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21절(가락-아버지)151203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21절(가락-아버지)151203b-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요한복음 8장 21절(가락-아버지)151203b-이 근호 목사
자, 지금 우리가 8장에서 봤던 내용이 이겁니다. “아버지하고 내가 같이 있는 것을 너희는 모르는데 너희는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나를 못 알아본다.” 그 이야기를 지금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나중에 “때”가 되면 이 사실을 전부다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낸 자만 알고 나머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28~29절 봅시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라고 하니까 ‘아이고 예수님은 좋겠다. 주께서 함께 하시니까..’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성령을 받으면 우리도 이와 같은 상태에 들어가게 돼요.
어떻게? 우리가 기대했던, 우리가 상상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런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보통 사람이 되어 버려요. 특별하지 않아도 성도, 기적을 베풀지 않아도 충분히 성도, 그냥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히 사라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삶을 살게 하죠.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하죠. 성도는 무능한 사람이이에요. 성도가 유능해져버리면 그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골리앗하고 싸울 때에 무능했어요 유능했어요? 질문이 예리하다. 무능했습니다.
자기의 입으로 얘기했습니다. “이 싸움은 내게 속한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준비할 것을 준비하고 난리났지요 물맷돌 들고 설치고 이겨놓고 칼로 자르고..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일을 하실 때에 남들 보기에는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사자(나)는 “나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내 계획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보는 사람과 다윗 사이에 의사소통이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는 경우입니다. 성령이 와야 돼요. 그러면 왜 성령이 오면 될 것을 미리 당겨서 알려 주지를 않느냐 그때까지는 아직 인간들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라야 돼요. 아직 “주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면서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라야 돼요.
그 죄인이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주장이 살아있습니다. 자기 판단이 있고 자기 선택의지가 살아있고 그런 거죠. 내가 알아서 예수님을 분석해서 믿을 사람인지 아닌지 내가 판단해보겠다는 거에요. 그런 식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긴긴 말씀은 ‘너희는 나를 모른다.’는 거에요.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이 말씀을 함으로써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졸지에 아버지가 없어요.
그러면 그들이 말한 “여호와”는 뭐냐? 누가 상상해왔습니까? 마귀가 가짜로 여호와를 믿게 한 겁니다. 죄 속에 있는 자는 나올 것이 죄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상하든 삼위일체를 상상하든 예수를 상상하든 그것은 전부다 조작되고 날조된 것이고 마귀가 집어넣어 준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단정하느냐? 처음부터,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 이상 주님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어도 좋아요. 분석해서 죄인을 깨닫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님을 보게 되면 한꺼번에 내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럴 경우에 내가 내뱉고 있는 모든 것이 죄에 바탕을 둔, 죄의 결과물로 나왔다는 것을 자기가 고백하게 되지요.
내가 무엇을 행하고 안 함으로써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인 나를 대신 희생하심으로써 구원이 되는 거죠. 따라서 대신 희생이 나에게 침입을 한 이상은 내가 스스로 납득이 되고 내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은 대신 희생에다가 양보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여호와, 예수님, 신)이 저기에 계시다면 이 중간에 십자가 사태가 일어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내가 이것을 경유하되 슬쩍 경유하는 것이 아니고 졸지에 여기(십자가)에 들어가면서 “죄인”이 되는 거죠.
그런데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까지 인도하는 것은 주님이 인도해야 되는 거죠. 그러면서 내가 처음부터 봤던 이 모든 것은 가짜가 되고 주님만이 아버지와 함께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 인도하는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이름(주님의 공로)으로 비로소 아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아신 아버지가 이제는 나의 아버지로 우리한테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만 의인이고 나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천국 간다.’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입니까?
“너는 뭐 해서 천국 가느냐?”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가.” 좀 이런 자랑질 좀 하세요.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보면 소풍 가는데 아무것도 안 가져가는 사람이 있어요. 얄밉지요. “너는 소풍 가는데 김밥도 없고 사과표 사이다도 없고 말표 사이다도 없고 삶은 계란도 없고 물고구마도 없고 뭐야?” 아무것도 안 가지고 그냥 오는 거에요.
“너는 뭔데 아무것도 안 가져와?” “3학년 2반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엄마)거든. 나 거기에서 먹을거야.” 신났어. 아무것도 안 가져가는 거에요. 바리바리 싸는 게 아니고.. 그걸 가지고 32절에 “자유”라고 합니다.
이 “자유”는 우리가 기대(예상)했던 “자유”가 아니고 예수님만 누리던 “자유”를 우리가 공유하게 돼요.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그냥 우리에게 쳐들어온 게 아니고 죄를 경유하거든요. 예수님이 죄를 경유해요.
그러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못 벗어났는데 함께 죄 속에 들어오신 분에 의해서 드디어 탈출 구멍이 발생되었잖아요. 그 구멍을 가지고 “자유”라고 합니다. 숨통이 틔인다는 거에요. 후~ 비로소 뭔가 봉창 너머의 맑은 공기가 들어온 기분이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영생을 얻게 된 그 영생의 기운, 영생의 그 바람으로 비로소 호흡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주신 은혜를 맛보게 되면서 교제가 되지요. 반드시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내가 살았다.”가 되어야 됩니다.
그냥 내가 산 것은 내가 기대한 하나님을 사귄다는 것인데 그것은 가짜고 날조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님을 사귄다는 것은 내가 몰랐던 아버지가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로움으로 추가적으로 계속 주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뒤로 밀려버리고 그 밀려버린 빈 자리에 주님(예수님)이 알고 있던 아버지가 새롭게 그 공간을 자꾸 채우는 겁니다. 그렇게 된 것 중에 하나를 아까 사도행전에서 했지요.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오직 친히 주시는 자다.” 그것도 하나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왜냐하면 그 사실을 알기 전에 구약을 보면 “바쳐라. 양 바쳐라. 안식일 지켰냐 안 지켰냐, 안식일날 나무했냐 안 했냐”라고 하는데 안식일에 나무해도 구원 받게 되었는데요?
이제는 안식일에 나무해도 구원 받아요. 십일조 안 해도 구원 받아요. 이런 배짱이 어디 있어요? 창녀도 구원 받는데요? 살인자도 구원 받아요. 네가 이 땅에서 무얼 했느냐를 일체 묻지를 않아요. 왜? 친히 주시는 분이시고 영생까지 주셨으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아버지는 오직 예수님만 알고 계시다. 예수님과 아버지만 알고 있다는 것이 아까 긴 이야기의 내용이었고 그 예수님이 혼자 잘난 체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죄인 속에 들어와 버렸지요.
그러면 죄인의 세계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지가 발생된 겁니다. 그렇다면 그 자유케 된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만 알고 있던 그 아버지의 내용이 그들에게도 같이 공유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를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일은 예수님 선에서 끝나버려요. 우리가 추가적으로 해야 될 일이 없어요. 흔히 학교에서 그런 경우가 있는데요.
담임선생님이 화가 났어요. “너희들 떠드는 소리가 교무실에까지 다 들렸어. 내가 조용하라고 했지? 전부다 꿇어앉아. 그리고 반장 너 나와. 손바닥 대.” 그리고 10대를 때립니다. 그러면 다른 애들은 상상을 하죠.
‘반장이 열 대.. 그러면 우리도 열 대..’라고 생각했는데 “반장이 대신 맞았으니까 끝.” 하고 가버리실 때, 선생님의 일은 어디에서 스톱이 된 거에요? 반장으로 스톱이 된 거에요. 그게 대신 매 맞으심, 채찍 맞으심이에요.
그런데 성경에서 채찍 맞으심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채찍 맞으심으로” 그 뒤에 무슨 말이 있습니까? “우리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우리가 나음을 입은 거에요.
그러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님이 채찍 맞는 것이 단독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해서 맞은 것으로 나중에 아버지의 생각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들이니까 내 쪽에서 아버지를 위해서 할 게 아무것도 (일체 모든 것이 말끔하게 날라가 버리고 소지가 되어서) 없어요. 하지 않아도 돼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은 주님이 회수해서 대신 다 이루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명령을 하는 겁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라”는 것은 “네가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예수님)가 이걸 다 이루어서 너희에게 이룬 것을 선물로 줄게.”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는 사람으로 쳐주는 겁니다. 모든 일은 스톱이 되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구경만 하면 됩니까? 아니, 날마다 죽었다가 깨어나야 돼요. 해지도록 분을 품었기 때문에 죽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주님 덕분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죽었다가 깨어나고 죽었다가 깨어나고.. 모든 것(말씀)이. 그것을 사도바울은 (죽었다가 깨어나는 것이 너무 번잡하잖아요.) 아예 내가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펌프질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펌프질을 한 번 할 때마다 저 아래쪽에 있는 물이 올라오지요. 주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구원 받은 내가 나타나면서 주님이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더 해봐야 이해가 안 되겠다.)
32절에 봅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지요. “진리를 알찌니”라는 말은 마치 명령처럼 들려요. 진리를 아는 사람에 한해서 자유케 된다는 말처럼 들리지요.
그런데 그 조건은 누가 가져온다는 거에요? 조건을 우리한테 부여해도 하나님께서 인간하고는 상대를 안 해요. 오직 우리의 대표자이신 예수님만 상종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을 대표해서 주님이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물을 그냥 받을 뿐이에요. “자유”.
이게 바로 출애굽기에 모세가 개입한 이유입니다. 모세만이 여호와를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런데 그래서 출애굽 실패했습니까? 모세를 보고 성공했잖아요. 그게 “모세언약”이잖아요. 모세를 보고 성공한 거에요.
그 산 밑에 있는 사람들 다 죽여야 되는데 모세를 보고 하나님이 살려주지요. 33절에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 대목이 중요한 대목이니까 좀 여러분이 힘들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경 해석할 때 늘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성경 해석을 할 때 반드시 유대인 쪽에 서서 성경을 다시 봐야 됩니다.”라고 했지요.
바리새인이 나오면 우리가 바리새인 쪽에 서서 해석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쳐야 될 경로가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도 아담의 자손이고 우리도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으면 안 돼요. 같은 족속이거든요. 그래서 바리새인이 이런 언급을 할 때는 이게 다 필요없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주님한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꿀떡 같을 때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시원하게 대신 주님 앞에 대들고 있는 겁니다. (우리 속에서 대들고 싶을 때, 매는 그들이 맞지만..)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라고 했는데 근거가 뭡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저주가 오지 않고 그 자체가 복이 된다고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 약속을 스스로 폐기할 리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비록 압제 받고 하더라도 여전히 죄에 매여지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축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은 우리의 축복권 밑에 예속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민족 중에 주인 되는 민족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계속 투입이 되게 되면 아브라함 내부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가정에서 저주가 아브라함 말고 다른 민족이 저주 받는 것이 당연하고요, 아비멜렉 같은 경우에 그랬잖아요.
사라를 건드리다가 그 집안이 어떻게 됐습니까? 전부다 불임 여성이 되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도해주니까 다시 불임이 풀렸잖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다른 민족이 저주 받는 것은 당연한 거에요.
그런데 아브라함 가정 내에 과연 저주가 없느냐 하는 겁니다. 노아 가정이 구원 받았잖아요. 그러면 노아 가정에는 저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함과 가나안이 그렇잖아요. 그 사람들이 노아의 식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의 공식을 만들 수 있어요. ‘언약이 투입되면 새로운 저주가 생긴다.’ 이렇게 공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그런가? 지금은 언약이 완료되었잖아요. 지금 이 모든 것은 십자가를 안 믿으면 저주를 받고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 것이 확정이 된 상태에요.
그러면 지금에 와서 우리의 행동 여지나 여러 가지 생활 태도, 우리의 습관, 우리의 재산 상태, 인물을 일체 보지 않습니다. 특히 인물을 보지 않고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지요? 일체 그런 것을 보지를 않고 기준이 이미 확정 되었어요.
주께서는 아무것도 안 받는다 이 말이죠. 오늘 이것을 꼭 기억하세요. ‘모든 것은 예수님 선에서 마감되었다.’ 이것이 새 언약의 특징이에요. 그러나 그전까지는 왜 우리한테 의논을 안 하고 우리와 협상을 안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밝혀지기 위해서는 십자가까지 계속 이끌어가야 되는 겁니다.
“이만하면 우리가 남은 자지요?” 하면 그 남은 자 속에 또 새로운 언약이 투입되어 버리고 그러면 그것도 균열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남은 자의 남은 자가 있을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설마 구원 받겠지요?” 그것도 깨버려요.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도다”
심지어 이렇게 한다구요. “아담의 자손이냐? 다 지금 죄의 종이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없어요. 죄인밖에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모두 다 죄인뿐이에요.
그러면 율법은 왜 주셨는가?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오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지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죄인이라고 확정짓기 위해서 율법을 줬는데 이 죄인이 죄인값을 하네..?
‘아, 잘만 하면 복 받는다 이거지요?’라고 지가 지 맘대로 해석을 해가지고 아직도 자기 가능성을 거기에다가 부여하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이유)은 죄인이 없게 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면 십자가를 준 이유는 뭡니까? 마찬가지에요. 예수 믿고 착하게 산 것으로 구원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십자가 안에 머물러 있어야 되지, 십자가에 있다가 거기에서 기어나오면 안 됩니다. “자, 십자가 알았으니까 바르게 살자. 바르게 삽시다.” 이러면 안 돼요. 십자가로 살면 죽이는 건데 이 사람이 덜 죽었어요.
그 말은 십자가가 가짜였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가짜 십자가를 이야기하니까 교인들마다 안 죽고 살아있었어요. 살아있다가 기어나오는 거에요.
전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지렁이가 밟으면 꿈틀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대로 안 밟아서 그래요. 꽉 밟았으면 돌연사해서 죽을 건데 덜 밟아서 꿈틀꿈틀 하는 거에요. 확 밟아줘야 돼요. 십자가로 확 밟아줘야 됩니다.
“자유”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토”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환경조성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지유”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지붕으로 덮친 겁니다.
그래서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이것이 구약 때는 성립되어요. 구약 때는 언약이 완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가나안 땅에 오더라도 다시 바벨론 땅으로 포로 잡혀갑니다.
따라서 구약에는 출애굽의 언급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애굽에서의 구원과 바베론에서의 탈출, 두 개의 출애굽이 있는데 둘 다 실패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한 번 매맞는다고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이 때린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박한다고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기만 더 늘어날 뿐이죠. 후 삼년 반 동안 직사하게 고생해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어요. 그것은 소수의 휴거를 믿는 소설이지 그런 거 없어요. 오기만 더 나지요. 바락바락만 더 심하게 될 뿐입니다.
“자유”라는 것이 와서 덮치기 때문에 성도의 특징은 역시 갇혀있다는 거에요. 그 “자유” 안에 갇혀있는 사람을 “아들”이라고 하고 “죄” 아래 갇혀 있는 사람을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율법의 종”을 말하고 “저주의 종”이 됩니다.
그런데 “아들”은 원형이 있어요.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렸던 영화를 같이 누리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미스코리아라면, 그 드레스를 우리도 같이 맞춰 입습니다. 예수님이 미스코리아라서 머리를 높다랗게 했다면 우리도 같이 머리를 높다랗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렸던 영화를 우리도 같이 누리는 겁니다. 그렇게 격이 맞아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영광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거에요. 거지가 구원 받기 위해서 어떤 착한 일을 했습니까? 이것은 응용문제인데..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그냥 구원 받았지요. 거지여서 구원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구원 받은 거에요. 그러면 부자는 왜 지옥에 갑니까? 그냥 지옥에 간 거에요. 그게 “자유”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이것은 우리는 의논할 상대가 아니고 어르신들, 예수님과 아버지가 의논하지 우리가 그 의논에 눈치없이 끼어들 필요가 없어요. 가만히 있으면 돼요.
쑥덕쑥덕 알아서 다 건져주십니다. 그게 믿어진다는 거에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 나의 미래로 확정되었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을 가지고 “약속을 믿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이미 내 운명은 예수님에 의해서 확정되었다는 것이 믿어지면 구태여 내가 애써서 꾸려갈 내 인생을 따로 마련할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요. 얼마나 귀찮은 일이에요. 할 필요가 없잖아요.
복음 전도는 다른 게 아니에요. 편하게 사는 모습을 그대로 공개하는 게 전도지요. 인간이 자유롭게 사는 것. “아들”이라는 말은 내가 “아들”된다는 것이 아니고 “아들”과 함께 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는 “양자”가 되는 겁니다.
어쨌든 함께 있는 분이 “아들”이라는 것은 보통 빽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종은 함께 있을 것이 없어요. 그냥 저주의 종이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의 사항을 충실하게 순종해야 되는데 그것을 순종해봐야 순종은 되지도 않고 저주만 일어날 뿐이죠. “율법의 종”
그래서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는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율법의 행함으로. 율법은 행하면 지옥가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율법을 어떻게 지킵니까? 성도에게는 율법이 없어요. 성도에게는 율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을 예수님이 가져가가지고 전부다 그것을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 주시죠. “다 이루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라” “왜요?” “다 이루었거든” “술 먹지 마라”“왜요?” “다 이루었거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새사람을 입으라” “왜요?” “다 이루었거든” 그런데 우리한테는 “새사람을 입으라”는 명령과 “다 이루었다”는 명령이 충돌되는 것처럼 느껴졌잖아요?
우리 쪽에서 새사람을 입으려고 하도록 주께서 동기부여한 것처럼 오해가 되지요? “새사람이니까 바르게 살으란 말이야.” 이렇게 해석하고픈 마음이 꿀떡 같지요. 그게 아니고 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새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행동을 다시한 번 보게 하는 겁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주께서 원하시는 그 새사람에 일치되지 않지요. ‘술을 끊었는데 그게 새사람인가?’ ‘일찍 퇴근하는 것도 새사람인가?’ ‘퇴근 시간이 6시인데 6시 반까지는 봐주는가?’ 지가 맘대로 새로운 법들을, 세칙들을 만들어 내요.
말은 안 해도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 냈는지 모르거든요. 징크스와 비슷한 거에요. ‘오늘 시험 잘 봐야 되는데 저 세 번째 오는 전봇대를 ‘탁’ 치고 가면 오늘 재수가 좋을 거다.’ 이런 징크스를 본인이 만들어 내요.
선악과를 폼으로 따먹은 것이 아니거든요. 축구할 때 머리를 안 감는다든지, 아침에 공짜 손님이 오면 재수가 없다든지, 가게 문을 열 때 고양이가 먼저 야옹하고 달려들면 오늘 망했다든지 그런 징크스를 계속 만들어 내요.
그런 징크스를 없앤다고 할지라도 평생 버릇이 내 몸은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평생을 다하도록 우리는 내가 구원이 되기 위한 조치를 뭔가 내가 벌리게 됩니다. 그때마다 주께서는 “자유케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에게 “주의 때”를 심어주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내가 죄인이 맞군요.’ 하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죄에서 우리를 구원한 것 맞군요.’ 어쨌든 이겁니다. 내 죄에서의 구원은 내가 추가해서 손 댈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손 댈 것이 없으니까 그게 짜증이 나가지고 계속 내가 나한테 손을 대잖아요. 손 댈 것이 없다는 것이 우리 버릇, 평소 생각하고 엄청나게 달라서 실감이 안 나니까 자꾸 뭔가 테스트, 내가 내 능력에 대해서 테스트 해보는 거에요.
‘기도를 한 시간 동안 하게 되면 애 성적이 올라가겠습니까?’ 자꾸 테스트 해보는 거에요. 그게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어떤 것도 내 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내 운명을 바꾸지 않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종이 되지 마라 왜냐하면 너는 내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종이라고 도외시하지 않겠다. 너를 아들이라고 이야기하겠다.” 아들만이 자유케 되는 겁니다.
34-35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종에서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종은 아들이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겁니다. 36절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자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했는데 그러면 주체가 바뀌어야 되죠.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관리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가 뭘 기대합니까? 주께서 나를 아들로 만들기를 기대하겠지요? 그 기대가 ‘꽝’입니다. 그 기대성이 죄에서 나오기 때문에 안 돼요.
아들이 우리를 자유케 하든 말든 그것은 아들 소관이지 우리가 요구할 사항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어떻게 부탁하면 종을 아들이 되게 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 백날 해도 어떤 사람은 두 시간 반 했다. 어떤 사람은 세 시간 했다. 어떤 사람은 소나무 뿌리를 뽑았다. 갖가지 이론들, 세칙들이 나와요.
종인데 아들이 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거들이라는 갖가지 유언비어라든지 건강상담 비슷한 이론들이 나옵니다. 해독주스를 마셔서 아들이 되었다든지 온갖 것들이 막 나와요. 다 거짓말입니다.
진짜 아들이 된 사람은 그냥 주께서 아들이 되게 해서 100% 아들이 되었을 뿐이지 내가 거든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자기는 그때 뭐했습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갔죠. 그런데 기대했습니까? 갑자기 주님이 쳐들어오기를 기대했습니까? “주의 때”가 침입한 겁니다. “주의 때”는 완료의 때입니다. “인간의 때”는 미완성이지만 완료가 쳐들어오니까 미완성은 쑥 들어가버린 거에요.
아무것도 하지를 않았는데 이미 구원 받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주께서 어떻게 나를 굴리든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왜? 주의 일이 시작되었으니까, 내가 뭘 해도 주의 일이 되니까 이래서는 됩니다. 안 됩니다. 내 쪽에서 권리를 주장할 입장이 못 되지요.
앞으로 뭘 할지도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이 계획 잡아서 하는 수고가 되는 겁니다.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사노라” 날마다 주께서 일거리를 주시는 대로 살면 되지요. 잠잘 때도 주의 일이고 깨어날 때도 주의 일이고 콩나물 다듬는 것도 주의 일이고..
나중에는 주의 일이 아닌 것이 없지요. 그게 아들이 우리를 자유케 했던 결과물로 우리가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했어요?” “주님이 알아서 했는데요” “주님이 어디 계시는데요?” “내가 변한 것 봐도 모르겠어요?”
주님이 보여줘야 봐서 믿으려고 했던 그게 바로 내 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봐서 믿어지는 것이 안 봐도 믿어지는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 종에서 아들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주님께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은 오직 나밖에 없다는 거에요. 그러고 난 뒤에 그 아들이 종의 사람을 구원해버리면 그 구원 받은 사람이 “죄의 종이었습니다.” 하고 고백을 터뜨리면서 아들의 품속으로 다 뛰쳐오는 거지요.
“나 저사람 보는 것이 옛날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해서 구원 받았다는 저 모습이 죄인데, 저게 죄의 종인데.. 헌금을 할 때는 종이가 얼마나 빳빳해야 되고 몇 년도 화폐 이상이어야 되고 다리미질은 얼마나 해야 되고.. 그래야 되거든요.
어떤 사람이 자기 남편을 봉양하는데 밑반찬을 천 가지를 해서 암에 걸린 남편을 봉양했어요. 그게 TV에 나왔는데 그 남편이 옛날에 체육 교사였는데 아파서 그만 두고 아내가 돈을 벌어가면서 남편을 봉양했거든요.
그 방송을 보는 순간 ‘나도 남편한테 착실한 아내였다.’는 사람들의 입이 다 들어가 버린 거에요. ‘밑반찬 천 가지를 어떻게 해?’ 멀쩡해도 꼴보기 싫은데 간암까지 걸리면 빨리 이혼소속 밟아가지고 도장 찍고 도망치기 바빠요.
‘계속 너한테 매이기가 내가 너무 억울한 청춘이다.’이래가지고 다 헤어지기 마련이거든요. 아내가 그렇게 안 헤어져도 친정에서 가만히 두지를 않아요. “야야, 아직까지 같이 사나? 빨리 헤어져라. 밥 먹는 것은 내가 먹여줄게. 결혼했다고 안 헤어지는 법 없다. 내가 있잖아.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그 나이에 너 활동할 수 있다. 한 남자한테 매여가지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니가 무슨 순정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빨리 빠져나와라. 그 지옥 같은 데서. 내가 먹여살려 줄게.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줄까? 요새 총각도 많은데 애 있어도 괜찮아. 애기 셋 데리고 시집갔다더라.”
순종이 소용이 없어요. 도대체 착한 사람의 기준 자체가 도토리 기재기해가지고 결정이 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무리 착해도 더 착한 사람이 등장해버리면 나는 거기에서 “졌다.” 하고 물러가야 돼요.
여러분 동계 올림픽 할 때에 스피드 스케이팅 보세요. 잘 못 뛰는 사람들이 처음에 뛰지요. 그러면 순위가 나옵니다. ‘37초 2’ 하면서 1등이 돼요. 그러면 다 알지요. 그 다음에 점점 더 물러가서 15등까지 내려가고 마지막 남은 조가 1, 2등을 결정해버려요.
마지막에 오신 때가 “주님의 때”에요. 최후에 남은 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앞에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어디서 그 앞에서 의인인 척을 하려고 해요? 죄 속에 있으면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모든 이들은 아들로 마감이 되고 아들과 우리 사이에는 성령이 와서 그냥 주는 법이에요. 손을 내민다고 받는 법이 아니고 재롱을 부린다고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해야 되기에, 아버지하고 약속이 된 바가 있기 때문에, 창세 전에 예정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쳐들어 와서 구원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요?” 할 필요가 없어요. 저 사람이 예정되지 않았으면 그냥 놔두고 가는 거에요. 자기가 걱정하면 안 돼요. 괜히 순정파도 아니면서 구원 받기 미안해가지고 남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 하세요.
우리만 구원 받으면 돼요. 남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이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기주의인가? 그렇다. 주님이 이기주의구나. 우리는 주님이 매몰차게 한다고 해서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구원은 당황스러워야 됩니다. 너무 놀래서 당황스러워야 돼요. ‘이럴 줄 몰랐습니다.’가 되어야 돼요. 그것도 매일같이 그래야 돼요. ‘세상에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이번 주는 내가 죽었지 싶으다. 벌 받지 싶으다.’ 한 주일 다가도록 벌은 커녕 일만 잘 풀리네..
‘주여 일만 잘 풀립니다.’ “니가 ‘잘 풀렸다 못 풀렸다.’ 하는 것은 어느 기준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옛날에 죄의 종이었을 때 그 버릇이 남아있구나. 나는 니가 잘 하고 못 하고 관계없이 나는 예수님한테 얘기했지 니가 잘 하고 까불고 있는 그런 것 보지도 않아.‘
그러면 우리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스럽지요. 나 혼자 뒷짐졌구나. 나 혼자 고민하다가 나 혼자 절망하다가 나 혼자 좋았다가, 좋은 정도가 아니라 좋았다가 웃었다가 자기 혼자 발작을 일으킨 거에요.
주께서 아예 보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보고 있는 양 여겼던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관찰하는 것은 죄를 더 짓게 하기(끄집어 내기) 위한 관찰밖에 없어요. 왜?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우리를 통해서 아들을 귀한 아들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더 착하다고 쓰레기가 덜 쓰레기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봅시다.
39~40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냥 주께서 혈통을 주장한다고 하면 되는데 더 알기 쉽게 말해서 그들은 아브라함을 오해했어요.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브라함아 당신만 순종할 줄 압니까? 우리도 순종할 줄 압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우리는 한 패 먹었습니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너희들이 생각한 것처럼 순종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아브라함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지 아브라함이 아니죠. 아브라함은 그들의 행위의 모델 케이스가 아니라 죄인인데 구원 받은 모델 케이스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은헤 주시는 당사자가 지금 유대인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결부를 시키려면 아브라함을 제대로 알고 결부시켜야 되는데 잘못된 아브라함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해야 돼요?
아브라함의 죄인된 그 자리로 그들을 데리고 가야 되겠지요. 그렇죠? 그 자리는 ‘행함’의 자리입니다.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가 뭐냐?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인간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행위가 되고 그 행위가 예수님을 죽인 것으로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게 목표다.’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했던 아브라함하고는 상관이 없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냐?
아브라함은 행위로써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의 아브라함다운 행위를 부여하신 거에요. 아브라함 때도 이미 주님이 주님의 이름으로 관여를 해서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렇게 행동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관여를 해서 아브라함이 이런 행동을 하게 하셨다가 되야 되죠.
또 주체가 나오는 겁니다. 행위의 주체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함께 동행하신 주님을 소개했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없이 직접 하나님을 상대하려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말했듯이 우리가 그런 유대인의 자리에 함께 있어야 돼요.
우리의 옛사람의 습관이 뭐냐? 주님의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에요. 배우자끼리 부부사이에 남편이 잔소리를 하거나 아내가 잔소리를 할 때 우리는 모른 척을 합니까 지키려고 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모른 척하는 게 쉬워요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게 쉽습니까 어느 쪽이 쉽습니까
나름대로 성의를 표하지요. 그래야 나중에 뭐라고 했을 때에 당당할 수가 있잖아요. 그 당당함,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도 우리 행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이스마엘 낳았다고 당당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아브라함을 우습게 만들지요.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 이것은 자기의 모든 꿈을 무산시켜 버리는 겁니다.
바칠 때 아브라함은 알죠. 내가 복의 근원이 아니라 내 아들이 복의 근원인 것을 내가 착각했다. 다른 말로 해서 내가 복의 근원이 아니고 복의 근원은 내 속에 들어있는 것을 마치 나로서 마감되는 줄로 알았지요.
내 아들이 복의 근원이고 그 아들대에 가서도 마찬가지에요. 그 아들의 속의 아들이 복의 근원의 마감이고 그게 마감인 줄로 알았더니만 그 아들의 아들이 마감이고 결국 모든 복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따라서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 되죠.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 분이 오셨는데 그들은 그동안 주님 없이 하나님을 안다고 치면서 막 상대하면서 이렇게 결국 주님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제발 나를 좀 죽여라.”는 거에요. 죽여야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안다는 거에요. “너희가 죄 속에서 나를 죽였구나. 그래 나는 죽으러 왔다. 너희 행위로 나를 죽여라. 그런데 너희가 나를 죽이는 그 행위마저도 내 스케줄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반항하는 그것도 우리를 구원하는 스케줄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우리는 구원 받으려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이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늘 화내고 늘 분노하고 주님한테 대들고 삐지고 ‘나 앞으로 한 달 동안 기도 안 해.’라고 하는데 ‘누가 하라고 했나?’ ‘나 헌금 안 해.’ ‘돈만 좋아하면서 억지로 내면서 좋아서 헌금 한 적 있나?’ 없잖아요.
우리는 맨날 나름대로의 투정을 부리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내 잘남의 투쟁을 하죠. 참 가련한 투쟁, 배고픈 일을 하는데 이것을 「헝거 게임」이라고 합니다. 배틀(투쟁)을 하는데 사느냐 죽느냐의 게임은 제가 부탁하는데 제발 그만 두세요.
그리고 내가 나를 죄인으로 자각하는가 안 그러면 나를 잘난, 의미 있는 존재로 자각하는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냐 아니면 나는 소중한 인간이냐 그 게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중요하지 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무능한 자가 되어야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가 유능하게 되면 십자가를 훼방하고 갈라먹습니다. 뭘 해도 우리는 무능의 티를 내라고 그 일을 시킨 겁니다.
카메라 맡긴 것도 무능하라고 맡긴 것이고 강의하는 것도 무능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내가 행한 것으로 한 사람도 구원을 못 받은 것을 깨달으라고.. 네가 협조한 것이 전혀 네 구원에 협조가 되지 않았음을 기쁨으로 감사하라고 우리한테 자꾸 무슨 일들(사태)을 일으키죠.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내가 달려들어야 해결되는 것처럼 하게 하는 이유는 다시 숨겨놓은 우리의 죄를 바깥으로 구체화시키고 노골화시켜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이것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이지요. 그 다음에 봅시다. 41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라고 하였는데 “너희 아비”는 누구냐 하면 44절에 “마귀(악마)”다 이 말이죠. 자,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악마”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로다”(41절)라고 했지요. 그러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아들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이미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확정되어 있지요.
아버지는 “여호와”고, 아들은 “이스라엘”이고.. 더 뚫고 들어갈 빈 틈이 없어요. 확정되어 있는 교리이고 신학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고 하니까 그게 죄가 된다”고 하셨고 그러니까 그들이 “왜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그게 죄냐?”
“내 아버지만이 아버지인데 내가 알기로는 내 아버지하고 네 아버지하고 다르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같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면 생각이 같아야 되는데 생각이 다르니까 아니, 생각이 다른 정도가 아니고 반대지요.
그러면 너희가 만든 아버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를 반대하는 아버지니까 결국 마귀지요. 그러니까 마귀가 그런 논리로 증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논리로 하면 “악마가 하나님”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악마가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악마”의 자리에다가 “하나님”을 넣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얘기하십니다. “누가 그렇게 얘기하던고?” “내가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악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악마”고 예수님이 믿는 아버지만 “진짜 하나님”이고.. 따라서 내가 직접 하나님을 상대하면 안 되고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하되 그냥 예수님을 경유하면 안 되고 “내가 죽인 예수님”을 경유해야 됩니다.
내 근원적인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을 경유할 때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하나님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면서 “바로 내가 저기 있습니다.” 하면서 손들고 나갈 수가 있겠지요.
오늘 제목은 이렇게 정했습니다. “아버지”. 간단합니다. “참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그냥 “아버지”라고 하면 보는 사람 중에 하나는 “마귀”가 “아버지” 하든지 그것은 알아서 하시고 오늘 강의 제목은 “아버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기에 비로소 이제 부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만이 성령 받은 사람이오니 이제는 죄인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성령 받은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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