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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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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138강, 139강), 선지자의 근심, 개인과 역사 151217강의이사야

유튜브(138강, 139강), 선지자의 근심, 개인과 역사 15121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38강

139강

이미아(IP:122.♡.169.34)

15-12-19 23:25

138강-YouTube강의(선지자의 근심)151217-이 근호 목사

오늘은 138강, 제목은 ‘선지자의 근심’입니다. 사람치고 근심걱정 다 하죠. 보통 근심걱정 할 때는 개인적인 문제, 사적인 문제로 근심걱정을 합니다. 근데 선지자가 근심하는 것은 우리하고 다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기 때문에. 그래서 선지자가 근심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도 근심하는데, 그 근심의 질이 다릅니다. 개인적인 자기의 영달을 위해서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내용을 가지고 근심을 하는데 그 근심의 내용이 뭐냐, 장차 오실 메시아가 이 땅에 일하시면서 갖는 그 근심을 구약의 선지자는 미리 앞당겨서 근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죠. ‘아, 선지자가 있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선지자의 근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접목되고 합류되는구나!’ 이렇게 아주 간편하게 정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더 나아가게 되면 선지지가 하는 모든 행동과 그들의 삶은 선지자 개인적인 삶이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서 그 시대에 보여주기 위해 합당한, 적합한 하나의 파편, 하나의 조각으로써 그렇게 미리 알려 준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러면 근심이 되려면 근심되는 상황이 발생되겠죠. 그냥 선지자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면서 근심한다. 이럴 리는 없겠고. 선지자를 근심하게 만든 상황이 있을 겁니다. 그 상황을 우리가 모르면 안돼요. 왜 그러냐 하면 선지자의 근심은 곧 오실 메시아의 근심이고.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이 오실 메시아의 근심에 미리 참여된다면 도대체 우리 시대에 또는 우리들이 어떤 식으로 선지자를 힘들게 했기에 선지자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근심하시는가, 그런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평소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잘못되었으면 선지자가 근심하고 걱정하겠는가? 그런 식으로 선지자의 근심을 바라보는 거죠. 그래서 선지자가 나타나서 근심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가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줄을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그 시대에 선지자를 딱 보내주니까 본인들은 전혀 근심하지 않고 ‘뭐 어때? 이 시대가 어떤데? 살만한데?’이렇게 여유만만 하다가 선지가가 딱 나타나면, ‘저 분 왜 저러지? 우리는 고민거리도 안 되는데 왜 고민하지? 뭔가 우리하고 다른 세계를 접목하고 있구나.’ 그걸 간파할 수 있어야 됩니다.

북쪽 이스라엘 같은 경우, 여로보암 2세 시대에는 너무너무 잘 살았어요. 심지어 그 영토와 그 면적이 다윗 시대를 능가했고 솔로몬 시대를 능가했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그 잘 살게 된 것을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그동안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그 주변나라들이 다른 나라, 큰 나라들하고 전쟁한다고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이스라엘에게 신경을 덜 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온한 세월을 맞이한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평온한 세월을 맞이하니까 이스라엘나라 사람들은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더니만 세상에! 이런 복을 받네.’ 라고 오해들을 한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들의 그러한 배부름과 편안함과 안도함 속에서 그들의 죄가 계속 묻힌다는 것을 선지자는 주님의 영에 의해서 파악을 한 겁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힘들 때, 어려울 때, 교회 나와서 말씀 보면서 주님! 주님! 찾게 되죠.

그런데 그러한 힘든 시기가 어느덧 슬그머니 계절 바뀌듯이 지나가고 난 뒤에 별로 고민거리가 없으면 걱정을 사서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만사형통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씀 없이 살아갈 때에 자연적으로 자기가 말씀 없는 이 행복누리기에 급급해서 주님과 관계는 자연적으로 등한시 되고 잊혀지죠.

분명히 성경에서는 말씀대로 산다 했는데 이제는 말씀 상관없이도 그냥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같은 것이 생깁니다. 다들 “복 받았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평안하네요.” 라고 위로의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우리 가운데서 선지자가 있다고 칩시다. 그 선지자가 그런 상태를 볼 때에 메시아의 안목으로 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얼마나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걱정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 10절인데 그걸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자, 이 이야기는 지금 선지자의 근심이야기 하면서 예레미야 애가 1장 10절을 언급할 때, 이 선지자의 근심과 이것과 상당히 연관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애가는 제목 자체도 ‘슬프다’예언서입니다.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하면서 장이 시작됩니다. 선지자의 근심이죠. 근심의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 이유가 뭐냐, 방금 읽어드린 것을 보면 이방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물론 이방인이라는 것은 침략자를 말하겠죠. 하나님의 성전, 그러니까 선지자가 근심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 못 받을까봐 근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보물, 그 보물은 성전이죠.

그 보물을 보물로의 가치를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겁니다. 그게 근심되는 거예요. 정리해봅시다. 보통 사람들이 근심걱정 하는 것은 자기의 보물을 빼앗기거나, 유지하지 못하거나, 흠집이 나거나, 자기의 자존심이 상하거나, 이럴 때는 분노와 함께 걱정이 됩니다. 가정주부 같으면 자식이 대표적이겠죠. 그리고 가정, 가족. 그리고 남자 같으면 사업하는 것, 직장, 그리고 자기의 안정된 미래의 자리, 이런 것들 때문에 다쳤을 때, 뭔가 위태로울 때, 걱정근심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정작 고귀하게 여기는 것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보물이 그 성전을 통해서 날마다 발생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한 번 깔끔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선지자는 울고 있다. 가슴아파하고 있다. 어째서? 그 당시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불쌍히 여기심을 놓쳤기 때문에 울고 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는가? 잘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일을 자기 식으로 해결하려는데 정신팔리다보니까 주님의 해결 방법을 시답지 않게 여기고, 그걸 우습게 간주하고 그걸 배척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돈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건강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자기의 자존심을 본인이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데, 자기 자존심 챙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존심 챙기면 챙길수록 구원과는 멀어지죠. 상관없죠.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하나님의 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완전한 하나님의 거룩,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왜?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주고. 하나님과 천국에서 만나게 해주는, 하나님이 제시해준 유일한 대안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베드로전서에 보면 왕 같은 선지자가 있는데, 제사장이고, 선지자가 있는데, 우리가 이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시대를 보고 어떻게 탄식하고 근심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모독당하고,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천시되고, 천박하게 취급되고, 남한테 밀침을 당할 때, 누가 근심해야 되겠어요? 누가 걱정해야 되겠습니까? 바로 선지자 속에 있는,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근심하듯이, 우리도 같이 성령의 근심에 따라서 근심을 내놓을 수 있는 자가 오늘날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성도입니다.

이미아(IP:122.♡.169.34)

15-12-19 23:27

139강-YouTube강의(개인과 역사)151217-이 근호 목사

이번 강의는 제 139강, 제목은 ‘개인과 역사’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늘 변화되는 겁니다. 역사라는 것은 변화되는데, 역사자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변화되고 싶은 역사를 만들고자 개인들이 굉장히 노력을 하죠.

사람들이 이렇게 노력을 하게 되면 그 노력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가를 절대로 무시하지 못합니다.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한 행위로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 결과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그 결과가 내 기대에, 내 욕구에 부응되는지를 늘 확인하죠. 이것이 바로 각 개인도 그렇고 개인이 모인 집단도 그런 것들을 기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100명이 교회를 시작하게 하면 “야! 우리가 100명 모였네.” 그걸로 모든 기쁨을 다 충족시키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되느냐, “자, 백 명으로 시작했으니까 내년에는 2016년에는 몇 명이 모일까?” 하고 기대를 하게 되어 있고, “우리가 가만히 있는다고 100명 이상 되는 것이 아니니까 100명 이상으로 교회라는 역사를 새롭게 창출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 각자가 맡은 일에 노력해야 됩니다.” 하고 자기 개인적인 역량을 거기에 투입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보이니까, 그 당연해 보이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성경과 다른 비 복음적인 요소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가 기대하고 싶은 그 역사가 보고 싶어서 성경도 의례히 그렇게 되리라고 단정 짓고 말아요. 거기서 나온 그 대표적인 단어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 확장은 공간 개념이죠. 또는 숫자로 표현하면 100명 모였다가 200명모이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백 명 모였다가 열 명 모이면 하나님 나라가 축소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정면으로 충돌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보낸 자를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평소에 자기중심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역사를 가지고 자기 기대치에 부응한 역사 같으면 하나님이 도와준 역사고 자기 기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계하고 채찍질 때린, 하나님께서 미워한 역사라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선언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큰 오류입니까?

그런 관점에서 모든 성경을 본다는 것은 성경을 보면 볼수록 성경과 점점 더 멀어지는 양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가만히 놀려두느냐, 그냥 시체처럼 가만히 꽁꽁 묶어두느냐,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들과 성도들을 부지런하게 활동시키죠. 그렇다면 성도를 부지런하게 활용하신다면 하나님 나름대로의 목표되는 역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거예요. 그 역사를 성도로서 마땅히 기대하는 역사라고 간주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반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역사를 성경적 역사라고 하면서 그것을 역사에다 집어넣는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미완성이 되기 때문에. 어떤 역사가 되게 되면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더, 더, 크게, 더 확장되게, 더 번창하는 것, 그런 아이디어가 나온다면 그 사람부터 잘못된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이 역사의 변화는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한 역사의 변화냐, 역사 안에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활동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흔히 말하는 사람 눈에 보이는 역사라고 보이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어떤 목표치가 없죠.

여기 우리가 어떤 일을 해놓고 우리가 기대한 결과가 나왔을 경우에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일이 벌어지는 족족 그것이 영광이 된다는 쪽으로 아멘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세상의 모습이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대치에 부응하느냐 안 하느냐 따질 필요 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현재 작용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리 입에서, 성도 입에서 아멘이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럼 성도가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되는가가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아멘이 되는 것이 덩치 큰 업적이나 결과가 나올 때만 아멘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을 하신 자체가 약속에 준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게 사적으로,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이것이 아멘이 되어야 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적으로 이런 큰일을, 큰 행사를 했기 때문에 아멘이고 교회적으로 이런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아멘이다가 아니라, 평소에 자기 집안에서 안방에서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작은 사소한 일 속에도, 거기서 항상 아멘, 아멘 될 그러한 현상들이 계속 생겨나온다는 이야기에요. 이 말은 우리가 이것이 약속이다 아니다 평가할 입장이 아니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약속 차원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일에 우리가 포함되는 겁니다. 약속은 크고 우리는 작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입에서 나올 것은 무엇밖에 없느냐? 아멘밖에 할 게 없고, 그 감사한 마음으로 아멘 할 때 그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1장 19절~20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광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지켜야 되느냐? 이제 그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뭐든지 심심하면 아멘, 감사, 아멘, 이렇게 하면 영광이 되느냐? 그 문제인데, 이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보다 세다고, 크다고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무언가 만들어 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멘이 되도록 우리에게 약속으로 작용을 하는데, 그 약속이 뭐냐? 그 약속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가 약속의 완성이니까, 십자가가 우리 사생활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에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불만과, 짜증과 그리고 주님에 대한 대항심이 발생됩니다.

아멘은커녕 하나님한테 화를 내지요. 그럴 때 우리는 영광에 실패했다. 물론 우리입장에선 실패했는데, 약속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모르는 불만과 불평과 짜증과 원망을 끄집어냈다는 그 점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성공하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돌아서서 결과적으로 “아!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알면서, 그 죄인 되게 하신 그 모든 일들이 합당하여 ‘아멘’이 되고, 그것이 약속에서 나온 것 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감사하면서 영광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는 없어요. 주께서 치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감추어 놓고 있던 우리의 죄와 우리의 욕구와 욕심을 들추어내고 파헤치면서, 다시 한 번 십자가 이외에는 다른 식으로 영광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확인케 하는 겁니다. 우리의 방법은 뭐냐. 우리의 방법은 참 경솔해요.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 여기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주시면 나는 살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나의 존재가 만나서 좋은 게 좋다고 서로 친하게 지내면 영광 돌린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이 아닙니다.

약속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와서 우리로 하여금, 감추어놓은, 우리가 찬양 돌린다고 하면서 사실은 은근히 감추어놓은, 우리의 허점과 죄와 탐욕과 욕심, 우리의 속에 더러운 것들을 들추어내는 방식으로만 하나님께 예, 아멘, 영광, 약속의 성취, 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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