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b -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b -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12)
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 궁금한 것이 있어요. 마귀의 자식라면 그냥 내버려 두지 굳이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그들 속에 오신 이유가 뭐냐?
내놓은 자식이라면 상관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것이 ‘말을 건넴’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구원의 시발이 말을 건네는 거에요. 창세기 3장에 유명한 말이 있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말을 건네는 겁니다.
그런데 말을 건넨다는 말은 말을 건네기 전까지는 인간은 어떤 질문도 소통할 수 있는 질문을 내뱉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교인들이 신앙생활이 안 되는 이유가 질문할 것이 없어서 그래요. 질문을 하면 궁금해서 성경을 찾아보든지 하는데 전혀 뭐를 질문을 해야 되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설교할 때 “여러분 이런 것을 질문하고 싶지 않았습니까?”라는 것을 끄집어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돼요. “이런 것들이 궁금했지요?”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에 성만찬 같으면, “‘그 성만찬 떡(살)을 잘못 먹어가지고 아픈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는데 성만찬을 치루면서도 살아남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만찬에 참석해야 합니까?’ 이런 것이 궁금했지요?”라고 묻는 작업부터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교회를 안 나오고 말씀을 안 듣게 되면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느냐(질문거리)를 모르는 거에요. 그 궁금거리를 모르게 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만드는 셈이 되어서 큰일이 나는 겁니다.
다른 분이 만들어줘야 되는데 내가 알아서 만들어 봐야 그냥 고만고만한 것이고 그저 남 뒤따라가는 흉내내기에 그칠 뿐이죠. 창조자로부터 질문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으면 되지요.
그런데 그 질문이 무서운 질문이에요. “너희는 아비 마귀한테 속했고” 이것이 질문이에요. 단정짓는 겁니다. “너는 땅에 속했고 또는 너희는 내게 속하지 않은 세계에 갇혀 있고” 항상 질문 자체가 우리에 대해 부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해대거든요.
그것은 왜 그런가? ‘걸림돌’ 때문에 그렇습니다. ‘걸림돌’을 빼게되면 전국민이 신자가 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중세시대입니다. 392년 데오도시우스가 선언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로마 시민은 신자가 아니면 공무원이 될 수 없다. 전 국민이 신지로서 오직 국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콘스탄틴 대제는 종교의 평등은 선언한 것이고 국교는 데오도시우스가 처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국교를 선포했다는 말은 모든 국민은 기독교 신자이고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교회가 들으면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겠습니까! ‘제발 기독교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어가지고 일요일에는 절대로 시험 안 치르고 모든 공무원들은 전부 다 기독교 신자로 만들어 가지고 이상적인 국가가 되고 싶다.’는 그런 여망이 있잖아요.
그러려면 방법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방법은 ‘걸림돌’을 빼는 겁니다. 어떻게 빼느냐? 주어진 몇 개의 문장만 ‘예.’라고 인정한다면 신자로 간주해서 세례를 주고 성만찬에 참여시켜 버리면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도 구원이 되는 거죠.
그 몇 개의 문장이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십자가의 걸림돌을 뺀 대용입니다. 십자가의 언급이 없이 삼위일체를 언급하면 돼요. 그러면 삼위일체의 핵심은 뭐냐? ‘존재론’입니다. 이렇게 묻는 겁니다. “당신은 존재합니까?” “예 존재합니다.”
그러면 “당신을 만든 분은 존재합니까?”라고 물어요. “예 존재합니다.” “누굽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일단은 신자가 될 기미가 보여요. 이미 모든 국교가 기독교인데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가 되어버리면 그 다음 질문이 궁해져 버려요.
“그러면 너는 누가 만들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마귀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렇잖아요. 자, 그렇다면 일단은 됐어요. 나는 신이 만들었다. 그러면 이미 유신론이 돼요. 신을 인정한 것이 되지요.
그러면 남는 것은 ‘신이 인간 존재를 어떤 식으로 창조하느냐?’ 그것만 삼위일체를 가지고 집어넣으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넣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음을 고백하는 거죠.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가 계속 이야기할게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의 국가종교라고 합니다. 국가종교는 종교국가하고 다릅니다. 종교국가는 현재 캐톨릭을 말하지요. 모든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캐톨릭으로 전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수도가 바티칸이죠.
국가종교라는 것은 국가 자체가 종교가 되는 겁니다. 민족주의 이전에 중세 때에 나라들이 전부 다 국가종교입니다. 어떤 영주가 갖고 있는 종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그 속에 있는 농노(농민, 백성)들은 그 종교를 따라야 돼요.
1555년 아우스부르크 회담에서 결정했어요. 그 회담에서 이미 결정을 내려버렸어요. 그러니까 마을 이장이 기독교라면 마을 전체가 갓 태어난 아이도 전부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겁니다. 요즘 우리 교인들 같으면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나도 좀 그랬으면 좋겠다.’
‘회사 오너가 기독교 신자라면 자동적으로 전부 다 말단 신입사원도 기독교 신자가 되는 그런 것 좀 시행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렇게 할 때 그들이 인간이고 인간의 이성이 있다면, 바보가 아니고 짐승이 아닌 이상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할 때 이것은 일색(동일할 색깔)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겁니다.
아까 전에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답변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면 대안을 제시를 해야 되는데 “누군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면 안 되거든요. “신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일단 합격입니다.” 그 다음에 “당신 속에 양심이 있어요 없어요?” “양심이 있지요.”
“착하고 싶어요 나쁘고 싶어요?” “착하고 싶어요.” “그러면 그 마음은 누가 줬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설명해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으니(창세기 1장 28절)”이 됩니다. 짝짝 성경대로 지금 맞춰가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약이에요. 신약도 이렇게 해야 되잖아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는데 사람이 죄를 지었고 사람의 힘으로는 죄 용서를 할 길이 없어서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성자를 보내서 용서하신 것을 믿습니까?”라고 하면 “안 믿는다.”라고 할 수가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것을 안 믿는다고 하면 그 다음에 답변이 궁해져요. “그러면 당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씻습니까?”라고 물으면 난처해지거든요. 자기의 나쁜 짓이 계속 발견이 된다면 알고 있는 죄는 착한 것으로 상쇄가 되면 되는데 계속해서 발견이 되는 죄는 계속해서 착해야 되는 부담을 느끼는 거에요.
다들 그런 생각 안 해요? 왜 그렇게 교인들이 열심입니까? 나쁜 짓을 한 것을 대비해서 보험들어놓는 거에요.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쌓아두면 설사 나쁜 일을 할지라도 착한 일을 모아둔 창고에 가가지고 몇 개 빼가지고 그것으로 이것을 상쇄하면 된다니까요.
창고가 있으니까 마일리지를 많이 쌓아놓고 급할 때 대한항공 마일리지를 쓸 수가 있다 말이지요. 천국도. 그걸 정리한 것이 마지막 삼위일체로 마감이 돼요. 성부, 성자, 성령이 있었는데 성자가 죄를 대신하여서 이 땅에 오신 분이고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이시고 성부는 그것을 계획하신 분이고 아버지시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어려운데, 이게.. 뭐가 빠졌지요? 십자가가 빠졌다고 하지 마시고 ‘걸림돌’이 빠졌다고 하세요. ‘걸림돌’이 빠졌어요. 왜냐?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똑같은 방식으로 유대인 전체를 국가종교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한테 살해당했습니까? 이방인 헬라인에게 죽었습니까? 로마 사람한테 당했습니까? 누구한테? 바로 그 유대교라는 국가종교한테 살해당하기 전에 요한복음 8장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고방식과 행세가 전부 다 마귀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믿을래야 믿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자기 속에 있는 거짓을 가지고 저희들끼리 떠벌리면서 나에 대해서 떠밀고 있고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이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세의 국가종교에서 하는 수법과 유대인의 수법이 동일하다면 똑같은 인간이기에 누구나 그런 생각이 일어난다는 논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고요 오늘날 그들이 질타받은 논리가 매일 우리 속에서도 쏟아져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 속에서 그들과 동일한 것이 쏟아져 나온다는 말은 늘 십자가라는 걸림돌은 계속해서 빠지고 있는 가운데서 우리도 살고 있는 겁니다. 이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두 가지 용어를 여기에서 사용하겠습니다.
하나는 ‘이상적 자아’입니다. 두 가지를 같이 써버리면 너무 어려우니까 한 가지만 먼저 쓸게요. ‘이상적 자아’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이미지가 따로 있다.’ 이것은 “얘야 니 꿈이 뭐니?” 어릴 때부터 전부 받은 질문이잖아요. “너 커서 뭐 할래?” 이것이 ‘이상적 자아’입니다.
전혀 어렵지 않지요. 진짜 어렵지 않은지 한 번 보겠습니다. 밑에 쓰겠어요. ‘이상자아’입니다. 그런데 ‘이상적 자아’와 같이 ‘적’자를 사이에 둔 것과 그렇지 않은 ‘이상자아’가 달라요.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이 뭐냐? 쉽게 갈 걸 괜히 두 가지를 다 써서 어렵게 간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게 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걸림돌이라는 용어를 설명을 못 해요.
‘이상적 자아’라는 것은 되고 싶은 거지요. 누가 되고 싶어해요? 내가 ...(미래에) 되고 싶어하는 어떤 이미지나 모델이 ‘이상적 자아’입니다. 그런데 ‘이상자아’는 저쪽(낯선 장소)에서 나한테 말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내가 되고 싶은 어떤 코스(노선)가 있잖아요. 그 코스 말고 다른 코스로 치고 들어오는 것이 ‘이상자아’입니다. 그러니까 ‘이상’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지만 설명하기 위해서 쉽게 한다면 ‘자아’가 이상해졌어요.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상하게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내가 왜 이러지’ 하는 것이 내 인생에 차고 들어오고 칩입해서 들어와요. 뭔가 내 인생을 가로막고 방해공작을 하면서 내 뜻대로 안 되게 만드는, 내가 원하는 코스가 아니라 다른 코스로 강제로 질질 끌고 가는 그런 힘으로 차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이 잘나고 잘난 유대인들 앞에 주님이 나타난 겁니다. “목사님 대표적인 예를 들어주세요.”라고 하면 간단합니다. 바로 사도바울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지요.
만나서 나누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소개할 때 “니가 핍박하는...”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핍박받는 분으로 나타났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핍박했습니까? 사도바울 본인이 예수님을 핍박한다고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이미 죽고 없어졌어요. 누구를 붙들고 멱살을 쥘 입장이 아니에요. 살아있어야 멱살을 쥐지요.
이미 예수님은 죽은 사람이고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는 헛된 소문을 퍼뜨리는 그런 이단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척결하기 위해서 설치는 것이지 지금 예수님 당사자를 붙들고 멱살을 쥐고 “당신을 핍박할거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이상적모델’ 안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 이미 죽었잖아요. “이순신 나와.” “죽었는데 뭘 나와?” 사도바울이 기대하는 이상적 모델 코스에 대한 스케줄(절차) 안에는 예수가 없어요.
‘나는 젊으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그 당시 유대인들한테 종교지도자로서 인정받고 나중에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하리라’라는 이상적모델 코스 내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지 않다니까요.
이미 죽었으니까 들어오시고 마시고 할 것도 없지요. 죽은 사람인데 뭘 들어와요. 그런데 갑자기 치고 들어온 거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말을 건네면서.. 이게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사도바울은 자기의 ‘이상적자아’를 버렸겠습니까 그냥 유지했겠습니까? 유지하지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왜냐하면 이 몸이 자기 몸이 아니고 옛날에 어떤 ‘이상적자아’를 추구하는 모습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사도바울은 압니다.
“내 속에 또 다른 죄가 있는데 죄와 내가 싸워서 죄가 이기고 나는 지더라. 나는 선한 법을 원하지만 그 원치 않고 나를 더 악한 법으로 몰아세우는 그런 자아가 또 있더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본인이 알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말을 건네온 주님이 이미 그 사람을 장악한 것이고 이 사람을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거에요.
성령이 오면 우리의 본색을 놓치는(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그대로 쥐고 그 본색과 주님을 대비시키면서 이미 너는 건널 수 없는 구원을 건너버린 거에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구원론은 더 이상 날아가고 없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구원 받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보이스피싱이에요. 돈 빼먹는 거에요. 여러분 베리칩 문신 하지 말아야 되고 뭐 해야 되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사기꾼들입니다. 십일조, 십계명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온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성령세례 받고 구원되었다고 사도행전에 나와요.
뭐가 필요합니까? 놀랍게도 구원 받는 데에 아무것도 필요 없었습니다. 심지어 회개조차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구원 받고 난 뒤에 즐거이 회개를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과 상관없이 회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구원 받은 능력으로 늘 반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반성이에요. 반성한다고 구원이 더 되고 반성한다고 복을 더 받고 반성을 안 한다고 복을 덜 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미 저주는 날아가고 없어요. 저주는 없어요. 왜냐하면 저주를 받거나 복을 받을 대상 자체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에요.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인데 그리고 주님이 자신의 몸을 자기가 복을 준다고 하는데 내가 더 바라고 할 것이 없잖아요.
내 것 같으면 ‘더 주세요.’라고 하겠는데 주님이 주님의 몸을 알아서 만드는데 내가 더 달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소급해서 “내가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만이 나올 뿐입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사도바울은 편지를 씁니다. “내가 몸은 매여도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아주 간결한 투로 이야기를 하지요. “몸이 매였느냐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이 방식이 예수님께서 이사야에서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 몸은 죽어도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같은 방식이에요. 그것이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로 끝난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죄를 지어도 말씀은 그대로 죄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예가 되는 거에요. 고린도후서 한 번 봅시다.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공식 속에 제일 먼저 시작이 ‘약속’이지요. ‘약속’이 오게 되면 그 결과 반응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데 ‘아멘’이 나타났잖아요. ‘아멘’이 나타나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골라잡아서 ‘아멘’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으면 ‘약속’이 알아서 우리로 ‘아멘’을 토하게 만든다 이 말이죠.
성적이 내려가도 ‘아멘’, 몸이 아파도 ‘아멘’ 이것은 우리의 능력을 초월합니다. 이것을 아까 ‘최초의 원인,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라고 했고 그것이 아멘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따져봐도 ‘아멘’이 아니고 ‘노멘’을 하고 싶은데 말이죠.
약속 안에 내정되어 있으면 분명히 남들 같으면 원망해야 될 일도 주께서는 그것을 우리 입에서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게 하시는데 그때가 그 것(일)을 통해서 ‘아, 내가 다룰 수 없는 능력 이상의 분이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순간입니다.
분명히 이것이 기뻐해야 하는 현상도 아닌데 이상하게 갑자기 기쁨이 생성되는 것은 약속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내가 약속을 쥐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나를 쥐고 이끌기 때문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12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옛날(그때)의 일을 다시 되돌아 보세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이 자기의 소원이었습니까? 평소에 윈드써핑하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물 위를 걸었잖아요. 물고기를 잡으면 잡았지 물고기 아가리를 벌려보니까 거기에서 동전이 나왔는데 그 물고기는 한국은행 근처에 있던 물고기입니까? 한국 연못 속에 있던 금붕어에요? 그 물고기에서 동전이 왜 나오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물고기처럼, 그 물(주님이 걸으셨던)처럼 주께서 나를 그런 인식으로 다루어 오고 있었다는 거에요. 지금도 다루고 있고요. 놀라기는 남들이 놀라는 거지요. “나는 네가 예수 믿을지 몰랐다. 너 같은 인간, 혜화동에서 술만 먹던 인간이 목사가 될 줄은 몰랐다.”
그 목사님은 절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불교에 심취하셨답니다. “네가 목사가 되다니..” 나중에 90이 넘은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옳도다.” 그분 친척분 중에 목사들이 많은데도요. “네가 한 말이 진짜 복음 같아. 다른 것은 다 엉터리 같아.”라고 하셨답니다.
그러면 자랑질할까요? 아니지요, 자랑질을 할 수가 없지요. ‘주님 왜 저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십니까?’라고 혼잣말로 이야기하지요. ‘이것은 제가 원한 인생이 아닌데요.’ 그것이 ‘이상자아’에요.
주께서 건너오실 때 이미 원본이 따로 있었어요. 이것은 내가 컨닝할 수 있는 원본이 아닙니다. ‘나는 ‘이상적 자아’에 푹 빠졌어. 나는 꿈이 많은 소녀야. 부푼 가슴을 안고 하여튼 꿈이 많아요.’ 꿈이 많아봤자 전부 다 늙으면 그만이지만요.
그 많은 꿈들이 진짜 개꿈으로 끝나 버려요. 그리고 내가 기대치 않던 다른 인간으로 달라졌는데 내 인생에 대해서 모두(all)가 ‘아멘’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 내용이 흔히 많이 나오는 주기도문의 끝부분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입니다. 재벌이나 대통령이 그런 고백을 하겠어요? 돈을 버는데 무슨 그런 고백을 하겠어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모든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WE)”라는 새로운 집단(집합이 아닌)입니다. 그 중앙에는 예수님에 의해서 소집당한, 호명당한, 호출당한 그런 개개인들이 있는데 그들을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는 호명하는 관계로써 만들어지는 겁니다.
내가 너를 불렀을 때에, 호명했을 때에, 아브라함아, 아무개야 불렀을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에 일어나 나왔잖아요. 그리고 “보기에 답답하구나”라고 하셔서 풀어줬잖아요. 죽은 지 나흘만에 기어나온 거에요.
이것을 나사로가 기대했겠습니까, 마리아가 기대했겠습니까, 마르다가 기대했겠습니까, 12제자 중에 나흘 만에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을 누가 기대했겠습니까? 아무도 기대를 못 하지요.
그러면 그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나온 것에 대해서 나사로는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제가 예수님의 계획대로 되는 그러한 ‘이상자아’였군요. 내 소원이 아니고 주님의 소원으로 성도가 되어야 되지 내가 요구하는 성도는요 도중에 스톱이 되어 버려요.
‘5년 전에 참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이 사람은 5년에서 스톱 되어 버렸어요. 5년 전에서 제자리 뜀하고 있어요. ‘참 6년 전에 은혜 많이 받았는데..’ 이 사람은 6년 전 자아를 지금까지 계속해서 울궈먹고 있는 거에요.
내가 기대하는 성도는 100% 가짜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거든요. 그래서 내가 기대한 ‘이상적 자아’에 의한 성도를 자랑질하지 마시고 그것을 아낌없이 부수어주셔서 볼품없는 자아가 된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보기에는 신자로 보이지? 나는 맨날 불신자야. 그런데 주님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아.” 차라리 주님만 증거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봅시다.
그래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는 것은 말을 건네오는 겁니다. 아예 그 사람들을 내치기 위해서 하시는 말이 아니고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마귀에게 속했다”는 말은 “너만 버림 받은 것이 아니고 나도 버림 받을 거야. 다 같이 버림 받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이상적 자아’로서 구원을 기대하지마.” 그것은 종교 친목회이고 취미생활이거든요.
지난 주일날 낮에 제가 그런 설교를 했잖아요. 취미생활에는 고난이 없다고 했지요. 힘든데 왜 나옵니까? 재미나기 위해서 하는 것을 왜 그렇게 하겠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취미생활이에요. 힘 들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치 않는 힘듬과 쓴잔을 우리에게 주는데 그 이유는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이상자아’가 있기에 그런 것을 주님만 따로 알고 있고 우리는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자꾸 꿈을 키우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상적 자아’를 무산시키는 일을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도 ‘이상자아’를 미리 당겨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라고 하는데 그것을 알면 우리는 믿는 자가 아니에요. 내가 나를 소유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내가 나를 믿는 게 돼요. 내가 예수 믿는 나를 믿는 식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안 돼요.
주님만 믿으려면 내가 쥐어야 될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돼요. 아버지와 아들이 아침에 식사를 하는데 난데없이 아들이 “나는 이제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이 말은 분명히 이 아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그런 겁니다.
남편이 갑자기 생전에 안 하던 “사랑한다.”는 말을(경상도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안 하는데) 하거나 선물을 갖고 올 때는 수상한 게, 뭐 잘못한 게 있는 거에요, 유난떨 때는 조심해야 돼요. 수상해요. 뭔가가. 분명히 발 저리는 것이 있어요.
우리는 늘 우리의 마귀적 본성이 어느 정도 괜찮다고 하면 그것을 내 소유로 해가지고 남들한테 내자랑을 하고 싶어해요. ‘나 이 정도 되는 신앙인이야.’ 이것이 ‘이상적 자아’잖아요. ‘내가 이런 수준까지 올 줄은 미처 몰랐어. 내가 이렇게 되다니..’
그런데 그런 방법을 주께서는 금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마음껏 하게 해요. ‘그래, 남들한테 네 자랑하는 것 실패해라. 내일 한 번 보자.’ 그리고 내일은 차마 남들한테 자랑할 수 없는 흉측한 일을 간직해야 되지요.
그런 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회상하듯이 주의 일을 하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8장 47절 봅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설명을 수요일날 했기 때문에 빨리 하겠습니다. 주님에게는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계통구원입니다. 주님께서 카펫트를 쭉 깔아버려요. 그런데 카펫트는 한 장입니다. 그 위에 자기 백성을 놓아버려요.
그러면 백성들은 각자 ‘주님께서 나를 구원했다.’고 오해해요.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도 오해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믿는 주님이 진짜 주님이야.’라고 서로 싸워요. 이때 주님이 카펫트를 싹 당겨버리면 구원 받은 자만이 그 위에 실려있기 때문에 그 계통은 딸려오지요.
걸림돌 위를 넘어선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아까 내 자랑했는데 미안합니다. 사실은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딸려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 카펫트 위에 있지도 않으면서 있는 척(구원 받은 척)을 하는 인간은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줘버리면 다 넘어집니다. ‘내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데.. 내가 이 교회 지을 때 집을 팔고 난 월세로 들어가고 집 팔고 남은 돈을 주차장 짓는 데에 다 냈었어.(다 낸 것이 투자한 것이지요.)’라고 하며 나서는 거에요.
그러면 그것은 자기가 깔아놓은 자기 방석 위에 날이면 날마다 점점 자라나는 거에요. 그것을 자기 스토리, 자기 소설 또는 자기 연대기적 역사라고 하는 겁니다. 몇 살 때 교회에 왔고 주일학교 어떻게 했고 지금 20대에 무슨 봉사했고 나중에 장로가 되면 봉사할 것이고 아들 죽인 사람까지 아들을 삼았고 이것이 쭉쭉 쌓이는 겁니다.
그래봐야 소용이 없는 거죠. 그것은 십자가 앞에 다 넘어가는 겁니다. 신학박사, 교수들 전부 다 넘어가요. 십자가를 전해버리면 그 앞에서 잘난 자도 없고 아무것도 소용이 없어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지, 그런 껍데기는 소용이 없어요.
반석이 중요하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무 소용 없어요. 물론 제가 이것을 카펫트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성경에는 이것을 가지고 예수 안, 또 다른 말로 십자가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과 반대되는 사람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원수(빌립보서 3장 18절)라고 하지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이미 기준이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의 원수냐 아니냐 그것만 보는 거에요.
그래서 설교할 때 마지막으로 십자가만 증거되어야 되지 다른 것, 교회 이런 것이 증거되면 안 돼요. ‘이것을 행하시고’라고 나오면 안 됩니다. ‘선교합시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합시다.’ 이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전부 가짭니다.
‘이미 구원된 것은 십자가 덕분입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하시면 구원됩니다.’ 그것은 전부 다 가짜에요. 이 사람을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합니다. 개인별로 속한 것이 아니로 단체로 속한 거에요.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하나밖에 없는 단체, 동일한 소속에 속해있기 때문에 구원된 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전자기기의 칩처럼 집어넣으시는데 반도체 회사 작업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공정이 빠른지 로봇이 와서 트랜지스터를 막 집어넣지요. 그런 것처럼 자기 백성을 그 키판에다가 꽂아 놓는 겁니다. 동일한, 하나밖에 없는 키판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예수 안, 십자가 안, 언약 안,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에서 너희들은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 하나이니라”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성도 밑에 카펫트는 한 장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와도 안 나와도 어디에 있더라도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이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사업을 망해도 강도가 되어도 세리가 되어도 창녀가 됐다고 할지라도 신자고 전부 다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보고 싶지요. 그러나 만나기까지 기다리세요. 미리 보고 싶어하면 친목이 되니까 그것은 곤란하고 가만히 있으면 우연을 가장해서 또 만나게 됩니다. 우연을 가장했다고 하니까 나훈아 노래가 생각이 나네요.
오직 하나입니다. 주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기 때문에 다 하나로 집결됩니다. 그 다음에 4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47절이 어렵다는 말은 개인구원이 아니고 이미 주께서는 집합이 아니고 집단으로 이미 모아놨다는 거에요. 집합해서 집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처음부터 키판에다가 반도체를 집어넣는 식으로 했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한다는 거에요.
왜? 계통 자체니까요.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인 것처럼 한 번 박혔다고 하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어요. 내 양이라고 하면 어떤 양도 목자의 완력(손)에서 마귀조차도 빼낼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빠져나오면 되지요. 그래서 일부러 막 죄를 짓는 거에요. ‘나 예수 안 믿을란다.’ 그러면 주께서 ‘네 맘대로 해봐라. 빠져나오는가.’ 실제로 우리 교회에 끈끈이를 갖다놓아 보면 살아있는 생쥐가 달라붙었는데 발을 빼려다가 애를 쓰다가 결국 헥헥 거리다가 죽어요.
쥐를 한두 번 잡아보면 다 압니다. 꼭 성도를 닮았어요. 온갖 나쁜 짓을 다해서 빠져나오려고 하고 ‘이제 내가 예수를 믿으면 개다.’라고 백날 해 보세요. 못 빠져나오지요. 한 번 해보세요. 되는가..
우리가 우리의 결심을 가지고 어떤 종교를 선택을 하고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른 것처럼 골랐으면 빠져나오는데 내가 내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령을 줘서 성령이 와버리면 우리 힘으로는 못 뺀다니까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그렇게 환난이 많은 거에요. 주님이 좀 밉지요.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 많은 것은 우리를 보고 ‘그래도 발 못 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우리를 그러한 난코스로 데려가는 겁니다.
현대차가 나오기 전에 일부러 사하라 사막에 가가지고 자기 차를 굴려가지고 온갖 사막에 돌아다니며 뒤집어쓰고 “이런 작품입니다.”라고 CF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실컷 환난을 당하게 해놓고 ‘햐, 도저히 주님한테는 안 되네요.’ 그런 고백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고생을 해야 됩니까?”라고 묻고 싶을 텐데요 제 대답은 “사는 것 자체가 고생인데 뭘 또 합니까? 더는 고생하지 마세요. 그냥 사시면 그게 고생입니다.”입니다. 그 놈의 ‘이상적 자아’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해요.
자기 인생이 마음에 안 들어요. ‘이상자아’가 전혀 마음에 안 들어요. 왜? 낯설기 때문에요. 그래서 마음에 드는 것이 ‘이상적 자아’에요. ‘기도했으니까 이제는 집 사주시겠지, 주여!’ 하는 것이 전부 다 ‘이상적 자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것은 해결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치고, 그 다음에 나오는 49절에 보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것을 설명하면 시간이 맞지 싶은데요. 이것을 꼭 설명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유대인하고 토론을 할 때 “네가 메시야인 것을 증명해보라.”고 하니까 “율법대로 내가 메시야인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뭔데?” “모세 율법에 증인 두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그러면 두 사람을 댈게.” “그럼 대봐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증인이고 또 하나는 내 아버지가 내 증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도 그렇게 이야기하겠어요. “당신이 사기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봐라.” “내 아내가 나를 사기꾼으로 보지 않는 것 하나, 내가 나를 사기꾼으로 보지 않는 것 둘, 끝.” 그 말을 누가 못해요?
그러니까 율법에 두 사람만 증인을 대도 합법하다고 하면서 주께서 이야기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너희들이 기대하고 있는 증명법 자체는 나는 일체 사용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납득할 만한 논리적 방법에 대해서는 나는 일체 거기에 끼어들지 않겠다. 내 논리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럼 왜 그러시는가? ‘그래야 너희가 나를 죽일 것이 아니냐?’ 이 요구가 10장에 나오거든요. 아직 안 나왔지만요.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데 그 죽는 것도 아버지와 나와 계약(언약)된 대로 나는 이 땅에 죽으러 온 것’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목적은 어쨌든 유대인들이 악마에 속했고 나쁘다는 것을 증명하면 예수님의 증명을 끝난 겁니다. 아버지께 받은 지시가 그거에요. 저 놈이 나쁜 놈이라는 것을 네가 죽음으로써 증명해줘라.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말은 그들의 화를 돋구는, 그들로 하여금 계속 죽이게 만드는 화법을 사용하시는데 이것이 일반적 해석이 아니고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 해석입니다. 19절에 주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죽음 문제를 누가 먼저 거론했지요? 예수님이 먼저 거론했지, 유대인들이 거론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주장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 같다 이 말이죠. “물 주세요.” “물 안 줘.” “당신은 날 죽이려 한다.” 이것은 일반적 해석이 아니에요. 삐져도 보통 삐진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당황해서 하는 말이 20절에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미쳤구나라는 소리임)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입니다. ‘우리 중에 당신을 죽이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까?’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반드시 내가 너희들이 나를 죽이게 만들도록 그렇게 일을 만들고야 말리라’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 과정이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설교를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분들 예수님을 싫어해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고 목적입니다.” 이것과 똑같은 거에요.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싫어해야 되고 미워해야 되고 저항해야 되고 질타해야 되고 예수님을 밀쳐야 됩니다. 그것이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아멘?” 이렇게 물어야 돼요. 아무도 그런 설교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설교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아멘하는 사람은 우리 교회 교인(윤덕희 집사님)밖에 없어요.
아무도 아무 소리 안 해요. 왜냐하면 누구도 자기 일을 회상하듯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이용해먹고 등쳐먹으려고 믿었습니다. 그걸 이제 알려주시니 아멘.’이라고 할 사람은 넉넉하게 한가로이 벌써 구원 받아가지고 느긋한 입장에서 여유롭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말이 실감나도록 우리 인생을 90 평생까지 계속 이어갑니다. ‘야, 살아보니까 이 정도로 제자 죄인 맞군요.’ ‘80세면 쓸모 있다고 전해라. 못간다고 전해라.’라고 자꾸 노래 불러쌌는데 80, 90, 70, 늦게 온 사람은 이 노래를 못 들었구나. 이애란이 불렀던 백세인생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51절에 봅시다.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너희들은 죽었다는 이 말이지요. 죽었다는 것을 모르니까 진짜 죽었잖아요.
예수님 말의 논리가 억지도 억지 9단이 아니고 억지 100단이에요. 이것은 억지 정도가 아니고 어거지에요. 결국 유대인을 캔버스로 간주해가지고 주님께서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냥 상대방에게 묻지도 않고 그려버려요. 그 사람 얼굴에다가 먹칠을 해버려요.
너희는 나를 죽이게 되어 있어. 너는 죽이게 되어 있고 너는 오른뺨을 때리고.. 그냥 얼굴에 그리는 겁니다. 하나의 도화지로 사용해가지고 말씀을 반영하는 스크린처럼 사용해 버립니다. 언젠가 제가 인간은 두께가 없는 얇은 막이라고 했지요.
두께가 없어요. 얇아요. 누가 거기에다가 그림을 그리면 그려진 그림대로 유지할 뿐이에요. 그런데 주님을 생각하면 습자지인데 혼자 생각하게 되면 어릴 때부터 기억이 많아가지고 너무 두꺼워요. 두꺼워도 너무 두꺼워요.
여기서 노래가 나와야 돼요. ‘너무 길어요.’ 조항조가 불렀던 노래 있잖아요. 남자의 ... 너무 길어요. 우리 남은 인생이 지루해요. 젊은 사람들은 앞일이 너무 남아서 걱정 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심심해서 걱정되고 재미없어서 걱정되고 너무 길어요.
그런데 주님이 보기에는 좌우를 바꿔서 보니까 얇은 습자지같이 얇아요. 전부 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우리의 그림이 아니고 ‘주님의 무늬’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종려나무라고 했습니다.
성막에 보면 그룹들(천사들)과 종려나무의 하나님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수를 놓았어요. 여자들이 수를 놓든지 해가지고 성막을 장식하는 무늬가 ‘주님의 무늬’입니다. 종려나무입니다.
종려나무라고 하는 것은 최후승리를 했을 때나 들 수 있는 나뭇가지이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와요. 성전의 무늬 자체가 이미 완성된 것을 기정사실화 시키고 왜 이 세상은 깨저야 하는가를 확인해주는 차원에서 주께서는 일하신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왜 나는 구원 되야 되고 왜 구원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를 우리 몸을 가지고 평생토록 주께서 굴리시고 활용하시는 거에요. 저쪽은 뭐를 해도 자기 자랑을 하고 나는 내자랑을 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깨져가지고 결국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잖아요.
바로 인간 자체가 종류가 다르고 계통이 다르다는 거에요. 언약이 다른 거에요. 그것을 다르게 한 이유가 일방적으로 했던 주님의 말이 계통에 따라서 이제는 납득이 됩니다. ‘야, 모든 것이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의 중심이기에 얼마든지 이러한 어거지 소리가 어거지 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화되도록 주께서 조치하셨구나.’
그리고 그 현실화된 결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어거지를 ‘주여, 아멘.!’ 하고 그 목성이 나온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 임해야 됩니다.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은 참 잘 하셨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52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개념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보통 상징적 죽음과 실제적 죽음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냥 간단히 해서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죽음인데 이것은 가짜입니다.
왜? 안 죽어봤기 때문에 죽음을 자꾸 인위적으로 상상하는 겁니다. 이미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 또는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기로 예고되신 분이 말하는 죽음은 죽음 그 이후에서 바라보는 죽음인 반면에, 살아있는 사람이 죽지도 않으면서 죽음이 무섭네, 어떠네 하면서 벌벌 떠는 것은 가짜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가짜 죽음이 마귀의 덫입니다. 성도는 그 가짜 죽음마저 넘어서서 진짜 죽은 주님과 합세했다가 다시 오는 거지요. 그러면 그 진짜 죽음을 진짜 경험하고 싶습니까? 경험하고 싶으면 500원.. 경험하고 싶어요? 말씀드려야지요.
진짜 죽은 자의 특징은 “나는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를 아는 겁니다. 죽어도, 자살해도 이것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죽고 안 죽고는 아무 문제가 안 돼요. 90년을 사느냐, 100년을 사느냐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나는 나쁜 일을 해서 죄인이 아니고 날 때부터 그냥 죄인이었어요. 이유는 묻지말고 무조건 죄인어었어요.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거에요. 그런데 이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를 대신 치름으로써 무조건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 죄와 더불어 의를 함께 알 때에 이미 이 사람은 진짜 죽음, 참된 죽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영이 우리에에 찾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성령을 통해서 죽으면 돼요 안 돼요 입 다물어. 죽음 문제는 걷어치우고 죄인이냐 의인이냐 이것이 관건이지 몇 년 살다가 죽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안 됩니다.
오늘 밤에 죽어도 스데반 집사처럼 주님께서 기다리고 있으면 빨리 가야지요. 그러니까 죄 문제에요.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서 의인 되게 하시는 것이지 얼마나 교회 다녀서 복을 받아서 건강해서 버티고 살고 호스 꼽고 링겔 맞고 요양 병원에 오늘 우리 어머니 들어갔구나.
그런 식으로 해봐야 그것은 문제를 지연시킬 뿐이지 그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된 자를 이유도 없이 그냥 의인이 되게 했는데 그 원인은 내가 예수를 믿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회개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그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로 제가 오늘날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벌리신 일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회상하듯이 봅니다. 주께서 던진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헛말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된 채로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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