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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분리와 연합 151218강의마가복음

분리와 연합 151218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서경수(IP:175.♡.227.25)

16-01-05 17:33

광주 강의(2015. 12. 18) 22-1

마가복음 6장 53-54절입니다.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예수님의 활동 반경이 호수 중심입니다. 호수 둘레를 돌면서 활동하셨다고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호수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에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그 주변에 예수님의 소문이 났어요.

55-56절은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왜 만졌을까요? 본인들의 병 낫겠다는 욕망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의 옷을 만질 때 자기의 존재 가치를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존재 가치를 확대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이 풍경은 한마디로 하면 ‘세속’의 모습입니다.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이 터전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번창시켜보겠다는 마음이 바로 ‘세속’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디에 속합니까? 천상입니까, 세속입니까? 세속에 속하지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를 ‘문화’라고 봅니다. 인간들이 자기의 삶의 질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 문화입니다. 그런데 문화는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 있어요. 화문활동을 하려면 입에 풀칠이 우선되어야 해요.

구석기 시대의 문화는 천박하지요. 그만큼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화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루이 14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프랑스 절대 군주의 시작인데, 이 왕이 문화생활을 한다면 좁은 방에서 노래나 부르며 놀겠습니까? 아니죠. 거대한 홀을 짓지요. 베드사유 궁전을 짓습니다. 벌써 노는 문화가 다르지요?

모든 문화는 문화를 지탱할 만한 경제적 잉여의 재물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문화는 상부구조에 속하고 경제가 하부구조다.’라고 했어요.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그 후 여유가 생길 때 문화 활동이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 박사교회에 있을 때 그 마을은 부촌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철철이 여행을 갔어요. 봄에는 꽃놀이, 가을에는 단풍놀이 등으로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박사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면 완전 시골이라 그 사람들은 그런 여유가 없이 살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놀러가는 사람은 팔자가 늘어졌다.’는 소리가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밥 먹고 사는 것이 세속의 전부일까요, 잉여물이 있어서 문화를 즐기는 것이 세속의 끝일까요? 남아도는 것을 소비하는 문화가 세속의 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큰 성 바벨론’이 나오는데, 이것이 세속의 끝입니다. 풍부한 자금으로 화려한 도시를 이루지요.

도시를 이뤘다는 것은 생각이 동일하다는 말이고, 생각이 동일하다는 것은 보편성을 말합니다. 보편성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공동체 의식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 사회에 동조되지 않으면 살기 힘들다’는 사적 의식이 삽입됩니다. ‘내가 뭘 할까?’가 아니라 ‘당신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가 중요합니다.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자아, 그것이 하나로 굳어진 사고방식 속에서 관행과 전통이 피어납니다. 이것은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가 돼요. 기독교가 왜 문화고 세속인가 하면, 우리 아버지가 장로고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면 나는 자동으로 기독교인이 됩니다. 왜? 아버지가 요구하는 바가 그것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요구에 부응할 때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사람으로 대우를 받는다는 말이고 이렇게 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겔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회는 상호 인정으로 유지된다.’ 만약 상호 인정이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국외로 추방되거나 자진해서 이민가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하지요. 그 사회의 법에 의해서 조치가 취해집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상호 인정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방금 사회,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이고 예수고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께 찾아든 이유는 뭡니까? 세속적인 욕구 때문에 예수께 달려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위에 있고 인간들은 땅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땅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자신들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택한 백성으로 삼았다는 그 만남의 지점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 땅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방식을 구체화 시키라고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성당’이라는 겁니다. 성당은 여러 가지 요소를 묶은 것인데, 외부적으로 보면 성당을 유지할 수 있는 요소가 있지요. 사제, 부제같은 인적 자원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종교적 행위를 통해 모두 함께 감흥을 받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신부가 연기가 피어나는 그릇을 흔들 때 이런 동작을 통해서 고객들이 감동을 받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물론 사전에 교육을 시킵니다. 성찬을 나눌 때 둥글고 납작한 과자는 예수님 살이고 포도주는 예수님 피라고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면 그 의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감흥을 받게 됩니다.

이런 모든 의식이 전부 가시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유물론적’이라고 말합니다. 신부는 복장부터가 보통 사람과 달라요. 목에는 넥타이가 아닌 로만칼라를 합니다. 이것이 시각적 효과가 있기에 다른 종교에서도 특별한 복장을 합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설교를 평가해 달라고 해서 들어가 봤는데 그 목사의 복장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옛날 제사장 복장을 약간 현대적으로 개조해서 입었어요. 분당 00교회 목사입니다.

언제부터 개신교가 천주교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세속주의입니다. 문화를 원합니다. 왜냐? 자기의 욕망을 현실화 시켜주는 메시아를 사람들은 고대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자신의 몸을 흔쾌히 드립니다. 왜 주님의 옷을 만지면 병이 나았는가? 그들의 욕망을 달성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통해 욕망을 달성한 그들에 의해 주님은 죽임 당하는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메시아와 진짜 메시아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를 마지막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데, 예수님 옷을 만져서 건강을 얻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그 모든 행위를 정죄해버리는 다른 기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적이 십자가입니다.

암에 걸렸다고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것이 세속의 극단적인 마음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 때 “주여, 저는 죄입니다. 주님을 이용하려는 저의 마귀적 심성을 이제야 들켰습니다. 제가 주님을 핍박하는 자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지요.

이렇게 되면 사도 바울의 말씀이 쉽게 다가옵니다. 사울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주여, 누구십니까?” 예수님 답변이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했지요. 여기에서 사울이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핍박받는다는 공식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공식에 따라 사울에게 찾아갔고, 사울에게 그 공식이 도착된 겁니다. 이 사람이 구원 받은 자입니다.

인간이 극악무도하다는 사실을 본인이 몰라요. 그런데 주님의 뜻은 ‘제발 극악무도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51편에 나오는 ‘상한 심령’이지요. “주님, 제가 극악무도한 자임을 이제야 일깨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세상과 분리 현상이 일어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이 주님 옷을 만졌다는 것은 ‘연합’인데, 이 연합이 누구 쪽으로 당기는 연합인가 하면,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자기 쪽으로 예수님을 잡아당기는 연합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똑같아요. 그런데 주님은 ‘연합’을 말씀하지만 먼저 분리가 일어나야 돼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해야 되지요? 아닙니다. 우리는 ‘분리’와 연합해야 됩니다. 나는 내 욕망을 챙기니까 예수님과는 점점 멀어지는데, 이런 분리된 상태를 없애지 말고 그 분리와 연합해야 돼요. 그래야 우리는 영원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나는 날마다 주님을 싫어하고 주님은 날마다 그런 나를 좋아하고.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난 후 나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인지, 아니면 “예수 믿고 무엇을 해야 더 나은 내가 됩니까?”를 묻는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합니까? 예수 믿은 후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오지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은 ‘지금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처지를 감사하지 않습니다. 평생을 불평과 불만으로 살아요. 죽을 때까지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쉽게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오래 전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화를 할 때 제가 굉장히 기분이 나빴어요. 예수님이 연예인도 아닌데 왜 슈퍼스타로 묘사했는가 하고. 보편성은 세속입니다. 주님은 보편성에 포함이 되면서도 포함이 안 돼요.

사람들이 주님을 볼 때 자신들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렇데 같지 않아요. 합세되어 있다고 봤는데 분리되어 있는 어떤 분, 예외적인 분이지요. 어쨌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슈퍼스타가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가서 시험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수평적으로 들어줍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왜 예수님께 그런 요구를 안 합니까? 요한은 알았어요.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만약 이 주장을 신학자들 모임에서 했다면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 겁니다. 여하튼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주님 보시기에 쓰레기니까 거기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한다면, ‘네가 갖고 싶은 것과 주께서 주신 것을 구분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분하지요? 자신에게 귀한 것을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노동과 땀으로 얻은 것이지요. 이런 것은 주님 보시기에 쓰레기입니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는 이유는, 그곳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도 동질성을 느끼기에 재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왔다는 것은 ‘예수가 별 것 있나? 우리와 같은 부류일거야.’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귀한 것 주님도 귀하게 여길 거야.’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리 생각하십니다. ‘진짜 귀한 것은 너희들로 인해 가로막혀 있다.’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귀한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드리라는 것이지요. 모리아 산에 가서 드리라고 했지요. 그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여하간 주님이 나타난 곳이 지시하는 곳이에요.

A지점(지시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아요. A지점을 분해해서 지시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지시하는 것을 따를 때만 A지점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갈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곳으로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 붙잡혔다는 사실이 나의 미래보다 더 중요한 미래입니다. 이것을 [오래 된 미래]라고 합니다. 유명한 책 제목입니다.

미래가 현재를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서는 안 되는 나를 만들어요. 왜냐? 알면 붙잡는 것이 의미가 없어져요. 알게 된 내가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기 때문에 나는 나를 포기 못합니다. 사단은 얼굴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지 말고 ‘사단은 어떤 일을 합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사단이 하는 짓은 이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는 층이 다른데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는 것이 사단이 하는 짓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단은 자기가 버림받은 층에 있다는 것을 인간에게 안 들키는 거예요. 사단은 이 말을 견디지 못합니다. 요한1서 2장 27절입니다. “너희는 주께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성령께서 너희를 가르친다는 거지요. 혹시 권위 있다는 목사나 지도자가 가르친다고 나서거든 요한1서 이 말씀으로 공격하세요. 어떤 목사가 “목사에게 대들어서 김00 장로는 저주를 받아 사업에 망하고, 아들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라고 하면 “그건 네 생각이다.”라고 공격하세요.

사단의 종들은 성경과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데, 성도는 그런 주장을 들으면서 “그건 주님 말씀이 아니라 네 생각이다.”라고 무시하면 됩니다. 그런데 거짓 목자의 주장에 동조해주고 호응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 이 사회는 상호 인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거짓 목사의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고, 그들 때문에 거짓 목사들이 자기 권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에릭 프롬은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학대받는 쾌감과 학대하는 쾌감 두 가지가 있다.’

사람에게 들어갔던 귀신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지요. 문제는 사람이란 껍데기냐, 돼지라는 껍데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질을 결정합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하니까 귀신이 나갔지요.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 ‘제발 우리 동네에 있지 말고 떠나주세요.’라고 밀어냅니다.

이것이 바로 상호인정으로 구축된 사회성에 예수님을 편입시켜주지 않는 거예요. 이것을 ‘특수성’이라고 해요. ‘보편성’은 끼리끼리 노는 것입니다. 보편성에 유일성이 추가되면 여기서 특수성이 파생됩니다. 보편성과 유일성의 만남에서 특수성이라는 증상이 발생합니다. “너는 좀 이상하다.”라고 하면 “그래 나는 너와 달라.”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나도 너와 친하고 싶은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예수님만 갖고 있는 유일성으로 자기가 합세하는 셈이 됩니다. 제 손녀 태어났다고 “감축 드립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분은 십자가마을 분위기를 몰라서 하신 말씀이지요. 십자가마을 바깥에서는 십자가마을이 언제 무너질 것인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사람의 심리가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거예요. 특수성이란 내가 특수한 행동과 생각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나도 주님이 특수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가짜 특수성이고, 진짜 특수성은 ‘왜 제 인생을 제가 예상 못한 길로 데리고 가십니까?’라는 소리가 나옵니다.

그러면 주님은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을 하시겠지요. ‘베드로야,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사람들은 자신이 미리 아는 길로 주님이 인도하시기를 바라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갈 길을 안다면 주님은 또 모르는 길로 이끄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를 계속 베드로 되게 하십니다. 한 번 반석 되었다고 자동적으로 계속 반석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반석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용이 있습니다. 유일자가 간섭해야 보편성 속에서 특수자가 나타나기에 늘 개입하시고, 이렇게 되면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은 보편적이어서 예수님이 자신들과 한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예수님 옷을 만지고 병이 나았으니까 이 사람은 확실한 증거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에 의해 주님은 버림받습니다. 옷을 만져 병 나은 정도가 아니라 제자들은 직접 귀신을 쫓아내고 하늘의 권세를 행사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도 버림 받았습니다.

‘너희들(제자들)은 어떤 일을 경험해도 너희를 포위하고 있는 보편성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다. 뭐, 나를 따라 온다고? 너희는 마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마귀가 베드로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활동하는 상황을 너희들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보편성 속에서 짐승을 하나 채택을 해요. 닭이죠. 닭이 우는 타이밍을 닭이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닭은 수시로 웁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이것은 제가 어떤 강의에서 ‘주님의 주권’이라고 했는데)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닭의 울음소리를 알람시계처럼 활용하신 것이지요.

이것을 봐서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도 이런 작용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에게는 늘 계속되어야 하고, 그 순간마다 터져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번 시간에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분리를 거부하지 말고 반기세요. 그리고 그것을 받으세요.’

주님과 내가 분리되었음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화해입니다. 주님은 의인이 되고 나는 죄인 되는 흑백의 만남. 이것이 바로 구원 되는 상황이에요. 계속해서 주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시고, 그래도 우리는 내 원하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

“단이가 정신 차려서 제 갈길 개척하고 남산 위의 노루처럼 이 세상에서 펄펄 뛰게 하옵소서.” 이렇게 비는 것은 무속 신앙이지만 이것을 살짝 바꾸는 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유물론적으로 별 차이가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내 가치의 존속이고 세속의 영향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이번 일에 제 편이 되어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는 네 편 될 생각 없다. 네가 뭔데 내가 네 편이 돼.” “그럼 제가 주님 편이 되겠습니다.” “네가 무슨 재주로 내 편이 돼.”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가만히 있어.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되게 한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이 주님 옷을 만지면 병이 낫겠다는 그들의 생각을 충족시켜 줬습니다. 그게 바로 ‘욕망의 충족’입니다. 욕망은 결핍을 만들고, 그 결핍이 충족되면 만족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깊은 내막은 욕망이 충족되는 것이 아니고 욕망 자체가 커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내 마음 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코앞에 있는 이것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가 대학에만 합격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을 합격하고 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깁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마귀가 계속 욕망을 만들어 내서 결핍을 느끼게 유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괴물의 정체는 주님께서 그것을 밝히 드러내실 때까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들의 욕구를 들어주면서 그들에 의해 버림받지요. 오병이어가 그런 경우지요. 배 불리 먹었는데 주님이 결재를 하시니까 주님이 돈 많은 분인 줄 알고 주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 때 주님은 카드를 들고 “너희들이 이것 때문에 나를 찾아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 카드(복) 때문에 나를 찾지만 나는 그런 너희들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을 너희들이 아느냐?’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요6:53).’고 하셨지요. 이 말은, ‘피와 살을 유발하는 원인 제공자가 바로 너 자신들인 것을 너희들이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 턱이 없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 “어렵도다.”라고 해요. 오늘날도 교회 20~30년 다닌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똑같아요. “어렵다.”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해서 교회 다녔으니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일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잘난 맛에 사는데 그것이 못난 짓이 된다면, ‘내가 따로 잘난 존재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또 욕망하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거예요. 누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 ‘그럼 내가 착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또 다른 욕망을 찾아요.

이런 우리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네가 무슨 욕망을 해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물어요. ‘그것이 아니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말은, ‘내가 예수가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되지 왜 믿으려고 합니까? 예수 믿는 그것을 내가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10분 쉽시다.

(2016. 1. 5. 16:43 녹취 마침)

서경수(IP:175.♡.227.2)

16-01-09 10:58

광주 강의(2015. 12. 18)

마가복음 7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사회의 서민들, 혹은 바닥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보는 것과 지도자 층이 보는 것이 달라요. 지도자 층은 제도적, 법적으로 봅니다. 이들은 질서체제의 정점이기 때문에 사회 질서를 최우선으로 고려합니다. 질서를 잡으려면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해야 합니다.

행동을 규제한다는 것은 그 법을 지정한 사람만 잘 지키고 다른 사람은 잘 못 지켜야만 자신들이 지은 그 법칙에 주도권을 쥘 수 있어요. 법 지키는 전문가가 될 경우에만 다른 사람을 법으로 통제할 수 있어요. 모든 사회 분야가 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밤 까는 일에 전문가입니다. 김장을 담글 때 의학박사가 30년째 김장을 담그는 사람보다 못합니다. 그러면 그 바닥에서 주도권을 빼앗기는 겁니다. 김장 할 때는 김장을 잘 담궈야 그 바닥에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 급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마귀의 통제 하에 있어도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보여주는 마귀의 다양한 면은 법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이 제시하는 법은 단순히 질서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지상과 천상의 구체적 가시화로 질서와 법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법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법을 잘 지키겠지요. 지키고 못 지키고를 자기가 정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자기는 하늘과 땅 사이의 중매자 노릇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거룩의 자리에서 세속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겠지요. 이게 오늘날 목사들도 그렇습니다.

‘나는 더러운 개입니다.’이렇게 생각하는 목사는 없어요. ‘나를 본받으세요.’ 이렇게 나오지요. ‘내가 가는 곳이 천국이니까 나를 따르세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요. 그런데 요한1서 2장 27절에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늘과 땅을 가시적으로 연결하려고 하는 자들은 마귀의 술책에서 못 벗어납니다.

인간은 거룩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해요. 웅장한 예배당, 화려한 성직자의 복장, 신기한 성만찬,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원합니다. 나보다 더 월등한 신적 존재가 있으면 그제야 안심하고 그 대상을 믿겠다는 거지요. 그런 종교적 심리를 문화라고 했지요.

문화는 가시적입니다. 삶에 여유가 생기면 이런 것을 찾습니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일하지 않습니다.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성직자는 십일조 받아 챙기면서 사람들에게 큰소리 치지요. 구약의 레위인을 거론하고 제사장을 거론하면서 그들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성직자들만 보입니다. 보이는 성직자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분을 만날 수 있다고 신부들이 교인들을 기만합니다. 그러니 가시적 문화와 제도, 그리고 유물적인 형식을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정신의 끝은 물질이다.’라고 했어요.

이 땅에서 정신 중 최고의 정신은 물질로 나타납니다. 모호한 정신은 단단한 물질로 나타날 때 그 정신은 더욱 더 정신으로 대우받습니다. “오, 살아계신 신이여!” 인간을 살아계신 신으로 추앙하는 것을 ‘쇼비니즘(chauvinism)’이라고 해요.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는데, 나폴레옹의 신하 ‘쇼뱅’이 하는 말이 ‘우리 황제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라고 했어요.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쇼비니즘’이 나왔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정치적 힘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질서를 잡는 것이고, 질서가 유지되면 체제가 갖춰지지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가시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늘과 땅이 소통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런 생각을 할 때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복습해 봅시다. 사단의 동네에서는 법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질서가 잡히면 그것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로 나타나지요. 그런데 이것으로 구원이 가능할까요?

강의 시작 전에 이런 소리를 들었어요. “사도신경이 무엇인지 어떤 목사에게 물었더니 사도들이 만든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무식한 소리입니다. 사도신경은 392년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한 후 전 국민을 신자로 만들었어요. 국가교회지요. 전 국민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면 누구나 ‘아멘’할 수 있는 것들을 매뉴얼로 만들어 제시했어요. 그 중 대표적인 교리가 ‘삼위일체’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사람들에게 설명하면 납득이 되고, 그 교리에 동의하면 신자가 되고, 신자가 되면 공무원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전 국민이 신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사도신경도 그 중 하나에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면, ‘아멘’하면 되는 겁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법이나 오늘날 사도신경을 외웠을 때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걸림돌이 없는 거예요. 걸림돌은 사도신경을 외워도 지옥 간다는 겁니다. 삼위일체를 알고 있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회개해도 죄고, 복음 믿어도 죄고, 전도해도 죄고, 교회 안 다녀도 죄고, 나와도 죄고 --

다윗이 성령 받고 난 후의 고백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한 심령을 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 귤을 드리면 안 돼요. 이걸 까야 돼요. 그러면 상한 심령이 나오지요. 상한 심령이 되면 이 상한 심령은 주님이 유발하신 겁니다.

상한 심령이 되는데 내가 기여한 것이 있습니까? 없지요. 다만 껍질을 벗기는 것도 다윗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고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다. 베란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이 눈에 띄었고 그래서 그 여인을 불러 동침했어요. 이 껍질을 누가 벗겼습니까? 밧세바지요.

그런데 밧세바는 이미 결혼한 여인이었습니다. 결혼했다는 것은 법이지요. 그런데 법을 주님이 어겨요. 유부녀인줄 알면서도 동침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껍질을 벗겨서 속에 있는 알맹이가 상한 심령이 되게 했습니다. 상한 심령은 가만히 있는 상한 심령이 아니었지요. 그러면 뭐냐?

아름다운 여인과 동침하고 싶다는 속마음이 껍질에 가려있을 때는 몰랐어요. 상한 심령도 죄지만 이것을 덮고 있는 껍질은 더 나빠요. 껍질 벗기면 똑같은 인간들입니다. 음욕을 이긴다고 성경 구절을 외우고, 예쁜 여인이 지나가면 눈을 감고 별 짓을 하다는데 그 자체가 간음입니다.

음란은 대상이 있다는 거잖아요. 음욕은 안 된다는 자체가 법적으로 나의 의를 지키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간음입니다. 자기 의를 지키겠다는 것보다 더 큰 간음은 없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단에 씌어 속에 있는 상한 심령이 노출되지 않아서 이런 소리를 해요.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피고는 지옥!” 즉석 재판에서 지옥 판결을 받았어요. 그런데 옆에 있는 세리는 감히 얼굴도 못 들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판결이 “피고는 천국!”

우리의 변호자는 성령이십니다. 누구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한 심령인 것을 알게 하는 내용으로 해서 우리 자신을 변호인으로 만들어요. 내 자신을 변호하는 변호인이 아니라 예수의 증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죄인을 예수님 증인으로 만들어요.

주께서 우리를 주님의 증인으로 만든 겁니다. ‘나를 포함해서 죄인은 구원 받는다.’ 성령 받으면 미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어느 정도로 미쳤는가? 사람들이 “당신이 메시아라면 메시아 된 증거를 보여라.”는 요청에 “율법에 의하면 두 증인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첫 번째 증인이고 두 번째는 내가 증인이다.”라고 했고, 사람들의 반응은 “네가 미쳤구나.”했지요.

예수님이 이런 식으나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서 나를 죽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죽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층이 다른데서 원인과 결과가 교체되기 때문이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쪽 층은 무슨 말인지 모르고,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요.

자기 의를 고수하기 위한 법 체제 안에서는 절대로 못 알아듣는 방식이 뭔가? 인간들의 법을 주님의 약속으로 포위해 버립니다.

마가복음 7장 3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어떤 신학자가 이런 소리를 했어요.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게 하신 이유는,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계속 일하면 피곤하니까 하루를 쉬게 했다.’는 것입니다. 기가 차지요?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이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안 먹지요. 위생상 아주 좋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건강에 신경을 써서 손을 씻고 먹어야 복을 받는다고 명령을 하셨다’고 할 때 서민들이 충분히 납득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손을 씻고 먹으라고 하셨구나.’

가시적인 깨끗함이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증거물로 포착된다고 보는 겁니다. 일반인들은 열심히 돈 벌고 노동하고 성직자들은 거룩한 척하면서 일반인들이 주는 돈을 받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고상하게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유전’이라는 말은 DNA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말합니다.

이 전통은 공동체 유지를 위한 전통입니다. 이것이 역사지요. 역사는 승자의 스토리입니다.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자의 신화입니다. ‘역사는 권력자가 만들어서는 안 되고, 그 권력자에 의해 죽어가고 신음하는 자의 손에 의해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자유주의적 역사관입니다.

신음소리가 난다는 것은 고생한다는 말이고 고생하는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지, 고생하는 쪽을 강탈해서 호사를 누리는 자의 손에 역사가 쓰여지면 또 하나의 신화가 되어서 다음 세대를 핍박할 수 있는 바탕이 되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과거 바리새인들이 다 한 소리입니다. 재미나는 것은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로마에 대항하는 투사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를 대변하는 자가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정신적 압제자입니다. 이것을 ‘예외규정이 작용하는 자리’라고 합니다.

법이 유통되려면 반드시 초법적인 자리가 있어야 됩니다. 화투칠 때 오야 마음대로지요. 화투 패를 나눠주는 사람이 있어야 화투가 진행됩니다. '있음'이란 반드시 '있음'에 포함되지 않는 예외적인 것으로 인하여 '있음'이 유지되기 때문에 모두가 그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 ‘현재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은 김정은 주석 때문입니다.’ 라고 주장해야 정신적으로 통합이 돼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전부 경쟁체제가 되어서 무질서해 집니다. 그래서 교황이라든지 국가의 대통령, 또는 조직의 회장 자리는 인품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라도 그 역할은 해야 하기에 있는 자리입니다.

거기에 합당한 인물은 없어요. 자리가 인간은 만들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 너무 욕하지 마세요. 인품이 훌륭해서 교장이 된 것이 아니고 누가 하더라도 한 사람은 해야 됩니다.

도대체 성도가 뭡니까? 성도는 백성이에요. 민주주의 사회인데요? 아니에요. 우리는 왕이 있습니다. 누구지요? 주 예수님이죠. 왕을 왕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왕이 따로 있기에 백성인 나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왕을 섬기는 것입니다.

백성은 자기를 포기해야 되는데 이것은 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민주사회인데 왕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항변할 사람이 있는데, 성도는 왕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는 본인이 왕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충돌하는 이유가 뭔가? 세상에 태양이 둘이 될 수 없잖아요. 사람들은 지배하고 핍박하고 다스리는 정점에 있는 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시점이 십자가를 통해 다 이루는 때입니다. 사단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행하는 모습은 국가 조직을 통해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옵니다. 음녀 바벨론.

국가의 가시적 체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누가 봐도 그 당시 정치범으로 죽은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3단계가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로마와 접해있는 사도요한과 일곱 교회가 나오고, 4장에 들어가면 갑자기 영적단계로 들어가요. 역사적 단계에서는 일곱 교회니까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최고 위의 단계는 모든 의미가 다 수렴되는 것, 모든 일어난 사태가 반드시 어떤 목적과 의미가 있는데 마지막 단계의 관점과 안목을 가져야 그 단계가 보여요.

그 단계가 뭐냐? 일곱 교회를 한 손에 쥐고 계시는 분이 있지요. 일곱 별을 오른손에 쥐고 있어요. 결국 이것은 7을 1로 이끌어 내시는 작업인데, 성도는 회고하듯이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풀 수 있는 세계가 요한계시록입니다. 회고라는 말은 알지요?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저런 일이 있었구나.’라고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관점입니다.

두려워 떨면서 ‘유황불에 들어가면 안 되는데’ 이런 관점이 아니고 이미 상황이 종료되었어요. 끝난 후 추억의 비디오를 보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땐 그랬지.’ 이렇게 보면 요한계시록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전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고 ‘옛날 옛적에 저런 일이 있었지.’

주님과 함께 있는 성도는 앞으로 될 일도 지나간 일입니다. 질이 다른 두 개의 시간이 동행하는 겁니다. 이미 도착한 사람이 과거에 미처 몰랐던 것을 회상하면서 ‘내가 이런 길을 통과했구나.’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보기 전에 겁낼 것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지켜야 구원 받습니까?’ 이런 소리는 하지 말자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당시 대중들을 억압한 것은 초월적인 것에 합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특수자도 없고 오직 보편자 밖에 없었는데 유일자인 예수님이 뛰어들어 바리새인들과 경쟁을 하시는 거예요. 경쟁을 하니까, 당시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주님 앞에서는 이것이 죄가 돼요.

이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동의했습니까? 아니지요. ‘왜 우리 집단을 당신이 공격하는가?’ 이렇게 나왔지요. 그런데 주님은 계속 공격을 감행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와서 예수님을 죽이지요. 이 때 예수님은 ‘드디어 걸려들었군!’ 하면서 기뻐하시지요.

문제는 걸려든 것에 모두 다 포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귀와 함께 걸려든 사람이 됩니다. 걸려들었는데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이 임할 때 알게 됩니다. ‘내가 세상과 한 편이 되어 예수님을 죽였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제가 분리와 연합하는 것을 이야기했죠. 주와 떨어졌음을 이제는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 보기에는 예수님만의 이야기죠. 그렇게 보이잖아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우리에게 제 3, 제 4 계속 일어나는 일로 이해가 됩니다. 우리도 똑같은 수모와 아픔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은 우리 머리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구원의 증거를 위에서 찾습니다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예수님께 속한 작은 자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인간들은 하늘과 땅의 연결체 보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주님은 눈으로 보이게 왔습니다. 별이 이동하지 않았다면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찾아올 수 없었고, 천사들이 조명을 비추지 않았다면 양치는 목자들이 예수님 탄생한 곳으로 찾아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 믿게 된 것은 누가 떠밀어서 믿게 된 거예요.

누가 떠밀었습니까? 주님이죠. 왜? 우리 구원 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증인되라고 떠민 거예요. ‘떠밀렸다’는 것과 ‘내가 믿는다’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전부 뽑아내 보세요. 그 후 남은 것이 있어요.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는 여분의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다 빼내야 합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진해서 빼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성령께서 빼내 줍니다. 쇼윈도에 걸린 예쁜 옷을 보면서 입고 싶었는데 성령께서 사게 하십니다. 그 옷을 산 후 일주일 뒤에 신상품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소박하게 꿈꾸었던 행복이 와장창 무너지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5절 봅시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제가 그동안 언급한 것을 여기에 적용하게 되면 쉽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마귀가 건설한 것입니다. 여기는 법이 살아 있고, 법에서 거룩이 나오지요. 법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눈에 보이는 가시체. 천상과 지상에 끼어 있는 것을 그들은 거룩이라고 했고, 이 거룩은 추상적인 거룩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거룩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법을 지키면서 나를 따르라고 모범을 보입니다. 거리에서 기도할 때도 바리새인들이 시범조로 기도해요. 그리고 구제할 때도 보란 듯이, 금식할 때도 얼굴을 더 초췌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마귀 국가 체제의 정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시비를 걸지요.

시비를 걸면서 아래쪽에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병도 고쳐주고 귀신도 쫓아내 주지요. 병 낫는다고, 귀신이 쫓겨났다고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자체가 세속이니까. 욕망의 결핍 때문에 예수님과 한 편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어쨌든 이쪽에서는 예수의 증인이 나타나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여기는 특수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보편자 뿐입니다.

그러면 특수자는 어떻게 옵니까? 특수자는 죽음으로 와요. 오늘날은 절망으로 오지요. 절망이 뭡니까?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이것입니다. 내가 소망하는 것 말고 추가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 된다면 내 속에 있는 것을 다 퍼낸 거예요. 제가 요즘은 라면은 안 먹어요. 왜냐? 신상 ‘진짬뽕’만 먹습니다. 이건 중국집에서 배달해온 맛이에요. 면이 너무 맛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대형마트에서는 품귀현상이 일어나기도 해요. 내 입맛에만 맛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런가 봐요.

‘진짬뽕’에 대항해서 나온 것이 ‘불짬봉’인데, 이것도 굉장히 맛있어요. 국물이 중국집 짬봉과 차이가 없어요. 그 국물을 다 퍼내게 되면 우리는 살맛이 안 나요.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재미를 느끼며 살았으니까. 그런데 국물을 퍼내는 순간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 뭔가? 주께서 내 원대로 안 해주시기에 내가 구원의 길로 가고 있는 중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에게 맡겨 놓았으면 나는 벌써 부자로 합류했을 거예요. 지옥에서 목이 말로 “물 좀 다오.” 라고 했을 거예요. 내 원대로 했다면. 아무리 신학을 공부하고 복음을 알아도 끝까지 우리 원대로 안 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내 원대로 되면 그것이 내 소유가 되고 나의 우상이 됩니다.

십자가마을이 우상이 된다는 것은 뻔한 논리죠. 십자가마을이 더 이상 모이지 않는다. 우리교회가 헌금이 안 나와서 월세를 지급 못해서 문을 닫았다. 축복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목회에 실패해야 비로소 예수님이 보입니다. 죽음의 자리에 서야 예수님이 보이지 희망의 자리에서는 예수가 없어요. 자기의 이상적 자아만 있습니다.

‘이상적 자아’와 ‘자아 이상’이 있는데, ‘자아 이상’은 아무리 봐도 이상해? 이상은 희망이란 뜻인데, 내가 꿈꾸는 이상이라면 ‘이상’이 앞에 와야 맞지 뒤에 가면 말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이상 자아’로 바꿨습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것은 전부 ‘이상적 자아’입니다. ‘나는 이런 인간이 되고 싶어.’라는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누가 만약 15층 빌딩을 준다면 월세 받으면서 여유 있게 살겠지요. 이게 ‘이상적 자아’에요. 모든 인간은 아침에 눈만 뜨면 이런 상상이 시작됩니다. 이게 ‘이상적 자아’거든요. ‘이상 자아’는 진짜 자아의 계획도를 내가 가지지 않고 다른 분이 갖고 있으면서 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상적 자아’에서 못 벗어나니까 진짜 내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분이 쳐들어 와요. 여기에서 ‘이상 자아’가 나옵니다.

그러니 이 둘은 화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발, 저항, 충돌이 벌어지지요. 이것이 바로 재현되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너는 복음은 안다고 하면서 사실을 날 싫어하지. 평소의 네 행동을 봐!’ 이것을 늘 지적해 주는데, 지적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책망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눈에 보이는 국가 체제가 있고, 질서가 있으니까 이상적 자아가 된 거예요. 누구도 이상적 자아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 여기에 빠져 있습니다. 제자들끼리 ‘예수님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까?’ 라고 할 때는, 이 상태에 놓여 있으면서 또 하나 삐져나온 ‘이상적 자아’지요.

그 중에서 실망한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 넘겼잖아요. 그럼 가룟 유다만 실망했겠습니까? 아니죠. 다 실망했어요. 그래서 고기 잡으러 가고 각자 흩어졌습니다. 주님이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죽었으면 끝난 겁니다.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도 힘들지만 돌아온다는 것은 더 힘든 일입니다.

왜냐? 가신 분이 그 분인지 어떻게 알아요? 예수님은 도마에게 창자국, 못자국을 보여줍니다. 그 때 도마에게는 십자가 사건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반복되는 능력의 사건임을 알았습니다. 못자국을 보고 ‘당신은 하늘나라에 소속된 분이군요.’ 이 말은 ‘저도 주님과 같은 쪽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 십자가의 상처가 도마에게 유일한 가시적 흔적이라면 오늘날 우리에게 가시적 흔적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짜증내는 모습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상입니다. 이 말은 ‘짜증을 내자.’는 말이 아니라, 짜증내는 가운데 이 죄인을 주님이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면 모든 일이 내 일이 아니라 약속 덩어리인 것을 알게 되고, 범사에 감사와 아멘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상적 자아에 매료되어 삽니다. 이것 외에는 사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차고 들어와서 그쪽이 아니라고 이끌어 주시고 예상 밖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 능력을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만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6. 1. 8. 09:3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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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