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151230
두려움 151230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두려움(창세기 3:7-10)
이근호
15-12-31 14:40
두려움
2015년 12월 30일 본문 말씀: 창세기 3:7-10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숨는다’는 것은 이미 인간이 비-정상적 존재가 된 겁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점은, 이 비-정상적 존재를 유일한 정상적 존재의 표준이 되는 양 발판으로 삼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과실을 따먹었을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음식물을 하나 섭취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기에 자신의 몸이 예전 몸과 같이 않았다는 인식이 생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자신이 섭취한 음식과 자기 몸을 통해서 느끼는 이상징후의 인관관계를 수립할 수가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먹을 것을 도로 토해놓으면 다시 전부터 멀쩡한 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선악과 과실에 무슨 요소가 인간으로 하여금 ‘수치를 느끼게 된 몸’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말입니까? 이것은 위치문제입니다. 몸에 있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보는가 아니면 자신의 몸에 있지 않고 희한한 눈(시선)이 하나 새로 생겨서, 그 생겨난 눈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보느냐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즉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눈의 원래 기능이 상실되어버리고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초월적 눈이 새롭게 생겨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버린 그 몸으로 보았을 때, 자신의 벌거벗은 몸은 자아를 부끄럽고 두렵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벌거벗었으나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 눈은 사라져버린 겁니다.
선악과 과실 따먹은 행위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처럼 새롭게 생긴 눈의 기능을 ‘눈이 밝아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의 눈은 어두웠다는 말일까요?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자기 자신에 관해 더 집착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명도대비 원리와 같은 겁니다. 그만큼 자신이 보는 시선이 그만큼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하는 그런 눈을 가진 겁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눈, 곧 인간의 시선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는 바가 됩니다. 즉 자신이 자신을 평가하는 위치를 갖게 됨으로서 자신을 평가하는 그런 자아를 평가할 수 있는 자아는 도저히 있을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이 자체적으로 주체와 대상을 함께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평가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인데 문제는 그것이 불안하고 영 마음에 들지 않고 두려움을 유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왜 그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인간의 밝아진 눈으로서 도저히 규명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두려움이란 원인과 결과가 부합되지 않음으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유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이는 곧 자기 행함으로 자기를 둘러싼 두려움을 해소해보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하지만 늘 실패로 끝납니다. 두려움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곧 인간 자체가 하나님만이 원인이라는 점을고려해볼 때 결과물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생각하는 원인으로서 결과를 미치 점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눈이 밝아졌기에 이 밝아진 눈이 가만있지 않고 자신이 기대하는 결과를 얻고자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으로 자기에 합당한 의미가 마감되지 않습니다. 기껏 자신의 몸에 대해서 핍박과 복수와 자해를 시도하는 행위밖에 안됩니다.
부끄러운 몸을 감추고 싶은 겁니다. 그것을 속으로 집어넣고 눈이 밝아진 그 시선에 부합되는 다른 몸을 창안합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겉 몸을 창안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몸을 숨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아예 몸 전체를 나무 밑에 들어가 숨습니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뭔가 두렵고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말보다 두려움이 앞섭니다. 인간이 가만 있지 못하는 이유도 두려움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배고파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가만있지 못하고 움직이는 겁니다. 사람들을 자신들의 행위를 두고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인간이 소지하고 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두려움 앞에서 아무 짝도 소용없습니다. 곧장 허물어져버립니다. 버텨낼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멈추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두려움이 급습하면 인간들은 말을 내뱉습니다. 하나님에게 내뱉는 말을 ‘기도’라고 하고 같은 인간에게 내뱉는 말을 ‘하소연’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자신을 겹겹이 둘려치고 싶은 겁니다. 일종의 ‘정신적 치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얻고자 하는 결과와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결과를 제시해놓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마태복음 12:46-50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이 원래대로 회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나타내고 싶은데 있습니다. 유일하신 한 분, 한 사람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 이런 예수님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통 관심사가 자신의 구원과 자신의 행복과 두려움과 불안이 없고 수치가 없는 존재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한 주님과 자신을 위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참된 예수님은 배척하고 자신의 구미에 맞는 날조된 예수상에는 환호를 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두 종류의 인간군(群)을 형성하십니다. 하나는 자신의 죄를 아는 성도와 자신을 자랑거리를 놓지 않는 비-성도로 나누십니다.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갈라 세우시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난 자아상을 앞장 세우며 사는 자는 지옥으로 보내시고, 자기 속에 더러움과 죄를 겉으로 내면서 십자가 앞에 나타내는 자는 천국으로 보내십니다. 당연히 그 어느 인간도 자신의 속내를 자신의 본질을 알 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죄인으로 아는 성도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행함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ㄴ 결과물로서의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두려움과 불안이나 환란이나 고통마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증거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2-31 14:41
19강-창 3장 7-10(두려움)1512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장 7-10절입니다. 구약성경 4페이지입니다.
창 3:7-10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7절에 보면 “눈이 밝아”라고 되어 있는데 그러면 그들은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눈이 어두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시력이 낮았던 것이 아니고 상대적으로 눈이 어두웠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는 것은 어느 눈이 밝아졌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하나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벌거벗음에서 이탈한 또 하나의 눈을 가졌다. 이것은 벌거벗은 몸 그 안에 이미 장착된 눈이고 그 바깥에서 자기 몸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눈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러면 처음에 선악과 따먹기 전에 갖고 있던 그 눈은 원래 창조한 몸에 있는 눈이라면 그 몸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눈이 있는 그 몸은 사실은 몸이 아니고 그 몸에서 유발된 비정상적인 자아라고 할 수 있어요. 새로운 주체, 몸에서 이탈해서 그 몸이 이러니저러니 평가되는 바깥에 새롭게 장만된 추상적인 자리, 허황된 자리지요. 거기서 보니 “벌거벗었네?”라고 새삼스럽게 이야기합니다. 벌거벗은 것이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 때 옷을 입혀서 만들어야 됩니까? 바비인형처럼?
처음에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채로 만들었으면 거기에 대해서 본인들이 처음에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었을 때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벌거벗은 상태로 만들어져서 부끄럽잖아요.” 하는 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아는 하나님께서 장만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창조에 없는 거예요. 없는데 자기의 몸을 자기의 평가 대상으로 자기 앞에 세워두었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나온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심각한 자기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왜 그런가?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하면 선악과라는 과일을 따먹었어요. 과일 하나 따먹은 것이 인간성 자체의 변화를 줄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바나나 따먹었다고 인간 달라집니까? 사과 하나 따먹었다고 해서 사람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교도소에 있는 나쁜 성품이 있는 사람들에게 바나나 한 개씩을 먹게 하면 다음날 개과천선 되어서 서로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 변화된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상상이 안 되지요. 음식물을 먹는다는 것은 건강유지를 위해서 에너지를 집어넣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눈이 밝아지고 특히 음식을 하나 먹었는데 그 음식이 나로 하여금 다른 인간으로 돌변시키는 그 원인과 결과를 이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나쁜 행동해서 나쁜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도 이해를 해요. 그런데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쁜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원인과 결과를 추적해서 ‘이런 원인으로 해서 이런 필연적인 결과가 나왔다.’ 하는 것의 논리가 밝혀져야 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안이 인간에게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상태, 거기서 나오는 것이 두려움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려움,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을 자기 행동을 원인삼아서 아무리 규명 해봐도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유도해낼 수가 없고 끄집어낼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뭐냐? 두려움입니다. 벌거벗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문제 삼지 않는데 인간이 문제 삼았다는 것은 벌써 자기들은 원리 자기 몸과 자아가 불 합치되는 거예요. 뭔가 맞지를 않는 겁니다.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운 것을 본인이 설명을 해야 되는데 설명할 재간이 없어요. 이것을 오늘날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원인-결과, 원인-결과, 인간이 이것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이 과학이거든요. “이렇게 하게 되면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이것이 과학적사고방식인데 이것이 교회까지 들어오지요. “이렇게 기도하시면 반드시 이런 응답을 받습니다.” 마찬가지에요. 과학이나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종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거 한 대목만 해도 목회 성공하는 거예요. 교회가 커질 수 있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왜? 다들 그런 식으로 하나님과 관련지으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식으로 원인을 제공하게 되면 하나님은 내가 요구하는 결과를 어떤 식으로 줄 겁니까?” 그런 식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바른 신학을 추구하게 되면 구원해주시겠습니까?” 왜 제가 개혁주의를 이단이라고 하는지를 아시겠지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 속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생겨요. 두려움이라 하는 것은 뭐냐? 결과는 원인과 안 맞을 수가 있다는데서 오는 두려움.
분명히 전도서에서 이미 솔로몬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공부 많이 한 사람이나 적게 한 사람이나 그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기 때문에. 미완성이라는 것이 아니고. 전도서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인생은 미완성, 노래도 있지만 미완성이라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이미 헛되다는 거예요. 미완성은 무슨 미완성입니까? 결론이 이미 났는데. 어떤 짓을 해도 헛되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대처하기를 “그러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헛되지 않고 어떻게 감사하고 어떻게 내 행동을 하나님께 드리면 되겠습니까?”라고 하게 되면 “네가 네 행동의 원인이 되어서 헛되고 헛된 그런 결과와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나오는 그 사고방식자체, 그게 바로 네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이라는 겁니다. 그게 죄라는 겁니다.
헛되다고 하면 “예, 헛됩니다.” 이러면 되는데 “그러니까 안 헛된 방법은 뭡니까?” 이런 발상이 필연적으로 나온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지옥을 만들어놓고 지옥 보냅니다. 그리고 천국을 만들어놓고 천국을 보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오면 “그러면 천국 가는 방법은요?” 이런 욕구로 나온다는 자체가 벌써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것을 하게 되면 저를 천국에 넣어주는 내가 되겠습니까? 내가 내 행동에 어떤 행동을 가미하게 되면 내가 천국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나온다는 자체가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싸여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비정상이에요.
“예수 믿으면 구원시켜 주겠습니까?”라고 나오는 것,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잖아요. 하나님도 약속을 지켜야 되잖아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는 분이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 했으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됐지요?”라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그 사고방식이 범죄 한 자의 범죄 한 모습입니다.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결론부터 먼저 해야 돼요. 본문이 굉장히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하면,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가 이미 범죄 한 이후에 성경을 보고 있다는 말이지요.
범죄 한 이후에 성경을 보고 있으니까, ‘자기 몸이 벗을 줄을 알고 치마를 해서 몸을 가렸고 하나님에게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뭘 상상하느냐 하면, 따먹기 전으로 어떻게 하면 되돌아갈 수 있을까를 상상하는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돼요. 성경을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욕구, 욕망을 상상하는 그 결과만 나올 수밖에 없어요. 본문에 하나님이 인간과 대화를 하는데 사람이 말을 하고 대화를 한다는 것은 이미 두렵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누구한테 말을 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겁이 나서 그냥 내뱉은 것이 말이에요.
제가 말하는 것은 두려움이 말보다 앞선다는 거예요. 얼마나 겁이 났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겠어요? 그렇잖아요. 왜 사람들이 평소에 기도를 안 하다가 갑자기 새벽기도, 기도도 아니고 제단, 새벽제단에 와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평소에는 교회였다가 어려울 때는 제단이 돼요. 엎어져서 “주여, 주여!” 할 때 왜 갑자기 하나님 앞에 말이 많아졌어요? 평소에 하나님하고 별로 좋은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하나님한테 왜 그리 말이 많아졌어요? 두려움이 엄습해 와서 그래요.
두려움이 엄습해오니 인간은 어떤 행동을 나타내야 되는데 기껏 나오는 그 행동이 뭐냐 하면, 내가 행동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치 않는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식의 결과를 기대하면서 행동에 나서는 겁니다. 그런데 다시 말씀드려서 이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과일을 하나 따먹었을 뿐인데 나한테 일어난 이 변화는 아담과 하와가 과일을 섭취했다는 이 행동, 과일을 먹는 행동과 나의 변화된 이 행동과의 원인결과를 범죄 한 인간으로는 추적할 길이 차단되어 있어요.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음식 하나 먹었다고 갑자기 죄인이 되고, 두렵고, 떨리고. 그러면 선악과가 어떤 마약종류였습니까? 선악과나무의 그 성분이 뭐지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서 분석해봤으면 좋겠어요. 어떤 약재가 들어 있고 단백질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갑자기 불안감이 생깁니까? 도파민, 세로토닌, 그런 종류겠어요? 신경전달물질, 그런 종류입니까? 사람이 두렵다면 두려운 채로 가만있을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나대게 되어 있고 몸부림치게 되어 있고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교회를 찾든, 부처를 찾든, 새벽기도 없다고 해도 교회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와서라도 기도를 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보고 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는데 기도는 안하고는 안 되도록 주께서 이끌어주십니다. ‘기도는 응답도 안 되는데 왜 하는가?’ 머리로는 그래요. 실제로 몰아넣는 상황은 기도라는 형식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 없이 뭔가는 외치고 싶은 거예요. 왜? 두렵기 때문에. 입이 근질거려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산에 가서 고함을 치든지 하나님에게 대들든지 하여튼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정말 이러기에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Why me?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인간은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몰아넣는 거예요. 기도를 안 하려야 안할 수가 없어요. 응답되고 안 되고는 나중문제입니다. 기도라는 게 무조건 부르짖고 보는 거예요.
왜 기도하는데 응답이 없는가? 기도 안할 위인은 없고요. 다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인간의 기도라는 원인이 그 응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기도해라, 들으시리라, 응답하리라, 그런 말이 많은데 그 말은 뭐냐? 반드시 택한 백성의 행위는 그냥 직접 하나님에게 전달되는 법은 없어요. 중보자를 경유하게 되어 있어요. 어려움가운데, 낙담가운데, 절망가운데, 절벽에 부딪힐 때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누군가 계셨다는 생생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해야 돼요. 내가 있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 왜? 헛되고, 헛되고, 나중에 한 90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니까. 내가 있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주께서는 일시적 현상을 통한 부르짖음, 절망, 두렵게 하는 이유는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히 고정되고 완전히 세상을 장악하신 분이 엄연히 우리가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사는 데만 급급하다 보니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 생생하다 보니까 나보다 더 생생하게 부활해서 살아계신 주님의 모든 흔적을 내 쪽에서 가리고 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8절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인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불안의 원인은 인간에게서 찾으면 실패입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인간에게 부끄럽고 두렵고 떨리게 하는 원인은 하나님 쪽에서 이미 갖고 있어요. 그것을 인간 쪽에서 아무리 애써봤자, 행동을 고쳐봤자 그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원인을 인간은 알 수 없다, 같은 말로 하나님만 원인이 된다는 말은 결과에 대해서도 인간은 모른다는 이야기고, 왜 인간으로 하여금 뱀을 동원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해서 따먹게 만들어놓고 불안케 하는 그 이유, 어떤 결과를 낳기 위해서 이런 사전조치를 깔아두었는가 하는 그것을 인간은 몰라요. 그저 인간은 불안하고 두렵고 떨릴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돼요. 만약 하나님께서 안 찾아온다면? 안 찾아온다면 그걸로 끝이지요.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 만약에 주님께서 저를 안 찾아오면 저는 구원 못 받습니까?”라는 질문들을 흔히들 많이 해요.
제가 보기에는 그런 질문자체가 이미 뭔가 불안하다는 뜻이에요. 두렵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 생긴 이 두려움을 내가 가져와서 내 쪽에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말고 이 두려움을 주신 원인자가 주님이니까, 주님이 뜻이 있어서 두려움을 줬으니까 주님한테 맡기면 되는 거예요. 지옥을 보내든 천국을 보내든 맡기면 될 문제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될 것을 가지고 내가 나에게 어떤 조치를 행해서 내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기를, 내 쪽에 주어진 두려움을 그런 식으로 해소하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제가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게 마태복음 12장 46절에 나옵니다. 여러분이 들으면 아시는 내용이에요.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이 대목입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은 이유가 잘 감이 안 오시지요? 모든 것은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한분만 남기자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 뜻대로 살아서 예수님의 모친과 자매와 가족이 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죄인이기에 죄밖에 나오지 않아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는 말은 형제, 자매, 모친 만들기를 먼저 기대하지 말고 누구를 경유할 때만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가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경유할 때만 그렇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경유하려면 우리가 예수님 쪽으로 다가가면 되는가? 다가간다는 이 나의 모션, 액션이 실패로 끝나요. 주님은 우리가 다가가면 붙잡을 수 있는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붙잡는다면 피해버린다든지 우리가 차마 붙잡을 수 없는 분으로 오셨어요. “내가 당신을 믿느냐 차라리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런 분으로 오셨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꾸 가짜 예수를 상상하고 생산하기에 안심 푹 놓고 “예수 믿습니다.” 하지만 진짜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태를 일으켜버리면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정말 이러깁니까? 나를 이렇게 만든 인간 나와 보라고 해. 누군지 한 번 따지고 싶어.” “난데? 바로 네가 믿는다는 예수인데? 이 배에 창 자국을 봐. 손의 못자국의 피를 봐. 너는 언제부터인가 내 몸의 창자국과 손의 피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잖아. 네가 출세하고 승진하고 잘되고 풍요롭고 그것만을 위해서 나를 찾았지?”
주님이여,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그 창 자국이 있었군요, 하고 그 창 자국을 그리워하고 못 자국을 보고 싶어 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거 본다고 돈이 생깁니까? 그거 본다고 출세를 합니까? 그걸 본다고 내가 만족이 됩니까? 인간은 누구도 십자가를 자진해서 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본문에 나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라고 했잖아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 부끄러워라! 나는 벌거벗었어. 불안해. 두려워.” 이게 끝이었습니까? 아니에요. 거기에 대한 처방을 본인이 내려버립니다.
그 처방이 뭐냐?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서 벌거벗은 몸을 가려버리지요. 그러면 여기서 두 개의 몸이 상정됩니다. 하나는 감춰야 될 몸, 부끄러워서 차마 남에게 내어놓을 수 없는 몸, 벌거벗은 몸을 속에 집어넣고 바깥에 그걸 곱게 감추어놓은 바깥에 있는 옷으로 입혀놓는 그 가짜의 몸을 자아는 흡족해 하면서 만족해하지요. 아예 리모컨을 쥐고 12번, 10번, 8번, 홈쇼핑채널에 빠져 있어요. 아침에 주부들 보는 그 채널들이 전부 다 옷 팔고 보석 파는 것들이에요.
왜 보석과 옷을 원합니까? 불안하니까, 두려우니까. 왜 두려운가? 이유는 없어요. 이유를 몰라요. 왜? 원인과 결과가 연결이 안 되니까. 가렸다는 말은 진실로 나의 수치가 뿜어져 나오는 이 몸이 싫다는 거예요. 싫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를 없애야 되겠지요. 그게 뭐냐? 자기가 자기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거예요. 그게 자해입니다. 인간이 두려움을 해소하고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없애는 거예요. “아무소리 하지 말고 내 옷 밑에 쭈그리고 앉아있어. 튀어나오지 마. 부끄러운 모습 가만있어. 방구 뀌는 그 모습, 너는 가만있어. 너는 들키면 안 돼.”
내가 꾸며놓은, 내가 공들여서 만들어놓은 이 몸이 나의 자랑거리로 대외적으로 내세우려고 합니다. 그 버릇은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여, 기도 오래했습니다. 헌금도 이만큼이나 했습니다. 개척교회도 여러 개 했고 선교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그것 가지고 내세우려고 모이는 것이 교회에요. 주님은 그런 수작에 넘어가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조치는 뭐냐? 안의 몸과 바깥의 몸, 숨기고자 하는 수치스런 몸과 그럴싸하게 보이고 온갖 자기노동과 힘듦으로 가꾸어놓은 멋있는, 자기욕망과 합치되는, 죄짓고 난 뒤에 자아에 부합되는 만족스런 그런 몸, 그 두 가지의 몸을 갖추고 있으니까 주께서는 이 두 가지의 몸과 합치되는 두 분류의 인간으로 둘로 쪼개버려요.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합니다.”하는 부류를 주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만들어버리고 내가 나를 죄지었거나 말거나 내 요구에 합치되는 인생으로 기어이 버티겠다는 쪽의 부류는 가인의 자손으로, 지옥 가는 쪽으로 분류시켜 버리지요.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자기라는 인간의 의미가 마감되지 않아요. ‘그래, 이걸로 끝이야.’ 욕망이죠, 자꾸 뭔가 ‘아니야, 지금 말고 더 될 수 있는 뭔가가 따로 있을 거야. 이것보다 훨씬 멋있고 괜찮은 나가 또 따로 있을 거야.’ 이런 식으로 자꾸 의미가 마감되지 않아요.
그 의미가 마감되지 않으니까 그 의미와 지금의 미흡한 자기사이에 불안과 두려움이 또 발생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를 자해하고 못살게 굴면서, 자기를 종 부리듯이 하면서 자기를 다른 자기로 대체하면서 살아가는데, ‘이렇게 살다가 정 안되면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데 하나님의 조치가 뭐냐? 사람을 안 죽여요.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자살해도 안 죽어요. 사람을 안 죽인다니까요. 우리 같으면 힘들면 죽으면 그만이잖아요. 살다 살다 못 살게 되면 ‘아, 죽으라는 뜻이구나. 그러면 죽어야지.’
그런데 하나님은 끝까지 살려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였잖아요.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인간의 죽음의 의미를 다 몰라요. 이게 인간의 비극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알게 되면 죽어서 편하면 되는데 죽어도 진짜 죽음을 체험하지 못하니까 그 의미에 미치지 못하고 그 의미에 합치되지 못해요. 자살해도 불안감과 두려움은 더 크게 남아 있어요. 지옥 간 부자가 지옥 가서도 물이 없을까 두려워하는 그 모습, 오히려 노골적으로 공포와 두려움이 지속되는 겁니다. 대체 이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 이것은 사나 죽으나 없어지지 않아요. 인간은 대책도 없고 해결책도 없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니까 목사님, 해결책을 내놓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해결책 내 드리겠습니다. 해결책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어요. 내 몸이 아닌데 내가 해결책 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까 제가 보았던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왜 오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이 무슨 식으로 자기에게 의미를 두려고 그토록 애를 쓴다는 것을 다 아시고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뽑을 때에 열 두 제자가 뭘 노리고 제자된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가, 다 알고 있어요.
심지어 자기가 탈 나귀가 누구 집에 있다는 그것까지 다 알고 계셨으니까. 물고기 아가리 벌리면 거기서 돈 나오는 것도 다 알아요. 인간들이, 수사관이 범인을 못 잡아서 그렇지, 뺑소니도 못 잡고 그렇지만, 주님은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불안, 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두려워하라는 겁니다. 이 땅에 살면서 걱정근심, 하라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로마서 8장에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하는 그 말씀이 나오잖아요.
주께서 그러한 것을 계속 안겨주시는 이유는 “아직도 네가 네 인생을 네가 원하는 인생으로 바꿀 시도를 하느냐?” 주께서 이미 주신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원하는 것이 되어야지. 그런 시도자체가 다 쓸데없고 필요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십자가 단번에 지심으로서 비교시켜서 저걸 떼 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개혁주의 신학을 제가 싫어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는데 왜 신학공부를 해야 돼요? 그걸 왜 해야 되는데? 목사들 밥벌이하려고 공부합니까?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것을 왜 해야 되는데? 옷을 벗으면 되는데. 십자가 앞에서.
껍데기, 잘난 체 하는 나를 벗어버리면 내 속에 벌벌 떨면서 ‘아이고 부끄러워라.’ 하는 그 인간, 수치를 늘 느끼는 그 인간, 십자가 앞에서는 다시는 수치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주의 모든 말씀은 잘난 체 하는 우리 몸의 그 표면에서 스톱되는 것이 아니고 감추고 싶은 그 내면을 향하여 화살이 날라 가서 꽂히는 겁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 할 때에 “맞습니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고 동의하면 그만인 거예요. 죄 안 드러나기 위해서 이리 감추고 저리 감추고 기도하고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바르게 사나 못되게 사나, 배우나 못 배우나 관계없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거예요. 그 헛된 자리로 속히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한 백 명 전도했습니까? 전도 받아서 “목사님에게 전도 받았습니다.” 할 때 그 목사님은 후딱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자리로 가버려야 돼요. “예, 주께서 저를 사용……” 이렇게 나대지 마세요. 후딱 가버려야 돼요. ‘이 교회 나 아니면 목회 안 됩니다.’라는 생각이들 수밖에 없지요. 왜? 그게 자기 욕구니까. 그 때마다 ‘미쳤어, 미쳤어!’ 하고 후딱 ‘저는 전혀 이 교회에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후딱 가야 돼요.
목사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겁니다. 밥 먹고 산다고 꼴 보기 싫고 더러운 인간들 많이 만났지요? 하지만 더러운 인간들, 꼴 보기 싫은 인간들, 내 말 듣지도 않는 그 못된 것들을 만남을 통해서 그동안 밥 먹여 줬습니다. 주께서 그런 인간들을 보냈어요. ‘아, 주께서 살려주시는구나.’ 아무런 살 이유와 가치가 없는 것을 계속 살려주시는 이유가 뭐냐? 이유는 몰라요. 주께서는 이미 그 결과를 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라고. 네 못난 그 자체가 증인이 돼요.
앞으로 우리에게 또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또 두렵고 겁이 납니다. 그러나 그 불안과 두려움과 겁나는 것, 그것조차도 주의 증인되는 필수 요건인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괜히 단단한 체하고 겁 없는 체 하지 마세요. 진짜 무서운 일이 닥치면 단단한 것도 다 한꺼번에 허물어집니다. 평소에 늘 벌벌 떨고 늘 불안해도 마땅한데 가끔은 감사가 되고 가끔은 편하게 되는 것,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그 고마움이 뭐냐?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것은 다 죽음 앞에 이기지를 못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내 두려움 앞에서 다 날라 가버립니다. 소용없는 거예요. 그걸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지만 두려움을 주신 분, 두려움도 주께서 뜻이 있어서 주셨다는 그 생각, 그것이 두려움마저 사랑으로 된다면 그 사랑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두려움이라도 주의 사랑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겁났으면 매달리고 기도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게 하신 그것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전달하는 방식인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내 주인인양, 이 자아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우리는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주인이 것을, 주님이 그리스도증인을 친히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을 저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