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강-YouTube강의(개인과 역사)151217-이 근호 목사
139강-YouTube강의(개인과 역사)151217-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69.34)
139강-YouTube강의(개인과 역사)151217-이 근호 목사
이번 강의는 제 139강, 제목은 ‘개인과 역사’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늘 변화되는 겁니다. 역사라는 것은 변화되는데, 역사자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변화되고 싶은 역사를 만들고자 개인들이 굉장히 노력을 하죠.
사람들이 이렇게 노력을 하게 되면 그 노력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가를 절대로 무시하지 못합니다.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한 행위로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 결과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그 결과가 내 기대에, 내 욕구에 부응되는지를 늘 확인하죠. 이것이 바로 각 개인도 그렇고 개인이 모인 집단도 그런 것들을 기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100명이 교회를 시작하게 하면 “야! 우리가 100명 모였네.” 그걸로 모든 기쁨을 다 충족시키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되느냐, “자, 백 명으로 시작했으니까 내년에는 2016년에는 몇 명이 모일까?” 하고 기대를 하게 되어 있고, “우리가 가만히 있는다고 100명 이상 되는 것이 아니니까 100명 이상으로 교회라는 역사를 새롭게 창출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 각자가 맡은 일에 노력해야 됩니다.” 하고 자기 개인적인 역량을 거기에 투입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보이니까, 그 당연해 보이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성경과 다른 비 복음적인 요소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가 기대하고 싶은 그 역사가 보고 싶어서 성경도 의례히 그렇게 되리라고 단정 짓고 말아요. 거기서 나온 그 대표적인 단어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 확장은 공간 개념이죠. 또는 숫자로 표현하면 100명 모였다가 200명모이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백 명 모였다가 열 명 모이면 하나님 나라가 축소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정면으로 충돌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보낸 자를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평소에 자기중심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역사를 가지고 자기 기대치에 부응한 역사 같으면 하나님이 도와준 역사고 자기 기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계하고 채찍질 때린, 하나님께서 미워한 역사라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선언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큰 오류입니까?
그런 관점에서 모든 성경을 본다는 것은 성경을 보면 볼수록 성경과 점점 더 멀어지는 양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가만히 놀려두느냐, 그냥 시체처럼 가만히 꽁꽁 묶어두느냐,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들과 성도들을 부지런하게 활동시키죠. 그렇다면 성도를 부지런하게 활용하신다면 하나님 나름대로의 목표되는 역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거예요. 그 역사를 성도로서 마땅히 기대하는 역사라고 간주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반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역사를 성경적 역사라고 하면서 그것을 역사에다 집어넣는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미완성이 되기 때문에. 어떤 역사가 되게 되면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더, 더, 크게, 더 확장되게, 더 번창하는 것, 그런 아이디어가 나온다면 그 사람부터 잘못된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이 역사의 변화는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한 역사의 변화냐, 역사 안에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활동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흔히 말하는 사람 눈에 보이는 역사라고 보이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어떤 목표치가 없죠.
여기 우리가 어떤 일을 해놓고 우리가 기대한 결과가 나왔을 경우에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일이 벌어지는 족족 그것이 영광이 된다는 쪽으로 아멘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세상의 모습이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대치에 부응하느냐 안 하느냐 따질 필요 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현재 작용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리 입에서, 성도 입에서 아멘이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럼 성도가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되는가가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아멘이 되는 것이 덩치 큰 업적이나 결과가 나올 때만 아멘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을 하신 자체가 약속에 준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게 사적으로,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이것이 아멘이 되어야 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적으로 이런 큰일을, 큰 행사를 했기 때문에 아멘이고 교회적으로 이런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아멘이다가 아니라, 평소에 자기 집안에서 안방에서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작은 사소한 일 속에도, 거기서 항상 아멘, 아멘 될 그러한 현상들이 계속 생겨나온다는 이야기에요. 이 말은 우리가 이것이 약속이다 아니다 평가할 입장이 아니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약속 차원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일에 우리가 포함되는 겁니다. 약속은 크고 우리는 작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입에서 나올 것은 무엇밖에 없느냐? 아멘밖에 할 게 없고, 그 감사한 마음으로 아멘 할 때 그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1장 19절~20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광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지켜야 되느냐? 이제 그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뭐든지 심심하면 아멘, 감사, 아멘, 이렇게 하면 영광이 되느냐? 그 문제인데, 이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보다 세다고, 크다고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무언가 만들어 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멘이 되도록 우리에게 약속으로 작용을 하는데, 그 약속이 뭐냐? 그 약속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가 약속의 완성이니까, 십자가가 우리 사생활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에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불만과, 짜증과 그리고 주님에 대한 대항심이 발생됩니다.
아멘은커녕 하나님한테 화를 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영광에 실패했다. 물론 우리입장에선 실패했는데, 약속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모르는 불만과 불평과 짜증과 원망을 끄집어냈다는 그 점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성공하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돌아서서 결과적으로 “아!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알면서, 그 죄인 되게 하신 그 모든 일들이 합당하여 ‘아멘’이 되고, 그것이 약속에서 나온 것 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감사하면서 영광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는 없어요. 주께서 치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감추어 놓고 있던 우리의 죄와 우리의 욕구와 욕심을 들추어내고 파헤치면서, 다시 한 번 십자가 이외에는 다른 식으로 영광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확인케 하는 겁니다. 우리의 방법은 뭐냐. 우리의 방법은 참 경솔해요.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 여기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주시면 나는 살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나의 존재가 만나서 좋은 게 좋다고 서로 친하게 지내면 영광 돌린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이 아닙니다.
약속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와서 우리로 하여금, 감추어놓은, 우리가 찬양 돌린다고 하면서 사실은 은근히 감추어놓은, 우리의 허점과 죄와 탐욕과 욕심, 우리의 속에 더러운 것들을 들추어내는 방식으로만 하나님께 예, 아멘, 영광, 약속의 성취, 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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