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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12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9-메를로-뽕띠자유게시판[신학]

201512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9-메를로-뽕띠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512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9-메를로-뽕띠

(강의:이근호 목사)

‘명증적’이라는 건 확실한 것, 말할 필요 없이 딱 보면 느껴지는 것.

우리가 두 번째 시간에 해야 될 일 뭐냐 하면,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거예요. 신체에서 바깥의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건 맞아요. 그런데 그 결과가 살이에요. 우리 신체와 자연과 상호작용해서 매번 달라지고 변동되는 그 결과물을 메를로-뽕띠는 살로 본 겁니다.

-이 살이 아니네요?

이 살 맞아요. 지금 좋은 질문했는데 이 살이 아니라 했잖아요. 그게 기존의 과학적 인식, 자아에서 나오는 살을 신체로 보는 겁니다. 살은 자아가 성립될 때 이게 살이네, 신체네 하지 살 안에서는 주체라는 게 없어요. 살이 그냥 살을 계속해서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주체를 없애보자는 거예요. 내 신체가 한 게 아니고 내 자아가 한 게 아니고 이 살이 한 거예요. 살은 누구 작품이냐? 대자연의 작품이 되죠.

여기 3페이지 봅시다.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위에서 아홉 번째 줄에. [신체적 응시를 실행하고 있는 우리에게 진짜로 존재하는 공간은 오히려 착시로 여겨지는 신체적 공간이어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물 컵을 보는 순간에 이걸 봄으로 말미암아 살이 아닙니다. 내 신체입니다. 신체가 평소에 갖고 있던 공간감이 새롭게 확인이 돼요. 이 물병은 책상 위에 있다고 판정내리는 것은 지나간 한 물 간 그동안 내 신체가 갖고 있던 공간감에서 나오는 일방적 주장이 됩니다. 컵이 옆에 있네. 이것도 일방적 주장이 돼요.

그런데 살은 뭐냐 하면, 컵 있고 이거 있고, 그래서 나중에 결과물로 확인되는 그게 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체에 있을 때는 내가 이걸 보는 주인이 되잖아요. 내가 본다가 되는데 살은 뭐냐? 너희들 때문에 생겨버린 게 살이 되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이게 관계에요.

아빠, 엄마는 왜 차 안 사줘? 대학교 들어갔다고 차 사달라고 땡깡 부릴 때 이건 철이 없지요. 그럼 철이 있는 건 뭡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대학 들어간 것도 아빠, 엄마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하면, 누구나 철났다고 하잖아요. 왜 갑자기 아빠, 엄마 덕분에 내가 이렇게 됐다는 것은 철이 난 거고, 차 사달라는 것은 왜 철이 없는 겁니까? 그걸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해봅시다. 어떻게 한쪽은 철딱서니 없는 거고 또 한쪽은 정말 철이 있는 착한 짓이 되는 겁니까?

주체가 바뀌었지요. 착한 아이는 주체를 누구를 봅니까? 아빠, 엄마 덕분에 내가 있다고 보지요. 그럼 네 주체는? 없어도 되지요. 적어봅시다. 복음적으로 너무 중요한데. 나는 없어도 괜찮다고 살아가란 말이죠. 이만한 윤리, 도덕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불교 승려가 도 닦는 이유가 이것 하려고 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나를 없앨까? 나만 있으면 모든 세상을 내 잘남으로 보잖아요. 내 중심으로 보지요. 그게 죄를 일으키고 악을 일으키니까.

특히 불교에서는 내가 있음으로 욕심이 생겨요. 욕심은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미흡이 생기고 미흡함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 받고 고통 받아요. 그래서 고통을 면제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살아볼까? 고통 없이 사는 방법은 나를 없애면 돼요. 그런데 불교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고통 없이 살아보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이게 문제에요. 바보 같이 고통 주면 감사하다고 받으면 되는데 다른 건 줘도 괜찮은데 고통은 싫데. 누가 싫은데? 내가 싫데.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살아 있잖아.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았지요. 아프지요. 안 아프면 기계고. 스데반 집사는 아프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주여,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나오지요. 이걸 한 마디로 말해서 스데반 집사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관계성 안에 있지요. 돌 던지는 일에 발생되는 그 주인공은 본인이 아니고 다른 분에 의해서 야기된 상황입니다. 그 관계성 안에 놓여있음을 스데반 집사는 그대로 수용하는 거예요. 이걸 메를로-뽕띠 식으로 하면 신체가 아니고 살이 되는 겁니다. 나는 신체가 있다. 신체에서 의식이 나왔다. 내 신체에서 세상을 이렇게 본다. 내 신체를 우선하는 것도 문제 있다는 겁니다. 신체마저 포기하고 신체를 살로 바꾸는 방법은 상호작용,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3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봅시다. [추상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 생리학자들은 신체와 별도로 그것의 선행적인 상위의 능력으로서 의식의 범주를 설정해왔다.] 생리학자들이 신체를 어떻게 자극을 주니까 정신이 나오고 그 정신에서 의식이 나온다고 본 겁니다.

여러분들이 음악치료, 미술치료 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정신치료를 위해서는 상관관계 없는 음악, 미술 같은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 겁니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에 보면 나오잖아요. 책장이 책을 두드리는 게 있지요. 다른 차원에서 이쪽 차원을 향하여. 그걸 물리학으로 설명할 때는 의식으로 설명해요. 이 우주는 파동으로 돼있습니다. 파동을 신체적으로 표현하게 되면 의식이 돼요. 그래서 무생물과도 얼마든지 사람이 소통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장미를 키울 때 팝음악이나 락음악보다 모차르트 음악을 틀어놓으면 실제로 결과적으로 과실이 여물고 단단하고 맛있고, 팝음악 틀어놓으면 아주 맛없고 짜증나고. 짜증난다는 것은 모든 대자연도 같이 짜증나는데 그걸 더 분석해보면, 그 안에서 원자, 분자로 돼있고 원자, 분자 안에는 파동으로 돼있고 그게 바로 에너지의 덩어리에요. 이걸 들뢰즈의 철학에서는 반복이 스톱될 때 하나의 물질이 되는 거예요. 에너지의 반복이 잠시 스톱되면 물질로 전환되는 거예요. 과학자들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고 철학자들은 그걸 이용해서 설명하고.

그러니까 에너지의 흐름을 다른 말로 의식이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걸 메를로-뽕띠는 반대하거든요. 그게 바로 생리학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걸 의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그걸 추상적 정신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유가 사실은 이미 사유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사유층, 신체층 따로 있다고 두 개를 분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본 거예요. 신체에서 사유가 나온다, 신체에서 의식이 나온다, 신체에서 자아가 나온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그전에 두 개를 나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동안 생리학자나 과학자들은 이 둘을 하나로 바꿀 수 있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데카르트를 물질과 영혼, 이분론이라고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욕을 하는 본인은 어떤 대안이 없는 거예요. 욕을 하면서도 본인도 추상적인 실제적인 것, 구체적 운동과 추상적 운동으로 나눴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성경해석과 어떻게 연관되느냐고 물으면, 전부 다 연관되지요. 성경에서 무시로 기도하라 할 때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라는 명령이니까 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지금 기도합니다, 라는 의식을 하지요. 그러면 메를로-뽕띠에서는 이미 틀렸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아에서 나온 기도이기에 잘못된 건데 그 자아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과거의 신체에서 관행적으로 관습적으로 알고 있던 시공간에서 나온 기도가 되는 겁니다. 아까 시공간 이야기를 제가 중간에 뺐어요. 그걸 설명하게 되면 너무 어려운데. 3페이지 밑에서부터 나오거든요. 뺄까 생각했는데 갑자기 못 빼겠네요. 그냥 제가 읽어보고 설명하겠습니다.

[“추상적 운동은 구체적인 운동이 전개되는 가득 찬 세계의 내부에 반성과 주체성의 영역을 움푹 들어가게 하고 잠재적이거나 인간적인 공간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대체해놓고 만다.” 그러나 물리학이 근거되어 있는 신체의 운동 이전에 객관적으로 실제하는 공간 개념은 현상학적 반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비반성적인 것이다. 환원에 의하면 이러한 공간은 신체로부터 파생된 원근법적 공간이 ‘자유변경’(반성)됨으로써 무한한 응시의 총합으로 구성된 잠재적 공간으로 판명될 것이다.]

도대체 이 문장이 무슨 말을 합니까? 이런 겁니다. 이미 인간이 시공간을 벌써 과거부터 갖고 있었어요. 추상적 운동과 구체적 운동을 분리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걸 반성하자는 거예요. 그걸 현상학적 반성이라고 합니다. 반성은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나오기 이전, 근원적으로 되돌아가자. 그걸 환원해보자는 겁니다. 환원했을 때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신체가 그 다음에 반성한 결과다. 다시 자기를 돌아보는 반성한 결과일 뿐이란 말이죠.

그런데 반성이 이뤄지는 것이 신체가 반성하는 게 아니고 신체가 낳은 추상적 정신적 공간을 주고받고 하면서 나온 게 반성이란 겁니다. 그러니까 반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가 된 게 아니고 늘 둘이 되면서 반성 제대로 했어, 못했어? 늘 이런 식으로 반성한다는 겁니다.

4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봅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우리는 신체와 별도로, 자유변경하고 구성을 행하는 주체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신체는 이런 구성을 행하는 주체가 아니라 구성된 공간에서 운동하는 수동적 주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신체 이전에 주체라는 영역을 따로 산성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메를로-뽕띠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말 맞잖아. 네가 자꾸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네가 지금 옳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 신체 말고 주체 있잖아, 라고 한다면, 메를로-뽕띠가 반발하기를 그 다음에 심맹환자의 경우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또 환자가 나와요. 아까는 환지통 여기는 심맹환자.

심맹환자가 뭐냐 하면, 의식도 없으면서 흉내는 낼 때 정신없이 행동하는 것. 어떻게 그런 행동할 수 있느냐? 그건 정신이 있는 게 아니고 신체 자체적으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신체 따로 있고 정신 따로 있다고 주장하느냐고 메를로-뽕띠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4페이지 밑에 봅시다. [병이란 어떤 특질이나 본질의 결여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기-조절 체계이다.]

당신은 병들었어, 라는 말이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병든 게 아니고 병이 당신으로부터 독립한 거죠. 내가 암 걸린 게 아니고. 내가 암 걸렸다하면 암이 기분 나빠요. 병이란 말을 빼자는 거예요. 각자 내 안에 독립적인 암이라는 자기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암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암의 입장에서는 암이 살려고 내 몸을 이용한 건데 자꾸 암 걸렸다고 나쁘다고 보는데 그러지 말자는 거예요. 병에 안 걸려야 정상이라는 생각은 네 주체가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병들면 내 속에 암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받아들이면 그만이잖아. 왜 그걸 나쁜 것으로 보고 왜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느냐? 그건 평소에 네 신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병에 안 걸려야 된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 이렇게 메를로-뽕띠는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참 살기 편하죠.

5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우리가 신체를 매개로 세계에 물음을 묻고 다시 사물들이 신체에 응답하는 방식이 어떤 공통성을 획득할 때, 이른바 그것은 습관적 행동이 된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메를로-뽕띠가 예를 드는 행동이 자동차를 몰고 피아노를 연주인데 이게 의식에서 하는 행동입니까? 아니면 무의식의 행동이에요? 무의식이죠. 그런데 왜 의식을 이야기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렇게 설명해요. 내가 자동차를 몰 때 처음에는 자동차로 나로 나 따로 에요.

그런데 나중에 한 5년 후에는 진짜 한 손으로 후진해요. 그리고 앞 범퍼 부딪힘이 내 신체와 연장된 신체의 부딪힘이라 피할 수 있는 거예요. 처음 운전할 땐 그것 힘듭니다. 내 몸 따로 차 신체 따로 있기 때문에 나한테 안 닿으면 차에 닿는지 어떤지 분명하지 않은데 이제는 운전을 많이 하다보면 내게 접촉되는 것처럼 대번 느끼게 되지요. 이미 한 통속이 됐기 때문에. 그게 자전거 타기, 악기 다루기에요. 오르간 연주할 때 그 순간만큼은 신체가 연장되는 거예요. 이걸 신체로 보자. 나중에 신체가 살이 돼요.

부모가 자식에게 욕하면 부모가 못 참지요. 왜? 자식 신체 따로 있고, 부모 신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부모는 영원히 자기 신체의 연장이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딸이 어디서 뭐하든지 아들이 무엇을 하든지 내 살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자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유산이나 많이 남겨주는 그것만 기대하고 있지 딴 거 생각 한 하거든요.

그 다음에 6페이지 봅시다. 중간에 읽고 물어볼게요. [만약에 창 밖에 모자와 외투를 입고 가는 타인을 응시한다고 치자. 내가 나의 시선을 내부로 향하는 신체도식을 통해서 인칭적 의식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더라도 다시 내가 눈을 돌려 창 밖에 있는 저 모자와 외투를 입은 물체를 응시할 때는 이러한 신체도식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 대신에 나의 고유의 신체는 응시를 통해서 저기에 있는 모자와 외투와 ‘함께 조직되어’ 새로운 체계를 형성시키게 된다.]

자,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내가 창밖을 우연히 보고 있는 어떤 신사가 모자와 외투를 입고 가는 걸 봤습니다. 그 다음에 아들이 “아빠, 뭘 보고 있었어?” “어떤 신사가 모자 쓰고 외투입고 가는 걸 봤어.”라고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내 인생 역사에 있어서 그 신사를 봤다고 할까요, 안 봤다고 할까요? 이게 질문입니다.

봤지요. 분명히 봤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지나간 일이 아니고 이미 내 신체의 일부로 편입이 된 거예요. 이게 오년 지나면 모르지요. 그럼 의식은 기억나지 않잖아요. 이미 내 신체가 되었지요. 내가 언제 봤는데. 그런 사람 본 적 없어, 라고 했는데 그 순간 우연히 창밖을 봤는데 그 신사가 지나갔을 때 뭘 느낍니까? 기시감. 어디서 봤는데, 이게 기시감이에요. 분명히 내가 돈 빌려준 것 같은데. 이런 기시감 같으면 곤란하겠지요. 어디서 봤는데?

메를로-뽕띠는 말합니다. 자아, 기억 믿지 말라는 거예요. 기억은 잊어버리기 때문에. 신체 흐름과 의식의 흐름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사상은 윤리, 도덕은 신체에 근거한 게 아니고 현재 장악하고 있는 의식에 근거해서 나는 착해야 돼. 저런 짓을 하면 안 돼. 나는 이렇게 하니까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 식으로 윤리, 도덕으로 남한테 나선 것이 그동안 인간들의 철학이었다 이 말입니다.

6페이지 대충 밑에서 열 번째 줄에 보면, 방금 이야기한 것보다 더 나갑니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엄밀히 말해서 나는 타자와의 어떤 공통적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타자의 세계에 대한 타자의 위치와 나의 세계에 대한 나의 위치는 양자택일을 구성한다.]

이게 의식의 세계에서는 의식은 인간의 신체에서 나왔기 때문에 공통점이 없어요. 나는 당신 말에 동의한다는 공통적 세계를 형성했다는 것은, 그 사람 세계의 공통점이 아니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 내가 새롭게 구성된 내 신체에서 새롭게 그 순간에 형성된 나의 세계일뿐인 겁니다.

따라서 메를로-뽕띠는 6페이지부터 구조주의를 언급하지요. 구조주의가 7페이지에 나옵니다. [구조주의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과부하 된 주체 개념, 절대화된 주체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자기 동일적인 실체로 있지 않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단 법이 없으며 순간순간 나를 다른 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구조주의에 의해서 보게 되면 인간의 주체는 없지요. 데카르트는 절대 주체를 찾고자 했고 후설은 그것을 끝없는 반성을 통해서 찾고자 했지만 구조주의에 들어가면 아예 주체란 게 없습니다. 그래서 메를로-뽕띠는 구조주의에 동의하고 있어요. 그 이유가, [현상학자들에게 내 바깥에 있다고 믿는 세계는 사실상 그 보다 상위의 ‘나’를 통해서 가능한 세계, 즉 상위의 ‘나’의 안에 있는 세계에 불과하다. 이 ‘바깥’은 진짜 바깥이 아니며 나의 존재 위계를 통해서 안과 밖의 변증법적 운동에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일방적으로 정한 안과 밖 또는 아래 위, 그렇게 정해놓고 나는 그 속에 어디에 포함됐지, 라고 하는 그 생각조차도 내가 만든 세상이기 때문에 그 현상학적 반성된 주체도 잘못됐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구조주의 주체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메를로 뽕띠는 다 받아들이지는 않아요. 구조주의를 반대합니다. 구조주의는 신체에서 이야기하는 주체는 없다고 한 건 맞는데 살에서 나오는 주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체에서 살로 전환은 어떻게 되는가? 그게 키아즘으로 설명돼있는데 어려우니까 넘어갑시다.

7페이지 마지막부터 8페이지 초반을 봅시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나의 시선이 타자의 시선과 마주할 때를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타자를 보았을 때, 타자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면 내가 보는 것은 나를 보는 타자의 시선이다. 즉 타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타자를 보는 동시에 타자의 시선이 닿는 내 자신을 간접으로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신체의 보는 힘의 또 다른 면이’다.]

제가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고 있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시선 속에서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을 그 사람 속에서 뽑아내서 내가 보게 된다. 그러면 차이가 나요. 내가 그 사람을 보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보는 것 속에 내가 그 사람 보는 것과 서로 다르게 돼요. 이걸 니체는 힘이라고 한 거예요(8페이지 중간에). 그런데 그 힘을 니체는 놀랍게도 죄로 본 겁니다. 이게 시선의 마주침이거든요.

아이가 서랍에서 돈을 꺼내는 순간 그 자리에는 서랍과 아이밖에 없지요. 그런데 서랍은 타자가 아니기 때문에 시선이 없잖아요. 돈을 꺼내도 자기는 일방적으로 서랍을 이용할 뿐이죠. 그 순간 문을 열고 “너, 지금 뭐 하는데?” 하고 엄마가 들어왔으면, 그 아이가 보는 서랍과 엄마가 서랍을 보면서 그 안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달라요. 니체는 거기서 힘을 느끼는데 타인의 힘에서 죄의식이 발생되는 겁니다. 니체가 말하기를.

“엄마, 잘못했어요.” 혼자서 서랍을 열 때 잘못했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물론 과거 엄마 기억은 하겠지요. 하지만 몰래 하면 죄가 안 되는데 현장에 엄마가 와서 “너, 뭐하는데?” 하는 순간 추상적 죄가 현실적 죄로 달라졌잖아요. 현대자본주의에서는 타인의 시선에 안 들키면 돼요. 들키면 뭐라고 합니까? 에이, 재수 되게 없다고 하지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행동할 때 누구 지시받습니까? 내 지시 받지요. 그러면 서랍을 연다, 돈을 꺼낸다. 누가 지시한 거예요? 내 자아가 나한테 지시했잖아요. 그러면 그대로 행동하면 되잖아요. 엄마가 들어오든 아빠가 들어오든 행동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엄마, 잘못했어요, 이게 왜 나와요? 이 세상은 힘과 힘의 충돌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내가 만드는 내 힘만 있는 게 아니고 타자가 만드는 힘이 있지요. 있는 것만 아니고 평소에 엄마한테 들켰으면 빌라고 그동안 나를 그런 존재로 만들어왔어요.

아이가 엄마한테 잘못했을 때 중력을 이기고 두 손바닥을 열이 나도록 비빈다. 이게 어느 물리학 책에 나옵니까? 엄마, 내가 두 손바닥을 비비면 여기서 열난다. 내가 물리시간에 배웠어. 이것 이야기하려고 딸이 지금 비비고 있는 겁니까? 실습한다고. 아니죠. 나오는 답변은 뭡니까? 엄마, 잘못했다고 빌지요.

그걸 계속 활용해봅시다. 교회 가는데 11시 예밴데 늦었어요.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니체는 이걸 스스로 내리는 벌칙으로 보는 거예요. 여자들이 뭔가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때 특히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립스틱 짙게 바르죠. 본인이 본인에게 내리는 벌인데 사실은 원인제공은 헤어진 남자 쪽에서 제공했지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전부 다 죄를 의식해서 나오는 행동이다. 니체의 이야기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이제는 그런 짓 그만하고 네가 스스로 신이 되어라. 그걸 초인이라 해요. 어떤 도덕에도 굴하지 말고 도덕은 네가 만들면 된다. 네가 만든 도덕으로 네가 살아라. 타인의 도덕에 의존하지 마라. 그래서 니체는 아주 기독교를 싫어한 거예요. 특히 산상설교를 아주 싫어한 겁니다. 예수님은 좋아하면서 산상설교는 싫어했어요. 희한해요. 왜 예수님을 좋아했느냐 하면, 자유자거든요. 예수님이 인간의 모델이지 지시받는 사람이 아니고 인간의 모델이에요.

예수님을 모델로 봤고 지시받는 쪽으로 본 사람이 가룟 유다잖아요. 예수님을 이용 대상,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어 했지 사실은 주님한테 굴복하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가룟 유다를 현대인들의 모델로 보는 겁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의 모델이 가룟 유다지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이지 복종할 생각을 안 해요. 그걸 니체가 이야기하고 메를로-뽕띠가 이야기해주니까 이란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워요. 내가 모르는 나의 진솔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8페이지 밑에 봅시다. [모든 표현은 진리를 고정시키고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단지 진리를 자유롭게 살게 만드는 일인데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려 하는 순간 진리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참 중요한 이야기지요. 그냥 살면 되는데 하나님이여, 잘 살고 있어요, 라고 묻는 순간 잘 삶이 날아간다는 거예요.

9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입니까? [여기서 그는 신체corp 대신 살chair(혹은 몸)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그가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철학의 환경을 교체했다는 가장 직접적인 암시가 된다. 살은 기계론적인 실체로 생각될 수 없도록 만드는 묘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메를로-뽕띠는 자기 사상을 결국 묘하다.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건데 이것은 언어가 묘한 것이 아니고 살덩어리로서의 내가 묘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 묘하냐? [이를테면, 물, 불, 흙, 바람이 그러하듯이 살은 유형적으로 존재하되, 어떤 결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단히 움직이는 것, 다른 것으로 합해지고 분리되는 어떤 익명적 생명을 상징한다.]

신체는 스스로 신체를 고집하려하고 사수하려는 반면에 살은 신체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음에 든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교류가 되는 거죠. 1996년도인가 mbc에서 <애인>이란 드라마를 했어요. 황신혜와 유동근이 나오는 드라마인데 그게 사회적으로 큰 쇼크를 줬어요. 둘 이 유부녀, 유부남이었어요. 과연 사회적으로 수긍할 갈만한 사랑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그 드라마는 있다고 한 겁니다. 그게 충격이에요.

그 충격을 주면서 도움을 줬던 음악이 I.O.U(I owe you)에요. 그 음악만 나오면 드라마 보던 아줌마들 뿅 갔어요. 유부녀, 유부남인데 너무 아름다워. 아름다움이 가정을 이기는 거예요. 그것이 영향을 줘서 아마 간통죄 폐지 운동이 그때부터 시작된 거예요. 인간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법이 족쇄를 채울 수 없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메를로-뽕띠를 생각하면 딱입니다.

유부남, 유부녀는 언어거든요. 법은 언어로 만들어졌잖아요. 법은 타인의 시선이죠. 그 앞에서 우리는 손바닥 비비면서 잘못했다고 빌잖아요. 빈다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고 의식화된 거예요. 습관화된 행동이라고요.

예를 들어서 유동근이 황신혜 보고 잘못했다는 소리는 안 한 것 같은데 잘못했다고 치고 헤어졌습니다. 그러면 유동근(가만있는 유동근 욕 얻어먹어서 미안합니다^^)이 오년 뒤에 황신혜보다 더 예쁜 사람 나타났다. 김현주 같은. 항상 젊은 것은 더 예뻐요. 또 마음이 확 당겨서 유부녀는 아니지만 하여튼 했다. 그럼 잘못했다고 비는 것, 아무 소용없어요. 그런데 누가 그 마음을 혹하게 했습니까? 내 신체가 아니고 내 살이. 왜? 나는 신체로 있어요. 신체에서 살이 빠져나오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내가 내 마음대로 못하는 새로운 상황과 사태가 내 앞에 들이닥쳤을 때 유령처럼 내 신체에서 살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참 이런 강의가 우리의 어떤 행동도 정당화해주는 그런 강의가 안 됐으면 좋겠어요. 목사님, 저는 살이 빠져나갔어요. 내가 살이 저절로 빠져나가서 저는 못 말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거나 변명하지 마세요. 왜? 정당화 변명도 죄의식, 법적인 의식, 정신적 체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메를로-뽕띠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살이라는 신체는 어떤 환경 속에 있느냐? 힘 속에 있다. 그래서 힘이라는 것도 묘한 표현이고 살이라는 것도 묘한 표현이고 둘 다 비과학적 표현이 되겠지요. 그런데 비과학적 표현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신체가 있고 정신이 있고 이 정신은 신체에서 나왔다. 이것은 묘하지 않은 과학적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과학적 사고방식이 돼버리면 인간은 결국 기계에 불과하다.

과학이 얼마나 건방진지 이 묘함을 용납을 안 해요. 과학은 묘함을 싫어합니다. 기계적으로 합법적으로 맞아야 돼요. 법도 합리적 이성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은 묘한 것은 기계적 사고방식으로 바꾸어서 이걸 법제화시키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정당하다, 정당하다. 하지만 메를로-뽕띠는 정당한 것도 없고, 나쁜 것도 그런 것 따지지 말고 그냥 묘하다. 그걸 정리하려고 한다면 주체를 또 상정해야 돼. 그러지 말자. 묘하면 묘한 대로 살면 돼요. 물론 묘한 것과 띵한 것은 구분해야 돼. 띵해서 살면 안 되고, 아이큐 낮은 거고. 묘한 거예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계속 넘어가서 12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의미작용은 기호를 넘어서 빛나지만 기호들의 진동일 뿐이다.] 이건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했거든요. 메를로-뽕띠와 같은 계열이에요. [의미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그것을 붙잡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매 번 내 손에서 빠져 나간다.]

말을 해놓고 내가 무슨 뜻으로 했는지 나도 몰라. 방금 네가 말한 것 다시 해봐. 그때는 지나갔어. 같은 말을 할 수 있지만 같은 의미로는 말 못해. 이게 롤랑 바르트가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게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전부 다 신체에서 나온 게 아니고 살에서 나온 거예요. 살은 어디서 나왔는가? 살은 힘에서 나온 거예요. 각자의 신체에서 뿜어내는 힘들 속에서 묘한 힘이라고 과학적 용어로는 안 돼요. 진짜 나는 살인데 살이라는 것도 기존에 알고 있던 합리적, 과학적 용어로는 표현 안 된다. 이걸 메를로-뽕띠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냥 늘 교류되는 거지요.

13페이지 평가. 인간 몸의 애매함. 그래서 이 메를로-뽕띠의 이 이야기를 제가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논문에 보면 나옵니다. 다니엘이 받은 계시를 설명하면서 다니엘 몸의 애매함을 설명한 거예요. 그 말은 다니엘 몸을 그냥 쥐고 있으면 다니엘이 받은 계시는 다니엘 시대의 역사에 끝납니다. 그렇다면 이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이 누굴 봤다고 했습니까? 예수님. 그게 설명이 안 된다니까. 시대가 다른데요.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봤다는 요한복음 8장이 설명이 안 되는 이유가, 평소에 성경 보는 우리 쪽에서 뭔가 정리 안 되는 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뭘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는 자체가 네가 누군데, 라는 질문에 대해서 답변이 궁해지는 겁니다. 그냥 오묘한 대로 주님께 맡기면 되는데 주님께 맡길 생각은 안 하고 내가 주님을 정보를 알아서 내 것으로 만들려는 그런 악마적인 본성이 우리 속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여, 설명해주소서. 제가 알아서 구원받겠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과연 성경해석이 제대로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걸 제가 비역사적 해석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역사적 해석, 개혁주의 문제가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 누군지 모르는 정도가 아니고 내 자신이 주의 활동을 방해하는 존재인 것을 본인이 인정할 줄 모른다는.

그리고 왜 방해하느냐?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뭐가 죄인 줄 몰라요. 아까 니체 말에 죄가 뭡니까? 이미 인간은 의식하고 있는 겁니다. 선악과적 사고방식에 의해서 잘못했다고 의식한다는 자체가, 누가 잘못했단 말입니까? 내가 잘못했다는 말은 내가 잘할 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성하는 식으로 이천 년 서양역사, 철학이 흘러왔다는 거죠. 메를로-뽕띠는 그게 싫다는 거예요. 인간은 반성 자체도 의미 없고 주체도 의미 없고 그냥 애매하고 오묘하고 묘한 존재란 말이죠.

항상 부산 강의를 하면서 느낀 점은 강의할 때마다 철학자 주장 하나하나가 완벽하지요. 그걸 못 느꼈습니까? 어떻게 토 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잖아요. 하이데거 할 때는 하이데거가 완벽한 것 같고, 불트만 할 때는 불트만이 완벽한 것 같고, 칼 바르트 할 때는 칼 바르트가 완벽한데 또 메를로-뽕띠 하니까 메를로-뽕띠 나름대로 완벽해요. 뭐 이의 있다고 할 수 없어요.

끝으로 이 완벽한 것이 완벽이냐, 아니냐? 13페이지 복음의 평 바로 위를 봅시다. [그러나 그것마저 이미 시작된 죽음의 힘에 의해서 온통 뚫려버린 구멍투성이가 된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차이가 주는 피곤함을 직시하는 것만이 실재라고 메를로-뽕띠의 외친다.]

구멍 뚫린 뻥뻥 뚫린 오묘함이 있어서 그걸 붙잡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 메를로-뽕띠의 주장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제 평은 뭐냐 하면, [철학자는 세계의 중심을 모른다. 그저 ‘공백’이라고만 표현하고 몸으로 현상한다. 그러나 복음은 정확히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인간은 공백이 아니고 그 공백에 예수님이 계시지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죄 많은 죄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 누가 오묘한 거예요? 예수님이 오묘하지요. 누가 기이하고 오묘해요? 오신 메시아지요. 이사야 9장 6절에 나오는 예수님을 이사야는 그렇게 예언합니다. 크리스마스 때 하는 이야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분은 기이하고 오묘하고. 전능자요 하나님이시오. 따라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오묘하지 않지만 성도라는 그 신분, 그 관계성, 그 자리는 정말 기적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알 수 없는 신분이 바로 성도입니다. 마음껏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아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가 왜 성도되기를 싫어하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될 수 있는 성도의 신분을 우리가 너무 홀대하고 우리가 얕잡아 보고 너무 시시하게 보지 않았는지 우리 스스로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51215b 부산강의.hwp (34.0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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