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51211b히11장 8절(창)-이 근호 목사
안양20151211b히11장 8절(창)-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14.35.214.12)
안양20151211b히11장 8절(창)-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본인 입장에서 목표는 없어요. 다만 본인 입장에서 목표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본인이 목표를 안 가지고 계속 주님은 목표를 아시고 이 윈도우(창) 같은 세계에서 계속 떠도는 거지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와가지고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까 아니면 한 달 반만에 갈 거리를 40년간 떠돌았습니까? 한 달 반만에 갈 거리를 40년간 떠돌았습니다. 그건 들어갈 만한 인간이 안 되었다는 겁니다. 더 깨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40년만에 갔는데 그것은 모세가 늙어죽기를 기다린 거지요.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왜 모세가 못 들어갔느냐 하면 모세의 자리가 하나님과 백성들 중간에 있는데 이걸 중매자, 중계자, 매개자, 중보자적 역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불신앙 가진 것을 모세가 담당을 해야 돼요. 그래서 이것으로 모세와 같은 동시대의 사람들은 다 못 들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모세가 못 들어감으로써 모세 후대는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말은 우리 때문에 못 들어갈 사람들이 발생되었다는 이야기에요. 짝을 이루거든요. 양말처럼, 장갑처럼.. 한쪽이 천국 갔다는 말은 연계되어 있는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천국가고 지옥간다를 본인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선택이 나타나는 현장에는 구원 받는 사람만 나타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지옥에 보내기로 작정한 사람도 같이 현장에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짝을 이룹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은 핍박을 받게 되어 있어요. 괜히 이유도 없는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저쪽 사람은 “천국 가면 다야?”라고 하는 식이지만 우리 쪽 입장에서는 “지옥 가면 다야? 지옥 가는 것도 어떤 권리야?” 그런 다툼이 있어야 되지요.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 아브라함만 달랑 구원하려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봤어요. 복의 근원은 복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복과 반대가 되는 저주가 나오는 근원도 복의 근원과 일치가 돼요.
복의 근원이 곧 저주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게 해요. 그러면 그 현장에 복음을 반대하는 속성들이 드디어 본색을 못 이기고 나불나불 대는 현장으로 만들어 버려요.
뉴질랜드에 어떤 목사님이 새벽기도에 복음을 전하고 내려오게 되면 당회장이 “왜 복음을 전하느냐?”고 그 목사님을 붙듭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요.
복의 근원이 곧 저주의 근원입니다. 복음을 안 전했으면 비난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안 전했으면 존대받았을 거에요. 그런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살해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요? 도망갔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잡혔고 죽었고 제자들은 도망갔다 그것으로 모든 이야기들이 끝났습니까? 그렇게 되어 버리면 사도행전이 안 나오지요? 그것으로 끝난 줄로 알았더니만 예수님이 받았던 성령을 이번에는 인간들이 받아요. 사도들이 받아버려요.
베드로가 먼저 받고 나중에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오니까 요단강에서 예수님께서 성령 받고 했던 그 일을 베드로가 반복하게 되고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임해버리니까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사도바울이 반복하고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도 같이 반복이 되어서 사도바울에게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면 사도바울에게 임했던 그 성령이 오늘날 우리에게 임해버리면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그 일, 사도바울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은 젊은 아이들이 놀이하는 것 있지요?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하고 노는 것 말이에요. 크리스마스 날 밤새도록 화투치면서 치맥(치킨하고 맥주)하면서 놀이하잖아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이 하는 그 놀이판에 말려든 거에요. 예수님이 했던 것, 베드로가 했던 것, 사도바울이 했던 것, 우리 선배들이 했던 것을 우리가 또 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왜 그런가? 같은 윈도우기 때문에 그래요. 뒤에서 주먹이 날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증인이 되게 하는 그 원리가 그대로 우리에게 반복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지나간 단회적 사건이 아니고 반복이다. 왜? 이것이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 사건은 일어날 때 그때만 사건이고 그 뒤에는 해석이 따라옵니다.
이순신 장군 사건은 1592년 임진왜란 그때 뿐이지요? 서양에서는 100년 전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건이라고 할 때는 반복이 안 되는 것을 사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5·16 사건이 반복 됩니까? 5월 16일이 되면 무슨 일이 또 일어나는 겁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사건은 한 번 일어나면 그냥 끝나 버리는 걸로 봅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안 믿는 가정 같으면 기일이 되면 뭘 합니까? 아버지를 살렸다가 또 죽입니까? 어떻게 합니까? 제사를 지내지요.
제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해석이지 그 사건의 반복은 아닙니다. 해석이잖아요. 그런데 해석을 해버리면 신앙이 되지 않고 이게 추억이 되어 버려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거나 추억하면서 믿는다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그 사건 이후에 나만 살아있을 때는 추억이 되고 기억이 되는데 그 사건 당사자가 나와 더불어 이 시대에 함께 살아있으면 이건 추억이 아니고 그 사건에 잠식이 되고 잠기게 되겠지요.
그러면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은 십자가를 반복해서 효과있게 들추어내고 그 십자가를 실현시키는 그 중에 우리가 말려든 겁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게 십자가 증거하라고 말려든 거에요.
왜냐하면 성령이 십자가의 영으로 오기 때문에 동일한 성령을 받아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반복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게 되면 거기에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반복하는 것, 십자가를 반복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핍박해서 일어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주변 유대인들이 이해했어요 못 했어요? 못 하지요. 그러니까 고난을 반복해서 받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12년 동안 병든 자나 문둥병자, 죄인들이나 중풍병자가 나왔잖아요. 그처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되면 분명히 안 믿어야 되는데 믿고 나오면서 “나 죄인입니다.”라고 하지요?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나올 때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이 병을 낫게 하지도 않고 복음만 전했을 뿐인데 “죄인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사도바울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사도바울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으로 지금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단독으로 살면 안 되겠지요.
주어진 모든 것, 강아지부터 해가지고 전부 다 십자가에서 주신 은혜와 연결된, 뒤에 십자가와 줄이 닿아져 있는 일들이 일어나서 우리가 속해있는 인생 자체가 십자가 사건의 반복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아브라함 시대도 그런가’ 하고 물으면 아브라함 시대도 그래요. 9절에 봅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했지요.
이삭과 야곱에게 아브라함이 유산을 준 것이 있는데 그 유산이 뭐냐 하면 “동일한 약속”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안에 있는 주님이 이삭에게 그 약속을 준 겁니다.
약속의 내용은 갈 바를 알지 못한 것을 주었지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줬다는 말은 “오기”를 버리고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에요. 그럼 “오기”는 뭐냐? ‘내가 열심히 하게 되면은 약속은 내가 지킬 수 있고 나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잠을 자는데 꿈에서 천사가 왔지요? 야곱은 천사하고 자기하고 한 패인 줄 알았지 적이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천사하고 한바탕 싸웠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군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천사였다는 사실이에요.
결국 천사는 나를 죽이고 내 안에 있는 아브라함(이삭)의 약속을 외부로 끄집어 내는 그 사명을 띠고 하늘에서 내려왔던 겁니다. 야곱은 죽이고 이스라엘로 끄집어 내는 것, 내 속에 주님의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아무개, 아무개의 이름은 죽이고 그리스도의 이름, 새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 천사의 임무입니다. 조금 어렵게 이야기해볼게요. 아담이 이름을 지었지요.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 이후에 사람들은 이미 붙여진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되지요.
이름이 있는 이 세계를 ‘상징계’라고 합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의미가 이미 확정되어 있지요. 개, 귤, 잔, 떡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떡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데 책을 가지고 가면 이미 치매 말기지요. 이때는 보통 치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떡과 책은 단어가 다릅니다. 불러주는 이름이 달라요. 상징의 세계는 기존의 의미로 정돈된 세계, 질서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상징적 세계에는 단점이 있어요. 그것은 이 붙여진 의미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상징적 세계에 있는 이름은 태어나면서 내 이름을 내가 붙였습니까? 누가 붙였어요? 우리 부모가 내 이름을 지어줬잖아요. 그러면 나보다 내 이름이 우선권을 갖고 있어요. 물론 이런 일은 있어요.
나는 이름을 만들지 않았는데 ‘김무식’이라는 이름을 지어놓았다고 합시다. “아버지, 왜 제 이름을 ‘무식’이라고 지었습니까?” “점쟁이 말이 그래야 오래 산다고 해서 그랬다.” 비굴하게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그래서 이름을 ‘유식’이라고 바꿨지요.
이렇게 이름을 바꾼 경우는 있지만, 그래 봤자 친구들은 전부 다 내 이름을 ‘무식’으로 알고 있는 이상, 내 혼자 이름 바꾸고 명함 바꾸는 데만 애를 먹는다 이 말이죠. ‘나’라는 것은 내가 따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갇혀있는 세계의 일부로서 밥을 하나 추가하듯이 튀어나온 거에요.
따라서 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야 돼요. 그런데 요구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에게 의미를 붙입니다. 어떻게 의미를 붙이는가 하면 기존의 사용하고 있는 단어와 개념들을 같이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수용하게 만들지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기에 길들여졌으면 이런 의미가 안 통하는 세계에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갈 수가 없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의미가 있는 사람에게 가정교사를 보내서 특별한 가정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인생을 실패로 끝나버리게 해요. 내 뜻대로 안 되게 한다 이 말이죠.
내 뜻대로 안 돼버리면 그 언약의 사람(성도)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야곱이 요셉을 되게 사랑해서 옷을 해입혔잖아요.
사랑하지 않아서 옷을 안 해입혔으면 형제들이 그렇게 질투하지 않습니다. 유달리 11명을 제치고 요셉만 집중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형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그 애를 죽이려고 했지만 르우벤이 봐줘서 죽인 놈을 살려가지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노예 장사꾼에다가 팔아먹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없고 이제는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다는 말은 형한테 돈을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돈을 지불했으면 요셉은 사람이 아니지요? 돈값을 빼내야지요. 돈을 누구한테 주고 데려왔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기 소유의 가구가 되는 겁니다.
요새 말로 하면 야구로 치면 요셉은 FA시장에 나온 거에요. FA시장 압니까? 야구에서 자유시장, 8년 동안 구단에 있다가 구단에서 놔주게 되면 이제는 메이저 리그로 가든지 일본에 가든이 니 마음대로 니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야구의 자유시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유시장이 되게 좋아보이는데 자유 노예시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강정호, 유현진, 노예시장이죠. 성적이 안 되면 그 다음에는 짤리지요. 그런데 그런 강정호, 유현진, 추신수가 대단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자본주의를 그대로 반영해주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래요. 여자가 집에 와서 밥도 안 하고 맨날 돌아다닌다고 하면 언제 자유시장에서 짤릴지 몰라요. “나 너하고 못 살겠다. 이혼하자.” “이혼 안 해?” 이혼 안 하면 강제로 이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람 피워버리면 됩니다. “이래도 이혼 안 할거야?” 억지로 헤어지기 위한 징벌성 바람.. 그러면 4주 냉각기간 거쳐가지고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도장 찍고 갈라서는 거지요.
이삭과 야곱의 경우는 지금의 우리의 경우와 똑같은데 아브라함에게 관여했던 주님의 관여가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그 인생에 주님께서 침입을 해버려요. 그렇게 되면 기존의 상징세계(질서세계)에서 다른 세계, 상징화 되지 않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언어로 미쳐 그 의미를 다 담을 수 없는 세계, 말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로 주께서 이끌어 내시는 겁니다.
이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성경을 우리가 해석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해석되어지는가 하면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했으면 좋겠어요. “연동해석”, 같이 연결되어서 움직이는 것을 “연동”이라고 합니다. 함께 움직이는 것.
성경은 내가 있고 성경이 있어서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있는 세계와 내가 있는 세계가 만남을 통해서 연동해서 같이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해석되는 거에요. 똑같은 구절이고 똑같은 찬송가인데 어떤 때 부르면 은혜가 되고 어떤 때 부르면 잠이 오지요.
요즘 제 강의 들으면 잠이 온다는 거에요. 그만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잖아요. 얼마나 느긋하고 여유가 있으면 이제는 더 이상 심각하게 안 봐지잖아요.
처음 바뀔 때는 이러다가 지옥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구름 위에 뜨는 것처럼 그러지요. 옛날에 1980년대에 칼(Korean Air Line, KAL)기 CF에 나온 노래가 있어요. 「welcome to my world」라고 하는 노래가 있거든요.
칼기가 구름 위를 나를 때 그 음악이 나오거든요. 밑에는 소나기가 내리든지 말든지 구름 위에서 편안한 거에요. 잠이 절로 오거든요. 최고의 수면제거든요. 이 힘든 인생 잠이나 잘 자야지요. 남는 게 잠밖에 없는데요.
편안하니까. 입만 떼면 편안하니까요. 초반부터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들을 것도 없어요. 이제는. 기도 안 해도 되고 헌금 안 해도 되고 편안하지요. 뭐. 구름 위를 나르는 비행기처럼 고요 그 자체..
연동해석이에요. 같이 움직이는 거에요. 성경해석은 정보를 빼내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를 빼내봤자 나에게 문제가 있어요. 정보를 빼낼 때 주께서 “스톱, 그 손 놓고.. 성경 지금 왜 보는데?”라고 성경을 보는 이유를 물어요.
“우리 애가 수시는 안 됐고 지금 바짝 원서 낼 때가 됐는데 엄마가 되어 가지고 성경 보는 척이라도 해줘야 행운으로 좋은 대학 갈 것이 아닙니까?” 그때는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돼요. 마침 성경 대목이 처나 자녀나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내용이 나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하, 성경 해석은 내가 내 기분 따라 해석하는 것이 전부구나. 결국 성경이 아무리 거룩한 말씀이고 내가 아무리 성도라도 내가 해석하고 내가 이해하는 것은 개떡이고 전부 다 추억이구나.’
아까 이야기한 신앙이 아니고 나를 합리화하는 내 기억에 불과하죠. 이것은 성령의 반복이 아니고 우격다짐이죠. 오늘 강의 제목 할 게 많다. 우격다짐, 연동해석, 아까 이야기한 윈도우까지.. 그 중에 윈도우가 제일 낫긴 난데..
그런 식으로 자기 정당화를 하는 겁니다. 나는 신앙인이 맞다는 핑계, 자기 변명거리로 성경을 보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을 보고 실상인 밖에 나오면 거기에 말씀이 작용해요 안 해요?
집에 있는 성경은 내가 보는 해석이지만 바깥에는 실제로 주님이 말씀으로 모든 자동차의 움직임, 길가에 담배 피는 아저씨, 이 모든 것이 주의 말씀대로 되거든요. 그래서 길에서 담배 피운다고 한바탕 싸우다 보니까 내 성질이 또 나오고요.
실제로 이 세상을 건설하고 있는데 나만 은밀하게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혼자 은혜 받으면 그게 성경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그것은 오락이고 취미생활이지 실제는 성경해석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교회나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서 논쟁을 하는 가운데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다가 성질내면서 끝나잖아요. 결국은 자기 자존심 간의 문제인 거에요. 성경이 결국 내 자존심이나 사수해주고 보디가드 역할밖에 안 되었던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합니다.
이 이삭과 야곱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박수쳐야 돼요. 실패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의 인생도 ‘나는 날마다 실패다.’를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실패하는가? 하나로 합치되려고 하다가 거의 합치가 되었는데 삐걱거리면서 또 틈이 생겨버렸어요. 합치되려다가 갈라져서 틈이 또 벌어져 버렸어요. 이것만 되면 나는 완전한 신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삐걱하고 주께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아요.
왜? 계속 실패해야만 내가 인간다워요. 이 말은 내 식으로 구원에 늘 실패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내 식으로는 절대로 구원 받는 사람이 안 되고 지옥 갈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인간을 주께서 다루시니까 주께 만나지는 그 연결고리(끈)에서 구원의 능력이 와요.
십자가의 능력이 거기에서 오는 거에요.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러 왔거든요. 우리는 죄인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데 기어이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는 겁니다. 오래 살다보니 개가 사람인 줄 알고 침대에 올라오곤 하는데 진짜 정신이 제대로 된 주인은 항상 개한테 “너는 어디까지나 개일 뿐이야.”라고 주지를 시켜야 되잖아요.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은 주제에 예수 믿고 자꾸 신이 되려고 하는데 “너는 어디까지나 죄인이야.”라고 주지를 시켜주는 그 분이 정말 좋으신 참된 주인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야곱과 이삭은 내가 살던 이 세계와 연동해서 하나님은 나를 죄인으로 규정시키는 작업을 하신다를 아는 겁니다.
왜? 십자가는 의인을 부르러 오는 것이 아니고 죄인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에 외롭고 외로운 자에게는 십자가가 보입니다. 아까 첫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11절에 봅시다. 11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라고 했지요? 여기에서 자세히 한 번 분석해 봅시다. “믿음으로”가 없다고 치고 “사라 자신이 나이 늙어 단산했다”는 말은 나이 늙어서 불임 여성이 되었다는 뜻인데 이것은 믿음에 관한 문제입니까 아니면 믿음과 상관 없는 문제입니까?
믿음과 상관이 없지요?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못 낳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것이 믿음과 관련된 상황(내용) 속에 포함을 시켜요. 강제로 애기를 못 낳는 그 지점까지 밀어붙였다는 겁니다.
이걸 사라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캣치를 한 거에요. 내가 옛날에 나쁜 짓을 했다. 그때 내가 ‘술을 안 먹을 걸’이라고 했는데 돌이켜서 보니까 주께서 술을 먹게 해서 음주운전을 하게 했고 재수가 너무 좋게 음주단속에 걸려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해서 예수를 믿었다는 그 인과관계, 그 연결고리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는 한꺼번에 다 수용이 되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의 뜻입니다. 주님의 손길은 발걸음도 세신다고 했으니까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해요.
모든 것에 말씀이 작렬하는 그런 현장이 이 세상입니다. 음력으로 오뉴월에 햇빛이 쨍쨍하지요? 그럴 때 사막이나 들판 같은 데에 나무가 하나 없다고 해보세요. 그걸 뭐라고 합니까? 온 천지에 햇빛이 쨍쨍하게 작렬한다고 하지요.
이 세상이 말씀이 늘 쨍쨍하게 작렬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에서 QT(큐티)하면서 말씀을 한 번 보면서 끝내버리잖아요. 말씀을 알았고.. 아니, 안 것은 끝내고 이제는 밖에 나가서 말씀과 부딪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 햇빛 쩅쨍 뿐만 아니고 말씀 쨍쨍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거짓말쟁이가 이런 거짓말을 했다고 합니다. 소나기가 오는데 그 오는 소나기 사이 사이를 다 피해서 왔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까? 거짓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현장에서 주는 말씀을 피할 수 없어요. 물론 게을러서 말씀을 안 보죠. 그러나 한 순간도 말씀과 안 만나는 순간이 없어요. 심지어 믿음이 있는 사람은 꿈속에서도 회개해요. 꿈속에서 온갖 짓을 해놓고 꿈속에서 또 꿇어앉아서 기도해요.
그만큼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우리 속에 오게 되면 이게 추억, 나의 스냅사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 한 번 물어봅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날 가운데 언제 가장 기분이 좋았던가요? 답변은 제가 하겠습니다.
“예상 못할 체험이 될 때”입니다. 이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정말 내가 옛날에 좋아했던 중학교 옆짝 친구를 만났다면 그 기억은 오래 가요. 늙었다느니 그것은 나의 평가이고 하여튼 이상하니 기분이 야릇하고 좋았다는 것은 잊혀지지 않지요.
왜냐하면 우연이기 때문이에요. 우연은 우리한테 다 기억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그렇다면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신앙도 항상 예상 밖의 것으로 우리에게 추억과 기억을 남기지요.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일까요? 아니에요. 그러면 말씀 증거하는 것? 아닙니다.
그게 왜 신앙의 축이 될 수 없는가 하면 내가 결심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거나 뭘 할 때 결심해서 하는데 내가 예상하고 해버리면 이게 ‘삑’이 돼요. 이것은 예상 밖의 기쁨이 아니에요. 정말 예상 밖의 기쁨은 내가 엄청나게 죄인인 것을 발각당하든지 아니면 예상 밖에 내가 엄청나게 좋은 일을 해버리면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요.’가 돼요.
유람선을 탔는데 갑자기 어떤 노인네가 빠졌고 다른 사람은 다 가만히 있는데 내가 혼자 뛰어들어서 그 남자를 건져줬더니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용감하시네요.”라고 해서 “누가 떠밀어서 그랬어요.”라고 하는 그런 유머가 있잖아요.
“내가 간 게 아니고 누가 뒤에서 ‘이 바보야.’ 하고 떠밀어서 바보라서 떠밀려서 그랬다.” 그래가지고 스타가 된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예상 밖에 일어나는 거에요. 애가 넷, 다섯이 되어도 항상 행동에 예상이 되는 애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애는 아무래도 관심이 가지요. “너는 안 낳으려고 하다가 낳았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에 우리한테 깜짝 쇼를 준비해놓고 이끄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상한 것은 일체 ‘삑’하고 받지를 않습니다. 철야해 보세요. 안 받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계산한 것을 기도 속에 포함해 놓기 때문에 받지를 않으십니다. 항상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해요. 사라가 애기를 단산한 것이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단산한 후에 임신을 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지금까지 애기를 못 낳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랄 때, 그때가 다시 한 번 믿음이 확인되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깜짝 쇼를 자주 경험하려면 그냥 막 사세요. 막 살면서 내가 막 살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천사를 통해서 가로막고 있구나. ‘그쪽은 아니야, 이쪽이야.’ 하고 친히 안내해주고 인도하시는구나.
그런데 안내가 과격해요. 몸도 많이 아프고 돈도 많이 뺏기고. .하여튼 무조건 안내해줘요. 예상 밖의 것으로.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덤으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11절 다시 봅시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라는 것을 한 줄로 줄인다면 “I'm nothing.”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빈껍데기 같은 여인이다. 만약에 자신이 태어난다면 그 애는 내 자식이 아니다. 주께서 나를 빈껍데기 여인으로 만들어 놓고 네가 낳지 않은 다른 자식을 나를 통해 낳게 하시는 것이지요.
이게 하나님이 사라한테 하시는 방식이라면 마리아한테는 정식으로 결혼해서 동침하기 전에 먼저 성질 급하게 임신부터 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이것을 예상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이것이 공식입니다.
주께서 믿음 생활을 뽑아내는 공식이 이거에요. 깜짝깜짝 놀라게 하신다니까요.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갑자기 결과만 주어지는 거에요. 아기를 낳았을 때 누가 가장 당황했겠습니까? 우선 마리아가 당황했겠구요, 누가 당황했겠어요?
이 마리아한테 남자친구가 있지요. 요셉이 굉장히 당황했어요. 그런데 요셉이 상당히 신사적인 사람이 되어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소문을 안 낼테니까 당신이 임신해놓고 그 남자의 말을 못 하는 것 내가 이해한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당하고 아파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양보해줄게. 내가 물러가줄게.”
이렇게 점잖고 신사다운 사람이 또 있겠어요? “그게 아니고 성령님께서..” “글세, 성령님께서 좋은 남자 만나게 해주셨다는 것을 내가 알거든?” 자꾸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지요. 이 상황을 마리아가 요셉에게 설득을 못 시킵니다.
왜? 언어(질서)체계에서는 상징할 말이 없어요. 누가 찾아옵니까 요셉한테? 천사가 찾아오지요. “그 여인을 너에게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 베리칩 안 박아넣겠다는 것도 두려움에서 나온 거에요.
신앙 자체는 무엇을 박아도 괜찮아요. 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주님과 하나가 된 입장이기 때문에 뭘 해도 괜찮아요. 뭘 조심해야 되고 안 해야 되고 뭘 안 먹어야 되고 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거에요.
나한테 일을 시작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마무리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일을 시작하신 분이 마무리도 시키는 겁니다. 미국 NASA에서 화성 같은 데에 무인우주선을 보내잖아요. 그러면 손바닥 겹쳐진 만한 것을 보내요.
그것이 땅에 꽂히면 이것이 착착착착 변신로봇처럼 펴진다니까요. 변신로봇이 자동차가 되었다가 로보트가 되었다가 ‘트랜스포머’라는 영화를 보면 나오잖아요. 기계가 알아서 착착 펴지잖아요.
그것처럼 우리 안에 심어져 있는 주님의 약속이 우리를 사용해서 척척척 펴진다니까요.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펴져버려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런데 한 단계, 한 단계가 상징세계인 이 세상에서 내가 미리 알던 그 내용하고 너무나 이질적이고 너무나 낯선 내용들만 펼치는 거에요.
그러니까 굉장히 우리가 당황스럽지요. 그런데 두려워서가 아니고 감격 가운데서 좋아서 당황스러워요. ‘어째 저한테 그런 일이요.’ 이것이 마리아의 고백이거든요. 결국은 마리아의 하는 말이 ‘주의 여종이니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그 정도 수준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그것을 바라고 있는 사람한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다가 졸음이 와가지고 깜빡 자다가 깨보니까 엉뚱한 일이 벌어져 있는 겁니다.
바라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바라는 것을 졸음으로 중지시키지요. 딴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 보니까 일은 되더라 이 말이죠. 항상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서 주시는데 그렇게 해야 그것이 나의 오기로 된 것이 아니고 그냥 선물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래야 모든 것의 원인이 저쪽(신문지 뒤)에 있지요. 그런데 빗나간 것을 주실 때 그것을 받기를 거절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아시고 ‘그래도 나는 너를 놓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거절하는 것도 막 사는 것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막 사세요. 하여튼 주어진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주님의 선물이고 주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계산을 하느냐 하면 실수를 안 하고 성공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거든요.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실패자인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12절에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제가 잠시 웃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와 방불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었잖아요. 그러면 사람이 손을 텁니다. ‘아이고 안 됐다. 저 좋은 분이 갔구나. 갔어.’라고 하는데 가기는 뭘 가요? 예수님이 만들어 낸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무수한 사람들이 종려나무 들고 나오는데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내 힘으로 그 속에 끼어들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어 버려요. 산 자한테는 그런 혜택이 없어요. 아까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오기에서 신앙으로 나오면서 이 마음과 몸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경계선에서 죽는다고 했잖아요. 그 다음에 로마서 6장 이야기했잖아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꼼지락거릴 수가 없어요.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는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의 몸으로서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에 두 가지 해석을 다 하세요. ‘내가 기도해서 이런 것을 얻었구나.’라고도 해석하세요.
왜? 우리는 옛사람이고 우리가 평소에 잘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역시 기도 좀 했더니만 일이 잘 풀리는구먼.’ 그렇게 해석을 하세요. 왜? 그것은 평생가야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나올 거에요. 그리고 그것이 왜 잘못된 해석인가를 아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역시 내가 기도하기를 잘 했어.’라는 죄를 짓는 가운데서 기도하는 죄는 내가 짓고 주님의 기도 덕분에 나에게 이런 결과는 주어졌다는 것을 앎으로써 그것이 내 자랑이 되지 않고 나의 기도와 상관없이 기도케 하시는 분에 의해서 주어진 주님의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다 은혜이고 앞으로도 다 은혜가 될 것이고 오늘밤에 죽으면 낙원에 갈 것이고 그것이 나한테는 또 새롭고 낯설게 느껴지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요새 그런 주부들이 많은데 잠이 안 온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제일 먼저 리모콘을 찾겠지요. 그리고는 채널 110개를 다 돌립니다. 그러다보면 잠이 오겠지.. 그런데 물론 그렇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주님이죠. 잠이 오지 않는 것은 원인이 없습니다.
잠이 온다는 것에 원인이 없어요. 그래서 잠이 잘 오는 것은 내가 잘나서 잠이 잘 오는 것이 아니고 잠들게 해서 잠이 왔다는 사실을 잠이 오지 않음으로써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
내 힘으로 잠들 방법이 없어요. 밤새도록 주말의 영화 세네 편 보고 깨어보면 아침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세상에 책을 옮길 때는 내 힘으로 한다고 하지만 잠잘 때 깨우면 다시 잠드는 것이 내 맘대로 되지를 않아요.
잠 들려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다가 양 2600마리 세다가 밤새버리고 말이에요. 뭐든지 내 맘대로 안 된다면 평소에 내 힘으로 책을 옮기는 것도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소급해서 인정해야 돼요.
온 전체가 몽땅 주님이 자신의 말씀의 현장에서 주님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다루고 있고 우리를 만들고 있고 우리를 조작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바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성경을 강의하다 보면 “목사님 말씀 듣고 복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 식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성경을 자주 안 보게 돼요. 설교도 안 듣게 되고 그러는데 성경을 들고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항상 소급해서 나라는 것, 나의 것이 오히려 나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돼요.
‘이제는 알았습니다. 이제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우기는 그 마음가짐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니까요. 걱정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요, 염려를 당겨서 안 할 염려를 미리 해버리지요, 주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을 가지고 내 것이라고 우기고 또 자랑질하고 자랑질할 때 나한테 박수치지 않았다고 상대방을 욕하지요.
모든 것을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일이 되기도 전에 벌써 초조와 불안이 찾아오지요. “어후, 내일 안 되면 어떡해?” “말씀 보면 돼.” “말씀은 내가 알지요. 십자가로 구원 받는 것, 난 죄인인 것을 다 알았으니까 안 볼거에요.” 그러고는 혼자 사소한 일에 목숨 걸고 걱정하고 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잠이 와서 성경을 보게 되면 ‘아하! 그렇구나. 걱정 안 해도 되는데 괜히 걱정했네. 걱정하게 하신 것도 은혜네.’라고 하면서 걱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되지요. ‘걱정해야 인간이 되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우리가 봤는데요 결론은 주께서 친히 만든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내가 알아서 내가 대비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주께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나가시는데 만드는 모습이 우리의 죄를 더 끄집어내면서 만들어요.
나의 잘난 것, 내 달란트, 나의 멋있는 것, 나의 훌륭한 것을 모아가지고 훌륭한 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가지고 죄다 끄집어내서 훌륭한 정도가 아니고 완벽한 의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위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징은 서로 남들하고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그 경쟁 자체, 우열을 논한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오늘 공부한 내용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의미없는 세계, 그 윈도우(창)에서 창 너머에 있는 천상에서 의미를 개입시켜서 이 의미의 개입으로 오늘날 우리를 성도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미리 와서 한 약속의 작업입니다.
이 세계는 의미가 없는 세계이니까 우리가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떨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오늘 강의를 잘 들었는지 한 번 물어봅시다. 내가 죽었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어요.
“아이고, 나 놔두고 가면 당신 없이 나는 못 살아.” 그래도 삼 년 뒤에는 나보다 젊은 아가씨하고 결혼할지 몰라요. “아이고 당신 없이는 못 살아.”라고 하고 있고 외삼촌, 처삼촌은 벌써 뒤에서 부조돈 센다고 열 받아 있고 뭘 좀 안다는 사돈의 팔촌은 “관을 저렇게 쓰면 되나, 이렇게 써야지.”라고 하면서 정방향을 해야 된다고 아는 체하고 있지..
우리 곁에 있던 사람들이 죽을 때 우리도 그렇게 의미 없는 짓을 했어요. 그러나 진짜 의미는 내가 죄인 되게 하셔서, 탕자 되게 하셔서 십자가의 상처로 구원한다는 그것이 우리의 오늘날 사는 의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의미 없는 우리를 모아다가 의미 있는 주님만 이렇게 생각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성경 공부로 끝나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살아계신 주님의 손길과 주님의 호흡과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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