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51113b-히11장 6절(대타)-이 근호 목사
안양20151113b-히11장 6절(대타)-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안양20151113b-히11장 6절(대타)-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특별한 사람들이에요. 보통 인간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늘을 난다든지 바다에 헤엄친다든지 그런 능력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 부분들이 살아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모양을 한 사람이 독점해서 갖고 있지는 않고요. 나누어서 갖고 있는 거에요.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많은 성도들은 부분, 부분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이 모이게 되면 하나의 몸이 되잖아요. 그런데 신약에 십자가 이후에는 “반복”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그림을 보이지만 신약에서의 “반복”은 완성된 것들의 되풀이가 돼요.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쳤고 그때에 하나님한테 믿음이 있다고 표징을 얻었지요.
그러면 오늘날은 왜 자기 아들을 안 바칩니까? 기도원에 가서 칼 들고 애를 잡아야지, 그런 것으로 안 잡고 공부로 잡고 시집 안 간다고 잡습니까? 아버지가 칼 들고 애를 왜 안 잡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잖아요. 같은 믿음의 노선이라면 따라해야지요. 그래야 같은 노선이라고 확인될 것인데 우리는 왜 안 잡느냐 말이에요. 방금 제가 해답부터 먼저 이야기했지요?
아들을 잡는 것은 아브라함의 몫이에요. 이삭은 아들을 안 잡았지요? 아들을 안 잡았지만 요셉을 하나님 쪽에서 잡아죽였잖아요. 구덩이에 집어넣어가지고 종으로 팔려갔는데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아버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식, 그래서 제일 귀한 옷을 입은 그 자식은 영원히 사라졌고 나머지 11명의 아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한테는 전혀 위로가 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다른 아들이 우는 아버지를 말려도 위로가 안 돼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고통이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야곱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예수님의 부분 가운데 또 담당해야 할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축복과 저주를 반대로 내리는 거에요. 히브리서에 나오는데 11장 21절 봅시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천국에 입성해서 신이 났을 때에, 그들이 정식으로 합격했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지요.
야곱이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로서 보여줄 것은 지팡이에 의지하여 축복할 때 어긋맞게 했어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자리를 바꿔서 축복을 해도 되는데 자리를 바꾸지 않고 어긋맞게 해서 한 거에요.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정상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한 나를 하나님은 거꾸로 만들었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자기 체험이 그대로 하나님의 계시(예언)로서 메시야까지 믿음의 노선에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 믿는 자의 특징은 항상 내가 생각한 인생의 반대로 가게 하시는 그러한 능력이 후대에 믿는 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넓은 길은 찾는 사람이 많지요? 그런데 영생의 길은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가면 안 되고 좁은 길이지요. 찾는 이가 적지요?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찾는 이가 적은 길로 가면 영생을 얻습니까 못 얻습니까 못 얻지요. 왜?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결과물인 것을 우리가 스스로 알고 고백을 해야 기뻐하시는 거에요.
결과물이라는 것은 내가 선택해서 내 인생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주님이 선택하고 우리는 결과물인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선택은 안 보이지요. 존재는 있지만 보이지 않잖아요.
그러면 나타나는 것은 내가 현재 이렇게 나타나고 내 인생은 이렇게 산다는 겁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나는 직장에 다니고 똑같지는 않아요. 그러나 거기에서 공통요소를 뽑아내면 똑같아요.
너나 나나 본인이 자기 인생의 원인자가 아니고 결과물이라는 거지요. 그리고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되었다는 것이구요. 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 뜻과 거꾸로 어긋맞게 산다는 것이 공통점이지요.
그러면 한 번 어긋맞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인생이 정상으로 갑니까 아니면 계속해서 어긋맞게 갑니까 계속해서 어긋맞게 가는 거에요. 이것이 “반복”입니다. 한 번 죄를 지으면 개과천선해서 두 번 다시는 그런 죄를 짓는다 안 짓는다 어느 쪽입니까?
계속 짓게 되어 있어요. 시기, 질투 계속 하는 겁니다. 시기, 질투를 어지간해서 안 하면 계속하게 만들어요. 어느 시점에 인간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인간됨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대신 죽음이고 우리의 몸을 죽일 때까지 우리가 바뀌지 않아야 그 의미가 우리를 통해서 구축(성사)이 되는 겁니다.
끝까지 우리는 죄를 지어야 돼요. 중간에 ‘나는 옳게 결심했어!’ 이러면 안 됩니다. 그 결심이 소용이 없어요. 그러면 계속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하나님 품에 안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까 그림으로 설명했잖아요. 고속도로가 두 개 있는데 행함에서 행함으로 가는 고속도로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것처럼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고속도로였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나란히 가잖아요.
이것을 옆으로 보면 아래쪽에 행함에서 행함으로, 위쪽에는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고속도로가 나란히 가가지고 나중에 교차가 되어 버리지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새로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때까지.
옛사람은 흙에 속한 것인데 인간의 몸이 흙에 속했기 때문에 반드시 욕구가 있게 되어 있어요. 그 욕구는 몇 m인지, 그 깊이는 죽을 때까지 다함이 없어요. 아무리 비싼 다이아몬드를 사줘도 다른 욕구는 또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끝까지 가요. 무저갱 같아요. 아무리 해도 ‘이만하면 됐습니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골프 좋아 하다가 나중에 골프를 좀 치면 시들거려요. 나중에는 재미가 없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이야기는 딱 부러지는 어떤 일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게 허무로 끝이 나요. ‘재미있겠다. 멋있겠다.’ 해도 대책이 없습니다. 온갖 상상을 다 해보거든요 ‘이럴 경우에 얼마나 행복할까?’
막상 그것을 해보세요. 얼마 안 가면 별로에요.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첫사랑을 만나보세요. 별로에요.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면 알아서 해라. 우리 집 근처에 이사 오지 마라. 나는 젊을 때 너를 기다렸지, 지금의 너를 기다린 게 아니야.’ 이렇게 돼요.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거든요.
지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보고 있기 때문에 못 본다고 이야기했지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그런데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게 전부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지요.
성경책을 좀 떼어놓고 보면 보이지만 바로 코 앞에서 보면 인쇄된 잉크자국 난 점들만 보이잖아요. 어느 정도 거리를 떼어야 의미가 발생되는 것처럼 인간은 가까이 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멀어지게 되면 그리울 때가 있어요. 부부가 너무 붙어있으면 재미가 없는데 가끔 한 사람이 출장 갔다오게 되면 갑자기 “자기 잘 있었어? 목욕해.”라고 하지요. 만나면 또 마찬가지지만 말이에요. 떨어져 있을 때는 없는 그리움이 생기고 그러잖아요.
믿음이 특수하다고 했잖아요. 그 이유가 “대타”이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강의 제목을 “대타”라고 합시다.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를 대신한 분을 보여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이 사람이 특수한 사람이고 믿는 자에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보지 말고 내가 믿는 자를 봐라.”라고 하면서 살아가야 돼요. “그래, 너희들이 지적하는 것을 나도 인정하는데 너는 나를 구원하지는 못 하잖아. 마귀야 너는 지적질은 잘 하는데 너는 나의 구세주가 될 수 없잖아.”
마귀가 지적하는 것은 정확해요. 왜? 마귀는 선악과를 알고 있거든요. 내가 뭐가 잘못이고 나의 한계가 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적만 할 뿐이지 구원이 안 되는데 주님은 지적하는 게 구원이에요.
이미 구원이 된 자이기 때문에 지적하는 겁니다. 아까도 산상수훈에서 “돈을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저 주어라”는 말씀은 절대로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거에요. 이것은 우리가 선택하라든지 결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니가 이런 일을 하게 되면은 나는 너를 보고 선하고 착하다고 박수 칠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것은 너에게 불가능한, 너에게 금지된 사항이다. 금지된 사항을 너는 할 수 없다.’라는 거에요.
이 말씀을 우리가 못 지키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주께서 산상수훈으로 내뱉어주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뒤에 아무리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해도 인간은 심령이 가난할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의 몸에는 욕구가 있고 갈수록 더 높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방향에 있어요. “가훈이 뭐야?” “가난하기” 이런 것은 없잖아요.
언젠가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제 딸 초등학교 선생님이 “각자 집에 가서 가훈을 써오세요.”라고 했는데 제가 “죽자.”라고 했거든요. 그것을 딸이 그대로 가져간 거에요. 그런데 그런 가훈은 처음 들어본 거에요.
죽어도 상관이 없는 가정, 북한 말로 죽어도 일없는 가정, 진리로 자유케 된 가정이라는 함축된 뜻이 있는데 선생님이 그것을 알겠어요? “성실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소금과 빛이 되자.”라고 해야 되는데 말이에요.
주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말씀을 줘도 우리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 의미를 성사시킬 수 없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타”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특수한 존재에요.
주께서 하실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루었던 일, 십자가의 일을 대신하는 거에요. 십자가를 믿고 있는 그 순간이 “돈을 빌러 오면 거저 주는” 순간이에요. 이것이 어떻게 논리가 성립이 되는가 봅시다.
산상수훈(마태 5장)에 ‘꾸고자 하는 자는 거저 주어라“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도저히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우리의 몸이 있어서 살고자 하는 본성(욕구) 때문에 이럴 수가 없거든요.
한 명이 왔으면 할 수 있겠지만 두 명, 세 명이 오면 못 하지요. 어느 집에 가니까 돈을 공짜로 준다는 소문 듣고 한 2500명이 왔다면 할 수가 없잖아요. 한두 명에게 해줬다고 지킨 것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해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못 지켜요. 우리한테 문제가 있는 거에요.
“대타”이신 주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우선 끄집어 내요. 그래가지고 그 문제 있는 것을 주님이 가지고 갑니다. 이것을 “우리 대신 죄짐을 지신 분”이라고 하는 거에요. 찬송가에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불러요.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죄짐을 대신 가져가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해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루었다” 안에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저 주어라”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다 이룬 것이 되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 말씀을 십자가 이후에 우리에게 줍니다. 그 다음에는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저 주어라”에 해당되는 그런 일들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게 됩니다. 이 말씀을 내가 읽고 있는데 딩동 하더니 누가 집에 들어왔어요.
“목사님 돈 10만원 있습니까?” 하필 타이밍이 큐티 타이밍이에요. 그럴 때 돈 10만원을 빌려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동행하라고 했으니까 최소한 20만원은 줘야 돼요. 쩨쩨하게 10만 5000원 주면 안 돼요.
그런데 20만원을 주면 절대로 안 돼요. “형제여 예수님이 다 이루심을 믿습니까?” 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돼요. 오늘 갑자기 기쁜 소식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지요? 돈을 주면 안 되고 복음을 전파해야 돼요.
“저는 돈이 필요한데요?”라고 하면 “돈 있어서 뭘 하려고? 이 지옥 같은 세상 더 살려고? 주께서 굶어죽으라고 돈 없게 하는데 빨리 죽어야지. 그래도 복음을 알면 돈 없이 지금 굶어죽어도 천국 갑니다.” 하고 복음을 전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 사람은 돈을 빌리러 왔다가 돈은 하나도 못 받고 복음만 듣고 그냥 돌아가게 돼요. 여기서 내가 만약에 그 사람에게 10만원을 줬다면 이 사람은 쫌상이 돼요. 비겁하게 나의 의를 위하여 예수 믿는 티를 낸다고 주의 말씀을 도용한 인간이 돼요. 내가 불쾌해요.
그런데 20만원을 줬으면 ‘야, 내가 성령 받은 것이 맞기는 맞구나. 내가 옛날 같으면 이럴 수 없는데 성령의 은혜로 10만원을 덤으로 주면서, “형제여 이것은 안 갚아도 돼요.”라는 놀라운 말이 나한테 나오다니..’ 이렇게 할 때 이것이 되돌아와서 ‘자기 대견함, 자기 의로움’이 10만원 할 때보다 곱빼기나 더 많아져요. 10만원 할 때는 쫌상인데 20만원 하니까 여유로워요. 완전히 맹자, 공자, 부처가 다 되었어요.
그런데 방금 그냥 복음을 전했다고 하니까 무슨 생각이 듭니까? ‘참 내가 돈을 어지간히 사랑하는구나.’라는 것이 느껴지겠어요 안 느껴지겠어요 돈을 주기 싫어서(이 돈이 어떤 돈인데) 복음으로 때웠잖아요.
결국 주님은 “다 이루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 두 사람을 박치기 시킨 거에요. 이쪽도 마찬가지에요. 돈 빌리러 온 이유가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더 살려고 나한테 온 건데, 주님은 돈 없이 해서 천국에 보내려고 하시는 거였으니까요.
나는 돈을 주는 것이 아까워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땜질하려고 때웠던 돈 사랑하는 나도 주님 앞에서 둘 다 죄인으로 드러났으니까 주님께서는 성공한 것이 되지요. 성공한 케이스에요.
이때 우리는,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저 주어라”는 말씀이 믿기 전이나 후나 동일하게 우리의 죄를 유발시키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것을 드디어 발견하게 되지요. 만약에 20만원을 줘보세요. 줘서 보내면 이 말씀에 대해서 그 사람은 성경책을 지워버려야 됩니다.
왜? 자기가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저 집에 가면 10만원 더 얹어서 준다더라.”고 소문을 내서 자기 친구들 한 200명 몰고 오면 돈이 없어서 못 준 것이 되지요. 그러면 안 돼요. 빌려서라도 줘야 돼요.
그러면 이 사람은 ‘내가 행하지 못해서 죄인인 것을 아는 것’과 ‘나는 그냥 있어도 원초적으로 죄인인 것’의 다름, 행하지 못해서 죄인인 사람은 지옥 가고, 원초적으로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천국 가는 노선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표정들이 안 믿는 표정들인데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은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 말씀을 못 지키지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져서 성령님이 오시면 여러분의 힘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이 말씀대로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100%가 가짜입니다.
“전에는 돈을 헌금할 때 아까워하면서 냈는데 지금 은혜를 받고 난 뒤에 이제는 자발적으로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100% 가짜입니다. 절대 그 사기꾼, 조희팔에 넘어가지 마세요. 그거 다단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넘어갈 거에요. 돈은 우리가 남한테 넘겨줄 수가 없어요. 저 사람한테 돈이 넘어가는 일, 주님께 그런 일은 아예 없어요. 나에에 찾아온 사람이나 만난 사람이 둘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만났느냐, 그것만 봐요.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가 원인이 아니고 우리가 결과일 때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히브리서 11장 6절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일하신다는 뜻이거든요. 일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 “상”은 우리가 아니고, 미래의 것을 미리 당겨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런 행위 자체가 내가 원인자가 아니고 원인자가 따로 있음을 증거할 때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이제 7절 노아로 넘어가 봅시다. 노아라고 하니까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고 갑자기 친근해지네요. 날 때부터 4.2kg.. 노아는 ‘안식’이라는 뜻이거든요. 이름에 ‘안식’이라는 말을 붙였다는 것은 결국 ‘안식’이 있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안식’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고 네가 하는 짓을 알아라. 안식할 만한지.. 하는 짓은 개판이면서 무슨 안식을 누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노아가 등장했는데 이것은 노아가 그 시대의 평화, 그 시대를 천국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그 시대를 뭉개버리고 다른 세계, 그 시대를 밀어붙이고 그 밀어붙인 세상에 등장할 다른 세계를 앞당겨서 일찍이 보여주는 특수한 임무를 지닌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를 믿으라는 말은 이 세상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돈 없다고 교인에게 10만원 빌려 오지 말고 돈 없이 살게 된 것을 고맙게 여기고 굶어죽을 준비를 하라. 그것이 너한테 할당된 너의 임무다. 마음 편하게 먹고 하나님께 오라.’
참새를 주께서 키우잖아요. 그러면 언제까지 키웁니까? 굶어죽을 때까지 키우죠. 그러니까 아무리 키워도 결국 굶어죽여서 그만 키우시는 거에요. 바깥에 들풀은 잘라서 아궁이에 들어갈 때까지 키우잖아요. 아궁이에 들어갈 때 이미 들풀의 임무는 끝난 거에요. 임무 제대한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마냥 우리에게 밥을 먹이지 않습니다. 마냥 키우지 않습니다. 주께서 필요한 만큼만 키워요. 따라서 더 살려고 욕심 낼 필요가 없어요. 이 전도서에 나오는 내용을 보세요. 너무나 낯선 내용들이 나와요.
“세상? 세상 뭐 있어, 한 방이야. 그저 살아있을 때 아내와 맛있는 것, 좋은 것(포도주가 언급되어 있거든요.) 마셔가면서 제발 재미나게 살아라.” 우리가 재미있게 안 살겠다는 말은 더 살고싶어하는 욕심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거에요.
왜? ‘헛되다고 분명히 했는데 헛되다고 하면서 왜 꿈지럭대면서 거기에 기거하려고 시도하느냐? 내 말은 말같지도 않느냐?’ 이렇게 나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헛되다고 했으면 떠날 생각을 해야지 헛되다고 해놓고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하는가 하는데 좋은 일은 없어.’
“공부하면..” “공부한 인간이나 공부하지 않은 인간이나 똑같애.” 전도서 이야기입니다.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나 안 착한 사람이나 결과는 누구나 가름할 수 없어. 착한 사람도 망할 수 있고 못된 사람도 잘될 수 있고..” 그게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전도서에 나와요.
어려우면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라는 책이 나와 있기 때문에 그것 보시면 돼요. 하루하루 재미나게 살고 감사하게 살면 된다는 뜻이에요. 성경은 허무주의 같은데 이상하게 낙관주의지요. 비관적인 것 같은데 속에는 세상에 이런 긍정적인 삶이 또 있겠어요? 전도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를 다른 말로 하면 “기쁘고 기쁘고 기쁘고 기쁘도다, 모든 것이 즐겁도다”에요. 빚잔치 하겠다는데 즐겁지요. 인생을 말아먹겠다는데 즐겁지요. 희망을 갖지 말라는 거에요. 왜? 희망은 다른 데에 있기 때문에.. 희망은 위에서 주는 것이고 네가 생각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에요. 노아의 이름이 안식입니다. 그러니까 집사님의 손자의 이름이 노아라고 했는데 아마 그 애는 구름 위로 살아야 될 거에요. 이 땅을 딛지 않고 구름 위를 살듯이 그렇게 살면 적당해요.
이 노아가 다른 세계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다른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보고 싶어 하지요. 이것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어디 안에? 다른 세계를 지금 지상에 있는 식으로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지상에 있는 물건들(사물들)로 응축시킨 것이 방주입니다. ..어려워요.
초등학교 때 공작시간에 보통 종이로 장난감집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이걸 짜부러뜨려서 뭉개버립니다. 그러면 형체는 날아가고 납작하게 되어 있지요. 이게 홀로그램의 원리에요. 홀로그램이라고 하는 것은 얼핏 보면 얼룩덜룩인데 3D 안경으로 보면 입체로 보이지요.
이 얼룩덜룩한 무늬 안에 레이저 광선의 정보가 함축되어 있는 거에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빛을 그냥 보내고 하나는 레이저 광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이걸 모아(합류해)보면 두 가지 정보가 있고 그걸 사람이 두 개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보게 되면 원래에 있던 정보가 입체적으로 보인다는 원리가 있어요. 이게 홀로그램의 원리에요.
노아가 짜부려져 있으니까 사람들은 노아를 보고 잠수함이야, 이게 무슨 세월호야, 이게 뭐야, 배야, 이것밖에 안 보이지요? 이걸 배로 보는 거에요. 이걸 낯선 세계로 안 보는 거에요.
이걸 왜 낯선 세계로 안 보는가 하면 기존 세계가 너무나 명백하게 자기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환경에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이 “나”거든요. 우리는 나 혼자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입장(욕망)에 맞추어서 내가 있는 거에요. 남들이 요구하는 욕구에 맞추어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 보기에 내가 어때?” 항상 우리는 남에게 말하지 않아도 시선 자체가 남을 경유해서 내 행동을 결정짓습니다.
‘아, 이런 행동 하지 말라는 말이지! 알았어. 그 행동 안 할게.’ 그 행동을 안 함이 나의 양심이 되고 그게 굳어져서 나의 습관이 되고 내 성질이 되고 내 성격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편 죽고 자식 떠나고 다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행동이 개차반이 되지요. 그 다음부터는 아침이슬 먹고 ‘아이고, 당신 나 놔두고 벌써 가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냐?’ 맨날 술로 달래고 ‘심심해서 못 참겠다. 어디 남자 없나?’ 해가지고 캬바레에 가서 바닥 비비고 안 꼬시려고 하면서 자꾸 꼬시기를 기대하고.. ‘나 이런 여자 아니요.’ 하면서 자꾸 본인이 기대고..
주위에서 더 이상 내가 이런 인간이어야 되는 필요성이 날아가 버렸어요. 왜? 주시하고 관찰하는 시선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대표적인 것이 거리에 속도측정기가 없으면 차가 어떻게 달립니까? 날아가죠. 새로난 도로에는 그냥 시속 140km입니다. 서서히 경찰이라도 하나, 둘 다니기 시작하지요? 시속 100km로 갑니다.
시험이 없다고 하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나는 내 실력 얼른 측정하고 싶어.’ 이런 학생 없습니다. 반에서 어느 정도 석차인지 아버지가 궁금해하셔요. 그것 때문에 시험을 봐요.
본인한테 물어보면 자기는 공부를 잘 한대요. 자기는 맨날 책 펴놓고 공부한대요. 그런데 시험 보면 꼴찌에요. 성적이 안 나와요. 꿈속에서는 자기가 천재에요. 그런데 시험 보면 운전면허증도 못 따요.
노아 때 상태를 이렇게 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6가지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관심사가 없어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이 6개의 관심사에 이미 함몰되어 있습니다. 빠져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어디에 가요? 교회에 가요. 그리고 교회에 가서 기도한다고 내놓는 것을 보세요. 내놓는 모든 내용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에 관련된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그걸 한 마디로 “돈 벌자.”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주여, 돈 주시옵소서. 주여, 집 사주세요.' 쌍둥이 애들 통성기도하는 것 봤지요? 그걸 보고 누가 애들을 작은 무당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아무 말도 못하는 애들이 그걸 하는 거에요. 유튜부에 나와요. 나중에 보세요. 나옵니다.
그 기도하는 내용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나는 그런 게 필요없는데 남들이 나한테 ‘너는 그렇게 살아야 돼.’라고 이미 타인의 시선 속에 포위되어 있는 거에요.
‘가정주부가 저래도 돼?’라든지, ‘적어도 남자가 20살 되었는데 그래야 돼?’ 꼭 남들의 시선에 의해서 맞추어주는 인생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구약에서는 두 자로 이야기합니다. “애굽”.
「출애굽기 속의 그리스도」라는 책 본 적 있습니까? 거기 첫 문장에 나와요. 인간은 출애굽 할 이유가 없다. 살기 좋은 세상.. 그리고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도 나 자체가 세상이 그렇게 되는 데에 기여를 했어요.
남 탓하지 마세요. 내 욕망이 이 세상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데에 나도 그걸 요구했어요. “나” 자체가 “애굽”인데 “애굽에서 탈출한다”는 말은 “지금의 나가 아닌 나”로 가위표를 친다는 말인데 “내가 아닌 나”가 되어 버리면 나는 뭐죠?
그걸 상상도 못 하죠. 그래서 “출애굽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라고 책 첫 페이지에 나와요. 책 덮어버리면 다 잊어버리지요.
노아가 그 시대에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냐?’ 흔히 하는 말로 “네가 그런 소리 해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다.”에요. 이 말을 얼마나 들었겠어요?
그런데 노아는 할 말이 있어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거에요. 내가 전도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단독자가 아니어서 그런 거에요. 노아는 단독자가 아니에요. 노아는 결과물입니다.
보이지 않는 숨어계신 주님, 장차 오실 십자가가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물을 미리 앞당겨서 예수 그리스도로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불평을 얼마나 했겠어요? 노아가 불평했다는 것은 성경에 안 나오지만 노아와 같은 노선에 있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보세요.
예레미야가 걸핏하면 불평을 하지요. 주의 복음을 전하니까 남들이 “너는 입만 벌리면 욕을 한다.”고 하지요. “주여 내가 욕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안 하려고 했는데 주께서 불같이 말씀을 주니 안 할 수가 없었나이다.”
백날 성경을 써도 여호야김 왕이 옆에 있다가 쓰면 찢어버리고 쓰면 찢어버리고 보란듯이 성경책을 쪽쪽 찢는 거에요. “네가 백날 해야 나한테는 헛소리야.” 이런 식으로 모멸감과 모욕감을 줄 때 얼마나 외로움을 느끼겠어요?
그런데 혼자서 예레미야는 천상회의에 참석했어요. 롯데 호텔 37층, 신격호 가족들 있는 그 동네에서 재벌 임원들 참석하는 것처럼 참석한 뒤에 “너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주께서 “예레미야야, 네가 네 모든 계시를 함축화해서 울어라.”라고 부탁하셨고 그 부탁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세상을 보고 탄식하여 우는 사람을 보고 예레미야를 닮았다고 하죠.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우리 속에서 매일같이 반복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다음에 이야기해봅시다.
이것이 홀로그램처럼, 3D 입체 사진처럼 방주 안에 함축이 되어 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방주의 구조를 핀셋으로 하나하나 펼친 그림 펼치기하는 것처럼 펼쳐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오는 세상이 도대체 어떤 세상이기에 요따위 식으로 이렇게 하느냐?’라고 되어 있을 거에요.
그걸 펼쳐보면 딱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 7쌍과 부정한 짐승 2쌍이 들어가거든요. 노아는 정결한 짐승 쪽에 서면 안 되고 부정한 짐승 쪽에 서야 돼요. 노아가 최후에 남은 인간이잖아요. 노아밖에 인간이 없는데 모든 인간은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일하게 오늘 강의 제목(대타)처럼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의 두 노선이 있다면 노아는 부정결한 짐승의 노선에 서야 돼요. 노아가 벌거벗었을 때에 자식이 얼레리꼴레리 했지요.
그런데 그 자식이 누구의 자식입니까? 노아의 자식이죠. 그러면 저주 받은 자식은 본인의 몸에서 나왔지요. 그러면 노아의 안에는 저주의 요소가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그리고 처음부터 노아가 술을 안 먹었으면 괜찮아요. 그리고 술을 먹어도 바지를 입고 먹으면 괜찮아요.
누구의 말대로 만취해서 무슨 죄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안 되고.. 만취해가지고 필름이 끊길 정도로 했어요. 바지를 벗었는지도 몰랐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은혜라는 것은 다른 노선에서 와요. 노아는 결과물이에요. 원인은 숨어있어요.
그런데 정결한 짐승으로 숨어있는데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정결한 짐승을 죽여 버립니다. (부정한 짐승을 제거하는 것이 아님) 정결한 것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결국 특수한 죽음의 정보가 담긴 것이 “방주 안”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세 자로 말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특수한 죽음이기 때문에 이 죽음을 죽음답게 하려면 우리(인간)는 날 때부터 악해야 됩니다. 창세기 8장을 한 번 봅시다. 8장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이런 것을 설명하려면 복잡하니까 빨리 가겠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제사를 받음으로써 우리한테 주님만 아시는 어떤 정보를 제공하시는데 그 내용이 주님의 본질에서 나와요. 그 본질이 구체화되면 예수 그리스도고요.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죄를 지어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을 때만 악해지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악하기 때문에 악한 티를 내는 것이 인간의 한 평생이에요. 심지어 요양병원으로 갈 때까지 계속 해서 악해요. 마지막 죽을 때도 죽고 난 뒤의 걱정까지 다 하고.. 죽고 난 뒤의 걱정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형제들끼리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재산 나눠라.”고 백날 얘기해도 소용 없어요.
태어나면서부터 악한데 악하면 저주에요. 그런데 악한데도 불구하고 저주를 안 받아요? 그러면 저주를 안 받는다는 말은, 악함은 따로 있고 저주를 안 받는 요소를 따로 겹쳐야 되겠지요.
그 겹치는 것이 “노아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여기 분명히 노아 당시에 노아의 언약은 “방주”였어요. 그 “방주”가 반복이 되면 “무지개”로 바뀝니다. 그 전까지는 “무지개”가 없어요. 노아의 방주 이후에 무지개가 처음 생기면서 무지개가 계속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지개가 생겨날 때마다 뭘 생각하라는 겁니까? 우리는 지금 물이 꽉 차 있는 어항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진작에 물에 빠져야 될 인간들인데 보세요, 귤에다가 떡에다가 케이크도 있잖아요. 심지어 숨도 쉬잖아요.
우리는 숨쉬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임을 언제 생각합니까? 모르잖아요. 그런데 호흡기가 안 좋아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높은 산에 가서 등산하다가 고산병에 걸릴 때 이 산소라는 것이 돈을 주고도 못 살 귀한 것이라는 것을 그때에 압니다.
제가 언젠가 예를 들었습니다만 가장 약오르는 것이, 병원에 입원해서 환자복 입고 창문을 열어서 밖을 보는데 나보다 더 나쁜 짓 한 놈이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하면서 웃고 지나가고 있고 나는 별로 나쁘지도 않은데 여기에 병들어 가지고 링거 맞고 있을 때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저주를 주십니까?’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시기와 질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숨쉬고 건강하고 밥 잘 먹는 것이 그냥 네가 인간다워서 주는 줄로 알았어? 보너스야. 보너스 없이는 하나도 없어.’
모든 것이 그냥 보너스로 주는 거에요. 일 하지도 않은 자에게 의롭다 하심의 증거로서 우리를 지금 살게 하시는 겁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 잘 나온 것이 여러분이 줄 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은혜입니다.
노아의 그 외로움을 지금 우리한테도 반복시키는데 우리는 늘 돈에만 관심이 있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거기에다만 관심을 두다가 보니까 정작 은혜에는 관심이 없이 살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노아의 방식을 순간순간 사태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특수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되새기게 만들지요. 그래봐야 한 3초밖에 안 가지만요. 오죽했으면 이사야에 너는 개만도, 소만도 못 하다고 합니까?
소와 개는 자기 주인을 아는데 너는 평소에 네가 주님이 주신 은혜로 살면서 내가 열심히 밤에 야근까지 하면서 이만큼 살았다고 하면고 네 행함으로 돌리고 새벽기도 해서 은혜 받았고 십일조 해서 복 받았다는 소리를 하느냐 말이에요.
그러면 노아의 기능을 우리가 방해하는 거잖아요. 11장 7절에 보세요. 거기에 보면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라고 나오는데 노아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부정적입니까?
왜 노아에게 이런 부정적 사고방식이 있느냐 하면 이미 긍정적 세계(영역)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맘껏 세상을 부정적으로 봐도 노아는 느긋한 겁니다. 방주가 이렇게 큰데 몇 명 오지도 않는다는 것을 신경쓸 필요도 없어요. ‘오면 오고 말면 말아라. 아무도 안 오면 끝까지 우리 식구끼리 가지 뭐.’
이 사명, 전도 안 하는 사명이 전도의 사명입니다. 오늘 또 희한한 말을 합니다. 특히 똥배짱 내밀고 전도 안 하는 그 고집, 함경도 고집인지 충청도 고집인지 모르겠지만 기어히 전도 하지 않는 고집을 통해서 전도되게 하십니다.
사람이 전도하려고 애쓰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요. 그러면 상대방이 이용합니다. “교회 가줄게. 너는 같이 등산 가줘라. 정수기 하나 놔줄래?.”라고 꼭 이용해 먹게 되어 있습니다. “아줌마 교회 갈 테니까 좀 싸게 해줘요.” 교회 가는 것과 싸게 해주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오지 마. 오기 싫거든.” 이런 배짱이 있어야 됩니다. 왜 그런 배짱이 있습니까? “나도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고 질질 끌려왔거든.” 강제입대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한 마디로 정신대라고 하면 돼요. 강제로 끌려왔어요. 우리는 아베 총리를 찬양해야 돼요.
‘주께서 끌어주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천국까지 오겠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루 24시간 온종일 거기에만 승부를 건 인생인데.. 그거 못하면 실패했다고 여기고 그거 해야만 성공했다고 여기는 그런 사고방식에 우리는 물들었고 내가 그런 물을 입혔고 내가 성공하느라고 남에게 피해를 입혔고 그런 배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인데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우리를 특수한 존재로 이렇게 끌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거리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면서 내 자신이 방주가 되어 버려요. 왜냐하면 내 안에 대신(대타로) 죽으신, 정결한 짐승 되시는 주님이 계시고 나는 그 앞에서 더러운 짐승으로서 동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최성수의 ‘동행’이에요. ‘누가 나와 함께 할 수 있느냐?’ 집에서 강아지만 키우지 마시고 내가 주님의 강아지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아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소속된 것처럼, 저희들도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이지만 하늘나라에 이미 소속되어 있음을 남한테 자랑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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