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창 3장 1-5(간교한 뱀)151216-이 근호 목사
17강-창 3장 1-5(간교한 뱀)151216-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17강-창 3장 1-5(간교한 뱀)151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창 3:1-5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마귀 말에 ‘아멘’이라고 붙일 수 있으려면 더 깊이 있는 성경해석이 되고 난 뒤에 ‘아, 마귀말도 아멘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뱀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지난 시간에 한 대로 에덴동산 나무가운데서 독특한 두 개의 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입니다. 같은 종류의 나무가 아니고 특별한 나무, 특수한 나무가 되지요. 그 특별한 나무, 특수한 나무가 에덴동산 중앙을 장악해 있습니다.
그 나무가 어느 정도 특별하냐 하는 것은 그 나무를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한 것이 있습니다. 법으로 지시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따먹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특별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렇게 특별한 나무를 중앙으로 해서 그 나무가 특별하게 되어버린다면 인간은 뒷전이지요. 모든 것을 인간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으로 삼는 그 내용이 또 따로 있어요. 우리가 범죄 했기 때문에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타고난 죄 성을 보여주는데 죄 성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살인이나 그 밖의 자투리 죄만 죄가 아니라 평소에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를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목사님, 술이나 담배나 이런 것도 죄입니까?”라고 질문하는 이것, “네가 바로 죄입니다.” 자기인생의 중심으로 자기만 있고 아무도 없다면 그게 바로 죄의 모습이에요. 죄인이 죄 같은 질문을 했으니까 답변은 호응하지 못하는 답변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단지 나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보면 들짐승 중에서 같은 들짐승이 아니고 독특한 들짐승이 등장합니다. 뱀입니다. 그리고 뱀에 대해서 하나님이 평가하기를 ‘간교하더라.’고 되어 있어요. 다른 말로 하면 지혜롭다는 겁니다. 특수하게 뱀이 가장 지혜롭다는 말은 다른 짐승들은 뱀보다 지혜가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특수한 지혜를 뱀이 이미 갖고 있다고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무 중에서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들짐승 가운데서는 뱀, 두 개의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독특하게 중심점을 차지할 만한 능력을 함유하고 있다는데 대해서는 같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본문 보면서 생각해야 될 것은 ‘나무도 특수한 나무다, 뱀도 짐승하고 다른 짐승이다.’ 그러면 인간입장에서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 끝.’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만의 관계로 모든 창조가 완료가 되었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는 그걸로 아주 간결하게 정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모든 나무를 따먹으라고 했다면 아주 간단한 거거든요.
모든 나무를 따먹으라고 했다면 ‘역시 하나님은 인간중심으로 보시는구먼.’ 이렇게 충분히 이해가 될 텐데 따먹되 따먹지 말아야 될 과일이 있고, 모든 짐승은 인간 밑에 있다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뱀은 그중에서 유독 지혜롭다.’고 해서 인간근처에 뱀과 선악과만큼은 우뚝 솟구쳐 오르는 두 개의 지점이 있어요. 지난시간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왜 심어놓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이 인간중심이 아니고 다른 분 중심인데 그 다른 분을 묘사하기 위해서 인간은 변두리로 나가야 되고 그 변두리에서 중심을 지켜봐야 될 입장이라고 했습니다. 중앙은 따로 있어요.
그런데 들짐승 중에서 뱀이 중앙으로 등장했다면 여기서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빼놓고 뱀과 인간에 의해서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인간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요. “하나님이여, 왜 유독 뱀에게 특수한 지혜를 주셨습니까? 창조했으면 인간중심으로 모든 것이 통합이 되어야 할 텐데 왜 유독 뱀은 지헤롭습니까?”라고 물을 수가 있지요. 다른 말로 하면 “왜 하나님은 뱀과 인간을 엮이게 했습니까?” 같은 질문이에요. 왜 하나님은 뱀과 엮이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뱀이 지혜롭다 할 때 그 지혜롭다는 것을 들추기 위해서 뱀과 엮이게 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뱀이 갖고 있는 지혜는 인간이 하나님께 듣는 지혜와 같은 질이 아니기 때문에, 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지시에 대해서 견해가 달라요. 뱀의 견해가 다르고 인간입장에서 하나님께 들었던 하나님의 견해가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 창조가 인간이 순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다. 끝!’ 그게 아니라 창조 속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절적인 요소가 함께 담겨 있는 새로운 창조가 된 거예요. 천지를 창조하고서 “하나님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할 때의 그 좋다는 그 의미가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이 바라보는 ‘좋았다’는 의미하고 전혀 달라요. 인간이 좋았다고 한다면, 인간이 등산가서 경치 좋다고 할 때의 그 말은 뭐냐? 내가 내 중심으로 볼 때 앞에 펼쳐진 정경이 내 맘에 든다, 그거잖아요.
그런데 내가 앞에 펼쳐진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날아가던 독수리가 싼 똥이라도 떨어진다 치면 “경치 다 버려놨네.” 라고 할 수도 있고 산불이 나고 있으면 “오늘 경치 다 버렸다.”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기 좋았다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중심으로 깔끔하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질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조차도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기견해는 모든 것이 내가 여기 있고, 내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고, 반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과 대적되는 요소가 있음에도 ‘심히 좋았더라.’고 하는 그 견해 차이를 좁혀야 되든지 아니면 일치시키든지 뭘 해야 돼요.
그러면 누가 잘못인가? 하나님 쪽에서는 잘못이 없고 인간 쪽에서 잘못이에요. 인간 쪽에서 어떻게 잘못이냐 하면 산에 가서 정경을 보면서 “야, 참 경치 좋다.” 하는 것은 전제가 뭐냐? 살아 있는 내가 있고, 그 살아 있는 내가 보기에 경치가 좋다,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창조가 좋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실어놓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가 되는 겁니다. 죽음을 실어놓고. 아 이거 정말 중요한 거예요. 저는 이걸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천지창조가 그냥 살아 있는 하나님에게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아들의 십자가죽음을 집어넣고 천지를 창조하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자기 아들의 죽음인 십자가를 집어넣고.
그렇다면 창조원리에 누가 가담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 뱀 자체가 창조원리여야 해요. 이 뱀 자체가. 그런데 인간들은 뱀을 논외로 치는 거예요. 이것은 안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하고 빼놓고 ‘하나님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자기중심으로 보니까 그런 오해가 생겨버린 겁니다. “하나님이여, 힘듭니다. 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왜 이렇게 사기꾼이 많고 보이스피싱사기가 많고 왜 이렇게 힘듭니까?” 그것은 네가 더 살려고 하는 욕망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천지창조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된 거예요.
인간이 마귀를 집어넣고 천지창조를 생각 못하는 겁니다. 뱀은 지혜로워야 돼요. 왜? 인간이 생각한, 아담이 생각한 것과 다른 의견을 제시해줘야 됩니다. 하나님 지시는 뭐냐 하면,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지혜로운 뱀이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이 말이 지혜로운 거예요. 인간이 미처 몰랐던 지혜로운 겁니다. 그렇게 되면 뱀에게 준 지혜는 뭐냐 하면, 창조 안에 감추어진 진짜 진리를 감추기 위한 지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여기서는 간교하다고 합니다. 지혜로운데 그 지혜가지고 진리를 안 들키게 감추는 용도로 쓰이는 지혜자로 뱀이 등장한 겁니다.
무엇을 감추려고 했을까요? 뱀한테 유혹받고 난 뒤에 인간도 자기 자신을 감추려고 했잖아요. 벌써 인간도 창조의 질이 뱀의 닮아버렸지요? 지금 뱀이 인간을 유혹하는데 뱀이 인간을 유혹한다는 것, 인간입장에서는 뱀의 뜻을 알 수가 없어요. 왜? 뱀은 창조전의 지혜까지 아니까요. 그렇다면 뱀은 왜 이런 속임수를 썼는가? 왜 감춤 질을 하는가? 이것은 창조원리에 뱀의 자기운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원리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뱀을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집어넣는 신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요. 그걸 감추고 싶은 거예요.
감추는 방법은 뭐냐? 원인과 결과가 안 맞는 것을 끼워버리는 겁니다. 모든 창조는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오늘날 우리가 되는데 뱀은 중간에 끼어들어서 그 원인을 예수님이 아니라, 그 당시는 예수님이 등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니고 너의 운명의 결과를 유발할 원인으로 너 자신이 되면 된다는 겁니다. 어떤 학교에서 문제를 냈어요. 부산강의에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요. 시험문제가 “왜 이혼을 하는가?” 그 선생님 보기에 틀린 답인데 창의적인 답변이 나왔어요. “결혼했기 때문에 이혼합니다.”
정답일 수는 없어요. 그런데 얼마나 창의적입니까? 그게 지혜입니다. 원인도 아닌 것을 가지고 원인과 결과로 연결시켜 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네가 따먹지 않은 네 행동으로 말미암아 오래오래 살리라.” 하는 뜻이 아니라 따먹지 않아야 될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인데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겠다고 나선다면 창조의 중심 되는 것을 밀어버리고 인간이 우뚝 서려는 그런 본성이지요, 그걸 죄라고 합니다. 죄라는 것은 결과와 원인이 안 맞는 것을 가지고 짜깁기 하는 것이 죄에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불신자 가운데 참 점잖고, 교육자집안이고, 정말 바르게 살고, 인격적이고, 사람들 됨됨이 상식 지킬 줄 알고, 예의범절 차릴 줄 알고, 대인관계 처신해야 될 도리 잘 알고, 그런 분들 얼마나 많습니까? 믿는 사람가운데 그런 분들이 있다는 이것이 신기하지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 많거든요. 그런데 그런 분들이 왜 지옥 갑니까? 자기가 자기됨의 원천지와 연결이 안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국을 만들어놓고 구원하실 때 자기 백성에 한해서는 행위를 보지 않고 원천지와 연결 된 것, 그 연결가지고 하나님의 의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의 관계로 천국에 들어가요.
돈 있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지식 있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의 바르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연결이 안 되어 있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선악과 심어진 그 자리, 에덴동산의 중심에는 다른 분을 증거 하기 위한 나무가 서 있는 겁니다. 너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에요. “거기에 네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 선악과와 네가 원인과 결과로 엮이지 않아야 된다. 정말 너는 생명나무와 엮이더라도 선악과와 엮여서는 안 된다.” 결국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생명나무와 못 엮였어요.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으니까.
그러니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 자체가 이게 죄고 마귀가 속으로 외치고 있는 소리에요. “내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하는 이것이. 구원받아서 또 자기가 세상 온 우주의 중심이 되려고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2천년 기독교 역사가 다 마귀역사에요. 해석을 전부 거짓말로 하는 거예요. 잘못된 원인과 결과를 억지로 엮어서 천국가려고 하는 겁니다. 부처와 예수의 차이점이 있어요. 부처는 사람을 자꾸 극락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님은 자꾸 지옥으로 데려가요. 지옥가야 자기주제파악이 되니까 지옥가야 비로소 주님이 보입니다.
그런데 부처는 자꾸 인간을 극락으로 데려가기 때문에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예요. “하면 된다.” 이게 교인인지 절인지 분간도 안돼요. 부처가 설교해도 그렇게 설교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뱀이 창조의 원리인데 뱀의 지혜가 어느 정도 깊이 있는가는 이스라엘 역사를 찾아보면 돼요.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 73편 16절-18절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신앙인이 하나님의 계시, 영감을 받아서 시 형식으로 읊은 것이 시편 73편이거든요. 그 내용에 보면, “왜 악인들이 편안하고 재물이 더하고 건강하고, 그게 왜 그렇습니까?” 라고 할 때에 계시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17절에 이제 하나님께서 정답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이 성전에 들어갈 때,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때 그들의 종말, 그들의 결국의 끝을 알았다. 그동안 마귀가 뱀이 그렇게 가리고 싶었던 그것은 하늘 예루살렘이었던 겁니다. 예루살렘에는 언약궤가 있고 제사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곳이거든요. 그것을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에서, 매일같이 제사를 드렸잖아요. 실체와 그림자로서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이지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그것으로 인하여 연결이 됩니다. 모세언약으로. 날마다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이 창조의 중심이 결과물로 살아 있는 자신의 목숨이 중심이 아니고 어떤 분의 죽음, 그 죽음에서 천지창조가 나온 거예요. 십자가 죽음에서 천지창조가 나온 겁니다. 살아 있으니 그냥 살아 있는 줄 압니까? 주님의 희생 때문에 살아 있는 거예요.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고생과, 주님의 희생 대신, 죽으심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천국 백성이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마귀백성이지요. 왜? 마귀는 그것을 자꾸 가리거든요. “내가 나 된 것은 나 원인자 외에 다른 원인은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끝까지 가보자.” 역시 마지막 손에 잡히는 것은 “나 외에 누가 있으랴?” 이미 자기 자신이 창조의 중심이 되고 말았어요. 이게 뭐냐 뱀의 알고 있는 지혜에 같이 동참하고 만 겁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안 되지요. 인간이 생명나무를 따먹는다는 것은 마귀한테 천국티켓을 주는 것과 똑같은 것이 되니까. “저리가! 훠이!” 못 따먹게 쫓아내 버리지요. 선악을 아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영적존재들인 천사들과 함께 되었으니까 내보내는 겁니다.
우리가 이걸 안다면 이제 뭐가 궁금하냐 하면, ‘마귀 이걸 체포해서 없애버리면 좋겠다.’ 그런데 마귀는 얼굴이 없어요. 왜 마귀는 얼굴이 없느냐 하면, 마귀의 모든 작업은 인간을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계통으로 봅니다. 계열, 계통으로 봐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일서 3장 8절에서10절에 나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서 속한다? 엄청나지요? 이런 것 때문에 성경 안보는 사람도 있어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 자 이 본문을 봅시다. 마귀는 얼굴이 없습니다. 마귀는 자기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요. 하지만 마귀는 어떤 계열과 계통을 세웁니다. 마귀가 세워 만들어나가는 계통과 계열이 응축될 때마다 나타나는 것이 뭐냐? 마귀의 얼굴이 아니고 마귀의 계열에 소속된 인간들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인간들의 얼굴이 마귀의 얼굴이에요. 모든 인간이 아니고 마귀의 계열에 소속된, 그 계통에 소속된 인간들의 얼굴이 곧 마귀의 얼굴로 나타나는 겁니다. 적그리스도라 할 수 있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 여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고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게 뭐냐? 네가 알아서 마귀를 처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마귀세계의 계통, 자기수하의 계통의 사람들을 만들어나간다면 주님도 주님의 얼굴은 사라져버리고 주님의 계통, 주님에 속한 사람들의 얼굴만 나타날 뿐이에요. 예수님의 얼굴이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이게 얼굴인지 아니면 자연의 숭고함인지, 위엄인지 그게 분간하기 힘들게 되어 있어요. 목소리는 파도 같다, 파도가 없다면 목소리를 표현 못해요. 온 천하가 주님의 형체를 묘사하는데 도대체 그 얼굴을 얼굴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해같이 빛나는데 코가 어디 있고 눈이 어디 있어요? 해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습니까?
도마가 주의 얼굴을 봐서 주님이라고 했습니까? 도마가 본 것은, 그리고 만진 것은 창자국과 못 자국이에요. 도마하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헤어지기 직전의 사건상태를 다시 주님께서는 부활하고서 보여주신 거예요. 못자국과 상처를 보여주신 것은 뭐냐? “도마야, 너와 나의 관계는 죽음으로만 연결될 수 있는 낯선 죽음이다.”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신기한 죽음. ‘십자가에 왜 죽었을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꼭 죽여야 일이 돼? 안 죽이면 일이 안 되는거야? 안 죽이면 일이 왜 안 되는가?’가 궁금하냐 하면, 내가 살아 있으니 산채로 내가 천국가려고 마귀 적 발상을 하기 때문에 그 발상이 바로 마귀 적 발상인 것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고 밀치는 그 죽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겁니다. “너는 마귀계통이야.” 에베소서 2장의 말씀처럼, “너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 따라서 너의 모든 것은 살고 싶어 하고 그 살아서 유지되는 너를 이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는 마귀심성에 포함이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불순종의 영들 속에서 성령을 보내주니까 ‘야, 내가 그런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신약에 와서 이 마귀가 하는 짓은 역시 감추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모든 지혜는 어떤 용도다? 복음을 감추는 용도에요. 인간의 철학과 학문, 이 모든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감추는 용도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4, 5절에 보면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물리학, 생물학, 화학, 인문학, 사회학, 언어학, 기호학, 철학, 신학, 이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거예요. 특히 중요한 것은 뭐냐? 창조과학론, 그게 복음을 가리는 겁니다. 이 세상에 신의 흔적이, 창조의 흔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신의 주권이고 하나님의 주권이지 예수님의 주권이 아니에요. 십자가 복음이 아닙니다. 세상을 존재로 보는 거예요. 왜 존재로 보고 싶은가? 존재로 봐야 존재로 보는 그 존재자가, 자기 자신이 긍정되기에. “내가 이렇게 여기 존재하는 것처럼 신도 존재하십니다. 우리 존재로 한통속이 됩시다.” 하는 악마적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이것은 마귀도 압니다. 귀신도 믿고 떱니다. 그래서 귀신이 구원받았습니까? 유대인도 알아요. 알라신을 믿는 사람도 알라신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습니다. 심지어 종교가 없는 철학가도 자기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유신론적 사고방식이 구원의 능력이 되겠어요? 구원의 능력은 뭐냐? 바로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마귀생각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자백하는 거예요.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자백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수학자입니까? 이 수학이 바로 마귀의 학문인 것을 자백하는 거예요. 신학을 했어요? 이 신학이 그렇고 목회를 합니까? “목회가, 내가 당회장이고 목회하는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 죄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거예요. 요리한다고 구원받습니까? 가정주부 해서 구원 받아요? 모든 나의 행동은 내가 원인이 되어야만 나한테 자랑거리가 계속 유지가 돼요. 내 존재의미가 생기고 존재가치가 생긴다고요. 이 세상을 돌아보세요. 세상 모든 것, 시, 문학, 소설, 드라마, 영화, 방송, 전부다 자기 행함에 대한 긍정입니다. 마귀가 그런 식으로 자기계통을 이어가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이것은 성경에나 나오지 실제로 동물원우리에서 뛰쳐나와서 우는 그런 사자나 있을까말까, 사자 우는 소리가 들립니까? 멧돼지 돌아다니는 경우는 좀 있었지만 사자가 우는 소리는 잘 못 듣지요. 하지만 성도 귀에는 전부 다가 마귀가 으르렁, 우는 소리로 들려야 돼요. 드라마나 모든 것이 마귀의 생각이니까 우리는 그걸 봐야 돼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되어갑니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냐? 어쩌면 나를 닮았느냐? 어쩌면 내 생각과 같으냐?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세상신이 하는 일이 나와요. 뭐냐? “무조건 복음만 막아라. 복음을 감춰라.” 어떻게? 너 자신을 원인자로 제공하는 그 방법으로 바꾸는 거예요. “따먹어라. 신이 될 수 있다.” 따먹고, 신이 되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시작을 너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 모든 것을. “구원받는 것도, 선교하는 것도, 헌금하는 것도, 네가 정신 차려서 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 된다.” 이게 바로 마귀의 전당입니다. 예수의 전당이 아니고, 명예의 전당도 아니고 마귀의 전당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어쩌면 우리에게 착착 달라붙는지, 얼마나 우리에게 흡착이 잘 되는지. 어떨 때는 감동이 되어서 눈물이 다 난다니까요.
감동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잖아요. 냉혹한 피로 구원받는데 우리는 울었다고 우는 것으로 들이대는데. “그래, 네가 운다는 그것으로 원인이 되어서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았구나.” 그것이 마귀의 생각이에요. 우리는 변두리로 나가 있어야 돼요. 이 영적싸움은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그냥 소속이 다를 뿐이에요.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계통의 원인이 이쪽 계통의 원인에 스며드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서는 안 되지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는데 왜 사람들은 그 예수님 자리에 자기가 뭘 했다는 것을 집어넣는 그것을 왜 그렇게 좋게 보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목사님, 성도가 뭡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서울에 가보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마포에서 세브란스병원 쪽으로 고가도로가 있었는데 그것을 공원으로 만든 데요. 서쪽에 있는 마포에서 동쪽으로 갈 때 다리가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자기가 다리의 어느 지점을 끊어서 ‘여기서부터는 내 것’이라는 것이 없어요. 손톱, 발톱부터 전부 다 주의 것입니다. 왜? 같은 고가도로니까. 고가도로로 주님께 연결되게 되면 빌딩들이 장애가 되지를 않아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를 쑤셔도 주님과 연속된 몸체기 때문에, 포도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은 열매 없는 일은 안하시거든요. 주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열매를 맺히는 겁니다. 제가 늘 예를 들었듯이 유리세공 하는 사람이 훅, 불면 관 끝에 동그랗게 튀어나오듯이 주께서 부시면 튀어나오는 것이 우리에요. 그게 성도입니다. 성도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나이고, 그 다음부터 주님 것이고, 그런 것이 없어요. 왜 우리 얼굴이 주님이 얼굴이니까. 주님이 해처럼 나타나 볼까요? 다 죽도록? 주님이 마리아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냥 해처럼 와버리면 예수님 주변의 열두 제자들 다 타죽어 버립니다. 마리아의 몸으로, 죄인의 몸으로 오신 이유가 죄인의 몸으로 왔지만 하시는 일은 주님의 일이에요. 주님중심의 창조의 원리의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목사님 마귀의 일이 뭡니까?” 전부 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미 창세기 3장 이후에 존재하는 그 세상과 그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먹을까, 말까?’ 이렇게 선택할 그런 것은 예전에 지나가버렸어요. 이제는 이미 마귀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모든 것, 이 세상 자체가 내 목숨 그저 부지하려고 부지런히 애쓰고, 성경이고 교회고 돈이 최고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광야에 가셔서 세상 신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게 되셨는데 그 시험받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세상중심이 되고 싶어서 갖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마귀는 그대로 예수님에게 유혹하지요. 예수님은 자꾸 이야기합니다. “감추려고 하지 말라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또 “감추려고 하지 말라.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저나 여러분은 누구하고 연결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세상사람 아예 사귀지 말까요? 아니에요. 모든 것을 주님의 선물로 보세요. 돈 주거든 돈 챙기고. 물론 술 까지 챙길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고. 가족도 마찬가지고 되어진 모든 것이 그 열매, 이 세상에는 악함과 선함이 함께 있어 그것이 바로 따먹어야 할 나무가 따먹지 말아야 할 나무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걸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이 우주의 핵심이었고 중심이었다는 것을 증거 하시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미 하늘나라가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자기 스스로 구원하고자 시도하는 것조차도 마귀 일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십자가가 원인이 되어서 그 열매로, 우리가 부활의 열매로 성도가 되었다는 이 신분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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