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 -뽕띠 151214
메를로 -뽕띠 15121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한윤범(IP:14.♡.134.60)
15-12-18 10:20
201512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9-메를로-뽕띠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강의는 메를로-뽕띠(1908~1961), 얼마 살지 못했지요. 53세로 죽었지요. 이 사람의 사상은 한 마디로 해서 몸의 현상학이라고 돼있는데, 우리가 몸은 알잖아요. 현상학이란 게 뭐냐? 어떤 사람이 나는 현상학이라고 주장한다면, 반드시 그 전제가 뭐냐 하면, 기존의 것은 틀렸다는 것을 언급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자기 사상이란 게 의미가 없잖아요. 기존의 사상이 불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불만인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기존의 사상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함에서 오는 불만을 갖고 있어야 돼요.
이 사람이 1908년이니까 20세기 사람인데 그럼 20세기 올 때까지 수많은 사상과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세상에 대해서 이것이 옳다, 이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메를로-뽕띠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고 단정 짓고 자기 사상을 펼치게 되는 겁니다. 메를로-뽕띠 이후도 마찬가지지요. 메를로-뽕띠까지 포함해서 잘못됐다고 사상을 내세우는 겁니다.
이게 유대인들이 성경해석법이에요. 유대인들의 성경해석법은 그냥 산 위에서 기도하고 도 닦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계룡산에서 계시 받았네, 라고 저를 욕하는데 진짜 계룡산에서 계시 받는 식으로 받는 게 아닙니다. 전부 파악해서 다 틀린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제대로 꽉 맞게 거의 합치되지 못하게 설명하지 못하게 어설프게 한다든지 꽉 조이게 하지 않고 듬성듬성 대충 넘어가는 그 틈새를 더 세밀화 시키면 더 꽉 조이니까 현실과 논리가 딱 맞으니까 오히려 한 발자국 진화된 진보된 진리가 되겠지요.
그런 식으로 학문이 늘어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해석은 역사가 흐를 때까지 계속 되다가 메시아가 오게 되면 모든 것은 확연히 드러난다는 게 유대인의 성경해석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어느 학자가 이의를 걸겠습니까? 아무도 걸 사람 없지요. 왜냐하면 그게 개혁주의기 때문에. 개혁주의가 뭐냐 하면, 정답은 없어요. 갈 때까지 가보는 겁니다. 정답은 역사에 맡기는 겁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역사가 진리에요. 아마 다음 되면 우리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진리에 합당하겠지,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되면 개혁주의 해석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대충 믿어 봐. 결국 이렇게 되지요. “목사님, 어떤 걸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그냥 대충 믿어. 나도 몰라. 후대에서 더 옳은 진리가 나온다면 나도 거짓말쟁이 되니까 나도 몰라. 그냥 대충 믿어. 신학교에서 순진한 신학생들이 교수한데 어떤 진리를 묻고 해석을 요구할 때 교수들이 대부분 하는 발언들이 뭡니까? 그건 내 분야가 아니고.
그럼 짓궂은 학생이 묻지요. 그럼 교수님처럼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너는 너대로 믿고 나는 나대로 믿고. 신학에는 믿음 이야기하지 맙시다. 우리는 학자들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이것만 이야기해야지 개인적인 신앙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수가 잘리는 수가 있어요. 우리 교단 사상과 안 맞는다고 하면 자기 밥벌이가 날아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짓궂은 학생이라고 했지만 나이 적은 학생이 아니고 전부 40~50대, 뒤늦게 사업하다 망해서 신앙은 관심 없고 그냥 장난치면서 족구하면서 재미나게 보내는 살만 찌고 졸업하는 사람들의 관심사겠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메를로-뽕띠가 이전에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메를로-뽕띠가 몸의 현상학이라고 했거든요. 현상학은 메를로-뽕띠 이전에 후설이란 사람이 주장했는데 그전의 사상이 뭐가 문제가 되어서 현상학이란 그런 사상을 주장했는가? 거기 나와 있어요. [현상학은 과학의 진리성을 의심하는데서 출발한다.] 과학자들이 들으면 굉장히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과학은 진리의 모든 것을 독점한 분야입니다. 진리를 물으려면 과학한테 물어야 돼요. 달에 토끼가 있느냐, 그런 것을 물을 때, 과학자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달엔 토끼가 없었습니다. 왜? 가보니까 토끼가 살만한 공기가 희박하고 온도차가 있어야 못 삽니다. 끝. 끝난 거죠.
요한계시록에 번개가 치고 우레가 치고 지진이 일어나는데 그 원은 뭡니까, 하나님이 진노입니까? 과학자는 간단히 이야기하죠. 우레와 번개, 이것은 지질현상이고 공기 중에 두 개의 대립되는 전기적 현상입니다. 왜 갑자기 우리나라에 홍수가 나고 또 가뭄이 듭니까? 하나님의 진노입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아닙니다. 엘니뇨현상입니다. 엘니뇨현상이 뭡니까? 엘니뇨현상은 적도부근의 수면이 올라가서 그렇습니다. 왜 올라갔습니까? 무역풍이 적게 불어서 그렇습니다. 왜 무역풍이 적게 붑니까? 지구 자전의 속도가 달라져서 그렇습니다. 왜 달라집니까? 지구 내의 자기장에 변화가 생겨서 그렇습니다. 왜 변화가 생겼습니까? 그건 뭐, 변화가 생기는 걸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가 없는 거예요.
과학에서 언급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전에도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사물이다. 물체에요. 인간이 물체라면, 물체는 주변에 둘러싼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게 물체잖아요. 1655년에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했습니다. 1632년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이야기했어요. 1543년에는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이야기했고.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했는데 발견한 인간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물체로 보는 겁니다. 물리학에선 이걸 질점이라고 해요. 수학에서 점이란 부피와 무게가 없는 거예요. 물질을 보여주는 점이다. 점이라면 인간 고유의 가치, 자존심이라는 건 일시적인 문제고 결국 한 마디로 죽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컵이 깨지면 나는 아깝지만 남이 보면 컵 하나 사면 되니까 별로 아깝지 않지요. 점점 더 과학적 사고가 되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물체가 분해, 해체된 걸로 보면 가슴 아프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는 게 가슴 아프지 않다면 자연적으로 종교라는 현상이, 바람이 불면 향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인간이 아우라처럼 걸치고 있던 종교, 내세문제, 영혼문제도 과학 바람에 다 날아가는 거죠. 갈수록 인간은 종교와 멀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 물체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는 물체로 살면서 재미나게 살면 되는 겁니다. 재미나게 사는 게 뭐냐? 자극적이고 즉흥적인 것. 요새 여러분들이 세대 차이 나는 중2부터 해서 젊은이는 엉망이라고 하는데 말로만 하지 말고 그게 과학기술 발전의 여파입니다. 그렇게 살벌한 과학이라면 우린 그걸 하지 않으면 되잖아,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모르는 이야기에요. 뭐냐 하면, 뉴턴이 발견했잖아요. 사람이 과학을 발명했지만 뉴턴 이전부터 세상은 만유인력으로 돌아갔지요. 그렇다면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가 과학을 발달시켰다고 자부심을 갖는 게 아니고 자연이 인간보다 더 세다. 이걸 소급해서 계속해서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즉흥적인 겁니다. 임시적이고. 재미나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자연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 그렇게 돼요.
자극적이고 모든 게 즉흥적이라면, 자극적인 것은 쾌감을 줘야 되거든요. 쾌감을 주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쾌감 주는 방법은 재미나는 일. 주변에서 재미나는 일을 구입하려면 돈이에요. 돈을 어떤 식으로 버느냐, 이것이 한시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유일한 목표가 되고 만 겁니다.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자연이 그런데, 뭐. 보통 다들 그래요, 하지요. 더 나가면 새고 꽃이고 뭐고 대자연이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누가 나서서 독보적으로 윤리나 도덕을 외칠만한 자격자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강의만 해도 프랑스 수능은 합격해요. 어떤 누구도 진리를 외칠 중심 자리에 선 듯 나설 위인은 없습니다. 왜? 모든 것은 자연주의, 과학주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물질이기 때문에. 물질의 특징은 본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주변에서 흔들리는 대로 이끄는 대로 갈 뿐입니다. 이게 완벽한 진리에요. 그리고 그 완벽한 진리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연의 산물, 다른 말로 과학의 산물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대해서 메를로-뽕띠나 철학자들은 분통을 터뜨리는 겁니다. 왜 자신이 과학의 진리를 발견해놓고 자기가 활용한다고 분명히 인간은 주인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니까 결국 인간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만유인력이 우연적으로 만들어낸 게 바로 인간이에요. 이게 오늘날 천문학의 끝입니다. 지구 말고 다른 외계에 인간과 같은 생물체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만나서 뭐 할 건데? 결론은 이미 나와 버렸어요. 만약에 외계인이 있다. 악수했다. 이야기한다. 나오는 대화는 너나 나나 자연이 만들었지. 그게 결론이에요. 이미 결론을 알고 있어요. 네가 나를 만들었어? 이런 결론은 아니에요.
결국 오늘날 과학은 진리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고 돈을 목표로 기술 발전을 위해서 과학이 시녀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제가 아까 철학자들이나 메를로 뽕띠는 분통을 터뜨린다고 했지요. 분통을 터뜨릴 때 다른 사람은 피식 웃지요. 너도 돈 없이 못 살면서 무슨 분통을 터뜨려. 확고한 과학에 네가 건방지게 대들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분통을 터뜨리면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1페이지 위에 있는 현상학이라는 겁니다. [과학은 이런 인간 주관적 의식과의 상호작용을 무시했다.] 여기서 상호작용을 무시했다고 메를로-뽕띠도 이야기하고 후설도 현상학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현상학은 과학이 문제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뒤에 나오는 사상체계입니다.
현상학에서 과학을 싫어하는 이유는, 결국은 과학적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과학이 낳은 사생아 또는 물체덩어리에 불과하잖아요. 그러면 인간 고유의 가치라는 게 있을 자리가 없어요. 만유인력에 의해서 내가 나왔으니까. 인간에 세포가 있는데 세포가 주변의 중력이 작용하잖아요. 그러니까 중력에 의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세포를 쪼개보면 분자, 원자, 원자는 쿼크로 돼있고. 모든 것은 중력에너지에 의해서 무에서 유로 힉스 장이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거란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나는 이런 내가 되고 싶다는 자기주장은 같은 건 소용없는 짓이 돼요. 나는 이런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은 태어난 중력장에 의해서 그런 주장이 나왔구먼. 이렇게 이야기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 네 주장이라고? 네 주장은 없어. 그래서 과학은 주체가 없어요. 자아는 있어요. 그러나 주체는 없어요. 자아는 몸에서 나온 거고 주변의 환경에서 만들어진 게 주체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잖아요. 커피 타고 예, 예하는 이건 주체에요. 집에 가서 자기 성질 죽인다고 너무 피곤해서 상사 욕하는, 혼자 있을 때 하는 이건 자아고. 모였다하면 갑자기 자아는 쑥 들어가고 주체가 나옵니다. 타인의 요구가 나의 주체는 만들어내는 거예요.
현상학은 그 자아라는 것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몸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물질과 영혼으로 돼있기 때문에 물질이 우선이냐, 영혼이 우선이냐고 따진 거예요. 따지는 방법이 딱 하나였어요. 나는 생각한다. 그것으로 따져보는 겁니다. 따진다는 것은 의심한다는 뜻이고요. 따져보니까 몸이 우선이 아니고 자아가 우선이었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하는 나는 의심되지 않잖아.
그러니까 내가 가장 근원적이다. 내 자아가 근원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현상학은 특히 메를로 뽕띠는 그 자아가 우선이 아니라 몸이 우선이라고 본 거예요. 그럼 자아는 뭐냐? 자아는 몸이 있고 난 뒤에 생긴 게 자아라는 겁니다. 몸이 먼저 있고 자아가 있다는 겁니다.
메를로-뽕띠, 당신은 과학을 싫어했는데 과학은 어떻게 생겼느냐? 과학은 자연에서 왔잖아. 메를로-뽕띠는 그렇게 하지 않고 주관적 의식과의 상호작용에서 했다는 것이 현상학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1페이지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과학은 이로서 진정한 의미나 가치를 놓치고 있다.]고 본 겁니다.
자아와 바깥과 상호작용은 후설의 현상학인 반면에 내 몸과 바깥의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메를로-뽕띠의 현상학, 몸의 현상학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현상학은 현상학인데 기존의 현상학과 달리 몸의 현상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 뒤에 봅시다. [메를로-뽕띠는 이런 현상학하고도 거리를 둔다. 인간의 선험적 주관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현실 문제를 지극히 추상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를로-뽕띠는 데카르트의 경험주의와 후설의 현상학 모두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펼친다.]
다시 강의하면서 여러분의 기억을 위해서 설명해드립니다. 데카르트나 후설의 현상학이나 메를로-뽕띠는 살의 현상학은 과학을 반대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과학을 진리를 다 차지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과학은 진리를 모른다. 오늘 강의가 어려워질까 겁나서 미리 결론부터 합니다. 과학이 진리를 모른다면 과학은 뭐냐? 과학은 환상이다. 자연인데. 자연도 환상이죠. 그러면 자연 속의 인간도 환상이다. 지금 결론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럼 환상 아닌 게 뭔데? 인간의 신체냐? 신체도 환상이다. 환상 아닌 건 살. 신체와 살을 구분했어요. 그래서 신체의 현상학이 아니고 살의 현상학이에요.
어째서 메를로-뽕띠가 대범하고 단호한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오늘 강의 시간에 살펴보는 거예요. 특히 메를로-뽕띠나 어떤 사상을 들을 때는 곱게 순응할 생각하지 말고 반발할 생각으로 들어주셔야 돼요. 그래야 차이가 등장하고 차이가 등장해야 양쪽 다 알아요. 네가 백날 해봐야 이렇게 해서 거짓말이라고 염두에 두고 어떤 강의나 설교나 봐야 돼요. 그래야 자신의 한계가 드러나요. 그걸 평가하려는 본인의 밑천이 적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지요. 그 사람의 주장, 논리를 반발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무식 덩어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 여러분 다 아시죠. 네 꼬라지를 알라하는데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진짜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 없는 사람은 사실 교회 오지도 않고 교회 나와도 잡담하려는 것밖에 안 돼요. 십자가 자체가 날마다 우리의 죄를 들춰내기 때문에 이만하면 나도 안다, 이만하면 됐다는 입장에서는 성경 보거나 복음 들을 자격도 안 되죠. 교회 나올 이유도 없고.
그렇다면 메를로-뽕띠가 기존의 과학이 왜 문제인가? 1페이지 중간에 나옵니다. 두 가지 테스트하는 거예요. 하나는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응시한다. 첫 번째 나는 생각하는 것의 한계가 뭐냐 하면, [경험 자체를 일단 의심(=반성)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를 비판하는데 참된 판단과 거짓된 판단을 누가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판단자가 없다는 거예요. 말 맞지요.
나는 의심한다, 나는 비판한다, 나는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판단은 누가 하는데? 본인이 하잖아요. 본인이 한 건 맞나요? 본인이 했기 때문에 무조건 맞는다는 것은 억지잖아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데카르트가 의심을 통해서 기껏 안 것은 뭐냐? 자아는 완전하다, 자아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그걸 안 게 아니고 메를로-뽕띠 보기에는 세계-내-존재라는 걸 확인할 뿐이다. 세계 안의 존재다. 존재가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세상 안에 들어있다. 전체 안에 부분으로 들어있으면서 감히 건방지게 부분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전체에 대해서 할 말이냐 그겁니다.
동사무소 9급 공무원이 온지 2개월도 안 됐는데 동장님에 대해서 어떻고 이야기한다는 게 됩니까? 그것도 말단 직원인데. 동장끼리 논하는 것은 정책상 상위에 있는 거거든요. 이건 하위직 공무원에게 꼭 알려줄 필요 없는 거예요. 그러면 9급 공무원들은 상위직에서 판단하고 정책 내리는 것의 진의를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나치 게슈타포, 비밀경찰이 시키는 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유대인들을 집어넣는다. 샤워한다고 해놓고 가스로 다 죽였잖아요. 그럴 때 그 행동 책임을 말단 직원에게 물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중에 전범 재판에서 당신은 왜 사람을 죽였습니까, 할 때 그 사람이 할 말이 있지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행동은 누가 시켜서 한 거예요? 사람들은 내가 했다고 하거든요. 내가 했다는 나라는 것에 대해서 메를로-뽕띠가 그걸 거부하는 거예요. 당신이 한 게 아니요. 당신의 몸이 당신이 했다고 우기게 만든 거야.
장발장이 도둑놈이 직업이 아니잖아요. 장발장이 옥에 갇힌 이유가 뭡니까? 배고파서 빵 먹었잖아요. 누가 배고파요? 장발장이 배고픈 게 아니고 사실은 장발장이란 신체가 배고픈 거예요. 그런데 왜 데카르트는 장발장이 배고프다고 이야기했느냐? 장발장이 배고프다면 자아가 자기 신체 하나 정도는 책임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자아가 자기 몸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이건 산상설교에 나오지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죄지요. 그걸 자아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예쁜 여자 보면 안대하고 눈 가리면 간음 안 한 거예요?
메를로-뽕띠는 이야기합니다. 어떤 여자가 지나가는데 간음죄 짓지 않으려고 갑자기 선글라스 쓰고 고개 돌리며 안 보는 척했을 때 지금 행동 보세요. 나는 저 아름다운 여인을 안 보겠다. 그런데 이미 이 문장 속에 다 나오지요. 이건 의식에서 나오잖아요. 메를로-뽕띠 이전에 모든 철학자들은 의식이 자아에서 나온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메를로-뽕띠는 의식이 몸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나는 저 여인이 아름답지만 절대로 내 눈엔 아름답지 않아요. 저건 추한 거야. 이렇게 하면 간음죄 안 짓습니까? 그 여자 근처도 안 갔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었다면 이미 간음죄가 성립되는데 그 간음죄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서 의식은 내게서 나왔기 때문에 내가 부족합니다, 불교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하고 모든 귀를 막는다고 해서 의식이 없어지느냐 이 말입니다.
메를로-뽕띠 이전의 모든 철학은 윤리, 도덕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윤리, 도덕적이 아닌 진리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 도덕과 관련된 것은 인간속의 의식이잖아요. 태도 이런 걸 말합니다. 의식을 어떻게 자아가 잘 정돈해서 죄를 적게 짓고 착한 일 많이 할 수 있는 의식으로 전환하는 이것이 바로 철학과 윤리와 도덕, 과학이 하지 못하는 다른 분야에서 해야 될 일이라고 그런 중차대한 사명감을 지고 외쳤단 말이죠.
그런데 메를로-뽕띠에서 끝나버려요. 의식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의식도 몸에서 나온 건데. 따라서 의식이 자아에서 관리 안 된다면 그전의 사상가들이 메를로-뽕띠에 대해서 뭐라고 비판하겠습니까? 윤리, 도덕 마지막 바탕까지 완전히 다 날아가 버린 셈이 되지요. 쉽게 말해서 누가 윤리, 도덕을 외치면 너나 잘하세요, 하는 것과 똑같다 이 말이죠. 너는 깨끗하냐 이 말이에요.
오늘 아침에 우리교회에 질문했는데, 질문하신 분이, 목사님의 신학은 완전한 신학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 던졌어요. 제가 답변하기를 완전한 신학을 기대하는 그것이 악마의 심성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분은 따로 있는데 내가 왜 완전해야 되지요. 이 세상일은 누가 합니까? 내가 합니까, 주님이 하십니까? 주님이 완전하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굳이 내가 완전한 신학을 따로 끄집어낸다는 그 의도가 바로 나도 신이라는 악마적 심정 아닙니까.
메를로-뽕띠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데카르트가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윤리, 도덕을 염두에 두고 자아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 자아를 좋은 자아로 괜찮은 자아로 쉽게 말해서 사람다운 사람, 인간다운 인간, 남한테 해를 끼치지 않는 훌륭한 사람, 이게 과학이 범접할 수 없는 생물학, 물리학, 화학, 그것만 진리가 아니고 또 다른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철학과 윤리, 도덕이 전공분야로 해야 된다는 철학적 존재, 가치, 거기에 신학도 포함되겠지요. 교회는 필요하다. 왜?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근거는 자아의식에 있단 말이죠. 그걸 무너뜨리는 거예요.
두 번째 시험이 나는 응시한다. 나는 내 눈을 통해서 책상을 응시한다. 여기 보면, 환지통 환자가 나옵니다. [환지통(幻脂痛)이란, 이미 사지가 잘려서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두뇌에서는 계속 아픔을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착각이죠. 아이고, 오른팔이 아프네. 오른팔 없는 사람이 오른팔이 아프데요.
[이것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인간의 세계관은 본인의 절대적 의식만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세계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는 ‘세계내존재’라는 점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즉 이미 있는 세계로부터 도리어 찌그러뜨림을 당하는 처지에 놓여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계속해서 영향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미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있던 세계를 유지하다보니까 그걸 지속하는 버릇 때문에 환상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해서 주장한다는 것은 새로운 내 살과 바깥의 자연과 상호작용에 의해서 늘 수정돼야 되는데 수정이 더딘 거예요. 그럼 계속 아픈 거예요. 없는 데요. 옛날 있을 때처럼 버릇을 갖고 하는 겁니다. 이 버릇은 인간의 의식에서 나오거든요. 실제는 잘렸는데 의식은 옛날 버릇이 남아서 오래 가는 거예요. 선입감 같은 거죠.
그래서 뭐냐? 중요한 이야기에요. 메를로-뽕띠는 대전제에서 [명증적으로 느끼는 자기의식은 늘 거짓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모든 언어는 거짓이에요. 그러면 성경의 헬라어, 히브리어는 뭡니까? 거짓이에요. 원어는 거짓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거짓된 언어로 계시를 이야기해요. 인간은 그걸 해석하면서 거짓된 의식으로 거짓된 방법으로 원어를 거짓되게 해석하면서 그걸 주님의 계시라고 일방적인 처단을 내리고 단언해버리죠.
그러한 절차, 논리를 끄집어내는 것은 메를로-뽕띠의 살의 현상학에서만 비로소 가능해요. 그럼 기존의 신학은 왜 안 되는가? 기존의 신학은 명증적인 것이 따로 있어요. 나는 존재한다, 내가 판단하는 것은 무조건 옳은 거야, 라는 것을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원어를 분석하고 철저하게 역사적인 모든 해석을 검토한 결론이 뭐냐? 그래서 이게 진리라고 주장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메를로-뽕띠는 한 마디로 그게 거짓이다. 환지통 환자다.
자연이 벌써 바뀌었는데 5초 후가 바뀌었는데 우리는 5초 전의 사상을 쥐고 있으면서 진리를 판정하는 판정자의 입장에 서있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메를로-뽕띠의 주장이라면 참신하고 옳은 주장인데 왜 그 사람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은 옳고 그르고 없어요. 돈밖에 몰라요. 내가 바른 판단하느냐는 것도 없어요. 그저 세계-내-존재로 공동체죠. 자기들끼리 누가 잘났나, 누가 더 위대하느냐, 욕망의 싸움질하기 바빠서 이런 것에 관심 없다니까.
오죽했으면 책을 읽으세요. 인문학 강좌가 왜 나왔겠습니까? 책 안 봤다는 거거든. 책을 안 볼 때는 그들은 뭘 한 거예요? 돈 버는 일을 한 거예요. 그들이 교회 오는 겁니다. 메를로-뽕띠는 거짓이란 걸 알았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거짓이란 것도 몰라요. 본인이 어느 정도 거짓인 줄 몰라요.
2페이지 넘어갑니다. 첫 번째 줄에. [궁극적인 환원을 향하여 늘 시도하게 되지만 그것이 늘 실패로 끝난다.] 세 번째 줄에. [이러한 실패성은 매개가 되는 언어로 표현되기에 언어가 품고 있는 본래의 의미 찾음도 덩달아 늘 실패한다.]
그러면 언어가 실패하게 되면 언어가 완벽하지 않지. 이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언어가 내가 사용하기 이전에 남들이 먼저 사용해요. 그 언어로 나한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사용한 언어의 의미에 합치되도록 정신적으로 강제하게 되고 지배하게 되고 통제하게 돼요.
너는 이런 인간 돼야 돼. 이런 인간 안 되면 호적에서 뺄 거야, 라고 아빠, 엄마가 이야기한다면 그건 언어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네가 이런 정도로 공부 못할 줄 몰랐다. 이렇게 공부하려면 나가 죽어라. 우리 집안사람 아니다. 이렇게 언어로 이야기할 때 합치될 의미를 알아야 되잖아요. 부모가 사용한 의미가 분명치 않아요. 도대체 얼마나 공부를 잘해야 부모 마음을 기쁘게 할지 자식들이 몰라요. 엄마, 아빠도 엉터리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언어를 남발하고 있으니까.
그 다음에 2페이지 위에서 일곱 번째 줄에. [메를로-뽕띠는 공격하고 있다. 과학적 진리를 비롯해서 모든 인간 사회에서 진리로 등장되는 것들의 명증성은 어떤 식으로도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증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에 대해서 증명되지 않는다는 말이지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에요. 과학이 불필요한 건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밤 까는 기계를 만들기 전에는 손으로 일일이 깠는데 기계를 만들고 난 뒤에 밤을 쉽게 깠다.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게 왜 불필요해요. 하지만 밤 까는 기계가 진리는 아니란 말이죠. 그런 다른 사람이 진리가 뭔데? 밤 까는 기계는 뭘 요구하느냐 하면, 밤 까는 기계가 편리하잖아요. 네가 편리하다고 느낀다면 너도 편리함에 맞춘 인간이 되기 위해서 밤 까는 기계를 살 수 있는 돈을 모으는 기계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골프를 거의 안 쳐봤습니다만 골프 치는 게 재미있지요. 그리고 골프 치면서 만나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그 모임에 들면 자기 신분이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에 마음에 흡족하고 만족하고 쾌감을 느끼잖아요. 그걸 목표로 잡으면 골프 치기 위한 돈을 모아야 되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그걸 목표로 한다면 돈을 생산하는 기계가 되는데 돈 버는 기계가 진리냐고 묻는 거예요. 메를로-뽕띠가 우리한테.
골프가 재미없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밤 까는 기계가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점점 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조차도 하지 않는데 휘말리고 있다는 겁니다. 메를로-뽕띠가 안타까운 게. 나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합당한 인간이냐는 질문 자체가 차단되는,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고 요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걸 물을 필요도 없는 거고.
여기에 대해서 과학자 말고 철학자들은 굉장히 반격을 하죠. 그 반격 중에 프로이트가 등장합니다. 어떤 인간에겐 장애가 있는데 그 장애를 억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흔히 친한 친구 죽음에 너무 슬픈 나머지 친구가 죽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 그처럼 모든 인간 속에는 진짜 인간으로 태어나서 진리로 살아야 되는데 그놈의 돈이 뭔지 돈 때문에 진짜 내가 인간 되는 것을 누르면서 그동안 살아왔단 말이죠. 그런데 누른다고 눌려지는 게 아니고 그게 꿈에 나타나고 평소에 무심코 행동 가운데 나타나다보니까 이게 누적이 되다보니까 정신병이 생겼다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정신병이 많은 게 아니에요. 전부 다 정신병자에요. 처음에는 아니겠지. 그러나 벌써 세 살 때부터 정신병자 되는 거죠. 추성훈이 딸 추사랑 나올 때부터 아이는 정신병 든 거예요. 아빠 저것 사줘. 본인은 추성훈이 아니고 그만큼 돈 있는 것도 아니고 아내는 일본의 제일 모델도 아니에요. 그런데 추사랑이 그런데 놀러가니까 아빠 나도 저런데 놀러가. 놀러가는데 그냥 갑니까? 돈이 있어야 가지. 그럼 아이가 억압되겠지요. 왜 우리는 내가 원하는 걸 못 살까? 그래 우리 집안은 가난해서 못 사. 그럼 걔가 그걸 전부 포기해요? 이미 봐버렸는데. 그걸 누르죠. 누른다고. 나도 언젠가 돈 벌어서 사랑이 엄마처럼 하겠어. 누르잖아요.
이 정신병자를 고칠 수 없어요. 정신과 의사가 정신병자거든요. 이렇습니다. 돈이 목적이 된다면 정신병자에요. 이건 본래 인간과 달라요. 왜냐하면 본래 인간은 메를로-뽕띠나 여러 철학자에 의하면 몰라요. 자본주의가 왜 나쁘냐 하면, 인간이 누구냐를 알려줘서 나쁜 것도 아니고 인간이 몰라서 나쁜 게 아니고 모르니까 에이씨(이게 중요해. 중간 매개로), 돈이나 벌자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알아서 안 알려준 그게 나쁜 게 아니고 모르면서 돈이 전부라고 그게 진리를 대용하는 식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그게 나쁜 거예요.
해답이 없으면 천부여 의지 없으면 손들고 오면 되는데 해답 몰라도 안 와요. 뭐만 있으면 돼요? 돈이 곧 행복이에요. 전에는 행복을 필요한 걸 얻기 위한 지폐였는데 이제는 돈 자체를 모으는 거예요. 옛날에는 상품이 좋았어요. 지금은 상품을 살 수 있는 돈이 더 좋아요. 우리 정신이 그렇게 개조되었어요. 자본주의 때문에.
그래서 자본주의의 폐해가 열 가지 있는데 다 설명할 건 없고, 욕망을 돈 주고 산다는 게 가장 나쁜 점이에요. 욕망을 풀어야 되는데 풀지 않아요. 욕망을 계속 누적시켜요. 욕망을 돈으로 사는 것, 그걸 광고라고. 광고는 계속해서 욕망을 생산합니다. 우리 학원에 오시면 한 달 만에 수학 20점 늘어납니다. 그걸 보고 에이, 거짓말이라고 하면서도 잊지를 못해. 그저 구라. 구라의 대결이에요.
2페이지 밑에 봅시다. [신체는 더 이상 의식의 작용을 받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거짓이었을망정 그런 의식을 이끌어내는 능동적인 계기로 역할하고 있다.]
메를로-뽕띠, 당신은 진리를 아느냐? 신체가 날마다 거짓을 유발하면서 그걸 능동적 계기로 그러니까 거짓을 이야기하면서도 역시 잘하고 있어. 오늘도 거짓말했어요? 잘했어요. 자기 자신의 신체의 거짓적 행동을 두둔하고 옹호해주는 그러한 자아가 신체에서 계속 뿜어져 나온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5-12-18 10:22
201512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9-메를로-뽕띠
(강의:이근호 목사)
‘명증적’이라는 건 확실한 것, 말할 필요 없이 딱 보면 느껴지는 것.
우리가 두 번째 시간에 해야 될 일 뭐냐 하면,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거예요. 신체에서 바깥의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건 맞아요. 그런데 그 결과가 살이에요. 우리 신체와 자연과 상호작용해서 매번 달라지고 변동되는 그 결과물을 메를로-뽕띠는 살로 본 겁니다.
-이 살이 아니네요?
이 살 맞아요. 지금 좋은 질문했는데 이 살이 아니라 했잖아요. 그게 기존의 과학적 인식, 자아에서 나오는 살을 신체로 보는 겁니다. 살은 자아가 성립될 때 이게 살이네, 신체네 하지 살 안에서는 주체라는 게 없어요. 살이 그냥 살을 계속해서 변화시키는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주체를 없애보자는 거예요. 내 신체가 한 게 아니고 내 자아가 한 게 아니고 이 살이 한 거예요. 살은 누구 작품이냐? 대자연의 작품이 되죠.
여기 3페이지 봅시다.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위에서 아홉 번째 줄에. [신체적 응시를 실행하고 있는 우리에게 진짜로 존재하는 공간은 오히려 착시로 여겨지는 신체적 공간이어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물 컵을 보는 순간에 이걸 봄으로 말미암아 살이 아닙니다. 내 신체입니다. 신체가 평소에 갖고 있던 공간감이 새롭게 확인이 돼요. 이 물병은 책상 위에 있다고 판정내리는 것은 지나간 한 물 간 그동안 내 신체가 갖고 있던 공간감에서 나오는 일방적 주장이 됩니다. 컵이 옆에 있네. 이것도 일방적 주장이 돼요.
그런데 살은 뭐냐 하면, 컵 있고 이거 있고, 그래서 나중에 결과물로 확인되는 그게 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체에 있을 때는 내가 이걸 보는 주인이 되잖아요. 내가 본다가 되는데 살은 뭐냐? 너희들 때문에 생겨버린 게 살이 되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이게 관계에요.
아빠, 엄마는 왜 차 안 사줘? 대학교 들어갔다고 차 사달라고 땡깡 부릴 때 이건 철이 없지요. 그럼 철이 있는 건 뭡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대학 들어간 것도 아빠, 엄마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하면, 누구나 철났다고 하잖아요. 왜 갑자기 아빠, 엄마 덕분에 내가 이렇게 됐다는 것은 철이 난 거고, 차 사달라는 것은 왜 철이 없는 겁니까? 그걸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해봅시다. 어떻게 한쪽은 철딱서니 없는 거고 또 한쪽은 정말 철이 있는 착한 짓이 되는 겁니까?
주체가 바뀌었지요. 착한 아이는 주체를 누구를 봅니까? 아빠, 엄마 덕분에 내가 있다고 보지요. 그럼 네 주체는? 없어도 되지요. 적어봅시다. 복음적으로 너무 중요한데. 나는 없어도 괜찮다고 살아가란 말이죠. 이만한 윤리, 도덕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불교 승려가 도 닦는 이유가 이것 하려고 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나를 없앨까? 나만 있으면 모든 세상을 내 잘남으로 보잖아요. 내 중심으로 보지요. 그게 죄를 일으키고 악을 일으키니까.
특히 불교에서는 내가 있음으로 욕심이 생겨요. 욕심은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미흡이 생기고 미흡함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 받고 고통 받아요. 그래서 고통을 면제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살아볼까? 고통 없이 사는 방법은 나를 없애면 돼요. 그런데 불교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고통 없이 살아보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이게 문제에요. 바보 같이 고통 주면 감사하다고 받으면 되는데 다른 건 줘도 괜찮은데 고통은 싫데. 누가 싫은데? 내가 싫데. 그러니까 네가 아직도 살아 있잖아.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았지요. 아프지요. 안 아프면 기계고. 스데반 집사는 아프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주여,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나오지요. 이걸 한 마디로 말해서 스데반 집사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관계성 안에 있지요. 돌 던지는 일에 발생되는 그 주인공은 본인이 아니고 다른 분에 의해서 야기된 상황입니다. 그 관계성 안에 놓여있음을 스데반 집사는 그대로 수용하는 거예요. 이걸 메를로-뽕띠 식으로 하면 신체가 아니고 살이 되는 겁니다. 나는 신체가 있다. 신체에서 의식이 나왔다. 내 신체에서 세상을 이렇게 본다. 내 신체를 우선하는 것도 문제 있다는 겁니다. 신체마저 포기하고 신체를 살로 바꾸는 방법은 상호작용,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3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봅시다. [추상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 생리학자들은 신체와 별도로 그것의 선행적인 상위의 능력으로서 의식의 범주를 설정해왔다.] 생리학자들이 신체를 어떻게 자극을 주니까 정신이 나오고 그 정신에서 의식이 나온다고 본 겁니다.
여러분들이 음악치료, 미술치료 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정신치료를 위해서는 상관관계 없는 음악, 미술 같은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 겁니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에 보면 나오잖아요. 책장이 책을 두드리는 게 있지요. 다른 차원에서 이쪽 차원을 향하여. 그걸 물리학으로 설명할 때는 의식으로 설명해요. 이 우주는 파동으로 돼있습니다. 파동을 신체적으로 표현하게 되면 의식이 돼요. 그래서 무생물과도 얼마든지 사람이 소통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장미를 키울 때 팝음악이나 락음악보다 모차르트 음악을 틀어놓으면 실제로 결과적으로 과실이 여물고 단단하고 맛있고, 팝음악 틀어놓으면 아주 맛없고 짜증나고. 짜증난다는 것은 모든 대자연도 같이 짜증나는데 그걸 더 분석해보면, 그 안에서 원자, 분자로 돼있고 원자, 분자 안에는 파동으로 돼있고 그게 바로 에너지의 덩어리에요. 이걸 들뢰즈의 철학에서는 반복이 스톱될 때 하나의 물질이 되는 거예요. 에너지의 반복이 잠시 스톱되면 물질로 전환되는 거예요. 과학자들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고 철학자들은 그걸 이용해서 설명하고.
그러니까 에너지의 흐름을 다른 말로 의식이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걸 메를로-뽕띠는 반대하거든요. 그게 바로 생리학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걸 의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그걸 추상적 정신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유가 사실은 이미 사유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사유층, 신체층 따로 있다고 두 개를 분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본 거예요. 신체에서 사유가 나온다, 신체에서 의식이 나온다, 신체에서 자아가 나온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그전에 두 개를 나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동안 생리학자나 과학자들은 이 둘을 하나로 바꿀 수 있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데카르트를 물질과 영혼, 이분론이라고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욕을 하는 본인은 어떤 대안이 없는 거예요. 욕을 하면서도 본인도 추상적인 실제적인 것, 구체적 운동과 추상적 운동으로 나눴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성경해석과 어떻게 연관되느냐고 물으면, 전부 다 연관되지요. 성경에서 무시로 기도하라 할 때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라는 명령이니까 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지금 기도합니다, 라는 의식을 하지요. 그러면 메를로-뽕띠에서는 이미 틀렸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아에서 나온 기도이기에 잘못된 건데 그 자아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과거의 신체에서 관행적으로 관습적으로 알고 있던 시공간에서 나온 기도가 되는 겁니다. 아까 시공간 이야기를 제가 중간에 뺐어요. 그걸 설명하게 되면 너무 어려운데. 3페이지 밑에서부터 나오거든요. 뺄까 생각했는데 갑자기 못 빼겠네요. 그냥 제가 읽어보고 설명하겠습니다.
[“추상적 운동은 구체적인 운동이 전개되는 가득 찬 세계의 내부에 반성과 주체성의 영역을 움푹 들어가게 하고 잠재적이거나 인간적인 공간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대체해놓고 만다.” 그러나 물리학이 근거되어 있는 신체의 운동 이전에 객관적으로 실제하는 공간 개념은 현상학적 반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비반성적인 것이다. 환원에 의하면 이러한 공간은 신체로부터 파생된 원근법적 공간이 ‘자유변경’(반성)됨으로써 무한한 응시의 총합으로 구성된 잠재적 공간으로 판명될 것이다.]
도대체 이 문장이 무슨 말을 합니까? 이런 겁니다. 이미 인간이 시공간을 벌써 과거부터 갖고 있었어요. 추상적 운동과 구체적 운동을 분리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걸 반성하자는 거예요. 그걸 현상학적 반성이라고 합니다. 반성은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나오기 이전, 근원적으로 되돌아가자. 그걸 환원해보자는 겁니다. 환원했을 때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신체가 그 다음에 반성한 결과다. 다시 자기를 돌아보는 반성한 결과일 뿐이란 말이죠.
그런데 반성이 이뤄지는 것이 신체가 반성하는 게 아니고 신체가 낳은 추상적 정신적 공간을 주고받고 하면서 나온 게 반성이란 겁니다. 그러니까 반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가 된 게 아니고 늘 둘이 되면서 반성 제대로 했어, 못했어? 늘 이런 식으로 반성한다는 겁니다.
4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봅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우리는 신체와 별도로, 자유변경하고 구성을 행하는 주체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신체는 이런 구성을 행하는 주체가 아니라 구성된 공간에서 운동하는 수동적 주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신체 이전에 주체라는 영역을 따로 산성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메를로-뽕띠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말 맞잖아. 네가 자꾸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네가 지금 옳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 신체 말고 주체 있잖아, 라고 한다면, 메를로-뽕띠가 반발하기를 그 다음에 심맹환자의 경우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또 환자가 나와요. 아까는 환지통 여기는 심맹환자.
심맹환자가 뭐냐 하면, 의식도 없으면서 흉내는 낼 때 정신없이 행동하는 것. 어떻게 그런 행동할 수 있느냐? 그건 정신이 있는 게 아니고 신체 자체적으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신체 따로 있고 정신 따로 있다고 주장하느냐고 메를로-뽕띠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4페이지 밑에 봅시다. [병이란 어떤 특질이나 본질의 결여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기-조절 체계이다.]
당신은 병들었어, 라는 말이 잘못됐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병든 게 아니고 병이 당신으로부터 독립한 거죠. 내가 암 걸린 게 아니고. 내가 암 걸렸다하면 암이 기분 나빠요. 병이란 말을 빼자는 거예요. 각자 내 안에 독립적인 암이라는 자기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암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암의 입장에서는 암이 살려고 내 몸을 이용한 건데 자꾸 암 걸렸다고 나쁘다고 보는데 그러지 말자는 거예요. 병에 안 걸려야 정상이라는 생각은 네 주체가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병들면 내 속에 암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받아들이면 그만이잖아. 왜 그걸 나쁜 것으로 보고 왜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느냐? 그건 평소에 네 신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병에 안 걸려야 된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 이렇게 메를로-뽕띠는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참 살기 편하죠.
5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우리가 신체를 매개로 세계에 물음을 묻고 다시 사물들이 신체에 응답하는 방식이 어떤 공통성을 획득할 때, 이른바 그것은 습관적 행동이 된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메를로-뽕띠가 예를 드는 행동이 자동차를 몰고 피아노를 연주인데 이게 의식에서 하는 행동입니까? 아니면 무의식의 행동이에요? 무의식이죠. 그런데 왜 의식을 이야기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렇게 설명해요. 내가 자동차를 몰 때 처음에는 자동차로 나로 나 따로 에요.
그런데 나중에 한 5년 후에는 진짜 한 손으로 후진해요. 그리고 앞 범퍼 부딪힘이 내 신체와 연장된 신체의 부딪힘이라 피할 수 있는 거예요. 처음 운전할 땐 그것 힘듭니다. 내 몸 따로 차 신체 따로 있기 때문에 나한테 안 닿으면 차에 닿는지 어떤지 분명하지 않은데 이제는 운전을 많이 하다보면 내게 접촉되는 것처럼 대번 느끼게 되지요. 이미 한 통속이 됐기 때문에. 그게 자전거 타기, 악기 다루기에요. 오르간 연주할 때 그 순간만큼은 신체가 연장되는 거예요. 이걸 신체로 보자. 나중에 신체가 살이 돼요.
부모가 자식에게 욕하면 부모가 못 참지요. 왜? 자식 신체 따로 있고, 부모 신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부모는 영원히 자기 신체의 연장이에요. 정확하게 말해서 딸이 어디서 뭐하든지 아들이 무엇을 하든지 내 살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자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유산이나 많이 남겨주는 그것만 기대하고 있지 딴 거 생각 한 하거든요.
그 다음에 6페이지 봅시다. 중간에 읽고 물어볼게요. [만약에 창 밖에 모자와 외투를 입고 가는 타인을 응시한다고 치자. 내가 나의 시선을 내부로 향하는 신체도식을 통해서 인칭적 의식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더라도 다시 내가 눈을 돌려 창 밖에 있는 저 모자와 외투를 입은 물체를 응시할 때는 이러한 신체도식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 대신에 나의 고유의 신체는 응시를 통해서 저기에 있는 모자와 외투와 ‘함께 조직되어’ 새로운 체계를 형성시키게 된다.]
자,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내가 창밖을 우연히 보고 있는 어떤 신사가 모자와 외투를 입고 가는 걸 봤습니다. 그 다음에 아들이 “아빠, 뭘 보고 있었어?” “어떤 신사가 모자 쓰고 외투입고 가는 걸 봤어.”라고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내 인생 역사에 있어서 그 신사를 봤다고 할까요, 안 봤다고 할까요? 이게 질문입니다.
봤지요. 분명히 봤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지나간 일이 아니고 이미 내 신체의 일부로 편입이 된 거예요. 이게 오년 지나면 모르지요. 그럼 의식은 기억나지 않잖아요. 이미 내 신체가 되었지요. 내가 언제 봤는데. 그런 사람 본 적 없어, 라고 했는데 그 순간 우연히 창밖을 봤는데 그 신사가 지나갔을 때 뭘 느낍니까? 기시감. 어디서 봤는데, 이게 기시감이에요. 분명히 내가 돈 빌려준 것 같은데. 이런 기시감 같으면 곤란하겠지요. 어디서 봤는데?
메를로-뽕띠는 말합니다. 자아, 기억 믿지 말라는 거예요. 기억은 잊어버리기 때문에. 신체 흐름과 의식의 흐름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사상은 윤리, 도덕은 신체에 근거한 게 아니고 현재 장악하고 있는 의식에 근거해서 나는 착해야 돼. 저런 짓을 하면 안 돼. 나는 이렇게 하니까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 식으로 윤리, 도덕으로 남한테 나선 것이 그동안 인간들의 철학이었다 이 말입니다.
6페이지 대충 밑에서 열 번째 줄에 보면, 방금 이야기한 것보다 더 나갑니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엄밀히 말해서 나는 타자와의 어떤 공통적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타자의 세계에 대한 타자의 위치와 나의 세계에 대한 나의 위치는 양자택일을 구성한다.]
이게 의식의 세계에서는 의식은 인간의 신체에서 나왔기 때문에 공통점이 없어요. 나는 당신 말에 동의한다는 공통적 세계를 형성했다는 것은, 그 사람 세계의 공통점이 아니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 내가 새롭게 구성된 내 신체에서 새롭게 그 순간에 형성된 나의 세계일뿐인 겁니다.
따라서 메를로-뽕띠는 6페이지부터 구조주의를 언급하지요. 구조주의가 7페이지에 나옵니다. [구조주의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과부하 된 주체 개념, 절대화된 주체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자기 동일적인 실체로 있지 않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단 법이 없으며 순간순간 나를 다른 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구조주의에 의해서 보게 되면 인간의 주체는 없지요. 데카르트는 절대 주체를 찾고자 했고 후설은 그것을 끝없는 반성을 통해서 찾고자 했지만 구조주의에 들어가면 아예 주체란 게 없습니다. 그래서 메를로-뽕띠는 구조주의에 동의하고 있어요. 그 이유가, [현상학자들에게 내 바깥에 있다고 믿는 세계는 사실상 그 보다 상위의 ‘나’를 통해서 가능한 세계, 즉 상위의 ‘나’의 안에 있는 세계에 불과하다. 이 ‘바깥’은 진짜 바깥이 아니며 나의 존재 위계를 통해서 안과 밖의 변증법적 운동에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일방적으로 정한 안과 밖 또는 아래 위, 그렇게 정해놓고 나는 그 속에 어디에 포함됐지, 라고 하는 그 생각조차도 내가 만든 세상이기 때문에 그 현상학적 반성된 주체도 잘못됐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구조주의 주체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메를로 뽕띠는 다 받아들이지는 않아요. 구조주의를 반대합니다. 구조주의는 신체에서 이야기하는 주체는 없다고 한 건 맞는데 살에서 나오는 주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체에서 살로 전환은 어떻게 되는가? 그게 키아즘으로 설명돼있는데 어려우니까 넘어갑시다.
7페이지 마지막부터 8페이지 초반을 봅시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나의 시선이 타자의 시선과 마주할 때를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타자를 보았을 때, 타자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면 내가 보는 것은 나를 보는 타자의 시선이다. 즉 타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타자를 보는 동시에 타자의 시선이 닿는 내 자신을 간접으로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신체의 보는 힘의 또 다른 면이’다.]
제가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고 있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시선 속에서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을 그 사람 속에서 뽑아내서 내가 보게 된다. 그러면 차이가 나요. 내가 그 사람을 보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보는 것 속에 내가 그 사람 보는 것과 서로 다르게 돼요. 이걸 니체는 힘이라고 한 거예요(8페이지 중간에). 그런데 그 힘을 니체는 놀랍게도 죄로 본 겁니다. 이게 시선의 마주침이거든요.
아이가 서랍에서 돈을 꺼내는 순간 그 자리에는 서랍과 아이밖에 없지요. 그런데 서랍은 타자가 아니기 때문에 시선이 없잖아요. 돈을 꺼내도 자기는 일방적으로 서랍을 이용할 뿐이죠. 그 순간 문을 열고 “너, 지금 뭐 하는데?” 하고 엄마가 들어왔으면, 그 아이가 보는 서랍과 엄마가 서랍을 보면서 그 안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달라요. 니체는 거기서 힘을 느끼는데 타인의 힘에서 죄의식이 발생되는 겁니다. 니체가 말하기를.
“엄마, 잘못했어요.” 혼자서 서랍을 열 때 잘못했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물론 과거 엄마 기억은 하겠지요. 하지만 몰래 하면 죄가 안 되는데 현장에 엄마가 와서 “너, 뭐하는데?” 하는 순간 추상적 죄가 현실적 죄로 달라졌잖아요. 현대자본주의에서는 타인의 시선에 안 들키면 돼요. 들키면 뭐라고 합니까? 에이, 재수 되게 없다고 하지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행동할 때 누구 지시받습니까? 내 지시 받지요. 그러면 서랍을 연다, 돈을 꺼낸다. 누가 지시한 거예요? 내 자아가 나한테 지시했잖아요. 그러면 그대로 행동하면 되잖아요. 엄마가 들어오든 아빠가 들어오든 행동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엄마, 잘못했어요, 이게 왜 나와요? 이 세상은 힘과 힘의 충돌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내가 만드는 내 힘만 있는 게 아니고 타자가 만드는 힘이 있지요. 있는 것만 아니고 평소에 엄마한테 들켰으면 빌라고 그동안 나를 그런 존재로 만들어왔어요.
아이가 엄마한테 잘못했을 때 중력을 이기고 두 손바닥을 열이 나도록 비빈다. 이게 어느 물리학 책에 나옵니까? 엄마, 내가 두 손바닥을 비비면 여기서 열난다. 내가 물리시간에 배웠어. 이것 이야기하려고 딸이 지금 비비고 있는 겁니까? 실습한다고. 아니죠. 나오는 답변은 뭡니까? 엄마, 잘못했다고 빌지요.
그걸 계속 활용해봅시다. 교회 가는데 11시 예밴데 늦었어요. 갑자기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니체는 이걸 스스로 내리는 벌칙으로 보는 거예요. 여자들이 뭔가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때 특히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립스틱 짙게 바르죠. 본인이 본인에게 내리는 벌인데 사실은 원인제공은 헤어진 남자 쪽에서 제공했지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전부 다 죄를 의식해서 나오는 행동이다. 니체의 이야기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이제는 그런 짓 그만하고 네가 스스로 신이 되어라. 그걸 초인이라 해요. 어떤 도덕에도 굴하지 말고 도덕은 네가 만들면 된다. 네가 만든 도덕으로 네가 살아라. 타인의 도덕에 의존하지 마라. 그래서 니체는 아주 기독교를 싫어한 거예요. 특히 산상설교를 아주 싫어한 겁니다. 예수님은 좋아하면서 산상설교는 싫어했어요. 희한해요. 왜 예수님을 좋아했느냐 하면, 자유자거든요. 예수님이 인간의 모델이지 지시받는 사람이 아니고 인간의 모델이에요.
예수님을 모델로 봤고 지시받는 쪽으로 본 사람이 가룟 유다잖아요. 예수님을 이용 대상,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어 했지 사실은 주님한테 굴복하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가룟 유다를 현대인들의 모델로 보는 겁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의 모델이 가룟 유다지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이지 복종할 생각을 안 해요. 그걸 니체가 이야기하고 메를로-뽕띠가 이야기해주니까 이란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워요. 내가 모르는 나의 진솔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8페이지 밑에 봅시다. [모든 표현은 진리를 고정시키고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단지 진리를 자유롭게 살게 만드는 일인데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려 하는 순간 진리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참 중요한 이야기지요. 그냥 살면 되는데 하나님이여, 잘 살고 있어요, 라고 묻는 순간 잘 삶이 날아간다는 거예요.
9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입니까? [여기서 그는 신체corp 대신 살chair(혹은 몸)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그가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철학의 환경을 교체했다는 가장 직접적인 암시가 된다. 살은 기계론적인 실체로 생각될 수 없도록 만드는 묘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메를로-뽕띠는 자기 사상을 결국 묘하다.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건데 이것은 언어가 묘한 것이 아니고 살덩어리로서의 내가 묘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 묘하냐? [이를테면, 물, 불, 흙, 바람이 그러하듯이 살은 유형적으로 존재하되, 어떤 결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단히 움직이는 것, 다른 것으로 합해지고 분리되는 어떤 익명적 생명을 상징한다.]
신체는 스스로 신체를 고집하려하고 사수하려는 반면에 살은 신체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음에 든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교류가 되는 거죠. 1996년도인가 mbc에서 <애인>이란 드라마를 했어요. 황신혜와 유동근이 나오는 드라마인데 그게 사회적으로 큰 쇼크를 줬어요. 둘 이 유부녀, 유부남이었어요. 과연 사회적으로 수긍할 갈만한 사랑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그 드라마는 있다고 한 겁니다. 그게 충격이에요.
그 충격을 주면서 도움을 줬던 음악이 I.O.U(I owe you)에요. 그 음악만 나오면 드라마 보던 아줌마들 뿅 갔어요. 유부녀, 유부남인데 너무 아름다워. 아름다움이 가정을 이기는 거예요. 그것이 영향을 줘서 아마 간통죄 폐지 운동이 그때부터 시작된 거예요. 인간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법이 족쇄를 채울 수 없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메를로-뽕띠를 생각하면 딱입니다.
유부남, 유부녀는 언어거든요. 법은 언어로 만들어졌잖아요. 법은 타인의 시선이죠. 그 앞에서 우리는 손바닥 비비면서 잘못했다고 빌잖아요. 빈다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고 의식화된 거예요. 습관화된 행동이라고요.
예를 들어서 유동근이 황신혜 보고 잘못했다는 소리는 안 한 것 같은데 잘못했다고 치고 헤어졌습니다. 그러면 유동근(가만있는 유동근 욕 얻어먹어서 미안합니다^^)이 오년 뒤에 황신혜보다 더 예쁜 사람 나타났다. 김현주 같은. 항상 젊은 것은 더 예뻐요. 또 마음이 확 당겨서 유부녀는 아니지만 하여튼 했다. 그럼 잘못했다고 비는 것, 아무 소용없어요. 그런데 누가 그 마음을 혹하게 했습니까? 내 신체가 아니고 내 살이. 왜? 나는 신체로 있어요. 신체에서 살이 빠져나오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내가 내 마음대로 못하는 새로운 상황과 사태가 내 앞에 들이닥쳤을 때 유령처럼 내 신체에서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