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16:31-36 (증거 항아리)
Re..출 16:31-36 (증거 항아리)
이름 : 이근호(IP:)
증거 항아리
2004년 9월 19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6:31-36
16: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16:32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16:33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16:34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16:35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16:36 오멜은 에바 십분의 일이더라
누가 여러분 보고 '재료'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많이 나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깡그리 무시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자신이 존재하는 걸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본성에 불과하며 실제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인간상이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되기위해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하실 일을 위한 재료가 됩니다.
우리의 목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주셔서 사람이 되게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보통 목숨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앞으로 영원히 자기 소유의 목숨으로 간주하라는 것으로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고자'하는 것으로 인간은 움직이게 되어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 우리네 목숨 간수하는 법입니다.
즉 어떤 식으로도 인간은 증거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증거 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 속성을 숨김없이 고백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스스로 자신을 살고자 하는 식으로 사는 속성은 그 사람이 신학을 연구하든지, 예술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공직에 있든지, 설교자가 되든지, 물리학과 천문학을 하든지 상관없이 결국에는 숨길 수 없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에게도,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도 영성 훈련이나 도를 닦는 사람에게도 살고자하는 속성은 늘 최종적으로 증거 되는 양상입니다. 출애굽하는 과정을 놓고 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면 곱게 데려가셔도 될 일을 꼭 애를 먹이시고자 아예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을 몹시 괴롭히는 양상입니다.
인간이란 육체덩어리를 지니고 있기에 몸이 고달프면 만사가 고달프게 마련입니다. 정신력이 육체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력으로 배고픔을 해소해 줄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서도 그 전에 해왔던 모든 일을 수월하게 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날개 없이 정신력으로 공중을 신나게 뻔질나게 날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력은 그저 날개 없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느낌을 상상해 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것은 꿈입니다.
성경은 정신력 배양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정신력으로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성경을 보는 것은 마술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속성을 밝히는 책입니다. 인간은 그 어느 순간에도 자신의 자아됨을 감추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면 하나님의 일하심의 올바름을 증거 하게 될 것이요, 성도가 아닌 자라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불만이 있음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즉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하고, 성도가 아닌 자는 모든 것을 '신과의 흥정'으로 볼 것입니다.
은혜란 그 내부에 이미 은혜 받을 자의 사명과 존재의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점을 확실히 합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그 항아리를 보관할 위치입니다.
그 위치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34절에 보면,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그런데 이 증거판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5:16과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즉 증거판은 모세가 세 번째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인데 거기에는 십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증거판이 바로 속죄소가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병원에서 여러분들의 병을 어떤 식으로 치료합니까? 우선 검사를 하겠지요. 그래서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내고자 합니다. 만약 병을 유발하는 미생물에 의한 것이라면 그 미생물을 죽이거나 약화시키는 약물이나 주사를 맞음으로서 병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렇다면 죄는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합니까? 병원에서는 해결이 안됩니다. 병에는 원인이 있듯이 죄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죄의 원인을 말해주고 그 죄를 씻어주는 식으로 처리하십니다.
죄가 죄로서 드러난 것은 두 가지 점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틈만 나면 죄를 지으려는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둘째는, 그 죄로 말미암아 외부적으로 튀어나오게 자극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즉 안에 잠재된 상태의 죄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실질적으로 죄 되게 하게 만듭니다.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하고는 정반대 생각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비록 우리 안에 죄 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할지라도 외부에서 좋은 말씀이나 좋은 교훈이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그 죄가 외부로 튀어나오지 않고 억제되어 그래서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억제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마가 심어준 상식에 불과합니다. 죄가 억제되기는커녕, '자기 의'라는 형식으로 변용되어 튀어나오지요. 로마서 7:7-9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원리를 하나님은 사도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평소에 늘 '자기 의'에 충만하면서 살아가는데 언제 그 죄가 드러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접촉하게 되면, 자기 의라는 속성을 감출 길 없어 그대로 증거되고 만다는 겁니다.
온통 율법에 의해서 지적 당할 수밖에 없는 죄투성이 인 채로 말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초콜렛을 사주고 나중에 보면 온 몸이 온통 초콜렛 투성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율법은 주면 인간은 그 율법에 의해 온통 죄로 먹칠하게 됨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과 항상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살아가는 그 실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처럼 죄가 무언지를 명확히 하는 배경 속에는 하나님의 속죄의 피를 뿌려집니다. 증거판이 들어있는 상자를 증거궤라고 하는데 이 증거궤는 일 년에 한차례식 대제사장이 대표로 지성소, 곧 속죄소에 들어가서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서 죄용서가 주어지는 관계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증거 판이 증거 하는 것은 하나님에 비해서 인간은 죄인임을 분명히 해두자는 겁니다. 속죄가 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 규정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속죄의 의식은 오직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에게만 효력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회개 해야지만 죄 용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해야 합니까? 그 보관하는 장소에 속죄의식과 관련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만나의 취지 속에는 인간들의 원망이 담겨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불신적인 본성을 하나님 쪽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죄가 성립되려면 하나님 쪽에서 피해를 받은 증거가 확보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증거 궤 위에 1년에 한 차례씩 뿌려지는 그 짐승의 피로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희생되는 제물은 흠이 없는 제물입니다. 즉 죄가 없이 거룩이 거룩답게 유지된 제물입니다.
그런데 그 제물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짐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있는 제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원망하며 사는 인간의 본모습을 같이 얼싸안은 것이 됩니다. 자기 백성의 원망이, 즉 인간의 근본 된 죄악 된 속성이 거룩한 제물을 죽게 한 겁니다.
이러한 희생을 다 누구의 잘못으로 온 것인가를 명확하게 말해주기 위해 만나가 든 항아리를 속죄소 곁에 두는 겁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근본 속성에 대해서 희생이라는 방식으로 알리고 계십니다.
즉 늘 십자가 앞에다 자신을 내비쳐 보라는 겁니다. 매일 거울 보듯이 말입니다. 이런 상태가 회개의 상태로서 속죄소 영역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항아리의 취지는 영원히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해서 버릴 내용이 아닙니다. 속죄하시는 희생 제물과 인간의 죄악은 항시 나란히 해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됩니다. 우리는 비처럼 내려오는 모든 은혜 속에는 오직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매일같이 예수님의 피로 샤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은 원망하며 살고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감사의 마음으로 고개 숙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