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3 혜화동특강a-언약의 흐름
20151203 혜화동특강a-언약의 흐름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51203 혜화동특강a-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성경의 맥락이라는 교재를 가져 왔습니다. 성경의 맥락 가운데서 구약 부분이 무려 14페이지까지 이어집니다. 성경을 볼 때 사람들이 구약을 잘 알지 못한 채 신약을 보기 때문에 신약 해석이 엉터리가 많지요. 그래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제일 큰 관건이 됐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구약에서 신약으로 연결할 때, 유대인들은 보통 구약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으로 끝이에요. 더 이상 선지자는 없기 때문에.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의 모든 것이 신약에 완성이 된다고 하니까 구약을 보는 의견 차이가 완전히 반대가 되겠지요. 하나는 구약자체로 된다고 보고,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은 하나의 질문이고 그 해답은 신약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완료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자체가 미완료라고 생각할 때 유대인 같으면 어째서 완료가 또 새롭게 추가되는지 당연히 의문점이 있을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유대인들의 생각을 일단 이해해야 돼요. 구약성경으로 충분한데 넉넉한데 왜 신약이 필요한가? 그것은 너희들이 구약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약이 필요한 게 아닌지 유대인들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 입장에서는 제가 강의하게 되면, 유대인들의 구약해석을 알 필요가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유대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잖아요. 인간으로서 그들이 구약성경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도 그런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경유하고 거쳐 와야 신약이 새롭게 보여요. 유대인들은 완벽에 완벽을 기해서 구약을 해석했습니다.
그걸 축자적 해석, 더 나아가서 은유적 해석, 비교적 해석, 그 다음에 영적 해석, 이렇게 나오는데, 축자적 해석은 기본적으로 문자 자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은유와 비유는 비슷한데 문자만 보지 말고 다른 구절들이 서로 관련돼있다고 보는 겁니다. 한 구절만 보지 말고 다른 구절과 균형 있게 맞춰야 하나님 뜻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영적 해석이란 것은 그렇게 해석해도 하나님 뜻을 다 알 수 없지만 영적인 신령인 경건한 마음이나 신앙심을 가진 사람에게만 특별히 보여지는 해석이 추가돼야 된다. 그들이 그걸 선지자의 해석이라고 보는 거고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선지자들이 나타났을 때 전에 있던 하나님이 주신 계시나 약속이 있잖아요. 약속을 선지자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살펴보니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 이상의 것이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선지자처럼 해석하면 우리 해석은 정답이라고 감안할 수 있지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영적인 해석을 하게 되면 더 이상 해석은 없지요. 영적인 해석이 그냥 성경해석만 한 게 아니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까지 열어주셨다. 그런 경우에만 영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걸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해석을 하되 그 해석이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해석이 된다고 유대인들은 본 겁니다.
-우리가 본 것과 똑같네요.
똑같지요. 그러니까 경유해야 돼요. 문제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해석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그러면 유대인들이 인간 가운데 제일 똑똑하다고 치고, 예수님도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했으니까, 가장 훌륭하다고 치고 훌륭한 사람이 실수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실수는 당연한 거죠. 결국 유대인이 실패한 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성경해석 실패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인간이 알라고 준 책이 아니고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비밀 된 계시로 다가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의 해석의 한계를 극복하게 된 사람들, 그걸 뚫어버린 사람들이 성령 받은 열두 사도가 되지요. 기존에 인간의 해석의 문제점이 뭔지 그들은 알아요. 그걸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으로는 성경은 해석되지 않는다. 그러면 새사람으로 해석하면 되느냐? 새사람으로는 해석되지요. 그런데 새사람은 옛사람과 연결점이 없어요. 그건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을 그대로 수요한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성경을 문자적 해석, 은유적 해석, 비교적 해석, 영적 해석인데 이것마저 유대인들의 해석은 나중에 역사적으로 반복된다고 해서 역사적 해석으로 완결됩니다. 그런 해석조차도 옛사람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해석이 돼버려요.
-선지자들 해석과 사도들의 해석과는 같습니까?
다르지요. 유대인들이 선지자들 해석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 사도들은 옛사람의 해석으로 본 겁니다.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세례요한이 제일 큰데 천국의 어린아이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했거든요. 세례요한은 선지자 중에 마지막 선지자잖아요. 선지자보다 어린아이 더 해석을 잘한다는 겁니다.
-선지자들도 성신을 받은 사람?
성신 받았지요. 성령을 안 받았다는 거예요.
-성신과 성령의 차이 때문에.
예. 그러니까 사도들은 구약을 미완료로 본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 자체로 완료로 보고. 그들은 그 자체를 완료로 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충족된다고 보고 사도들은 충족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만나고 보니 그 전체가 가짜더라.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유대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지요. 아브라함이 나 보기를 고대했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대목인데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봤다는 해석이 구약에 아무리 봐도 안 나와요. 아브라함이 서른세 살 먹은 목수의 아들을 기다릴 리가 있겠어요? 없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의 이런 해석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유대인들의 해석을 경유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그 전체가 옛사람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사람의 사고방식이 뭐가 문제인지 유대인들은 자체적으로 알 수 없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순수하게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받는다는데 그게 왜 거짓이 되고 왜 오류가 생기는지 말이 안 되거든요. 앞뒤가 안 맞아요. 하나님 말 순종하겠나이다. 순수하게 받는데 그게 오류가 있다는 말이 도저히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예를 들어서 잔 다르크가 1431년 백년전쟁 가운데에 프랑스 사람으로서 프랑스 편에서 영국을 치는데 선봉장에 섰거든요. 그 이유가 계시 받아서 그래요.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겠어요? 잔 다르크는 욕심도 없었고 그냥 받았단 말이죠. 그냥 줘서 그냥 받았는데 거기에 무슨 오류가 있겠어요. 커피 줘서 받았을 뿐인데 네가 오류를 만들었구나, 하면 자기는 납득이 안 되지요. 있는 그대로 받았는데.
이천 년 기독교 성경해석에서 사람들이 이 점을 빠뜨리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 받고 하나님의 계시 받으면 그게 진리인 줄 알고 있어요. 그 자체가 오류인데. 그럼 오류 없이 진짜로 구원받는 방법 없나? 오류 안에 진실이 있어요. 오류임을 인정해야 그 안에 진실이 있어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계시를 준 것은 우리한테 문제 있음을 최초로 알려주기 위해서 준 겁니다. 우리는 그냥 받기만 하면 된다는데 받는 순간 내가 괴물이고 악마의 앞잡이라는 사실을 발각당하는 일의 출발이 되는 겁니다.
엘리야나 예레미야가 계시를 받는 순간 그들은 오실 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지요. 계시 받아서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서 자기가 순수한 것도 아니고 오류 없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다윗 같은 경우에 밧세바와 간음한 것도 신의 계시였습니다. 나중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자기가 바람피운 것을 신의 계시에 합류시킬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그전까지 다윗은 순수하게 살고 있었어요. 왕이니까 모범을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바세바에 대해서 마음이 동해서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은 본인이 의도한 게 아니에요. 인간의 육신이란 육신이 감정을 다스리는 게 아니고 감정이 육신을 가지고 놀지요. 충동이. 인간은 한 마디로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오류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한다면 그건 오류에 오류를 낳지요. 그래서는 안 돼요. 가만있으면 오류를 알려주는데 나서서 나대면 그건 불교고 종교지요. 나 자체에 문제 있다는 것은 누가 지적해서 된 게 아니고 현재 나라고 여기는 그 상황 자체가 나중에 주님 보시기에 그 자체가 문제 있음을 알려주는 자료들을 모으는 겁니다. 이때까지 살아온 게.
그게 궁극적인 게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사람이 왜 죽는가? 죄 값으로 죽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이러면 벌써 오류잖아요. 내가 무슨 나쁜 죄를 지어서 죽습니까, 라고 시작한다면 다시 말해서 내가 죽을 수밖에 죽게 되는 죄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면 오류가 시작된 거예요. 물론 가만있어도 오류지만.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하게 되면 오류가 없는 게 아니고 시킨 대로 하게 되면 오류가 발생되면서 구원이 돼요. 그런데 시킨 대로 한다는 그것을 주님은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의 장점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숨어있는 죄를 들추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요. 선교, 전도, 목회, 설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모 노릇하는 것, 감춰놓은 나도 모르는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그런 환경을 조성해 가시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속 시원하게 다 풀려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한 것은 엄청난 오류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스러워 할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지은 죄가 우리한테 그대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무슨 자랑거리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무슨 죄에 속했느냐? 예수님은 같잖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더 예민해 있어야 되지요. 모든 인간이 죄의 종인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으로써 죄의 종의 모델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 모델이 뭐냐? 바로 메시아를 기다린 그들에 의해서 메시아가 살해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지요. 가까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죄가 더 노골화된다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경우에 그 사람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잖아요. 이미 유대인들의 해석을 다 압니다.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어떤 하자가 없다고 본 거예요. 완벽한 해석이라고 본 겁니다. 아까 제가 해석 이야기했지요. 문자적 해석, 은유적 해석, 비교적 해석, 영적 해석, 그리고 그 해석이 역사적으로 되풀이 되면서 전승되고 구전되고 전달되어 계시를 보조하는 계시로서 활용한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정통한 것이 사도 바울이지요.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건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그냥 예수밖에 없는 거네요. 죄를 깨닫게 한다는 자체도 죄고 다 죄니까
그래서 결론적으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기 증명입니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굴 시험하는 게 아니고 본인이 본인을 시험하는 거죠. 하나님 자체 안에서 이뤄지는 여파가 천지창조죠. 인간은 빠지는 거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죠. 열차 지나가면 바람에 흘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확 지나가니까 인간이 거기서 흔들리고 죽고 죄 짓고 하는 거예요. 인간 역사가. 불바다 되고 마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요. 그 관계가 구체화된 것이 이 세상입니다. 성부와 성자 관계. 그리고 모든 성경 계시는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준 거예요. 그리고 아들이 그 말씀을 홀로 다 이루지요. 물론 성령의 힘으로 이루시고 합니다.
이런 고백이 바로 예수 안에서 이 고백이 나오게 돼있어요. 이런 고백에서 내빼지 말고 이런 진리를 알았다고 단독으로 나가면 안 돼요. 건물 안에 있은 것처럼 예수 안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이런 고백이 나오고 만약에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에 바쁘다고 놓쳐버리면 건물 바깥에서 이 건물에 대해서 설명하게 돼요. 저 건물은 몇 층으로 돼있고. 설명한다는 자체가 유대인들이 한 거예요. 하나님 있고 자기 여기 있고 중간에 하나님께서 계시 내려주시고. 따라서 자긴 여기 있으면서 계시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그게 유대인들의 잘못인 거예요.
그들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을 너무나 인간적인 의미로 해석했지 나중에 언약적 의미로 해석할 줄 몰랐어요.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지만.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열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다녔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함께 있는 게 아닌데. 결국은 예수님 혼자 남고 다 도망가잖아요. 함께 있었던 게 아니에요. 지리적으로 지역적으로 장소적으로 함께 있다고 그게 함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장소적인 함께 있음을 뛰어넘을 재주가 인간에겐 없어요.
유대인들이 하늘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까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게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늘나라는 예수 안에 있다. 그런데 그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듣지요. 나중에 성령 받으면 그게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인식론)은 성령이 처소가 되어 확인해야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 따라가려 했거든요. 목숨 걸고 따라간다 할 때 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 처소가 마련되면 베드로가 거기로 가는 게 아니고 처소가 이동해서 베드로를 넘쳐버립니다. 그 순간부터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전부터 예수 안에 있던 것을 뒤늦게 차후적으로 알게 되지요.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본인 중심이기 때문에 주님과 자신을 떨어져있고 어쨌든 간에 주님을 따라 붙어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중에 성령이 와서 보니까 내가 주님을 붙든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붙든 걸 그제야 아는 거예요. 처음부터 주께서 나를 사랑했다는 걸. 그런데 시간적으로 창세전까지 가요. 창세전부터 베드로가 태어나야 될 것까지 예수 안에서 이미 확정된 사실을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창세전까지 가서 한꺼번에 알게 되지요. 처소적으로 예수 안이란 처소가 시간과 공간을 능가해버립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식할 때는 인간이 태어나서 자기 몸 바깥은 자기 몸이 아니잖아요. 이걸 내 몸이라고 하면 정신병자지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성경책을 쥔다고 해서 성경책을 내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몸이 성경책을 쥐 것이죠. 그래서 놔버리면 성경책과 따로 되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안과 밖은 자기 몸 중심이에요.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있고 바깥에 있으면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몸으로 바뀌면 어디 있어도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겁니다. 몸 안이라는 장소적이 아니고 몸 안에 있는 기능을 말해요. 사도 바울이 로마 가나 지중해 폭풍 속에 있으나 예수 믿기 전에 바리새인으로 있으나 어디 있어도 그리스도 언약 안에서 활동하는 셈이 됩니다.
그게 성경 시편 104편 29절 읽어보세요.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모든 만물이 주께서 호흡 주니까 숨 쉬고 호흡 거두니까 죽고, 참새도 거북이도 기린도 하물며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30절에 보면,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늘 새로운 작용이 이미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이뤄진 겁니다. 유대인이든 북한의 김정은이든 관계없어요. 전부 주님이 호흡을 준 거예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네요? 그게 아니고 언약적으로 활동하거든요. 그러면 북한의 김정은 언약적으로 저주받기 위해서 호흡을 준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기 위해서 지금도 이슬람의 IS라든지 살려두는 겁니다.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인간 보기에는 이 세상이 악이 있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완벽하게 잘 되고 있어요. 눈 오는 것도 그렇고 조금도 실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부 주의 신이 언약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번 강의의 핵심은 ‘언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약속과 언약은 다른데 하여튼 언약적으로 성경을 봐야 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마지막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 새 언약이기 때문에. 새 언약을 다 이룬 겁니다. 그러면 전에 있는 언약은 옛 언약이 되지요. 옛 언약은 옛 사람과 관련되어 있고 새 언약은 새로운 피조물과 관련돼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아니하면 새 언약을 알 수 없어요.
시편 104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 주의 신이 모든 인간을 지금도 통제하고 있습니다. 여기 시편 104편 24절 보게 되면,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나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보세요. 악어가 놀지요. 27절에 보면, 때를 따라 식물 주시잖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것에 주의 신이 관여하죠. 주의 신은 주의 명령을 따르죠.
어떻게 명령을 따르는가?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을 이스라엘에게 준 겁니다.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창조원칙이 있구나. 그 원칙은 언약이 되는 겁니다. 목사님, 그 원칙이 뭡니까? 그건 장차오실 메시아가 보여줘요. 원칙이 있다는 건 아는데 그건 희미하게 알고 다 몰라요. 미완료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언약을 완수하는 당사자로 오해한 겁니다. 우리가 지키면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문제가 있고 오류가 있다는 건 생각 못하고. 우리가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온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잘 활용했어요. 말씀을 순종해서 지키겠다는 것이 바로 숨겨진 악마의 최후의 양상, 주장이 그겁니다.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악마가 부추겨서 선악과 따먹게 했어요. 왜 따먹게 했을까요? 너도 나처럼 되기 위해서. 나처럼 된 것이 뭐냐 하면, 선과 악을 내가 판단 내려서 내가 선한 쪽을 해버리면 구원에 대해서 주의 은혜가 삽입될 여지가 없어요. 내 대신 누가 죽어서 구원되는 은혜성이 삭제되는 것이 바로 악마가 노리는 겁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 이게 악마의 마지막 노림수에요. 그 행함 가운데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다 포함되지요.
그렇게 행하려면 하나님의 언약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야 되겠지요.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불가능한 원칙은 안 돼요. 그럼 내가 구원에 실패하기 때문에 말씀은 하나님이 주고 실천 세목에 대해서는 본인이 기준을 만들어야 돼요. 왜냐하면 본인이 행동해서 완성을 봐야 되니까. 못 지키겠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기어이 희망을 가져야 돼요. 자기 자신한테. 지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 방안을 내가 만들어서 이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해질 수 있지요. 바리새인처럼. 참 대견하지요, 그지요? 묻고 싶은 거예요.
이런 속성이 바리새인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하나님,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니까 의미를 주옵소서. 예수님이 말하시기를 “너희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했나?”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버릴 것이다. 나를 배신할 것이다.” 이게 주님이 내린 결론이에요. 그리고 가룟 유다는 자살할 것이고. 나름대로 열심히 한 게 결국 배신이에요. 나를 찌를 것이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이기도하고.
그래서 제가 아까 유대인을 반드시 경유하란 거예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순수하고 순진한 신앙, 낮추고 또 낮추고,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내려놓을 때까지 다 내려놓은 것. 그게 악마가 하는 짓인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게 악마가 마지막 내민 카드란 사실을.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하고, 자기 몸을 내놓고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고 천사의 말을 하고. 그게 악마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에요.
기어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제거하려는 거예요. 대신 죽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대신 죽어요. 저도 할 만큼 할 수 있는데 그 정도로 우리가 나쁜 존재는 아니잖아요, 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긍정하고. 그래서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교도소에서 십자가 피 믿으면 구원받는 겁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달린 그 현장에서 살인강도로 잡혀서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의 가치를 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의 제일 큰 약점이죠.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잊지를 못해. 그게 나쁜 일이든 착한 일이든 회개하든 반성하든 잊지를 못해요. 반드시 거기에 의미를 두게 됩니다. 사실은 I’m nothing.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고 계속해서 눈 펄펄 날리듯이 눈이 계속 오는 거예요.
눈 내린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눈송이 하나하나가 바쁘잖아요. 우리는 안 바쁩니까? 아침에 일어나 세수해야 되고 혈압 약 먹어야 되지요. 굉장히 바쁘지요. 그런데 이런 눈송이 내린다고 우리가 구원됩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의 눈송이처럼 아침에 혈압 약 먹고 설치고 운동하고 성경 두 장 본다고 구원됩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활발하게 활동케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런 게 다 모여서 nothing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들이 모여서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
그러니까 마음을 편하게 잡숴요.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기준은 뭐냐? 이것조차 아무것도 걸 알고 모든 걸 하는 거예요. 성경해석도 해보고 선교도 해보고 십일조도 해보고 다 해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걸 알고 할 때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예요. 우리 육신은 충동과 욕구를 우리 스스로 잠재울 수 없습니다. 성깔, 욱하는 것 반드시 나오게 돼있어요. 참으면 나중에 곱빼기로 나와요. 참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욕망이라는 게.
그 욱하는 성격들이 구약에서 나쁜 평가를 받은 자들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우리 모습이에요. 대표적으로 가인, 라멕, 사울 왕 그리고 발람 선지자. 특히 발람 선지자는 목회자가 명심해야 되지요. 딱 우리 모습이에요. 나는 이런 뇌물 받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여호와의 지시를 받고 축복과 저주를 내리겠습니다. 얼마나 발람이 자기 절제를 했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발락 왕의 뇌물이 성공했잖아요. 이스라엘 사람이 멸망할 거리를 만들었지요. 바알브올에서 그들이 이방신에게 음란하게 제사함으로써. 그 아이디어를 누가 제공했어요? 발람이 돈을 받고 했잖아요.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받을 때는 나는 주의 종이니 이런 것 안 받습니다, 하다가 몇 억 받을 때는 어떻게 해요? 주의 축복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 생각해볼 때 남쪽에 있는 이름 없는 선지자가 여로보암의 재앙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선지자가 진짜 선지자인 줄 알고 영접하다가, 거짓말하잖아요. 나도 계시 받은 사람이니까 대접받으라고 해서 대접받은 남쪽 유다 선지자가 사자한테 물려죽잖아요. 그런데 사자가 잡아먹질 않아요. 베드로한테 닭을 보낸 것처럼 그 사람한테는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낸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북쪽 선지자가 내 탓이라고 한다지만 남쪽 선지자는 뭐예요? 분명히 하나님 지시에 어떤 누구에게도 대접받지 말라고 사전에 언질 했잖아요.
어떤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필히 네가 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십계명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은 뭐예요? 필히 거짓말을 매일같이 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간음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탐내지 말라 것은 탐내게 돼있다는 거예요. 안식일 지키라는 말은 안식일 어기게 돼있다는 겁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면서 평생을 보낼 것이라는 거예요. 구약해석 끝났네. 끝난 거예요. 명령어만 해석하면 끝난 거예요. 어떤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은 그 반대의 속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는 좋은 편에 서지 말고 나쁜 편에 서서 그 나쁜 짓을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설교 현장에서 절감해야 됩니다. 아무리 해도 아무리 도를 닦고 기도를 해도 우리는 성경 말씀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음을 다 끄집어내야 돼요. 그래서 설교 막바지에 우리는 절망으로 끝나야 됩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대신 죽음의 십자가를 배치해야 되지요. 그러면 십자가 안에서 다시 과거를 볼 때 우리는 막 산 게 되고 그걸 미래형으로 바꾼다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막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기쁨으로 확인하게 되지요. 막 살고 싶은데 주께서 막 살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그만 두게 하시는 거예요. 이제는 예수님의 앞잡이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앞잡이는 상당히 처음 듣는 용어지요.
-좋습니다.
좋지요. 그동안 우리가 누구의 앞잡이란 생각을 잘 안 하잖아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판단 내린다고 했기 때문에 누구 앞잡이라면 기분 되게 나쁘잖아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앞잡이란 용어는 안 나오지만 그 뉘앙스가 나와요. 두 군데 봐야 하는데 1장 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그 다음에 21절, 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22절에 성령을 우리에게 줬지요. 그게 19절, 21절에 보면 활동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막 살게 하시는 일을 말해요. 우리가 성령을 소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지금 활동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증명해주는 거죠. 소유하면 안 돼요. 소유할 쇼핑백이 낡아 터져서 죽어버립니다. 끝나버립니다. 성령을 담아둘 쇼핑백이 없어요. 그걸 허락지 않았어요. 점점 얇아져요. 죽어가면서. 담을 생각하지 말고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앞잡이라 하는 거예요. 앞잡이는 단독적으로 자길 챙기는 게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어떤 나쁜 사람이 이상한 음성 조작해서 전화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어느 집에 침투해서 이 일을 해라. 만약에 하지 않으면 네 딸의 목숨은 위태롭다. 그러니까 그 아줌마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화려한 유혹>이란 드라마 하고 있거든요. 딸 목숨 때문에 억지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게 앞잡이가 아니고 뭡니까? 그동안 우리는 죽기가 무서워서 죽음을 담보로 살아보려고 마귀의 앞잡이 된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5, 16절 말씀처럼. 그런데 이제는 우리는 로마서 6장의 말씀처럼 죄의 종이 아니고 의의 종이죠. 종이 앞잡이잖아요. 종의 특징은 자기 게 없어요. 자기가 챙길 자기 몫이 없다니까요. 의의 앞잡이 노릇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대표적이고. 앞잡이가 뭘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지금 부지런히 설치는 게 앞잡이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살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고.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어야지. 그 계획 잡는 것 소용없어요. 주님 계획은 따로 있거든요. 그게 고린도후서 2장 14절부터 16절까지 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누가 이걸 감당하리오. 기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구원받으려고 한 게 아니고 누가 시켜. 주님이 시킨 거예요. 시키는 계시가 온 게 아니고 시키라는 계시 없을 때도 화장실에서 용무 볼 때도 구원받는 자에게는 향기로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악취로,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에요. 그래서 그들이 당신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 되게 나쁘고 악취로 느껴질 때는 그것도 주의 기능이 그래요. 그런 결과를 도출한 것도 나를 사용해서 하신 주님의 일의 결과로 그들에게는 악취로 들려줘야 돼요. 그래서 사람을 설득하거나 내 사람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본인이 악취를 느껴야 되는데 본인이 냄새가 더럽다는 게 어떻게 하겠어요.
물론 예의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지만 의도적으로 그들을 포섭할 필요는 없어요. 포섭하는 게 주의 앞잡이 역할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있던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어요. 마태복음 4장에도 예수님이 있던 그 현장도 악마가 다스리는 세력이잖아요. <헝거게임>이란 영화가 있는데 어떤 특정 구역에 반란자들이 케피톨이란 진짜 세계와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지금 어느 세계가 진짜 세계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지요. 그러면 이 세상은 악마의 나라지요. 이게 플라톤의 이원론이니 뭐니 관계없어요. 성경 자체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단어는 네자 단어로 확실해요. 천상회의. 구약에 나오지요. 천상회의는 천상에 있겠지요. 지상에는 천상회의가 없잖아요. 미가야라든지 에스겔은 천상회의에 참석했잖아요. 따라서 이 세상은 둘로 나눠진 게 맞지요. 천상회의라는 단어 자체가.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 뭡니까? 이 세상은 오리 알처럼 있는데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고 그걸 연결하는 세계가 열리면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께 임하니라. 결국 인간은 갇혀있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죄에 갇혀있지요. 다른 표현으론 율법에 갇혀있다. 또는 사탄에 갇혀있다. 도둑이 와서 주인을 묶고 가재도구들을 가져가는 것처럼 하늘나라가 이미 그런 식으로 임한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원론이지요. 하늘나라와 지상의 나라, 악마의 나라. 거기서 싸움을 하는 거예요.
여기 보면 전쟁을 벌이시는 하나님이죠. 구원 개념이 전쟁 개념이에요. 존재 개념이 아니고. “저,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이렇게 물을 게 아니고, “저는 지금 무슨 전쟁하고 있습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사도 바울도 영적 싸움한다고 했잖아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이 몸으로 구원받았으니까 남은 것은 좋은 회사 취직해서 우리 자식과 행복하게 살아야지. 이게 전쟁입니까? 그건 전쟁 개념이 아니고 존재 개념입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것, 살다가 주가 부르시면 천국 가야지. 이건 존재 개념이에요. 지금 전쟁을 벌여야 돼요.
이번에 요한계시록 할 건데 마찬가지에요. 전쟁 개념으로 이해해야 돼요.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하는 하나님입니다. 다른 말로 만군의 하나님이라 하지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하나님. 게하시와 엘리사의 대화중에 나옵니다. 아람 나라가 포위를 했지요. 게하시가 완전히 기가 죽었어요. 졸았다고 하지요. 벌벌 떨면서 선생님, 이제 죽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해주니까 이쪽 편에 천군천사 저쪽 편보다 더 많아.
문제는 여기서 유대인의 해석, 유대인의 시각을 봅시다. 유대인들은 그걸 보잖아요. 보는 정도가 아니라 달달 외우죠. 우리를 천군천사가 도와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의 악마의 나라가 되어 주께서 반드시 괴멸시킬 것이다. 그런 해석 내리겠지요. 바울 되기 전의 사울도 그런 해석을 내렸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평은 이렇습니다. 사울아, 네가 고생하는 것이 너만 손해다. 네가 그런 해석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그것이 나한테 해가 되는 게 아니고 너한테 오히려 네가 맨발로 선인장 가지로 스스로 찌른 것처럼 너한테 혹독한 시련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하지요.
엘리사의 그런 이야기가 나아만 장군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항상 이스라엘 중심으로 돼 있잖아요. 이게 무슨 하자냐, 무슨 오류가 있느냐고 유대인들은 생각한 거예요. 제가 처음에 반드시 유대인의 해석을 경유하라고 했지요. 성경에 보면 나오니까. 성경에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망한 쪽 우리가 관찰자로 보지 말고 망한 쪽에 서면 돼요. 망한 쪽에 서 있으면 그들이 성경해석을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동의가 돼요. 왜? 그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내 위주로 좋은 쪽으로 긍정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우리한테는 아주 자연스럽고 저절로 나오게 돼있거든요. 이게 바로 오류가 되는 겁니다. 그럼 전쟁은 누구와 하느냐? 주님이 우리와 하는 거지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51203 혜화동특강a.hwp (34.0K), Down: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