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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1203 혜화동특강e-언약의 흐름자유게시판에스겔

20151203 혜화동특강e-언약의 흐름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51203 혜화동특강e-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이스라엘 속에 이질적인 것, 특이한 요소가 들어옵니다. 모세가 개입하지요. 모세의 개입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은 바로 왕뿐만 아니고 모세를 따라서 구원돼야 될 히브리인들도 모세 하는 일들에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애굽 상황이 그게 현실 전체기 때문에. all이거든요. 일반적, 그들이 아는 모든 것 속에 포함된 모세는 단순히 하나의 개인이기 때문에 바로만 무시한 게 아니고 히브리인들도 모세를 무시했습니다.

무시했다는 말은 장차 예수님이 창조주로 오시는 게 아니고 보통 일반 구성원으로 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 개입하니까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못 알아듣는 거예요. 목수의 아들 아니냐, 그 아버지를 아는데, 보통 사람이에요. 그리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너, 어느 신학교 나왔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특이성을 나타내려면 언약적 내용이 거기에 주어지겠지요. 언약적 내용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일어난 사건의 반복이 돼요. 모세언약이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있었던 그 언약의 반복이에요. 언약은 전쟁에 관한 용도라 했지요.

출애굽기 3장 13절부터 15절까지 읽어보세요.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의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한 분이라고 해도 되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세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느냐 이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이 이삭을 통해서 완성되고, 이삭 통해서 한 언약이 야곱을 통해서 완성되고, 야곱이 현재는 집단적으로 모세를 통해서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 히브리인들은 개인의 구원문제에 집작돼있거든요. 우리가 힘들다, 못 살겠다, 바로가 핍박한다. 개인적인 자기의 생존문제에 걸렸는데 주님께서는 그게 아니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데리고 자기 군대로 삼아서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밖에 모르는 그렇게 통치했던 보이지 않는 악마와의 전쟁에 히브리인들을 사용하려는 겁니다. 그럼 히브리인들이 어떤 재주가 있느냐? 재주는 없어요. 그럼 뭐냐? 그들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2장 봅시다. 12장 41절 읽어보세요.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하나님의 군대가 나왔지요. 군대 같아요, 어때요? 히브리인들이 군대 같은 모양새가, 무기가 있습니까, 진영을 갖추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오합지졸이죠. 그게 언약 안의 군대 특징이 그렇습니다. 자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의 집합이에요. 무능한 자들의 집합이죠. 무능해야 돼요. 무능하지 않으면 영적 전쟁이 아닙니다.

지금 기존의 교회에서 선교단체를 유능한 자로 만드는데 절대로 유능하게 만들면 안 돼요. 어느 정도로 무능하게 만들어야 되느냐? 개죽음 당해도 좋다고 할 정도로 무능해야 돼요. 제가 할 게 있어야 선교하지요. 저는 지금 개죽음 당해도 당연합니다, 마땅합니다. 이래야 군대에요. 기도의 용병? 기도의 용병 필요 없어요.

우리 가운데 능한 자가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가진 자가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똑똑한 자가 누가 있느냐? 중요한 건 자랑의 내용의 차이거든요. 그리스도만 온전히 자랑할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내 자랑할 거냐? 이건 마귀한테 백전백패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없어요. 마귀는 그리스도와 뒤에 뭔가 섞이길 원합니다.

언약이 인간은 빠집니다. 언약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언약이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면 안 돼요. 끼어들려면 새로운 피조물 돼야 되는데 새로운 피조물은 옛 피조물과 연관성이 없어요. 왜냐하면 옛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을 넘어서며 죽어야 되니까 연관성 없는 거예요. 죽은 것을 주님께서 받아내잖아요. 이건 해골이에요.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해골을 주의 말씀으로 살려내기 때문에 해골과 새로운 하나님 군대는 연속성이 없어요. 중간에 개입된 인자가,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 돼야지 옛날 그 인간이 일하면 안 돼요. 그 인간은 계속 무능한 자가 돼야 돼요. 그러니까 계속 무능이 유지되기 위해서 승리하고 무능에서 벗어나면 패배가 되는 겁니다. 무능에 대한 자각이죠. 제가 지금까지 한 것도 그렇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못할 거예요. 이렇게 돼야 돼요. 전쟁에서.

그래서 나중에 나오지만 이스라엘이 승리할 때는 무능할 때는 승리했고 조금이라도 유능할 때는 패배했어요. 왜냐하면 적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적들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적들 배후에 비 언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귀신입니다. 언약적이지 않으면 무조건 하나님께서는 마귀 편 손을 들어버려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언약궤 돌아오니까 좋다고 춤을 췄잖아요. 20절에 보면,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왕의 신체는 절대자의 신체기 때문에 신적인 요소로 간주되거든요. 국가는 곧 왕의 얼굴이라는 말이 있어요. 국가가 유지되는 것은 왕의 얼굴이 유지될 때 그게 특수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통합돼요. 그래서 김정은이 김일성 흉내 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왕의 제국에서는 임금의 용안이 곧 중심이 되는 얼굴이에요.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얼굴입니다.

왕이 하찮은 종처럼 구니까 왕비가 저래서 나라가 잘 될지 걱정이 된 모양이죠.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21,22절) 했거든요.

이게 아까 야곱언약이죠. 처음 된 자가 나중 되죠. 그게 이스라엘 내에 살아있을 때만 이스라엘의 승리가 주어지는 겁니다. 지금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거든요. 그 승리가 유지돼야 돼요. 승리의 내용이 다윗에게 포함돼있으니까 다윗이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거예요. 그걸 왕비 되는 미갈은 모르는 거예요. 미갈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23절)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지요. 그럼 누가 패배자에요? 결국 블레셋만 패배자가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패배자가 발생된 겁니다. 누가? 미갈이 패배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의 양발차기에요. 누구 축복이냐, 저주냐 하는 것은 언약이 실현되는 현장에서 지옥과 천국이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왜 미갈은 이렇게 다윗에게 조언했습니까? 이미 기존에 있는 이스라엘은 자체로 하나님 편이라고 우긴 거예요. 반복적인 언약이 아니고 그냥 상징 자체를 실재로 본 겁니다. 계속해서 언약이 주어져야 되는데 과거의 이스라엘이 지금도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큰 교회에서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다. 왜 그러냐 하면 교회를 교회로 보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가 개척할 때 일곱 명으로 해서 칠천 명 됐다고 합시다. 아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제대로 하려면. 6999명 쫓아내고 새로 시작해야 돼요. 그런데 칠천 명부터 시작하는 것은 칠천 명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지요.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어제 내 아내였으니까 오늘도 내 아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늘도 도망 안 갔구나. 감사합니다. 그게 낮아짐이에요. 자기의 무능성입니다. 언약을 위해서 붙여줬지 내가 잘나서 잘했기 때문에 붙어사는 게 아니잖아요. 둘 다 마음 낮추라는 주의 계획 때문에 붙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새 장가가야 돼요. 날마다 새로운 시집을 와야 되고. 그게 언약적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게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역사의식 때문에 그래요. 과거에 그랬듯이 마땅히 오늘도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전쟁은 외부 전쟁 이전에 이미 주께서 언약이 있는 그곳에 내부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무엘하 6장 6절 봅시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보세요. 앞에서 분명히 언약궤를 블레셋에서 가져왔는데 언약궤 혼자 돌아다니면서 블레셋 진영을 온통 전쟁판을 일으켰잖아요. 블레셋이 감당 못해서 내놨습니다. 돌아오게 되면 언약궤가 마땅히 이스라엘 편일 줄 알았는데 웃사가 손으로 잡으니까 웃사를 쳐버렸잖아요. 그럼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하나님은 그때그때마다 자기편을 생산하지요. 이게 진짜 어렵습니다.

날마다 교회 돼야 되지 한 번 교회가 교회라고 하면 안 돼요. 몰라.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교회는 그러면 안 돼요. 이게 일곱 교회입니다. 운명이에요. 그래서 일요일에 교인들 모이거든 모이게 하셨지요. 그 다음 주에 온다는 보장 없습니다. 그건 주님께 일임해야 돼요. 오고 안 오고 모이고 안 모이고는 주님께서 부지런히 안 오게 하시는 활동, 오게 하시는 활동 그건 주님 소관이지 목사 소관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목사가 자기 싸움을 계속 하기 때문에. 오셔야 되는데, 라는 것이 욕심이 일 수 있단 말이죠. 안 오시면 안 되는데, 이게 욕심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는 목회하면서 자기 죄를 깨닫는 겁니다. 아까 미갈의 생각이 오늘날 목사들의 생각일 수 있잖아요.

이스라엘 내부에 언약이 살아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었다. 언약을 맺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지 육적인 이스라엘 만족과 맺은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분간 못해요. 이스라엘이 있으면 이게 전부지 자기 뒤에 진짜 이스라엘이 받치고 있다는 걸 생각도 못해요. 그러니까 자기는 족보적으로 이스라엘이고 그게 그 당시 현실에 실존한 유일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너온 열두지파가 전부잖아요.

열두지파가 전부인데 주님께서 한 지파로 바꿔버려요. 레위지파로 바꿔버립니다. 레위지파에 모이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아닌 게 돼버려요. 레위지파가 가동되면 이스라엘 가동돼요. 레위지파를 무시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망해버립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레위지파를 잘해주면 될 것 아니냐? 잘해주기가 힘들어요. 십일조 해야 되거든요.

십일조 받는 자 입장은 뭐냐 하면, 내가 노동하지 않는 것을 마땅히 받아 챙기는 지파가 레위지파에요. 다른 지파는 본인이 노동해서 우리가 노동한 것과 상관없이 이런 생산물이 나왔다고 고백해야 되는 게 나머지 열한지파에요. 그러니까 레위지파는 특이한 지파가 되는 거지요. 대표 지파가 되는 겁니다.

민수기 3장 12절,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대신’이란 의미를 누가 품고 있습니까? 레위지파가 품고 있어요. 그래서 열두지파를 대표하는 한 지파기 때문에 그 안에 모든 지파가 다 들어있지요. 모든 지파를 볼모로 잡았다고 보면 돼요.

이 말은 모든 지파 내에 레위지파가 흩어져 잠입돼있다고 보시면 되죠. 모든 지파의 레위지파화, 이게 율법이에요. 제사는 레위지파가 드리지만 그 여파는 레위지파에 소속된 모든 지파에게 제사 드리는 효력을 발생시켜서 그들에게 제공됩니다.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요? 그게 이스라엘이거든요. 레위지파의 나라, 제사장 나라에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뭡니까? 영원한 제사장이죠. 그럼 우린 뭡니까? 주님이 내 속에 들어와서 주님이 하신 십자가의 결과를 유발시켜서 위해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용한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주의 증인이 되죠. 그럼 독자적으로 내 것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리스도의 것이 돼야 돼요.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 아니지요. 사마리아 인인데 이스라엘 됐어요. 왜? 예수 그리스도가 만드신 영생이 나오는 우물을 그 속에 만들어넣었어요.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죠. 영원한 제사장 안에 모든 지파의 제사장이죠. 그 제사장이 사마리아 여인에 들어오면 사마리아 여인은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게 새 이스라엘 만드는 작업이에요. 언약적 실현입니다.

그럼 나머지 역사는 뭐냐? 가짜 이스라엘과 진짜 이스라엘의 싸움이 여호와 전쟁이 되는 겁니다. 바깥의 전쟁은 전쟁도 아니에요. 이스라엘만 이스라엘 되면 나머진 다 이기게 돼있어요.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다윗이 한 말이 있어요.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우리를 겁줄 수 있느냐? 상당히 언약적 사고방식이에요.

이스라엘은 기적적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할례언약, 모세언약이죠. 피언약. 언약 때문에 유지되는 게 이스라엘인 반면에 골리앗이 포함된 블레셋은 언약이 없단 말이죠. 언약이 없으면 저주잖아요. 그럼 뭘 해도 저주되는 나라가 복이 될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언약이 있으면 뭘 해도 복이 되지요. 전쟁은 끝났어요. 저주는 저주대로 복은 복대로 분리되면 전쟁이 끝나는 건데 이 전쟁은 시작부터 끝난 전쟁이다. 다만 골리앗이 까불거리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을 새삼 확인하기 위해서 한 것이죠. 이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께 속한 전쟁이라고 돼있어요.

사무엘상 17장 47절 읽어보시고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잖아요. 그러면 다윗은 아무것도 안 해야 되잖아요. 답변해보세요. 전쟁은 여호와께서 속했으니까 설칠 필요 없이 가만있으면 되는데 다윗은 왜 설칩니까? 물맷돌 던지고 칼이 없어서 골리앗 칼 들고 목을 베고 왜 그런 행위를 보여줍니까? 가만있으면 되는데 여호와께서 속했으면 여호와가 알아서 천사가 와서 할 건데 왜 지가 나서냐 말입니다.

언약의 구체성이잖아요. 언약의 구체성은 관찰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직접 뛰어들면서 아님을 알게 하는 거잖아요. 지가 행동하면서 내 행동과 전쟁 승리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여호와 전쟁입니다. 자칫하면 전쟁은 이스라엘이 해놓고 다윗이 패배할 수가 있어요. 내가 했습니다. 사울이 이래서 망했잖아요. 전쟁은 전쟁대로 승리하되 사울은 승리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빠져버려요. 모든 전쟁은 내부 전쟁이지 바깥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골리앗은 허수아비에요. 진짜 전쟁은 이스라엘 내부 전쟁입니다. 다윗의 인식을 갖고 있느냐, 사울의 인식을 갖고 있느냐, 그 싸움이에요. 사울의 인식은 이스라엘은 내가 지킨다고, 다윗은I am nothing. 우리는 이스라엘 지키는데 하나도 소용없음을 보이기 위한 행위만 보이면 되겠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고 막 사는 거예요. 왜 그냥 살지 않고 ‘막’ 자를 집어넣는가? 우리가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음을 우리가 막 사는 걸 통해서 주님을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이스라엘 내부에는 모세언약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계약은 시내 산 밑에서 계약했지요. 출애굽기 24장 6절부터 읽어보세요.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도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 할례를 행한 후지요. 할례언약이 피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근원적인 피는 인간의 육신을 제거하는 데서 오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소를 잡지요. 소 잡아서 흘린 언약의 피는 다시 사람에게 오되 그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고 인간 속에 섞이는 특이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피를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사람의 피가 중간에 율법을 통해서 양의 피로 바뀌었다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해서 그것이 진짜 상징을 상징되게 한 실제적인 피, 예수님의 피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모든 언약의 한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나님이 죽는다는 게 포함됩니다. 하나님이 죽어서 하나님 됨을 자기 증명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이었어요. 죄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죽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는 것은 확정된 것이고 죽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죄가 발생돼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는 겁니다.

인간의 상식은 뭐냐? 인간이 죄 짓고 인간을 불쌍히 여겨서 죄 용서하기 위해서 어린양으로 제사 지내서 그 피로 씻어주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고. 창조 전부터 십자가 있었던 거예요. 이게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깊은 진리에요.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는 겁니다. 십자가 피가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조치하는, 처리하는 현상으로 주어지게 되면 구원론이 돼버려요. 그건 종교가 돼버립니다.

십자가는 구원론에 연관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본질에 관한 거예요. 십자가지지 않으면 주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 지셨기 때문에 주가 되시고 주시기 때문에 십자가 지시게 되는 거예요. 인간의 구원과 상관없이. 다만 인간이 죄 짓고 구원하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 져야 될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죄 짓고 거기서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되는 겁니다.

이걸 누가 모르느냐? 칼 바르트가 몰라요. 칼 바르트가 모른다는 건 다른 신학자 모두가 모른다는 뜻이에요. 모든 신학자 가운데 최고가 칼 바르트거든요. 칼 바르트조차 이걸 모르는 거예요.

-처음에는 아는듯하다가 나중에 바뀐 그게 아닌가요?

몰라요. 처음도 몰라요. 다른 신학자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요. 그런데 이 사실을 몰라요. 헤겔이란 철학자도 성육신은 알았는데 십자가를 몰라요. 지젝이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기독교에 대해서 너무 잘 분석했지만 십자가를 몰라. 십자가를 모른다는 말은 죄를 모른다는 말이고 죄를 모른다는 말은 언약을 모른다는 말이고 언약을 모르게 되면 복음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 옆에 강도는 알아요. 강도 돼야 된다는 사실. 누굴 위해서? 주를 위해서. 내가 강도된 것도 주를 위한 일이란 사실.

그래서 이게 언약이거든요. 언약의 피입니다. 언약의 피가 계속 가동되면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이걸 형식화시킨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내부 전쟁, 형식이냐, 실제로 피 흘린 분이 따로 계시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따로 계신 분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들이 뒤에 오시는 메시아를 위해서 앞에 있는 종들이 죽음을 당해요.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을 상대하면서 내세웠던 비유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포도원을 만들고 주인이 먼 타국에 가있다가 일꾼들에게 추수한 걸 얻기 위해서 종들을 보냈는데 보낸 족족 죽이는 거예요. 설마 아들은 존중하겠지 하고 보냈더니만 아들마저 죽이고 하는 말이, 이제 포도원이 우리 것이 되었다고 한 겁니다. 그럼 처음부터 종들을 때리고 죽인 것은 그때부터 이미 이 포도원은 내가 노동해서 얻었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는 거죠.

그럼 구약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이스라엘은 누구 것이다? 자기 것이라는 거죠. 대대로 자기 혈족, 자기 민족 거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방나라화 된 이스라엘이고 자동적으로 우상을 선호할 수밖에 없어요. 우상이 우상다워서 아니라 본인이 이미 우상이기 때문에. 우상이란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존재하거든요. 교회 가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가잖아요. 그게 우상이란 말이죠. 우상과 우상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특이하게 성신 받은 선지자는 그게 아니라고 나서는 겁니다. 그게 특이한 현상이에요. 그 선지자를 오는 족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죽여 버려요. 왜?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이스라엘을 훼방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이 나라를 부정해. 그 노선이 아벨에서 스가랴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피가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저주와 심판을 외쳤던 첫 번째 나라가 이방나라가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에요. 바벨론 무너지기 전에 이스라엘이 먼저 망해요. 왜? 거룩에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

심판이 무엇부터 시작됩니까? 교회부터, 하나님의 집부터 시작된다고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지요. 이게 원리에요.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유대인에게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이야기함으로서 유대인만 악마가 아니고 나머지 모든 인간이 다 악마에 소속돼있다는 걸 언급하는 겁니다. 이게 구약의 요나도 마찬가지에요.

요나가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요나가 외도를 했지요. 다시스로 가다가 중간에 걸려들어서 니느웨를 거치게 됩니다. 니느웨 현장에서 자기 나라를 봤을 때 자기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말씀을 외치니까 동일한 주의 말씀인데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아니하고 니느웨는 회개했잖아요. 심지어 짐승들까지. 그럴 때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그곳이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진짜 이스라엘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요나 자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갑니다.

히브리인이 이스라엘이 아니죠. 히브리인한테 쫓겨난 사람이 모세입니다. 어떤 동조자도 없이. 모세가 사람 죽였다는 것을 같은 동족이 찔렀지요. 동족이 모세를 배반한 거예요. 모세가 삐져서 양 치고 있다가 다시 재투입 파견 근무합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거죠. 마태복음 1장에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만드는 것은 외부인입니다.

마태복음 1장 3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살몬은 라합에게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에게서’가 네 번 나오는데 세 개 이야기했죠. 여기 우리야의 아내, 다말, 라합 다 어떤 여자입니까? 이방인이죠.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유지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리아는 유대인이지만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서 임신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처녀가 임신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서는 용납이 안 되죠. 특히 우리야의 아내는 다윗과 간통한 사이잖아요. 마리아는 아예 임신해버렸어요. 갈수록 인간들이 믿을 수 없는 요소가 언약을 통해서 불거지는 겁니다. 크게 부풀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이해했다는 제자들이 갈수록 이해 못해요. 처음에 오병이어 할 때는 메시아가 왔다고 착각했지요. 그러나 갈수록 하시는 말씀을 이해 못하고 특히 이해 못한 것은 바로 성전 청결할 때 주께서 폭력을 사용했지요. 성전마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을 열두 제자들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성전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내가 기댈 언덕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그래서 구원되는 겁니다. 구원되도록 약간의 접촉점을 내 쪽에서 만들면 안 돼요. 우리가 기댈 비빌 언덕이 있으면 안 돼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의지했습니다. 의지했던 이스라엘이 그야말로 이순재가 하는 것처럼 못난 놈이 되어 이들이 멸망해버립니다. 멸망하는 가운데 선지자들이 계속 투입되고, 투입되면 핍박하고 투입되면 죽고, 이름 있는 선지자도 죽고, 이름 없는 선지자도 죽고, 계속 죽어나갑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죠.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사실은 다윗이 왕 되고 싶은 게 아니고 사울을 대체하기 위해서 왕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사울은 왜 왕 되었는가? 그것은 백성들이 왜 왕을 달라고 했는가? 비어있는 것을 굉장히 못 마땅해했어요. 구체적으로. 아까 구체적인 인물, 왕의 용안이 국가를 대표한다고 했지요. 그런 왕이 없는 거예요. 왕이 없으니까 각자 소견대로 지 마음대로 놀았던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에게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왕이 없어서 생긴 불상사로 여겼던 겁니다. 왕만 있으면 하나로 통합되는데.

그러나 제사장 나라에서는 제사 지내는 레위지파가 제대로 지내면 유지가 돼요. 그런데 사사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떠돌아다닙니다. 레위인들이 밥을 먹을 데가 없어요. 땅도 없고. 레위인은 원래 땅이 없어요. 도와주질 않습니다. 기껏 레위인을 자기 가정과 자기 집단 복 빌어주기 위해서 무당 불러오듯이 부른 거예요. 사고방식이 우상 숭배에 레위지파를 접목시킨 겁니다.

지금의 군목, 병원의 원목, 학교의 교목, 교회의 회목, 전부 다 마찬가지요. 우리 교회에 잘 하라고 당회장으로 모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란 것은 성경에만 있지 이 교회는 없어도 괜찮거든요. 제가 교회를 없애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취임해야지. 그 교회에 가면. 여러분, 부동산 만들었으면 제가 없애드리겠습니다.

왕을 달라는 백성들이 이방 나라처럼 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언약의 취지가 날아가 버리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왕을 주되 그 왕을 중심한 이스라엘이 가짜인 것을 그 나라 속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서 바꿔치기 하겠지요. 그게 다윗이고 기존에 있는 것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옛날 이스라엘 대표하고 다윗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데 숫자가 사울 패가 많아요. 전쟁이 일어나겠지요. 다윗이 가는 곳마다 쫓겨 다니죠.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러한 신음소리와 고난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게 이스라엘 때문에 그렇지요.

그것을 그대로 십자가에서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는 분이 왕이에요.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자리가 비어있는 왕의 자리에요. 왕의 자리는 버림받는 자리. 그러면 왕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왕을 버렸습니다,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저 때문에 버림받았습니다. 저 때문에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잖아요. 이 죄 많은 나 때문에.

그래서 죄란 것은 나쁜 짓해서 죄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만 비로소 죄가 드러나요. 죄가 드러나면서 동시에 십자가 앞에서만 그게 의가 돼버려요. 주님과의 연관성 때문에 의가 되니까 마귀가 아무리 율법으로 고소해도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고소할 사람이 없어요. 왜? 이미 자기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태양의 밝은 빛 앞에서 자기 자신의 허점이 드러난 사람이 촛불 앞에서 벌벌 떨겠습니까? 안 떨지요. 자기의 모든 죄란 죄는 십자가에 드러난 사람이 대통령이나 높은 장관 앞에 재벌 앞에 벌벌 떨겠습니까? 안 떨지요. 그게 자유잖아요. 주님 앞에 된 통으로 당한 사람이 주님 앞에 죄인으로 이미 규정받았는데 잘났다고 할 필요 없잖아요. 못난 줄 모르는 사람과 못난 줄 아는 사람의 차이 아닙니까. 성도는 못난 걸 안은 사람이 세상 사람은 지가 못난 걸 모르는 사람이고. 갑자기 나는 못난이 노래 생각나네.

그래서 다윗의 나라의 왕은 다윗은 사울을 대신해서 왕으로 들어갑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장하면서 원래 진짜 숨어있는 왕이 따로 있어요. 다윗은 상징물로 있습니다. 진짜 숨어있는 왕이 다윗을 통해서 솟구쳐 나와야 되지요. 그 현상이 다윗을 상한 심령, 죄인 되게 만들어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원초적인 죄인, 처음부터 죄에서 태어났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이 땅에서 어떤 죄도 짓지 않았지요.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성도로 난 사람은 다시는 죄 짓지 아니하나니.

-그냥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짓지 아니하나니.

-그런 의미였었군요.

사적인 죄가 아니고 차원 자체가 죄의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는 두려워하지 않아요.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이유가 의인이기 때문에 이미 죄라고 드러나면서 의인됨이 같이 드러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져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일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사랑이 임하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 짓지 아니하나니. 사적인 죄 개념에서 벗어납니다. 진짜 죄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게 죄겠지요.

다윗을 통해서 뚫었다 했잖아요. 숨어있는 왕이 다윗으로 하여금 상한 심령으로 돌발시켰어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다. 상한 심령이다. 주께서 원하는 모든 말씀을 지킬 분은 따로 계신 거예요. 주님을 위해서 지킬 말씀이 두루마리 책에 따로 한 분이 오시는 겁니다.

시편 40편 6절에서 8절 보면 나오지요.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했지요. 그렇다면 왜 제사 드리라, 이야기하셨는가? 그것은,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숨어있는 분이 제사 뒤에 숨어 계셨던 거예요.

제사가 실패하면서 제사가 형식화되면서 제사를 뚫고 들어온 겁니다.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에 실패한 자를 원하는 거예요. 제사 드려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의 등장. 왜? 상한 심령이 제사 드려야 소용없는 거예요. 제사 드려서 상한 심령이 새로운 심령 되는 건 아닙니다. 대신 죽으실 분에게 일임해야 되고 맡겨야 돼요. 내 인생을 내가 살면 안 돼요. 주께서 일임하고 맡기는 인생을 살아야 된다 이 말이죠.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내가 왔나이다. 내가 누구냐? 히브리 10장에 이미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와버리면 이 세상은 이미 종결됐어요. 묵시적 세계입니다. 역사가 진행해봐야 의미 없어요. 똑같은 십자가 의미의 반복일 뿐이죠. 사도 바울에게 역사적 종말이란 의미 없습니다. 자기가 외치는 순간이 심판의 순간이고 종말의 순간이죠. 자기 있는 순간이.

그렇다면 뚫고 들어오면 다윗 왕 자리를 찢어버리죠. 왕이 없는 거죠. 왕이 없으면 뭐냐? 영원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겁니다. 모세언약이 살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올 왕은 모세언약을 이루는 왕으로써 등장하겠지요. 제사란 뭘 의미하냐? 모세가 피 남편, 죽음이죠. 죽음을 양의 죽음에서 사람의 죽음으로 바뀌지요. 그걸 미리 보여주는 것이 선지자들의 죽음과 고난입니다. 에스겔, 예레미야, 전부 고난 받고 죽기도 하고. 예레미야나 죽을 뻔하다 살았지 죽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 당시에 시드기야나 여호야긴 시대에 순교자가 많이 등장했거든요. 그건 아벨과 같은 노선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죽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죽인 자가 있을 게 아니에요. 가해자가 있으니까 피해자가 있지요. 가해자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자기 딴에 여호와 믿는 사람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여호와 믿고 성령 믿고 삼위일체 믿는 그것이 곧 적그리스도. 어떤 상징, 이미지를 실재라고 착각하는 적그리스도죠. 양의 탈을 쓴 거예요. 마귀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면 그게 교회 이름으로, 목사 이름으로, 장로 이름으로, 교단 이름으로, 기독교 이름으로. 왜냐하면 내부 전쟁이 곧 외부 전쟁으로 이어지니까. 나의 전쟁, 나의 싸움으로 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희가 전부 다 적그리스도?

처음부터 적그리스도에 소속돼있다. 앞잡이라 했잖아요. 앞잡이였는데 그걸 확연하게 드러냄을 당한 사람이 이미 성도가 됐지요. 그러니까 감사할 뿐이죠. 주께서 사용한다는 점에서 감사할 뿐이죠. 사용할 가치를 없는 강도를, 창기를 사용하시니까. 뭔가 새 사람 된다는 조건 하에 사용하는 게 아니고 새 사람 안 되게 하시면서 사용하시잖아요.

네가 새 사람 될 필요 없다는 식으로 사용해버리니까 그게 옛 자아와 새 자아의 새로운 발생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주님 앞에 사용당하는 겁니다. 마리아가 주의 일에 도움 줬습니까? 임신할 때 미리 기도했어요? 임신해달라고. 그냥 쳐들어온 거잖아요. 난처했지요. 처녀 입장에서 임신했으니까. 바로 그거에요.

그래서 고난 받는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선지자의 자리가 항상 구멍, 여백으로 남겨진 공허한 자리로 뻥 구멍 뚫려야 돼요. 메시아 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선지자는 죽음으로 자기 중앙 포기하죠. 중앙은 내 자리 아니라고 자기는 죽지요. 다니엘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인자라고 하지요. 다니엘은 인자라고 불리면서 인자의 자리를 내놓습니다. 나는 그 주변에 있고 일은 장차오실 분이 앞서서 나가고 일하고 계십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51203 혜화동특강e.hwp (35.0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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