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12)
요한복음 8장 44절(가락-악마의 정체)15121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44절이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43절부터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그 다음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이 대목부터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일단 마귀가 등장하면 우리는 뭘 보고 싶어하는가 하면 마귀에 속한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를 보고 싶어하죠. “대장 낯짝 한 번 보자.” “봐서 뭐 할 건데?” “보고 체포해버리려고.” 마귀의 대장의 목을 베기 위해서 마귀를 보고 싶어 하는데, 마귀는 얼굴이 없어요.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사를 보고 싶어한다고 천사가 “여기 있지롱~” 하고 나타나는 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천사나 이런 영적 존재는 우리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하고 거래나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천사 같은 경우에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요.
왜 우리 지시를 따르지 않느냐 하면 우리는 구원의 대상이지, 구원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구원 당한다는 입장이라는 뜻은 구출이잖아요. 이 구출이라는 말은 우리가 놓여있는 이 바닥이 좋은 바닥이 아니고 나쁜 동네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나쁜 동네에서 물들은 인간이 그 나쁜 동네의 버릇으로 자기 자신을 건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나쁜 것에 속하지 않은 쪽에서 일방적으로 끄집어내는 방식이 되어야 그것이 의의 방식인데 나쁜 동네에 있으면서 본인이 나쁜 줄도 모르고 자기가 자기 식대로 자기가 구원하겠다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서 자기를 물에서 건져내겠다는 식의 모순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구원받은 성도는 ‘나는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에 구원자는 내 외부에 따로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을 해줘야 돼요. 그래야 힘을 뺍니다. 흥정이나 타협이나 협상을 안 해요.
구원 가지고 타협이나 협상을 하는 노래가 작년부터 유행해요. 이애란씨가 불렀던 노래인데 제목은 「백세인생」이에요. 그 내용은 ‘60세에 저 세상에서 나를 데리러 오거든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다오, 못 간다고 전해다오 하는 노래가 있어요.
‘70세에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도 할 일 많아서 못 간다고 전해라 8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도 쓸만하다고 못 간다고 전해라 90세에 날 데리러 오거든 내가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이건 뭐..
‘백세에 저 세상에서 오라고 하거든 날짜는 내가 알아서 정할 테니..’ 내가 간다는 겁니다. 「백세 인생」이라고 인터넷에서 한 번 찾아보세요. 히트했는데 지난 트로트 모임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는데 신인상 치고는 나이가 너무 많아요. 50이 넘어갔대요.
이렇게 흥정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하는 식이지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겁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마귀가 어떻게 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이것 하나만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돼요.
“원인보다 더 큰 결과”,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 이것이 중요합니다. “원인을 능가한다.”는 말은 원인을 5개를 집어넣었는데 결과가 7개 나왔다면 그때 2개는 원인에 포함되는 거에요 원인에서 포함이 안 된 겁니까? 원인에 포함이 안 된 거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5개를 집어넣었는데 결과가 7개 나왔다면 2개는 다른 데에서 왔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7개를 다 5개를 집어넣은 곳과 다른 곳에서 나왔다고 봐야 돼요.
이쪽 판과 저쪽 판이 다른데 마귀는 이 둘을 교묘하게 이걸 교체시켜서 섞어버린 거에요. 처음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할 때 선악과는 인간 소속이 아니에요. 그런데 마귀가 자꾸 “그것을 따먹으면 하나님의 것이라도 내 것이 된다.”고 부추긴 거에요.
선악과를 따먹는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 선악과가 가지고 있다는 그 결과, 선악과가 품고 있다는 그 지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그 지혜가 내가 원인 제공자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 결과가 나와 연결이 된다고 보는 거에요. 이게 마귀의 유혹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기도하면 그 기도가 받으시는 것이 되고 내가 헌금하면 주께서 그 헌금을 받으시고 내가 전도하면 주께서 받으시는 전도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마귀의 생각이에요.
이 역사가 오늘날 교회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에요.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유대인들이 내내 생각했던 그 생각이었습니다. 쉽게 가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결판난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데 구원이라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 시작(시동, 가동)은 지상에 있는 나의 행위로부터 시작이 되고 결과는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주님은 엉뚱한 원인과 결과를 연결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들 유대인들 앞에 나타나는 이유는 본인이 원인이기 때문이에요.
유일한 원인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본인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마귀가 어떻게 생겼습니까?”라고 묻는데 그렇게 묻지 말고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해야 돼요.
마귀가 하는 일을 중심을 가려버리는 일입니다. 이 중심을 가려버리면 원인을 가린 것이 되지요. 그러면 원초적인 원인(주님)을 가려버리고 원인의 자리는 누가 독차지하겠어요? 원인을 따로 집어넣은 본인이 그 중아에 서있겠지요.
그래서 모든 세상만사를 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소속되어 있기에 내가 여기에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세상은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이 짜여지고 원활하게 돌아가야 기분이 좋고 만족스러운 거에요.
남 좋은 일을 시키면 내가 기분이 나빠요. 그런데 남이 망하든 어쨌든 간에 내가 잘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에요. 그러니까 의외로 마귀가 그렇게 흉측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마귀의 모든 기능은 흉측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고 그렇게 친근하고 친밀스럽고 왠지 다정해보이고 마치 오래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줄곧 해왔던 그 생각을 우리한테 그대로 제공을 하기 때문에 마귀의 하는 일을 들어보면 마음이 편하고 정이 가요.
그것을 유대인들은 “화해, 화목”이라고 했고 이것을 우리 현대인으로 번역하면 “평화”입니다. 이스라엘의 90%가 전쟁역사였거든요. 그들의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평화를 보장받는 것입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고 평화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루어서 평화를 가져온다면 그것으로 자기들은 족하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하는 이 화해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평화를 목적으로 하고 또 하나의 화해는 주님의 화해로 불화를 통한 화해입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것과 원수지간이 됨으로써 비로소 화해에 도달하는 방법을 씁니다. 기존의 나를 화해하게 만들고 평화롭게 만드는 모든 요소와 불화를 일으키고 다툼을 야기함으로써 비로소 그 결과로 생겨나는 화해를 주께서는 시도하지요.
떨어져 나가야 새로운 것과 비로소 붙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떨어져나갈 때 떨어지려고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떨어질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려고 했던 평화는 누구의 평화입니까?
안에 누가 있어요? 결국은 나의 평화거든요. 나의 평화, 그것을 내가 스스로 깨부순다는 것은 행동할 분명한 이유가 성립이 되지 않잖아요. 나를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과 타협하고 협상을 했는데 그것을 스스로 깬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을 10장에서는 너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라고 했어요. 그 얘기는 다시 말해서 “너와 너 자신 사이에 다퉈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네가 너를 미워할 수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미워하려면 나 말로 또 하나의 나, 나를 좋게 보지 않고 나쁘게 보는 새로운 내가 등장해야 됩니다. 그러면 나 대신 나 같은 분이 등장해야 되지요. 그 분이 누구겠습니까?
우리는 아담에 속해 있잖아요. 그러면 아담을 질타하고 아담을 붕괴하는 아담은 어떤 아담입니까? 마지막을 장식할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과 나 사이에 좋은 관계가 아니고 불화해야 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없이는 하나님께는 화해가 없습니다. “십자가로 화해했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십자가가 믿어지면 좋은 관계가 되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것과는 정반대지요. 심지어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 받고자 하는 나를 내치고 그것을 마귀적 생각이라고 질책하는 방식으로만 우리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를 나의 구원의 용도로 쓰려고 끄집어 당기는 그 모든 행위가 결국은 주님 위주가 아니라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인 것을 질책 받고 그것을 지적당하게 하시는 사건이 일어나야지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구원에 대한 기대나 구원에 대한 희망 자체가 마귀적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구원에 순서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구원의 순서가 있어요. 모든 인간을 다 버려놓습니다. 다 버림 받게 만들었어요. 그 다음에 순서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부활의 순서가 나오는데 제일 먼저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일찍 돌아가신 모세나 엘리야 그렇지요. 이렇게 부활의 순서가 구원의 순서에요. 모든 인간을 다 버려버립니다. 예수님도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았지요.
제일 첫 번째 순서로 사흘 만에 부활한 분이 예수님이에요. 성경에서는 그 예수님이 구원 받을 때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지 않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만 달랑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예수님 외에 모든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처음부터 죽은 자들에 속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은 자들에 속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손을 들어서 “저 먼저 구원해주세요.” “손 내려. 저 먼저 구원해주세요.”라는 말을 할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권리가 있다고 여긴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어요.
하나님이 십계명 주시고 율법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이유는 자기들이 그것을 지키면 복 받아서 구원에 이른다는 논리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 중심이라고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겠다는 그 생각이 마귀적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렇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악마적 방식에 대해서 주님의 대응방법은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세요. 5개를 집어넣고 5개를 예상했는데 7개가 나왔다면 5개는 내가 집어넣은 것이고 2개는 주님이 주신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7개 몽땅 주님이 주셨기에 5개를 원인으로 집어넣었다는 그 5개에 대한 고발조치로 7개의 결과가 생긴 겁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5장 말씀대로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입니다. 평소에 조깅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했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조깅 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학생 때에 다들 컨닝해 봤지요? 컨닝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도 있고 보여줘서 하는 경우도 있고 합니다. 컨닝하는 것은 나쁜 짓이지요. 그런데 뒤돌아 보니까 조깅하는 것만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컨닝하는 것도 주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원인보다 많은 결과)”를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구약 사사기에 마노아 가정을 아십니까? 삼손의 아버지 가정이에요. 마노아 가정에 자식이 없었는데 어느 날 (자식을 간절히 원하는 것에 관계없이) 자식을 주겠다고 나타난 쪽은 마노아 쪽이 아니고, 천사가 나타나서 제단을 쌓으면서 자식이 있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서 자식이 있겠다는 결과는 마노아 가정이 그런 천사가 나타나라고 사전에 굿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나타나가지고 “자식을 낳는데 미안하지만 그 자식은 네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께 바쳐야 될 나실인으로 살아야 되겠다.”라고 일방적으로 조치를 한 거잖아요.
이것은 사무엘도 마찬가지지요. 아들이 없는 한나에게 아들을 줬는데 한나는 그 자식을 누구에게 도로 바칩니까? 하나님께 도로 바치잖아요. 이 예가 그거에요. 내가 열심히 기도했더니만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고 사무엘을 주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게 하신 거에요.
따라서 ‘내가 기도를 몇 시간 했던 간에 관계없이 “사무엘”이라는 모든 작품과 모든 공로는 내가 가져갈 게 전혀 없고 도로 주님께 바쳐야 될 “주님의 것”으로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신학에 성도됨의 표징이 되는 거에요.
성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 10%와 주님 90%가 아니고 100% 전부 다 처음부터 주님께서 계획하신 바 스케줄에 따라서 그때 그랬었어야 하는 거에요. 그때는 절에 갔어야 되고 성당에 갔어야 되고 여호와 증인에 갔어야 되고 신천지에 갔어야 되고 하는 겁니다.
그때 그것을 거쳤어야 된다는 것을 성도가 된 후에 한꺼번에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느긋한 마음으로 앞으로 내년 2016년도에 1월, 2월, 3월에 어떤 스케줄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미리 당겨서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겠지요. 제가 ‘염려할 필요가 없겠지요?’라고 했는데 염려를 해요 안 해요? 하잖아요. 이걸 이야기해야 돼요. 이제부터 정말 어렵습니다.
오늘 할 강의가 요한복음 8장 44절, “너희 아비는 마귀”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나는 마귀 안 섬길래. 마귀 오기만 해봐 마귀를 만나면 내가 목을 비틀거야. 나는 마귀가 싫어. 그러니까 나는 마귀 안 섬길거야. 나는 주님만 섬길게.’라고 하잖아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거에요. 그래서 이 성경이 난해한 겁니다. 마귀가 나쁜 존래라고 하는 것은 다 알지요. 마귀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마귀를 상상해서 그래요.
나는 마귀를 싫어한다는 사고방식이 마귀를 나쁜 존재로 몰아세운 겁니다. 그게 마귀의 술책에 걸려든 거에요. 마치 보이스피싱에 걸려든 것처럼 말이에요. ‘나는 사기꾼은 싫어. 하지만 사기꾼을 잡는 경찰은 좋아.’라고 한 그 순간, 경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말려들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나는 마귀가 싫고 주님이 좋아.’라고 한 그 순간, 그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나타난 마귀에게 백발백중 걸리는 겁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마귀를 싫어하고 주님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마귀의 꾀임에 빠진 것이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마귀와 주님을 내가 선택해서 그런 겁니다. 내가 누구를 선택할 때는 그냥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 선택하겠습니까? 나의 구원에 유리하라고 주님을 선택하고 예수를 선택하지 마귀를 선택하지 않지요.
그게 주님이 알려주는 마귀 선택방법과 완전히 틀어지고 차이가 나는 거에요. 제가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를 버려두고 주님부터 먼저 끄집어내어 구원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 다음에 차례대로 뽑아내시잖아요.
제가 분명히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버렸다는 그 점에 우리 하나하나를 끼워넣기를 우리는 주저하든지 안 그러면 상당히 본능적으로 그것을 원치 않아요.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버렸다고 할 때에 우리 마음은 주(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심지어 자기 아들을 버리게 만들어놓고 끄집어내는 것을 관람하는, 다른 저쪽에 높은 산에서 그것을 쳐다보는 제 3의 장소를 우리는 정하고 싶어하는 거에요. 내 자아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보고 옳은 쪽으로 진리를 내가 선택해야지 이런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보고 성경을 해석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평가하려고 덤벼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스포츠 선수들을 보면 두 종류가 있잖아요. 구단에 속한 선수가 있는 반면에 FA(자유선수)가 있어요. 구단에 속한 사람은 선수를 저쪽에 넘기려면 본인은 빠져야 돼요. 왜냐하면 구단에 돈을 주고 샀기 때문에 구단주가 주인이 되어가지고 저쪽 구단주하고 의견이 일치해야 돼요.
특히 메시같은 축구선수는 이적료를 선수가 받는 게 아닙니다. 그 선수를 상품으로 삼고 있는 구단끼리의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자유선수가 되면 어떻습니까? 빌라델피아에서 데려간다. 김현수를 얼마에 데려간다고 하는 것은 본인이 자유선수이기 때문에 자기는 제 3의 자리에 앉아가지고 “자, 고액을 제시하는 쪽으로 내가 갑니다.”라고 자기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미 우리의 구단주가 마귀에요. 그러면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우리는 어떤 생각과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마귀의 생각과 마귀의 선택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마귀의 하수인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무슨 수로 우리가 간파합니까? 어떤 수를 써야 간파해요? 철야를 할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면 간파할 수 있습니까? ‘참, 내가 마귀에 속했지..’ 이것을 어떻게 알아요?
인간은 자기 중심이고 자기는 천하에 천사인데 어떻게 자기를 악마의 하수인으로 스스로 포함시킬 수가 있느냐 말이지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알려드릴까요? 약올려야 돼. 알려드릴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싫어지는 모양새로 다가오면 돼요. 그래야 내가 마귀에 속한 사람인 것이 판정이 납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예수님이 어떤 것을 원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에 대해서 싫어버린 바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좋아했습니까? 좋아한 것처럼 보이는데 끝에 가니까 모닥불 쬐면서 베드로가 뭐라고 했어요? “저 사람하고 나하고 상관없는 사이다.”, 심지어 “저주한다.”라고 분명히 했지요?
베드로로 하여금 “나는 예수님을 저주합니다.”라는 발설이 나오도록 누가 사건을 그런 식으로 몰아넣었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몰아넣었지요? 베드로가 칼을 들고 있을 때는 “칼을 거두어라. 칼로 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
하여튼 제자들이 내뱉는 모든 생각은 전부 다 거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습니까?”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어린애를 데리고 와가지고는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섬기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고 했지요.
제자들은 말하기를 “우리 가운데 누가 높습니까?”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쓴 잔을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그런 발언을 할 자격이 안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여튼 제자들이 하는 족족 전부 다 거부를 해버려요.
그리고 심지어 베드로는 뭐라고 장담했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언정 ‘저’ 모르겠습니까? ‘저’ 베드로입니다. 당신이 이름지어준 ”반석“입니다. 김반석, 최반석,.. 하는 ”반석“입니다. 다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마귀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겁니다.
“네 힘으로 네 자리에서 내 쪽으로 건너올 수가 없다. 네가 그러한 객기를 부리면서 네가 그러한 기대를 하지만 닭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씩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까 한 것을 다시 한 번 물어봅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한 것의 원인자가 주님입니까? 베드로입니까? 주님이시지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때는 그 사실을 몰랐어요. 나중에 오순절날 성령을 받고난 뒤에 베드로는 비로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심지어 예수님을 부정한 것도 은혜에 속할 줄이야..’ 죄 지은 것조차도 은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요.
우리는 행동으로 죄냐 아니냐를 결정하기 때문에 내 행동이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원인을 바꿔치기 해버린 거에요. 내 행동과 무관한 원인이 우리 속에 투입이 되어버리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이게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왕 요한계시록 강의도 가까워오는데 미리 풀어야지요. 빨리 풀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세 가지 안목이 있어요. 이것을 교재에 써놓았어요. 사도의 안목, 천사의 안목, 주님의 안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주님을 통해서, 천사를 통해서 사도요한에게 오거든요. 이것이 요한계시록 1장에 제일 먼저 나와요. 내가 앞으로 본 것은 주님의 종에게 온 것은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나에게 알려준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관점은 (미리 다 해도 되는가 모르겠다마는) 역사적 관점이에요. 인간은 역사를 알잖아요.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역사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인간의 관점 아닙니까?
그게 7교회지요. 빌라델비아, 사데, 라오디게아, ... .인간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시작합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입니다. 그 뒤에 4장, 5장을 넘어가면 인간의 관점에서 떠나버립니다.
그러면 해석이 안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해석이 안 돼요. 인간의 관점만 해석이 되지요. 그러면 위쪽의 관점은 결국 아래쪽 인간의 관점을 부정하고 고발하는데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거에요.
“너희는 땅에서 났는데 어떻게 위의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요한복음 3장)에 그 말씀이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8장 23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위, 아래, 위, 위, 아래”라는 노래가 있지요. 주님은 위에서 났고 우리는 아래에서 났지요. 그러면 주님이 오심으로써 아랫동네의 해석방법, 아랫동네의 사고방식이 드러나겠어요 안 드러나겠어요? 드러나는 거에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을 때에 그 해석은 본인이 위에서 오신 성령을 받게 되기 전까지 아랫동네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해석인데 그 해석은 마귀가 쳐놓은 그 울타리 밖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물론 예수님을 좋아했어요. 그렇지만 결국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가두어져 있은 거에요. 그런데 베드로가 ‘이것은 마귀 니들 짓이지.’라는 말을 못 해요. 왜냐하면 역사적 해석에서는 마귀가 없어요.
이 땅에서는 자기를 해꼬지 하는 존재가 마귀인 줄 알고 있어요. 자기를 병들게 하고 자기의 모가지를 비틀면 마귀인 줄로 알고 검은 사제들 불러다가 명동에서 굿하는 거에요. 그런 영화가 나왔지요.
자기를 해꼬지 하면 마귀인 줄로 알아요. 자기를 잘 되게 하는 존재가 마귀인 줄 몰라요. 나에게 평화(평온한 인생)를 허락하면 천사가 했는 줄 아는데 그것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있지요. 「내게 강 같은 평화」. 그거 해서 뭐하라고요? 누구 좋으라고요? 나 좋으라고요. 예수도 내게 좋으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왜 왔다고요? 그 “평화”를 “불화”로 만드는 거에요.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소속된 곳이 예수님과 통합적으로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개인적으로 주님을 좋아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주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어요. 내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좋아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결국 주님은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우리 중 누가 믿었으리요 우리 눈에 기이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싫어버린 바 된” 모습으로 모든 개인에게 다 찾아왔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통째로 마귀라는 바구니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 바구니 바깥에서 주님이 오시게 되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공통된 본성을 보이게 되어 있어요. 천하에 예수라도 내가 싫으면 싫어지는 거에요.
이것이 마귀의 심리인데 “강력한” 저항, “강력한” 밀침입니다. 주께서 주신 그 모든 사항에 대해서 “강력한” 불만과 불평이 있고, 돈이 수천억 있어도 자기 인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음에 들었다가도 약간만 시간이 지나버리면 불안해요. 언제 이 상황이 바뀔지 모르잖아요.(바뀐다는 것을 뻔히 다 알잖아요.) 그런데 바뀌어 버리면 괜찮은 곳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리 몸이 늙습니다. 늙으면 비가 좀 온다 싶으면 온 천지가 류마치스 관절염 때문에 찌뿌둥해가지고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사랑, 성령의 열매가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려요.
「사사기의 그리스도」 책이 곧(1월에) 나옵니다. 처음에는 남이 귀찮다가 나중에는 내가 귀찮아요. 그것도 모르고 80세에 찾아오거든 쓸모 있다고 전하라고 하는데 뭘 알아서 갑니까?
다시 돌아갑시다. 인간이 왜 자기가 속한 존재인 것을 모르는가 하면 마귀 바깥에 마귀의 정체와 전혀 이질적인 어떤 분이 나타나지 않는 한 인간은 그 안에서 자체적인 평화와 평안을 모색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인간은 정치적이다.’라고 해요. 가정에도 정치가 있는데 그것은 협상과 타협입니다. 간난애도 본능적으로 협상과 타협을 할 줄 알아요. 어느 정도 울면 젖을 준다는 것을 알아요. 협상력과 타협을 타고 났어요.
그리고 이것이 확장이 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국가라고 하거든요. 국가를 가지고 보편적 조직이다. 개인이 모이면 다수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국가가 되지 않아요.
개인이 모이면 보편적이 되어야 돼요. 그 하나의 단일체계가 정신적으로 지지를 받게 되어 있지 개인이 모인다고 해서 단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모인 것을 가지고 그냥 ‘집합’이라고 이야기하고 ‘집합’이 하나의 동호회가 되면 그것을 ‘집단’이라고 이야기해요.
사르트르가 그런 이론을 제시했거든요. 그것이 적절한 이론이에요. 그냥 버스정류장에서 사람 10명이 모여봐야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무주구천동 산악회에 갔다면 (이 추운 날 왜 산에 가가지고 사람 2명이나 죽고..) 이때는 동지 의식이 생겨요. 이것은 ‘집합’이 아닙니다. 그쪽 사상에 내가 자발적으로 굴종이 되고 자발적으로 복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회사에 사람이 오게 되면 (이것은 ‘집합’입니다.) 이들을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면 자발적 순종이 되는 우리 기업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들 훈련을 잘 시켜야 오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가 있어요. 요즘 20대가 만만치 않습니다마는 훈련시키기가..
그렇게 되어버리면 회사가 일종의 종교단체가 되어버리지요.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충성을 다 하는 겁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하거든요. 오늘 것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는 것은 땅에 있는 인간이 아무리 추적해도 그 출처를 알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몰라요. 다만 성령을 받으면 마귀적 발상을 하고 있는 인간들의 집합은 압니다.
성령을 받는다고 해도 마귀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면 안 돼요. 마귀 얼굴이 뭐, 뿔 달리고 이렇지 않아요. 자 이제부터 이렇게 대강 알고 지금까지 어려운 것을 하지 않았어요. 이제 어려운 것을 합니다.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나는 그런 마귀가 싫어. 아담은 마귀한테 속아넘어갔지만 나는 두 번 다시 마귀한테 속지 않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마귀를 대적해서 물리칠 거야.‘ 누구나 이 본문을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한다 이 말이죠.
그게 잘못이에요. 어떻게 그것이 잘못이 되는가? 마귀는 우리가 칠 수 있는 대상이 안 됩니다. 마귀가 있고 그의 졸개가 함께 있고 우리는 주님에 속하고 주님의 지체로서 주님과 함께 따로 있다고 우리는 자꾸 생각을 하거든요.
이 놀이가 무슨 놀이인가 하면 ‘우리 집에 왜 왔니?’ 하는 놀이에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가위 바위 보 해가지고 한 명 더 빼앗고 하는 게임 있잖아요. 밀고 당긴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노래가 안 돼요. 전부 다 마귀에 속해서 마귀의 속성을 가진 육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기 택한 백성을 건질 때에 어떻게 건지시는가?
주께서 성령을 보내서 성령이 옵니다. 오게 되면 전부 다 반발하게 돼요. 물론 성도도 반발해요. 왜? 습성이 마귀적 습성이기 때문에요. 그런데 ‘마귀적 습성’이라는 것은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여튼 이것이 공식이에요. 내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내가 기도했다는 원인이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헌금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면 내가 내 돈을 냈다는 거에요. 요게 마귀적 발상이에요.
내가 성가대에서 찬양을 했다면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셨고 그 다음에 영광 받은 원인을 추적해보니까 거기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마귀적 발상이에요. 원래 어떤 결과가 나왔을 때 원인자는 따로 있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만 원인자인데 뱀(악마)이 아담을 잡고 유혹한 거에요. 그걸 주님으로 차단시키고 네가 중간에 끼어들라는 거에요.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 이 말이죠. 여기 이 에덴 동산에 거주하게 된 이유, 선악과와 아름다운 과실, 이젠 모든 것이 너를 위해서 존재하는 나무들이 된다고 본 거에요. 마귀가.
그러니까 마귀는 항상 우리편이에요. 이것이 좋은 말입니다. 마귀는 항상 내가 좋으라고 하는 거에요. ‘너의 마음에 결심하고 감정과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똑바로 착하게만 살면 복은, “주시마” 하신 약속대로 주시겠다는데 왜 행동을 똑바로 안 하느냐?’ 이것이 마귀적이라니까요.
그 동안 나를 원인자로 제공하는 데에 쉽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데 이 논리 방식 외에 우리가 아는 것이 없어요. 태어나면서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그 방식 외에는 “No!”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내가 무엇을 해서 영광을 내가 차지하겠다는 이 논리가 너무나 맘에 들어요. 내가 무엇을 했는데 남이 영광을 받는다면 이것은 성질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죽 쒸서 개 주는’ 것처럼 말이에요. 죽여버립니다. 용서가 안 돼요.
명절날 맏며느리가 반찬을 다 했는데 시어머니가 뒤늦게 와가지고 세 시간 있다가 떠날 둘째 동서한테 맛있는 고구마 튀김을 주면서 “야, 야, 고생했다.”라고 하면 우리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침 해먹여서 자식 다 키워놨는데 남편은 다른 여자 만나서 바람을 피웠다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요. 저는 설리반 선생을 만나서 소경인데 훌륭한 학자가 된 헬렌켈러라고 있지요? 그 사람이 참 착하다고 하잖아요? 안 믿습니다. 그 사람이 결혼해서 남편이 바람을 피워보세요. 성격이 좋은지..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성질을 건드리기 위해서 왔어요. 그래야 우리의 본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를 안 건드리면 우리는 자체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마귀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려고 애를 써요.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안 믿습니다. “그 중에서 나는 좀 빼주세요.”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아요. “저는 남편 밑반찬 1000가지 했습니다.”라면서 빼달라는 거에요.
자기는 이렇게 성실하게 살았으니까 빼달라는 거에요. 그 죄인이라는 항목 속에 나를 한꺼번에 도매급으로 넘기지 말아 달라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그렇게 우리를 도매급으로 넘깁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너희가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는 그 말씀을 그 당시 제자들이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왜? “나는 빼주세요.”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와서 하는 이야기,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이 제자들입니다.
“주님이여 그러면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부자,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도 구원을 못 받는다면 얼마나 복을 많이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이거든요. 아무도 안 된다는 겁니다.
걱정되지요. 그러면 누가 구원 됩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느니라”가 되는 겁니다. 계룡산 도사가 되어서 구원 받아야 돼요. 주께서 주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받습니까? 구원? 아니요. 우리가 엉터리로 살아왔다는 그것이 발각당하는 복을 받습니다. 이게 걸림돌이에요. 주께서 영생을 주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를 줘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걸림돌을 이미 넘어선 이후에 다시 ‘나를 뭐가 넘었지?’ 하고 다시 돌아보게 되면 십자가의 걸림돌을 넘어섰는데 그것은 결코 내 힘이 아니에요. 왜? 나는 결코 나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나를 미워해도 나는 나를 사랑해요. 지옥에 가도 나는 나를 존중할 거에요. “힘내, 지옥 가도 사람 다 살고 있고 동창생이 많아.” 이렇게 나에게 격려할 거에요. 그러니까 나를 저주하는 것을 넘어선 것은 그야말로 이것을 가지고 5자 용어로 “수면내시경”이라고 합니다. 그냥 “내시경” 말고..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했으면 좋겠어요.
팔 벌리고 손등 위에 주사를 맞거든요. 멍들지요. 그럼 마취제가 들어갑니다. 눕히는데 옆으로 눕혀요. 그러면 간호사가 와가지고 “입을 벌리세요.”라고 해서 모양새가 우습게 해놓고 호스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환자는 누워가지고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생겼는가 한 번 구경해 봐야지.’ 하고 9, 8, 7, ... 세다가 깨보면 벌써 회복실로 가 있어요. 그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지요? 누가 넘어섰어요? 자기는 자고 있었는데 누가 넘어섰어요?
나를 데리고 멱살 쥐고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주께서 하셨어요. 그래서 이쪽(내시경 검사하는 방)에 있는 나를 회복실로 옮겨놓고 깨게 만들었습니다. 깨면서 우리가 느낀 점은 ‘내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은 하나의 고집이고 다 내가 좋으라고 내가 내 식으로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하나의 종교적인 발악(?)이었다.’입니다.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예수 믿으라고 하면 예수도 믿고 십자가 믿으라면 십자가도 믿고 헌금하라고 하면 헌금도 하는 그 짓거리가 바로 내가 도저히 구원 될 수 없는 것을 더욱 더 구원이 되지 못 하게 만드는 마귀가 시킨 짓인데 우리는 그것에 충실히 따라온 거지요.
교회에 한 주에 몇 번 가면 됩니까? 새벽기도 몇 번 꼭 나와야 돼요? 일 년에 전도 몇 명 해야 돼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따내려고 했던 그 모든 헛짓이 다른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나왔지요.
그래서 내 속에 있는 마귀에게서 나온 원인과 주님의 원인과 결합되면서 구원은 주님의 원인 쪽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만 자랑하고 모든 공로는 주님께 돌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필히 성령은 우리를 질책해야 돼요. 질책이 없으면 주님께 공로를 돌리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내 공로로 돌려버려요. 신앙 좋은 내 공로로 돌린다고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항상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을 마귀짓이라고 질책하는 이유는 그것을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은 받았기에 회상하는 식으로 보는 거에요.
‘네가 그런 구닥다리 몸을 죽을 때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네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 마귀짓을 네가 즐겨 구경하라. 그리고 그것과 예수 십자가 피 앞에서 그것이 죄인인 것을 들추어주신 그러한 안목이 있는 자리를 허락하신 것을 주께 감사하라.’
이 요한복음 8장 이하를 그 당시 제자들은 이해를 못 해요. 그런데 다시 이 말씀을 들으면 ‘그때 그런 뜻이었구나.’를 알지요. 10분 쉽시다.
요한복음 8장 44절이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43절부터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그 다음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이 대목부터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일단 마귀가 등장하면 우리는 뭘 보고 싶어하는가 하면 마귀에 속한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를 보고 싶어하죠. “대장 낯짝 한 번 보자.” “봐서 뭐 할 건데?” “보고 체포해버리려고.” 마귀의 대장의 목을 베기 위해서 마귀를 보고 싶어 하는데, 마귀는 얼굴이 없어요.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사를 보고 싶어한다고 천사가 “여기 있지롱~” 하고 나타나는 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천사나 이런 영적 존재는 우리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하고 거래나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천사 같은 경우에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요.
왜 우리 지시를 따르지 않느냐 하면 우리는 구원의 대상이지, 구원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구원 당한다는 입장이라는 뜻은 구출이잖아요. 이 구출이라는 말은 우리가 놓여있는 이 바닥이 좋은 바닥이 아니고 나쁜 동네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나쁜 동네에서 물들은 인간이 그 나쁜 동네의 버릇으로 자기 자신을 건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나쁜 것에 속하지 않은 쪽에서 일방적으로 끄집어내는 방식이 되어야 그것이 의의 방식인데 나쁜 동네에 있으면서 본인이 나쁜 줄도 모르고 자기가 자기 식대로 자기가 구원하겠다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서 자기를 물에서 건져내겠다는 식의 모순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구원받은 성도는 ‘나는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에 구원자는 내 외부에 따로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을 해줘야 돼요. 그래야 힘을 뺍니다. 흥정이나 타협이나 협상을 안 해요.
구원 가지고 타협이나 협상을 하는 노래가 작년부터 유행해요. 이애란씨가 불렀던 노래인데 제목은 「백세인생」이에요. 그 내용은 ‘60세에 저 세상에서 나를 데리러 오거든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다오, 못 간다고 전해다오 하는 노래가 있어요.
‘70세에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도 할 일 많아서 못 간다고 전해라 8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도 쓸만하다고 못 간다고 전해라 90세에 날 데리러 오거든 내가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이건 뭐..
‘백세에 저 세상에서 오라고 하거든 날짜는 내가 알아서 정할 테니..’ 내가 간다는 겁니다. 「백세 인생」이라고 인터넷에서 한 번 찾아보세요. 히트했는데 지난 트로트 모임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는데 신인상 치고는 나이가 너무 많아요. 50이 넘어갔대요.
이렇게 흥정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하는 식이지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겁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마귀가 어떻게 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이것 하나만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돼요.
“원인보다 더 큰 결과”,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 이것이 중요합니다. “원인을 능가한다.”는 말은 원인을 5개를 집어넣었는데 결과가 7개 나왔다면 그때 2개는 원인에 포함되는 거에요 원인에서 포함이 안 된 겁니까? 원인에 포함이 안 된 거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5개를 집어넣었는데 결과가 7개 나왔다면 2개는 다른 데에서 왔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7개를 다 5개를 집어넣은 곳과 다른 곳에서 나왔다고 봐야 돼요.
이쪽 판과 저쪽 판이 다른데 마귀는 이 둘을 교묘하게 이걸 교체시켜서 섞어버린 거에요. 처음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할 때 선악과는 인간 소속이 아니에요. 그런데 마귀가 자꾸 “그것을 따먹으면 하나님의 것이라도 내 것이 된다.”고 부추긴 거에요.
선악과를 따먹는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 선악과가 가지고 있다는 그 결과, 선악과가 품고 있다는 그 지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그 지혜가 내가 원인 제공자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 결과가 나와 연결이 된다고 보는 거에요. 이게 마귀의 유혹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기도하면 그 기도가 받으시는 것이 되고 내가 헌금하면 주께서 그 헌금을 받으시고 내가 전도하면 주께서 받으시는 전도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마귀의 생각이에요.
이 역사가 오늘날 교회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에요.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유대인들이 내내 생각했던 그 생각이었습니다. 쉽게 가는 것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결판난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데 구원이라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 시작(시동, 가동)은 지상에 있는 나의 행위로부터 시작이 되고 결과는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주님은 엉뚱한 원인과 결과를 연결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들 유대인들 앞에 나타나는 이유는 본인이 원인이기 때문이에요.
유일한 원인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본인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마귀가 어떻게 생겼습니까?”라고 묻는데 그렇게 묻지 말고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해야 돼요.
마귀가 하는 일을 중심을 가려버리는 일입니다. 이 중심을 가려버리면 원인을 가린 것이 되지요. 그러면 원초적인 원인(주님)을 가려버리고 원인의 자리는 누가 독차지하겠어요? 원인을 따로 집어넣은 본인이 그 중아에 서있겠지요.
그래서 모든 세상만사를 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소속되어 있기에 내가 여기에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세상은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이 짜여지고 원활하게 돌아가야 기분이 좋고 만족스러운 거에요.
남 좋은 일을 시키면 내가 기분이 나빠요. 그런데 남이 망하든 어쨌든 간에 내가 잘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에요. 그러니까 의외로 마귀가 그렇게 흉측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마귀의 모든 기능은 흉측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고 그렇게 친근하고 친밀스럽고 왠지 다정해보이고 마치 오래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줄곧 해왔던 그 생각을 우리한테 그대로 제공을 하기 때문에 마귀의 하는 일을 들어보면 마음이 편하고 정이 가요.
그것을 유대인들은 “화해, 화목”이라고 했고 이것을 우리 현대인으로 번역하면 “평화”입니다. 이스라엘의 90%가 전쟁역사였거든요. 그들의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평화를 보장받는 것입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고 평화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루어서 평화를 가져온다면 그것으로 자기들은 족하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하는 이 화해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평화를 목적으로 하고 또 하나의 화해는 주님의 화해로 불화를 통한 화해입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것과 원수지간이 됨으로써 비로소 화해에 도달하는 방법을 씁니다. 기존의 나를 화해하게 만들고 평화롭게 만드는 모든 요소와 불화를 일으키고 다툼을 야기함으로써 비로소 그 결과로 생겨나는 화해를 주께서는 시도하지요.
떨어져 나가야 새로운 것과 비로소 붙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떨어져나갈 때 떨어지려고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떨어질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려고 했던 평화는 누구의 평화입니까?
안에 누가 있어요? 결국은 나의 평화거든요. 나의 평화, 그것을 내가 스스로 깨부순다는 것은 행동할 분명한 이유가 성립이 되지 않잖아요. 나를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과 타협하고 협상을 했는데 그것을 스스로 깬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마태복을 10장에서는 너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라고 했어요. 그 얘기는 다시 말해서 “너와 너 자신 사이에 다퉈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네가 너를 미워할 수 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미워하려면 나 말로 또 하나의 나, 나를 좋게 보지 않고 나쁘게 보는 새로운 내가 등장해야 됩니다. 그러면 나 대신 나 같은 분이 등장해야 되지요. 그 분이 누구겠습니까?
우리는 아담에 속해 있잖아요. 그러면 아담을 질타하고 아담을 붕괴하는 아담은 어떤 아담입니까? 마지막을 장식할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과 나 사이에 좋은 관계가 아니고 불화해야 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없이는 하나님께는 화해가 없습니다. “십자가로 화해했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십자가가 믿어지면 좋은 관계가 되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것과는 정반대지요. 심지어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 받고자 하는 나를 내치고 그것을 마귀적 생각이라고 질책하는 방식으로만 우리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를 나의 구원의 용도로 쓰려고 끄집어 당기는 그 모든 행위가 결국은 주님 위주가 아니라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인 것을 질책 받고 그것을 지적당하게 하시는 사건이 일어나야지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구원에 대한 기대나 구원에 대한 희망 자체가 마귀적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구원에 순서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구원의 순서가 있어요. 모든 인간을 다 버려놓습니다. 다 버림 받게 만들었어요. 그 다음에 순서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부활의 순서가 나오는데 제일 먼저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일찍 돌아가신 모세나 엘리야 그렇지요. 이렇게 부활의 순서가 구원의 순서에요. 모든 인간을 다 버려버립니다. 예수님도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았지요.
제일 첫 번째 순서로 사흘 만에 부활한 분이 예수님이에요. 성경에서는 그 예수님이 구원 받을 때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지 않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예수님만 달랑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예수님 외에 모든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처음부터 죽은 자들에 속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은 자들에 속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손을 들어서 “저 먼저 구원해주세요.” “손 내려. 저 먼저 구원해주세요.”라는 말을 할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권리가 있다고 여긴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어요.
하나님이 십계명 주시고 율법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이유는 자기들이 그것을 지키면 복 받아서 구원에 이른다는 논리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 중심이라고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겠다는 그 생각이 마귀적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렇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악마적 방식에 대해서 주님의 대응방법은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입니다. 그것을 기억하세요. 5개를 집어넣고 5개를 예상했는데 7개가 나왔다면 5개는 내가 집어넣은 것이고 2개는 주님이 주신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7개 몽땅 주님이 주셨기에 5개를 원인으로 집어넣었다는 그 5개에 대한 고발조치로 7개의 결과가 생긴 겁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5장 말씀대로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입니다. 평소에 조깅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했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조깅 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학생 때에 다들 컨닝해 봤지요? 컨닝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도 있고 보여줘서 하는 경우도 있고 합니다. 컨닝하는 것은 나쁜 짓이지요. 그런데 뒤돌아 보니까 조깅하는 것만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컨닝하는 것도 주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원인을 능가하는 결과(원인보다 많은 결과)”를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구약 사사기에 마노아 가정을 아십니까? 삼손의 아버지 가정이에요. 마노아 가정에 자식이 없었는데 어느 날 (자식을 간절히 원하는 것에 관계없이) 자식을 주겠다고 나타난 쪽은 마노아 쪽이 아니고, 천사가 나타나서 제단을 쌓으면서 자식이 있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서 자식이 있겠다는 결과는 마노아 가정이 그런 천사가 나타나라고 사전에 굿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나타나가지고 “자식을 낳는데 미안하지만 그 자식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