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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1203 혜화동특강b-언약의 흐름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20151203 혜화동특강b-언약의 흐름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51203 혜화동특강b-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의 제목은 전쟁.

첫 번째 쉬는 시간에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을 이야기했지요. 성신은 언약을 따라서 언약이 나아가는 방향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기능을 보여주는 데 그 기능은 어떤 한 점을 수렴한다고 했지요. 언약이 완성되는 수렴하는 지점을 향하여 성신도 따라가서 성신의 기능도 수렴되고 있습니다. 그 기능은 모든 피조세계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완성하는 그쪽으로 몰고 가죠. 동물, 식물, 하늘의 별, 달, 모조리 다 성신께서 그쪽으로 몰아세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하늘이 캄캄해졌지요.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모든 자연세계를 쥐고 계신 성신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한 공동 작업에 나서신 거예요. 물론 마귀도 거기에 포함됐고, 마귀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가룟 유다도 그렇게 한 것도 그렇죠..

성신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모든 인류를 구원함이 아니고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언약이란 주니의 속성, 공의로움이 공의답게 드러나고 긍휼은 긍휼답게 일어나기 위해서 인류는 두 패로 나눠져야 됩니다. 긍휼 입은 자와 하나님 공의에 의해서 심판받을 자로 분류되고 그런 것이 발생돼야 될 작업에 성신께서 관여하셔서 한쪽으로 수렴한다는 것, 예수 십자가를 향하여 모아지는 거죠.

그래서 가장 하나님의 비밀은 뭐냐? 정말 어떤 인간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깊은 곳이라 했거든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십자가 외에는 깊은 곳이 없어요. 깊은 곳을 성령이 알려줬다는 말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도 바로 그것을 가리데 전력을 다하지요.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세상 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 하는 목적이 있어요.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이미 알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몰라도 인간을 통제하는 악마는 알고 있어요. 십자가 복음만 어쨌든 가려보자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지도자, 대통령, 국회의원, 재벌 등 이 사람들이 하는 모든 활동은 어쨌든 간에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도록 그걸 가로막는 데 있지요. 모든 철학과 과학을 총동원해서 여기에 집중합니다. 여기는 교회 그리고 교회권력, 기독교 모든 역사가 오직 복음을 가리는데 악마에 의해서 동원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으로 교도소에서도 구원받는데 그게 싫은 거예요. 교회를 잘 되게 하려고 복음을 포기해야 된다는 쪽으로 세상을 흘러가고 있습니다. 몇 명 모였니, 헌금은 얼마냐는 그 자체가 십자가 복음과는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의 관심사, 목사님 교회 몇 명 모여요? 두 명 모입니다. 아이고, 망했네. 저도 알아요. 처음부터 망했어요. 뭘 전하는지 묻는 게 아니고 결과를 보자는 거예요. 실적을 보자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 뜻이라면 많이 모일 것이고 아니라면 적게 모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인식이 십자가 복음과 인식을 유포시키고 확산시키는 겁니다. 바로 그 전쟁을 말합니다. 뭔가 처음부터 그 전쟁이 있었지요. 교재를 봅시다. 전쟁을 벌이시는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이죠. 전쟁을 벌일 때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이 언약이죠. 언약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은 하나님 쪽이고, 어쨌든 간에 언약을 가로막겠다는 것은 악마고. 그러나 악마고 하나님이고 둘 다 인간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실재라 해요. 보이는 것은 상징. 인간이 보는 모든 것은 상징이거든요. 지난 우리교회 참석하셨으니까 아시겠지만 떡과 잔, 보통 교회에서 이걸 상징이라 하잖아요. 제가 거기에 추가했죠. 떡과 잔을 먹는 인간도 상징이라 했죠. 설교 핵심은 그거에요. 떡과 잔을 먹는다는 인간도 상징에 해당돼요. 상징은 실체가 있지만 실재는 아니다. 진실은 아니다. 허구란 말이죠. 보통 허구는 실체가 없는 걸 말하잖아요. 유령 같은 것. 그런데 실체를 가지고 있는 허구.

실체가 있는데 과학입장에서는 사모님은 과학을 하시니까, 인간의 몸이 허구가 아니죠. 실제로 수술하고 관절 고치고 류마치스 치료하고 허구가 아니잖아요. 실제로 손으로 만지잖아요. 만지다보니까 실체가 있으니까 허구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성경은 그 전체를 상징으로 봐버리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성경해석 실패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이스라엘을 상징으로 보지 않고 실체가 있으니까 실재로 본 거예요. 다른 나라는 없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빼놓고 준비된 나라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실재고 예수 안에 이스라엘을 숨겨놓았지요. 숨겨놓은 이스라엘이 있으면 역사 속의 이스라엘의 실체는 허구가 되는 겁니다. 허구기 때문에 허구적 기능을 발휘해왔잖아요. 허구적 기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반대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 기능을 한 겁니다.

특히 허구에서 사람들이 상징이라 해도 안 믿는 이유가, 여기서 죽음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죽으면 죽으리라. 이걸 흉내는 낼 수 있어요. 그걸 미메시스라 하는데 플라톤은 이원 세상이 실재 세계 따로 있고 이 땅을 가상 세계, 흉내 내는 세계로 봤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흉내 내기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막상 본인이 죽는다면 이건 장난이 아니잖아요. 아는 지식이 내 죽음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너무나 실감나는 거예요. 아이, 죽으면 죽지. 그러기는 쉬어요. 배고플 때 먹을 게 있는데도 안 먹는다. 그건 어떤 인간도 못 이깁니다.

죽음을 기피하고 싶은 심정, 이걸 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만이 실제가 되지요. 과학이든 철학이든 결국 죽기가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볼까, 하는 아이디어들이 모든 실용적 철학이고 모든 과학이고 사실은 종교도 그렇고. 죽기 무서워서 지옥 가는 게 두려워서 그렇게 하잖아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이 자기는 실재라는 겁니다. 그러나 실재는 따로 있지요. 모든 게 상징이 돼버립니다. 상징이 될 때 결국 인간들은 이스라엘이 생각한 것처럼 여기 이스라엘 역사가 있다. 그것만이 진리요, 실재라고 했는데 그게 오류가 있을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는 그때뿐만 아니고 처음 아브라함이 소명 받을 때부터 시작되었어요.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이 부를 때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했지요. 어디로 가는지 네가 알 바가 아니라는 거죠. 그럼 어디로 가는지 그곳이 실재가 되고, 내가 있는 곳에서 주께서 이끄시는 그곳을 모르게 되면 결국 이곳이 상징이 돼버립니다. 아브라함이 살아가는 몸, 자기 발걸음, 발자국 소리, 모든 것이 상징이 돼버리죠. 실재가 아니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이 상징이면서도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부르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끌어주심으로 인하여 허구라도 좋은 거예요. 왜냐하면 언젠가 허구가 끝날 때가 있기 때문에. 그게 아브라함을 부르신 소명이거든요. 가면서 아무것도 그냥 가는 게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실재 세계가 손에 만져지잖아요. 그 중에 하나가 네 아들 바치라는 것, 내가 지시한 곳에 가서 네 아들을 바쳐라.

그러면 아들이 실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치는 행위,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아브라함은 행위로 말미암아 자기 믿음을 기능적으로 표현한 게 됩니다. 그 행위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고 행위의 목표를 본인이 정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예상도 못한 목표를 정해놓고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벌어지는 그런 사건 자체가 주께서는 행함으로 규정해버리죠. 그런 낯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행함이란 게 특별한 행함이 아니고 복분자 마시고 커피 마시는 것도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되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복분자 마시지만 본인은 주께서 허락하신 은혜로 마시면 모든 게 은혜가 되니까 그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는 행위와 동일한 맥락의 행위가 돼버리죠.

그래서 아까 4장 마귀 이야기했고, 마귀가 설치는 것은 복음이고,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보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여기 두 가지가 있지요. 육으로 해석하는 것과 영으로 해석하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나오거든요. 모세가 수건 쓴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거기에 영광이야기 나오지요. 처음에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가, 육으로 해석하는 것과 영의 해석이 실제적으로 기능적으로 수건을 써야 될 정도로 인간이 육이 감당 못할 현실을 유발하는 겁니다. 해석이, 해석이 아니고 새로운 낯선 현실의 등장이 해석이 된단 말이죠. 해석의 결과가 낯선 현실이 도래한 거예요. 그렇다면 그 해석은 하나님이 유발한 해석이고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오셔서 성령으로 역사한 이것이 주님의 영의 해석의 도달지점이다.

우리가 앉아서 기도하면서 해석한 게 영의 해석이 아니고 평소에 차 마시는 게 영의 해석이란 그런 뜻이에요. 눈부시지도 않은데? 예수님 당시는 낮아지신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눈부시지 않아요. 이것 하면서 눈부셔서 먹습니까? 그래서 간증집회가 위험한 거예요. 별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별을 보면서도 인자하심을 느끼는 것이 주의 영광인데 맨날 보는 별인데 뭐 별 것 있는가? 별 것 없어요. 하지만 별 것 있게 보는 것이 주의 영이 그렇게 함께 하게 되면 그 인자하심을 뽑아낼 수 있다 이 말이에요.

평소 살아가는 것,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 이게 웬 떡이냐고 느끼는 것, 작은 것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들풀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자기 자신의 죄를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아는 것, 이게 바로 오늘날 소자, 그리스도에 속한 소자들의 무심코 한 행동 속에서 주님이 나타난 겁니다. 제가 언제 주님께서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습니까? 배고플 때 언제 먹을 걸 주었습니까? 저는 돈 벌이만 할 뿐인데 언제 했습니까? 그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러한 기능적으로 이미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아시겠지요. 상징을 실재로 보는 패와 어차피 상징에 불과하다는 패와의 싸움이지요. 그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제 교재 봅시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의 주체는 인간이고 회복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여기서 회복이라 했는데 회복이란 말을 제가 안 좋아해요. 통일교에서나 또는 워치만니 쪽에서 많이 사용하고 기존 교회도 많이 사용하고. 심지어 <회복>이란 영화도 있고 회복 교회도 있어서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 다른 말로 갱신이라 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아니지요. 왜냐하면 에덴동산은 상징이니까.

[신의 나라를 그 나라에 건설하고자 하신다. 인간나라는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면 전쟁을 하잖아요. 전쟁의 원칙은 언약이죠. 언약을 벌이시는 거예요. 인간들은 상대할 대상이 없지요. 인간은 서로 협력하지 싸우는 것이 주 활동이 아닙니다. 인간은 혼자 못 살아요. 외로워서 못 살고 자연에 대응하기 힘들어요. 짐승이라든지 그런 것과 싸우기 위해서는 협력해야 되고 다른 민족과 싸우기 위해서는 성을 쌓아야 되고. 가인이 도시 만들고 성을 쌓았잖아요. 비록 외부와는 싸웠지만 안에서는 단합하잖아요. 협조하고 협력하고.

전쟁은 누구 아이디어냐? 일방적인 하나님 의견이에요. 창세기 3장 15절에 나와 있지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라고 나오잖아요. 내가 너로 할 때 ‘너’가 뱀이죠. 뱀은 아까 상징이라 했잖아요. 상징 자체가 허구고 상징이 허구니까 허구가 의미를 가지려면 숨어있는 실재와 관련성이 있어야 의미가 있지요. 허구와 상징 되려면 실재와 연결돼야 되지요. 뱀은 실제 하는 악마의 상징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그냥 뱀으로 볼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상징 세계가 언어 세계거든요. 인간의 언어는 실재 세계를 담을 수 없어요. 상징 세계만 담을 뿐입니다. 상징 세계는 그 자체가 의미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차이와 차이가 날 뿐이지.

이것과 이것이 다르다는 것에서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의미만 나올 뿐이지 고정된 의미는 없어요. 여기 만약에 사과가 있다면, 사과가 왜 사과냐? ㅅ, ㅏ, ㄱ, ㅗ, ㅏ 대해서 답변이 없어요. 바나나 아닌 사과, 이렇게 돼요. 이것도 바나나, 이것도 바나나 하면 바나나와 모양새가 다른데 혼동이 되잖아요. 바나나가 있는 이상 사과로 해야 구분이 되잖아요. 네가 왜 남자냐? 여자 아니기 때문에. 너 왜 여잔데? 남자 아니기 때문에. 개는 왜 개냐? 송아지 아니거든. 송아지는? 개 아니거든.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의 고유성과 합치된 내용이 아니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아담이란 이름은 하나님과 인간이 차이지게 하려고 만든 이름이죠.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이 지은 이름이죠. 그런데 아담은 죄 지었을 때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아담 이름이 뭡니까? 먼지, 흙이었잖아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아담의 의미가 뭐냐? 아담 의미를 아담도 몰랐어요. 그러나 준비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서는 이래서 아담이었구나.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된다. 말씀이 말씀대로 영원하기 위해서.

이사야 40장 6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아아, 재미있어요. 풀은 시들고 꽃이 마르는 것은 자생적인 힘이 아니라는 겁니다. 힘이 빠져서 죽어야 되겠다.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호와의 기운이 됐어, 그만 살아.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세포 끝에 텔레미아란 요소가 있어서 텔레미아가 짧아지면서 인간이 죽는다는 겁니다. 과학에서. 왜 짧아지는데? 이유는 몰라요. 그냥 짧아진데요. 그러나 과학은 여호와와 관련짓지 못하죠.

그 다음에 읽어보세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자체가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실재와 연관된 상징으로 풀과 꽃이 있는 겁니다. 실재 세계는 죽게 함으로써 진짜 죽음이 없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창조세계를 죽게 만드는 겁니다. 그 중에 죽게 하는 중에 하나가 인간이 포함돼있습니다.

인간은 죽어야 돼요. 왜?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는데 지가 뭔데 안 죽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산다면 우리도 사는 거죠. 그걸 성도라 합니다. 주님 죽을 때 같이 죽고, 주님 살 때 같이 살라. 로마서 6장. 그게 성도입니다. 그게 진짜 인간이에요. 그리스도가 실재와 연관된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 목사님 말은 그럴싸한데 그게 실제입니까, 현실입니까? 예수님 죽은 게 진짜입니까? 진짜입니다. 그럼 사흘 만에 부활한 게 진짜입니까? 진짜입니다. 십자가, 부활을 언약 말고 인간적인 이성으로 과학과 철학으로 해명할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해야 십자가를 알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십자가를 이해 못합니다. 이해 못하기 때문에 숨겨진 복음이고 비밀이 되고. 교회가 아무리 크고 융성해도 십자가를 대체할 수 없어요.

오만 명 모여도 구원 요소는 그 교회에 없어요. 구원되지도 않는데 모인 겁니다. 오만 명이 다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정말 오만 명 중에서 한 사람이라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만 명이란 교회 자체에 의미 두지 않아요. 거기에 다니더라도. 십자가가 구원하지 오만 명 교회가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람만 알고 그 교회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교회가 없어진다고 해도 아쉬워하지 않지요. 주님은 영원하기 때문에 교회는 당연히 없어져야 되지요. 그게 일곱 교회입니다. 없어지라고 만든 게 교회가 일곱 교회에요. 상징이니까. 없어져야 될 것을 왜 그렇게 붙들고 실적 논하고 어느 교회가 크냐, 잘 됐느냐, 목회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고 논하고 있으니까 그 자체가 바로 십자가 복음을 가리기 위한 배후에 보이지 않는 실재 악마의 모습이고 그것과 싸워야 될 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다. 전쟁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뱀의 후손이 등장하면서 같이 등장해야 돼요. 여자의 후손만 달랑 등장하는 법은 없고 진짜 여자의 후손이 누구냐는 것은 뱀의 후손이 등장하는 그 현장에 같이 나타납니다. 아벨이 훌륭하다, 어떻게 아느냐? 가인과 더불어 나타나기 때문에. 가인과 짝이 된 아벨이지 그냥 가인 없는 아벨은 의미 없습니다. 같이 등장해서 가인은 아벨을 쳐죽어야 돼요. 그리고 아벨은 죽어줘야 돼요. 맞아 죽을 뻔해서는 안 돼요. 죽어야 돼요. 참 신자로서는 안타깝지만 죽어줘야 돼요. 그래서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 아벨의 죽음은 약속된 죽음.

아벨의 죽음은 하나의 노선을 형성합니다. 역사란 말을 안 하고 노선이라고 해요. 노선을 형성한다는 말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란 약속을 역사 속에 구체화하려면 서로 대립된 두 개의 노선이 등장해야 돼요. 그 노선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노선과 성령의 노선 두 개의 노선이 나와요.

특히 노선이 마지막에 가면 천국과 지옥으로 완전히 확정되거든요. 마태복음 13장에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이야기하면서 확정됩니다. 가라지와 알곡으로 확정되듯이 처음부터 구약에서 두 개의 노선이 나옵니다. 두 개의 노선이 가만있느냐?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원칙이 언약이죠. 언약은 전쟁을 유발시킨다. 어떤 전쟁? 상징을 앞세운 실재의 전쟁.

그런데 악마는 스스로 자기 정체를 감추어 버리거든요. 악마 없다가 악마의 전형적인 방법이에요. 오직 있는 것은 너밖에 없다고 이야기해줌으로서 악마는 있으면서도 눈에 띠지 않도록 빠지잖아요. 결국 인간밖에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모든 역사는 인간하기 나름이다.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죠.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놓는 모든 초월적인 개념들, 귀신이나 신이라는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으로 이건 상징이라 하지 않고 상상이라 합니다. 상상, 상징, 실재, 세 가지죠. 인간은 어떻게 상상하느냐? 플라톤 같은 게 대표적이죠. 이 땅에 허무한 인생이 끝나면 진짜 원형이 있다. 플라톤은 복음이 아니고 상상의 세계입니다. 상상의 세계는 언제 하느냐 하면, 배부를 때 살만 할 때 상상 하게 돼요. 상상의 동력이 있어요. 상상 되는 동기는 자아실현입니다. 내가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지. 사람이 밥 먹고 살만 하면 이걸 해요.

교회도 좀 여유 있는 사람은 상상합니다. 천국 가면 상급 받겠지. 자아실현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돈 한 푼 없다, 몸 아파서 어느 병원에서도 커트 당해서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할 때는 살려주세요, 하지요. 그때는 상상이 아니고 전체가 자아실현이고 뭐고 몸만 산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요. 여유가 없으니까. 돈 없지요, 몸 아프지요. 그럼 끝난 것 아닙니까. 자기는 더욱 더 이게 현실이라고 실감 나지요. 이제는 부처든 뭐든 관계없어요. 이단이든 삼단이든 신천지든 뭐든 내 몸만 낫게 하고 옛날 잃어버린 돈만 다시 나한테 굴러들어오면 그때처럼 살 수 있다면 살아있는 신으로 동의하겠다.

이 상상의 단계를 주님이 베드로 찾아올 때 이미 했어요. 고기가 안 잡혀. 베드로 밤새해도 고기가 안 잡히거든요. 일부러 주님께서 고기를 철수시킨 거예요. 베드로 자리가 기본적인 생존의 자리라는 거예요. 이런 입장에서는 눈에 띠는 구체적인 그것이 기적이 되죠. 신의 기적을 자기의 노림수, 자기의 상상과 결부되는 겁니다. 구약 자체가 그래요. 풍랑이 일었다. 누가 대신 제물로 바치면 바다가 잔잔해질 텐데, 할 때 요나가 뛰어드니까 바다가 잔잔해졌지요.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신의 있음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맞춰준 겁니다. 그러면 요나 빼놓고 그들은 천국 갔습니까? 아니에요.

문둥병자가 열 명 있었잖아요. 그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자기 문둥병을 낫게 해주시면 메시아라고 생각한 거예요.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그 열 명 다 낫게 했지요. 구원받은 사람은 몇 명입니까? 한 명이지요. 그 한 명과 아홉 명의 차이점이 뭘까요? 자기가 생각한 상상의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생각했던 그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거든요. 상상의 하나님은 실재가 누굽니까? 본인이에요. 다시 말해서 자기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돌아온 문둥병자는 자신이 누구 앞에서 죄인인 걸 안 거예요. 그러면 나의 세계는 죄의 세계고 나를 죄 되게 하신 그분 세계가 실재 세계잖아요. 그래서 그 이방인은 예수님 앞에 돌아온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주께 돌아오라고 살아가는 거예요. 탕자의 경로지요. 목사님 미국에서 사는 것, 내가 한국에 사는 것도 탕자로 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내가 겪는 세계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세계라고 우기고 있어요. 그러니까 상상의 세계지요. nothing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물론 여유 있을 때는 주여, 주여 합니다. 그런데 사기 당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 내가 급해. 급하다보니까 내가 최고라는 것이 실감 나요. 뭐니뭐니해도 나는 살고 봐야 돼. 헬프 미, 주여, 저를 살려주세요.

-상상의 세계에서 끄집어내서 실재를 보게 하시는

그렇지요. 그런데 상상의 세계에서 상징의 세계로 가는 자체가 그게 전부라고 본 거죠. 상징이란 자체는 실재를 염두에 둔 경우고 실재를 모를 때는 이 세계가 전부라고 보는 거예요.

십자가는 뭐냐? 상상의 세계, 또는 상징의 세계에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메시아의 죽음 사건, 하나님의 자기 죽음 사건을 집어넣는 게 복음이에요. 구름 타고 오는 줄 알았어요. 이것은 다니엘에 나왔고 다니엘 보면서 상상합니다. 주께서 멋지게 구름 타고 올 것이라고. 그런데 구름은커녕 구름 타고 온다고 여긴 유대 민족에서 죽임을 당하신 분. 베드로도 못 알아봤지요. 주께서 구름 타고 올 줄 알았지 맥없이 체포돼 자기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을 줄 상상도 못한 거예요. 저 사람을 아느냐 하니까 난 모른다. 저 사람과 관계없다. 난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했잖아요. 그게 베드로의 한계인 동시에 모든 인간의 한계지요. 그동안 주님을 어떻게 알았는가? 같이 있으면서 상상으로 안 거예요.

그러나 막상 자기가 궁지에 몰리니까 난 살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마귀가 통제한 것, 악마가 통제한 게 그거에요. 일종에 헝거게임을 한 거죠. 거기서 자유로운 것이 있어요. 닭이었습니다. 닭 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것처럼 이 시대성 자체를 닭이 욺으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생각한 현실이 사실은 주의 예언 안에 포함된 세상인 사실을 알았지요. 네다 닭 울기 전에 날 세 번 부인하리라 할 때 닭 우는 것까지 이미 관할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그 바깥에 주님의 세계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배신하는 것도 주님의 의도한 바였지요. 오지 말라고. 네 식으로 네 행함으로 올 수 없는 세계에 간다는.

내가 스스로 발걸음으로 갈 수 없는 세계가 내 안에 박혀있을 때 우리는 그 세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가 나를 소유하게 되는 겁니다. 품게 되지요. 그럼 나의 모든 생애가 그분의 소유가 돼버리죠. 그걸 통해서 나는 이 땅의 전쟁에 상징물로서 주님의 앞잡이가 되어서 사는 겁니다.

앞잡이 중에 하나가 노아입니다. 아까 아벨 이야기했지요. 이제 노아입니다. 노아의 특징이 동행이란 게 있어요. 제가 강의하면서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강의할 것을 염두에 두고 강의하고 있습니다. 교인들과 성경을 찾아보면서 해야 되니까. 창세기 5장 21절, “에녹이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에녹이 동행했는데 앞에 있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 앞에서는 죽었다, 죽었다고 했는데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서 죽음 보지 않고 데려간 게 되지요. 그럼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그런 현상이 있다면 장차 신약 때 주님이 와서 성령이 와서 동행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없다는 게 되지요. 숨 끊어져 죽더라도 그건 죽음이 아니고 그냥 쉬는 것, 죽더라도 동행이 이어지죠. 죽었다고 동행이 끊어진 게 아니죠.

그렇다면 성도는 이 땅에서 숨 쉬고 사는 게 중요합니까, 동행합니까? 동행이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동행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밥 빌어먹고 사느냐가 우선이 되겠지요. 교인들이 교회 온다는 말은 하나님 덕분으로 밥 빌어먹기 위함이지 동행하고 싶어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동행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하느냐 하면, 밥 빌어먹는 것을 포기해야 되지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동행이란 사실을 눈치 채야 되겠지요. 그 말은 죽어도 좋아요, 돼야 돼요.

자살하란 말이 아니고.

그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요. 구원이 목적이 아니에요. 동행을 하게 되면 주께서 전쟁할 때 필요한 상징적인 결과물을 그 사람을 통해서 내놓게 되는 겁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노아지요. 노아가 구원받은 게 문제가 아니고 뭘 했다는 언약적 기능을 했어요. 창세기 6장 17절에 보면,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당에 있는 자는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여기 창세기 6장 8절부터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동행한 바깥은 어둡지요. 17절에 보면, 천하가 멸절돼야 되지요. 세상이 멸절당해야 된다는 사실을 동행한 자의 눈에만 그것이 실제로 현실로 인식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미련 가질 필요가 없지요. 동행하게 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고 주님을 직접 만난 이사야가 왕이 갖고 있는 보물이 부럽다고 하겠어요? 안 하지요. 지금 동행이 중요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별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 모습이 언약의 모습인 거예요. 그게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 함입니다. 예수는 자유인이란 책 제목이 있어요.

첫 번째, 두 가지 세계를 다 알면서 소속은 천상에 속하면서 그 다음에 세 번째, 지상에 사는 사람. 천상에 속해서 팔짱 끼고 보는 게 아니고 진흙구덩이 같은 세상에 들어와서 힘든 인생을 사는 겁니다. 소속은 천국인데 활동지역은 지옥이에요. 이게 언약에 속한 사람들, 이 세상에서 발을 뺄 수 없습니다. 기도원에서 기도만 할 문제가 아니에요. 기도원에 가지 마시고 시장 통에서 장사해야 돼요. 생업에 종사해야 돼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일해라. 돈 번다는 뜻이 아니고 돈 번다는 것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가 돈에 집착하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동행해주시는 은혜를 알라. 우리가 돈의 유혹에서 못 벗어나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절감하면서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해서 대신 죽으심을 그 현장에서 실감하는 거죠. 그게 언약이기 때문에.

뱀과 전쟁하는 과정에 주님은 늘 우리와 전쟁합니다. 우리와의 전쟁에서 주님이 우리를 이길 때 그게 뱀하고 마귀한테 이기는 셈이 돼요. 내가 늘 주님한테 질 때 우리는 주님의 군사가 됩니다. 내가 주의 힘 받아서 내가 나서서 칼질하는 게 주의 군사가 아니고 내가 주님에게 져서 포로가 되는 거예요. 포로가 되고 종이 되고 앞잡이 되는 겁니다. 날마다 주님은 이기고 날마다 패배자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이름 바꿔서 조 다윗 이러고 있는데 이름을 지으려면 조 패배자, 이런 것. 김 포로, 이 앞잡이.

노아는 안식이거든요. 안식이란 기능에 포로가 된 자가 노아지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고 언약적 이름이고. 그 이름과 평소 생활은 합치되지 않고 합치되지 않지만 합치되게 하시는 것이 동행의 의미니까 기어이 노아를 주님의 군사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어느 수준에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만드는 과정도 이미 군사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1등급 신자냐, 2등급 신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뭘 하든지 간에 바깥의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기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따로 독자적으로 5등급, 6등급, 1등급을 따지면 안 돼요.

그래서 노아가 재미있는 것은 노아가 구원받고 난 뒤에 술 먹고 정신도 못 차렸다는 사실. 자기 처신도 제대로 못하는 존재를 통해서 주의 은혜를 안 사람은 야벳과 셈이고, 그것을 놀렸던 사람은 함과 가나안이고. 노아언약을 이해 못한 거지요. 동행의 의미를 모른다. 합리적인 인간에게 접촉하고 있는 거죠.

노아가 전쟁에서 뭘 했느냐 하면, 노아의 전쟁은 자기 빼놓고 자기 식구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그 시대 모든 사람과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 무기는 바로 방주였습니다. 방주는 아무 쓸모가 없어요. 비실용적이죠. 전혀 유용하지 않아요. 어데 쓰는 물건인고? 전혀 적합한 데가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사고방식을 전적으로 모두 부정할 때는 누가 봐도 불필요한 것을 만들어서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어요. 누구에게도 인기 없는 물건, 방주입니다. 그 방주를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노아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혜화동에 있다면 예수님도 역시 사람들한테 인기 없어요. 뭔가 자기가 원하는 게 예수님한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저 면은 나한테 필요하다는 걸 예수님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사실은 우리한테 불필요한 인생을 살고 있어요. 특히 성도의 한 평생은. 성도가 보기에 아무 이익이 없는 필요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내 계획대로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는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요’가 아니거든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 필요한 거예요. 그게 동행이죠.

무기가 방주인데 이 무기는 어디에 쓰는 무기냐 하면,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항상 기본은 분리됨, 갈라지게 하는 거죠. 뱀의 후손밖에 없는데 여자의 후손을 뽑아내는 거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갈라진다는 말도 맞지만 정확히 말해서 뱀의 후손들 속에서 여자의 후속을 따로 돌발적인 사건을 통해서 뽑아내는 겁니다. 언약이 오게 되면 언약의 위력, 그 자체의 능력으로 뽑아내게 되죠. 그래서 말씀을 지키면 안 되고 말씀이 스스로 일하고 있음을 고백해야 되지 말씀을 지키면 안 됩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51203 혜화동특강b.hwp (34.0K), Down:19

이상현(IP:24.♡.254.52)

15-12-11 18:54

30년만에 찾아온 혜화동 대학로.

젊음과 낭만과 술과 친구가 스러져 간다.
백발과 현실과 성경과 죄인이 눈 앞에 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과 함께 이 또한 또 다른 허구로 넘기어질 때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가 열린다.

예수님
십자가
복음

세상은 내리는 눈 속에서 바삐 돌아가는데
탕자 둘이 예수 십자가 복음 안에서 막춤을 추며 막살고 있다.

부르신 그대로
상징으로서
허구로서

조금씩 복음의 광채를 맛보면서
그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악마와 싸우고 있다.

예수님의 앞잡이가 되어

내 안에 아간을 잡아내는 싸움을
내가 주님께 져서 죽어지는 싸움을
세상 끝날까지 나와 동행하시며 주님이 벌리시는 싸움을...

언약이 유발시키는 주님의 전쟁이다.

이 전쟁의 구호는 베드로의 선창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근호 목사님, 한윤범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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