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51211a히11장 8절(창)-이 근호 목사
안양20151211a히11장 8절(창)-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안양20151211a히11장 8절(창)-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상당히 많이 알려진 대목이 나와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는데요, 방금 봤지요.
여기에서 믿음이 빠졌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다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등했겠지요. 그 갈등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인데 갈 바를 알지 못하면 아예 안 가지요. 왜냐하면 미래가 확보되어야 선택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갈 바를 모르고” 갔다는 것이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와 부합이 되겠지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믿는 자는 미래를 미리 당겨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고 부르심에 순종하다가 보면 최종적으로 주께서 이끄시는 그 현장(장소)에 도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갈 바를 알지 못”했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이 되는 겁니다. “미리 알고 가는 곳은 가짜 천국”이라고 정리될 수 있지요. 천국이 좋으니까 제가 나설게요.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부리는 하나의 객기, 또는 하나의 ‘오기’ 같은 거에요.
‘오기’와 ‘신앙’의 차이점이 뭐냐? 반댓말입니다. 오기는 자기의 의지가 여기에 작동합니다. “I can do!” 조폭 가훈이라고 하지요. “나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앙’은 반대니까, ‘오기’는 “나는 할 수 있다.”가 되고 ‘신앙’은 ‘오기’와 반대니까 “나는 할 수 없다.”가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오기’를 ‘신앙’으로 보니까 ‘오기’를 ‘신앙’으로 볼 수 있는데 지금 제 말이 이해가 안 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은 이해가 되고요.) “나는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도 나는 간파하고 있다.”, 그리고 “저 천국을 얻기 위해서 이것, 이것을 시도할 용의(성의)가 되어 있다.”
‘그런 마음의 성의가 되어 있다. 성의만 잘 하면 하늘도 감동하겠지’ 하는 이것이 ‘오기’입니다. ‘오기’는 교회에서 거의 99.9%, 거의 100%가 전부 ‘오기’라고 보면 돼요. ‘악바리’, 기어이 방언 해보겠다고 설치는 그런 사람들이 ‘오기’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반대보다 더 나아갑시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나는 천국에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내가 이만큼 해냈다는 그것이 오히려 나를 엉뚱한 길로 접어들게 만든다는 거에요. 이게 ‘신앙’이에요.
왜냐하면 “갈 바”를 몰라야 되니까요. 열심히 했는데 가보니 아니더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열심히 배의 노를 저었는데 뭐가 보여서 가보니까 지옥이더라 말이에요.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 했는데 가보니까 지옥이더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천국은 처음부터 내가 노를 저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여기까지는 안다고 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갑시다.
왜 사람은 ‘오기’를 부릴까요? 나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그러다가 보면 이 오기를 부리는 이유는 나한테 있어요. ‘나는 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오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신앙’은 내가 할 수 없는 거에요. “I'm nothing.” 나는 아무것(nothing, 무)도 아닌 거에요. 그러면 신앙의 길, 좁은길, 영생의 길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나는 의미가 있다.”의 반대, 가면 갈수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가 되는 거에요.
쉬운 예를 들면, 오늘 세 사람이 분홍, 노랑, 병아리색을 입었는데요. 이 분홍빛, 노랑빛, 병아리색 말고 연탄처럼 시커먼 옷을 입으면 거기에다가 글씨를 써도 표가 안 나요. 왜? 배경 자체가 시커멓기 때문에 볼펜으로 써도 표시가 안 나지요.
그런데 노란색, 병아리색, 하얀색 같으면 조금만 써도 표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오기를 부리는 이유가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교인이 하나 더 오면 선교상 받고 발표를 하게 되면 박수소리를 듣고 뭔가 티가 나는 반면에 신앙은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신앙이 좋은 점은 살이 찐다는 거에요. 배짱이 편해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초조하지를 않아요. 내 배 째라에요. I'm nothing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서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나를 알아줘.” 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신앙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only(오직)”가 돼요. “오직 나만, 홀로”가 돼요. 그런데 홀로가 될 때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 있는데 홀로 있어서 내 주위에 내 맘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생활하다가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면 홀로 있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여기고 친구가 많으면 이것이 주의 축복인 줄 알고 신나게 밤이 새도록 10시간 동안 눈썰매 타고 놀지요.
그렇게 되면 주님과의 동행은 까맣게 잊어 버립니다. 여러분 ‘피노키오’라는 동화를 알지요? 원래 피노키오가 목각인형인데 천사가 와서 목수가 아들이 없다고 아들을 하나 줬는데 말을 안 듣지요.
왜 학교 갔다가 바로 집에 오지 않았는가 하면 놀이공원이 있어 가지고 친구들하고 논다고 집에 오지 않았던 거에요. 거기에다가 거짓말까지 하니까 신기하게도 세상에... (그런 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코가 있다면 사람들 지금 코가 다 커졌을 거에요.) 심리학에서 사람들은 하루에 보통 여덟 번 거짓말을 한대요. 여덟 번이니까 슥슥 늘어나서 전부 다 코에 걸려서 못 살 거에요.
아빠하고 있었어야 되는데 왜 친구하고 있어가지고 아빠의 명을 어겼느냐고 이야기하지요. 똑같은 거에요. 주님과 함께 있으면 자연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돼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갈 바를 아는 오기만 충만한 자들이고 신앙인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증언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증인이기 때문에) 이 신앙인을 호응해주고 같이 따라올 친구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다 떨어져요.
그런데 유집사님은 왜 그렇게 친구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복음을 알면서도 왜 그리 친구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물론 예의상, 사회 관계상 만날 수는 있는데 건성으로 만나게 돼요. 왜 그런가 하면 대화를 해보면 들을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고 그저 갇혀있는 것만 이야기해요.
이 세상은 갇혀 있잖아요. 갇혀있으니까 환기가 안 되고 그러면 냄새가 나요. 문을 열어놔야 돼요. 갇혀 있으면 공기의 순환이 안 돼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 냄새나는 세상에 갇혀서 전부 다 썩은 냄새를 피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환기가 안 됩니다.
외부에 “창”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강의 제목을 제가 “창(window, 창문)”이라고 하고 싶어요. (컴퓨터에 보면 나오지요? 제목이 나중에 바뀔 수도 있어요. 내가 지금 정한 것이라서요.)
성경 전체가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잖아요. 옛날에는 두루마리라서 둘둘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직사각형으로 한 번 꾹 눌러보세요. 그러면 납작한 것으로 되지요? 납작해버리면 이것은 유리판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유리판이 여기에 있다면 이 성경 자체는 천성과 지상 사이에 있는 납작한 창이 되어 버리지요. 창이 되는 겁니다. “창”의 특징은 시간이 중지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다 봐야 돼요.
예를 들면 3, 4살 어린애들 가지고 노는 퍼즐이 있잖아요. 다 맞추면 백설공주 그림도 나오고 인어공주도 되고 하는 것 말이에요. 이것 맞추는 것(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보면 애들이 앉자마자 정신 없이 밥도 안 먹고 그냥 한다 말이지요.
그런데 퍼즐이 처음에는 전부 다 미완성으로 더덕더덕 부분이 되어 가지고 무슨 그림인지 그 그림의 이미지가 잘 나타나지 않다가 나중에 마지막 퍼즐을 딱 끼우면 전체 그림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그 그림은 조각, 조각의 결합체이지만 전체적인 그 그림의 이미지는 가져와 보면 전부다 스톱이 되어 있고 그것은 아침에 봐도 다음날 봐도 인어공주고 한 달 후에 봐도 인어공주고 그대로 있지요?
그래서 우리 인생은 내가 혼자 있을 때는 시간이 흘러요. 왜? 우리는 늙어가니까. 나만 늙어갑니까? 친구도 늙어가고 또 바쁜 일이 생기면 딴 일하느라고 바쁜데 전체 윈도우, 창 안에서 보게 되면은 창 안에서 바쁘게 놀아도 (설쳐대다가 어느 날 죽어버리면 그만이고 또 손자가 태어나고 백 날 해도) 노는 마당이 성경의 범위 내에서만 노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약속의 범위 내에서 논다고 합니다.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 있고 너희는 오묘한 것에 제한되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가 노는 마당은 창으로 테두리 친 그 안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동서남북’이라고 하는데 스가랴에 보면 동서남북 저 구석까지 줄자를 가지고 재는 분들이 있어요. 이들을 네 천사라고 합니다. 이들이 정해버려요. 그러니까 인간은 천사가 구획해놓은 마당에서 잠시 놀다가 본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요.
그런데 같은 마당에서 노는 사람은 어떻게 보는가 하면은 김영삼은 88세에 김대중하고 저희들끼리 정치하는 게임하다가 죽었거든요. 그랬을 때 같은 마당에 있는 옆 사람은 김영삼이 죽으니까 어디로 가는지 모르거든요. 판대기기 때문에, 윈도우거든요. 놀다가 늙어죽었다는 것만 알지 죽어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요.
그래서 드라마는 사람이 죽는 것을 테마로 하지 않고 중간 부분을 테마로 잡아요. 남녀 둘이 연애하다가 결혼하면 드라마는 끝이 납니다. 결혼하고 난 뒤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더라인데 오래 살았지, 영원히 살지는 않았거든요.
머리가 파뿌리가 될 정도로 오래 살다가 ‘님아 요단강을 건너가지 마오’ 해도 한 사람이 가고 난 뒤에 어디로 갔는지 압니까? 이게 오늘 나온 말씀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거에요. 뭐 천국 갔다느니 지옥에 갔다느니 하는데 이 윈도우 판에서 인간들이 지어내지 않으면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르는데 인간들이 이미 각 종교마다 지어낸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 판대기에서 지어낸 천국, 지옥은 전부 다 가짜라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진짜 신앙인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 곳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미리 알고 가게 되면 갈 바를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오기가 작동되지 신앙이 작동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걱정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미리 천국을 알고 거기에 대비하는 식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마태복음 25장에 기름 준비를 하라고 했으니까 기름을 마음껏 준비하면 어떻습니까?’라고 하는데 오기에서 신앙으로 넘어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신앙에 예속되어야 되지, 오기에서 한 번 신앙으로 넘어왔다고 신앙에서 또 오기가 나와버리면 오기가 나오는 이 신앙의 넘어섬은 가짜 신앙입니다.
오기에서 신앙으로 넘어왔잖아요? 그러면 신앙에서 신앙으로 나와야 돼요. 그런데 왜 오기에서 내심하다가 ‘이제 주의 은혜로 합니다.’ 하면서 믿는 척했는데 또 오기가 나와요.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지 이번에 안 지키면 벌 받고 지키면 복 받을 거야.’
이렇게 오기가 또 나오는 이유는 오기에서 신앙으로 옮길 때에 그냥 이 몸 그대로 옮겨서 문제에요. 여기에서 반드시 죽고 옮겨야 돼요. 나(옛사람)는 반드시 죽고 새사람으로서 나가야 되는데 새사람은 옛사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새사람의 바탕은 저 앞서 기다리고 있는 주님으로부터 새사람이 부여돼요.
옛사람에서 정신 차려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옛사람은 죽음으로 끝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는 새로운 몸이 새사람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을 한 번 봅시다. 아까 집사님이 복음 알고 난 뒤에 성경을 안 본다는 말을 듣고 내가 속으로 걱정을 해가지고 성경을 안 보는 것하고 성경을 모르는 것하고 구분할 줄로 압니다. 성경은 안 봐도 성경을 알지요.
1~2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사람들이 이 대목 해석을 잘 못해요. 제일 어려운 대목이 뭐냐?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의 뜻을 몰라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죄”는 ‘내가 전에 속해있던 상황, 전에 있던 덩어리 전체’를 죄라고 합니다. 그렇게 이해를 못하고 ‘옛날에 내가 나쁜 짓 했던 데’라고 생각한다면 이 해석은 완전히 엉터리 해석이에요.
전에 살던 동네를 죄의 동네라고 합니다. 전에 살던 동네에서 살아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 버렸어요. 이미 예수 안에서 산 자이기 때문에 저쪽에서는 죽은 자로 간주해 주시는 겁니다. 딱지 뗐다고 하지요.
처녀가 결혼하면 처녀 딱지 뗐다고 하잖아요. 처녀 생활은 없어요. 이미 기혼녀가 된 겁니다. 누구하고? 예수님하고 결혼했으니까 기혼녀가 된 거에요. 결혼했으면 기혼녀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남편이 있는 여자입니다.
그 남편이 있는 여자가 마치 옛날처럼 됐을 경우에는 이걸 가지고 간음한 여인, 에스겔에서는 이 사람을 음녀라고 하고 요한계시록 17장에서도 음녀라고 해요. 더 나아가 버리면 요한계시록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이것으로 스톱하고 로마서 6장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에 대한 설명을 안 들었다고 치고 여러분들이 이해한다면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가 ‘아 옛날에 참 죄 많이 지었어. 술, 담배했어.’ 이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옛날에 내가 살던 동네, green grass of home에 살고 있는데 창 저쪽은 주님의 세계에요. 창은 성경이라고 했고요. 창 저쪽에는 주님이 계시고 창은 유리천장이라고 보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창 저 너머를 상상해도 가짜고 몰라요. 왜냐하면 창 너머에 있기 때문에 몰라요.
우리는 창 너머에서 삐져나오는 것들만 알지 창 너머의 세계는 모릅니다. 신문지가 여기 있는데 이것이 윈도우, 창, 성경입니다. 오묘한 것은 감추어져 있고 나타난 것은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먹을 쥐고 이렇게 밀어버립니다.
그러면 불룩 튀어나오겠지요? 불룩 튀어나온 쪽에 아브라함이 걸려든 거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주님에게 접촉할 때 아브라함은 무슨 세계를 접하고 있느냐 하면은 남들이 도저히 내가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는 세계에 이미 신분이 소속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노는 그라운드에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자리가 바뀐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주변 사람들, 심지어 아내한테 설명을 해줘도 저쪽이 납득이 안 되네. 나는 이해가 되는데 저쪽이 납득이 안 돼요. 설명이 안 돼요.
그러니까 친구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친구는 대화로 형성되는데 만나가지고 입 딱 다물고 있으면 무슨 친구입니까? 나발나발 “그래 맞다, 얘.” 이렇게 되어야 두 시간, 세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인상써가면서 저녁 할 때까지 오래 눌러 앉아 있는데 이게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옛사람으로도 있어 봤기 때문에 친구들 하는 말이 평가가 되지요. 속으로 ‘그래 니 논리는 저렇게 끝나는 거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결국 자식 자랑 나오네.’ 이제는 그들의 수를 알아요. 이야기하는 수를 알고 바둑으로 하면 급수를 알아요.
본의 아니게 상수 정도가 아니고 초월수가 됐어요. 이건 내가 I.Q.가 높아서 (똑똑해서, 좋은 대학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니고 밀어붙이는 것이 있어요. 주먹으로 가위게, 바위게, 보자기게 가위, 바위, 보 하는 식으로 자꾸 밀어붙이는 거에요.
이 초월의 부딪힘과 만남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만) 신약에 오면 노골적으로 이게 바로 “상처”입니다. 내 창자국과 내 못자국. 도마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내미는 상처난 못자국. “너 같은 인간 때문에 이렇게 피를 흘려야 너 같은 인간도 하나님 나라에 올 수 있다.” 이 상처 없는 구원은 없다.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은 뭘 자랑하겠습니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상처가 삽입되어서 이 상처의 효과(예수의 피)로 친구들아, 내가 너희들이 알지도 못한 다른 세계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요?
욥의 세 친구와 욥의 차이가 바로 그거에요. 이것은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찬양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찬양해서 소속권(티켓)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이 내 허가도 없이 내 인생에, 열심히 나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만들고 살고 있었는데 주께서 쳐들어 온 거에요.
내 허락도 없이 내 인생에 막 밀고 들어온 겁니다. 이건 덤프차하고 똑같은 거에요. 식당하고 있는데 덤프차가 “급발진이었습니다.” 하고 밀고 들어온 것처럼 주님의 급발진이 내 인생의 중심부를 완전히 파괴시켜 놓아버렸어요.
그래서 알아요. 우리는 친구가 소중하고 다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특히 식구들이 소중한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그들이 모르는 것도 또 압니다. 곱빼기로 압니다. 양쪽 다 압니다. 감사한 일이에요.
자장면만 있는 세상에 “너 짬뽕 먹어봤어? 니가 짬뽕 맛을 알아?” 그런데 그들은 “니가 먹는 짬뽕은 우리 동네에 없다. 그래서 너는 미쳤어. 어느 교회에 가도 너 같은 소리는 안 하더라. 그러니까 니가 이상한 데에 빠졌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브라함이 이랬는데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목사가 “이겁니다.”라고 설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각자 각자가 가는 길에 여러분본인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매일같이 새롭게 느껴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상처의 깊이는 점점 더 깊이 내려가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상처가 딱지 정도로 머물면 안 돼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십자가 지는 데까지 성령께서 계속해서 이끌어 가실 거에요. ‘아, 아무것도 아닌 나를 이렇게 극진히 대우해주셨구나. 이게 바로 사마리아 강도 만난 사람에게 했던 그 사랑이고, 탕자에게 옷을 입혔던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이거구나. 아가서에서 싫다고 하는 여자를 좇아와가지고 기어이 자기 사람, 자기 신부를 만드는 그 솔로몬 왕의 집요함이 바로 이 집요함이구나.’
이것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하나님이 내뿜는 질투의 능력이에요. 얼마나 우리만 사랑했기에 ‘나는 네가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원치 않아.’라고 하겠어요? 이것이 신앙에서는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일에 감사로 이어지는 거에요.
저기 멀리 타국에 계신 분이 서원기도에 대한 질문을 우리교회에 했지요. 거기에 제가 답변을 해놓았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사시면 됩니다. 맹세하지 말고 주는 대로 감지덕지 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을 요령부리지 말고 꼼수부리지 말고 막 살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왜? 주께서 막 살도록 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 산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옛사람 쪽에서 막 사는 것은 윤리, 도덕인 반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라에 가기 때문에 거기에서 제시하는 막 사는 것과 제대로 사는 기준은 그때에 가서 새로 주어져야 되지 내가 판정을 내리면 안 돼요.
‘나에게 지금 주의 말씀이 내렸다.’라고 판정내리는 것은 오버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오기에서 신앙이 되었으면 신앙이 나와야지, 신앙이 되고 난 뒤에 신앙적 오기가 또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죠.
처음에도 갈 바를 알지 못했고 내일 되어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모레 되어도, 내년이 되어도 계속해서 갈 바를 알지 못해야 돼요. 주께서 매일 주시는 숙제가 무엇이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해요.
사람이 미리 예상을 할 것 같으면 주식 부자가 누가 안 될 거에요? 아무도 주식해서 미리 알아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식은 그냥 던져놓아라 하는 거에요. 주식, 펀드만 던져놓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도 주님한테 던져놓아 버리세요.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이 관리하지 말고 그냥 던져놓으세요. 119 소방대원이 와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때에 힘을 뺄 때 쉽게 건집니다. 본인이 살려고 악을 쓰게 되면 건지는 사람이 더 힘들어 지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해서 감으로써 오기와 신앙의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신앙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는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미리 아브라함의 등 뒤에서 차고 들어가서 주먹으로 팍 쑤셔버리면 종이가 불룩 튀어 나오지요.
밀고 들어온 내 영역은 주님이 그만큼 밀고 들어왔기 때문에 내 옛사람이 그 부분만큼은 양보해야되고 포기를 해야 되는 겁니다. 뭔가 밀고 들어온 그 면적만큼 우리는 많은 것을 버릴 수밖에 없어요.
친구 만나는 것도 조금 줄이게 되고 술 먹는 것도 소주 한 병 먹다가 반 병으로 줄이게 되고 화를 내는 것도 화를 조금 덜 내게 되고.. 인생에 대해서 양보, 양보가 계속 이어집니다. 전에는 계속 막 따지고 들었는데 이제는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지옥에서.’라고 하며 그냥 양보하게 됩니다.
귀순용사가 탈북해서 한국에 왔다면 그가 한평생 해야 될 일은 북한 비난하는 일이에요. 그렇지요? 정말 옛사람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내가 지니고 있는 그 성질이 전에 내가 속했던 데에서 다 스며들어 온 거거든요.
귤이 딱딱해보이지만 까보면 안에는 알알이 자기들 편밖에 없잖아요. 전부다 한 통속이에요. 그 한 통속 중에 하나가 나였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을 비난한다는 것은 그들이 잘났다 내가 못났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 속에 남아있는 나의 옛사람을 내가 날마다 비난하는 거에요.
이게 새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가 그런 성질을 갖고 있었습니다.’라고 자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출-애굽이죠.(저는 일부러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을 하나 그었습니다.) 이미 탈출한 사람만 애굽에 대해서 언급할 자격이 돼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언급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이미 탈출이 된 사람만 해당이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은 백날 해봐야 구원이 안 돼요.
구원이라는 것은 이미 탈출이 된 사람이 지난 날을 설명하면서 이미 구원이 되었음을 증명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내용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회상하는 거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섭지요? 그런데 그것을 느긋하게 long long ago, 옛날 옛적에 그런 기분으로 볼 수 있어야 돼요.
앞으로 될 일조차도 회상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왜? 주께서 그렇게 해나가실 거니까요. 우리는 누구하고 한 패 먹었어요? 아브라함처럼 주님과 한 패 먹었기 때문에 ‘그래, 내가 속해있던 세상이 저런 세상이었어.’라고 느긋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귤 까먹어 가면서 요한계시록을 공부합시다.
바짝 쫄아가지고 이건 해서는 안 되고 666이 어떻고 괴물이 나오고 무서워. 하지 마시고 지난 밤 꿈 이야기하듯이 어젯 밤 꿈 속에서 난 누굴 만났어 그렇게 하듯이..
그렇게 해서 내가 무언가 주의해야 되고 내가 뭘 안 함으로써 구원 받겠다는 것, 이것이 오기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뭔가 어드밴티지(마일리지)를 쌓을 수 있다는 이것이 신앙의 세계가 아니고 오기의 세계,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이런 구원 받지 못한 공통적 성질이 우리 속에 찌꺼기처럼 계속 올라오고 있어요. 그냥 성경을 볼 때, 말씀 들을 때는 안 그런 것 같은데 동창회에 나가서 누가 싸운다거나 시장에 가서 콩나물을 살 때는 옛사람이 또 튀어나와 버려요.
분명히 우리는 “주의 것”인데 “주의 것”이 자꾸 “나의 것”으로 전환되어 버려요. 내 자식, 내 남편, 내 가정은 철벽입니다. 하나의 성입니다. 이것 넘어오면 안 돼요. 이것을 사적(사유)공간이라고 합니다. 사유공간이 뭐냐하면 절대적 공간이에요.
마태복음에 보면 이것을 깨버려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지 마라. 가장 깊숙한, 이곳 만큼은 제발... 하는 그곳을 주께서 전기톱을 가지고 두두두둑 해가지고 벌목하듯이 쫙쫙 잘라버립니다.
내가 온 것은 화평을 주려함이 아니고 불화를 낳기 위함이다. 그 불화를 낳는 중심지점이 가정입니다. 어제 수요일날 “여자”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었습니다. 설교들으시는 분은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여자는 판을 생각하는데 남자는 자기를 일단 중심에 놓고 여자를 보조인(부속)으로 봅니다. 남자를 중심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배필자로 보고 여자는 남자의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에 뼈이기 때문에 남자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여자라는 이름으로 심지로 새겨버렸다는 것이 여자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난 뒤에는 여자의 본래 기능은 없어지고 남자 같은 여자로 다 전환되고 말았어요. 남자가 자기가 되어야 될 이상형이 되어 버려서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의 것으로만 여자가 밥 빌어먹고 살라는 것이 보편화 된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어쨌든 힘이 있는 곳에 붙어야 목숨이 약간은 더 연장된다는 그런 인식들이 있는 거에요. 옛날에 농토가 좁은 집에는 여자가 대주주한테 시집가야 돼요. 그래야 밥이나 먹는다고요. 애조절도 안 되었잖아요.
그래서 애는 생기는 대로 낳아버리고 그 애 중에 여자가 있으면 시집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팔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장 시어머니가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해가지고 그집 사람을 다 만들어 버리고 친정과 화장실은 멀리한다고 해가지고 시집 왔으면 못 가게 만들지요.
그래서 노래도 있잖아요. ‘고추, 단추 맵다해도 시어머니같이 매우꺼나’ 그 시집살이 하는 것의 뜻은 이제 다시 친정은 잊어버려라 하는 거에요. 결국은 노동력 확보에요. 왜냐하면 옛날에 농사를 지을 때는 대규모로 했거든요. 모내기할 때도 대규모로 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지금 세대 차이가 나는 이유가 농경 시대의 인식을 가진 사람에게 산업 시대, 수출 물품에 맞춰서 잔업을 해야 되는 시대가 안 맞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윈도우를 다시 보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노는 가락이 시대에 따라서 세대차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안 되지요. 이 말은 인간이 갖고 있는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가 주입시킨 거에요. 그래서 세대차가 나는 거에요. 시어머니는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거에요. 자기 젊을 때에 맞는 이야기를 이미 늙어버려서 경제 구조가 다른데 똑같이 적용시키려고 하는가 말이지요. 산업시대하고 농경시대하고 구조가 다르거든요.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하면 남의 여자가 되었으면 자식을 낳아야 되는데 반 이상은 자식을 안 낳겠다는 거에요. 우리교회의 청년한테 물었어요. “누구하고 결혼할 건데?” “저 결혼 안 할 건데요.” 저는 깜짝 놀라지도 않았어요. ‘아직 덜 답답하구나.’ 이렇게 생각했지요.
이런 모든 것을 총괄해서 죄라고 하고 그 죄에 대해서 죽은 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합했다는 뜻)를 받은 자는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에 같이 산자로서 규정을 받아요. 그래서 죽어가는 게 죽어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죽어가는 것이 사라지는 거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모습이 우리가 늙어가는 모습이에요. only(오직) 성도에게만 그래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쉬러 가는 거에요. 아이고 이제 허리 조금 펴볼까? 이게 죽는 거에요. 아이고 짜부둥해. 웬 비가 오려나? 이게 장례식이에요. 안방에 베개하고 누워볼까? 자는 잠에 그냥 간다. 이거는 푹 주무시는 겁니다. 이제는.
깨어날 때는 두 번 다시 이런 썩어가는 몸을 입지 않아요.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의 영광을 입고 기지개 펴고 ‘아, 참 잘 잤다.’라고 할 날이 곧 옵니다. 베리칩 이런 거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온천지에 문신을 해도 괜찮아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방식에서 우리가 아는 구원 방식을 뺍시다. 요렇게 대비하고 요런 식으로 피해버리면 구원된다는 이것이 이단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을 이제는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데?”라고 하면 “내가 설명해도 너는 몰라.” “부탁이다. 복음 이야기해줘.”라고 사정하면 그때는 못 이기는 척하고 한 소리하세요. “주님의 상처가, 주님이 흘리신 그 피가 우리 속에 삽입되어서 그것이 우리의 중심이 되었다.” “왜 그런데?”하면, “그 피 속에 새언약의 완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새언약의 완성은 약효과의 완성이라고 보면 됩니다. 언약의 완성이라는 것은 더 이상의 추가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죄 씻음의 알약의 효력이 우리 중심에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는 사도바울처럼 상처라는 주님의 모습으로 우리 속에 박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런 큰소리를 칠 이유가 있어요.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큰소리 치는 거에요. 이것이 사도바울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문제고 또한 바로 아브라함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귀순용사의 특징은 옛날 있었던 자기 세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발설하는 것이 자기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누구를 지목해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지목하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못됐습니다.’라고 하는 주님에 대한 고백이 내 죄를 아는 그것이, 날마다 죄인 되는 그것이 새사람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죄를 알 때, 죄를 만들어야 됩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를 만들 필요가 없어요. “갈 바를 알지 못”하잖아요. 안 간다는 말이 아니고 계속 윈도우 상에 돌아다녀요. 그러면 누굴 만나겠습니까? 옛날에 내가 좋다고 했던 시츄에이션(상황들)을 만나겠지요?
그러면서 옛날 버릇이 있어가지고 ‘그래 내가 그걸 좋아했었어.’ 하고 다시 그걸 또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거에요. 예수 믿고 술 끊었다고 해봐야 고급술을 아직 못 만나서 그런 거에요. 아죽 고급술, 먹어도 머리 안 아픈 고급술을 만나면 한 잔만 땡기고요. 하게 되어 있어요.
흔히 대중가수들이 예수 믿고 고 하용조 목사 생전에 만나가지고 온누리교회에 가가지고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다고 간증해서 수입을 얻고 밤무대해봤자 5년, 10년만 지나면 난 두 번 다시 가스펠송만 부르고 찬송가만 부르고 대중가요 안 부른다고 선언했던 그들이 역시 돈은 대중가요를 불러야돼. 라고 나옵니다. 윤항기 같은 사람들..
대중가요를 불러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거에요. 그러면 대중가요를 안 부른다고 해놓고 왜 지금은 부릅니까? 하면 변명할 것이 많지요. ‘대중가요도 건전한 것이 많습니다. 건전한 대중가요도 안 되면, 이미 구원 받았기에 자유롭게 안 건전한 대중가요도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또 핑계를 대지요.
그러니까 어디에 가봤자 돈 앞에서는 다시 옛날 본색이 유감없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지금 가족이 여유가 있을 때는 괜찮지만 가족 간에 아들이 만약에 빚 냈는데 사업 망했다고 하면 그때는 눈에 뵈는 게 없지요.아들이 결혼했어도 남편 몰래 집 담보해가지고 갖다 주고 ‘차라리 내가 굶어죽는 게 낫지 니가 아픈 것은 내가 못 참겠다.’ 이것이 어미(여자)의 심정 아닙니까?
그처럼 이 세상에 모든 우리의 죄에 대한 그것은 주께서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가는 곳마다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가 이런 죄 속에서 그동안 이게 전부인 줄 알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 날이면 날마다 그걸 깨닫게 되는데 그렇게 될 때에 십자가의 은혜가 더욱더 고마워지지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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