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강-창 3장 11-13(하나님의 추궁)160106-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20강-창 3장 11-13(하나님의 추궁)160106-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20강-창 3장 11-13(하나님의 추궁)1601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4페이지입니다.

창 3:11-13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이 최초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좋은 만남이 아니고 추궁하듯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정상적인 관계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올 필요가 없겠지요.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진리란 오류가 없으면 진리가 오지를 않아요. 그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오류가 있어야만 그 속에서 진리가 나타나게 됩니다.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있고 죄 없는 곳에는 의가 없어요. 생명은 죽음 안에서만 생명이 나오고 죽음 밖에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온 것은 이미 인간은 오류가 발생되었다는 겁니다. 오류가 발생되면서 인간은 이미 본인은 오류 편에 섰어요. 오류, 거짓 편에 서 있으면서 부끄러운 상태로서 진리를 대면하는 처지가 우리 인간의 처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쳐놓은 울타리 그 한계를 건드린 셈이 됩니다. 건드리기는 인간이 건드렸는데 그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합니다. 거짓이 거짓을 해결하지 못하는 거지요. 과학이 진리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과학이 이 세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경제가 세상문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바탕이고 기본이에요.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문제 있다고 다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결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자꾸 우리는 본인 스스로 의도적으로 의인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이 오류와 잘못을 범하는 겁니까? 뭐가 무서워서 의인되어야 되지요? 뭐가 겁나서 훌륭한 사람 되어야 되는 겁니까? 뭐가 크게 잘못되었어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께서 문제 내주면 풉니다. 문제 내주고 풀고. 그런데 문제 내주고 풀 때 인간은 무엇을 놓치는가 하면, 내가 잘만 정답 맞추면 내가 오류 있는 인간, 거짓된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많이 알면 자기가 악에서부터 많이 벗어날 수 있고 모르게 되면 악과 가까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이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올 때는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이 감추어놓은 질문의 답이에요.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갑니까?” 그게 네 답이기 때문에, 하나님보시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내가 보기에 너한테 정답이기에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독자적으로 자기생각, 관심사가 자기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주고받는 대화 자체가 그래요. 10절에 보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인간의 관심사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커버하는가? 자기수치를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을까? 관심사가 전부 자기에게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적합니다. 너는 나하고 대화할 때 초점을 엉뚱한데 두고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누가 너의 벗은 것을 가지고 내가 찾아온 줄 아느냐?” 그렇게 돼요. 요새 교회 버전으로 하면 “하나님이여, 제가 죄를 지어서 구원을 못받았나이다.” 하면 주님께서 “네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도 네 생각이다.” 네가 죽어서 지옥 갈까, 천국 갈까, 하는 이 관심사 자체가 너에게만 있는 관심사에요. 그것은 주님과 대화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11절에 보면,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의 관심사는 선악과에 가 있습니다.

관심의 초점이 달라요. “네 한계를 왜 벗어났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네가 인간 그만 되고 싶으냐? 피조물 그만 되고 싶어서 아주 용을 썼구나.” 그런 뜻이에요. “네가 네 자리를 떠나기 위해서 아주 열심을 냈구먼.” 네가 본래의 자리를 떠나버리면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리를 찾는 것보다도 자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그것이 더 신경 쓰이는 겁니다.

여기서 무척 어려운 이야기를 제가 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담은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아담이라는 자리가 따로 있고 그 자리를 떠난 아담 따로 있고, 두 종류의 아담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관심 두는 것은 아담의 자리에 있는 아담을 원하는데 모든 인간들인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아담의 자리를 훌쩍 떠나서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그런 아담이면서도 그걸 아담이라고, 인간이라고 행세깨나 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하나님과 어긋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들통이 나 버린 겁니다.

“제가 부끄러워서 하나님 뵙기가 죄송스럽습니다.” 상당히 겸손해 보이지요. 아주 교만한 겸손입니다. 관심사가 주님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선악과 왜 따먹었느냐? 누가 너더러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했더냐?”라고 하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말한 것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한 자가 누구냐?”라고 묻는 겁니다. 아담에게 물었어요. 아담은 여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의 관심사가 또 다시 빗나가고 있습니다. 여자한테 책임을 미룹니다. 자기는 안 따먹었습니까? 자기도 따먹었잖아요. 여자에게 책임을 미룸으로써 자기가 자기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자기에 세상에 대해서 책임지지 말라.” 한 거예요. 이러나저러나 무조건 내가 되고 싶은 나는 무조건 챙겨야 되겠다는 자기중심적 생각, 그것은 핀트가 어긋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화할 때, 교제하거나 관계를 맺을 때 핀트가 어긋난 겁니다.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면 영광되겠습니까? 저렇게 하면 구원되겠습니까?”라고 하는 그것, 그게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그리스도에게 가 있어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 관심사가 없는 사람은 교회 한 두 번 나오다가 결국은 교회를 못 나와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 관심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누가 꼴 보기 싫어서 못나오고, 누가 삐져서 못나오고, 누가 나에 대해서 무슨 소리 할 까봐서 못 나오고, 수군수군 댈까봐서 못나오고. 그런 사람한테는 본인이 관심 두는데 동조하지 않는 거기에 숨어들어가는 것밖에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몸이 아픈데 누가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을까? 위로해 줄 사람 “여러분” 부르는 가수나 찾아가라고 하세요. 자기 위로해 줄 사람 찾아가는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그런 식으로 해서 내 인생은 끝까지 내가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이 관심 두고 있는 원래 아담에서 벌써 어긋나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렇게 묻고 그 다음에 여자에게 묻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기서 아담에게 묻고 다시 여자에게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따먹었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밴드를 조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인조 밴드, 그 밴드 자체가 경로를 결성하는 겁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그리고 여자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함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에 대적했던 그 대상은 하나의 밴드로 형성되어 있는 겁니다. 조직으로 구조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구조화되면 뭐가 날라 가느냐 하면, 개인, 개체는 거기에 필요 없습니다. 개인, 개체되어봐야 남 핑계밖에는 안 해요. 통째로 다룹니다. 통째로 다루기 때문에 로마서 5장에 아담으로부터 죄가 오게 되면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 되었다, 아담의 모든 후손이 죄의 종이 되어서 죄가 왕 노릇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밴드를 형성하는 겁니다.

밴드를 결성해서 하나의 집단으로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설명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뒤부터 관심사가 나밖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괜찮은 존재가 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관심이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그 관심사가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노출돼요. “제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진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개인의 문제가 있다면 개인의 그 문제에 대해서 대처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져서 그로 인해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겠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나쳐 버려요. 지나치고 또 여자에게 가고 또 뱀에게 가고. 그 세 피조물을 묶어 버립니다. 물론 모든 피조물은 아니지만 인간과 악마, 뱀이라는 피조물을 한데 엮어 버려요. 엮이게 되면 사적으로 “하나님, 저는 이런 소원이 있는데요.”라는 것은 스톱이 되는 거예요. 나 자신의 개인적인 희망과 의도를 위해서 하나님한테 요구하는 이것은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습니다. 왜냐? 우리는 이미 개인적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아담과 하와와 뱀을 통해서 확실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뱀과 하나의 밴드를 형성했어요. 조직을 형성한 겁니다. 따라서 이미 우리는 마귀의 졸개입니다. 마귀의 졸개라고 이미 승인이 되었어요. 그렇게 하나님 쪽에서 승인이 되었는데 우리 쪽에서는 확인이 안 되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이렇게 선악과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두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심어놓은 그 취지와 최종적인 실현하고자 하는 그 뜻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심어놓은 그 본래의 취지와 의미가 하나님의 본래관심사라는 그 말입니다.

그 선악과가 뭐냐? 그야말로 선과 악을 가름하는 거지요. 악이 선이 될 수 없고 선이 악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니까 선과 악을 구분했잖아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심판행위주체자의 등장을 미리 선악과를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마지막에 온 우주를 심판할 심판주가 등장하게 되면 선악과의 정신, 선악과의 그 취지는 실현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추궁해서 결국 뱀과 선악과의 주인공과 전쟁을 하게 되어 있어요.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인간은, 남자와 여자는 하나의 밴드로 결성되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여자를 상대하지 않고 인간여자를 경유해서 그 배후에 있는 뱀과 전쟁을 함으로써 모든 일을 마무리 짓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에 돌입하는 겁니다. 그 전쟁에 돌입할 때에 그 방식은 어떻게 되는가? 아까 제가 아담을 둘로 나눴지요? 아담은 자신이 눈에 보이니까 가시적이지요. 눈에 보이면 아담이고 하와건 간에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성한 구조, 밴드에 대해서는 의식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뱀에게 찾아가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구조적으로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아담을 둘로 나눠야 되고 여자도 둘로 나눠야 되고, 야곱도 둘로 나누고, 이삭도 둘로 나누고, 전부 두 종류로 나누는 거예요.

아담을 둘로 나누는 방법은 뭐냐? 아담이 자식 가운데 가인과 아벨을 둘로 나눠버려요. 가인의 아버지가 아담이고 아벨의 아버지가 아담입니다. 아시지요? 같은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노선이 발생되어버립니다. 두 노선이 그냥 가는 것이 아니에요. 두 노선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원래 인간이 놓쳐버린, 원래 하나님이 지정해 놓은……, 물론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위해서 마련해준 그 인간의 자리에 다시 영원토록 정초되는, 영원토록 확고히 서는 인간을 창출합니다.

그 싸움을 인간입장에서는 원하지 않아요. 인간은 자기의 사적인 형통만 주어지면 끝이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이미 범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이 되고 오류가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 거짓과 오류가 있는 그곳에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옵니다. 6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가 투입되지 아니하면 오류가 오류로 들어나지 않고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아담이 범죄 함으로 의인이 하나도 없어야 되고, 전부 다 죄인이 되어야 되고, 전부 다 죄의 종이 되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런 원대한 계획이 그냥 듣는다고 해서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본인 자신을 정당화하고, 두 가지의 나가 있다는 생각은 안하고 지금 있는 나가 전부에요. 지금 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내가 전부에요. 이것은 내가 진리를 어떻게 많이 알아서, 그 진리를 확보해서 그 진리덕분으로 지금의 내가 잘되고, 죽어서 천당 가고, 그런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주변 되어지는 모든 환경이 밴드, 구조적으로 마귀와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세상환경, 자연환경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인간 본인은 하나님의 전쟁이고 약속이고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고 그냥 내 몸 하나 편하게 살다가 백세 인생 살다가 죽어버리면 그만이에요. 아직 못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 못 간다, 미루다가 나중에는 극락 간다는 식으로 자기 몸 하나 잘되면 끝나는 거예요. 이게 쉽게 말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지향, 모든 경향성과 내 욕망과 일치가 되지 않아요.

이게 뭐냐? 삶의 무게입니다. 사는 게 왜 그렇게 무거운지, 정말 무거워요. 뭘 좀 안다고 해서 가벼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연세가 많다고 해서 편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공부 많이 한다고 해야 머리만 복잡해지고 골치 아프고, 돈 많아져 봐야 뜯어가는 사람만 많아지고, 맞벌이 해 봐야 손 벌리는 사람이 더 많고, 이게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어느 가정이 행복한가 싶으면 그 가정에 문제가 많이 있고, 문제없는 가정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환경에 합치되는 인간은 이 땅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노리는 것은 사적인 행복을 노리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마귀하고 전쟁하는 전쟁터에 합당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으니 어떻게 그게 합치될 수가 있습니까? 초점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른데요.

그저 교회 와서 빌면서 자기 잘되게 해달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난 너하고 이야기 안 해. 왜냐하면 너는 네 책임을 이미 남에게 미뤘잖아.” 뱀에게 “저를 너무 서럽게 하지 마세요. 제 잘못 아니에요.” 라고 미룬 상태에서 뱀하고 전쟁하는 그 전쟁터에 어딜 낄 데가 있습니까? 폭탄 날라 가고 있는데 거기서 ‘나만큼은 행복하다.’ 하는 이런 동굴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이번에 요한계시록을 찬찬히 공부하면서 보니까 어떤 노래가 굉장히 위험한 노래가 있어요. You raise me up, 하는 노래가 있잖아요. 주께서 나를 산 위 높은 곳에 세울 것이라고 하는데 성경 요한계시록과 선지서를 조사를 해 보니까 산 자체가 박살 나버립니다.

올라갈 산이 없어요. 산 자체가 박살나는데 어딜 올라갑니까? 차라리 역전되어야 돼요. “산들아! 나를 덮쳐라.” 해야 돼요. “두꺼운 이불을 덮듯이 산이 그 영광스런 심판 앞에서 나를 덮쳐라.” 이게 현실입니다. 로마서 8장 20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자기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당신이 잘못을 해서 지금 당신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내가 실수해서 인생 불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어릴 때 지은 죄가 많아서, 업보가 많아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뭐냐? 항상 나는 사적으로 가는데 생존이 우선이에요. 밥 먹고 사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기능으로 바꿔버려요. “네가 마귀전쟁에 어떤 역할을 해라.” 이런 기능으로 바꿔버립니다. 주어진 환경을 생존과 결부를 시키니까 사는 것이 너무 무거워요. 식당 차렸는데 옆에 큰 식당 때문에 이 식당에 손님이 안 와버리고. 손님 없는 빈 식당 하루 종일 지키고 있을 때 얼마나 서글퍼요. 애들은 커나가지요. 공부는 시켜야지요. 스마트 폰도 바꿔줘야 되고요. 이거 얼마나 큰 삶의 무게입니까? 만약에 더 힘들면 아내가 이혼하자고 나올 것이고. “내가 시집와서 너 때문에 망했다.” 남편 탓을 하는데 그런 아내한테 “이 철없는 아내야. 로마서 8장을 봐라. 네가 고생하는 것은 네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고 이것은 굴복케 하시는, 허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았느니라.”

왜 그래야 하는가? 모든 일은 주님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의 영광도 주께서 이미 계획 잡힌 대로 마귀만 처단하게 되면 그 영광은 우리가 “너무 좋습니다.” 할 때가 온다는 거예요. 하나님 나름대로 계획을 잡아놓았다는 말이지요. 너의 소원 들어주려고 마귀하고 싸운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은 그 죄에 대해서 합당한 심판을 하게 되면 지상은 저절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심판받은 대상에서 너도 빠질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도 하나의 밴드니까. 남자, 여자, 뱀, 전부 한 통속이 돼요.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으니까. 밴드, 인간은 보컬그룹이에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보고 “가만 지켜만 봐라. 생존에 연연하지 말고 내가 뱀하고 싸워서 승리하면 그 혜택을 가지고 택한 백성인 너희에게로 갈게.” 이렇게 말씀하시니 가만있으면 되는 것인가? 인간은 하나님 뜻에 순순히 순응할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 성경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제일 급한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지옥 가는 인간들이나 그것 구하는 것이다.”라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대도 우리본성이 이방 적이에요.

아무리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해도 그것은 구색 맞추기고 우리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살아야 할 텐데.’라는 생존뿐입니다. 주께서는 그런 인간, 그런 아브라함, 그런 야곱, 그런 이삭, 그런 사람들을 가지고 주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존밖에 모르는 그것이 거짓이고 오류거든요. 그런데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런 거짓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가 타이밍 맞춰서 개입하는 거예요. 죄인을 들어 쓰시는 겁니다. 그 죄인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원천적으로 “네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지금은 네가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이런 자리에 있다. 네가 그저 네 생존만 신경 쓰고 네 행복만 신경 쓰는 것은 죄인으로서 마땅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네 힘으로 원래의 자리로 못 찾아 간다.” 하는 거지요.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진리가 이 죄 속에 죄인의 몸으로 오신 겁니다. 그렇게 외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생존밖에 모르는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가? 마귀와 싸우는 하나님의 전사, 군인으로 하나님께서 활용을 해버려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활용당한 경우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 예를 들면 요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 싫어서 도망치다가 걸렸습니다. 갑자기 요나가 타고 도망치던 배에 풍랑이 일지요. 하나님께서는 마귀하고 싸우는데 선지자라는 인간이 마귀하고 싸우기를 싫어해서 자기 몸 하나 편하자고 도망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우리 모습하고 똑같지요. 예수님은 이 세상을, 마귀를 심판하는데 관심이 있는데 우리는 당장 때 꺼리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찬가지에요. 혼자서 살고 싶어 하는 것, 혼자서 자기 편한 대로만. 내 인생 내가 책임지면서 산다는 이것이 죄 지은 상태에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본성이거든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만큼 더 확실한, 더 절실한 본성은 없습니다.

그런 요나에게 풍랑이 일게 해서 요나를 가지고 밴드를 결성했어요. 요나 하나 매 맞는 것이 아니고 함께 배를 탔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곤욕스러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호들갑 떨면서 대책 찾고 있을 때 요나는 혼자 빠질 것처럼 여기고 배 밑에서 잠을 잤지요. 그런데 기어이 요나를 깨웠습니다. “혹시 이 재앙이 무슨 연고인지 네가 알리바이를 대 봐라.” 그렇게 된 거예요. “아무리 봐도 이것은 참으로 수상한 징후의 일이 일어났다. 당신이 누구기에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은 선장의 오래된 항해 노하우입니다. 이렇게 이 계절에 갑작스런 풍랑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우연적이고 돌발을 가장한 필연적인 사태인데 무슨 이유가 있고 우리 배안에 있는 어떤 인물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 겁니다. 걸린 거지요. 그럴 때 요나가 이렇게 합니다. 12절에 보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게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라, 나를 죽이라. 심청입니다. 나를 죽이세요. 요나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도피한 것은 살기 위해서 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딱 걸렸을 때는 뭐냐? “저를 죽이세요. 내가 죽어야 당신들이 삽니다.” 이게 바로 뱀에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것은 생존과 전혀 관계없는, 오히려 하나님의 전쟁에 대한 핵심부분이에요. 한 사람이 죽어서 다른 사람이 사는 것. 왜냐하면 이미 인간들은 마귀에서 속아서 밴드를 형성했기 때문에 마귀는 계속해서 뒤에서 “그러면 죽는다. 너 불행해진다. 인생 망한다. 한참 좋은 나이에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네 인생은 네게 책임질 수 있어.” 이런 식으로 계속 우리에게 격려를 가장한 협박, 공갈을 해왔던 겁니다. “네 인생 포기하지 마. 너는 가치 있는 거야. You raise me up! 너는 산위에 우뚝 설 수 있어. 너는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있어. 좌절하지 마. 희망 있어. 어쨌든 네가 살아야 되잖아.”

자꾸 마귀는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해서 우리에게 유혹의 말을 하는 거예요. 마귀하고 한 밴드, 한통속이니 서로 잘 통하지요.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어요. 이 세상 신의 지배를 받아왔고 불순종의 영의 역사하는 그 속에서 다루어졌고 그런 식으로 훈련받아 왔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서. “역시 나 혼자 살아남는 것이 최고다. 이 세상이 뭐라고 해도 나 혼자만 살면 되니 걸음아, 나 살려라.” 그게 최고에요. 36계 도망가는 것이 최고이듯이 내가 곧 진리에요. 내가 살아남는 것, 내가 곧 진리에요.

그런데 요나는 그 진리 사용하다가 걸려든 겁니다. 걸려 들 때 그동안 쌓였던 삶의 무게가 한꺼번에 다 날라 갔어요. “죽으면 죽으리라. 여러분! 이것은 당신들의 관계가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빠트리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죽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생명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평소에는 나에게만 있던 그 관심사가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이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새로운 하나님과의 밴드를 형성하는 겁니다. 조직을 형성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보면,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들 중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의 원형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승리했다고 하지요. 다 이루었다. 죽는 것이 뭐가 다 이루는 거예요? 죽음으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구원의 능력이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목사님,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하고 묻지 마세요.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습니까?” 제 해답은 성질대로 사시다 죽는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냥 막 사는 그것이 영생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막살지 않으려고 하기에. 조심스럽게 살려고 하려고 해요. 그 이유가 있어요. 사적인 관심사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 사적인 관심사는 선악과 한계 바깥에 마귀가 지배하는 그 동네 이야기인데, 처음 인간 만들 때 인간은 그런데 신경 쓸 필요가 없었어요. 이미 한계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기 때문에 사적으로 나라도 나에게 관심을 둬야 숨통이라도 트는 거예요.

그러나 그럴수록 나하고 환경이 안 맞으니까, 코드가 안 맞으니까 아무리 살아도 삶의 무게는 힘겹고 힘들 수밖에 없어요. 산만큼 고생이 되고 지옥 같은 하루하루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요나는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아무리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났다고 하지만 전에 있던 밴드, 같이 배를 타고 풍랑을 만났던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요나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이게 바로 요나의 기적이에요. 십자가를 대하여 세상에서 보면 죽은 자고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은 죽은 자가 돼요. 이미 주께서 설정한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이미 둘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면서 한쪽은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이 되고 한쪽은 평생 살면서 자기만 생각하다가 지옥 가는 그런 영역이 되는 겁니다.

한쪽은 선이 되고 다른 한쪽은 악이 되는 것, 바로 그 중간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선악과의 주인공 되시는, 선악과의 실현체가 되는, 전쟁의 승리자가 되는, 만왕의 왕이 되시는 그 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본래의 자리를 이렇게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의 계획에 눈치 채게 하여주옵소서. 힘들게 사는 것은 사실은 주의 뜻이 아니고 우리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을 깨닫게 하여주시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강-창 3장 14-16(저주속의 약속)160106-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22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3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192 자유게시판 140강-YouTube강의(희생)160107-이 근호 목사 레위기 최고관리자 16-01-10
15,191 자유게시판 수련회 참가자 명단 [수련회] 최고관리자 16-01-09
15,190 자유게시판 수련회 방 배정표 [수련회] 최고관리자 16-01-09
15,189 강의 십자가와 부활 160108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6-01-09
15,188 강의 고향 160108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6-01-09
15,187 강의 무한과 초월 160107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1-09
15,186 강의 유튜브(140강, 141강), 희생 , 영적 전쟁 160107 레위기 최고관리자 16-01-09
15,185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b -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1-07
열람 ➜ 자유게시판 20강-창 3장 11-13(하나님의 추궁)160106-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1-06
15,183 자유게시판 수련회 시간표 [수련회] 최고관리자 16-01-06
15,182 우리교회 하나님의 추궁 160106 창세기 최고관리자 16-01-06
15,181 자유게시판 수련회 준비물 및 오시는 길 [수련회] 최고관리자 16-01-06
15,180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5. 12. 18) 1강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6-01-05
15,179 자유게시판 172강-고전 12장 14-17(지체의 다양성)160103-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1-03
15,178 자유게시판 64강-신 11장 8-12절(약속의 땅)160103-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1-03
15,177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6 - 주님의 증인 잠언 최고관리자 16-01-03
15,176 우리교회 약속의 땅 160103 신명기 최고관리자 16-01-03
15,175 묻고답하기 요긴한 지체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1-03
15,174 우리교회 구원의 길 160103 - 최고관리자 16-01-03
15,173 우리교회 지체의 다양함 160103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1-03
15,172 설교 지체의 다양함(고린도전서 12:14-17)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6-01-03
15,171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6-01-03
15,170 자유게시판 서울 의존교회151211a,b (말씀의 주권)―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6-01-01
15,169 자유게시판 19강-창 3장 7-10(두려움)151230-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2-31
15,168 우리교회 두려움 151230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2-3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