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6 - 주님의 증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6 - 주님의 증인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6 - 주님의 증인
15,12,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4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스데반 집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자기가 잘나서 돌에 맞아 죽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가 죽은 후에 누구를 만납니까? 하늘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받으시지요. 그러니 스데반 집사가 죽어서 부활하는 원천이 무엇인고 하니, 스데반 집사 개인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겁니다.
◈ 하나님의 횡포 !!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스데반 집사의 구원은 예수님의 명예와 관련이 되어있는데, 즉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명예와 영광을 누구에게 줌으로서,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온 우주에 계속해서 연속을 시키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 혹은 방침은 구약의 선지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식과도 동일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영광스러움을 우주에 펼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심지어는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조차도 자기 이름을 더럽힌다는 이유 때문에 가차없이 처단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친 독재나 횡포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격이나 스타일이 그러한데, 자기의 명예나 영광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데반 집사가 구원을 받은 것은 개인적인 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망인데, 하나님의 소원이 예수님의 통해서 스데반 집사에게 덮쳐졌다는 말이다.
◈ 인간은 다른 누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 !!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하나의 공식을 만들 수 있는데, "인간은 다른 누구에게 자기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공식인데 말이다. 성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영향력을 다른 누구에게 행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가인의 후예들이 최초인데, 그래서 라멕과 같은 자들은 자기가 독재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은 자기 수하로 만들었지만, 정작 아담이나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과 야곱과 같은 자들을 보라는 것이다. 남들에게 자기를 알리고 싶어서 환장한 자들이 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방금 이야기한 스데반 집사와 관련된 공식을 보면 간단한데 말이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다 끝이 났는데, 자기가 나서서 전도하고 선교하는 기능은 성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성도는 전도를 하지도 않고 선교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증인과 마귀의 증인 !!
그러면 성도는 무엇만 하는고 하니, 이것이 뻔히 아는 이야기임에도 모르는 사람들은 또 모른다는 것이다. 성도는 증인일 뿐이지, 누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연사는 그것을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몇 명이나 전도해서 구원을 시키면 됩니까?" 라는 것이 성도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전도를 해서도 안 되고 선교를 해서도 안 되고, 다만 증인으로만 살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스데반 집사가 가장 잘 보여주는데,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잘해서 몇 명을 더 전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돌에 맞아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귀한 것은,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나는 너희들에게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 고정되어있을 뿐이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증인이 되기가 참 쉽네요" 라고 할지 몰라도,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남에게 영향을 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남에게 영향력을 주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증인들이 하는 짓이란 말이다.
예수님의 증인과 마귀의 증인이 있는데, 마귀의 증인도 나름대로의 전도나 선교를 할 수 없고, 물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배가 지옥의 백성들을 만든다" 라고 하셨지만, 그들이 멀리까지 전도하는 것을 두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증인과 마귀의 증인도 둘 다 영향력을 줄 수 없는데, 다만 마귀의 증인들은 마귀의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마귀의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이렇게 마귀의 힘이 작용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가인의 후예들인데, 라멕과 같은 말이다. 즉 "나는 건드리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라는 것인데, 물론 성경에는 마귀의 증인이라는 표현은 없는데, 그것은 새삼스럽게 마귀가 증인노릇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가 자기 나라이니 말이다.
마귀는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있는데, 그러니 새삼스럽게 확장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꽉 차있으니 유지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 나라가 자기 것인데, 거기에 더 세력을 확장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조폭의 두목이니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속에 뛰어들기 때문에 그들과 이질적인 것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하지만, 하지만 사람이 태어났다고 하면 그 자체가 마귀에게 속한 것이란 말이다. 불교에서 뭐라고 하는가?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부처다" 라고 하는데, 바로 그런 이야기라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마귀의 종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마귀의 종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종들이 예수님의 종들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당신들은 왜 남들에게 인기를 얻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 라는 투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니 기분이 좋더라. 그런 기분이 좋은 일을 왜 하지 않느냐?"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스데반 집사야,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면 참 좋은데, 당신은 왜 그러한 일을 하지 않는가?" 라는 식인데, 그러면 스데반 집사는 뭐라고 하는가? "나는 너희들과 상대하지 않는다. 주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증인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자기 사람을 만들고 하는 것은, 설령 하고 싶다고 해도 하지 못하는 입장이라는 말이다.
◈ 구원은, 예수님 생애의 내력 !!
이것을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방금 새로 오신 분이 있어서 강의를 다시 시작하겠는데(ㅋㅋ), 여기에 대해서 무슨 불만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중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마귀의 세력과 불꽃튀는 만남의 능력, 그것을 지난 시간에 은사라고 했는데, 그 은사를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구원이란 것은 예수님 생애의 내력이다" 라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살았던 내력이, 그것이 마치 마술사가 오색테이프를 내미는 것처럼 성도를 통해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 아닌데,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들이 말이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해서 한 수 배워서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서 나오다가보니, 자기는 항상 자기 입을 막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즉 "니 속에서 말하는 이는 니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라는 것이다. 우리의 입을 막고, 코를 막고, 귀를 막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마치 매운 시집살이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요즘은 며느리살이가 그러한데(ㅋㅋ), 하지만 아무리 맵다고 해도 주님께서 시키는 주님살이보다 매운 것이 없는데, 성도에게는 독자적인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주님이 이 세상을 빠져 나올 때 힘들게 나오셨는데, 인간과 인간들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하고 단결력이 있었으면,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이야기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거기에 혹해서 빠져 나오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 얽히고 얽힌 인연이라는 것은 그 어떤 칡넝쿨보다도 더 심한데, 그런 악마의 밀림에서 자력으로는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 !!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에서 세 가지로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말씀을 들어봐야 마귀가 가만 두지 않고, 말씀을 들어봐야 고난이 오면 넘어지고, 그리고 말씀을 들어봐야 이 세상에 대한 안락함과 풍요함과 인기, 그것을 무슨 수로 이길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인기가 많은데, 스스로 외로워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외로움이 아닌 인기로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그것을 왜 마다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잘 나갔던 연예인들 중에서, 이렇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외로워서 말이다. 그러니 주위에게 자기를 그렇게 존경하는데, 그런데도 이 세상을 빨리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니 떠나려고 하지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힘으로는 이 끈끈한 정(情)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도무지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손을 대야만 하는데, 그게 바로 진짜 사랑의 매인데 말이다. 그런데 주님에게 얻어맞으면서 성도가 신경을 쓰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남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를 때리는 것에 신경을 쓰다가보니 자연적으로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는 힘드는데,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니 말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띠를 띠고 원하지 않는 길로 간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의 육신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하는데, 좋은 게 좋고, 행복한 게 행복하고, 편한 게 편하다는 것이다. 그것까지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는데, 맛이 있는 것을 맛있다고 하고, 재미가 있는 것을 재미가 있다고 하면 되는데, 그런 것까지 숨기고 겸손한 것처럼 위장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옛날에는 그런 좋은 것에 얽매였는데,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개입하니 그런 것들이 모두 끊어져 버리고, 그야말로 스데반 집사님처럼 된다는 것이다. 즉 "너는 저쪽과 너무 엮이지 말고,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오직 나만 신경을 쓰면 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 저기 동생은요?
그렇게 주님과 자기 사이만 신경을 쓰면 되는데, 그게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주위에 자식도 없고 신경을 쓸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4장으로 넘어가게 되면 타인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래서 가인이 "저기 동생은 어떻게 해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동생의 제사는 받는데, 왜 나의 제사는 받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동생, 즉 타인과의 비교에서 자기의 우월함을 원하는데, 그것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들해지고 소원해졌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실속이 없고, 실속이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남들에게 믿음이 좋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더 좋게 느껴지는, 그런 세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벌을 내리시는데, 그러자 가인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인간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인데, 그러니 벌을 받는 자는 벌을 받는 동시에 가장 깊은 곳에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들이 볼 때는 벌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벌을 받는 자는 상당히 아픈, 그런 개별적인 벌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는데, 그러자 가인이 뭐라고 하는가? 남들이 자기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가인이 평소에 무엇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인가? 하나님보다도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을 자기가 평소에 소망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소망을 하나님께서는 훼손시키는 벌을 내리셨다는 말이다.
(창 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실 때는, 그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칡넝쿨을 잘라내는, 바로 그 관계에 마치 주사바늘을 찌르듯이 침투를 하신다는 것이다. 즉 "주여, 제가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안 됩니다" 라고 하는, 바로 '이것' 이라는 것에다가 주사바늘로 찌르고 칼과 가위로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아프다는 말이다.
◈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뿐 !!
우리가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사도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가족관계가 별로 나와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잘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다들 독신은 아니지 싶은데, 그저 하나님과 자기 이야기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 10장의 말씀과도 같은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떻게 자기의 혈연관계를 끊을 수 있는가? 안 되는데, 그런데 주님은 바쁘게 몰아세워 버린다는 것이다. 자식이 뭐고 간에 챙길 여유도 없게 만들어버리신다는 말이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런 혈연관계를 끊어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모친과 새로운 형제를 찾아가도록, 그렇게 내몰아 부치신다는 것이다.
◈ 사랑하는 어머님 !!
그러니 당하는 사람은 정신이 없는데, "사랑하는 어머님, 고향에서 평안하십니까? 저는 여기 빌라델비아에서 전도를 잘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편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 사도바울아, 고생이 참 많다. 힘이 들어도 열심히 해라" 라고 하는 부모님의 답장도 없고 말이다.
사도들은 오로지 복음을 전한다고 정신이 없는데, 그러니 그런 낭만에 젖어서 성경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곧 이 땅에서 고생을 하시면서 사셨던 예수님의 생애가, 그게 그들의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성도에게 있어서 이웃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없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웃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여있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천국에 갈 형제와 자매는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침이 그러한데, 그게 실제이고 현실이라는 말이다.
◈ 전도는 누가 하는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 전도와 선교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한 권한이 애초부터 우리에게는 삭제되어있다는 것이다. 누구를 전도하게 되면 또 다시 인간 관계가 얽히게 되는데, 전도라는 미명 아래에서 말이다.
어떤 사람을 교회에 데리고 왔는데, 그런데 그 뒤에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당신의 말대로 교회에 나가주었으니, 내가 이번에 사업을 하는데 보증을 좀 써주세요" 라고 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신 말대로 당신의 교회에 등록해줄 테니, 당신은 내 보험을 하나 등록해주세요" 라고 하는데, 또 "저 미용실 말고 우리 미용실에 오세요" 라고 하고 말이다.
그래서 "주여, 용서하소서. 전도 때문에 어떻게 하다가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전도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무슨 전도라는 말인가? 누가 그런 엉터리 전도를 가르쳤다는 말인가? 전도는 니가 하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말씀하시기 이전에 주의사항을 이야기했는데, 즉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라는 것이다. 물론 돈도 던지면 안 되는데, 전도를 한다면서 일당을 주고 하는 짓거리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나 돼지인 줄 어떻게 아는가? 일단 던져보면 아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고 하면, 그런 사람은 개나 돼지라는 말이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는, 물론 전혀 상종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는 말이다. 모든 관계가 다 사회생활인데, 그러니 전혀 만나지도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데, 다만 그 귀한 복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런 사람들을 자꾸 붙여주시는고 하니까, 그것을 바로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에 몰두하지 않고, 이제 자기가 주님을 알았다고 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안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즉 "하나님을 잘 믿는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서 내 패널을 확보하겠다" 라고 하는 교주적인 사고방식, 마귀적인 사고방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즉 "역시 나는 믿음이 좋으니 내 편들이 많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성령에 충만한 스데반 집사 !!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주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가 전부이고, 그 이외에는 전부가 다 주님의 몫인데, 그러니 우리가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데반 집사인데, 오죽했으면 그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였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장렬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처참하고 비참하다는 것이다. 살려고 하는 자에게는 비참한 것이고, 반면에 죽고 싶은 자에게는 복이 넘친다는 말이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충만했는데,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 어떤 돌이 자기에게 날아와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짱돌이 날아온다고 해서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조금도 주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의심을 품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에 충만한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인데, 성령이 붙들고 있는 자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고 "그럼 그렇지. 진작에 너희들의 본색을 좀 드러내지" 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기의 당연한 환경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 최후의 심판과 십자가의 피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십자가의 능력이 지금도 여전히 성도를 통해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십자가의 피라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고 하니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누가 아는고 하니,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이다. 그 심판이 어떤 심판인지를 말이다. 그래서 그 심판과 연루해서 구원의 최종적이고 가장 적절한 조치는 십자가의 피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2,000년 기독교 신학을 다 밀어내어야 하는데, 모두 다 버리고 이것만 있으면 되는데, 즉 "마지막 심판의 적절한 조치는, 그것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기에, 구원의 방법은 오직 하나, 다른 복음은 없고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 복음을 온 교회와 목사들이 모두 다같이 공격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교회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하겠다고 하는, 즉 목회를 하겠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이미 주님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인데, 주님과 함께 있으면 스데반 집사가 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만약에 목사가 정말로 성도라고 하면, 주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통해서 십자가를 매일같이 뽑아내는지, 거기에 대해서 관심만 가지면 되는데, 즉 자기와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만을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교인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간에,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마지막 심판의 조치에 대해서 십자가를 주셨다" 라는 것인데, 이게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발전되는데 말이다. 마지막 심판은 주님만 아시는데,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알아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 마지막 심판과 연결된 것이 오직 십자가의 피라는 것이다.
◈ 이제는 방주나 홍해나 성전이 아니고 !!
굳이 방주를 만들려고 하면 지금도 설계도를 가지고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데, 하지만 방주는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바치는 것도, 아마 모르기는 해도 실제로 그렇게 할 사람도 있지 싶은데, 자기가 살기 위해서 맏아들을 잡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것도 이제 아니라는 것이다. 속여서 별미를 바치고 하는 것은 야곱인데, 그리고 갈라진 홍해를 건너는 것은 출애굽 방식인데, 또한 성전을 지어서 바치는 것은 다윗시대이고 말이다.
지금 신약시대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런 방주나 홍해나 성전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피라는 것이다. 정말 이게 맞는데, 그런데 절도 아니고 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그것을 싫어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이제는 오직 십자가의 피만이 주님의 심판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그것을 '언약의 피' 이라고 하는데, 부활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에 속어서 넘어가면 안 되는데, 부활에 무슨 피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피가 아니고 십자가의 피라는 말이다. 즉 "부활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지 않으면 영생이 없는데, 그러니 부활이 아니고 피라는 말이다.
(히 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히 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히 9: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최후의 심판이 십자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더 나아가서 이 십자가의 피는 마지막 심판이 어떠한지, 그 심판에 대한 전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방향이 이미 마지막 심판이 십자가로서 이미 완료가 된 것인데, 그게 묵시세계라는 말이다. 묵시는 이미 시간이 종결되고 확정이 되었는데, 거기서 솔솔 뿜어져 나오면 그게 역사가 되는데, 즉 시간의 흐름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가 정답이라면, 마지막 심판은 어떤 식인지,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조금씩 감을 잡을 수 있고, 그게 요한계시록이란 말이다. 그러면 십자가에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교회인데, 즉 십자가의 원수가 교회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가시적이기에, 인간이 운영하면 된다는 말이다.
◈ 붙잡을 수 없는 십자가 사건 !!
하지만 십자가는 그렇게 붙잡고 운영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십자가는 사건이기에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건을 왜 붙잡지 못하는가? 사건은 터지고 난 다음에 그 증상과 흔적만을 남기기 때문에, 그 원초적인 사건을 손으로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날아가는 화살은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사건은 그렇게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을 대신해서 무엇을 잡는고 하니, 구원받은 자기 몸을 잡는다는 것이다. 즉 "나는 5년 전에 은혜를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사건이 잡히지 않으니, 사건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흔적인 자기 자신을 잡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십자가 사건이 나오는가? 나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잡았다고 하면 십자가로 깨고, 잡았다고 하면 또 십자가로 깨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기 자신을 증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 마을에서 복음을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가? "나도 구원을 받았다"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그게 과연 복음의 내용이냐는 말이다.
그러면 "나도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은 무슨 사고방식인고 하니까, 그것은 12제자가 예수님 앞에서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높습니까?"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인데, 일단은 같은 제자들이라고 간주해주고, 그러면 제자들끼리 토론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누가 높은지를 말이다. 그러면 거기에도 치맛바람이 작용하는데, 자기 아들을 더 좋은 자리에 넣어달라는 것이다.
주님의 사건은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데,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주님의 사건을 잡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달리 말하면, "성령은 소유할 수 없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다만 성령께서 침범하고 내주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은 임의로 불기 때문에, 그래서 "어제의 나를 믿으면 안 되고, 오늘의 나를 되게 하신 성령님을 믿어야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변화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붙잡아봐야 늙어서 썩어간다는 말이다. 날마다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생애를, 즉 십자가를 뽑아내시는 그 주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식이 심판에 합당한 십자가라는 것이다.
◈ 주께서 저를 아십니다 !!
그렇다고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복잡하게 되고 말았는데 말이다. 아무튼 마지막 심판에 대처하시는 주님의 조치는 십자가밖에 없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십자가밖에 없다고 하니, 우리는 그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를 믿는 자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믿는 자기 자신을 믿게 되는 오류에 빠지고 마는데, 그런데 방금 그것을 피하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십자가는 사건이라고 했는데, 즉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건을 붙잡을 수 없는데, 그래서 반대로 바꾸어서 사건이 우리를 붙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즉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 라고 하지 말고, "주께서 저를 아십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베드로의 고백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눈이 오겠는가?" 라고 하면,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안철수 신당이 20명이 모이겠는가?" 라고 하면,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ㅋㅋ).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안철수가 신당을 조직한 것 자체가 복음의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안철수가 신당이 제대로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주님이 아십니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게 남들에게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내용이 확장되었는데, 성경구절만이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꽃이 피고 눈이 오고 하는 것들이 모두 다 복음의 내용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그 어떤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 우리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다 녹아져서 십자가를 증거하게 한다는 것이다.
◈ 창조과학회의 이단성 !!
왜 우리가 라면을 끓이면 면만 넣은 것이 아니라 수프도 넣고 계란이나 파도 넣고 하는데, 그렇게 다 어울려서 맛있는 라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형성된다는 것은, 그게 교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가정문제, 북한문제, 석유문제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십자가와 관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과학회는 엉터리인데,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십자가가 나오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는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는 것만 나오는데, 하지만 그것을 가짜라는 것이다. 주님이 창조하셨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했던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했는데, 그런데 주님의 주권을 이야기한 스데반 집사님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했던 이스라엘은 십자가 사건을 유발한 가해자가 되었고, 주권을 이야기한 쪽은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인데, 과연 어느 쪽이 마지막 심판을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십자가를 언급하게 되면 같이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걸림돌이란 것이 같이 나와주어야 하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하면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이것도 참으로 중요문제인데 말이다.
◈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
주님께서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니가 부끄럽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니가 예뻐 보인다" 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뭐라고 하는가? "나는 너희들이 부끄럽다. 저리 지옥으로 가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리 와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시 127:5)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러니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주님께서 "나는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은 수치스럽게 만들고야 말리라" 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러니 지옥으로 가서 "내 신세가 왜 이럴까?" 라고 한다면, 그게 얼마나 수치스러우냐는 말이다.
지옥에서 "내가 세상에서는 그래도 삼성그룹의 회장이었는데, 그런데 여기서 왜 이렇지?" 라고 하고, "그래도 내가 신학박사인데, 그런데 이렇게 물도 한 방울 없는 곳에서 왜 이렇게 고생을 하지?" 라고 하고 한다면, 그런 자기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겠느냐는 것이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나는 고난도 없이 건강하고, 만사형통하구나. 굳이 예수님을 찾지 않아도 가족들이 다 잘되는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재벌집에 시집을 가고 말이다. 그렇게 전혀 수치를 몰랐는데, 그런데 죽고 나니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를 모른다는 이유로 영원토록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계산을 해도 전혀 잘못했다는 말이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의 모든 행동을 수치와 관련이 되어서 움직인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느낀 것이 수치인데, 바로 그 수치를 피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자기의 수치를 가릴 수가 없으니, 차라리 그런 가릴 것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인데, 그게 곧 자살이란 말이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인간은 평생동안 머리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데, 그것이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알지 몰라도 수치를 피하는 방법은 모르는데, 십자가의 피가 아니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볼 때, 그렇게 보지 않겠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주님께서 죄를 묻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순회재판을 하시면서, 현장에서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인에게 그렇게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간음한 여인이 그런 용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주님이 선언을 하시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여인아, 그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지금 너에게 준 그 용서라는 관계 안에 머물러라" 라는 것으로, 그게 교재 143페이지에 나오는데, 그게 산상설교의 주제라는 말이다.
교재 143페이지를 보자.
**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상설교가 곧 지혜인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 중의 최상의 지혜가 대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의 지혜를 거론하십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
이 마태복음 5장 20절의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도록 애를 써라" 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그와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보통 인간과 바리새인들을 비교하셨다는 말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누가 말씀하시는가? 분명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와 바리새인들만 보겠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끌어당겨서 보겠는가? "너는 뭐야?" 라는 것을 필히 느끼게 되는데,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그들도 나중에는 다 배반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리새인들도 들어서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이미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는 말인가? 천국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이 천국 안에 계신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천국을 몰고 오셨다고 보자는 말이다. 혹은 예수님이 새삼스럽게 천국을 만들고 계신다고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을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가? '너희'와 '바리새인'을 비교하는 것에서 나오는데, 그렇게 그들이 서로 비교가 된다는 것은, 즉 "아무리 해도 너희들이 노는 마당은 바리새인 안에 머물러 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 날을 해봐야 바리새인을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바리새인을 능가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을 최종 모델로 등장시켰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내세웠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기껏 너희들이 수고해봐야 최종적인 도달점은 바리새인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우리 인간은 바리새인에게 갇혀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다도 더 낫지 아니하면" 라고 했으니, 결국은 주님의 세계와는 단절이 되었다는 말이다.
◈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해 !!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이렇게 하면 천국에 간다는 것인가? 가지 못한다는 것인가? 못 간다는 것인데, 그러면 왜 천국에 가지 못하는가? 주님의 심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에 간다고 하니, 사람들은 심판은 것은 없고 골라잡으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데, "나는 지옥보다는 천국이 좋아. 천국에 가고 싶어" 라고 하면서, 천국행에 손을 들면 되는 것으로 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심판이란 것이 왜 있겠는가? 심판에서 면제가 되는 사람에 한에서 "너는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 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데, 사실은 심판에서 면제가 된 사람에게 그런 것을 묻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묻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주님의 입장에서는, 심판에서 면제가 되는 순간 곧 천국이라는 것은, "이미 너희들은 심판 속에 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려운데 말이다.
우리의 인식이 항상 자기가 골라잡는 위치에 있다가보니, 그것을 깨트리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는 말씀은, 심판에서 벗어나면 이미 천국이라는 것이다.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1단계, 그 다음에 "너는 천국에 갈래? 지옥에 갈래?" 라고 묻는 것이 2단계, 그런 것이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면 이미 천국이라는 것이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너희는 이미 지옥에 있다 !!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미 사망 안에 있는 주제에,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것을 요구할 입장에 있지 못하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천국을 만드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이것이 지옥이다" 라는 것 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천국은 꿈도 꾸지 말라. 너희가 지옥에 있다는 것만 분명히 해라"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신 말씀은, "바리새인들부터 비롯해서 모두가 다 현재 천국에 들어올 입장에 있지를 못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왜요? 우리가 무엇이 잘못인데요? 우리는 모세율법대로 다 했는데요? 거기에 또 무엇을 더 해야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산상설교에서 가능성은 삭제되어야 !!
그러니 그들은 아직까지 자기들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지금이라도 행동을 똑바로 하게 되면 천국에 갈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그런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온 산상설교에 관한 책들은 모두다 엉터리라고 보면 되는데, 왜냐하면 자꾸만 가능성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말씀을 지켜서,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성령이 임하면 지킬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가자"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하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성령이 임한 사람은 뺨이 남아나지 않지 싶은데, 매일같이 얻어터지니 말이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맹세도 하지 않고, 내일에 대한 희망도 품지 않는가? 그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것은 책망을 한다는 의미인데, 즉 "너희들은 지옥 속에 있어서 지옥 값을 하고 있고, 지옥의 티를 내고 있다" 라고 하면서 성령의 책망을 받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영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 그 누구도 구원이 될 수 있어 !!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함에 있어서 그 대상은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없기에 모든 사람이 다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나는 너희들 중에서 몇 명을 보고 이야기를 한다" 라는 것이 없는데, 즉 "너희들은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 내 백성 중에 너희들은 없다" 라고 하시기 때문에, 거기서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아무도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노바디에서 에브리바디인데, 그것이 어떻게 말이 되는 영어표현인 줄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우리의 입장에 아닌 주님의 입장에서 '누구든지' 라는 것인데, 그러니 구원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의 장점이나 실력이나 기술은 전혀 구원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라고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수면 내시경과 구원 !!
제가 가락교회강의에서 수면 내시경 이야기를 했는데, 환자가 수면 내시경을 받는 장면을 설명하면서 말이다. 의사가 자기에게 검사하는 하는데, 그게 보고 싶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시는 것이 보고 싶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죽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먼저 간호사가 와서 입을 벌리게 하고 준비를 다 시킨다는 것이다. 제가 얼마 전에 받아봐서 아는데, 그렇게 해서 의사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기다렸는데, 나중에 보니 그만 회복실에 와있다는 것이다. 그게 수면 내시경인데, 그러니 자기가 잠을 자고 말았으니 그 순간을 어떻게 포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구원이 바로 그러한데, 이미 검사를 다 받고 회복실에 와있듯이, 이미 구원이 끝나있더라는 말이다. 그렇게 구원이 끝난 상태에서 구원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마취가 되지를 않으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발악을 한다는 것이다.
(녹취자 - 저는 약 6개월 전에 수면 내시경이 아닌 일반 내시경을 받아보았는데,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생동감도 있고 말이죠. 혹시 처음 받아볼 계획이 있는 분이라면 굳이 수면이 아니더라도 괜찮을 것 같아요. 하지만 구원은 절대로 수면이 필요하겠지요. ㅋㅋ)
교회는 어디로 가야하고, 헌금은 어떻게 해야하고, 전도는 어떻게 해야하고, 가족들도 다 구원을 시켜야하고, 새벽기도도 나와야하고, 성경도 적어야 하고, 이미 다 이렇게 출판사에서 책으로 만들어놓았는데 왜 적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거기에다가 방언과 같은 신비로운 체험도 해야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은 체험 최소한 3개 이상은 되어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어제 은사의 열매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은사가 8가지인데 말이다. 그 가운데서 하나 정도는 골라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같으면 아무런 곳에서나 디비져서 잠을 자는 것도 은사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ㅋㅋ).
은사라는 것은 그때 그 시절에 필요한 것으로서, 그런 은사의 공통점은 "나는 무능력자입니다" 라는 것인데, 즉 "주께서 직접 일을 하십니다" 라는 것만 필요하고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어야 주님이 사용하고 싶은 것에 사용을 하시는데, "저의 주특기는요?" 라고 하면서 나오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제 점수는 80점입니다" 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는데, 굳이 점수를 이야기하자면 빵점이라는 말이다.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 목사님, 참 자유로우시네요 !!
우리교회 사이트에 비밀글로 저에게 질문한 사람인데, "목사님의 신학은 완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주님만 완전하면 되었지 제가 왜 완전해야 합니까?" 라고 했는데, 그러자 약 10일 뒤에 글이 오기를, "목사님은 참 자유로우시네요" 라고 반응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자유롭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미면 비꼬는 것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던데, 그러니 그런 표현보다는 "우리가 죄인이 맞네요" 라고 하면 참으로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굳이 남의 자유까지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ㅋㅋ).
구원이라는 것은 수면 내시경인데, 즉 이미 검사를 받고 회복실에 와서 "아하, 이것이 내 힘으로 될 문제가 아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성도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닌데, 그렇다고 자기 아버지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회장 목사가 설교를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전부 다 무엇인가? 오직 예수님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설교를 듣고 납득을 하고 자기가 논리를 짜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을 모두 수면 내시경을 하고 싶은데, 마취를 시켜서 말이다. 그러니 구원의 마취제, 즉 십자가의 피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를 잊어버리는,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마취제를 주사기로 다 놓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것이 저절로 나올 수 있도록 말이다.
◈ 산상설교 - '그 입을 다물라' !!
물론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데, 그런 마취제 중의 하나가 바로 산상설교라는 것이다. 즉 "그 입을 다물라!" 라는 것이다. 오른뺨을 친다고 해서 왼뺨을 내놓으면 구원을 받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속으로 간음을 하지 않으면 착한 짓인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 어떤 인간이라도 그 말씀을 하나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것을 구하면 안 된다고 하니, 그게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 중에서 먹는 것과 입는 것을 구하지 않는 인간들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상설교를 비롯한 그 모든 율법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즉 "너희는 인간이 아니고 나만 인간이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지혜인데, 그러니 지혜는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 지혜 덩어리가 인간의 몸으로 마지막 때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 '마지막' 이라고 함은?
여기서 '마지막' 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보겠는데,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시간적으로는 마지막이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해내는 것에 있어서는, 시간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허황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이 있는데, 즉 시간을 표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 인간 등등, 그렇다는 말이다.
그게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인데, 그만큼 자연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연이 깨지고 있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을 미리 이야기를 해버리면 수련회에 참석을 하지 않을 수가 있어서 조심스럽다는 것이다(ㅋㅋ).
◈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에 대한 철거작업 !!
아무튼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보여주는 것은 "내 것을 내 마음대로 뒤집겠다고 하는데 너희들이 왜?" 라는 것인데, 즉 "그것들이 깨지든 말든 왜 너희가 섭섭하게 생각하지? 해와 달이 너희들 것이야? 강물이 썩든 말든 그게 너희들 것이야? 아니지? 그러면 신경을 꺼라"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철수를 하셨는데 그 나머지를 철거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왜 아쉬워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너무나 쉽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아기를 낳으면 태반을 잘라서 버리는데,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주님이 되게 한 것이 이 세상인데, 그렇게 예수님이 주님이 되었다고 하면, 그렇게 주님이 되게 한 태반과 같은 이 세상은 버려야 하는데, 그것으로 요한계시록은 끝났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더 이상 왜 필요하냐는 말이다. 참으로 쉬운데, 더 이상 이 땅에서 살지 않고 주님과 합류하면 되는데, 그러니 666이 어떻고 하면서 요한계시록을 어렵게 여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이것을 지켜야 합니까? 일곱 인이 온단다. 강물의 3분의 1이 썩는다" 라고 하는데, 당연히 그렇게 썩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이미 떠났으니 말이다. 주님이 어디 강물에서 물놀이를 할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태양이 어두워지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태양을 쬐었으면 되었지, 그러니 주님이 떠나고 나면 당연히 태양도 역할을 다했으면 은퇴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물론 산천수목도 다 사라지고 말이다.
우리 인간이라면 태양도 필요하고 다 필요한데, 주님이 인간인 이상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 아닌 쪽으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태양이 사라지고, 첫 번째는 4분의 1, 두 번째는 3분의 1, 그리고 세 번째는 온통 다 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박수만 치면 되는데, "참으로 잘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왜 시래기국에서 건더기를 건져내면 그 안에 뭔가 가라앉아서 들어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요한계시록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께서 건더기를 건져내니 그 밑에 것들이 뭐라고 하는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잘 살고 있는 비닐 하우스를 왜 거두어갑니까?" 라고 하면서 항의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침전물을 모아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좋은 곳으로 보내 줄게" 라고 하시면서 유황불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 옛날에 저렇게 했지 !!
그러니 요한계시록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으니 요한계시록이 무척 어려워 보인다는 말이다. 떠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있을 생각을 하니 요한계시록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무엇을 지키면 되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키기는 무엇을 지킨다는 말인가? 요한계시록은 이미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회고하는 식으로 보는 것인데, 즉 "옛날에 저렇게 했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수면 내시경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마지막을 표현할 수 있는 무대장치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그동안 숨어있던 마귀가 정체를 드러내는 것인데, "하나님, 하나님!" 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적그리스도, 혹은 거짓 선지자들도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고, 그리고 이 세상 신이 깔아놓은 그 정체가 구체적으로 그 관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노골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물론 평소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친하게 지내지만, 사실상 그 속에는 "너희는 죽어 마땅해" 라고 하는 성도에 대한 핍박과, 그 악마적인 공격성을 폭로시키는 내용들이 같이 어울려서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것이다.
◈ 사태파악은, 십자가 사건의 반복으로 !!
그러면 그 마지막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장식이 되는고 하니, 그것은 예수님 주변에 포진이 되어있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핍박했던 그 핍박을 반복하게 되면, 그게 마지막 현상의 모델케이스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복음으로 인해서만 진상이 드러나는데, 그래서 복음에 서있지 않으면 마지막에 아니라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으로 사는 사람에는 이 세상이 심히 수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복음으로 정신을 차리면 되는가?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는데,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즉 "너는 십자가 사람이야" 라는 것을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는데, 우리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속해 있는 환경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으로 무장하게 되는데, 물론 지나면 또 잊어버리지만 말이다. 그러면 또 사건이 터진다는 것이다.
"누가 교회에 나와서 그렇게 잘 되었단다" 라고 하면, 처음에는 부러워하는데, 그러다가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게 부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즉 "아하, 내가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 마귀의 종들이 좋아하는 것을 부러워했구나" 라고,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욥기인데, 욥의 세 친구가 얼마나 느긋한지 모르는데, 아마 기분이 좋았지 싶은데 말이다. 자기들은 고난을 받지 않기에 자동으로 의인이 되었는데, 졸지에 죄를 짓지 않은 인간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욥은 천하에 죄인이 되고 말이다. 즉 "니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너의 인생이 이렇게 꼬일 리가 없다" 라는 것인데, 욥은 하는 것마다 작살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광주모임에 오신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던데, 학교생활, 결혼, 사업 등등, 자기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그 사람주변에 얼마나 전도를 잘 하셨는지 모르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망한다" 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곧 주님의 전도방법인데,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너라" 라는 것보다 더 좋은 전도방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사태파악은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킴으로서, 그러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강의의 핵심인데, 십자가 사건의 반복으로 인해서 그 사람은 증인이 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적으로 증인이 되게 하셔서, 주님이 친히 벌리시는 전도와 선교가 되도록 조치를 하신다는 말이다. 괜히 필리핀에 가서 총 맞을 짓을 하지 말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막상 산상설교가 끝나고 난 뒤에 구원을 받은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문둥병 환자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근거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라고 하셨는데, 즉 "나는 이 제물의 실체화이다" 라는 겁니다.
(마 8: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 저희에게 증거하라 !!
우리의 인생이 하는 일마다 꼬이고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증거인데, 여기에 분명히 "저희에게 증거하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대학교에서는 데모를 하다가 잘리고, 토익을 900점이나 맞아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고, 그것을 경상도 말로는 '답답하다' 라고 하고, 전라도 말로는 '갑갑하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요구가 아니라, 주님의 요구에 의해서 주님의 증인역할을 하라고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이미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구원받은 몸이다" 라는 것인데, 이미 회복실에 와있다는 것이다. 그 몸의 상황은 자기가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너희는 저기에서 여기로 일방적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는 것이다. 그러면 심판이란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데, 그것이 요한일서에 나온다는 말이다.
(요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