게 안다. 그러면 40대에는 또 어떻게 바뀔지? 50대에는 어떻게 바뀔지 개인적으로도 복음은 늘 바뀌고 그리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내세울 때에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이 과연 제대로 된 정답인가 라고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던져 졌는데 해석이 너무 구구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을 누구한테 물어봐야겠어요? 그래서 바로 사도가 그것 때문에 있는 겁니다. 사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나타난 일꾼이 사도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일꾼, 그렇게 되려면 그 사도의 의견은 개인적인 의견이라 하면 안돼요.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사적인 자기 의견을 내 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만은 별개로 쳐야 된다 이 말입니다. 사도는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고 숨겨진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도가 있는 겁니다.

그 사도가 주님사이의 관계에 성령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사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게 접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구약에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선지자에 대해서 쉽게 판단하지 못한 이유는 거짓선지자들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게 문제가 된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거짓선지자를 삼가라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라 그런 뜻이거든요. 무슨 수로 구분합니까? 자기 구미에 맞으면, 자기에게 동의 하게 되면 참된 선지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입니까? 원래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기준인데 내 의견과 일치되면 참된 선지자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많아요.

복음이 뭐냐 하면 죄인을 용서해서 구원하여 영생 주는 것이 복음이잖아요. 복음의 시작이 뭐로 시작하고 있습니까? 죄인이라 말이죠. 죄인을 건져서 의인되게 하는 것이 복음인데 출발점이 죄인이라 하면 죄인이 생각하고 죄인이 믿고 죄인이 희망하고 죄인이 사랑하는 그것은 죄 아닐 수가 없죠. 그것마저 죄이죠. 그러면 죄인이 구원받겠다고 판단하고 저 사람은 거짓 선지자야! 참된 선지자야! 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것도 뭐가 됩니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 선지자들을 많이 보냈지만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달라질게 없습니다. 원래 이렇게 이야기해야 맞아요. 뭐냐 하면 선지자의 말을 들으라고 보낸 게 아니고 원래 들어 먹지 않을 족속인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냈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에게 하나님과의 관련성은 바로 성신이 임했기 때문에 선지자 노릇을 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죠.

사무엘도 그렇고 다윗도 마찬가지로 성신이 임했죠.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성신이 임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한번 정리해 봅시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 보이는 자기 백성을 통해서 활동한다. 그 보이는 자기 백성과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졌는가? 성령을 통해서 이어졌다. 그러면 성령을 통해서 이어진 사람의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느냐? 동의 할 수 있느냐? 동의 안 된다. 왜?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동의가 될 수 없다. 동의한다고 해도 수상하고 동의 안한다고 하는 것이 원래 정상이고 동의하겠다는 것이 더 수상해요.

죄인인 주제에 무슨 동의가 되겠습니까? 동의한다는 그 말은 죄에서 빠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죠.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죄라면 나는 선지자의 말을 곧이듣고 나는 믿습니다.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죄가 될 수밖에 없어요. 아예 죄가 아닌 것이 나올 것이라고 처음부터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선지자 이야기도 소용없네요? 맞죠. 믿어도 수상하고 안 믿어도 수상하고 믿어도 가짜고 안 믿어도 가짜고, 요한일서에서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 만이 선지자의 말을 듣는다고 되어 있어요.

복음을 전하는 사도도 죄인이고 그리고 선지자가 들어있는 그 상황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들도 죄인인데 선지자의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의리의 관계나 또는 동조, 공감, 납득 이런 관계가 아니고 오직 누가 개입을 합니까? 성령이 개입을 하죠. 그러면 성령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죠. 그러면 선지자 보고 전하라 해 놓고 예수님이 빠지는 것이 아니고 전하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전하는 그 현장에 누가 개입을 합니까? 전하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이 친히 성령 안에서 관여하는 겁니다.

어떤 상태에서? 완성된 상태에서 관여하죠. 한번 잘해 봐라! 이게 아니고 완제품으로 개입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는 이미 구원받았기에 선지자, 사도를 통해서 이 복음이 복음으로 이해가 반드시 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와 동시에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너는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내가 하는 복음을 왜곡하게 되어 있다. 이것도 성령의 개입, 또는 주님의 영의 개입으로 필히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양발 차기라고 했죠.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이 등장했다. 그것은 무엇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가 등장했다. 이렇게 바꿔서 이야기가 돼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에 사람들은 축복과 저주를 그 사람들은 일체 생각을 안 한 겁니까? 나름대로 생각을 했겠습니까? 나름대로 생각을 했죠.

안 믿는 사람들 정월 초하루, 1월1일에 비는 것 보세요. 나름대로의 복과 저주가 다 있다니까요. 인간들에게 나름대로의 복과 저주가 있는데 거기에 아브라함이 등장을 하게 되니까 제가 처음에 강의 할 때 했잖아요. 인간들은 뭐다? 죄인이죠. 죄인이 생각하고 있는 복과 저주는 잘못되었죠. 어떤 의미에서 저주라고 하는 것이 복이고 복이라고 하는 것이 저주가 될 수가 있어요.

그들 속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끼어들었잖아요. 그러면 자연적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은 충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 된 자와 죄인 되었다가 주님에 의해서 의인된 아브라함과 상충되겠죠.

어쨌든 지금 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이 세상은 뭐와 뭐로 분류된다? 축복과 저주로 분류된다. 저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필히 저주가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또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는데 필히 누가 등장해야 돼요?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실명을 거론했습니다. 후00 빌00이 아닙니다. 실명을 거론해서 이런 사람이 암 세포와 같이
독소, 독약 같은 존재로서 복음을 갉아먹는 짓을 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보기에는 이런 사람이 없었으면 참 교회가 얼마나 깨끗하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지금 까지 강의 한 내용을 보면 그러면 안 되죠. 축복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뭐가 따라와야 됩니까? 저주가 따라와야 됩니다. 그러면 복음은 내가 원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축복받을 자인지 저주 받을 자인지 내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축복과 저주를 갈음하는 기준이 뭐냐에 대해서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고 이해하는가? 그게 본인의 저주와 축복을 결정하는 겁니다.

축복과 저주는 어차피 둘로 나누어져요. 무슨 기준으로 나눌 것이냐? 그러면 목사님, 그 기준은 뭡니까? 그것은 저한테 물어볼 것이 아니죠. 여기 후메내오와 빌레도에게 물어야 돼요. 왜? 이 사람들에게 내신 기준이 사도 바울이 보기에 저주받아 합당한 기준이 되겠죠. 그러면 18절에 보면 “진리에 관하여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는 겁니다. 이제부터 한번 생각 해 봅시다. 성경에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후메내오는 디모데전서 1장에도 문제 있는 인간이라고 나왔고 빌레도는 처음 나오는데 그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는 것을 디모데나 사도 바울의 개입이나 편지가 빠져 있는데 상태에서 인간들끼리 모였을 때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는 것에 대해서 그게 아니라고 강력하게 그게 아니라고 나설 수 있는 권위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것도 뭐 너의 좋은 하나의 의견일 수도 있고”이렇게 되겠죠.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서 나타난 것은 사도죠. 사도가 디모데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럴 때 사도가 보내는 것은 이미 인간들은 뭘 해도 죄가 되니까 죄가 된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결정짓죠.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부활은 이미 지나 갔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 부활이 이미 지나 간 것을 믿으면 복 있는 사람이고 부활이 지나 간 것을 모르면 저주받을 사람이라고 그들이 주장하겠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후메내오가 빌레도가 그런 주장을 하는 이것이 “나는 주님 앞에 죄인이야!”라고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겠죠. 부활이 이미 지나 갔어! 나는 주님 앞에 당당해! 라고 주장할 때 본인이 옳다고 주장한 것을 이것은 내가 분명히 거짓말 할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자가당착입니다. 서로 반대가 되는 이야기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내가 옳다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게 무슨 말이 됩니까?
내가 옳거든 그런데 거짓말로 알아라!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왜 하나? 이게 뭔데? 이거 물이야! 그러면 끝나는 것을 가지고 이것은 물이라고 내가 이야기한 것은 옳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거짓일수 있어! 이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왜 갔다가 붙입니까? 그럴 필요 없잖아요.

내가 물이라면 물이야! 이게 솔직한 생각이지. 내가 겸손 해 한다고 내가 옳을 수 있고 하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 다 빼고 이게 뭔데? 그거 물이야? 아니야? 물이야! 그러면 됐다. 이 말이죠. 그것을 판단한 그것은 바로 복음에 의하면 죄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하는 말이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는 것을 그 당시 교회가 언제 압니까? 디모데 편지를 통해서 알죠.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누구의 권위가 개입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편지가 개입되지 않은 거죠. 사도 바울은 누구의 종입니까? 그리스도의 종이죠.

그러면 사도 바울의 활동은 디모데의 활동은 사적인 활동이 아니죠. 왜? 그리스도의 종이니까 그러면 그 종이라는 말은 종만 활동한다는 뜻이 아니고 주인 되시는 분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니까 결국 주인님이 활동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부활하신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면 부활에 대해서 누가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알고 있죠. 그런데 이 부활에 대해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후메내오와 빌레도에게 뭐라 합니까?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활이 안 지나 갔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겁니까? 잘못 안 된 겁니까? 부활이 지나 갔다고 해서 그릇됐다고 했는데 그러면 부활이 안 지나 갔다고 한다면 그 사람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부활이 지나 갔다고 하니까 디모데가 편지를 뜯어보니까 이게 그릇되었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가 사도 바울 편에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뭐라 하겠습니까? 나는 부활 안 지나 간 것에 한 표 던집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 받아요? 안 받아요? 그 사람은 복음 편입니까? 복음 편 아닙니까? 아니죠.

쉬운 예를 들어 조금 전까지 현직에 있는 장관이나 현직에 있는 청와대 인사가 사표를 던지고 난 뒤에 국회의원 되려고 당 공천 받으려고 북한에 대해서는 이런 정책을 해야 되고 이렇게 강경하게 나가야 되고 경제인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현직에 있을 때 그 이야기를 하지 왜? 나와서 국회의원 공천 받기 위해서 오버하고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죠.

사도 바울의 편지나 디모데의 편지가 오기 전에 너는 그릇 되었어! 라고 왜 언급을 안 했습니까? 이미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소문났다는 말은 많은 동조자가 있다는 말이고 이미 용납이 되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실명이 거론하는 거예요. 가만히 내 이름 밝히지 마라, 사실은 부활이 지나 갔거든! 이게 아니고 이미 부활이 지나 갔다는 이것을 복음의 내용으로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자기 펜클럽 유명세를 떨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명을 거론한 거예요. 다른 교회도 이미 유명한 인사가 된 모양이에요. 참신한 복음이라고요.

참신한 복음 유명하잖아요. 십자가 복음 너무 참신해서 유명하잖아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부활이 지나 갔다는 말을 해 줘야 돼요. 해 줘야 바도 지속적으로 바울의 편지나 계시가 필요로 하는 교회가 되게 되는 겁니다. 나, 옛날에 사도 바울의 설교를 많이 들었어! 이제는 내가 알아서 구원 받을 거야! 이제는 내가 알아서 신앙생활할 거야! 절대로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문제가 일어나야 돼요.

의존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지요? 아무 문제없는 것이 문제인가? 경제적 문제 말고 복음에 관해서 한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때문에 핍박을 안 받으면 말씀의 관심이 점점 더 식어져 갑니다. 제가 100% 장담합니다. 부부가 이게 복음이니 저게 복음이니 하면서 싸울 때는 그래도 성경 말씀을 들척이면서 여러 사람 설교 들으면서 비교하고 그러는데 둘 다 동의해 버리면 갑자기 고요해져요. 이제는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고 어떻게 돈을 버느냐에 관심 두자! 갑자기 아무 문제가 없어 져 버렸어요. 이제 애나 잘 키우자! 이제 복음 다 동의 하는데 뭐! 동의하면 그게 복음입니까? 복음은 예수님께 지속적으로 관리대상이 되어야 그래야 성도입니다.

주님이 지속적으로 관리대상이 된다는 말은 반드시 무엇이 축복이며 무엇이 저주이며 그것이 날마다 매일 새롭게 다가와야 됩니다. 축복과 저주가 새롭게 다가오지 않으면 나는 복음을 받았으니까 이제 아쉬운 것은 돈밖에 없다 구원은 받았으니 돈이나 벌자!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갑자기 주님이 개입하다가 주님의 일이 자기 야망의 일로 전환이 되고 맙니다. 제가 아까 안양 강의를 하면서 이런 공식을 제시했거든요. 죽음이라 하는 죄의 값이라 했어요. 죄가 있기에 주님이 오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성도를 먼저 죽여 버립니다. 성도를 죽여 놓고 내가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살아요. 이미 죽여 놓고 무엇을 드러내느냐 하면 평생 동안 무엇을 드러내게 합니까? 죄를 드러내게 하는 방식으로 살게 하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이미 성도는 죄를 드러내면서 야, “식겁했다!”큰일 날 뻔했다! 이런 죄를 지었으니 내가 지옥 가는 것은 마땅하지! 아이고 바보같이 지옥가면서도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세상만 쳐다봤지! 이렇게 십자가를 알고부터 그 다음에 내가 행동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아이고 큰일 날 뻔했다! 어휴! 큰일 났네! 이렇게 살아가는 것과 이제 복음 알았으니 돈이나 벌자! 이거하고 달라요. 느낌이 달라요. 가정 분위기가 달라요.

물에 빠진 사람 살려놓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그렇게 될 공산이 굉장히 큽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인데 복음으로 교회를 만들어 놓고 복음을 지탱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주님의 현재성이 날아가 버려요. 주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우리끼리만 남아요. 오손도순 잘해 봅시다. 우리교회 잘 해 봅시다. 이것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고 가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예수 믿어요? 나 예수 믿습니다. 둘이 결혼합시다. 결혼하고 난 뒤에 뭐? 뭐? 이제 오손도순 삽시다. 결혼하고 난 뒤에 오손도순 사는 게 아니에요.

왜 주님께서 우리를 결혼해서 부부가 되게 하셨는가! 서로가 내 놓는 그 죄를 통해서 “아, 식겁했네!”이렇게 결혼했으면 나 잘난 체하잖아! 라는 것을 계속 새겨지고 또다시 전에 보다 주님의 관여가 더 깊숙하게 느껴져야 되죠. 점점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느껴져야 되지요. 학원 같으면 6개월 수료, 이렇게 하면 끝나요. 복음 6개월 수료입니다. 이렇게 하고 끝나는데 교회는 원장이 있어서 수료증 나눠주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이 그것도 그냥 주님이 아니고 십자가 못 박히신 주님이 거기 현장에 계신다면 처음에 교회에 올 때 요만큼 알았다면 그 다음 올 때는 더 은혜를 많이 아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 많아지니까요. 그 다음에 더 많은 죄를 느끼면서 은혜를 더욱더 느끼면서 그렇게 와야 된다 이 말이죠.

17절에서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이것은 후메내오, 빌레도 개인이죠. 개인의 의견이 왜 그리 중요하죠? 이 사람들이 부활이 지나 갔다고 해서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아이 부활 지나갔어? 아이 나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네! 미안하다! 내가 미리 이야기 할 건데 이렇게 주님께서 미안해하십니까? 개인이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주의 계획이 달라지겠어요? 달라지지 않겠어요? 달라지지 않겠죠. 그러면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이야기에 대해서 무시하면 그만 인데 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왜 거론 하느냐 이 말입니다.

문제가 복잡해 졌죠? 부활은 지나갔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야야 무시해라! 무시해라! 못 들은 것으로 해라! 그냥 넘어가버려라! 이러면 될 문제잖아요. 그런데 왜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이런 주장을 딱 집어내면서 왜 거론이 돼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이야기한 것을 무시하고 우리끼리 구원받으면 돼! 이렇게 나 올 수 있는데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이런 이야기한 것을 부각을 시킵니까? 그것은 세월이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십자가 복음이 품고 십자가 복음을 드러내는 십자가 죽음을 드러내는 죄는 더욱더 다양하게 깊이 있게 나타나야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쓰이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알아서 내가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마찬가지로 같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지금 주장하는 것이 개인의 주장이죠.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그 사람은 개인의 주장 아닙니까? 역시 개인의 주장이죠. 그러면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주장이 개인의 주장이고 잘못 됐다고 지적을 하려면 본인은 내 의견은 이렇다고 하면 안 되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께서 너를 그런 식으로 쓰셨다고 이야기를 해 줘야 되죠.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부활을 남겨둔 그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너로 하여금 부활이 지나 갔다는 이야기를 하는 역할을 너에게 맡겼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되죠. 그래야 너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안 되고 주님에게 맡겨진 의견이 나오죠. 그런 뜻에서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계속해서 되지도 않는 소리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상당히 중요시 여기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이 그릇됐죠. 그러면 저의 질문이 뭐였습니까? 부활은 안 지나갔어! 이러면 복음이냐 복음 아니냐? 이 말입니다. 간단한데 이게 복음입니까? 복음이 아닙니까? 부활은 안 지나 갔어! 이것은 복음이에요? 복음 아니에요? 복음 아니죠.

복음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야, 후메내오야 빌레도야! 너희는 부활이 지나 갔다고 하는데 부활은 안 지나 갔어! 부활은 십자가가 부활이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게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네가 그런 부활이 지나갔다는 소리가 나오겠금 누가 연결 해 줬는가,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지금 현장에서 이 현재성을 가지고 너희가 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그것이 십자가를 증거하는 부분으로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이 되는 겁니다.

후메내오야 빌레도야 이리 와봐 내가 한 수 가르쳐줄게! 이러지 말라는 거죠. 그 그릇된 이야기도 십자가가 전파되는 현장에서는 필수적으로 일어나야 될 일 인겁니다. 개인 소유가 아닙니다. 개인이 전달할 내용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다고 복음이 사도 바울 것입니까? 아니죠. 디모데가 전한다고 디모데꺼 아니죠. 쉽게 말해서 복음 앞에서 어느 누구도 내 것이라고 할 게 없죠. 이 말은 나는 의미가 있다? 없다? 나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왜?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지신분에 스스로 나서서 활동을 하는데 우리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겁니다. 주께서 택한 백성을 알아서 건지시는데 우리의 전도가 주님의 전도에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여기 15절 16절 17절 말이 사도의 말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이겠습니까? 이게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개인의 의견이 아닙니다. 제가 분명히 처음 강의에서 이야기했죠. 개인의 의견은 없다고요. 왜냐하면 복음을 개인의 의견에 맡긴 적이 없어요. 너희들의 생각은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다! 그렇게 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도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이렇게 돼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네가 옳고 내가 옳고가 아니고 너, 나 하지 말고 이 현장에 누가 계시냐? 이 현장에 주님께서 계시다는 겁니다. 네가 주님께서 지시하지 않으면 그런 되지도 않는 헛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헛된 소리 그릇된 소리 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 네가 할 역할이라는 거죠.

그런 이야기할 때 뭐가 빠집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의견은 빠져버리고 누구의 의견이 그 현장에 있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복음인데 부활은 복음이 아닙니까? 십자가가 다음에 부활로 갔잖아요. 그러면 십자가가 부활로 갔으면 부활이 십자가를 넘어선 것, 또는 포함한 것이 되니까 부활을 알면 십자가도 저절로 그 안에 다 아는 게 될까요? 아닐까요? 초등학교 4학년 수학을 보면 3학년 거쳐서 4학년으로 가기 때문에 4학년 수학을 알면 3학년 수학은 그 안에 이미 포함될까요? 안 될까요? 포함되어 있죠. 그러면 부활도 그러하냐 이 말이죠.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믿게 되면 이미 십자가를 안게 된 걸까요? 아는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에게는 부활을 안다고 십자가를 취소할 수 있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바뀌어져요.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를 다시 보라고 부활이 있는 겁니다. 도마에게 주님이 나타날 때 나 부활체이다 이렇게 나타났습니까? 아니면 부활체에 뭐가 새겨져 있습니까? 옆구리에 창 자국, 손에는 못 자국, 그렇다면 그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없을 때 도마를 무엇을 생각하겠어요? 웬 유령이냐?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러나 창 자국 못 자국 있는 것을 봐서 이분은 그냥 살아난 분이 아니고 십자가의 못 박힌 의미를 영원히 존속시키는 요량으로 살아난 분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시어머니가 순천에 산다고 합시다. 우리는 서울에 산다하고요. 순천에 사시는 시어머니가 전화를 해서 “야야 잘 있냐?” “예, 잘 있습니다.”이렇게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 다음 날 벨이 띵동하고 울려요. 보니까 시어머니가 나타났었어요. 서울로 올라왔어요. 올라왔는데 병색이 환연해요. 많이 아픈 몸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때 그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눈앞에 있는 시어머니를 보고 놀랐겠어요? 아니면 그 때 전화했던 그 생생한 목소리가 아니고 병색이 환연한 그 시어머니가 왔다는 것에 놀라겠어요? 어느 것에 놀라겠어요? 어제 전화했던 그것과 환연히 다른 모습으로 온 것으로 놀라겠죠.

그러면 며느리의 기억 속은 뭡니까? 그 때 그 사람입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때 그 사람입니다. 부활이라 하는 것은 여기 시어머니가 나타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순천에 있는 시어머니가 중요하죠. 십자가 지신 분이 눈앞에 나타난 그 결과적 사항이 그 배경이 그냥 부활일뿐이죠. 실제로 핵심이 뭡니까? 사람들에 의해서 버림받았던 그 분이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서 수용이 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는 하나님하고 이것은 다르다는 정도가 아니고 대척 관계에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에요.

지금 사도 바울이 천막 다 치우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어떤 개인이 미워서 후메내오와 빌레도 미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우주를 통째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과학, 철학 어떤 분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팩트, 사실이 뭐냐? 진실로 사실이 뭐냐 하는 겁니다. 진실로 진짜가 뭐냐?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 인정받은 사도죠. 그러면 인정받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너는 그릇되었어! 라고 한다면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분명히 그릇된 것 맞죠? 절대적 기준이 나타났으니까요.

그러면 부활이 지나 갔다는 말은 부활에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십자가에 대한 견해가 진짜 사도가 아니는 견해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부활이 지나 갔다는 것이 그릇된 것을 알고 난 뒤에 나는 부활 안지나 갔어요. 이런 소리를 한다고 그 사람이 자동적으로 복음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반드시 부활은 부활 단독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과 같이 등장해야 돼요. 초밥이라 하는 것은 밥에다가 식초를 넣은 것이 초밥이잖아요. 그렇죠? 말 그대로 하면 그렇잖아요. 그런데 초밥에는 반드시 해물이 곁들여 있잖아요. 회 없는 초밥을 봤습니까? 초밥 주세요! 하면 그냥 밥에다가 식초를 부어서 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부활이라 하는 것은 뭐 없이는 부활이 아니다? 내가 아는 십자가는 이런 십자가입니다. 하고 거론을 하면서 부활을 언급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부활을 생각할 때에 오래 사는 것이 탐이 나는 거예요.

죽으면 억울한데 오래 사는 다른 방법 없나?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을 믿으면 저도 부활될 수 있습니까? 다른 말로 나도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나도 영원히 오래 살 수 있습니까? 여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거예요. 여기가 탐이 나는 거예요. 그 결과물 있지 않습니까? 이게 새 생명 아닙니까? 모든 한국교회가 다 그것으로 가잖아요.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뭡니까? 내가 잘되는 것, 나한테 유리한 것, 내가 되고 싶은 것, 내가 영원히 살고 싶은 희망을 충족시켜 주는 교회는 무엇이며 교리는 무엇이며 내 요망을 충족시키는 그 복음은 어떤 복음이냐? 그것을 찾고 있어요.

십자가 죽읍시다. 아무도 안 찾아요. 주님 혼자 고생했고 우리는 그냥 고생하지 않고 영생, 새 생명 얻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따로 있고 부활 따로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밥에다가 식초를 부으면 초밥인줄 알고 있어요. 반드시 거기에 뭐가 붙어 있어야 됩니까? 회 조각이 붙어 있어야 되잖아요. 회 조각이 모양처럼 붙어 없어야 되고 그 사이에 녹색 겨자가 묻어있어야 됩니다.

복음은 십자가이지 부활이 아니에요. 부활을 언급할 때 생각는 반드시 십자가와 결합해서 부활을 언급해 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와 연결되지 않은 부활은 그것은 진정한 부활이 아닙니다. 복음도 아닙니다.

그러면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부활이 지나 갔다고 언급을 할 때 그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지나갔다고 할 수 있느냐? 그것은 이 본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나타납니다. 뭐냐 하면 사람이 어떤 종교, 그 당시에 기독교도 종교이니까 종교의 지도자가 어떤 뭐라 할 때 그것을 사람들이 판단을 할 때 어떻게 판단을 하느냐 하면 실제로 네가 그렇게 해 봐라! 눈에 보이는 업적과 실적을 나타내면 내가 믿어줄게! 이게 판단 기준이에요.

내가 십일조를 하니까 복을 받더라, 말은 할 수가 있는데 진짜 십일조해서 복을 받은 사람을 불러와 그러면 그 사람들의 말을 내가 청중해 보겠어! 그래서 이렇게 해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했더니만 40배 60배 100배 복을 받더라! 아, 그래요? 그러면 네가 할 수 있다면 나도 그대로 하게 되면 너와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희망으로 삼을 수 있겠죠. 그러면 경제적으로 어떤 손해를 봤다, 사기를 당했다, 재산 날아갔다, 그럴 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원상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십일조라는 것을 하게 되면 원상회복을 할 수 있다. 이것을 알려줄 때 그래도 뭐 밑져야 본전 이라 일단은 믿어보자는 쪽으로 안 오겠어요?

소문났는데 십일조 받쳐서 복 받았다고 소문났는데 심지어 못 고치는 불치병인데 기도해서 낫다는 것이 소문난 교회라면 병원값 아끼기 위해서 거기에 기도하는데 돈 얼마 안 드니까 낫고 난 뒤에 몇 번 감사하고 나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돈이 안 드는 쪽으로 그 교회 간다 이 말이죠. 병도 낫고 하나님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내 눈으로 확인이 돼야 믿든지 말든지 그것을 내가 결정한다는 게 이게 저주 받은 인간들의 보편적 특성이겠죠. 바로 교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했을 때 또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이 있었어요.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 문장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혹 하고 끄는 데가 어디입니까? 우리 죄? 아닙니다. 성경대로? 아닙니다. 그 살아났다는 그 분을 만나고 싶은 거예요. 살아난 것을 만나면 앞에 이야기한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도 인정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살아났고 그 뒤에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사도바울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죠.

이 이야기가 전달될 때 분명히 사도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아까 순천의 시어머니 이야기를 했잖아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던 그분이 살아났는데 사람은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려면 출입구부터 들어가서 놀이기구를 타야 되는데 이 노선 말고 엉뚱한 산 위에서 바로 탈수 있습니까? 탈수 없거든요. 이 입구가 뭡니까? 이 부활의 입구가 뭡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하면 우리는 필히 뭐가 들어가야 됩니까? 우리는 뭘 해도 뭐가 됩니까? 죽어 마땅한 죄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돼요. 인정하고 들어가게 되면 롤러코스터 타는 것은 죽은 채로 가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의 소관입니까?

부활은 누구소관이냐 하면 자기가 미리 당겨서 얻고자 하는 부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기는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채로 안 죽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나? 부활이냐 아니냐를 자기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채로 이게 판단이 안돼요. 성령을 받아서 내가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그 그리스도가 나로 하여금 자기 부활을 나에게 적용시키는 식으로 내가 부활된다!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요.

이게 로마서 6장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함께 살아나사”또 로마서 8장 11절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이 모든 주어가 동력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피동적인 우리가 아니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신 그 분이 우리를 부활시키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만 죄인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문제가 처음부터 출입구가 틀어져 버린 거예요.

아무 것도 안 해도 가만히 있어도, 뭘 해도 죄인 될 수밖에 없다. 왜? 그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통보이고 규정이고 결정사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죽고 사는 것도 나를 죄인 되게 결정지었던 그분의 작업으로 우리가 부활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에게만 먼저 적용된 게 아니에요. 이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에게 먼저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여! 제가 모든 것을 영혼을 주께 맡깁니다. 십자가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내 영혼을 주께 맡기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해 놓고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죠.

우리는 맡길 아버지가 없어요. 왜? 우리는 상상하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맡겨봐야 그거 부도납니다. 맡길 것을 맡겨야지 사기꾼에게 맡기니 내가 지어낸 내 하나님께 나를 맡겨요? 말도 안돼요. 우리가 맡길 분은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그 아버지에게 맡겨야 되는데 그럴 통로가 차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목숨 바치겠다고 어디, 누구한테 목숨을 바쳤는데요? 베드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아버지를 베드로는 몰라요. 성령이 와야 알게 돼요. 그 전까지는 베드로가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요. 아버지에 대해서는 예수님만 알아요.

예수님이 아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은 모른다 이 말이죠. 예수님은 뭐냐? 출입구에요. 나와 더불어 나를 믿는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여주는 죽임에 대해서 동의를 해 줘야 돼요. 우리는 마땅한 죄인입니다. 주님의 그런 조치에 동의를 해야 돼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 내가 그 죄인 복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동의가 돼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의를 할 수가 없어요. 왜, 끝까지 자기 가치를 포기 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한테 마련이 너무 많이 남아요. 그래도 이거 하나는 챙기겠습니다. 자꾸 그래도 이거 하나 챙기겠습니다. 몽땅 드리지 않고 다 드려놓고 마지막 남은 것까지는 기어이 나다운 것을 쥐려고 해요. 그동안 살아온 어떤 성과가 아까운 모양이죠.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부활이 지나 갔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기준에 의하면 이것은 잘못됐습니다. 잘못된 것은 부활만 잘못된 것이 아니고 십자에 대한 이해 전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를 했다면 부활이 지나 갔다는 소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그것은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부활에 대해 관여를 인간이 거론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뭐만 이야기해야 돼요? 십자가만 이야기해야 돼요. 십자가 앞에 내가 죄인인 것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나머지는 저절로 부활이고 십자가이고 죽은 자를 어떻게 끌고 가든지 어떻게 다루던지 그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어떻게? 약속대로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죽은 자 가운데 첫 번째 부활이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는 누가 부활된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이러한 계획에 대해서 우리가 거기서 측정을 한다든지 내가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 한번 시험해 봅시다! 라고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주체가 없어요. 진실로 우리가 이미 죄인인 것을 안 다면요. 그것을 판단하는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주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렇게 돼야 되지 뭘 하나 잡을꼬? 첫째 부활 잡을까? 이렇게 우리가 그것을 잡을 권한이 없습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서울 의존교회160108b (십자가와 부활)―이 근호 목사

복음에 대해서 십자가와 부활이죠. 복음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을 달리 해야 됩니다. 십자가 부활이 인간의 일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의 일이에요. 이게 남의 일이에요. 우리가 부활해 주세요. 십자가 나타내 주세요. 이렇게 요구할 입장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디모데후서 신약을 보고 있잖아요. 구약보세요. 구약에 보면 나타난 주님의 구원은 구약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본인들이 기대하지도 않고 의도 하지 않는 일을 하나님이 벌려 버려요.

이게 성도에게 닥친 신앙생활입니다. 성도 본인이 하는 신앙생활은 종교가 됩니다. 이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항상 우리의 신앙생활을 틀어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게 주님이 벌리시는 일이에요. 주님이여!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많이 해라! 많이 해! 그거 의미 없어! 네가 기대가 가능한 일을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부활의 본질은 결코 인간 손에 포착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저 주께서 거저 주는 혜택이 주어진다면 우리가 알아차리면 안 되는 거예요. 부활이 지나 갔니? 안지나 갔니? 안지나 갔던 지나갔던 둘 다 의미없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부활이라 하는 것은 전제되는 것이 십자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미 죄인이고 그리고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가 나선다면 이것은 죽은 자가 아니고 아직 펄떡거리고 있는 생물, 살아있는 거죠. 그거는 모순됩니다. 죽은 자라면 너 입 다물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 순서, 그 다음 절차에 대해서 네가 입 다물어! 그러면 죽어 있으면 됩니까?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나 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너희에게 뒤집어 씌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은 부활했잖아요. 그 다음부터는 우리의 부활이 없어요. 왜? 우리는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은 죽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부활은 없어요. 그러면 뭐냐,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끝까지 우리 부활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그 다음에 예수님의 속한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 져서 살아나는 겁니다. 은근히 영생을 노리고 은근히 부활을 노리는 그런 꼼수는 주께서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피해 가버립니다. 예수 십자가 믿고 난 뒤에 나중에 진짜 덩어리 부활을 믿게 되면 나는 부활의 영광이 된다고 이렇게 노리지 마세요. 그런 꼼수는 혼자 상상하는 겁니다. 주께서는 그런 상상을 전혀 들어주지 않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18절을 봅시다. “진리에 관하여 너희가 그릇 되었도다.”부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진리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부활만 잘못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는 아는데 부활만 바꿔라! 그게 될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벌써 후매네오와 빌레도가 이미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특히 교인들이겠죠.

사람들은 부활을 자기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데 그 오백 명하고 사도 바울 하고 이런 사람들에게만 딱 나타나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 부활했다는 소문이 없고 그것을 봤다는 사람도 없다 이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부활을 안 것으로 들통 나는 것은 더더군다나 싫은 일이고 그러면 해결책은 간단한 겁니다. 이미 부활은 지나갔다. 그렇게 되면 부활을 목격해야 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죠. 부활을 목격해야 신앙인이 된다는 그 심리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부활을 목격 안 해도 신자라는 평가를 당당히 받을 수 있는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관심사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에 관심 없고 부활을 했다는데 누구는 봤다는데 나도 보여줘! 이렇게 자기가 보고 믿겠다는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하는데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3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여기 성경대로 몇 번 나옵니까? 두 번 나오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했다는 말은 제가 아까 설명했듯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은밀한 그것을 인간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신경 쓰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시켜 버린 겁죠. 성경대로 가동시켜 버린 겁입니다.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것이죠. 그러면 예수께서 성경대로 모든 것을 가동시킨 거예요. 가동시키는데 그 가동된 것에 포착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 죄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데 이것마저도 뭐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약속된 바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죠. 뭐가 빠진 겁니까? 우리가 뭘 해야 됩니까? 이것은 완전히 다 빠지는 거예요. 내가 용서 받기 위해서 내가 죄인 되기 위해서 뭘해야 됩니까? 이런 것도 다 빠지는 겁니다.

가만히 있어라! 죄인 되게 규정하는 것도 네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 너는 성경대로가 아니니까 성경대로 담당자가 따로 있으니까 누가? 아버지와 주님이 알아서 성경대로 죄인 되게 했다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물론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 뜻대로 안 되지만 하여튼 성령에 의해서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받아들이게 되면 나 받아들이니까 구원받았습니다가 아니라 아, 성경대로 받아들여야 하기에 받아들이게 하셨군요! 라고 피동적으로 되게 됩니다.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본인이 인생을 몰고 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마차에서 말이 앞에 있고 뒤에 수레가 있죠. 말이 끌면 수레가 끌려가잖아요. 주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고 수레를 앞에 두고, 우리를 앞에 두고 말이 뒤에 가요. 뒤에 앞에 수레를 밀어 버립니다. 기관차가 뒤에 있고 객차가 앞에 있는 식이 돼요. 그러면 우리 눈앞에 뭐가 보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안 보이죠. 아무 것도 안 보이니까 아무 것도 해석 안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 것도 안 보이니까 뭐를 시사 하겠습니까? 내가 인생에 대해서 불안하니까 뭐라도 나한테 조치를 취해야 되겠죠. 뭐를 선택해야 되고 뭐를 결정해야 되고 뭔가 규정해야 되고 뭔가 사귀어야 되고 뭔가 활동해야 되고 그것을 안 하면 답답해서 못 견디거든요.

기도 싶어 하고 헌금도 하고 전도도 하고 싶고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뭔가 하겠죠. 그런데 뒤에 말의 입장에서는 그런 짓을 하는 그것이 바로 말을 죽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뒤에서 너의 행동으로 너로 인하여 죽게 된 내가 뒤에서 받쳐주니까 그래서 성도는 뭐냐? 내가 한 모든 행동은 죄가 되고 이 죄를 미리 알려 주면서 해결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성경대로 이미 나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우리 보고 지키라고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보고 못 지킨다고 주신 것이고 그리고 지키는 분은 우리를 죄인 되게 규정하시는 예수님만이 성경을 지키는 거예요. 일점일획이라도 어기지 않고 다 지킨다는 말뜻은 무슨 뜻이겠어요? 경쟁하자는 이야기잖아요. 너희들이 지켜서 하는 의와 내가 십자가에서 이룬 의와 어느 것이 천국을 뚫을 수 있는가를 한번 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해요. 말이 앞에 있고 우리는 수레가 돼서 앞에서 끌고 가면 우리는 끌려가기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끌려가는 것이 자기의 장점이 되어 버리면서 죄가 들어나지를 않아요. 뭐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하면 시키는 대로 한 것이 잘난 일이 되어 버려요.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게 하시는 것은 아무도 믿을 자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도 믿을 분이 못 된다는 것을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내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도움이 안 되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전혀 내 구원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끼게 하는 겁니다.

뭐를 믿어도 그 믿음마저 다 좌절되는 그런 인간을 주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용쓰지 말라는 겁니다. 용을 쓰나 안 쓰나 인간은 용을 쓰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 죽인다고 가만히 있을 인간이 없습니다. 처음 한 두 끼 굶을 때는 가만히 있죠. 한 세끼 굶으면 배고프면 뭐라도 해 봐야겠다. 합니다. 말이 안 보니까 역시 믿을 놈은 나밖에 없네! 나밖에 믿을게 없어요. 진작 그렇게 살지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 했느냐 이 말이죠.

주님 앞에 잘 보이면 믿음 좋다고 칭찬 들을 줄 알았어! 없어! 너는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고 없어! 네가 지어낸 거야! 네가 상상한 거지 그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에 내가 이미 죽었나니! 죽은 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와 협상이나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놓고 고린도전서 15장 16절을 보게 되면 이것이 단순이 부활이 아니고 복음 전체에 관련된 상황이라는 것을 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여기 있는 단어가 어떻게 얽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은 저쪽 하늘에서 오신분이잖아요. 그러면 땅에 있는 사람은 무엇이 한계이냐 하면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으라 하는 것은 없고 왜? 죽었다 살게 되면 자기 죽었던 할아버지도 살아서 돌아 다녀야 하거든요. 없잖아요. 그렇죠?

인간들의 한계가 뭐냐 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는 것이 한계인거예요. 그 한계에 주님께서 거기에 끼어드신 거예요. 끼어들어서 살아나신 거예요. 그러면 뭐가 잘못됐습니까?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 살아나는게 없다는 것이 이게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좁은 너의 식견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다. 이러면 또 안돼요. 오늘 본문에 보면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 다음에 너희가 죄가 운데 있을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주께서는 주님이 오시지 말고 모든 사람을 죽여 놓고 죽었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좀 살아 돌아다니면 되잖아요. 아, 사람은 죽어도 또 살수 있구나! 이러면 간단한 문제인데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개입해야 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얘들아, 너희가 죽으면 그만인 줄 아느냐? 걱정하지 마! 죽어도 다시 살아나! 저희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10년 전에 죽었던 너희 아버지 있지? 예, 내일 살려줄게! 아, 맞네요! 이게 주의 말씀이 맞네요. 사람이 죽은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러면 문제가 깔끔하게 끝났잖아요. 뭐가 문제죠?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아,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사는구나! 이렇게 되면 아무 문제없잖아요. 뭐가 빠져있습니까? 죄 가운데 있다는 이 말이 빠진 거예요. 죄에 갇혀있다는 죄 가운데, 너희가 죽어서 다시 사는 게 없다는 그 문제를 다시 사는 문제를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죄와 연관해서 생각할 줄 몰라요.

왜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이 그릇되고 그냥 죽음으로 끝나느냐?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왜 죄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깊숙이 집어넣는데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는 창조 안에서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전부 다 빠져 버렸어요.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것을 누가 자기 지혜로 이것을 터득하겠습니까? 공자가 터득했어요? 부처가 알아챘습니까? 아무도 몰랐죠. 왜 모릅니까?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겁니다. 왜 죄 가운데 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미 옛날 그 아담이 아니에요. 이미 죄를 범한 인간은 이 창조를 누가 만들었으며 주인공이 누구이며 누구를 위하여 누구로 말미암아 만들어 졌다는 그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겁니다. 같은 모르는 인간들이 모여서 과학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는 겁니다.

이게 팩트에요. 사실입니다. 당 이름을 뭐로 할까? 국민의 당! 이게 정답입니까? 국민의 당 이게 예수님의 계시입니까? 누가 했습니까? 쉽게 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접촉할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죄를 앞장세웁니다. 죄를 앞장세운다는 말은 이 부분이 죄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 전체가 죄에 갇혀있다는 말입니다. 특정 행동이 죄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숨 쉬는 것도 죄, 모든 것이 죄에 갇혀있는 그것을 한꺼번에 들추어내는 그런 사건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에스더 보세요. 에스더가 왕비가 됐잖아요. 에스더가 알게 된 경우가 뭡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다시 말해서 죽기 위해서 왕비 되었다는 사실을 왕비 컨테스트할 때는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왜 모릅니까?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죄 가운데 있는 에스더에게 모르드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투입하니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왕비된 것이 누구 뜻이다? 내 뜻이 아니었다. 이것은 나에게 찾아온 분이 사전에 전략적으로 너는 왕비 되어야 했기에 왕비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몸은 죄를 드러내는 일에 활용된다면 쓰시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

부활은 내가 사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쓰임 받는 것입니다. 무슨 쓰임?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활되어야만 하는 팔자가 성도의 팔자입니다. 뭘 보여 주기 위해서? 살았다? 아니에요. 우리는 죄에서 예수님 때문에 죄인에서 의인되었다는 그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활이 필수적으로 거론되고 부활된 사태가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주님의 숙제입니다. 우리의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주님이 저 부활시켜 주지 마세요. 한다고 해서 부활 안 시켜 주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까불지 마라 이 일은 너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야! 주님의 지속적인 십자가 복음의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부활은 필히 따라오는 겁니다. 주님의 일을 마치 내 일처럼 그렇게 여기시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일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일입니다. 날씨 추운 것, 주님의 일입니다. 해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해가 뜨는 것, 달이 뜨는 것, 누구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다.

요셉이 팔리는 것? 요셉이 꿈을 꿨는데 해와 달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 요셉이 그것을 창작했습니까? 아니죠. 주님의 개입입니다. 요셉은 그게 자기 꿈인 줄 알았죠. 나중에 자기가 팔려 갔을 때 자기가 감옥에 내려갔을 때 비로소 이 일이 내가 다룰 수 있는 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의견을 묻는 게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협약된 거예요.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 겁니다. 그 창조의 원리가 모든 창조물 속에 하나의 상처로서 다 삽입되어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을 다시 설명합니다. 수레를 앞에 두고 뒤쪽에 말을 둠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기껏 죄밖에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 예수 믿는 그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말이 뒤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까? 그래도 구원 안돼요. 왜냐하면 구원은 내 소관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으실 때에 그게 바로 은혜에 속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두 가지 믿음이 나와요. 하나는 은혜에 속한 믿음이 있고 본인이 믿으려고 하는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은 본인이 믿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행함에 속한 거예요. 믿음은 반드시 은혜에서 와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행함의 가치가 무산될 때 내가 믿던 소망하던 모든 행동이 그게 다 의미 없이 어디 까지나 내 일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느껴 질 때 주님의 숙제, 주님의 자기 과제로서 우리를 주님의 일에 동참시킨 겁니다.

그 다음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5장 봅시다.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여기서 우리라는 말이 나오죠. 이것은 성도한테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이 모든 이야기가 이렇게 보시면 돼요. 예수님한테 일어났던 그것을 확장시켰다고 보면 모든 것이 간단해요. 복음은 뭐냐,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나한테 돌아올 이익을 챙기는 게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챙길 주체가 없습니다. 죗값은 사망이라서 우리는 죽어 마땅하지 복 받아 마땅한 자는 아니거든요. 복 받아야 마땅한 자는 주님의 일방적인 소관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 낸 자만 복 받을 자가 돼요.

십자가에서 부활로 넘어갈 자아가 중간에 없어요. 이 자아는 예수님의 자아만 해당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께 수용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조원리입니다. 우리가 잠깐 있다 사라지는 이유는 그리스도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192 자유게시판 140강-YouTube강의(희생)160107-이 근호 목사 레위기 최고관리자 16-01-10
15,191 자유게시판 수련회 참가자 명단 [수련회] 최고관리자 16-01-09
15,190 자유게시판 수련회 방 배정표 [수련회] 최고관리자 16-01-09
열람 ➜ 강의 십자가와 부활 160108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6-01-09
15,188 강의 고향 160108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1-09
15,187 강의 무한과 초월 160107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1-09
15,186 강의 유튜브(140강, 141강), 희생 , 영적 전쟁 160107 레위기 최고관리자 16-01-09
15,185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b -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1-07
15,184 자유게시판 20강-창 3장 11-13(하나님의 추궁)160106-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1-06
15,183 자유게시판 수련회 시간표 [수련회] 최고관리자 16-01-06
15,182 우리교회 하나님의 추궁 160106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1-06
15,181 자유게시판 수련회 준비물 및 오시는 길 [수련회] 최고관리자 16-01-06
15,180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5. 12. 18) 1강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6-01-05
15,179 자유게시판 172강-고전 12장 14-17(지체의 다양성)160103-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1-03
15,178 자유게시판 64강-신 11장 8-12절(약속의 땅)160103-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1-03
15,177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6 - 주님의 증인 잠언 최고관리자 16-01-03
15,176 우리교회 약속의 땅 160103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1-03
15,175 묻고답하기 요긴한 지체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1-03
15,174 우리교회 구원의 길 160103 - 최고관리자 16-01-03
15,173 우리교회 지체의 다양함 160103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1-03
15,172 설교 지체의 다양함(고린도전서 12:14-17)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1-03
15,171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1-03
15,170 자유게시판 서울 의존교회151211a,b (말씀의 주권)―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6-01-01
15,169 자유게시판 19강-창 3장 7-10(두려움)151230-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2-31
15,168 우리교회 두려움 151230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2-3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