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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무엘상 9강(오류) 마태복음 71강(엮임) 151228 + 대전주례사 16123강의이사야

사무엘상 9강(오류) 마태복음 71강(엮임) 151228 + 대전주례사 16123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주향(IP:211.♡.45.164)

16-01-24 12:08

오류 (사무엘상 2:13-17 ) 대전-(사무엘9강)

이근호

2015년 12월2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2:13-17

(삼상2: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삼상2: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삼상2: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삼상2: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삼상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 더라

여기서 소년들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지요. 아버지가 제사장이고 그 소년들은 평소에 늘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들은 봤습니다. 소년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12절부터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고 불량자의 티를 냈는데 어떤 티를 냈냐하면은

(13절)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절)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제사하기 전에 먼저 챙긴 거지요. 삶지 말고 생것으로 먹겠다고 생고기를 달라는 겁니다. 육회를 좋아하는 모양이지요? 수육보다 육회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도 소년들이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 있냐하면 이것 하나만 아시면 됩니다. 진리는 오류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오류 없는데서는 진리가 나온다? 안 나온다? 안 나온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오류적이기 때문에 오류가 나올 때 하나님께서 이것은 오류다라고 나중에 지적하기 전 까지는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같은 인간이니까 뭐 그럴수도 있지! 그래서 불량자, 철없는 소년들이 하는 짓이 하나님께서는 오류라고 보시는 겁니다. 불량자가 제사를 멸시했다. 하나님께서 소년들이 하는 것을 좋게 보시지 않고 나쁘게 봤거든요. 나쁘게 봤다라는 것은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에잇! 나쁜 인간들” 이렇게 지나치지 말고 오류에 초점을 맞춰서 거기에 끼어들어야 돼요.

끼어들어서 하나님은 이 소년들이 하는 짓을 나쁜 짓이라고 했는데 과연 우리도 나쁘게 느껴지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똑같은 원리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 죽으시는데 만약에 그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고 했을 때 예수님을 이해하는 쪽이냐 예수님을 살해시킨 그들의 이래에 동의 할 것이냐? 우리가 다시한번 돌아 봐야 되지요. 어디에 동의하겠습니까?

죽이는 자에 합세 하겠지요? 나도 한표요! 이렇게 찬성표를 던질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라는 거에요. 믿음이 안 나오면 천국도 못 가지요? 그래서 천국은 막혀 있습니다. 대전을 보면 한밭로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살고 있다. 우린 이렇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대전 사람들이 옹기종기 이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옹기종기 그들이 갇혀 있다고 보지 못하잖아요.

이렇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에요. 어디에 갇혀 있냐? 죄에 갇혀 있는 거에요.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대전 사람들이 옹기종기 죄에 갇혀 있다. 죄에서 못 빠져 나온다. 무슨 짓을 해도 죄 안에서 죄를 퍼트리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옹기종기 참 잘살고 있다 이렇게 같이 공감하게 됩니다.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라든지 명절이나 이러 때 보면 “나도 저들처럼 웃음소리에 끼어들면 얼마나 좋으련가! 나는 저들에 비해 너무 외롭다. 주여! 저를 왜 이렇게 외롭게 하십니까?”

죄에 갇혀 있다는 것, 이것은 그냥은 알 수 없고 옹기종기 살고 있는 그 모습이 그렇게 행복스러워 보이고 좋아 보여서 “나도 한표요!”라고 뛰어 들 때 뛰어든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선 준비해 놓은 성경 말씀으로 대비를 시킵니다. 마주치게 하지요.

그렇다면 대전에 사는 것도 계시에 편입되고 성경책도 계시에 편입이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과 대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습, 그들은 살았다고 보거든요. 주님은 그것을 죽었다고 보시는데 기필코 우깁니다. “왜 우리가 죽었다고 하는지? 멀쩡하게 좋은 일 하고 있는데 왜 죽었어?” 그들이 살았다고 하는 여기에 주님께서 성경 가지고 들이대십니다.

성경으로 들이 대시는데 거기엔 주제가 있지요? 십자가라는 주제, 복음으로 이렇게 들이대시니까 마주치지요? 복음으로, 십자가로 들이대게 되면 “나는 빼주세요!”가 안 돼요. 왜요? 같이 서로 좋다고 맨날 카톡! 카톡!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하면서 살았다는 말이죠. 노아가 방주 지어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아주 재미있게 정신없어요.

돈 없다! 돈 없다! 하면서도 연말이 되고 크리스마스 때면 인천 국제공항은 터져 나가지요? 이렇게 옹기종기 사는 모습이 얼마나 이상향이고 우리가 고대했던 바입니까?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잖아요? 남의 집을 보게 되면 사실은 거기도 다 불행이 있는데 멀리서 보게 되면 다들 행복하고 자기만 불행한 느낌이 들지요. 연말에 연예대상이니 상 받게 되면 그 받은 연예인은 굉장히 행복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옹기종기 잘 살고 있는 거에요. 자체적으로 자기 오류를 뽑아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선 구약 때 순교자를 키우지요. 하나님께서 순교자를 만들어 냅니다. 순교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만들어 냅니다. 본인이 선지자하려고 아무도 안 나옵니다. “선지자 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안 나옵니다. 누가 자진해서 순교자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강제 조치가 내려집니다.

하나님의 신이, 성신이 주어집니다. 이 성신은 어디와 연결 되어 있냐하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선지자입니다. 왜 예수님 오시기를 고대하다가 보고 기뻐했으니까! 그래서 선지자의 기쁨은 옹기종기 잘 살고가 기쁜 게 아니고 누군가 오신다는 것. 메시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메시야 중심을 뭐라고 하냐하면 ‘천국’이라고 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하고 전혀 달라요.

진짜 천국은 성신을 받든지, 성령 받든지 다른 말로 하면 옹기종기 사는 자체가 오류 있음을 말해서 그들로부터 미움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천국 백성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천국 백성을 자진해서 순교의 길을 갈 사람은 아무리 성신 받아도 자진해서 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강제 조치를 하지요. 이것을 원치 않는 길이라고 했어요.

(요 21:18)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입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 뭐라고 했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마 저를 미워하는 사람은 이 대목만 딱 따가지고 고발할거에요. 그런데 베드로를 한번 보세요. 자기는 죽기를 각오 했으나 뭐라고 했습니까?

(누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너는 마귀에게 팔린다. 주님의 기도 덕분에 평생 우리가 살아온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옹기종기 사는데 합세하다 보니까 여기 옹기종기 사는 대전 바닥은 전부다 자기로 의해 즐거워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강제 조치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 했습니까? 그동안 살아왔던 옹기종기를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이것을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 방문하니까 누가 반대를 했냐 하면 애굽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이 극렬하게 반대해요. 잘 살고 있는데~ 그 동안 여기 드린 밑천이 얼만데요.

히브리인이 닭갈비집을 하고 있는데 떠나자고 하면 닭갈비집 보증금은 어떻게 하라고 누가 돌려줍니까? 하나님이 돌려줍니까? 갑자기 보따리 싸고 가기는 어디로 가는데요. 그 동안 여기 드린 밑천이 얼만데요. 인테리어 비용 계산해 보세요. 그리고 이웃과 다정하게 사귀었던 것, 그 관계를 다 끊어 버리고, 이건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애굽을 떠날 때 모세도 본인이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게 아니고 추방당한 거지요. 사실은, 현상금 걸려서 도망친 거에요. 모세도 그런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모세 말을 듣겠습니까? 아무도 안 듣습니다. 얼마나 집착이 강한지 광야에 가서도 항상 뭐만 생각합니까? 애굽 시절, 그 때가 좋았더라! (Green Green Grass of Home)이죠. 고향의 푸른 잔디, 차에서 내리면 아빠, 엄마가 반겨주고 금발의 메리가, 체리 빛 입술을 가진 메리와 참 나무 밑에서 같이 놀던, 깨어보니 꿈인데,

그런 시절을 못 빠져 나온다는 것을 심리학에선 뭐라고 하냐하면 인간은 기억으로 자아가 매일같이 형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두뇌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고 두뇌 전체의 공명 현상에 의해서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게 뭐냐하면 생물학적으로 현재의 정황이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기억하지 않는 그 기억이 지금 자기로 하여금 신체적인 본능을 형성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도 생존의 본능의 일종이에요. 생존에 불리하다 싶으면 헤어지는 거에요. 내가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생각하는 거에요. 그것을 생체 리듬이라고 하는데 생물학에서는 이 생체 속에도 시계가 있어요. 보통 우리의 상식은 낮이 되고 밤이 되면 식물도 해 뜨면 활동하고 밤 되면 잠자고 이런 줄 알고 있는데 가둬 놓고 모든 것을 차단시켰을 때 햇빛도 달빛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본능적으로 세포내에 시계가 있어서 스스로 알아서 잠 잘 때 잠자고 활동 할 때 활동하는 것을 밝혀냈지요.

아하! 외부와 차단되어도 인간은 따로 시계가 움직이는구나! 삼풍백화점 붕괴 되었을 때 생존자가 신기록을 세웠지요? 17일 만에 구조 됐는데 며칠이나 지났어요라고 했을 때 한 이틀 되었나요 하니 왜냐하면 생체 리듬이 갇힌 환경에 적응하도록 재편성 된거에요. 두뇌와 관계없이 신체 자체가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거에요. 사실 정신 바짝 차린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육신이 알아서 하면 정신은 뒤따라서 내가 정신차려서 된거라고 우기는 변명하는 것이 정신이지 실제로는 육체가 알아서 생존에 적합하도록 방어하게 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를 한 것은 결국 진리라 하는 것은 물 건너 갔다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주께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지요.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안되는 것을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지요? 안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이란 간단해요. 내가 안 되는 것을 주께서는 어떻게 되게 하시는가?

주께서 하신 일만 찾으면 돼요. 그걸 어디서 찾습니까? 간단하지요. 숨 쉬는 것, 무얼 먹을 까 반찬 고를 때, 점점 더 범위를 확대하면 뭐만 남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걸로 나와 버려요. 내가 한 발걸음과 머리카락 까지도 전부 다 주께서 하신 일로 되어 버리죠. 퍼센테이지가 저쪽 주님이 하신 일로 점점 더 많아져요. 심지어 무엇까지 포함되냐 하면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의 위협 이것까지도 주의 일이 되어 버려요.

내가 실수해서 죄 지어서 징계 받는다 그런 게 아니고 실수해서 벌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고 환란과 핍박 어떤 어려움이 올 지라도 그것마저도 주께서 준비 된 절차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나에게 들이 닥쳐야 될 사태로 생각하게 됩니다. 믿게 되요. 우리가 옹기종기 살 때는 뭐가 겁나냐 하면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제일 겁나요. 사실은.

옹기종기 살면서도 늘 벌벌벌벌 떨면서 사는 이유가 이 행복을 주께서 혹시 앗아가지 않을지, 소박하고 정말 이건 욕심도 아니야라고 마지막 챙기는 것 마저 주께서 맴매! 하면서 내놔! 하면 “마지막 남은 것까지 빼앗아 가면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 그런 걱정을 미리 당겨서 하는 겁니다. 오죽했으면 임재범이가 제발 다른 것은 다 되는데 제발 이 여자만큼은 허락 하소서라고 합니다.

허락 해줘봐야 몇 개월 가지도 안을 거면서, 결혼식 할 때 기분 좋다 할 뿐이지 몇 개월 가지도 않아요. 애 울 면 운다고 제대로 짜증 낼 텐데, 1과1이 있을 때는 별로 싸움이 없어요. 그런데 제 3자가 들어오게 되면 둘이 갈라져 버려요. 제3자가 자식입니다. 좋은 자식은 슥되고 미운 자식은 자식이 되는 집은 받고 부양도 안하려 하는 자식은 자슥도 아니고 자식이죠. 부양하는 조건으로 집을 주었는데 안 하는 거에요.

다시한번 정리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계시거든요. 소년들은 제사를 멸시했다. 주의 뜻은 이것입니다. 네가 제사를 알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사에 대해서 오류를 통해서 제사의 본질이 뭔가를 접근해 가시겠다는 겁니다. 그 오류를 우리 대신 불량자 소년들이 대신 일을 저질러 주는 겁니다. 제사가 뭐냐는 거지요. 도대체 제사가 뭐냐?

제사가 뭐이기에 소년들이 하는 짓이 제사와 반대가 되고 제사를 공격하고 제사가 보여줘야 될 하나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짓이 된다는 겁니다. 소년들의 하는 짓이, 그러면 두 가지를 생각 할 수 있지요. 첫 번째는 소년들의 짓이 제사의 본질을 훼손한다. 두 번 째는 더 어려워요. 소년 속에 무엇이 제사를 훼손 하려고 시도되었느냐 또는 소년 안에 어떤 요소가 있기에, 마귀지요! 마귀는 순진한 소년들을 통해서 어떤 자기의 얼굴을 보이는지 밝혀내면 되겠습니다.

이 두 가지를 밝혀내기 위해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오류를 일으키신 거에요. 2015년 마지막 설교는 뭐로 끝났습니까? ‘막 살아라!’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오류에요. 오류를 통해서 날마다 다시한번 주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선지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마지막 때의 선지자라면 선지자라고 규정한 개념이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그 개념과 불일치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육신의 모습.

아까 힌트 드렸지요. 우리는 생존적인 욕구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기억이라 하는 것은 지금 내가 사는데 유리하도록 조작이 되고 날조가 되는 주일 낮에 했던 모든 기도의 응답은 없다고 하면서 모든 기억은 날조된 것이고 조작된 것이라고 했지요? 그것은 뭐냐하면 자기가 기도해놓고 응답이 없으면 남들이 얼마나 우습게보겠습니까? 그러니까 억지로 참는 거에요. 구성을 편집해요.

“내가 기도하니까 이런 응답 받았어요.”하면 남들이 카리스마 있다고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게 뭐냐하면 목사들의 주된 작업이 재구성이지요. 현실의 재구성이죠. 만약에 우리가 베드로라면 이렇게 해야 되요.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는 것조차도 죄라고 고백해야죠. 왜? 띠 띠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 내가 원하는 길에 동업자가 아니에요. 내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이 뭐에요?

내가 원하는 것 자체가 주님이 본래 제시한 것과 불일치된다는 것을 주께서 이미 아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게 되면 우리는 좋다고 넓은 길로 가요. 넓은 길로 가게 되면 나락으로 떨어지잖아요.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어떤 바보같은 30대 남자가 휴대폰을 보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겁니다. 그럴 수 있겠어요. 절벽 구경하러 관광 갔다가 마침 거기서 전화 받다가 떨어져 죽은 거에요.

그걸 보고 제가 느낀 건 뭐냐하면 옹기종기 사는 데 정신 팔려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에요. 모든 사람들이, 이게 전부인가? 2015년이 지나고 2016년의 환상을 위해 발밑이 절벽인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달 보며 비는 거에요. 대전에도 유명한 공원 위에 올라가 빌고 전부 비는 거에요. 가상의 브릿지를 놓는 겁니다. 자신이 만든 유토피아로 가기위한 브릿지. 그렇게 올라가서 비는 것은 무속 신앙이고, 송구영신 예배 때 손 모아 비는 것.

참, 절에 가서 비는 것이나 교회에 가서 비는 것이나 둘 다 뭡니까? 전부 다 우상 숭배지요. 새해에 각오를 새로이 한다? 도대체 새해를 누가 만들어 놨는데 사람이 만들어 놨는데, 각오를 자기가 해요? 365일 누가 만들어 놨습니까? 주님은 하루만 만들어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것으로 끝나요. 일 년 스케줄을 주께서 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른 비, 늦은 비로 스케줄 끝나버려요.

그것은 이스라엘 내에서도 세속적이고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안식일 1.2.3.4.5.6,1.2.3.4.5.6. 안식일의 반복이에요. 그 안의 심지 같은 계시적 시간입니다. 안식의 언약이 계속해서 눅눅하게 녹아 있을 때만 그것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호떡 안에 설탕이 없으면 그건 호떡이 아니지요. 그냥 밀가루 덩어리지요. 호떡 먹는 이유가 뭡니까? 뜨거울 때 접어서 먹으면 주룩하고 설탕물 하고 땅콩가루하고 계피하고 있어야 맛이 나잖아요.

자 첫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의 본질은 오류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면 소년들이 하는 짓이 어떻게 제사의 본질과 대비되는 속성을 가지는가? 소년들이 하는 짓은 의외로 평범해요. 삶은 것 말고 날 것 먹겠다는 거에요. 너무나 단순한 거에요. 소년다운 생각이라! 왜냐하면 아버지가 제사장이니까 삶은 것만 나왔어요. 그래서 싱싱한 것 먹고 싶다는 거에요. 이게 뭐가 그리 나쁜 짓입니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예수님을 재판 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사형시키는데 한 표 던진다고요. 왜 그들이 하는 짓이 내 몸도 결코 그렇게 나쁜 짓이라고 생각이 안 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중심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유리함, 생존의 유리함이 평소에 중앙지역을 이미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죄에 갇혀있다라고 보는 겁니다.

“나는 죄에 안 갇혀 있는데?” 갇혀 있다면 나에게 갇혀 있는데!“ 그게 바로 죄에 갇혀 있는 거에요. 나에게 갇혀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다는 소년적인 성격이 그대로 제사하는 곳에 가서 고기 날 것을 달라 한 겁니다. 소년들이 보기에는 늘 반복되는 일상적인 거잖아요. 제사장이 가서 제사 드리고 하는 일이 늘 하던 일이라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복이 되어 버리면 식상해지고 그 의미가 이제는 고정되어 버렸어요. 이 세상에는 흐름이 있는데 이 흐름에 마디를 주게 되면 질서가 생기고 질서에서 나온 것이 뭐냐하면 형상이 되고 그 형상은 하나의 고정적 대상이 되면서 여기에 이름으로 부르지요. 이름이 있어야 대상이 되니까 관계를 맺습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 있고 흐름에 마디를 주면 질서가 생기지요. 이 마디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이 소년들은 무심코 신선한 고기를, 이제는 삶은 고기가 지겨워져서 생고기를 먹겠다고 먹었는데 그것이 사건이 되었고 그 사건이 자신들에게 평소에 있던, 소년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던 자신들의 본성이 바깥으로 질서화 되어서 튀어 나온 겁니다. 무심코 한 것인데 질서가 튀어 나오고 [흐름 / 마디→질서→ 형상] 여기서 전혀 오류라는 낌새가 나타납니까? 안 나타납니까? 전혀 나타나지 않지요.

왜냐하면 소년들은 날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해석 할 때에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불리하면 악이 되는 거에요. 이것을 지난 수요 설교에 했지요.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불리하면 악이 되는 겁니다. 선악과가 그렇게 변질된 겁니다. 그래서 해석을 할 때 선과 악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내 생존에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근거해서 해석한다는 거에요. 이런 식으로 해석 안하는 사람 있으며 나와 보라고 하세요. 아무도 없어요.

다시 이야기 하면 1+1=사이좋게 지냈다. 드라마에선 이것이 1+1관계에서 출생의 비밀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1+1관계) 여기에 이미 흐름이 질서가 되었어요. 서로 사랑해 주고 예뻐해 줬는데 (1+1관계)에 사이에 “사실은 네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고 내가 친 엄마다!”라고 끼어들어 올 때 (1+1관계)에 사이에 제 3자가 차고 들어오게 되면 뭐가 깨어집니까? 그 행복이, 서로 좋은 관계가 깨어지잖아요? 억지가 되지요?

인간들 끼리 살잖아요. 그럼 인간들 끼리 잘 살면 되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면 되는데 왜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예수님은 왜 (그 사이에) 끼어듭니까? 그것도 별을 따라서 왔는데 동방박사가 하는 이야기가 “혹시 여기에 임금님이 새로 나셨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문재인이 당대표로 있는 새 정치 민주연합당(더불어 민주당)이 있는데 누군가 “혹시 여기 당대표가 안 바꾸었습니까? 안철수로?” 그럼 문재인이 가만있겠어요?

만약에 내가 문재인이 동생이다라고 한다면 “형님 뭐합니까? 안철수 내쫓아야지!”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헤롯 왕이에요. 헤롯 왕이 나쁜 놈이라고 욕 할게 못 된다니까요. 자기가 지금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왕인데 누군가 “혹시 여기 왕이 새로 태어났지요?” 하면 지금 정권 물려 줄 생각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건 당연히 제거해야 되지요? 물론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알지만 그건 먼 훗날 이야기고,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누구도 알아야 돼요? 헤롯 왕도 동의가 돼야 하는데 전혀 동의가 안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동방 박사들 가는 길에서 암살 시키고 두 살 아래 남자 아기들 다 죽이고 그래야 뭐가 된다? 흐름에 마디가 생기면 뭐가 된다? 질서, 이스라엘의 질서를 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헤롯 왕을 욕 할게 못 되지요. 우리는 우리 질서 없습니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10:34) 불화를 주려 온 거지요.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좋은 관계에서 갑자기 누가 치고 들어오는 겁니까? 주님이 치고 들어오면 이 가정이 불화가 날 수 밖에 없어요.

사무엘상 2장에서 3장을 쭉 읽어 보면 엘리 제사장이 말하는 게 굉장히 점잖아요. 사무엘이 세 번씩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엘리에게 왔을 때 엘 리가 사무엘을 구박했습니까? 미워 했습니까? 타박했습니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주신 계시를 수용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수용했어요. “사무엘아 네게 무엇을 말씀 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걱정하지 말고 말해라, 화 안 낼게.

이야기 하니까 뭐라고 합니까? “그대로 되어야지” 사람이 이 정도로 점잖아요. 얼마나 점잖아요. 아버지는 점잖은데 애들은, 자식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점잖은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엘리가 죽고 나서 집안에 며느리가 해산이 가까웠는데 아들을 낳았을 때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결국 뭡니까? 이 집안에 영원한 저주가 내려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몰랐었는데 오류가 눈앞에 막 등장하면서 진리는 오류를 밀어 내면서 뒷 부분에 진리가 같이 연결 되면서 지상으로 나오지요. 그래서 십자가를 가지고 주께서 앞장세우게 되면 그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고 그리스도의 영은 십자가만 이야기해요. 요한복음16장에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그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거에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나온다. 옹기종기 살기 좋을 때는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또는 갑자기 한 달 수입이, 월급이 100원정도 더 올라갔다. 분명히 기쁜 소식이에요. 하지만 이런 기쁜 소식 때문에 뭐가 가려지나 하면 하나님의 의가 가려져 버려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소중함과 고귀함은 그 순간만큼은 가리워져 버리지요. 잊어지거나 가리워지지요. “나는 월급 100만원 더 못 받아도 하나님의 의가 더 좋아!” 이렇게 돼야 되는 거거든요. 이게 정상이거든요.

하나님의 의는 뭐냐 하면은 일어난 사태와 그 속에서 자기의 죄를 느낄 때, 비로소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의는 새롭게 우리에게 느껴지는 겁니다. 뭔가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매사가 자기 원대로 안 될 때,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뜻대로 안되게 되면 어떻게 대처 하느냐 하면 자기의 욕심을 낮춰요. 욕심을 낮춘다고 됩니까? 낮춰도 안돼요. 무슨 이런 운명이? 포기해도 안돼요.

눈높이 낮춰도 취직이 안 될 정도로, 결혼 하고 싶은 데 내가 너무 콧대를 높였구나! 조금 낮춰야지! 낮춘다고 결혼 됩니까? 그래도 결혼이 안돼요. 주위에서 결혼시킨다고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저도 참 마음이 아파요. 결혼한 사람의 여유? 그런 게 아닙니다. 모르니까 하려고 하는구나! 왜냐하면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본성에 맞아요. 그런데 누구와 같이 산다는 것은 챙겨줘야 되는데 이게 짐이 되요.

왜 인간은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이 맞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아에서 못 벗어나거든요. 나갔다가도 후딱 자기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같이 산다는 이유 때문에 억지로라도 사랑을 해줘야 되니까, 급히 사랑해주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오려고 하니까 상당히 자기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해요. “여보 사랑해!”라는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 예의상 해 줘야 한다는 것.

사실은 자식을 낳고 통계를 내 보세요. 예쁜 짓하는 것이 많아지는지 미운 짓 하는 일이 많은지를 기껏해야 세 살까지로 이쁜 짓이 끝이나요. 그 다음 네 살부터는 미운 짓하기 시작해서 일곱 살 되면 지리산으로 보내야 되는 가? (청학동) 훈장님에게 보내서 인간 만들어야 되는 지, 나이 12살 정도 되면 감당이 안돼요. (사춘기)15살 정도 되면 벌써 옷에서 담배 냄새나기도 하고 “저것, 누굴 닮았나?”하고 자책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우리 자신들의 평범하고 소박하고 아무 욕심 없는 그것이 복음을 가립니다. 낮추고 낮추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이 복음을 가리는 거에요. 그냥 오류대로 성질대로 살면되요. 알아서 우리를 동반시켜서 우리를 오류라고 드러내면서 같이 동반해서 나타나십니다. 주께만 영광이 되지요. 이가봇이라는 비느하스의 아내는, 엘리는 죽고 그 집안에 남은 것이라곤 며느리의 자식 밖에 없잖아요?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집안은 어차피 영광을 가려야 될 저주 받아야 될 집안이라고 인정을 해 줘야 되요. 여기서 비느하스가 지옥 간다, 엘 리가 지옥 간다고 그렇게 단정 짓지 마세요. 왜냐하면 구약 자체가 하나의 연극 무대이니까. (각자의) 역할, 나쁜 역할을 해야되요. 나쁜 역할이 있을 때 우리는 선뜻 나쁜 역할보다는 좋은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데 사무엘처럼 되고 싶어 하는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런 것이지,

우리는 나쁜 역할에 더 일치 됩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거에요.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 올 때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주께서 맴매해서 온 거에요. 주께서 좋게 하면 교회에 안 옵니다. 따라서 교회에 안 나왔다 하면 그것조차도 주의 뜻이에요. 다음 주에 또 본다는 보장 없습니다. 내가 내일도 산다는 보장 없듯이, 주님께서는 내가 생각한 드라마를 늘 일찍 종결시켜 버립니다. 일찌감치 막 내려 버립니다. 내일의 나를 주께서 드라마를 짜 주셔야 되지, 오늘의 나는 오늘로 끝나는 거에요.

이 소년들의 죄는 다시 말하지만 평범합니다. 그러나 소년들 속에 욕구는 평범하지 않아요. 이것은 바로 제사를 노리는 거에요. 제사를 노리는 마귀의 술책이죠. 그래서 우리는 정리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항상 평범한 인간의 얼굴로 지상에서 구체화되는 거에요. 다들 동의 되고, 다들 공감하는 뭐 애들이 그럴 수 있지, 철없어서 애들이 그럴 수 있지라고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마귀는 주님의 그 시대에 필요한 구원에 위한 복음을 훼손합니다.

그러면 제사는 뭐냐?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편하게 내가 생존하려는 욕구와 반대되는 요소가 제사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사가 뭡니까? 어린 양의 죽음이지요. 어린 양의 죽음에 대해서 소년들이 뭘 알겠어요? “나는 저 죽음이 싫어!”라고 대모 하지 않았어요. 그냥 고기 먹고 싶다. “삶은 고기 말고 생고기 먹고 싶어” 그 뿐이에요. 그런데 제사를 멸시 했다는 거에요.

소년들이 속해 있는 모든 흐름과 구성, 질서 자체가 호시 탐탐 제사의 가치를 모독하고 무산시키는 세력에 의해서 갇혀 있는 시대가 바로 사무엘의 시대이고 오늘 날 우리의 시대에요. 그러면 사무엘은 성신이 임하기 때문에 이 소년들과 다르겠지요? 사무엘은 어떤 일로 달라지는 거에요. 그 이야기가 뒤에 나옵니다. 오류 없이는 진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삼상 2장21절)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 하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지요? 계속해서 초점이 엘리의 소년들과 사무엘인데 결국 사람은 오류지만 그 오류를 아시면서 인간은 오류인 것을 아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지속적으로 투입이 되었습니다. 투입된 노선을 따라 이 땅에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무엘이죠.

그렇다면 사무엘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에 보편적 이상이나 보편적 상식과는 다른 태도로써 다른 노선으로써 인생을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날 성도의 가는 길이에요. 모든 사람들은 넓은 길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우리도 좋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딱 멱살 쥐고 “안돼!”하고 빼내어서 다른 길로 가게 하지요. 그러면 “제가 좁은 길로 가겠습니다”라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나서는 좁은 길은 넓은 길의 일종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익히 알고 내가 아는 길은 넓은 길입니다. 자기 딴에 고난 받고 굶고 금식해도 넓은 길이에요. 좁은 길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길이에요. “내가 여기에 알아서 온 것이 아니였군요!”라고 고백되어 질 때 주께 좁은 길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해서 내 인생은 주님의 인생이지 내 인생은 아예 없는 겁니다. 사무엘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마음을 낮추거나 높일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닌데 내가 마음대로 살아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그냥 막 사세요. 어차피 내 인생이 아닌데요. 그렇게 되면 막 살면 사무엘도 막 살고 있는 중이에요.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막 살고 있는 거에요. 아마 사무엘이 막 안 살고 정신 차려서 살았다면 나중에 사무엘의 아들들이 8장에 보면

(삼상8:1-3)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라고 되어 있잖아요. 자식 교육 잘 시켰습니다. 5월8일 어버이 날 이 본문 가지고 설교 하지요. “여러분! 사무엘도 다 소용 없네요.” 이렇게 제목을 해서,

성경에 보면 목사의 자격 가운데 뭐가 있냐 하면 자기 집안을 잘 다스리는 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것을 가지고 강의를 했어요. 목사의 자격이 몇 가지가 되요. 주시는 이유가 아무도 목사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그럼 목사는 어떤 사람이 되야 하나? 내가 목사 값을 못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 만 주의 영이 임하는 것이죠. 주께서 하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 저는 목사 할 자격이 안됩니다라고 늘 고백합니다.

그러면 정리하고 1강 마치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평범한 일을 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계시가 규정을 했어요. 불량자이다. 제사를 멸시했다. 그런데 소년들을 보면 멸시 한적 없어요. 방해 한 게 아니잖아요. “그만 둬라! 나는 제사가 싫어! 난 어린 양의 제사가 싫어! 난 다른 신을 믿겠어!”라고 안 했지요? 유별나지 않았지요? “아이고! 우리 아버지 참 고맙다. 아버지가 제사장이라 매일 고기 먹는다.”라며 오히려 제사 하는 것을 좋아 했을 거에요.

왜? 제일 좋은 고기를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마귀라는 것이 노골적으로 뭘 엎어 버리고 예배당 유리창 깨고 이것이 마귀가 하는 짓이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옹기종기 재미나게살면 그게 마귀인 거에요. 복음도 관심 없고 언약도 관심 없고 그냥 제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배부르고 등 따뜻하고 가정에서 웃음소리 나고 시편 73편에서처럼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늘 건강하고 늘 운동만 했는지, 아무 걱정도 없고 만사에 형통하고 그것이 마귀 짓입니다.

10분 쉽시다.

주향(IP:211.♡.45.164)

16-01-24 12:10

엮임 (마 20:1-16) 대전- 71강

이근호

2015년12월 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0:1-16

(마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마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마20: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20:4) 저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마20: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마20: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20: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마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마20: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마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마20: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마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천국은(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 ~)안에 있는 것이 궁금하지요? 예수님께서 천국에 사시다 오셨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 잘 아시거든요. 천국은 ~와 같으니, 우리는 궁금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은 천국은 ~와 같으니에 있어서 그 재료를 구경하고 있는 우리를 집어넣어서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보통 설탕은 건강에 해롭잖아요. 그런데 백 선생은 설탕을 많이 집어넣고 요리를 하는 거에요. 우리는 천국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해준다면 “예~예! 믿습니다!”하고 믿을 용의가 있는데 구경꾼인 우리를 (재료로) 집어넣어서 주께서는 레시피를 만들어 요리를 내놓으시는 거에요.

천국을 만드는데 죄인이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수요일 설교에 언급을 한 것 같은데 에덴동산은 뭐든지 좋지요? 뭐든지 좋은 것만 있지요? 생명이며 아름다운 꽃들과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는 거, 뭐든지 다 좋은데, 왜 좋은 그 동네에 부정적인 요소인 “죽으리라”는 죽음이 왜 끼어드는 거냐는 거지요.

선악과가 구석에 안 보이는데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한 가운데서 있으면서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 했듯이 에덴동산은 우리가 살기 좋은 동네가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한 동산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뭉개 버리고 부숴 버리기 위해 집어넣는 겁니다. 천국은 ~와 같으니라고 ( )해놓게 되면 이 ( )안에 뭘 집어넣어야 되냐하면 20장 16절을 넣어야 되요.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마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천국은 나중 된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천국은 먼저 된 자를 나중으로 만드는 힘이 작용하는 게 천국이다.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떤 장소에 들어가기를 원하지요? 야구장이라든지 공연장이나 표를 끊고 들어가는 것처럼 천국도 들어가면서 천국 시작~ 하면서 “바라만 보다가 들어가니 천국 좋다~” 이러고 싶어 해요.

제가 이번에 요한계시록 할 때 언급할겁니다. 새 예루살렘, 장소적 의미가 왜 장소적 의미이냐? 하나의 장소적 의미이냐 아니면 하나의 무늬이냐 거기에 대해서 언급을 하겠습니다만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천국은 인간들이 상상해서 따로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 주님이 몰고 왔다고 보면 되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아니 누가 왔다는 거야? 예수님이 오시지요?

예수님이 나타났는데 그 뒤를 돌아보니까 천국을 몰고 오시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 비켜주세요! 저는 예수님 뒤에 있는 천국에 가야겠습니다.”라고 하면 안돼요. 왜? 예수님이 새로 시작해야 되니까! 그러면 요리사가 이제부터 맛있는 만둣국을 해 드리겠습니다하면 “요리사 필요 없어! 난 만둣국만 먹으면 돼!” 왜 안됩니까? 주님은 “내가 만든다고 내가~ 왜 이리 성질이 급해?”

내가 만둣국 먹게 해 드리겠습니다하고 했는데 듣는 사람들은 오해해서 다 만들어 놓은 만둣국을 요리사가 들고 온 것으로 생각한 거에요. 예수님이 천국을 들고 온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소매 걷고 만들려고 온 거에요. 뭐를 재료로 한다고 했습니까? 파, 마늘? 아니에요. 죄인을 재료로 해서 만드시는 겁니다.

주님이 채찍 맞아야 되거든요. 주님이 비난도 받아야 되요. 전부다 설탕같은 존재인 재료에요. 대신 죽어줘야 되지요. 아무도 예수 믿는 사람 없고 다 떠나야 되지요. 전부다 천국 만드는 거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로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가난하게 되려면 가난하게 될 상황이 벌어 져야 돼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또는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한다면 울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일어나야 되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에서 돌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이 만드시는 천국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조미료가 되고 양념이 되고 재료가 되는 겁니다. 마귀까지 포함해서 전부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21-23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마라” 다른 말로 기대하지 말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천국은 ~와 같으니 라고 예수님께서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제3의 자리에서 “말씀만 하신다면 나는 바로 뛰어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거에요. 교회 안에 들어오시면 또는 등록하시면 천국에 들어 갑니다라고 그런 인상을 자꾸 제공해요. 그렇게 되면 천국은 교회 바깥은 천국이 없는 셈이 되 버려요.

제가 지난 시간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오류지요. 그러면 교회가 왜 있습니까? 오류를 오류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거에요. 이것이 요한 계시록의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의 촛대를 옮길 때 비로소 그 현장에서 진짜 교회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럼 전 가짜 교회 말고 진짜 교회 가고 싶어요.” 아니에요. 항상 진짜 교회는 가짜 교회만을 드러내면서 뒤에 보이지 않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그래야 가짜 교회와 진짜 교회 사이에 순교가 일어나기 때문에 두 증인의 순교가 사건이 유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없다’라고 여기는 사람이 ‘교회’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교회는 없다라고 늘 지적당하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고 (그 사람이) 지체가 되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들이 감 잡았지요? 아하! 천국은 우리가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구나! 사실은 천국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에이~ 저게 무슨 천국이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밉상 받고 거부당하는 천국으로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오빠11명이 못된 계모의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하였어요. 그때 막내 딸, (엘리자) 공주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옷을 짜주는 거지요. (마법에서 풀리는 방법)

오빠들은 낮에는 백조가 되어 버리고 밤에는 사람으로 변하는 마법에 걸린 거에요. 이것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오빠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설사 오빠들은 누이동생이 하는 일을 무슨 일인지를 봐도 “ 저! 옷 짜는 것과 우리가 구원받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무 연관성이 없어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는 일은 우리가 기대했던 구원의 방식과는 전혀 무관한 식이 되니까!

그래서 신학 교수나 신학 박사가 신자 되기가 힘든 정도가 아니고 거의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신학 교수나 신학 박사 이 사람들은 뭘 하고 노느냐하면 그들에겐 장난감이 있어요. 장난감을 두자로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라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거에요. 나중엔 자기 밥벌이도 되고 목사들도 심방과 기도가 두 개의 장난감을 가지고 자기 밥벌이 하는 거에요. 성경이고 뭐고 귀찮아서 하지도 않아요.

그저 기도, 기도는 뭘 받는다? 응답 받는다. 이거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게 목회가 되거든요. 비는 장소 못 찾아서 환장하는데 예배당 지으면 안 나오겠어요? 하나님에게 응답이 된다는 그 장소를 제공하니 그 장소에 아낌없이 십일조하면서 설사 응답이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기도 하는 본인들이 응답을 만들어 내는데요, 날조하는데요. 응답 없으면 자기가 부끄럽기 때문에,

우리 동네 갑 바위에 가는 사람들, 응답 자기가 다 지어내요. 오죽하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겠습니까? 본인이 본인을 속인다니까요. 날 때부터 오류가 있으니까 본인이 스스로 자기를 괜찮은 존재로 자꾸 변명하고 위장하고 자기가 자기를 사수하고 지키고 변조하고 그러한데 쓸데없이 복음 전하면 뭐합니까? 기도하고 응답 받는 걸로 충분한데 설교 내용도 필요 없어요.

이렇게 열심히 했더니만 이런 응답받았습니다라는 그 설교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이 알아서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알아서 넙죽 절하고 다 가요. 이게 장남감이죠. 서유석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아름다운 여인.(헤르만 헤세의 시에 음을 붙인)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다 얼싸안고 기어이 부셔버리는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오 오오오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그 노래가 너무 인상 깊은 거에요. 지금 그것을 복음적으로 생각하니까! 모든 인간은 각각 자기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가지고 있어요. 애들에게만 장난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애가 크면 어른 되거든요. 어른들에겐 어른 나름대로의 장난감이 있다고요. 퇴근하면 술 먹으러 가는 장난감도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의 자기 즐거움이 다 있어요. 그게 없으면 못 살지요. 주께선 이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아까 이야기 했지만 모든 세상에 되어지는 일들이 어디에 사용된다고요? 천국 만들기에, 하나 버릴게 없어요. 이단이든 삼단이든 다 필요해요. 천국 만들기에 다 필요 합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도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의미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다만 우리 안에서는 의미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주님을 경유해야 의미 있는 거에요.

이것을 가지고 ‘엮임’이라고 합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 정리해 봅시다. 정형화되지 않은 뒤죽박죽의 세계가 [무한(흐름)→ 마디(사건)→ 질서→ 형상]이라 했지요. 마디를 눌러 주면 바이올린이 왜 소리가 납니까? 줄을 눌려 주면 제 소리가 나잖아요? 소리가 뭐냐하면 질서지요? (소리의) 질서는 이건 도. 이건 레, 이건 미..이것이 정형화돼서 개체가 되지요? 레와 도는 소리가 다르고 미와 솔이 다르잖아요. 이것을 형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형상이 뭐도 되냐 하면 인간도 형상이 되요. 문제는 형상이 가만있지 않는다는 거에요. 부단히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한에서 질서는 이것이 움직이는 질서가 되겠지요? 움직이는 질서를 가지고 운동이라고 했는데 운동의 원인이 되기 위해서는 뭐가 되냐 하면 두 번째 시간 제목이 엮임이에요. 이것을 그대로 예수님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지요?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말은 우리 인간 입장에선 있지도 않는 세계에요. 이번에 요한계시록 교재에 보면 (없는 장소: 주님의 세계는 현실에선 없는 세계)) 없는 장소에 대한 묘사라고 있을 거에요. 없는 세계에서 등장 해 버렸습니다. 아까 동방박사들이 무엇을 따라 왔다? 별을 따라 왔다. 그 별은 늘 있던 별이에요? 없던 별이에요? 없던 별이에요. 그것도 어떻게 되요? 그 별이 어떻게 해요? 가만히 있는 질서에 움직이지요.

별이라는 형상이 아까 형상은 대상이 된다고 했지요? 대상이 있어야 서로 주고받게 되요. 마디를 주고 하나의 형상화가 될 때 두고 받는 다는 거지요. 불교도 그렇잖아요. 불교에서도 인간이 죽으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해서 다 흩어지지요. 사람이 죽으면 다 흩어진다고 하잖아요. 동양 철학에선 ‘기’도 흩어지잖아요. 인간이 고체가 될 때 인간이라고 하지만 죽으면 흩어진다. 그래서 불교에선 죽을 때 화장을 권합니다.

인간이 움직이려면 가만히 있으면 움직이지 않아요. 엮여야 되요. 만약에 예배시간에 설교하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아! 예~예~하며 받으러 밖에 나갑니다. 왜 움직였지요? 엮였어요. 외부에서 신호가 와서 엮이지 않으면 인간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에요.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중간에 항상 좋았더라 하는 게 아니고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지요? 좋았었는데 갑자기 일이 터지지요? 제 3자가 등장 하면서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하든지,

아버지가 사장인데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인간이 모함해서 자기가 사장되려고 회사를 뺏었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고 난 뒤에 딸은 처음부터 자기가 가난한 줄 알고 공부해서 우연히 어떤 회사에 취직했는데 알고 보니 첫 출근 할 때 급히 커피 들고 가다가 재벌 3세하고 부딪혀 엎어져서 “어디 건방지게 부딪히고 사과도 안하는 너 같은 건 처음 본다”하니까 “네가 뭔데?” 하니까 “어! (이 여자) 매력있네!” 서로 얽히기 시작해서 둘이는 사랑하고 아버지는 반대하고 나중에 보니 원수 집안이고, 이렇게 엮이는 거에요.

주님께서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찮은 것들, 그냥 고요하게 옹기종기 잘 사는 거기에 주님이 와서 이상하게 주님과 엮이게 만드는 겁니다. 가만있던 동방 박사가 왜 먼데까지 옵니까? 이란에서 알라나 부르고 있지, 왜 옵니까? 별과 엮이게 돼서 헤롯 왕과 엮였지요. 더군다나 죽을 뻔 했잖아요. 꿈에 천사가 안 나타났으면 그냥 갔어요.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피신해라! (해서 살았지.)

저는 마태복음 2장을 보면서 느낀 게 있어요. 왜 하나님은 동방 박사들은 살려 주고 그 뒤에 나오는 베들레헴의 2살부터 그 아래 사내아기는 다 죽이냐는 말이죠. 누구는 무 뿌리 먹고 누구는 인삼뿌리 먹습니까? 살리려면 다 살려야지. 아기들 죽이려고 군인들 오기 전에 “ 아~마이크 테스트~ 베들레헴 이장인데 내일이면 군인들이 두 살 아래 사내아기들을 다 죽이려 하니 숨던지 다 피하던지 하세요! 그냥 있으면 두 살 아래 아기들은 다 죽습니다.” 라고 천사라도 와서 광고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무도 언지를 준적이 없어요. 왜 그러냐 그게 바로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왜 죽었던 아이들의 엄마들이 동일한 이름을 갖습니다. 라헬입니다. 라헬은 누가 사랑했던 사람인가 하면 야곱이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야곱 뒤엔 누가 있느냐 야곱의 하나님이 있어요. 거기에 12아들이 있고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죽음 속에서 비로소 발생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죽음과 엮이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벤허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었지요? 거기서 보면 문둥병에 걸리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언제 나음을 입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깨끗함을 입어요. 이 말은 뭔가 하면 엮였잖아요. 이것은 영화니까 무시합시다. 그러면 요한복음11장에 나사로는 언제 엮입니까? 마지막에 어떻게 엮입니까? 죽은 지 나흘이나 됐는데 다시 살아나서 엮였지요.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이 훌렁 떠나버리시니까 제자들이 얼마나 섭섭했다고요. 왜 섭섭했는지 알아요? 옛날 방식의 엮임은 이제 끝났네! 다시 말해서 물 위를 걷는다든지 병자를 고쳐준다든지 죽은 자를 살린다든지 앉은뱅이를 일으킨다든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 이런 것 이제 끝났네라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새로운 방식의 엮임을 주시는 겁니다. 이게 뭐냐 사도들에게 성령이 와 버리지요.

성령이 오니까 사도들은 이미 주님과 엮였어요. 그러면 사도들의 시간은 주님과 엮인 시간이 되요. 그러면 사도의 시간이 뭐냐? 요한계시록의 시간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사도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뭐냐 이것보다 더 빼거나 더하면 천국에 합당치 않다. 사도의 시간이 곧 주님의 세계의 마지막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사도의 시간이 중심이 되어 버리면 바깥의 역사는 뭐로 끝나는가?

다니엘서에 의하면 네 번째 짐승이 나오는데 로마지요? 요한계시록은 로마이야기로 끝납니다. 로마 이후는 안 나오죠. 왜 로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로마의 변두리 짐승의 역사는 중앙에 있는 사도의 시간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수련회 때 하겠습니다. 이 말은 요한계시록을 영원토록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시간은 사도의 시간과 함께 끝나 버려요.

그 안에 있는 천년 왕국이라 하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나 다 사도의 시간으로 끝나 버려요. 그러면 재림 아직 안했는데 사도의 시간으로 끝난다하면 우리는 끝났네요? 우리가 재림의 시간을 기다리는 그 자체가 우리의 시간관에 오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만들어 내는 천국에 재료로 들어가야 되는데,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팔짱끼고 제3자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에서 뭐라고 하는지 내가 알아들고 믿어서 구원 받을께요라고 자기의 시간을 따로 챙기는 그것이 해석의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20장 해봅시다. (마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엮이기 시작합니다, 주인하고 품꾼과 엮입니다. 여기서 엮일 때 주인 주변에 일꾼이 몇 명 등장 하지요?

주인이 있고 일꾼이 아침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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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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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