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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반전 (마 19:28) 대전- 70강자유게시판마태복음

반전 (마 19:28) 대전- 70강

이름 : 주향(IP:211.231.45.164)

반전 (마 19:28) 대전- 70강

이근호

2015년11월 24일 본문말씀: 마태복음19장 28

(마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태복음19장 28절부터 보겠습니다. 28절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그 다음 29절이 이해가 되요.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이 말씀이 상당히 부담으로 안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28절을 모르고 29절을 보게 되면 발길을 돌릴 수가 있어요. 교회에 왔다가 신세 제대로 조지고 “아이고! 잘못 걸렸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거에요.

28절의 의미가 뭐냐하면 구원이 자율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구원은 내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는 12보좌에 앉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고백 이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통보지요? 그냥 통보해주는 거에요.

마치 장정들에게 논산 훈련소에 집결하라고 통지서 날라 오지요?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훌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이등병의 편지 나오잖아요. 그냥 통보하는 거에요. 통보한다는 말은 자율적이지 않아요. 내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죠. 통보한 분의 일에 우리가 강제로 끌려가는 겁니다. 일종의 추행 당하는, 고상한 내 인격에 추행 당하고 강간당하고 추행 당한 거지요.

누가 12보좌에 앉고 싶어서 환장한 것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미 자율성을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자율성을 박탈당하면서 거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자율성을 박탈한다고 통보를 하면 자율성을 박탈당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요. 슬슬 계산 하겠지요. 좋은데 주시는 구나! 그럼 나는 어떻게 될까? 또 좋은 것만 생각해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겠지요?

그런데 12보좌에 앉는다면 완전히 왕 앞에 앉는 것처럼 좌의정, 우의정이 앉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때 29절이 주어집니다.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다 갔다 버려라! 모든 걸 버려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안할래!” 아무리 미래에 좋은 게 있다 하더라도 이정도까지 강압적으로 나의 모든 걸 빼앗아 가면 이 흥정은 깨지는 겁니다. 이 거래를 저는 안하겠습니다. 이 물건 안 사겠습니다하고 돌아 서겠지요.

그러면 처음부터 너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도 자율권을 네가 포기한 적이 없음을 들통내는 구절이 29절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보게 되면 28절을 다시보게 되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에서 나와 너희의 의미는 주님께서 새롭게 제공합니다.

내가 아는 나는 여기서 탈락이 일어나고 내가 생각하는 우리는 탈락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에 탈락이 일어나면서 탈락 과정과 동반해서 주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 주님과 준비해 놓은 내가 생각하지 않는 우리가 새롭게 여기서 떠올라요. 부각이 되는 겁니다. 모터쇼 같은 데를 안 가봤지만 입장료 비싸서 못 가봤지만 모터쇼에는 무대에 신차가 먼저 안 나와 있어요. 차 옆에 멋있는 아가씨가 먼저 나오잖아요.

자! 신상 나옵니다하면 무대가 빙글 돌면서 밑에서 차가 무대에 올라오면서 새롭게 부각되지요. 바로 주님이 이야기했던 너희라는 것, 천국의 백성이 우리가 깨어지면서 그 속에서 새롭게 솟구쳐 올라옵니다. 새롭게 등장 하지요. 이 작업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주님이 하신 작업이에요.

그러면 주께서 이야기 하신 새롭게 한 너희와 현재 우리가 말하는 내가 속해있는 12제자 집단 체와 우리하고 어떤 차이가 있냐하면 너희 속에는 뭐가 들어 있냐하면 대신 죄 용서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죄를 씻어 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죄를 씻어 줬는데 왜 너희가, 우리가 뭘 모르냐 하면 죄를 모르는 상태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누가 씻어 주는 게 아니고 내가 착한 일만 꾸준히 하게 되면 나의 착한 일로써 삭제시킬 수 있는 죄를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쁜 짓을 중지하게 되면 이제는 안 지워지는 죄들만 전부 끌어다 논 거에요. 내가 행동만 똑바로 하게 되면 두 번 다시 안 짓는 죄 있잖아요? 그런 죄들만 죄라고 전부 다 모아 논 거에요. 따라서 그 죄는 어떤 한계가 있냐 하면 착하기만 하면 두 번 다시 안 지을 수 있는 죄가 되는 겁니다. 내가 착하기만 하면,

성경 말씀을 제가 한번 읽어 드릴테니까 여러분 나름대로 요점을 마음속으로든지 아니면 말해보세요.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인데 2장14절을 읽어 드릴테니까 누가 한번 해석해 보세요.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 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게 무슨 뜻이지요? 이것은 무척이나 쉬운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말로 하지 말고 실제로 도와주라고 하는 거지요. 1단계 쉽지요? 그런데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되요. 주는 쪽의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받는 쪽에서 만족해야 그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주는 쪽은 말로 때웠는데 받는 쪽은 춥고 헐벗고 있다라는 말이죠. 이게 행함과 믿음 사이라는 겁니다. 야고보에서.

그러면 믿음과 행함에서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고백을 받는 쪽이 누굽니까? 하나님 쪽이죠?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납득이 되고 만족스러운 믿음을 내놓기 위해서는 “네~ 주님 믿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존재를 믿습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그런 것은 귀신들도 안 하는 거에요. 그러면 뭘 원한다는 말입니까? 믿습니다라고 하기 이전에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 주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납득 하고 하나님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행함을 보여 주라는 거에요. 그런 행함이 뭐냐하면 아버지가 자식을 잡는 것이고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하는 거에요. 이건 살인죄와 거짓말 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왜 야고보가 이 두 가지의 예를 들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때 고아원의 예를 들으면 얼마나 수월합니까? 고아원이나 어려운 사람들, 노숙자를 말하면 충분한대 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예를 드냐는 거지요.

이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본인의 행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합당한 행위를 내놓을 수 있는 주체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건 뭐냐 아브라함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밀어 낸 거에요. 그게 로마서8장에 나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지요. 인간은 몰라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아! 그런 기도는 아니야!” 내가 알고 있어. 성령께서 아버지가 아시는 것을 인간을 대( )해서 실행시키는 겁니다. 이것을 주일 낮에 말한 것처럼 밀어 낸다는 거에요. 뭔가 하나가 들어 왔을 때는 주님의 행함을 바깥에 내 놓는데, 이런 것 있잖아요. 윗집에서 부부싸움을 한다고 할 때 아랫집에선 한두 번 한 게 아니고 오랫동안 하게 되면 벌써 알아요.

부부싸움 하고 난 뒤에 바깥에 뭐가 나가 있는가를 알아요. TV나 냉장고는 비싸서 안되고 그릇이나 항아리, 베개나 이불등 뭔가 바깥에 우당탕탕 했기 때문에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창 밖에로 다 튀어 나온 것들, 나중에 울면서 자기 마누가 나오겠지요? 마지막으로 나오는 장면이 “그래! 못 살겠다!” 보따리 싸고 나오면서 그게 마지막 하이라이트잖아요? 튀어 나온다는 말이죠,

뭔가 일이 났기 때문에 바깥에 튀어 나온 게 있다면 그 바깥에 튀어 나온 게 죄가 되는 거에요. 의가 삽입되는 동시에 바깥으로 의와 있을 자리가 없어서 나와 있는데 그 죄가 뭐냐? 이 말입니다. 그 죄가 바로 종교적 행위 아닙니까! 그동안 내가 안다고 여기면서 행했던 선교와 전도와 기도와 성경공부와 예배 참석과 목사 섬기기, 이 모든 것이 죄라는 이름으로 빨간 딱지 붙여서 전부 바깥으로 이거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물건들이라는 것이라고 끄집어내는 겁니다.

다 바깥으로 튀어 나오는 겁니다. 목회 잘하는 것등 다 나오지요. 그런데 마지막 나오는 물건으로 누가 나오냐 하면 병든 내 몸이에요. 내가 바로 배설물 그 자체에요. 이게 주일 날 설교에 마지막으로 한 거에요. 내 자신이 배설물이라는 사실을 해피벌스데이 투유 할 때는 몰랐지요? 몰랐어요. 내가 쓰레기인줄 몰랐어요.

그런데 내가 나를 바깥으로 쓰레기를 밀어낸다는 말은 주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 낸 진짜 나. 그리스도의 성령이 임해서 섬겨야 할 나라가 이미 내 안에 만들어졌기에 껍데기 같은 구닥다리 내가 바깥으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의가 들어가서 죄인된 내가. 육신의 내가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 과정을 주님께서는 십자가 지면서 다 보여준 거에요.

“네 몸속에 내가 들어갈께!” 죄인의 몸속에 들어 왔고 죄인의 몸이 너희가 만나지 못한 아버지 앞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십자가위에서 보여줬습니다.“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려야 될 몸을 우리는 최고로 여기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걸 유지하려고, 또 내일 모레 김장한다고 준비해서 본격적으로 김장합니다. 김장은 왜 합니까? 먹고 살라고,

예수님 드릴려고? 예수님은 김치 안 드시는데 예수님이 김치를 잡수시면 문제가 되요. 어떤 교회에선 새우젓을 넣고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액젓을 넣고 할 것이냐 이게 문제가 되요. 어떤 장로교는 새우젓을 넣고 할 것이고 어떤 침례교는 다른 액젓을 사용할 수 있는 문제이고 서로 자기네가 맞다고 할 거에요. 이게 물질의 정신화거든요.

집사가 성만찬을 할 것이냐 목사가 할 것이냐 부목사는 왜 안되냐 이게 문제가 되는 것처럼 이 모든 게 형식, 형식, 형식에요. 그 형식을 밀어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12제자들을 가지고 이미 목표를 정해 놓았어요. 12보좌에 앉는다는 목표를 주고, 그다음에 허접하지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들을 데리고 십자가의 길로 동행을 하십니다.

십자가로 같이 동행하시는데 주님이 레이스인가 속도를 너무 내셨네! 처음엔 제자들은 시속 20Km로 갈 땐 편안 했는데 30Km으로 갈 때도 룰루~ 랄라~ 김밥 사먹으며 재미있었어요. 갈수록 속도가 나는데 갑자기 속도가 높아진 것이 뭐냐 성전에 채찍 들고 설칠 때, 상 엎을 때, 아~심하다! 꼭 이럴 필요까지 있나? 드디어 슬슬 12제자가 눈치 보기 시작합니다.

눈치 보다가 가롯 유다는 최초로 배신 때리기로 작심을 했어요. “청춘을 돌려다요! 잃어버린 3년 세월, 그걸 보상받고자 내가 사람 잘못 봤네. 진작 발 뺄껄! 무슨 낙을 보겠다고! 속았네! 그저 훌륭하다는 소리 들으면 되지, 메시야인줄 알았는데, 아~가짜였다! 늦기 전에 발 빼자! 그냥 발 빼면 안돼! 화가 난다. 팔아먹어야지!” 하고 스승을 팔아먹었지요? 쉽게 말해서 “예수 너도 한번 당해봐라! 이겁니다. 인간은 복수 없이 못 살거든요.

복수하는 재미로 살거든요. 그 가롯 유다가 12제자들을 대표한다는 사실이에요. 다른 제자 하나가 빠져도 나머지 11제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가 빠져 버리면 바로 와르르 다 무너져요. 가롯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을 때 그 옆에 몇 명 남았습니까? 12제자들 중에 단 한 명도 안 남기고 다 도망갔지요. 진작에 그렇고 그런 집단이었어요. 뭐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를 하고 뭐 귀신 쫓아내고 병 고칠 때 대단 했지요? 주께서 12제자에게 한 그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다시 봐야 될 이야기에요.

(마10: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 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마10: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 이시니라

이 말이 성립되려면 제자들 속에 성령이 임해야 되요. 성령이 임해서 성령이 이야기 한다는 것이 뒤늦게 예수님의 말씀이 납득이 되고 “야! 이게 현실이구나! 나에 대해서 이미 익히 알고 있구나!” 이게 되는 거에요. 이것을 미래에서 보면 뭐가 없어져요? 제자들에겐 애초부터 뭐가 없습니까? 자율권이 없어요. 자율권이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자율권을 마음껏 활용케 하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자유가 있어요. 자유가 있는데 자유가 없이 되어 버려요.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제자들은 마음껏 자유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신 그 개념 아래 인간의 개념을 따로 갖고 있다고 보면 되지요. 나는 자유가 있다. 나는 선택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모든 게 주님의 자율이었고 주님의 자율된 뜻이었는데 인간의 자유가 그 안에 발휘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하면 주님의 자율로 만든 세계가 따로 있고 내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내가 자유로운 세계는 이게 죄 짓는 거지요? 이 죄가 예수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것을 포함시킬 때 이런 문장이 되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 짓게 하신다. 억지로라도 죄 짓게 하신다. 이걸 더 간단히 이야기하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죄 짓고 살면 됩니다. 이걸 네 자로 줄이면 “막 살아라”가 됩니다. “저는 죄 짓지 않고 조심스럽게 살았습니다.” 그게 바로 막 산거에요. 그러면 막 살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이 될까요? 안 될 까요? 이미 구원이 되었기에 막 사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자율의 개념에 대해 했는데 좀 더 해 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유가 구원받기 위해서지요? 천국가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서의 구원은 자기 죄에서 나온 구원 개념이지요? 죽어서 좋은 데 갈려고 하는 개념이지요? 그러면 이 구원도 죄가 되겠지요? 그러면 결국 구원에서부터 구원이 돼야 됩니다. 나의 구원에서 예수님의 구원으로 이전 돼야 되요. 이사 가야 되요. 그걸 짧게 이야기 하면 구원 받는데서 구원 돼야 되요. 이것을 더 줄이면 구원 안 받으면 돼요. 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구원 안 받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행동은 구원이 안 되는 행동을 보여주면 되요. 점점 더 말이 재미나고 쉽습니다. 나의 기도와 나의 헌금과 어떤 것도 전혀 나의 구원에 요건이 된다? 안 된다? 안돼요. 나의 찬양도 (그 어떤 것도) 구원이 안되는 거에요. 왜? 이미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전도해서 구원 됐다. 아니지요! 전도 해봐야 나중에 예수님 배반하는데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 구원 됩니까? 물 위를 걸어봐야 배반 하는데요.

베드로가 병을 고쳤다. 베드로가 귀신을 쫓았다. 구원 받았다? 아니지요! 그렇게 해봐야 모든 것은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으로 모아 집니다. 왜냐하면 배신으로 모아질 때 가장 극단적으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죄를 집대성한 가운데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만 홀로 탈출이 되요.

나사에서 우주선을 쏘아 올리면 올라갈 때는 덩치 큰 우주선이 올라가잖아요. 나중에는 TV생중계 보게 되면 (우주 발사체는 크게 윗부분의 탑재부와 아랫부분 추진부로 나뉘는데 발사 후 추진부가 분리돼 떨러져 나가고) 정작 우주 궤도에는 작은 (탑재부) 것만 남게 되요. 최초로 1957년 (구)소련에서 (인공위성인 스푸트닉 1호)쏘아 올릴 때 농구 공 만한 것을 소련에서 올렸어요. 미국에선 짜증났겠지만 미국에선 그것도 못했어요.

처음엔 거대한 것을 실어서 결국 작은 거만 남잖아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떨어뜨리고 뭐만 올라가는가? ‘다 이루었다’만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시고 올라간 그것이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었다’를 새삼스럽게 증명하는 것. 제가 증명보다 더 좋아하는 단어는 확인, 확인이 뭐냐 아까 이야기한 고백과 같아요. “너 성도 맞지?” 하면 “맞네요!” 확인 하지요.

성도임을 확인 할 때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할 때, 한번 물어 봅시다. 12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잖아요. 오순절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걱정이 늘어졌습니까? 방금 들으셨잖아요?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동의했다 치고 성령이 임하면 그러면 12제자가 걱정이 늘어졌습니까? “나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이렇게 걱정 했습니까? 기뻐했지요? 성령이 임한 특징이 뭡니까? 기뻐했지요.

그런데 그 기쁨을 성령 안 받은 다른 사람은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이해가 안돼요. 이해가 안돼는 그들은 뭐라고 하냐? 미쳤다고 그래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 소릴 들었는지 “그래! 미쳤다. 나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이것을 합치면 미처 죽겠다라는 말이거든요. 주님이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서 미처 죽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아까 말한 단독자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가 아니고 무엇과 연결되냐?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의 이루신 그 공로와 연결되어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의 환자라고 볼 수 있어요.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이고 옆에 있는 산소통에서 산소가 코로 계속해서 공급이 되잖아요? 성령이 계속 공급 되니까 나는 죽었는데 공급되어지는 힘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냥 내가 산다고 하지 말고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의 능력이 펄떡펄떡 뛴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장어라든지 추어탕하는 미꾸라지를 시장에서 사게 되면 죽은 낙지 말고 산 낙지를 사게 되면 산 낙지는 접시 위에서도 참기름이 있는데도 움직이죠? 입에 들어가면서도 꼼지락거리잖아요? 그러니까 뭐냐하면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거에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산다는 말은 산다에 초점이 아니고 율법의 행함이 아니고 용서의 힘. 사랑의 힘. 덮어주고 봐주는 힘이 나를 장어처럼 펄덕펄덕 뛰게 하는 겁니다. 저는 장어 안 좋아 하지만 어쨌든 펄덕펄덕 뛰게 해요. 장어들이 모였더니 다 뛰네! 장어들이 모였더니 서로 내 것을 내꺼라 하지 않고 서로 소통하고 통용하고, 주변 사람들은 전부 미쳤는가 하겠지만, 나누어 주고, 어떤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공동체를 보면 안돼요. 공동체를 보면 실패 하고 사도행전처럼 공동체 만들자! 이렇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미친놈만 다 모여라! 언제까지 미친 짓 그만 할 때까지 하고 흩어지는, 기쁨에 미친 것이 사그라지게 되면 모이면 위험해요. 헤어져야 돼요. 같이 있으면 안됩니다. 같이 있으면 오해합니다. 마치 교회인양, 한 때 교회였다고 오해할 수가 있어요. 계속해서 미치지 아니하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미칠 때만 교회에 나오면 돼요. 안 미칠 때는 TV 드라마보고 있다가 미치면 교회 나오면 됩니다. 보통 그런 방법을 쓰는데 그런 방법도 있고 또 나오다 보면 말씀 듣다 보면 안 미치다가도 미칠 수도 있고 돌아갈 때는 기쁨으로 돌아 갈수도 있고 방법은 주님이 하시는 방법인데, 이렇게 공동체가 되면 공동체가 뭐가 날아가 버리냐 하면 두 가지가 날아가요.

시간과 공간이 날아가요. 이건 요한계시록에서 하는 건데 미리 해야 되나! 시간과 공간이 날아간다는 말은 내가 의미 없어요.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의미 없고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몇 백 년 지났냐가 의미가 없어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고, 왜냐하면 그 기쁨이 계속 호수로 오니까 “지금 몇 월, 몇일이지? 지금 여기가 어디지?”가 의미가 없다니까요. 이것을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을 했어요.

뭐냐하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이게 마태복음 18장20절에 나오는데 여기서 주의 이름이 있죠. 그러면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네가 니 홀로 산다면 시간과 공간이 계산이 돼요. “다음에 잘할께요. 다음에 교회가서 착실하게 하고 여기는 절이니까 좀 봐주세요. 교회에 가선 잘할께요.” 또는 5년 후에는 바르게 살겠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거에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에요. 우리는 아예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요. 왜? 주의 이름이 생산되는 것이 우리(가?) 있기 때문에, 니 인생을 니가 제조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고 난 뒤에 오늘 본문을 보면 19장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 여기서 “아이고 ! 그러면 부동산 갖다 바쳐야 되나?”걱정 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건 니 이름이기 때문에

29절을 이렇게 고칠 테니까 이해되는가 한번 보세요. “네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지 마라” 이렇게 되지요. 이해 쉽게 되지요. 돈 내지 고 하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너는 내지 마라, 왜 “내기 전부터 내꺼니까!” 그러니 낸다는 게 의미가 없어요. 안 내도 이미 받친 게 되니까. 어떤 분이 벤츠를 구입했다. 내 것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주의 이름으로 구입 했으니깐. 벤츠 타면서 차가 없는 사람이 되요. 이미 차는 받쳤으니까, 주께 받쳤으니까.

그리고 남은 인생이 몸이 아프다. 인생이 쓰레기야! 찌거기야! 쓰레기라고 라벨이 주의 이름으로 붙여지게 되면 쓰레기라도 버릴 것 하나도 없어요. 다 귀한 쓰레기에요. 이쁜 쓰레기라고 버리지 않아요. 그 쓰레기도 쓰레기가 되어 줄 때 대신 죽으심이 빛이 난다니까요. 남들 보기에 무가치 하지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대신 죽으심이 삽입되면 대신 죽으심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귀한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29절 말씀 모든 것을 버려라는 이 말은 버리지 말고 그냥 갖고 있어. 이런 뜻입니다. 해석이 참 마음 편하게 해 주지 않습니까? 너무 사람에게 좋게 하나? 아무것도 바치지 마라! 왜 그냥 있어도 내 꺼니까! 시편 50편 8절부터 10절까지 읽어 보세요.

(시 50: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 이로다

(시 50: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시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마지막 절) 다 내 것이며에 누구도 포함 됩니까? 나도 주의 것이며를 포함시키세요. 이건 짐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보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 네가 교회에 가나 집에 있으나 다 내 것이라, 네가 교도소 들어가나 군대에 가나 다 내 것이라, 전방에 가나 후방에 가나 다 내 것이라. 그러면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영화롭게 합니까? 니 몸으로 하면 안돼요. 대신 죽으심이어야 영광이 되요.

히브리서 10장10절에 보면 나옵니다. 시편 40장 6~7절에 보면

(시 40: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시 40: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주께서 책에 있는 것을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네가 못 지키고 이 책에서 보면 대신 지켜야 될 분을 따로 파견해 보내겠다. 그래서 복음은 뭐냐? 복음은, 내가 아니고, 주님중심에 소속돼 있음을 인정하는 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우리가 믿으려면 내 자리에서 떠나 주님 자리로 가야 이것이 복음에 대한 믿음이 되요. 따라서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뭐냐 ‘믿음 없는 신앙’이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가 앞에 믿음은 누가 믿는 거에요. 이거는 존중한다, 인정한다 이런 뜻이에요. 계약 할 때나 차에 운전사를 나는 믿습니다. 비행기 탈 때 조종사를 믿습니다. 내 인생은 주님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의 특징은 그 주인공이 누굽니까? ‘내가 믿습니다’잖아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 운전 잘해! 비행기 잘 몰아! 주님이여! 구원 꼭 해 주셔야 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이건 신앙이 아니고 그냥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이라는 거에요. 이 믿음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는다. 왜? 본인이 이스라엘 바깥으로 나오면 되는 데 이스라엘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엉터리가 되는 거에요. 오히려 이방인,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될 때 오히려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할 수가 있어요. (롬 11:13-19)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 이야기 하면서 원 뿌리도 파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이 어려운 게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다 구원 한다는 말이 아니고 소급해서 이스라엘 될 사람들이 구원 받는다는 뜻이에요. 온 이스라엘은 구원 받는다. 로마서 11장26절에 나와요. 그런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 협상과 타협이 되는 거에요.

“아~ 믿지요! 믿습니다.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이런 믿음이에요. 그런데 이 믿음은 항상 믿음으로서 내가 살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 믿음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믿음 때문에, 이 믿음이 가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분으로 오셨지요! 이사야 53장에 누가 믿었으리요. “믿어?” 믿습니다. “자! 나를 믿을 수 있는지?” 못 믿겠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지!”

그래서 신앙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되냐 하면 ‘믿음 없는 신앙’이어야 됩니다. 아까 말한 것, 구원에서 구원이라고 했지요! 믿음 없는 신앙이기 때문에 믿음의 주체가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라고 하지 말고 내가 나를 못 믿게 만드신 분. 이렇게 되요. 나의 미래를 내 계획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 분. 그 분에 의해서 졸지에 나는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지요.

(빌4:13) “내게 능력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만약 능력을 행하게 되면 성공과 실패를 내가 규정해요. 성공했다, 실패 했다, 하는데 사도 바울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에 한 것처럼 그냥 입 다무는 거에요. 시키는데로 가는 거에요.

이것을 요한복음 21장18절에 보면 베드로보고 뭐라고 합니까?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띠 띠우니까 완전 질질 끌려가는 거에요. 이리 와! 띠 띠우고 그 다음에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거에요. 미치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 손 놓으세요! 제가 주님 원하는 데로 가겠습니다.” 그게 원치 않는 길이에요. “주여! 선교사 되겠습니다.” 하면 “아서라! 하지 마라!”왜? “네가 하겠다고 하니까 하지마라!”

그게 바로 베드로의 이름, 유다의 이름, 요한의 이름을 전부 다 뭐로 바꾸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바뀔 날이 올거에요. 이렇게 바꿔지면 12제자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기쁨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어디라는 게 의미가 없으니까 장소의 개념이 없으니까 시간 개념이 없는 데 이걸 가지고 스데반은 뭐냐 하면 예를 들어 방이 있는 아파트의 베란다를 트면 거실이 넓어지잖아요.

스데반 집사는 이생과 저승의 틀을 터버렸어요. 주님이 바로 옆에 있어요. 그러니까 함께 있는 거에요. 그게 바로 동행입니다. 주님과 함께 성령이 함께 있는 거에요. 아까 껍데기 얘기 했지만 우리의 육신의 몸은 새로운 몸을 입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의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어요. 이게 고린도 전서 15장에 나오거든요. 연약한 것은 날아가고 새 몸을 입는다. 병든 몸이 사라지고 건강한 몸을 입는다.

그런데 병든 몸이 내 몸으로 되지 않고 주께서 썩게 하셔서 새 몸으로 갈아입히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어릴 때 키울 때 개구쟁이들 옷 입힐 때마다 한바탕 전쟁을 벌입니다. 특히 여자 얘들은 자기가 마음에 드는 볼록한 소매로 된 것만 입으려 하니 “야!야! 그거 더러워 벗어라!” 하면 “이거 입고 갈래!” 하고 “너는 밤이나 낮이나 이것만 입고 잘 때도 이거 입냐? 빨리 갈아입자! 냄새난다~” 하면 “아니야! 이거 입고 갈래~”

학교 갈 때 도망가듯이 가지요. 볼록 소매가 뭐라고! 자기가 백설 공주인 줄 알고 또 어떤 얘들은 꼭 바지 안 입고 치마만 입는 애도 있고 또 어떤 얘들은 남자같이 “난 부끄러워서 치마 안 입고 바지만 입는 게 편해.” 바지입고 전봇대 올라가 장난치고 재미있다고 남자같이 왈가닥 같은 애들이 있어요.

어떤 설교든 관계없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마음가짐으로 전부 다 바뀝니다. 그리고 몸의 영광을 노리지 마세요. 왜냐하면 주께서 받은 영광은 주님의 심성에 격에 맞아서 수준에 맞아서 그런 거에요. 우리가 탐을 내면 안돼요. 하늘의 영광을, 마음가짐이 심령이 가난하게 되면 저절로 확인돼 있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잖아요. 심령이 가난하면 되요.

그럼 어느 정도로 가난 합니까라고 물으면 오늘 본문 다시 해 봅시다. 이제는 이 본문 볼 때 부담 느끼지 않지요? 편안하지요? 아무것도 바치지 마라고 했으니까.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소유권 등록 이전이 다 된 사람은 주님이 주신 영생까지라도 이미 함께 있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영생이 주어지니까

다시 30절 보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려운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다가 인간들 입장에서는 불만이에요. 처음부터 먼저 될 자를 따로 두면 되는데 왜 헷갈리게, 먼저 될 자를 처음부터 달리기해서 1등으로 하면 될텐데 왜 꼴찌로 가게 해서 역전극을 일으키느냐?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이 돼버리면 이 육신은 우리 육신이 아니고 예수님 육신이거든요. 그럼 예수님 육신에 반전이 있고 역전이 있어요. 십자가에서 죽을 때 사람들이 다 실패 했다고 보는 거에요. 실패하고 망했고 죄인이잖아요. 죄인으로 규정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의 믿음의 세계에서 볼 때 정말 이거는 끝까지 실패로 보는 거에요.

그러면 누가 그 좁은 길을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안 가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뒤 돌아 봐요. 아무도 따라 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에 홀로 가신 겁니다. 누가 따라 오며 안돼요. 누가 따라 오면 일부러 숨어요. 아무도 가지 못한 길. 왜 그러냐 하면 주의 이름은 홀로 언약을, 말씀을 다 이루어야 돼요. 누가 끼어들면 안돼요. 내가 구원 받는 다고 내 공로가 끼어들면 안돼요.

모든 것을 다 차단시킵니다. 차단시켜져야 뭐가 성립 돼냐하면 용서가 용서다워 져요. 용서이전에 뭐가 있어야 되냐하면, 죄가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의가 있으면 용서라는 게 빛을 잃어 버려요. 용서되려면 철저하게 용서 받아야 돼요. 처음부터 끝까지 용서돼야 돼요. 예를 들면 선생님이 시험을 치르는데 “나는 너희들이 빵점을 맞아도 다 용서해 주겠다! 너희 성적이 학위 끝나면 100점 될꺼야!” 해놓고 선생님이 계속 시험치는 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무척 어려운 거에요. 땀 뻘뻘 흘리면서 시험을 보는 데 어떤 학생이 진짜 문제가 어려워서 빵점을 맞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학생을 불러서 1+1은 얼마야? 2입니다. 100점. 일부러 그 학생을 빵점 안되도록 만드는 거에요. 그래서 “너는 적어도 1+1은 2라는 것을 아는구나! 그러니 완전한 빵점은 아니야!” 그리고 계속해서 성적을 향상시켜 높이는 거에요.

그렇게 해 놓고 마지막에 “ 너희들이 이번에 100점 나온 것은 너희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나의 용서 덕분이야!”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오늘 강의는 뭡니까? 바르게 살자가 되요. 바르게 살아야 되요. 왜? 그게 죄악이기 때문에, 막 사는 것 하고 혼돈되지요? 12제자가 예수님 덕분에 바르게 살았어요. 시키는데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빵점이에요.

뭐냐 십자가 달리실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나 버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하지요? 결국 인간은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그 바르게 살고자 하는 내 마음이 내가 꼬깃꼬깃 숨겨 놓은 나의 극단적인 죄의 모습이에요. 나의 가치, 나는 이렇게 착할 수 있다. 이렇게 거룩 할 수 있다는 것, 나는 복 받을 만한 짓을 할 수 있다. 내 힘으로도 구원 받을 수 있다. 십자가 믿어 챙기고 믿고, 믿고, 믿고 믿음으로 행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게 빵점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죄인이라고 해서 죄만 짓지 마시고 형편에 따라 수시로 우리 자신의 잘남과 의로움이 계속 나옵니다. 우리가 착한 짓을 했을 때 나의 선악적인 요소가 양심이 가만두지 않고 반드시 포착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칸트의 도덕률이라 하는데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고귀한 도덕법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겁니다.

어떤 목적 없이도 착해질 수 있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 별처럼 박혀 있다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귀가 집어넣은 선악과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양심은 살아 있지요.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이유가 있고 핑계가 있고 변명거리가 되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용서가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아! 내가 착하고 선하고 경건하고 거룩하는 이것마저도 용서거리가 되는 군요.!”

이미 다 용서를 하셨습니다. 나머지 우리의 삶은 무엇이 죄이냐? 무엇이 용서 받아야 해결될 수 있는 죄가 되느냐를 이제는 우리가 계속해서 평생 살면서 끄집어 내도록 하는 겁니다. 바르게 살고 “주님이여! 이것은 아무 댓가 없이 진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진짜 고마워서 하는 짓이니까 특별 의미를 부여 하소서!” 라고 했던 그 짓들이 아하! 주께 용서받을 죄의 항목에 포함시키는 것을 비로소 끄집어내면서 소급해서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가 주님의 믿음 속에 적용받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돌라서면 다시 모든 게 내 것이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미리 아셨기에 십자가에서 대신 돌아가신 것을 다시 한번 높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질문: 그럼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답변: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는 말은 바로 네가 아무리 먼저 된다 해도 결국은 나중 될 수 밖에 없는 짓을 하는데 주께서 먼저 되게 해주시는 거지요.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는 말과 바리새인에게 하는 말이 다르거든요. 제자들이 누가 더 높으냐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는 것처럼 항상 주님의 반전을 우 리 속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내가 이렇게 착합니다”라고 했는데 “아하! 이게 내 가 나중 될 요소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게,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가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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