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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5. 12. 18)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5. 12. 18) 1강

이름 : 서경수(IP:175.215.227.25)

광주 강의(2015. 12. 18) 22-1

마가복음 6장 53-54절입니다.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예수님의 활동 반경이 호수 중심입니다. 호수 둘레를 돌면서 활동하셨다고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호수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에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그 주변에 예수님의 소문이 났어요.

55-56절은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왜 만졌을까요? 본인들의 병 낫겠다는 욕망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의 옷을 만질 때 자기의 존재 가치를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존재 가치를 확대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이 풍경은 한마디로 하면 ‘세속’의 모습입니다.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이 터전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번창시켜보겠다는 마음이 바로 ‘세속’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디에 속합니까? 천상입니까, 세속입니까? 세속에 속하지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를 ‘문화’라고 봅니다. 인간들이 자기의 삶의 질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 문화입니다. 그런데 문화는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 있어요. 화문활동을 하려면 입에 풀칠이 우선되어야 해요.

구석기 시대의 문화는 천박하지요. 그만큼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화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루이 14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프랑스 절대 군주의 시작인데, 이 왕이 문화생활을 한다면 좁은 방에서 노래나 부르며 놀겠습니까? 아니죠. 거대한 홀을 짓지요. 베드사유 궁전을 짓습니다. 벌써 노는 문화가 다르지요?

모든 문화는 문화를 지탱할 만한 경제적 잉여의 재물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문화는 상부구조에 속하고 경제가 하부구조다.’라고 했어요.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그 후 여유가 생길 때 문화 활동이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 박사교회에 있을 때 그 마을은 부촌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철철이 여행을 갔어요. 봄에는 꽃놀이, 가을에는 단풍놀이 등으로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박사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완전 시골이라 그 사람들은 그런 여유가 없이 살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놀러가는 사람은 팔자가 늘어졌다.’는 소리가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밥 먹고 사는 것이 세속의 전부일까요, 잉여물이 있어서 문화를 즐기는 것이 세속의 끝일까요? 남아도는 것을 소비하는 문화가 세속의 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큰 성 바벨론’이 나오는데, 이것이 세속의 끝입니다. 풍부한 자금으로 화려한 도시를 이루지요.

도시를 이뤘다는 것은 생각이 동일하다는 말이고, 생각이 동일하다는 것은 보편성을 말합니다. 보편성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공동체 의식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 사회에 동조되지 않으면 살기 힘들다’는 사적 의식이 삽입됩니다. ‘내가 뭘 할까?’가 아니라 ‘당신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가 중요합니다.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자아, 그것이 하나로 굳어진 사고방식 속에서 관행과 전통이 피어납니다. 이것은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가 돼요. 기독교가 왜 문화고 세속인가 하면, 우리 아버지가 장로고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면 나는 자동으로 기독교인이 됩니다. 왜? 아버지가 요구하는 바가 그것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요구에 부응할 때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사람으로 대우를 받는다는 말이고 이렇게 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겔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회는 상호 인정으로 유지된다.’ 만약 상호 인정이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국외로 추방되거나 자진해서 이민가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하지요. 그 사회의 법에 의해서 조치가 취해집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상호 인정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방금 사회,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이고 예수고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께 찾아든 이유는 뭡니까? 세속적인 욕구 때문에 예수께 달려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위에 있고 인간들은 땅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땅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자신들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택한 백성으로 삼았다는 그 만남의 지점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 땅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방식을 구체화 시키라고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성당’이라는 겁니다. 성당은 여러 가지 요소를 묶은 것인데, 외부적으로 보면 성당을 유지할 수 있는 요소가 있지요. 사제, 부제같은 인적 자원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종교적 행위를 통해 모두 함께 감흥을 받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신부가 연기가 피어나는 그릇을 흔들 때 이런 동작을 통해서 고객들이 감동을 받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물론 사전에 교육을 시킵니다. 성찬을 나눌 때 둥글고 납작한 과자는 예수님 살이고 포도주는 예수님 피라고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면 그 의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감흥을 받게 됩니다.

이런 모든 의식이 전부 가시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유물론적’이라고 말합니다. 신부는 복장부터가 보통 사람과 달라요. 목에는 넥타이가 아닌 로만칼라를 합니다. 이것이 시각적 효과가 있기에 다른 종교에서도 특별한 복장을 합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설교를 평가해 달라고 해서 들어가 봤는데 그 목사의 복장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옛날 제사장 복장을 약간 현대적으로 개조해서 입었어요. 분당 00교회 목사입니다.

언제부터 개신교가 천주교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세속주의입니다. 문화를 원합니다. 왜냐? 자기의 욕망을 현실화 시켜주는 메시아를 사람들은 고대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자신의 몸을 흔쾌히 드립니다. 왜 주님의 옷을 만지면 병이 나았는가? 그들의 욕망을 달성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통해 욕망을 달성한 그들에 의해 주님은 죽임 당하는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메시아와 진짜 메시아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를 마지막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데, 예수님 옷을 만져서 건강을 얻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그 모든 행위를 정죄해버리는 다른 기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적이 십자가입니다.

암에 걸렸다고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것이 세속의 극단적인 마음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 때 “주여, 저는 죄입니다. 주님을 이용하려는 저의 마귀적 심성을 이제야 들켰습니다. 제가 주님을 핍박하는 자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지요.

이렇게 되면 사도 바울의 말씀이 쉽게 다가옵니다. 사울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주여, 누구십니까?” 예수님 답변이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했지요. 여기에서 사울이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핍박받는다는 공식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공식에 따라 사울에게 찾아갔고, 사울에게 그 공식이 도착된 겁니다. 이 사람이 구원 받은 자입니다.

인간이 극악무도하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라요. 그런데 주님의 뜻은 ‘제발 극악무도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51편에 나오는 ‘상한 심령’이지요. “주님, 제가 극악무도한 자임을 이제야 일깨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세상과 분리 현상이 일어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이 주님 옷을 만졌다는 것은 ‘연합’인데, 이 연합이 누구 쪽으로 당기는 연합인가 하면,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자기 쪽으로 예수님을 잡아당기는 연합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똑같아요. 그런데 주님은 ‘연합’을 말씀하지만 먼저 분리가 일어나야 돼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해야 되지요? 아닙니다. 우리는 ‘분리’와 연합해야 됩니다. 나는 내 욕망을 챙기니까 예수님과는 점점 멀어지는데, 이런 분리된 상태를 없애지 말고 그 분리와 연합해야 돼요. 그래야 우리는 영원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나는 날마다 주님을 싫어하고 주님은 날마다 그런 나를 좋아하고.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난 후 나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인지, 아니면 “예수 믿고 무엇을 해야 더 나은 내가 됩니까?”를 묻는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합니까? 예수 믿은 후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오지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은 ‘지금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처지를 감사하지 않습니다. 평생을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요. 죽을 때까지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쉽게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오래 전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화를 할 때 제가 굉장히 기분이 나빴어요. 예수님이 연예인도 아닌데 왜 슈퍼스타로 묘사했는가 하고. 보편성은 세속입니다. 주님은 보편성에 포함이 되면서도 포함이 안 돼요.

사람들이 주님을 볼 때 자신들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렇데 같지 않아요. 합세되어 있다고 봤는데 분리되어 있는 어떤 분, 예외적인 분이지요. 어쨌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슈퍼스타가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가서 시험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수평적으로 들어줍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왜 예수님께 그런 요구를 안 합니까? 요한은 알았어요.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만약 이 주장을 신학자들 모임에서 했다면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 겁니다. 여하튼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주님 보시기에 쓰레기니까 거기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한다면, ‘네가 갖고 싶은 것과 주께서 주신 것을 구분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분하지요? 자신에게 귀한 것을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노동과 땀으로 얻은 것이지요. 이런 것은 주님 보시기에 쓰레기입니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는 이유는, 그곳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도 동질성을 느끼기에 재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왔다는 것은 ‘예수가 별 것 있나? 우리와 같은 부류일거야.’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귀한 것 주님도 귀하게 여길 거야.’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리 생각하십니다. ‘진짜 귀한 것은 너희들로 인해 가로막혀 있다.’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귀한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드리라는 것이지요. 모리아 산에 가서 드리라고 했지요. 그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여하간 주님이 나타난 곳이 지시하는 곳이에요.

A지점(지시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아요. A지점을 분해해서 지시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지시하는 것을 따를 때만 A지점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갈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곳으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 붙잡혔다는 사실이 나의 미래보다 더 중요한 미래입니다. 이것을 [오래 된 미래]라고 합니다. 유명한 책 제목입니다.

미래가 현재를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서는 안 되는 나를 만들어요. 왜냐? 알면 붙잡는 것이 의미가 없어져요. 알게 된 내가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기 때문에 나는 나를 포기 못합니다. 사단은 얼굴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지 말고 ‘사단은 어떤 일을 합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사단이 하는 짓은 이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는 층이 다른데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는 것이 사단이 하는 짓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단은 자기가 버림받은 층에 있다는 것을 인간에게 안 들키는 거예요. 사단은 이 말을 견디지 못합니다. 요한1서 2장 27절입니다. “너희는 주께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성령께서 너희를 가르친다는 거지요. 혹시 권위 있다는 목사나 지도자가 가르친다고 나서거든 요한1서 이 말씀으로 공격하세요. 어떤 목사가 “목사에게 대들어서 김00 장로는 저주를 받아 사업에 망하고, 아들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라고 하면 “그건 네 생각이다.”라고 공격하세요.

사단의 종들은 성경과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데, 성도는 그런 주장을 들으면서 “그건 주님 말씀이 아니라 네 생각이다.”라고 무시하면 됩니다. 그런데 거짓 목자의 주장에 동조해주고 호응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 이 사회는 상호 인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거짓 목사의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고, 그들 때문에 거짓 목사들이 자기 권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에릭 프롬은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학대받는 쾌감과 학대하는 쾌감 두 가지가 있다.’

사람에게 들어갔던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지요. 문제는 사람이란 껍데기냐, 돼지라는 껍데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질을 결정합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하니까 귀신이 나갔지요.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 ‘제발 우리 동네에 있지 말고 떠나주세요.’라고 밀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상호인정으로 구축된 사회성에 예수님을 편입시켜주지 않는 거예요. 이것을 ‘특수성’이라고 해요. ‘보편성’은 끼리끼리 노는 것입니다. 보편성에 유일성이 추가되면 여기서 특수성이 파생됩니다. 보편성과 유일성의 만남에서 특수성이라는 증상이 발생합니다. “너는 좀 이상하다.”라고 하면 “그래 나는 너와 달라.”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나도 너와 친하고 싶은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예수님만 갖고 있는 유일성으로 자기가 합세하는 셈이 됩니다. 제 손녀 태어났다고 “감축 드립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분은 십자가마을 분위기를 몰라서 하신 말씀이지요. 십자가마을 바깥에서는 십자가마을이 언제 무너질 것인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사람의 심리가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거예요. 특수성이란 내가 특수한 행동과 생각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나도 주님이 특수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가짜 특수성이고, 진짜 특수성은 ‘왜 제 인생을 제가 예상 못한 길로 데리고 가십니까?’라는 소리가 나옵니다.

그러면 주님은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을 하시겠지요. ‘베드로야,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사람들은 자신이 미리 아는 길로 주님이 인도하시기를 바라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갈 길을 안다면 주님은 또 모르는 길로 이끄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를 계속 베드로 되게 하십니다. 한 번 반석 되었다고 자동적으로 계속 반석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반석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용이 있습니다. 유일자가 간섭해야 보편성 속에서 특수자가 나타나기에 늘 개입하시고, 이렇게 되면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은 보편적이어서 예수님이 자신들과 한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예수님 옷을 만지고 병이 나았으니까 이 사람은 확실한 증거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에 의해 주님은 버림받습니다. 옷을 만져 병 나은 정도가 아니라 제자들은 직접 귀신을 쫓아내고 하늘의 권세를 행사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도 버림 받았습니다.

‘너희들(제자들)은 어떤 일을 경험해도 너희를 포위하고 있는 보편성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다. 뭐, 나를 따라 온다고? 너희는 마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마귀가 베드로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활동하는 상황을 너희들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보편성 속에서 짐승을 하나 채택을 해요. 닭이죠. 닭이 우는 타이밍을 닭이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닭은 수시로 웁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이것은 제가 어떤 강의에서 ‘주님의 주권’이라고 했는데)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닭의 울음소리를 알람시계처럼 활용하신 것이지요.

이것을 봐서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도 이런 작용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에게는 늘 계속되어야 하고, 그 순간마다 터져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번 시간에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분리를 거부하지 말고 반기세요. 그리고 그것을 받으세요.’

주님과 내가 분리되었음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화해입니다. 주님은 의인이 되고 나는 죄인 되는 흑백의 만남. 이것이 바로 구원 되는 상황이에요. 계속해서 주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시고, 그래도 우리는 내 원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

“단이가 정신 차려서 제 갈길 개척하고 남산 위의 노루처럼 이 세상에서 펄펄 뛰게 하옵소서.” 이렇게 비는 것은 무속 신앙이지만 이것을 살짝 바꾸는 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유물론적으로 별 차이가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내 가치의 존속이고 세속의 영향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이번 일에 제 편이 되어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는 네 편 될 생각 없다. 네가 뭔데 내가 네 편이 돼.” “그럼 제가 주님 편이 되겠습니다.” “네가 무슨 재주로 내 편이 돼.”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가만히 있어.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되게 한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이 주님 옷을 만지면 병이 낫겠다는 그들의 생각을 충족시켜 줬습니다. 그게 바로 ‘욕망의 충족’입니다. 욕망은 결핍을 만들고, 그 결핍이 충족되면 만족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깊은 내막은 욕망이 충족되는 것이 아니고 욕망 자체가 커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코앞에 있는 이것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가 대학에만 합격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을 합격하고 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깁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마귀가 계속 욕망을 만들어 내서 결핍을 느끼게 유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괴물의 정체는 주님께서 그것을 밝히 드러내실 때까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들의 욕구를 들어주면서 그들에 의해 버림받지요. 오병이어가 그런 경우지요. 배 불리 먹었는데 주님이 결재를 하시니까 주님이 돈 많은 분인 줄 알고 주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 때 주님은 카드를 들고 “너희들이 이것 때문에 나를 찾아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 카드(복) 때문에 나를 찾지만 나는 그런 너희들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을 너희들이 아느냐?’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요6:53).’고 하셨지요. 이 말은, ‘피와 살을 유발하는 원인 제공자가 바로 너 자신들인 것을 너희들이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 턱이 없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 “어렵도다.”라고 해요. 오늘날도 교회 20~30년 다닌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똑같아요. “어렵다.”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해서 교회 다녔으니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일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잘난 맛에 사는데 그것이 못난 짓이 된다면, ‘내가 따로 잘난 존재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또 욕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거예요. 누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 ‘그럼 내가 착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또 다른 욕망을 찾아요.

이런 우리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네가 무슨 욕망을 해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물어요. ‘그것이 아니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말은, ‘내가 예수가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되지 왜 믿으려고 합니까? 예수 믿는 그것을 내가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10분 쉽시다.

(2016. 1. 5. 16:4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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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