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5. 11. 27) 1강
광주 강의(2015. 11. 27) 1강
이름 : 서경수(IP:14.44.77.175)
광주 강의(2015. 11. 27) 21-1
전에 세례요한이 죽었던 이야기를 거론합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왜 죽이려고 했는가? 그것은 평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데 그 위장술에 요한이 안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정당하다고 여겼는데, 요한이 도끼 이야기를 했지요.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3:11).”
그리고 ‘회개하라.’고 했지요. 걸치고 있는 위선의 옷을 벗으라는 거지요. 회개하라고 했는데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회개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뜻이 아닙니다. 이런 점이 어려워요. 성경은 분명히 ‘회개하라.’는 명령으로 나와 있지요. 그러나 명령이 아니라 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나처럼 현 상태를 안다면 나는 회개했다.’ 이런 뜻입니다. 회개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에 대한 답변을 한 것이 아니고, 이 상황이 회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을 알면 그 자체가 회개입니다. ‘내가 그동안 상황판단을 잘못 했구나.’ 이렇게 잘못 된 것은 알게 된 것이 회개입니다.
뉘우치고 고치면 회개한 사람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회개한 나의 괜찮은 행동이 나를 더욱 훌륭하게 만들어요. 이렇게 되면 자신의 위선을 벗을 수가 없어요.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옷을 벗으세요.”라고 했는데, 어떤 분이 “옷을 벗으면 구원 받습니까?”라고 물어요. 제 뜻은 그것이 아니고 ‘여기는 목욕탕입니다.’라는 이야기를 ‘옷을 벗으세요.’라고 표현한 거예요. 옷을 벗으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상황을 말한 겁니다.
‘회개하라’는 말도 쉬운 것이 아니지만, 세례 요한의 말 중에 진짜 어려운 말이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겁니다. 무엇이 왔다는 것은 시간적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에 오는 거잖아요. 그러면 ‘시간이 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시간이 왔다, 안 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 인간은 항상 시간을 보면서 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시간은 내가 알아요.
그런데 내가 모르는 시간이 왔다는 말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상관없이 어떤 인물이 왔다.’는 겁니다. 인물이 왔으면 ‘너희들이 시간을 보고 상황을 판단하는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신랑 온다고 기름 준비하는 것처럼. 기름 준비하면 신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요.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뭔가를 준비하게 되면 구원에서 탈락됩니다. 구원은 우리의 준비가 소용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구원 받습니다. 왜냐? 이전에는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삶을 살았는데, 천국에 필요한 백성은 다가오신 분이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면 그 나라에 백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백성 만들기는 오신분의 자기 숙제입니다.
지금까지 마가복음 6장 30절을 했는데, 세례 요한이야기를 했어요.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했지요. 회개하라는 말은 반성하라는 말과 다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정신 차리고 잘못을 시인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것조차 할 필요 없게 만드는 상황이 찾아 온 겁니다. 뭔가 마지막 때가 왔을 때 사람들이 그 때를 무작정 기다리는 바보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뭔가를 준비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이 있기에 준비가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는 말은, 인간이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비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이 닥쳐오는 거예요. 세례 요한 당시에 선지자는 말라기로 이미 끝이 났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선지자가 말을 하면 어떤 뉘앙스냐? 선지자는 마지막 때를 대비하기 위해 온 자들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방법이 뭡니까?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정신 차리게 되면 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바로 그 생각이 세례 요한이 와서 잘못된 생각인 것을 폭로합니다. 왜냐? 회개하라는 말은 시간이 가까워 졌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시간이 지난 거예요.
뭔가가 온다면 사전에 대비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미 왔으면 어떻게 합니까? 대비 자체가 소용없는 거예요. 시대를 잘못 읽었어요.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고 곧 올 줄 알았지요. 이미 왔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내가 그동안 선지자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구나.’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명령이 아니고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수련회에서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 우리가 대비하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재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결과를 원인과 연관시킨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식으로 대비하는 책이 아니고, 성도 아닌 자가 성도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결과입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성도 되는 일에 실패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원인이 나 혹은 내 주변에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승리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게서 오는데 인간들의 평소 버릇은 ‘내 인생은 내가 챙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엄청난 무서운 일이 온다고 하니까 자신이 대비를 하려고 합니다. 666 도장도 안 받고 피하려 하는데 그 자체가 구원되지 못할 자임을 보여주는 짓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는 것은 인간이 대비하라는 말이 아니고 상황 자체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 알아보는가? 인간들의 시간해석 자체가 오실 메시아 계열과 맞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서 헤롯은 세례 요한의 외침은 새삼스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세례 요한을 죽이려 했지요.
세례 요한은 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임을 당합니다. 태어날 때는 요란했습니다. 성령의 계시에 의해 잉태하고, 이름도 사가랴가 아니고 요한이라 지었고. 어린 때의 경우만 놓고 보면 이 인물이 나중에 총회장이나 혹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공적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후 죽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세례 요한을 일찍 죽게 하셨는가? 그것은 ‘중심 찾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심 찾기가 무슨 뜻인가 하면, 묵시(비역사)라고 할 때 사람들이 역사를 떠난 다른 곳에 묵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묵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고, 역사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니까.
역사 세계를 떠난 묵시 세계를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벧후3:8).’고 했지요. 이 땅에 있는 시간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묵시 세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자체는 맞는 말인데, 역사 바깥에 묵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묵시가 역사 안에 파고 들어와요.
역사와 묵시가 같이 동심원을 이루는, 하나의 중심이 되는 그 ‘중심 찾기’는 이 땅에서 어떤 흔적으로 오는가? 묵시와 역사가 만나면서 죽음으로 옵니다. 죽음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묵시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구름타고 와야 되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다니엘 7장에 보면 메시아가 올 때 구름타고 온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구름타고 오지 않으면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어요. 구름타고 오신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주님은 몰래 침입했어요. 몰래 오셔서 죽을 때는 제자들도 배신했으니까 누가 알았겠어요?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르고 시체를 찾겠다고 무덤에 갔잖아요. 결국 아무도 예수님을 몰랐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찾으려 하는 거예요. 내 육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주님 존재를 중심으로 본 겁니다. 주님의 신체가 중심이 아니고 그분의 죽음이 묵시적 사건입니다.
역사는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묵시는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항상 발생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늘 일어납니다. 발생합니다. 이것이 묵시입니다. 죽음의 반복이지요. 묵시가 역사와 만날 때는 죽음이에요. 이 죽음을 바울은 ‘사랑’이라고 했어요. 또는 ‘사랑보다 깊은 상처’라고 할 수 있어요.
상처가 사랑이에요. 주님이 찾아오실 때 나에게 상처로 와요. “네가 바로 적그리스도고, 네가 나를 배신했다.”고 지적하면서 오십니다. 이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원수 된 자인데, 수많은 원수 된 자 중에, 특별히 원수 된 자라고 통보해 주고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의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자신의 의의 자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묵시가 역사를 차용해서 그 역사가 묵시를 반복하는 자리로 일방적으로 사용하십니다. 내 몸으로 ‘하나님의 의가 이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도구로 우리가 차출 당한 겁니다. 차출 당한 것을 ‘소명(부르심)’이라고 합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롬8:30)” 이 대목을 보면, 마치 우리를 구원시켜 주시려고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를 구원시키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고 주님이 활용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간 구원은 없고 주님의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덤으로 가는 것입니다. 왕비 옆에 왕비를 보좌하는 무수리가 있어요. 우리는 무수리가 되어 주님을 따라 가는 거예요. 모세도 주님의 사환이었습니다. 무수리는 본인의 목표나 희망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몇 살까지 삽니까?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이런 질문을 하다가는 주님께 쥐어 박힙니다. “너는 너를 위한 존재가 아닌데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가?”라고.
우리는 주님과 관련된 속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음 수요일에 창세기 2장 ‘남자와 여자’를 설교할 예정인데, 미리 잠시 언급하면, 남자 없이는 여자가 없습니다. 여자라는 말 자체가 ‘나보다 먼저 남자가 있었음’을 말하기 위해 여자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독적으로는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누구의 여자입니다.’라고 할 때 이것이 여자의 존재 의미입니다. 여자분들 기분 나쁩니까? 기뻐하세요. 죄 짓기 전까지만 그래요.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역전되었습니다. 이제 여자의 후손 없는 남자는 없습니다. “나는 누구의 남편입니다.”라고 해야 살아요. “나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편입니다.”라고 할 때 사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분의 신부가 되는 거예요. 남자든 여자든. 이제는 통합됩니다. “나는 누구의 여자입니다. 누구의 신부입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부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 나오지요. ‘내가 지금 신랑, 신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남, 여가 결혼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허구입니다. 허구가 내용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관을 지어야 하고, 이럴 경우에만 허구가 아닌 것이 됩니다. 옛날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건전지를 넣어 소리가 났는데, 건전지 약 떨어지면 소리가 안 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니라(마10:20).”고 하는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 말씀을 생각해 보니 그 때 그 당시의 ‘나’가 아니고 성령 받은 후 ‘나’에 대해서 주님이 일러 준 거예요. 왜냐? 주님의 시간은 인간들이 대비하는 시간이 아니고 이미 넘어섰어요.
시간을 기다리고 대비하면 내가 조정할 수 있지만 시간이 넘어버리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고 나는 결과로 살뿐 원인은 주님께만 있는 겁니다. 이것을 시간적으로 원인, 결과의 반대로 했지만, 저는 이것을 ‘중심 찾기’로 말하고 싶어요. 원인, 결과로 말하면 여전히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과거 00이 원인이 되어서 현재 이런 결과가 왔습니다.’ 이것은 시간성이죠. 그리고 ‘원인이 미래에 있습니다.’ 라고 해도 역시 시간성인데, 이 시간을 없애버리면 ‘중심은 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묵시적 개념입니다. 이 묵시적 개념이 시간이 흐르고 있는 역사 속으로 들어올 때는 죽음으로만 들어와요.
그런데 아무도 죽고 싶은 사람이 없고, 십자가 지고 따라 올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혼자만의 구원이에요. 모든 구원은 예수님만의 구원이에요. 예수님 몸의 구원이에요. 그 몸에 지체로 붙어 있는 사람만 지남철에 쇳조각 붙듯이 하나로 엉키게 되고, 여기 붙은 자들이 무수리입니다.
왕비 없는 무수리는 의미 없습니다. 이 말은, ‘내가 여기 있으매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의 소속은 어디야?”를 묻는 거예요. “마귀 소속이야, 주님 소속이야?”를 물어요. 단독적 존재가 아닌 관계입니다. 그냥 관계가 아니고 내가 주인으로 삼는 그분의 결과물이 나입니다.
제가 요즘 자주 언급하는데, 귀신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주님을 원망했겠습니까? 남들은 멀쩡한데 자신의 딸은 귀신에 들렸으니까. 그런데 원망은커녕 뭐라고 합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예수님 말씀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고 합니다. 자신을 개라고 여긴 거지요. 이런 여인을 보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세례 요한을 왜 죽이는가? 죽임 당해야 해요. 왜? 그래야 이 세상이 이미 죽음이라는 중심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리게 됩니다. 역사 속의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뭡니까? 죽음입니다. 주님의 본 모습은 물 위를 걷는 것도 아니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도 아니고, 설교를 멋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귤이 있고 감도 있는데, “여기에 귤과 감이 있습니다.”라고 주님께 말씀드리면, 주님은 틀렸다고 하십니다. 왜요? ‘귤을 귤이라고 하고, 감을 감이라고 한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십자가가 증거 되어야 합니다. 나의 죽음이 아니고 주님의 죽음입니다. 세례 요한이 목 잘려 죽을 때 “주여, 억울합니다. 이제 막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저를 죽이십니까?”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6장 27-28절을 봅시다.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역사 가운데 세례 요한의 죽음 사건이 일어났지요. 그런데 이 죽음이 세례 요한이 죽는 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의 죽음은 주님의 죽음을 반영하는 결과물이 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써 역사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자체가 예수님의 죽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러면 세례 요한을 죽이는 자가 나왔지요. 헤롯, 당시의 권력자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그 권력을 인정했습니까, 부정했습니까? 인정했지요. 심지어 베드로도 그 권력이 무서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어요. 이미 권력을 인정하지요? 헤롯이 권력자인 것을 알잖아요. 권력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주님은 어떤 죽음을 당해야 합니까? 혼자 자살해서는 안 되겠지요? 무엇이 실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돌아가셔야 되겠지요.
세례 요한을 죽인 그 권력에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헤롯은 뭔가? 예수님의 일을 위해 보조 역할을 하기 위해 권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마귀도.
질문: 그럼 헤롯도 자기 역할을 하고 죽어서 지옥 가나요?
답변: 그렇지요. 세례 요한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는 일을 하고 지옥 가는 거지요.
질문: 그러면 진리라는 큰 시나리오 안에서 각자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고 지옥 갈 자는 지옥으로 가는 것인가요?
답변: 그럼요. 언약의 속성 중에 축복도 있고 저주도 있습니다.
질문: 그럼 축복과 저주 중에서 하나님이 자기 원대로 주시는 건가요?
답변: 정답입니다.
질문: 그러면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잖아요?
답변: 그러니까 안 믿어야 되는 거예요.
질문: 안 믿어야 돼요?
답변: 안 믿어야 되는데 인간은 계속 믿죠. 왜냐? 본인이 본인을 관리하고 싶은 속성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내 인생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까 내가 예수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즉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거기에서 자신이 납득이 되는 믿음을 끄집어내니까 한심한 거지요.
질문: 그러면 지금 세상의 많은 종교들 중에 아무것도 믿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구원에 가까운 사람인가요?
답변: 종교라고 하지 말로 문화라고 생각하세요. 문화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면, 인간의 행위로 구성되어 있어요.
질문: 세상은 종교로 구분을 해 놓았잖아요.
답변: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지요.
질문: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가 이것이 종교 중 하나라고 인식하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잖아요.
답변: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예수를 모르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참 진리라는 것을 모르고 살다가 죽는 사람이 오히려 구원에 가까운가요?
답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구원에 가깝다는 것은 없어요. 왜냐? 구원은 인간에게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질문: 그러면 다 지옥에 가야 하나요?
답변: 당연하지요.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추방할 때는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추방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아까 질문하실 때 ‘인간’이란 말을 하셨는데, 우리가 ‘인간’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해야 됩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으로 났어요.
질문: 그러면 하나님은 어차피 죽어 지옥 보낼 인간들을 왜 태어나게 하셨어요?
답변: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지요. 언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님과 상대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지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바로 죽었습니까? 아니지요.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고 930년을 향수하고 죽었어요.
아담이 몇 년을 살겠다는 목표가 있었습니까? 없지요. 자식 몇 명 낳겠다는 목표가 있었습니까? 없지요. 그냥 주께서 죽일 인간을 충분히 활용하고 죽였어요. 그리고 활용한 그 후손이 저와 질문하시는 분입니다.
질문: 그럼 우리는 어차피 죄인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면 구원과도 상관이 없나요?
답변: 없지요.
질문: 만약 그것을 아는 순간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고 힘들기만 하기에 지금 죽어버려도 상관없나요?
답변: 그것을 진작 알아야지요. 사실은 태어날 때부터 알아야 하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자신이 의미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거예요.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베들레헴 주변에 2살 이하의 아이들이 다 죽임 당했어요. 그들이 2년 살고 죽으나 90년을 더 살고 죽으나 죽으면 살아온 것이 전부 무효가 됩니다. 거기에서 ‘나는 예수 믿었다.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질문: 그러면 힘든 세상 왜 삽니까?
답변: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려 주시니까 사는 거예요.
질문: 그러면 내가 선택해서 죽어도 상관이 없는 거예요?
답변: 죽을 힘을 주셔야 죽을 수 있어요. 자살도 자살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그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 여기 감이 있는데 저는 감 있는 줄 몰랐어요. 이것도 내 뜻이 아니에요. 내 키가 작아서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도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내 발걸음을 내가 헤아릴 수 없어요.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밤에 잠이 들기 전에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식사 준비를 해야지.’ 생각하고 잠을 잤어도 잠이 들면 끝입니다. 하나의 물체가 됩니다. 잠든 중에도 계속 심장이 뛰게 하시고, 아침에 눈을 뜨게 하셔야 살아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하지요.
질문: 그러면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국은 우리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요?
답변: 그게 바로 소급입니다. 그동안 자신은 예쁘게 미화시킨 겁니다. 자신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흙이 되기 전에 주께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흙 아닌 인간처럼 살게 하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데 마치 그 약속을 단독적으로 내가 관리한다고 오해하게 된 것은 태어날 때부터 죄에 물들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질문: 그럼 그 오해를 다 풀고 제대로 이해하고 죽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답변: 아무도 없어요. 오해를 풀면 안 됩니다.
질문: 그러면 내가 풀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답변: 풀려 한다는 말은, 내가 나 바깥으로 나가야 ‘이건 아니야.’라고 할 수 있는데, 어느 누구도 나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요. 그러니까 풀겠다는 자체가 또 하나의 착각을 만든 겁니다.
질문: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변: 주께서 은혜 주시는 대로 살면 됩니다.
질문: 주께서 주신 은혜인지, 아니면 내 생각인지 어떻게 구분하지요?
답변: 그건 남에게 물을 필요 없어요. 본인이 알아요. ‘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알게 하신다.’ 요한1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에게 확인받고 인정받으려 할 필요도 없어요.
질문: 저는 아직 모르겠는데, 아직 성령이 작용하지 않아서 모르는 거예요?
답변: 모르겠다는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알고 모르고를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본인이 있지 않아요. 그런데 자신을 판단의 위치에 세우게 되면 두 개의 자아가 됩니다. 내가 나를 판단할 자격도 없으면서 판단하는 나와 판단 받는 나가 생깁니다. 이 자체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판단은 주님이 하시지 본인이 판단하면 안 돼요.
질문: 주님의 판단인지 내 판단인지 본인이 알 수 있다는 말인가요?
답변: 자기만 알 수 있지요.
질문: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답변: 모르겠다는 말은 저에게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르겠다고 할 때는 반드시 다른 것은 안다는 말인데, 그 아는 기준을 본인이 세울 수 없는데 왜 본인이 세웁니까? ‘이건 알고, 이건 모르겠다.’는 말은 아는 부분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안다는 것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모르는 것에 포함되어 있어요. 알고 모르고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주님 은혜로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이것을 뒤늦게 안다고 더 살려주고 모른다고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 그러면 성경 공부는 왜 하는 거예요?
답변: 주께서 하게 하셔서 하는 거예요. 마치 내가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살게 하시는 것이 주의 뜻인 것처럼 하게 하신 거예요.
지금의 대화를 분석해 보세요. 저는 원인을 주님께 두잖아요. 그런데 질문하시는 분은 내가 어느 정도는 알고, 또 약간은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본인으로부터 모든 것을 출발해요. 본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제가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니까요. 소위 성령 받았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두 가지를 다 알아요. 내가 시작하는 경우와 그리고 내가 시작하는 이것조차 주님께서 하게 하셨다는 것 둘 다를 알고 있어요. “나는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시면,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이것에만 관심을 두면 됩니다. 내 것 만들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면 지금까지 질문하신 것들은 전혀 궁금해 할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주께서 지금 어떻게 일하십니까?’ 이것을 궁금해 해야 합니다.
“성도님은 주님이 살아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모르겠습니다. 저는 교회 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잘 못 했네요. “최초에 인간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인간은 우주보다 누가 먼저 있었다는 생각을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냥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아니고 방금 질문하신 분이 말씀하신 그 ‘하나님’입니다. 영어로 하면 nature. 한자로 하면 自然(자연).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철학이나 과학에서는 ‘자연은 자연적으로 있다.’고 합니다.
방금 본인이 이야기했으니까 그것은 믿습니까? ‘자연은 스스로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태어나보이 모든 것이 있었으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후에 있었던 간에 나보다 먼저 있는 것이 있지요? 그러면 문제가 간단해 졌어요. 자연이 나를 지배하고 있지요? 그럼 나의 의미란 없습니다.
자연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이 죽으라고 하면 죽고, 살라고 하면 살고. 그러면 나 나름의 의미나 목적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반역이고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럼 본인은 지금 죄인이기 때문에 자연이 죽으라고 하면 이유도 물을 필요 없이 죽어야 돼요. 자살해서 빨리 죽어야 하나? 빨리 죽든 늦게 죽든 시간은 의미 없어요. 물에 빠져 죽을까, 번개탄을 피워 죽을까? 관계없어요. 어쨌든 죽으면 자연으로 흡수되지요.
문제는 이것이 정답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제가 강요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이렇게 되면 아까 하신 말씀처럼 나의 사는 의미, 행위의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질문: 의미가 없더라도 힘들지는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답변: 힘든 것도 자연이 주는 것인데요. 윗사람이 힘들게 살라고 하면 힘들게 살아야지 별 수 있나요? 부분이 왜 전체에 대해 반항하지요?
질문: 반항하면 안 되나요?
답변: 반항하세요. 그런다고 해서 자연이 겁을 냅니까?
질문: 사는 것이 힘드니까 반항이라도 하고 싶어요.
답변: 반항하고 싶은데, 아무리 반항해도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반항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나는 자연에 복속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되잖아요. 자꾸 정리를 안 하려고 하시는데, 제가 정리하라고 도와드리는 거예요. ‘반항을 하든 뭘 하든 그것은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해답이 나왔지요?
‘반항을 하든지 자살을 하든지 이것도 자연의 일부다.’ 이것을 성도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세례 요한이 왜 죽었는가? 자연을 만드신 분이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요한이 죽은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세상을 만드신 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죽으실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펼쳐진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은 누가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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