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151223
선과 악 151223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선과 악(창세기 3:4-6)
이근호
15-12-23 21:17
선과 악
2015년 12월 23일 본문 말씀: 창세기 3:4-6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뱀과 여자의 만남에서 여자는 갑자기 자신의 인식이 바뀌게 됩니다. 선악과 나무를 보는 순간, 그녀는 “따먹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그 현장에 들어오는 나무과실은 탐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안다는 악마의 말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 부부에게 주신 말씀에 대해서 인간쪽에서는 결코 선과 악에 대해서 구분할 줄 알아서는 아니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야 된다는 취지로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선과 악의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미리 언질을 주시지 않으신 취지에 부합됩니다.
비록 나무 명칭은 선악과 나무이지만 실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해서 인간을 배제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아시면 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의 실재화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뱀은 하나님께서 언질하지 않으셨던 선과 악에 대해서 인간에게 언급합니다.
곧 악의 등장이요 악의 시작입니다. 선은 인간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놓으신 선과 악은 필히 ‘죽음’을 중심을 두고 나타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뱀이 말한 선과 악은 ‘죽지 아니함’을 전제로 하고서 계산되는 선과 악입니다. 이는 진정한 선과 악에 대해서 인간들은 다른 기준, 다른 방식으로 관련되게 합니다.
즉 인간마저 자기 수하에서 움직이게 하겠다는 것이 뱀의 생각입니다. 그 다른 방식의 선과 악의 시작은 욕망으로부터입니다. 선악과 과실이 욕심을 자극하는 대상물로 보입니다. 이 과학만능시대에 왜 인간은 약물로 성도가 될 수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도란 필히 예수님의 죽음 사건에 합류되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미 욕망의 막으로 둘러싸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판단과 선택의 현장에서 욕망이 먼저 설칩니다. 욕망의 지시를 받고 욕망의 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모든 것과 관련해서 욕망이 발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이 만족스러워서 마음이 만족하면 선으로 이해하고, 욕망이 충족되지 아니하면 악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미 자신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는데 실은 자아가 아니라 욕망입니다. 욕망이 쾌락을 생산하면 선이요, 쾌락을 낳지 아니하면 악으로 판단하는 식으로 인간은 달라져 있습니다. 특히 ‘먹는다’는 가장 기본적 욕구까지 욕망이 작용해서 그 먹는 행위의 가치까지 관연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욕망이 이끄는 방향은 보다 더 깊고 풍부한 쾌락과 즐거움이 기대되는 곳입니다. 뱀은 이미 인간에게 그 목표점을 제시했습니다. 선악과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신이 된다고 말입니다. 즉 절대신이 주는 쾌락을 향해 욕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욕망의 대상을 교체합니다.
이것이 희망 찾기입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을 끌어가는 유일한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비록 그동안 자신의 뜻이 쉴새없이 좌절되어도 희망만 보인다면 살 힘이 솟아오릅니다. 희망은 곧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말합니다. 곧 즐거움의 이 기다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동안 실패와 고생을 충분하게 보상해줄 수 있는 쾌락이 저기 있는 한, 인간은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그리고 악착같이 살아남아 그 좋은날을 보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이런 식으로 정신무장시키는 작자는 바로 악마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도서 2:14에 보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곧 성령에 의한 예수님이 벌리시는 일을 말합니다.
즉 이미 ‘죽음에 넘겨진 자’로서 활용되는 예수님의 선한 일이지 본인의 독자적인 선한 일이 아닙니다. 성도가 성도다운 것은 이미 ‘죽음에 넘겨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선악과 나무에 담긴 선과 악의 실제성을 뱀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실시하신다는 점입니다.
죽음을 구체화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과 악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죽음 속에서 욕망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그 인간의 죽음을 당연히 포함합니다. 욕망의 죽음이란 욕망의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갔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의 욕망은 조금도 한풀 꺾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 품에 안겨 있는 낙원에 가 있는 나사로에게 물 심부름을 시킵니다. 손가락에 물 찍어 자기에게로 오라는 겁니다. 물이 너무 먹고 싶고 목이 너무 마르다는 겁니다. 이미 욕망의 덩어리로 변해버린 육신을 안고 그대로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되지 않고 독자적인 삶을 붙들고 있으면서 그 육신을 천국까지 올려보내기 위해 온갖 시도들을 다 해봤자 모두 마귀짓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고, 십자가 피를 믿고, 복음과 성령과 성경을 믿는다 해봤자 자신의 욕망이 먼저 말씀을 맞으려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받아 누릴 쾌감과 자기 즐거움을 노리고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위 구원욕구가 바로 이런 겁니다. 자신이 자신을 살리는 방안을 교회 다니면서 줄곧 강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선과 악의 진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기 위한 성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직접 만들어 내십니다.
즉 성도의 구원을 성도 개인에게 맡기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인생에 대해서 성도가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거짓말한 야곱을 천국에 넣으시고, 거짓말의 피해자가 된형 에서를 지옥에 넣기 위한 사람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제작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특징은 매일의 삶이 자기가 이끄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작품으로 생성되고 있음을 인지한다는데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변화가 주님의 주되심을 증명하기 위한 주님의 솜씨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2-24 07:46
18강-창 3장 4-6(선과 악)151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장 4-6절입니다. 구약성경 3페이지입니다.
창 3:4-6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지금 이 대목에서 마귀, 뱀이 여자, 곧 사람과 대화하면서 주제로 삼은 것이 뭐냐 하면, 선악과에 관한 주제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면 신처럼 된다.”라고 뱀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뱀의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느냐?”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선과 악에 대해서 네가 무지해서야 되겠는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요. 선악과를 두고 뱀이 여자에게 다가오는데 선과 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무런 언질을 준 적이 없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이라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준 바 없습니다. 아예 따먹지 말라고 했지, 선은 이것이고 악은 이것이니 조심하라든지 사전에 어떤 방침 같은 것을 주시지를 않았어요.
따라서 뱀과 여자의 만남은 사람이 처음으로 듣게 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놀랍게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뱀으로부터 온 겁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네가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머리를 써 봅시다. 악이 뭐냐? 선과 악이라고 할 때 악을 알면 선을 알고 선을 알면 악도 알겠지요. 선 아닌 것이 악이고 악 아닌 것이 선이니까요. 그러면 악이 뭐냐? 악은 선과 악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 악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귀가 인간을 후리고 유혹하는 첫 번째 멘트가 그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네가 알 수 있다. 알아야 된다.” 이것이 뱀이 제시한 선과 악에서 뱀의 선의 기준이 그겁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너에게 선이라는 겁니다. 그 전에 하나님께서 선과 악에 대해서 아무런 언질을 준 적이 없어요. 악만 나오기를 바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선이라는 것은 주제넘고 분수에 넘치는 이야기입니다. 선에 대해서 인간이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미 인간은 악의 속에 박혀 있고, 악 속에 잠겨 있고, 악 속에 갇혀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하는 말을 “네가 선과 악을 알면 된다. 그것이 선이다.”라고 하는 말을 21세기의 현대에, 오늘날 교회에 응용을 시켜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서 바르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라는 이것이 마귀의 유혹입니다. 디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그것은 성령이 임할 때 경우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지는 거지요. 성령이 임할 때에요.
그러면 성령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는 반드시 뭘 앞장세워서 들이닥치느냐 하면, 죽음을 앞장세워서 들이닥칩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 쪽에서 오신……, 하나님 쪽에서 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위에서 오신 분이거든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선한 분으로 오셔서 그 선한 분이 이 땅에서 죽음사건을 일으키고 그 죽음사건을 모아서 우리에게 쳐들어올 때 비로소 그것이 선이 되는 거지요.
이걸 정리하게 되면 선은 어디에 있느냐? 선은 내가 너를 죽이고자 하는 그것이 선이라는 겁니다. 내가 너를 죽이고자 하는 것.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그 말씀이 그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선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진정 주의 뜻을 성령 받은 사람이 안다면 “하나님이여, 저를 죽여주옵소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에스더의 말처럼 “저를 죽여주옵소서. 저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 맞잖아요.”라고 되물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돼요.
이런 기준으로 볼 때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나오기는 하는데 과연 교회가 천국이나 영생을 언급하는 곳인가, 아니면 오히려 천국과 영생과 예수님을 가리는 곳인가를 생각해 봐야 돼요. 제가 수도 없이 이야기했습니다만 천국은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 자체가 바뀌어야 돼요. 사람 자체가 바뀌게 되면 뭐가 바뀌는가 하면, 내가 누군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그런 입장과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것은 판단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나는 이런 일을 해서 천국에 가야지.’라고 판단하는 것, 그 판단자체도 문제가 되는 겁니다.
현재 내가 살아 있는데 살아 있는 내가 어떤 판단을 해서 그 판단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살아 있지만 앞으로 계속 천국까지 살아 있겠다고 이걸 연장하고 이어보는 것, 그것은 완전히 마귀의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의 오늘 본문을 주신 것은 예수 십자가 죽음과 관련지으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나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타나야 돼요.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 요령을 부려서 ‘이렇게 한다면 우리가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난다면 이 성경구절은 전혀 마귀가 해석하고 마귀가 활용하는 성경구절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아담이 이렇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두 번 다시 나쁜 짓 하지 말자.”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마귀의 해석이에요. 아담하고 우리하고 차이점이 뭔데요? 우리는 중립적인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잘못된 그 속에 갇혀 있는 거예요. 늪 속에 빠진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려고 해도 이미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선과 악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악을 물리치고 선으로 나가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 모습 자체가 뭐냐 하면, “그러니까 네가 마귀에 흠뻑 빠졌잖아.” 하는 그것만 증명될 뿐이에요.
선하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테레사 수녀가 어떠니, 주기철 목사니 어떠니, 선교지에서 피살된 순교자의 모습이 어떠니, 백날 그런 이야기를 해도 그런 쪽을 선호하고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그 자체가 마귀적 발상에 불과한 겁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어떠니, 청교도가 어떠니……. 조나단 에드워드 안 죽었습니까? 부처 죽었거든요. 모든 사람은 죽는데 죄 값으로 죽어요. 그 죄가 뭐냐? 자기 살아온 한 평생이 죄잖아요. 죄 짓는 것이 그렇게 부러운가요? 죄짓는 방식이 유별나면 천국 보내줍니까? 번개탄 피워서 자살하나 물에 빠져 자살하나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구세군냄비에 돈 넣고 지옥가나 안 넣고 지옥가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저는 이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딱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약물 먹는다고 성도되는가? 약물처방 한다고 성도가 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여러 가지 약물, 혹은 해독주스 마신다고 해서 성도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왜 성도가 되는데 있어서 인간의 어떤 방법도 일체 허용될 수가 없는가? 그 이유는 바로 이 죽음문제를 인간은 넘어설 수가 없어요. 죽는 문제를. 그래서 죽는 문제를 넘어설 수 없으면 인간은 절망에 빠져야 되는데 항상 희희낙락 웃고 있는 이유는 마귀의 꾐에 푹 빠져서 그래요.
마귀는 죽는 문제를 우회하도록, 죽는 문제를 없애도록 했습니다. 창세기 3장 4절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여기 뱀에 괄호를 치는 거예요. 아무개가 여자에게, ‘여자에게’라고 하지 말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른 말로는 “지옥가지 않는다.” 그리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이 하는 말이 “네가 선과 악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있지?” “인식하지.”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좋은지 알지?” “알지.” “그러면 하나님이네? 그러면 네 영혼은 불멸해.”
이게 바로 불교잖아요. 이게 바로 불교입니다. 죽어도 다시 해체되어서 새로운 생이 또 나오니까. 기독교는 이걸 이렇게 변개했습니다. “죽어도 영혼은 영원하니까 영혼문제만 해결되면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둘 다 마귀가 쳐놓은 그 늪에서 나오는 생산물입니다. 마귀가 만든 생산물이에요. 그걸 제가 문화라고 했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여기까지 읽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이걸 “당신이 그 나무를 봤음.” 그 다음에 괄호를 열어놓고 여러분 보고 써 넣으라고 한다면 그 뒤에 “내가 그 나무를 본 즉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이 딱 나와야 되지요. 그게 나오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무엇이 날라 가버렸습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 무엇이 날라갔어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가 어디로 갔습니까? 날라 가버렸어요. 오늘날 우리의 하루 일상생활 같습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아침에 눈 떠서 ‘오늘 무엇이 즐거울까?’ 그것만 생각되지 십자가는 날라 가버렸어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같은 나무인데 그 나무를 두고 하나님은 “이 나무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한 그 나무는 여자가 뱀을 만나고 난 즉시 그 나무를 보았을 때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안목은 다 날라 가버리고 그 나무가 달리 보인 거예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선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고 이야기했지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일체 사전에 어떤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선과 악에 대해서 ‘선과 악이 뭐 길래 그걸 따먹지 말라고 하시지? 선과 악에 대해서 좀 알면 어때? 알면 왜 안 되는데?’ 궁금할 수도 있는 문제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통해서 선과 악을 생산합니다. 생산하는 방법은 뱀과 인간이 선악과 따먹는 그 순간을 기다린 겁니다. 그게 악입니다.
선악과는 죽지 않았어요. 살아 있어요. “따먹어라. 따먹으면 그게 악”이 되는 거예요. 악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어떤 형식이냐 하면, 선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미 뱀과 인간이 합작이 되었으니까. 뭐가 선인가? 내 탐심, 내 욕망을 충족하면 선이 되고 내 욕망에 미흡하면 악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자아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살아 있는 겁니다. 욕망이 살아 있어줘야 그 욕망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가 있는 겁니다.
프로이트라는 사람은 그 욕망을 두고 ‘리비도’라고 했지요. 알 수 없는, 아무리 해도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것, 하지만 그 누구도 각자 갖고 있는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현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사실은, 인간이 의식이라고 하면서 뭔가 절제하면서 생각하면서 판단하는 이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그 배후에는 욕망이 있어요. 그 욕망에 의해서 인간은 결단내리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 욕망은 무엇에 조종 받는가 하면, 쾌락, 즐거움에 조종을 받게 되어 있어요. 향락, 즐거움에.
무엇이 즐거운가? 오늘 본문에 보니 “먹음직도 하고” 저거 내가 따먹으면 내가 즐겁겠다는 그것, 그 나무를 볼 때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말씀은 벌써 날라 가버렸고, 그것은 이미 없어졌고 그 나무라는 하나의 대상을 볼 때 그 나무 때문에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욕망이 자극을 받아서 일어나는 겁니다. 따먹었으면 좋겠다, 이걸 가지고 ‘먹음직하다’고 해요.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탐욕의 대상이 되어버리면 뭐가 바뀌는가 하면, 내가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고 욕망이 나를 부리는 겁니다. 종 부리듯이 부리고 다시는 그런 형편에 놓여 있게 되는 겁니다.
이게 악이고 이 욕망 안에서 원래 준비된 하나님의 작업이 드디어 서서히 시작이 되는 겁니다. 지옥가도, 만약에 지옥에 가도 욕망이 없다면 전혀 고통스럽지가 않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있잖아요. 지옥에 가면 가만있는 것이 아니에요. 물이 먹고 싶다는 거예요. 물이 먹음직 하다는 겁니다. 나사로 시켜서 손가락으로 물 찍어서 직접 오든지, 아니면 택배로 운반해 주든지 야식 배달하듯이 물 배달해달라는 겁니다. 허기진 거지요.
이것은 부자가 평소에 자기 자신이 욕망을 갖고 있다고 착각을 해서 그런 겁니다. 자기자신이 욕망을 가진 것이 아니고 욕망의 산물이 본인이 되었어요. 이 욕망은 요한계시록에서는 마귀의 욕망입니다. 악마의 욕망이에요. 여자가 뱀과 만나고 난 뒤에 이제는 더 이상 여자고 없고 아담도 없고 다만 악마의 하수인, 악마의 종이 될 뿐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걸 죄를 왕으로 삼아야 될, 죄의 지배를 받는, 로마서 5장에서 죄의 왕 노릇, 죄가 왕 노릇 함을 보여주는 시연, 따라다니는 종으로서 죄를 보여주는 도구로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할 때, 우리가 지금 성경을 보면서도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수긍이 안 되고 납득이 안 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지금껏 즐겁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늘 우리를 쑤시고 자극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아플 때나, 혹은 사고 났을 경우에나, 나이가 많아져서 시름시름하고 숨이 가빠질 그 때나 죽음을 생각하지 한창 20대가 죽음을 잘 생각 안 해요.
자기일이 꼬인다든지 잘 안 풀린다든지 할 그 때는 ‘죽어버릴까?’ 하는데 그 죽음도 ……, 자살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살이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실망으로 인하여 자기에 대해서 더욱 더 사랑하기에 자신의 욕망을 자기에게 가한 그것이 죽음”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보게 되면 강물에 뛰어들기 전부터 이미 인간은 늘 자살 대기상태에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욕망이 자기 뜻대로 안 될 때는 수시로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지요. 그럼 어떻게 하는가?
인간이 자기 뜻대로 안 될 때는 다 죽는가? 천만의 말씀, 대상을 바꿔요. 이거 안 되면, 이것 가지고 기쁨을 얻고자 했다가 기쁨이 안생기면 다른 욕망의 대상으로 자꾸 바꾸는 겁니다. 직업 바꾸듯이.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욕망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인간을 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징검다리처럼 이거 해보다가 안 되면 저거 해보다가, 저거 해보다가 안 되면 이거 해보다가, 그렇게 한 평생 다 보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퉁탕퉁탕, 뛰어가는 거예요. 그 때 그 때 즐거우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것을 늘 피해 다니듯이 죽음을 멀찌감치 밀어놓는 거예요. 밀어놓고 죽음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그 가운데 즐거운 것을 기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의 보람, 사람 사는 보람은 뭐냐? 딱 한가지에요. 소망입니다. 소망만 있다면 사람은 자살 안 해요. 지금 형편이 어렵고 고생스럽다가 할지라도 앞으로 내가 잘된다는 희망만 있다면 사람은 견뎌냅니다. 도파민이 팍팍 나와서 견뎌내게 되어 있어요. 엔돌핀 막 돌고. 그러나 희망이 없어버리면 그 때는 좌절하지요. 좌절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좌절한 그것을 희망의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꿈으로 말미암아 버티고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사랑하는 남편이 죽었다. 아내가 곧 쓰러질 것 같지만 자식을 보면서 ‘나는 너 보고 산다.’고 또 자식보고 이겨냅니다. 그러니 세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것이 뭐냐? 내 욕망에 만족하는 한에서 마귀가 하는 말이 늘 상 현실이고, 실재적이고, 이게 옳다는 이야기에요. 이게 납득이 되고 체험이 돼요. 이것이 제일 위험하고 무서운 이야기지요. 마귀가 하는 이야기가 진짜 실재적이고, 경험적이고, 실존적이고, 현실적이고, 딱 맞는 말이에요. 성경의 이야기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이론적이고, 전혀 가슴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고. 제가 언젠가 누가 그랬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성경 안 본다고. 봐야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고요. 봐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세상 이야기는 구라를 풀어도 몇 시간 씩,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어도 밤이 다 새는 줄도 몰라요. 이번 수련회 가서 밤새도록 수다를 떨거지요. 왜 그런가 하면, 본인이 이미 신이기에 신은 남한테 잔소리 듣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간섭 받는 것을. 욕망이 나의 신이기 때문에 욕망이 ‘이렇게 하면 너는 만족스럽다. 그러면 그 결과로 나는 즐겁다. 즉 욕망대로 하면 즐겁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욕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 그게 최고의 복음이에요.
인간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복음이고 마귀 속에 갇혀 있는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현실적이고도 실제로 우리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누가 나를 위로해 줍니까? 바로 여러분! 누가 당신을 위로 해줘요? 바로 여러분!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그러니까 6절을 다시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그 나무를 봤습니다. 본즉 “선악과를 다시 보자. 아, 안 돼. 저거 따먹으면 안 돼. 하나님께 저 나무를 두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어. 절대 안 돼.”라는 것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보는 순간 이미 내가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의 욕망이 나의 모든 판단의 원천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보이게 된 겁니다. 계속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건너갈 수 없어요. 건너가고자 애쓰면 애 쓸수록 자신의 욕망이 우리보다 앞장서 우리 기쁜 대로, 우리 즐거운 대로, 우리 마음에 흡족한 쪽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무엇과는 전혀 관계없는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아픔, 눈물, 성령의 탄식,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내가 기도해서 은혜 받으면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쾌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 종교, 이것은 우리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또 하나의 문화적 방식이 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의 죽음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문제는 인간 쪽에서는 해결되지 않아요. 죽음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도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욕망 앞에 어쩔 수 없는데 이 말씀 앞에서 그렇다면 목사님이 내린 결론이 뭡니까? 이렇게 우리는 만들어져 가면서, 악으로 만들어져 가면서 드디어 숨겨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겁니다.
뱀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해서 “네가 신이 된다.”고 했거든요. 그러나 성경은 뭐냐? 예수님이 주가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따로 만들어요. 내 인생은 내가 가꾸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분이 계셔서, 주님이죠, 그 어떤 분이 나를,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한 조치로서 우리를 늘 만들어가요. 내가 어떤 목표가 있고 소망이 있어서 나와 그 소망과의 간격을 줄이면서 내가 그 소망대로 이루어져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뭐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한순간도 주님이 우리를 놓치지 않고 주께서 원하는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겁니다.
선에 속한 인간은 선한 인간으로 야곱처럼 만들어내시고 또 악에 속한 사람은 악으로 만들어내십니다. 에서처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에서가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아무 나쁜 짓도 안했어요. 오히려 거짓말을 한 쪽은 야곱입니다. 야곱이 거짓말을 했지 에서는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자기성질대로 그냥 사냥을 했을 뿐이지요. 야곱은 자기성질대로 안했습니까? 야곱도 자기 성질대로 했어요. 야곱의 성질은 집에 조용히 있는 것이고 에서의 성질은 밖에 나가서 사냥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 어쩔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성질, 욕망, 그것은 따로따로기 때문에 본인의 잘잘못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친히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어떤 잘못도, 어떤 책임도 본인이 본인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오랜만에 복음 또 전했습니다.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 된 것을 본인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나한테 묻는 그것은 바로 마귀가 노렸던 거예요. “네가 그래서 천당 가겠는가? 지옥가지. 빨리 예수 믿어. 십자기 피 믿어야 천당 가지.” 이게 마귀 짓이에요. 그것은 내가 나를 만드는 방법인데 내가 천국 가는 나를 만들어도 내 앞에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이 먼저 있기 때문에 천국 가는 사람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갔다고 아주 기분 좋은, 내 욕망을 만족시키는 인간을 항상 추구하기 마련이에요.
“천국 갔다고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런 거예요. 많은 사람이 저에게 질문하는 것이 그거예요. “이제 천국 갔으니 무슨 짓을 해도 되지 않습니까?” 하는 거예요. 천국 갔으니 이제 기분 좋은 모양이지요? 자기 욕망에 대한 만족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만든 것은 욕망이 그렇게 만들었거든요. 본인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욕망이 그렇게 한 거예요. 우리의 욕망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자기 즐거움에 탐닉하도록 하는 겁니다. 탐닉하게 되면 십자가 죽음, 주님의 아픔과 고난과 희생과 쓴잔, 이런 것들이 안보이게 되어 있어요.
“나는 죽으면 이제 구원받는다. 고맙습니다.” 하고 가버려요. 주님의 희생과 고통, 이런 것은 전혀 못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내가 죽고 나서도 더 살고 싶은 나의 욕망이 복음을 가려버린 겁니다. 그런 구원의 욕망을 노린 것이 신천지, 구원 파, 청교도, 모든 2천년 기독교신학이 “당신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지심으로 죄를 용서받으시면 이제는 구원받아 천국 갑니다.” 백날 주의 말씀 이야기해봤자 내 욕망이 앞장서서 “그러면 나는 잘되겠지요?” 그걸로 결론 나버리는데요?
결론은 자기가 잘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기가 절대 신이 되는 겁니다. 마귀가 마지막 노리는 것이 나의 절대신,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기독교버전으로 다 바꾸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 네가 신처럼 되리라.” 그런 이야기 많이 듣고 있어요. 특히 워치만니, 위트니스쪽에서 많이 듣고 있어요. “이제 성도는 신이다.” 그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는지요. 신이 못돼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신이 되겠다는 제안은 마귀 쪽에서 한 제안이에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에 대해서는 어떤 언질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몰라야 돼요. 그런데 뱀을 보내게 해서 인간과 만나게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과 뱀,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선악이 갖고 있는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한 기준에 의해서 악이 무엇이고 선이 무엇인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여자가 선악과를 본즉, 본즉 “와! 맛있게 생겼다.” 이게 말이……, 이게 당연하게 보입니까?
선생님께서 “숙제 안 한 사람 다 나와.” 해서 회초리로 내리치니까 여학생이 보고 있다가 “선생님의 회초리를 든 그 손이 참 남성답네요.” 하는 이런 엉뚱한 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단순히 욕망이 앞선 거예요. 무슨 취지로 때리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딱 본즉, “아, 때리는 선생님 너무 멋있다. 강동원 닮았어.” 이러고 있는 거예요. “김수현이 닮았어요.” 이런 식으로 갑자기 딴 소리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미 욕망이 우리를 앞장서 있는 이상은 우리가 어떤 판단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일부러 만들어냅니다. 주님 쪽에서 알아서 만들어내요. 주님은 선악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네가 아는 선은 악이 되고 주님이 아시는 선만이 선이 되거든요. 그런데 어떤 주님만이 아시는 그 선이 되려면 죽음의 십자가를 경유를 해야 되고 그것을 통과해야 되는데 모든 사람은 욕망이 먼저 앞서기 때문에, 즐거움과 쾌감이 앞서기 때문에, 심지어 자살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의 쾌감이 되는 거예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제가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습니다.” 한 자체가 이미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쾌감과 짜릿함을 주는지, 그 욕망이 먼저 마중 나오고 앞장선 거예요. 내가 누굴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이게 또 하나의 취미활동이고 자기 욕망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몰랐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그런 헌신에 감동 먹은 게 아니에요. 마귀가 늘 노리고 있던,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베드로가 믿어야 될 것은 하찮은 닭을 봐야 돼요. 그 닭이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듯이 베드로도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주께서 베드로를 데리고 다닙니다.
베드로가 천국 가고 구원 받는 것은 백 퍼센트 다 예수님의 공로요 예수님 하신 일의 결과지 베드로가 거기에 맞장구쳐서 된 결과가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주의 작품인 것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욕망은 우리의 즐거움과 쾌감을 고대하고 기대하게 만들고, 즐거운 것이 아니면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 욕망인 것을, 우리 자신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원래부터 이런 인간인데 주께서 이런 인간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의인되게 하셨사오니 이 모든 업적이 주님 혼자만의 업적인 것을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