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사무엘상 2:12- ) 대전-(사무엘8강)
중독 (사무엘상 2:12- ) 대전-(사무엘8강)
이름 : 주향(IP:211.231.45.164)
중독 (사무엘상 2:12- )
대전-(사무엘8강)
이근호
2015년 11월24일본문말씀: 사무엘 상 2:12
(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사무엘상 2장 12절을 보게 되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이야기가 신약의 입장에선 잘 이해가 안 될 거에요. 왜냐하면 신약의 이스라엘이라 할 것 같으면 신약의 사람들은 그것이 교회다라고 간주하는 버릇이 있어서 교회라고 하면 주님이 함께 계신데,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그들이 알지 못한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안 되지요?
알 든 모르든 주님의 혜택을 입고 있는데 꼭 주님을 알아야 하나? 몰라도 혜택만 입으면 되잖아요? 그렇죠? 왜냐하면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 여기서 문제는 여호와를 어느 정도 아느냐? 수능 몇 점 이상 되야, 수능 몇 점 이상 맞아야 여호와를 안다고 할 수 있냐의 기준이 나오게 된니다는 말이죠. 여호와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몇 점 밑이 되야 모른다에 속하느냐 이런 문제가 또 생겨요.
목사가 설교 할 때 여러분, 주님을, 예수님을 아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때에 집사들이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론 “목사 너는 얼마나 아는데?” 그러면 네가 안다고 하는 그 수준은 나만큼 알아야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목사만큼 더 알아야 된단 말인가? 아니면 자기보다 몰라도 봐준다는 뜻인지? 그러면 우리 교회에선 몇 퍼센트가 모르는 쪽이고 몇 퍼센트가 중간 정도이고 몇 퍼센트가 내신 등급 1위하는 정도이냐?
이러한 계급들이 성립되게 되어 있어요. “그럼 너는 잘 아냐?” 이렇게 되겠지요. 자! 그렇게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에 여호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을 안다고 하는 것과는 좀 다른데요. 여호와를 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나는 여호와를 알아라고 했을 때에 안다, 모른다의 측정 정도를 어떻게 판단하냐는 겁니다. 흔히 우리가 많이 들었던 이야기를 먼저 할께요.
여호와를 알게 되면 기적들보다 많이 챙겼다에 해당이 됩니다. 기도 많이 했더니 복을 많이 주셨다. 이처럼 간단한 공식이에요. 기도를 많이 했더니 기도의 응답이 자주 일어나더라. 그만큼 나는 뭘 안다? 여호와가 나를 알아준다. 나와 여호와가 아는 사이가 된다. 여호와를 알면 행운이 찾아오더라는 것이 하나의 표준처럼 느껴지지요? 손가락이 아플 때 기도하면 쫙 펴진다? “아! 집사님 여호와를 많이 아시네요! 이런 기적이 오다니~”
그러면 기도해도 응답 없고 기적도 별로 없으면 여호와를 안다고 해봐야 “에이~ 큰 소리 치지마! 실적을 내놔야지~” 이러면 할 말이 없잖아요. 실적을 내놔라! 애가 공부를 잘한다던지 그런, 보통의 사람들이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기적적인 실적이 있을 때 안다라고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니까 사람들은 “목사님! 그건 아니지요!” 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게 아니라면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겁니까?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내면에 들어 있고 그것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 어떤 모양새로 나올 때, 어떻게 안다는 거냐? 창세기 5장부터 보면 에녹 같은 경우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잖아요? 그 다음에 동행한 사람이 6장에 보면 노아가 동행 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와 동행했을 때 나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으로 인정받는 겁니다. 기적 받는 게 아니에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매 당대에 의인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 멸망시키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할 때 아브라함도 알았어요. 의인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그래서 사무엘상 같은 경우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형성 됐잖아요? 율법을 왜 줬겠습니까? 법을 왜 줬겠습니까? 법이 삽입돼 들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법 들고 들어 왔다는 뜻이거든요.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이 법 들고 들어왔어요. 법을 들고 들어 왔다는 말은 법 지키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요를 했지요?
법을 지켜야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다른 나라에게 밀리지 않는다. 이게 축복이다라고 된 겁니다. 그러면 법을 지키면 다른 나라에게 밀리지 않고 복을 받는다.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 이것을 단출하게 하면 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나오고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저주를 받지 않고 의가 있는 곳에는 복이 안 올래야 안 올수가 없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하는 말이 성립되지요. 불량자란 말은 의에 관심이 없다라는 말이고 왜 의에 관심이 없는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설명을 더 하자면 이렇게 되겠지요?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는 무슨 뜻인가 하면 바로 단독자로 산다는 말입니다. 홀로 산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객관식 문제를 내겠습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다음 중 흠뻑 마귀 들린 사람은? 다음 중 악마에 들린 사람은? ①번 간음한 자 ②번 살인한 자 ③번 도둑질한 자 ④번 열심히 바르게 사는 자. 몇 번 입니까? 누가 악마 든 사람입니까? ④번 열심히 바르게 사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홀로의 가치를 계속 이어나가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단독자의 가치를, 계속 이어 나가야 돼요. 그냥 내 가치를 누구에게 빼앗기거나 상실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나는 내 가치, 내가 챙긴 의로 버티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 들린 사람의 최종적 모습이에요. 그게 요한복음 8장 44절에 나오지요.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 느니라 그는 처음부터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홀로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난 수요일에 언급했듯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홀로 살 수 있는 입장이 안됩니다.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 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할 일은 입을 다무는 것, 가만히 입 다물면 돼요. 괜히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잖아요! 입 다물면 되는 거에요. “여자 친구와 헤어졌습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어요. 헤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거에요.
욥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욥에게 두 가지의 자아가 있거든요. 하나님이 인정한 욥이 있고 욥(자신이) 생각하는 욥이 있는데 그것은 허구입니다. 욥(자신이)이 생각하는 욥은 주위 사람들과 대조해서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다라는 그런 자아가 있는데 이것이 밑에 원래의 원판이 있고 욥 본인이 생각하는 허구적인 것이 있는 거에요. 이것을 주께서 껍데기를 벗겨내는 작업을 하신 거에요.
입 다물라! 돼지고기 껍데기 벗겨 내듯이 욥은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이것을 잃으면 자기는 다 잃은 줄 알고 있어요. 사실 이것을 잃어야 그동안 몰랐던 진짜 자기 자신을 주께서 창조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동안 공들였던 내가 달아나니까 그게 되게 아까운 거에요. 멋있는 나의 가치가 하루아침에 날라 갈 때 아까운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다닐 때 제자들 중에 별로 아픈 사람이 없었어요. 베드로의 장모가 아팠었지 베드로가 아프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도 안 아프고 12제자들도 안 아파요. 처음 알았지요? 아픈 사람 없다는 것을 그런데 이상하게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모여요. 그럴 때 제자들이 이래야 되요. “아~우리는 안 아프다!” 이러면 안돼요. “우리도 진작에 아팠어도 당연해” 배워야 되요.
건강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아픈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저주하지 아니하고 아팠기에 주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들이 막 나오니까 이것을 제자들이 멍청했던 자아를 버려야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 9:1-8)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지붕 뚫고 들어오잖아요. 제자들이나 그 주위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병 고치실줄 알았지요. 심지어 병자 본인도 병 고칠 줄 만 알았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를 언급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지요. 그러면 이 죄는 뭐냐 아프든 건강하던 다 죄가 있는 겁니다. 아차서 자기가 조인인 것을 알기는 쉽지만 모든 만사가 형통하고 몸이 건강한 가운데 “아휴! 나는 죄인이야!” 이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이거는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사람이 일이 꼬일 때 내가 세상을 잘못 사는 가하고 의심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일이 평온하고 잘 될 때 정말 이건 위험한 순간순간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하나님께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이 잘 될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수긍 못합니다. 수긍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라는 마음가짐하고 이렇게 착한데 왜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하는 마음가짐하고 어느 쪽이 악마 편에 서있어요? 나의 가치를 나는 그것이 신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갖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량자의 대표자가 요즘의 재벌 3세 에요. 드라마에 나오는 천하에 뭣도 모르고 지 세상인 듯 깝죽대고 스포츠카나 몰고 다니고 할아버지, 아버지가 잘 산다고 자기도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거에요. 이런 인간들은 대 기업의 빌딩 현관에서 말단 사원인 여직원하고 부딪혀서 커피 쏟아야 되요.
커피 쏟아서 양복이 젖어서 “니가 뭔데 감히 내 양복이 얼마 짜리인줄 아니? 물어내!” 라고 하면 그 아가씨가 “ 물어내라면 물어내면 되지 니가 뭔데?” 하면“ 나 이 회사 사장 손자야!” 하면 “ 손자면 손자지 그게 뭐? 물어내변 되잖아!” 하며 아주 되받아 치고 나올 때 “ 나한테 대드는 아가씨는 니가 처음이다!” 이렇게 드라마 시작 되는 거에요. “ 어! 매력있네! 나한테 기 안 죽고 달려드는 건 니가 처음이야!” 이게 아침 드라마 1~3회 정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불량자를 재벌 3세로 본다면 여호와를 알 수가 없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재벌 3세가 여호와를 안다 하잖아요. 안다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불량자가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저! 여호와 알아요!”라고 손들고 성급하게 나오지 말고 이 불량자라고 할 때 너도 거기에 한패 먹으라는 겁니다. 네가 불량자 입장에 서서 그 코스를 밟아서 여호와가 누군지를 다시금 점검하라는 뜻이에요.
이게 뭐냐하면 이스라엘에 일어나는 전체 일들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계시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나는 저 사람은 편이 아니고 이 사람 편이야!”라고 할 수가 없어요. 누가 저에게 질문 한 것처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하고 기름 안 준비한 다섯 처녀중 “나는 기름 준비한 아가씨 편에 설래!” 그러한 의도 자체가 주님께서 어리석은 처녀가 기름을 준비 안한 이유가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거에요. 기름 준비한 쪽으로 가면 안돼요. 기름 준비하지 않은 쪽에 가야 되요.
하나님이 마지막에 악한 고기와 좋은 고기로 나누신다 할 때 좋은 고기 쪽에 서면 안되요. 악한 고기 쪽에 먼저 가야되요. 가라지 뽑아내고 알곡 거둬 드릴 때 “나 알곡 될래요!”손 들지 마세요. 가라지 쪽에 서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택은 그리스도의, 여호와의 동행 안에서만 선택이 완료적이기 때문에, 완료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선택 할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구원 받고 난 뒤에 이미 주님의 선택이 완료적으로 나에게 적용 되었다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 성도의 할 일은 뭐냐? 고백이에요. 고백 이전에 뭐냐 주님의 통보가 있어야 된다. 성도는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통보 받은 것을 재확인 하는 고백, 이것이 성도의 남은 삶입니다. 어디서 살던지 강원도에 살던지 대전에 살던지 관계없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고백이고 그 고백의 근거는 착함이 아니라 주님께서 저에게 먼저 알려주셨잖아요! 이런 통보를 바탕으로 해서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제가 주일 낮에 분수 이야기 헸지요? 항상 설교를 50분안에 끝내야 되니까 강의시간 같으면 더 해도 괜찮은데 설교시간에는 12시를 안 채우고 중간에 자꾸 단출하게 이야기 하는데 분수위에 톰과 제리 이야기에요. 만화에 나오는, 분수위에서 쥐가 막 달리잖아요? 물 위에서 달려 집니까? 안 달려지지요?
그러면 여기서 살다가 미국에 가서 산다하면 미국에서 새 언약의 분수가 막 올라 오잖아요? 그러면 한국에 있는 분수와 미국에 있는 분수가 똑같은 새 언약이다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는 유럽에 살던 아프리카에 살던 관계없이 새 언약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속의 분수가 꺼져 버려요. 꺼지는 이유가 뭐냐하면 마음속의 가치를 재구성했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가치를 재구성 하게 되면 재구성하기 전에 먼저 순서가 뭐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무가치하다라고 하면서 몇 분 안가서 나의 가치를 따로 적립해요. 이렇게 적립을 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고백은 뭐냐하면 나는 잘났다! 라는 고백이 되요. “하나님! 이 정도는 해주셔야 됩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면 안되고 이 정도는 해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나와요. “나 한국 말고 미국에 가서 살까?” 갑자기 공간적으로 자기가 선택을 해버리고 “나는 지금은 아니지만 한 2개월 후부터 성경 읽어야지” 라는 시간적인 선택을 해버려요. 그러며 어떻습니까? 완료된 선택이 아니고 새롭게 시작하는 자기 선택이 되겠지요?
지금 제가 불량자 이야기를 했거든요. 다시 강의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성경에서 불량자라 했는데 제가 먼저도 이야기 했지요? 불량자라 할 때 자기와 관련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호와를 알려면 반드시 불량자가 어떤 자인지를, 불량자를 거쳐야 되요. 불량자가 아주 나쁜 사람이지요. 아주 나쁜 사람을 거쳐야, 여기서 불량자를 거칠 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냐하면 엘리의 아들들이 불량자라고 규정을 하잖아요!
이 규정에 누가 개입되어 있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규정 하는 것, 내가 나를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항상 자기를 옹호하게 되잖아요. 내가 나를 판단 할 때 자기를 무시하는 판단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항상 옹호해요. “그래! 이번엔 실패 했지만 여덟 번 째는 성공할꺼다!” 라고 격려를 해 준다니까요. 자기 자신을, 나는 항상 내편이에요.
저의 ‘피’라는 책에도 나옵니다만은 우리가 만약에 지옥에 떨어 질 때 모든 사람이 저주한다고 손가락질 할 때도 누가 나를 격려해 줍니까? 나만이 지옥가는 나를 격려해줘요. “에이! 어쩔 수 없잖아! 지옥에서라도 잘 살자! 힘내! 여기서 무너질 수 없어!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어! 그래, 지옥도 사람 사는데 일거야, 아마! 영원토록 살아야지!” 이렇게 격려해 주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거짓 말 중에 제일 구라. 제일 거짓말 중에 거짓말은 내가 죄인이라는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것이 왜 거짓말이냐 하면 앞에 뭐가 붙느냐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내가 이야기한 것은 이것 맞지요? 이것 진리 맞지요라고 하는 거에요. 내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규정한 이것만 진리 맞지요?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멍청은 아니지요?
내가 죄인이라는 진리를 간파할 정도로 그거 하나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주님! 제가 전적으로 죄인이 아니라는 논리가 되지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왜 거짓말이 되냐 하면 내가 죄인이라고 말을 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이것이 거짓말이 된다 이말이지요. 이번에 일이 안되고 당한 것은 하나님께 벌 받은 것이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 받은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 이건 벌 더 받아야 되요. 아직 멀었어요.
인간은 자꾸만 자기를 규정하는 이것은 사무엘상 2장에 12절 본문에 나온 것처럼 불량자, 다시 말해서 여호와와 함께 있지 않는 것, 단독자로 살아가는 것, 홀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화를 하다가 거룩을 하다가 돌발 상황이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지었다 합시다. 자기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좌절한다는 것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 하느냐 하면 평소에 자신이 죄를 짓기 전부터 이미 자기는 마귀의 앞잡이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자기 가치에 대해서 조바심을 내면서 귀하다고 쥐고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뭐냐 내 가치를 내가 잘난 사람으로 하겠다는 말은 그냥 내 가치 붙들고 혼자 살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어서 사는 보람으로 제일 큰 보람으로 삼고 있는 겁니다. 진짜 성도는 혼자, 단독자로 가치 있게 사는 게 아니에요.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야 돼요.
그리스도와 연결된 상태로 살아야지 주님이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 “이건 뭐야?” 하시지요.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너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어!” 갑자기 죄 지어서 죄인된 것처럼 왜 그러지? “왜 오바해? 아기도 네 주제를 모르겠어? 너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마치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무슨 가치 있는 존재인것처럼 그렇게 살아온거에요.
그런 대표적인 집단이 지방교회입니다. ‘워치만 리’의 대표적인 논리가 육과 혼과 영의 삼분설이에요. 사무엘상 2장에 의하면 불량자들이에요. 여호와를 알지 못해요. 다만 여호와를 이용할 뿐이죠. 여호와 하시는 것을 모델로 목표를 잡아서 끊임없이 그 간격을 줄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과 자기가 해 낼 수 있는 것의 간격을 줄이면서 간격을 줄인 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그 말씀을 보고 그 간격을 줄이려고 하는 거에요. 촘촘하게 줄이려고 하는 거에요. 좀더 가까이, 미분 방정식처럼, 옛날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원의 면적을 구할 때 어떻게 하냐하면 원의 면적을 낼 수 없으니까 (반지름)×(반지름)×3.14 원을 등분내어 한없이 잘게 잘라 이어 붙이면 결국 직사각형 모양에 가까워져 구하는 방식, 즉, 근소한 차이를 좁혀 나가는 방법으로 하거든요.
수학에서 이것이 나왔다는 말은 근사치입니다. 무한적, 무한대라는 것은 사실은 0인데 0은 아니고 0에 가까이 가잖아요. 이게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아담의 마음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요. 수학이고 과학이고, 진리는 몰라도 가까이는 갈 수 있다. 이게 학문의 희망이잖아요. 학문하는 사람들이 희망으로 삼습니다. 과학은 물리적인 것을 다루지만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는 무엇을 다루냐? 인간의 마음을 다루거든요.
그것에는 목표가 있어요. 교회 나올 때의 목표가 있고 철학 할 때 목표가 있고 학문을 하는 목표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아까 근사치, (원주율)파이 3.14로 근사치에 가듯이 인간은 절대 행복에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느냐를 본인이 테스트 하는 거에요. 자기의 평생을 걸고 도박하는 겁니다. 그것을 두 자로 ‘중독’ 이라고 합니다. 중독이에요. 절대 ‘선’에 대한 집념을 보이는 겁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쥐를 잡아 가두고 시시한 지푸라기주고 지켜봤습니다. 별로 맛없는 음식을 주니까 먹다가 말다가 이러는데 거기에 갑자기 쥐가 가장 좋아하는 치즈라든지 그런 것을 줬어요. 주니까 환장하는 거에요. 쥐가 시시한 것을 먹다가 진짜 맛있는 것을 주니까 그리고 학자가 맛있는 것을 맛보여 주고 난 후 그곳으로 가는 길을 못 가도록 차단시켜 버렸어요.
차단시킨 후 쥐의 뇌를 수술을 했어요. 수술을 해서 맛있는 것을 더 강열하게 느끼도록 만든 뒤 시시한 음식과 전에 맛보았던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에 두니까 이쪽으론 맛있는 것이 있는데 못가요. 쥐가 갈 수가 없는 거에요. 장치를 해 놓아서, 그런데 시시한 음식이 있는 곳은 자유롭게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거에요. 쥐가 (좋아 음식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포기 하겠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심리학자가,
쥐를 수술해서 다시 집어넣으니까 이게 집착을 보이는데 시시한 건 굶어 죽어도 안 봐요. 이미 맛 봐서, 맛보고 난 뒤에는 거기에 집착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아주 무서운 말인데요. 성도에겐 별로 무서운게 없잖아요. 뭐가 무서운가를 제가 한 번 써 볼께요. 그런 집착을 뭐라 하냐하면 ‘쥐의 인간화’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수적인 것, 대구 사람, 경북 사람은 누가 나와도 여당을 다 찍어 주듯이 보수적 경향을 보이는 것. 인간이 보수적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뭐냐하면 이미 주변의 환경이 치즈가 되었든 뭐가 됐든 쥐의 인간화가 되었다는 것은 주기 뭘 발견했다는 겁니까? 자아와 주체를 벌써 맛 봤다는 거에요. 치즈가 없는 나를 상상도 못 하겠다는 거에요.
쥐의 인간화라는 것보다 더 무서운 말을 쓸께요. ‘인간의 동물화’에요. 이게 더 무서워요. 쥐가 인간화 될 수 있다 즉, 자아와 주체가 확보될 수 있다는 말은 물론 수술에 의해서 그렇게 되겠지만 다른 기능은 제거하고 그것만 집중하도록 하는 거지만 이 말은 얼마든지 인간은 동물화 될 수 있다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에요.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지켰다. 못 지키면서도 지켰다라는 것을 먼저 선점해서 상상적인 자아의 이상향은 이미 굳어졌어요. 굳어지고 난 뒤에 이제 남은 것은 뭐냐? 그 간격만 채우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교회 중독, 종교 중독, 성경 중독이에요. 교회가 교인들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노리는 가가 여기 나왔지요? 시키는데로 무조건 따라하는 중독시키는 거에요. 사람을 종교에 중독시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세요. 주님은 현실을 이야기하던가요? 종교를 이야기하던가요? 둘 중에 어떤 것을 이야기던가요? 현실을 이야기 하지요. 그러면 현실을 이야기 하면서 예수님이 따로 “야!야! 현실은 이렇다”라고 이야기 하던가요? 아니면 예수님이 현실을 이야기 하면서 어느 한 가운데서 현실을 언급하던가요? 바로 종교 나라, 국가 종교, 유대교 한 복판에서 예수님은 “이게 아니고 이건 악마이고 악마의 술책이고 이게 아니고” 아니라고 이야기 하지요?
현실을 이야기 하지요? 내 말은 무시하는 것은 먼지 털어 버리듯 해라!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심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건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 장차 무화과나무가 시들 때 그 때가 차라리 안식일이 아닌 것을 감사해라! 그 때는 임신한 여인들은 괴로울 것이다. 성전이고 모든 것은 불타버릴 것이다. 해가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지고 지구상에 모든 사람에게 내가 구름타고 임할 것이다“
지금 현실을 이야기 하지요? 그래서 성도는 현실을 말하기 위해서 뭐를 포기해야 되요? 아까 중독 있잖아요? 중독을 포기해야 되요. 중독이 되려면 주체가 있어야 되는데 현실은 뭐냐? 현실 속에 내가 파묻혀서 내가 사라져 버려야 되요. 내가 있으면 불량자가 되요. 내가 있는 순간부터 나는 단독자로 살 수 밖에 없어요. 나는 나를 위해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불량자에요.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그들이 뭘 모른다? 여호와를 모른다. 이것은 오늘 날 대입시키면 성도는 뭘 안다? 여호와가 예수님 중심으로 현실 속에 일부로써 나는 들어가있다라는 겁니다. 내가 밥을 먹고 내가 춤을 추든 뭐를 하든간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힘 가지고 하는 거에요. 그리스도가 나의 주체를 대신해버렸습니다. 왜? 대신 죽었으니까! 대신 죽었다가 대신 살아 나셨어요.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에요. 일부지요. 하나의 퍼즐의 그림에서 한 조각을 담당 하지요!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큰 그림에서 중에서 하나의 조각을 담당하지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에녹이나 노아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파트를 담당하는 겁니다. 모세 같은 경우에는 고난 파트를 바로왕의 아들 됨을 포기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겼다. 즐긴 것도 아닌데 즐겼다는 거에요.
현실을 언급할 때 “아! 내가 착하게 살아야겠구나!”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시는 작업 안에 내가 놓여 있다. 이 현실은 날마다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예를 들어서 식상 하겠지만 세상의 끝(the end of the world)인가하는 옛날 팝송 있지요? 왜 태양은 계속 빛나는가? 내 사랑이 깨졌는데 왜 밤은 지고 새는 짹짹거리고 왜 재미있게 밝고 웃냐는 말이죠?
니가 아무것도 아니거든!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게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아무것도 아닌데 마치 상처를 입고 내가 좌절한다는 것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다는 말입니까? 마치 이 현실은 내 눈앞에 굴복해야 될 마치 내가 주인인것처럼 내가 판단자이고 최종적인 절대자인 것처럼 살았는데 그게 바로 마귀의 앞잡이로 살아온 거에요. 마귀는 뭐라고 하냐? 여호와랑 붙어 다니지 마라는 것이거든요.
혼자서 살 수 있는데 왜 여호와랑 자꾸 붙어 다니냐? 오늘 본문에 불량자라서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 여기에 불량자라고 엘리의 아들들을 욕하지 마세요. 우리가 평소에 엄마로부터 태어 날 때 이것을 부여 받고 태어났어요. 응애~ 하면서 우리는 불량자의 심성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동안 아닌 척하고 위장들을 하지만 한순간에 위장은 벗겨져 버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나한테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라고 따지게 될꺼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게 죄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게 죄에요. 우리는 버림받아야 되는 정도가 아니고 수시도 대드는 입장에 있습니다. 대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치 있는 나를 왜 자꾸 무가치로 몰아넣는 것에 대해서 나는 못 참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래요. “네 속에 마귀가 들어 있으니까 너는 처음부터 거짓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몰아 붙여서 무가치하다고 하는데 껍데기에 불가한 우리가 마귀가 시키는 대로 극렬하게 반발하는 겁니다. 극렬하니까 유해진이 생각나는데 어느 섬에 가서 문어가 잡힌다는 거에요. 유해진이가 극렬하게 통발 설치해도 문어가 한 마리도 안 잡혀요. 아내인 차승원이 요리를 해주고 있는데 문어가 잡혀야 요리를 해 주잖아요. (오락 프로) 삼시세끼. 왜 안 잡히느냐? 주님께선 “왜 잡아야 되는데? 니가 왜 잡아야 되는데?”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내가 내 의미를 규정하지 마세요. 내가 내 의미를 규정한다는 것은 그건 불량자입니다. 단독자이기 때문에 자기 홀로 서고 싶어서, 그게 바로 불량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불량자가 나온 것은 “나는 불량자가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해!” 이러지 마시고 주께서 불량자의 자리를 일부러 마련하셨습니다. 불량자의 자리로 갈 때 비로소 우리가 몰랐던 여호와가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바로 불량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워요. 억지가 아니고 그냥 우리가 자연스럽게 살게 되면 행복 위주로 태평하게 살게 되면 더 이상 여호와가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나는 나 홀로도 얼마든지 여유로울 수 있는 그 지경, 여호와고 삼위일체고 다 귀찮아! 그냥 혼자서 살고 싶은, 이것이 우리의 바램속에 있는 우리의 진짜 소망이 아닌가?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내가 신이 되는 거에요.
혼자. 그냥 다 귀찮아! 혼자 있으매 그 자체로 절대적인 존재, 그게 자아실현인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고맙게도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 가운데 나온 겁니다. 그러면 아들이 나왔다는건 아버지가 문제 없는데 아들이 문제 있다는 거에요? 아버지가 문제 있다는 겁니까? 아버지가 문제 있는 거에요. 그러면 어디에 아버지가 문제가 있는지 2장 30절 보겠습니다.
(삼상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 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 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되어 있지요? 그 이유가 2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 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식을 하나님 보다 더 중히 여겼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자식이 최고이지. 인간의 혈연관계가 있는데 제가 이번에 요한계시록 교재 올려놨지요. 혈연관계에서 못 빠져 나온다고, 교회에 왜 갑니까? 하나님 믿으러 가는 게 아니고 자식 잘되라고 하나님을 이용 하려고 가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제일 중요시 하는 자식, 그것도 못난 자식이 아닌 정말 귀한 자식을 하나님과 맞바꾼 사람이 누구 밖에 없냐 하면 아브라함 밖에 없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계열에 속한 사람은 줄줄이 강제로 자식을 (하나님과) 바꿔야 되는 현상이 일어나겠지요? 이삭도 누구를 더 좋아 했습니까? 장남 에서를 더 좋아 했지요? 자기가 더 좋아하는 아들이 영원히 저주를 받습니다. 지옥 가요. 자기가 좋아했는데,
그런데 자기가 안 좋아하던 아들은 천국가요. 하나님 믿을 마음이 생깁니까? 나가 죽어라하는 자식은 천국가고 있고 귀하다하는 자식은 지옥가고 그럼 자기의 판단은 뭐가 되요? 거짓이 돼 버렸지요. 야곱은 어떻습니까? 아들을 자진해서 내놓은 게 아니고 강제 조치로 제일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어요. 짐승에게 물려 자기가 입힌 옷에 짐승의 피가 묻혀서 야곱은 죽은 존재입니다.
이 세 가지의 언약을 앞장 세워서 여호와 등장 하면서 그게 집단화 하게 되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요. 모든 아들은 다 죽어야 되는데 이스라엘의 아들도 죽어야 되요. 아들도 죽어야 되는데 니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어린 양과 바꿔치기 해서 하나님이 주신 자식으로 다시 수용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겁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요? 그것을 발랐을 때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애굽 사람도 우리 가정도 다 죽은 거고 장자가 죽었다는 것은 대가 끊어졌다. 이건 저주 받은 거에요. 다 마땅히 저주 받습니다라고 되야 돼요. 그러고 난 뒤에, 다 죽고 난 뒤에 자신이 이제는 무가치 한 것 중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여호와 보시기에 가치 있는 것을 거기에 담아 버리지요.
보쌈 싸듯이 돼지고기에다가 우리는 뭐냐 배추 잎사귀, 상추 잎사귀에 불가하고 다 의미 없어요. 없는데 상추 잎사귀는 그 자체로는 의미 없어요. 뭔가 담겨야 되요. 귀한 보물이 담기듯이 담겨야 된다고요.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 했겠습니까? 신랑을 담겠습니까? 결국은 신랑을 담잖아요? 기름 가지고 주유소 할 것도 아니고 기름은 단지 신랑을 담기 위한 임시적 조치이지요?
기름을 준비하겠다는 것은 신랑을 더 그리워 한다는 뜻입니다. 기름 값 오른 다고 더 준비한 게 아니고 신랑이 그리운 거에요. 우리는 쌈 같은 존재로써 새로운 것이 담겨야 합니다. 그게 뭐냐 우리가 어린 양 때문에 새로운 가정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동행 없이는 우리는 죽습니다를 담아요.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는, 그 동행이란 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존재가 동행 한다는 것이 아니고 내 존재를 부정하는 분의 동행.
나의 가치를 무가치로 만드시는 매일 같이 그 작업을 반복해서 유발시키시는 분의 동행이 되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는 지금 생각해도 준비 할 때부터 너무 어렵다, 참 어렵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물질의 정신화로 짧게 이야기 했는데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냈잖아요. 유월절에 양을 왜 잡습니까? 유월절을 지키면, 자기네 나라가 무슨 나라? 복된 나라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유월절을 지킨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 봤습니까? 못 알아 봤지요. 지키기 때문에 못 알아 본겁니다. 매 주일 교회가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만나는 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예배드리고 Q.T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만나는 거에요. 왜? 본인이 가치 있는 일을 계속하기 때문에 그 가치 있는 일을 종사하고 보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느낄 새가 없는 거에요.
목회자들의 가장 문제가 그게 아닙니까? 목회 하면서 무가치함을 “나는 목회 안 해도 돼!”라고 하면 되는데 목회해서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문제가 된거에요. 인기가 높아지니까. 갑자기 자기가 주의 종이 되어 버렸어. 완전 주님의 하청업자가 되어 버렸어. “나는 건드리는 건 주님을 건드리는 거다.” 이렇게,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하나님의 동행은 사무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아니요! NO! NO! NO!. 엘리 가문이 이스라엘과 박혀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게 여호와의 동행이에요. 사무엘이 훌륭한 것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엘리 가문이 멸망할 때 이스라엘 내부에 마땅히 멸망할 요소를 우리가 품고 있어야 그게 성도에요. 그게 신약의 십자가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함을 하루라도 잊지 마세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대전8강 사무엘상2장.hwp (61.0K), Down: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