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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복음 8장 21절(가락-아버지)151203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요한복음 8장 21절(가락-아버지)151203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요한복음 8장 21절(가락-아버지)1512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20절입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마치 이 말은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에 스케줄에 따라서, 체포하느냐 마느냐 까지도 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체포되지 않는다는 투로 이야기하죠.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네가 나를 체포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허락이 있을 경우에만 너희들은 나를 체포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도 내 계획 중 일부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했지요. 그냥 “때”라고 생각한다면 인간들의 때가 됩니다. 그런데 앞에 그의 때가 붙어버리면, 인간들의 “때”로서는 접근하기 곤란해요.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에 있어서 “인간의 때”와 “주님의 때”, 그리고 공간에 있어서도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영역”과 “주님의 영역”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주님께서 지금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습니다.

녹취만 어려운 것이 아니고 주님 말씀이 더 어렵지요. 같은 “때”라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요. ‘아하,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제가 알겠습니다.’라고 하겠는데 주께서 “그의 때”로 들어오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주님의 때”는 “인간의 때”를 침입해서 그것에 균열을 일으켜서 그것을 쪼개버려요. 보통 “때”라고 하는 것은 시간 요소이기 때문에 쭉 흘러가죠. 시간은 흘러가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주님의 요소가 침입을 해버리면 이것이 끊어져버리죠. 딱 스톱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때는 밑으로 빠지고 끊어져버린 순간부터 주님의 때는 따로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때”라는 그 시점을 통해서 “너희들끼리 갈래? 아니면 나를 따라올래?”가 결정나는 거죠.

내 말을 이해하면 인자의 때에 속하게 되고 너희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줄곧 가는 데로 그냥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끊어진 이 지점을 다른 말로 하면 “격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말인데 “돌발적인 변화”, “연속이 안 되는”..

군인들이 행진할 때 쭉 행진하다가 “발 바꿔 가!”라고 하면 발을 바꾸잖아요. 쭉 가다가 뭔가 부자연스러운 요소가 가미되면서 잠시 있었는데 다시 원상 복귀가 돼요. “방금 무슨 일 있었어?” “몰라.” 이게 주님의 때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때”는 순간적으로 침입해서 사라지고 나면 마치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무슨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주님의 때”가 그 당시 유대인 뿐만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으로 “주님의 때”가 임해버리면 분명히 뭔가 변화가 있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까 ‘뭐였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의 때”와 “사울의 때”가 만났습니다. 본인은 “격변”인데 주위의 동행자들은 잠시가 우레가 일어난 것뿐이고 아무것도 아니지요. 다만 사울은 갑자기 눈이 멀었고, 그리고 인생관과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때”라는 것에는 무슨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이 뭐냐하면 시간의 격변이지만 사실은 “주체 격변” 또는 “자아 격변”입니다. 내가 주인공이었던 인생이 내가 서술부가 되는 겁니다.

주인공은 따로 있었고 그 주인공이 전부터 (사실은 창세전부터인데) 활동하셨던 거기에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주님의 때”가 임할 그때부터 내가 소속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나는 원래 “주의 때”에 포함이 되어 있어서 주님을 만났어야 하기에 이제야 만났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드라마에 그런 요소가 있어야 돼요. 아버지가 미국에 잠시 다녀왔다고 해놓고는 논팽이가 와서 하는 말이 “나는 네 아버지다.”라고 하면서 등장할 때 “무슨 이런 아버지가 다 있느냐? 이런 논팽이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요.”라고 아들이 격렬하게 대항하죠. ‘조강지처’라는 드라마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고 내가 알고 있는데요.

중간에 자기 인생에 끼어든 거에요. 그러면 그 청년은 “자기 때”에요. 그런데 “자기 때”에 친구가 침범하면 “반갑다. 친구야.”하면 끝나는데 이 분이 아버지니까 자기 존재의 원인자잖아요. 아버지가 아닌 자를 아버지로 불러야 되니까 졸지에 자기는 난데 없이 아들노릇을 해야 되는 거에요.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들노릇을 해야 되니까 위계순서가 자기가 밀리게 되는 거에요. 좋든싫든 “네 아버지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아들은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이런 아버지 나한테는 필요없다.”고.

왜? 자기가 주체인데 아버지가 무게있게 들어와 버리면 자기는 주체에서 밀리게 되잖아요. 자기 인생에 없던 아버지가 등장해버리면.. 없던 동생이 왔다고 하면 이것은 별 문제가 아니에요. 동생은 자기 아래니까 계속 무시하면 됩니다.

그런데 없던 아버지가 나타나버리면 자기는 많은 영토를 아버지의 몫으로 돌려줘야 됩니다. 그리고 특히 아버지가 돈도 있으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되겠는데 이거는 빈대붙이러 왔거든요. 엄마도 자기 엄마도 아닌데..

만약에 아버지가 늙었을 때 돌보지 않으면 불효자라는 주위의 나쁜 시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격렬하게 반응하죠. 하물며 자기 인생에 집 나간 아버지가 돌아와도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데 애초부터 내 인생에 없었다고 일러주신 분이 침입할 때 우리는 격렬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뭔가 잠깐 착각했어.’ 할 정도로 사태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거에요. 사도바울은 부정 정도가 아닙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했는데 남들은 우레가 울었는데 그 짧은 우레 소리 안에 사도바울한테는 모든 게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의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은 이미 여기에 시간적으로 “그의 때”가 따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면 “주님(그)의 때”와 “인간의 때”가 그냥 나란히 평화롭게 가는 것이 아니에요. 둘 중에 한 쪽만 진실이죠.

그러면 “주님의 시간”만 진실이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자이고 “인간의 때”에 예수님이 잠시 뛰어들었다고 본 사람은 불신자고 그런 겁니다. “자기 때”에 예수님이 잠시 들어왔다고 해버리면 자기 주체가 여전히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본인이 주인공이고 예수를 믿어도 내가 믿게 되지요. 그러나 “주님의 때”가 침입해버리면 내가 주님을 믿을 수 없고 내가 주님을 믿는 것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교회놀이 한 겁니다. 가짜인 겁니다.

믿는 주인공이 내가 되어버리지요. 봉사하는 주인공도 내가 되어버리고요. 내가 없는 내 인생은 생각도 못 하지요. 그러나 “주님의 때”가 침범하게 되면 내가 내 인생을 착각으로 페인트칠한 겁니다. 내가 내 구원을 방해했다가 되지요.

주님이 구원했는데 마치 내가 한 것처럼 그동안 으스대면서 우쭐거리면서 설쳐댔잖아요. 교회 소꿉놀이하면서 그짓했다 이 말이죠. “내 영광 받으옵소서.”라는 놀이를 한 거죠. 주님은 아무것도 받지를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한 번 봅시다. 사도행전 17장 25절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네, 그 정도면 됐어요. 섬길 때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주신 것을 받았습니다.”라고 할 때만 영광이 돼요. “날마다 주시니 고맙습니다.”라고 할 때만 영광이 되지, “받아놓고 입 닦냐?” 이런 것을 따지고 묻지 않습니다. 친히 키우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집 강아지가 자기를 무는 경우에는 화를 내지만 그냥 강아지가 강아지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주인이 결코 화를 내지 않죠. 물론 나중에 강아지가 건방이 늘어져가지고 침대에 올라오고 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강아지보고 돈을 벌어오라고 하거나 이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강아지는 어디까지나 강아지다울 때로 족해요. 강아지가 사람흉내내게 되면은 무서워요. 강아지한테 옷을 입히는데 누구 좋으라고 옷을 입히는지.. 자기 좋으라고 그렇지 강아지 좋으라고? 강아지는 더워서 헤헤 거리는데 뜨개질해가지고 옷을 입힙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부족한 것처럼 받는 게 아니다”에서 이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아무것도 안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해야 돼요. 친히 키우신다는 의미까지 해야 돼요.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했지요.

“주신다”는 말은 구원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 사람의 운명을 내가 결정한다는 의미에요. 지옥가든 천국가든 입 다물라는 뜻이에요. 내가 만들어놨고 내가 태어나게 했는데 “저는 지옥가면 안 됩니다.”고 반발하게 되면 “너한테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런 소리를 하냐?”라고 나와요.

“근거 있나?” 아무 근거가 없는 거에요. 처음부터 인간은 없는 존재입니다. 없는 존재를 있게 했을 때는 그저 있게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 가미되어서 있는 거거든요. 주님의 뜻이 가미된 상태, 그 상태가 처음부터 모든 게 주님의 시간이고 주님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사람들이 그것을 다 압니까? 안 믿는 사람도 있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24절에 보면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합니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한 것을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원인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라는 것 때문에 “죽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죄 때문에 죽으신 거냐?”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 않고 “언약”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지요.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언약 때문에 죽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언약 때문에 돌아가신 것”과 “죄 때문에 죽은 것”의 차이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의”와 “죄”를 다 같이 보여주는 죽음이고 인간의 죽음은 그냥 “죄”만 보여주는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의”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으셔야 “의”가 나와요. 이걸 신학자들은 모르고 예수님 자체가 의롭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 자체가 의로운 분이 아니고 죽으셔야 의로와요. 왜? 언약을 이룰 때에 “의”가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가만히 있어서 “주”가 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비로소 “다 이루었다.”고 내뱉을 수가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는 이유가 존재로 생각을 해서 그래요.

언약을 빼버리고 “나 여기 있고 좋으신 분 저기에 있으니까 만나서 우리 좋게 지냅시다.”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에요. 나라는 존재와 저쪽 존재, 두 존재가 만나게 되면 저쪽 존재가 갖고 있는 “의”가 잘해줬으니까 이쪽 존재인 나한테로 전이되고 전달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중간에 뭐가 빠졌어요?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아니에요. “죽음”과 “죽음”의 만남이거든요. “내가 죽을테니까 너도 죽을 수 있느냐?” 이렇게 만나는 건데요. 그런데 이 세상에 주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죽음을 언약적 죽음으로 전환시킵니다. 예수님의 자기 죽음 안에 나만을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내 백성을 위해서 죽는다고 함으로써 아직 백성만들기의 여지를 남기면서 혼자 돌아가시지요.

그러면서 그 안에 백성만들기의 여지가 남아있고 그 여지는 성령(예수님 자신의 영)을 통해서 백성이 아닌 자를 백성으로 전화시키는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욕심쟁이에요.

본인의 성깔을 본인의 성깔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백성만들기에다가 그것을 확장시킵니다. 사실은 그게 언약 안에 들어있어요. 출애굽 할 때 그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의 용사가 되셔가지고, 구약에 보면 우리의 임금이 되시죠.

그 임금이라고 하는 것은 단독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을 전제로 한 임금이지요. 왕이 먼저 등장하고 왕에 합당한 백성들이 나중에 왕에 의해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백성은 아무도 없고 임금이 백성만들기에 나서셔요.

그 중앙에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에 보면 새로운 나라가 등장하는데 그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하면 인자의 나라입니다. 인자의 나라. 임금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만들기에 나서시는 나라.

그런데 마귀가 자기 백성을 안 빼앗기려고 애를 쓰지요? 그러나 주께서는 마귀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뺏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근거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유일하게 빠져나오는데 성공하신 분이거든요.

마귀가 인간을 지배했던 모든 완력, 손에 쥐는 그 완력에서 유일하게 홀로 빠져나오셨기 때문에 그 빠져나오셨던 능력이 자기 백성에게 도달하게 되면 더 이상 마귀도 그 사람을 쥐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걸 마스터 키라고 이야기합니다. 뭐를 열어도 다 열리게 되어 있어요. 막을 자가 없다는 거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막을 자가 없다.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어요. 달라고 하면 내놓아야 돼요.

왜냐하면 이미 탈출에 성공한 분의 권세로 달라고 하기 때문에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없어요. 마귀의 세력에서 주께서 탈출하면서 거기에 찢어진 구멍이 생겼거든요. 그 구멍 새로 주님의 바람(성령의 바람)이 휙휙 들어오니까 자기 백성은 그 구멍으로 가게 돼요.

그러면 내가 주의 백성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빠져나가면서 주께서 빠져나간 그 구멍만 크게 보인다면 주의 백성이고 구원받은 자기 자랑하면 주의 백성이 아니지요.

그런데 성도는 ‘내가 생각한 적이 없는 길인데, 내가 생각도 못한 그런 방식인데...? 나는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이거는 막 살아도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세리, 창기도 관계 없고.. 일체 그러한 사회적인 지위고하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만 빠져나와서 주의 공로만 영광 돌리는 이런 길도 있었네.’라고 빠져나가면서 비로소 아는 겁니다.

그러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를 알려주는 권세를 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압력을 가해요. 그러면 인간들은 그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성도답게 살기 위해서 온갖 나름대로의 몸부림을 칠 게 아니겠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해가지고 부적을 하든지 안 그러면 명동성당 가가지고 검은 사제 둘을 불러서 명동골목에서 무당 굿을 하든지 성경읽기, 쓰기, 새벽기도 나오기, 나름대로 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면 할수록 빠져나와요 못 빠져나옵니까? 점점 더 강도가 심해지는 조건들이 제시됩니다. 전에 기도를 30분 했다면 이번에는 꿇어앉아서 30분 해야지, 전에는 본봉에서 십일조를 했다면 이번에는 보너스에서 십일조까지 해야지 어디서 니가 거짓말로 헌금을 해? 아나니아 삽비라 몰라? 헌금 속이다가 졸지에 하루아침에 사이좋게 죽은 부부..

또 성경에 보면 “거룩하라”고 나오지요,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나오지요, 온천지에 지킬 게 너무 많아요. 성경을 들추면 모조리 다 지켜야 돼요.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죠,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되어 있거든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뭐 온갖 것을 하니까 그 “말씀을 준행하라”는 명령법 수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보지요. 마치 사도바울 되기 전의 사울처럼.. 그리고 이미 그것에 성공했다는 그런 가짜 모델들도 찾아다니고,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 삼았다는 손양원 목사와 같은 모델도 생각해보면서.

그리고 그냥 교회만 한 것이 아니고 고아원을 만들어서 많은 전쟁고아를 살렸다는 한경직 목사의 경우도 생각해가면서, 죽기까지 신사참배하지 않았던 주기철 목사부터 해가지고.. 온갖 것을 다 해보는 겁니다.

그게 “자기 때”입니다. “주의 때”가 아니고 “자기 때”에요. 그래서 ‘“주의 때”가 되지 않으면 여전히 자기가 주체로 살아있고 주체가 살아있으면 내가 내 방식으로, 내 행함으로 내가 구원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죄 아래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다.’라고 성경에서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보면 ““그의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라고 한다면 “그의 때”를 기다리면 될 것 아니에요?”라고 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뒤에 보면 “너희들은 죄 속에 갇혀 있다”라고 해요. 중립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의 때”가 아니면 조용한 게 아니고 그냥 죄에 시달리고 또 시달리고 또 시달리고 또 시달리는, 끊임없이 마귀의 테스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는 그런 가련한 신세로서 살아가고 있어요. 사실 가련할 것도 없어요. 둘이 단짝이 되었는데 뭘 가련해요.

21절에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했는데 이게 바로 찾다가 죽는 거에요. 백날 해봐야 찾지도 못하고 그냥 몸부림치다가 볼일 다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를 썼는데 죽는 게 아니고 그 자체가 죄를 유발하면서 계속 죄를 지으면서 그 죄 가운데서 죽는 겁니다. 자기가 행한 것을 인하여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가까운 쪽으로 자기를 자기 행함으로 몰아세우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는 짓거리가 전부다 더욱 더 지옥으로 재촉시키는 행위들만 하면서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겁니다. “주의 때”가 임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러면 “주의 때”가 임하면 그때부터 착하게 사는 겁니까? 아니요. 소급해서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죠. 한꺼번에 한방에 깨끗하게.

그러니까 이렇게 볼 때에 산다는 것은 그냥 중립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살려지는 삶이냐 아니면 죄 짓다가 지옥에 가느냐 달랑 두 종류의 삶밖에 없어요. 돈 벌면서 산다? 아닙니다. 죄 지으면서 사는 거에요.

이것이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했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에 “주님의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때”란 뭐냐? “지옥으로 가는 시간의 나열이었다.”라고 주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예수님께서 이 얘기를 하시는 것은 누구를 지적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때”의 의미를 이야기하려면 필히 기존의 때를 설명할 수밖에 없고 지옥이라는 것은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리 한 번 해봅시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주님의 진리성은 죄 가운데 피어난다.” 주님의 주님됨은 죄하고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죄 가운데서 비로소 올라오지요. 피어나는 겁니다. 똑같은 인간형을 가졌으면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주님은 다른 곳으로 가는 겁니다.

다시 해봅시다. 주님이 오지 않으면 그냥 더할 나위 없이 점잖고 고상하고 착하고 기본 양심들은 다 있는 사람들인데 주께서 침입한 순간 노선이 지옥이냐 천국이냐 딱 둘로 나뉘어져 버리죠.

고상하고 훌륭하고 인격적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건 소급해서 전부다 죄 가운데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시고 난 뒤에 그때부터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그전부터 주님이 이미 인생으로 살아온 거죠. 소급해서 전부다 주의 은혜로 살아온 겁니다.

어떤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만났다면 그때부터 아버지가 아니라 그전부터 아버지였었지요. 그때는 아버지가 딴 동네에 살다가 이제사 나타난 거지요. 그래서 소급해서 내가 니가 없을 때부터 너의 아버지였고 이제 내가 아버지로서 너를 길렀다는 것이 그 뒤에 나오는 겁니다.

“내 때”에다가 “주님의 때”를 연결시킬 수가 없다는 거에요. “주님의 때”가 오게 되면 “내 때”는 지워져 버립니다. 삭제해 버립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죠. 시간이 먼저 있고 그 시간이 확장되게 되면 이 공간이 되는 겁니다.

23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산 위에서 하셨습니까 저 구름위에서 하셨습니까 어디서 했습니까?

그들이 있는 같은 눈높이에서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의 키가 얼만지 모르지만 눈높이가 비슷하다고 보여져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DNA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키가 고만고만 해요. 인물도 마리아를 닮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을 그들은 납득할 수 없죠. 왜? 같은 세상 바닦에 같이 서서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속한 세상은 어느 세상이냐 말이죠.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에 함께 있는데 네 세상이 따로 있고 내 세상이 따로 있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버리면 우리가 평소에 봤던 세상의 개념 자체가 잘못된 틀려먹은 개념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세상이라는 것은 여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이렇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고 세상을 둘로 모아져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과 “죄 속”에 있는 곳이 합쳐서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둘로 분류가 되잖아요.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죄 속”에 있지요.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죄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속한 곳은 “하나님의 의” 속에 있는 거에요. “죄”와 “의” 속에 있는 겁니다.

이렇게 갈라지는 것이 바로 언약적 관점입니다. 언약이 오게 되면 축복하면 축복이 되고 저주하면 저주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말씀하는 것이 세상을 잘못 사용했다는 뜻이에요. “니가 게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니가 세상을 알아?”라고 하는 것은 니가 세상을 모르고 세상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저 인간들의 집합이 세상이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이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집어넣고 보는 세상인 반면에 인간들은 예수님을 빼놓든지 아니면은 예수님을 자기와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해놓고 그걸 아울러서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여기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라고 했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피조물입니까? 위에서 났으면? 내가 위에서 왔기 때문에 너희가 아래에 있다고 본 겁니다.

요한복음 3장을 한 번 봅시다.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3장 31절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고 하였고 이왕 찾아본 것 (나는 찾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도 아니고..) 이것은 한 번 찾아봐야 돼요.

요한일서 4장 4~6절 누가 한 번 읽어주세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성경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너희는 주님께 속했고 우리는 세상에 속한 근거를 대라.”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미혹의 영을 받았으니까 세상에 속했고 우리는 진리(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가 미혹의 영을 받았다는 근거를 대라.” “너희는 세상에 속했다.” 이것은 제자리를 빙빙 도는 이야기죠. 그걸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몰라도 돼.”라는 뜻이에요. “왜 몰라야 됩니까?” 모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몰라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안 가면 되잖아.”라는 거에요. “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가 모르게 한 거야.”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갑니까?” “내가 원하는 사람만 일방적으로 내가 넣어줄거야. 너는 오지 마.” 이런 식이에요.

그러면 저쪽에서 듣는 사람이 “화난다. 당신을 죽이겠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죽여라. 그것이 바로 “내 때”다. “너희가 얼마나 죄에 속했으면 죄의 근원적인 본질, 메시야를 반드시 죽이라는 이 특명을 이제사 너희가 실시하는구나. 그래 죽여라. 너희가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요한복음 10장)”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우리가 로봇이냐?”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너희가 로봇 근처에도 안 갔다. 너희가 죄에 속했기 때문에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고 죄의 로봇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쪽에서 “그러면 우리는 왜 태어났습니까?” “죄 지으라고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죄 짓기 싫은데요?” “그러나 너희한테 그런 권한이 없다. 피조물이 자기 인생을 골라잡을 입장이 아니고.. 백화점에 쇼핑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태어난 대로 살아.”라고 해놓고 주께서 돌아서서 혼잣말로 하시는 말씀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책임을 누구한테 전가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 모든 것은 딱 하나에요.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올 수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꾸 이런 반발을 하는 이유가 아무도 없는 거에요. 아무도 없는데 자기는 특혜를 받으려고 한다 이 말이죠.

내가 골라서 예수를 선택하고 싶은 거에요. 사실은 그런 방식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보낸 자만 온다는 원칙을 준수하는데 인간은 “자 골라, 천국갈까 지옥갈까? 부처 믿을까 예수 믿을까?” 자꾸 골라잡으려고 한 거에요.

그러면 그것은 “자기 때”지요. 그건 “주의 때”가 아니고 “자기 때”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때”가 침범하지 않으니까 역시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주체된 행세께나 하고 있는 겁니다. 그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일괄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금 나를 믿으라는 말도 아니고 “내 말 잘 알아듣지?”라고 묻는 말도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퍼붓는 이야기에요. “나는 위에서 났고 너희는 아래서 났고” 뭘 알든지 말든지 너희들한테는 그런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말씀대로 필히 실현시킨다는 것이죠. 필히.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주님이 하신 것은 다 옳았습니다.”라는 말을 이 말씀에 근거해서 고백하게 되죠. ““너희가 죄 가운데 죽으리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알고 보니까 이게 진실이었습니다.”하고 받아들이죠.

그러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 아는 비밀을 그냥 보따리 풀어서 위에서 줄줄 붓는 거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줄줄 부어버리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낸 자도 같이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상당히 이상해 보이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그것은 당연한 조치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다시 돌아갈 길이 막힌 입장에서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죠.

꼼지락거리면 다 죄가 되고 뭘 해보려고 하는 것은 다 죄가 되니까 안 꼼짝거리면 된다고 하는데 인간은 살아있는 이상 꼼짝거리게 되어 있지 가만히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보면 이 땅에 있는 것은 “인간의 때”인데 “인간의 때”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죄에 속해서 죽어가고 있는 과정”, “죽음의 현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을 해요. 이게 죽 나오는데요 그 반박이 뭐냐? “우리가 죄 속에 있다는 근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죠. 합리적으로 맞잖아요.

내가 죄 속에 있다는 근거를 주님이 뭐라고 댑니까? “내가 죄라면 죄야.”가 그 근거에요. 이거는 조폭도 아니고 인격모독도 이런 인격모독이 없어요. 어떤 연극에 「관객모독」이라는 연극도 있다는데..

이거는 정말 인격을 묵사발내는 겁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왜요?”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너는 아버지가 없거든.”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당신만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근거를 대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시하는 기준은 여기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8장 16~18절에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율법에 맞잖아?” 그러면 저쪽에서 “무슨 개떡같은 해석을 하고 있냐? 니가 그런 소리하면 나도 그런 소리하겠다. 나도 메시야다.”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판정은 어떻게 나느냐?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하느냐의 판정이에요.

부활하면 이것이 다 맞는 이야기이고 그런 예수님을 보고 욕했던 모든 인간은 죄 속에 있는 것이 맞고,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나 그들이나 다 헛소리를 한 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믿은 것이 아니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서 그래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은 딴 영이 아닙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살고 죽고 하는 구원 문제가 내 손에서 떠나버렸어요.

이것은 내가 관리할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관리하면 그것은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에요.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나한테 맡겼겠지요. 내가 안 되는 일을 주께서 하신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건방지게 옛사람이 남아있어가지고 내 구원(일)에 내가 손을 대고 색칠을 하려고 하지요. 지가 뭘 안다고.. 꼭 아는 체하다가 티박맞아요. 주님한테..

주님은 음식 드시는 것을 좋아하실 거라고 해서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고 있고 보니까 싸가지 없는 동생은 주님 발앞에 앉아가지고 말씀을 듣고 있더라 말이죠. “주님 저 싸가지를 좀 나무래주세요.”라고 했다고요.

“지금 니가 싸가지야.” 니가 원하는 내가 아니고 내가 원하는 너이어야 하는데 너는 지금 내가 뭘 원하는지를 모른다 이거에요. 김밥이나 떡볶이를 먹으려고 온 게 아니거든요. “더 좋은 것을 하고 있다.”

그러면 마리아가 예수님이 더 좋은 것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본인도 몰랐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점수를 그렇게 매기는 거에요. 주님이 문제를 내도 인간은 그 문제가 무슨 문제인지 몰라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 점수를 매기는 것도 본인의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주신 점수가 내 점수에요. 100점이라면 그냥 100점인 줄 알면 돼요. 그게 믿음이에요. 믿음이란 주체가 바뀌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활용하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체가 나의 주체를 밀어부쳐서 “나의 때”는 사라지고 “주의 때”로 흡수·통합시키는 겁니다. 그때에 동반해서 드러나는 사실은 “우리의 때”가 아니고 “지옥의 때”고 죄 속에 묻혀있던 그 시절인 것이 주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밝혀진 겁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리가 죄 속에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에요. 주님을 믿는다면 “맞습니다. 우리가 죄 속에 살고있습니다.” 하고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25절도 같은 취지입니다. 25~27절에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25절에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고 했는데 처음부터 무슨 말을 했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누가 이야기했어요? 아버지가 이야기하신 거죠. 누구에 대해서? “너희 땅에 아들이 간다.”라고 구약 성경에 이야기하셨죠.

그러면 구약 성경의 해석이 어떻게 돼야 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해석해야 바른 해석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해석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자기를 일대일로 맞상대하는 거에요. 중간에 말씀을 집어넣고는..

“말씀 간다.” “예, 지키겠나이다.” 이것으로 끝났어요. “율법 간다.” “예, 잘 지켜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것으로 끝났어요. 중간에 없어요. 왜?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로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만 그들이 죄 속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주께서 율법을 줬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것도 가림막이 없다고 본 겁니다. 내가 지키면 지키고 안 지키면 안 지키고 꼭 침례교 쪽이에요.

말씀을 내가 지키면 지키고 말씀을 내가 지켜서 선이 되고 안 지키면 악이 되고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훤히 막 통하는 모양이죠? 그러면 창세기에 쫓겨났다는 말이 뭡니까? 그냥 몸만 쫓겨난 줄 알아요?

세상의 원리와 모든 죄의 원리에 확고하게 지배를 당하면서 그들은 쫓겨나버려요. 독자적으로 쫓겨난 것이 아니고 통치할 악마까지 보태서 이 세상에 쫓겨난 거에요. 그래서 악마는 이 세상의 신이에요.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신의 통치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백날 모든 종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면서 허덕여봐야 악마의 힘에 눌려서 거기서 돌파할 수가 없어요. 그것을 째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고 모든 인간이 다 실패하죠.

비록 에녹이 죽지 않고 살아서 가도 죄의 두께는 여전해요. 에녹이든 아브라함이든 불수레 타고 올라가던 엘리야든 누구든지 죄의 두께가 벗겨지지 않으면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는 변화산에서 주님과 이야기하죠. “주님 언제 죽으시는데요? 언제 죄 많은 내 대신 죽으실 겁니까?” “왜, 너 착하잖아?” “제가 뭐가 착합니까? 죄인이죠.” 엘리야는 불수레 타고 약각 재미있었지만 그게 구원이 아니잖아요.

불수레 탄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지요? 불수레 탄 것을 가지고 자랑질을 못하잖아요. 죽는 모습은 다 다르지만 구원은 한결같이 십자가 외에는 다른 방식이 없어요.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보더니 “나도 한 번 타보고 싶다.”라고 하는데 “그럴려면 에버랜드 추운데 가서 혼자 타라.” 그걸 타서 뭘 할건데..

그걸 타서 구원 되는 게 아닙니다. 그걸 타서 구원이 되면은 엘리야가 메시야게요? 아무도 메시야가 아니에요. 메시야는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보통 졸업식 할 때에 졸업생 가운데서 대표해서 상장 받고 대표해서 답사하는 사람이 있죠. “3년 동안 교육해주시고 인간되라고 훈계해주신 교장 선생님 이하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졸업가 부르면서 답사를 하지요.

그렇게 답사한 선지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구원될 수가 없다. 아무리 선지자노릇을 해도 구원될 수가 없다. 인간의 죄는 선지자 했다고 휘둘리는 그렇게 만만한 죄의 지층이 아니다. 오존층보다 더 심하다.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유일한 구멍, 유일한 탈출구는 주님이 뚫었지 예레미야가 뚫은 게 아닙니다. 다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님이 뚫어놓은 그 구멍으로 아브라함도 통과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허다한 천군 천사들도 거기서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이런 모든 신화같은, 만화같은, SF 영화같은 이야기의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부터 모든 의미를 새롭게 출발해야 돼요. 내가 잘된다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에서부터 출발하게 되면 바로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주의 것인 ‘나’가 되죠.

새롭게 배급받은 것이 돼요. 시레이션 비슷하게.. 언제? 매일같이 새롭게 내 인생을 배급받습니다. 이 말은 ‘나’라는 껍데기의 내용이 주께서 주신 숙제로써 계속 채워진다는 거에요. 또 하루는 이렇게 살아야 돼. 다음 날은 이렇게 살아야 돼. 주께서 사는 내용을 계속 채워주는 겁니다.

온 가족이 멀쩡하다가 갑자기 둘째 애가 아프다면 아픈 애를 간호해야 할 숙제를 유발하기 위해서 또 채워주시는 거에요.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거든요. 얼마 전에. 야고보에 보면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는데 그분의 질문이 이렇습니다.

주님이 평소에 기도하고 있는데 우리가 왜 기도해야 돼요? 상당히 노골적이고 솔직한 질문입니다. 주님이 기도하고 있는데 내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그러면 주님의 기도가 부실합니까? 내가 기도를 추가하게..

그래서 저는 답변했어요. 병든 사태가 일어날 때는 우리가 평소에 주님의 기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관심이 없이 살아왔다는 우리 자신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 병든 사람이나 내가 병드는 경우가 발생되는 거에요.

“정신 차려라. 내 기도 덕분에 니가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아멘.” 하고 받아놓고 돌아서면 단지 정보가 되어 버려요. ‘주님은 또 오늘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나?’가 되어 버리고 실감이 안 나요.

또 답답증이 생기고 또 기도 안 하면 못 배길 일이 벌어질 때에 주께서 그냥 성경의 정보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난처한 상황, 당황스러운 사태가 일어나게 하시죠.

이런 일이 일어났다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일부러 일으켰다는 거에요. 그리스도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항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과 내통하는 그 유일한 구멍에 주목하라고, 거기에 관심을 두면서 살라고..

그 관심에서 눈을 돌리면 모든 게 죄 또 다시 죄 속에 있는 생활의 반복이 되어 버려요. 어디 귀한 것 없나 좋은 것 없나 돈 벌 궁리 없나 내가 잘난 체 할 수 있는 기회는 없나 전부다 그런 거에요. 어디 성경읽기 대회 안 하나 우리교회에서? 대회하면 완전히 암기해가지고 할 건데 그래가지고 목걸이 하나 따면 뭐 합니까? 의미가 없는데..

우리가 무능력자가 되어야 됩니다. 능력이 있는 게 화근이에요. 오늘 제목을 화근이라고 할까? 좀 이상하지.. 무능력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요한복음 8장 21절.hwp (64.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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